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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장교의 병영일기] 하느님, 그 한 분이면 그만이지 / 권영훈 중령

권영훈(레지나) 중령·국군수도병원 내과간호과장
입력일 2021-05-11 수정일 2021-05-11 발행일 2021-05-16 제 3245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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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옥아, 잘 지내고 있어. 훈련 마치고 올게.” 옅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던 연옥이, 제가 본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예비역 육군 대위 고(故) 양연옥, 4년간 동고동락했던 제 동기생입니다.

간호사관생도 4년은 정말이지 열심히 공부하고, 임상 실습, 군사훈련, 동아리와 종교활동까지 무엇 하나 허투루 시간을 보내지 않던, 열정 가득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느 날, 학보에 실린 글에서 ‘하느님께 정성을 다해’라는 문구를 발단으로 동기들 사이에서 ‘하느님’이 맞느냐, ‘하나님’이 맞느냐는 작은 말다툼이 급기야 천주교, 개신교 신자인 생도들 사이에 교리적인 언쟁으로 치닫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 연옥이가 “하나님이든, 하느님이든 호칭이 뭐가 중요하노? 각자 믿는 그 한 분이면 그만이지”라고 말하는 순간, 상황은 깨끗하게 정리되고 말았습니다. 연옥이는 그랬습니다. 뭐라 불리든 주님 한 분을 사랑하며 늘 기도했고, 따뜻하고 소박한 웃음을 지녔기에 동기생들 사이에서 연옥이의 별명은 짓궂게도 ‘보살님’이었습니다.

임관 후 우리 동기들이 전방과 후방 각지에서 간호장교의 소임을 다하며 10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마취 간호장교로 헌신하고 이제 막 전역한 연옥이가 백혈병에 걸렸습니다. 동기들과 동문 선후배들이 나서 치료를 도왔지만, 절망스럽게도 골수 이식 후 재발에 더는 손을 쓸 방법이 없게 됐습니다.

저는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삼키며 일곱 살 된 제 큰아이, 대건 안드레아를 데리고 여의도성모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병상에서 뼈만 앙상한 연옥이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저를 오히려 위로해 주었습니다. 바로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제 아이가 조용히 연옥이의 머리에 작은 손을 얹더니 마치 신부님이 안수기도하듯 기도하기 시작했고 연옥이도 내맡기듯 기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놀란 저는 아무 말도 못 했고, 기도를 마친 연옥이는 “기도, 정말 고마워” 하며 가만히 제 아이를 안아 주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대건 안드레아에게 아까 어떤 기도를 했는지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은 낭창한 한 마디였습니다. “응? 몰라!” ‘그럼, 그렇지.’ 하지만 제 마음은 이미 더할 나위 없이 성령으로 가득 찼습니다.

며칠 후, 훈련 중에 연옥이가 세상을 떠났다는 문자를 받았습니다. 너무 슬퍼 크게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간호사관학교 밴드부 ‘사하라’의 키보드를 맡아 영혼을 위로해 주던 동기들의 영원한 뮤즈, 연옥이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연옥이는 그토록 사랑하는 주님 곁에서 더는 아프지 않고 행복할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이천에 잠든 그 친구에게 좋아하는 성가 한 곡 불러 줘야겠습니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권영훈(레지나) 중령·국군수도병원 내과간호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