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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10) 젊은 세대에 대한 하나의 생각

정희완 신부 (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입력일 2021-05-11 수정일 2021-05-12 발행일 2021-05-16 제 3245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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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세대 위한 희생이 아닌, 함께 살아갈 소통과 협력 필요
공통된 목표 공동의 노력 속에 많은 것 가능했던 예전과 달리 지금 세대는 희망 찾지 못해
변화를 위한 투쟁은 사라지고 각자 생존 위한 경쟁만 치열
소통·협력 부재, 세대 갈등 낳아
교회 역시 청년 세대의 입장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현실
오늘날 각 세대에 필요한 건 가르침보다 경험과 지혜 나눔

급변하는 사회 현실에서 각 세대의 경험과 지혜를 서로 나누고 배우는 태도가 절실히 요청된다. 교회는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통찰력과 독창성과 지식을 활용해 스스로 문제와 관심사를 다루도록 도와야 한다.

■ 사람은 자신의 세대를 산다

노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희망과 계획과 준비의 시간을 살기보다는 체념과 견딤과 수용의 시간을 살아내고 있다. 잘 늙어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삶의 종착지를 향해 어떤 태도와 모습으로 걸어가는 것이 신앙적으로 아름다운지, 자주 생각하고 고민한다. 잘 늙는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몸이 노화되면서 젊은 육체에서 오는 건강함과 자신감을 상실하고 있는 경향을 보인다. 새로운 시도를 해 볼 수 있는 생의 시간 길이가 한정되어 있어서, 괜히 마음이 조급해지고 속 좁아지는 나를 발견한다.

사제로 살아간다. 부모로서의 책임과 희생과 헌신의 삶을 경험하지 못했다. 다음 세대를 위해 생래적으로 노력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 물론 사제는 혈연의 가족이 아니라 신앙의 가족을 위해 책임과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 교회 안의 미래 세대를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사실, 주변에 책임과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살아온 사제가 많다. 하지만 나 자신을 돌아보면, 참 이기적인 모습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발견한다. 다음 세대를 위한 희생과 헌신도 없이 살아왔구나 하는 미안함이 요즘 나를 사로잡고 있다. 물론 신형철의 지적처럼, 희생과 헌신의 서사를 말하는 사회는 건강하지 못한 사회다. 한 세대가 다른 한 세대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해야 한다는 서사는 무의식적 강박과 죄의식의 악순환만 낳는다. 모든 세대는 다른 세대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세대별 시기에 따른 역할의 구분이 있을 뿐이다.

■ 청년 담론의 허구성과 청년 세대의 우울한 현실

요즘 20대 남성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특히 보궐선거 이후 ‘공정에 예민한 청년 세대’, ‘보수화된 청년 세대’에 관한 담론들이 언론에 자주 등장한다. 계급 갈등과 젠더 갈등이 세대 갈등으로 수렴되는 듯한 느낌이다. 이 세대 논쟁이 그리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점점 심화 되는 가난과 불평등의 문제를 은폐하기 위해 세대 갈등에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기도 한다. 젊은 세대의 목소리를 통해 세대 문제가 등장했다기보다는 중장년 세대의 시선으로 젊은 세대의 문제가 이야기되고 있다.(사회적 권력과 문화적 자본을 가진 세대는 중장년 세대다. 청년들은 그저 투표나 SNS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청년을 대상화하는 기성세대의 시선은 한계가 있다. 요즘 언급되는 ‘20대 남성 현상’의 이야기 안에는 불순한 정치적 의도가 내재한 것 같은 느낌도 든다. 하미나의 지적처럼, “자신이 경험하는 가난과 불평등을 구조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맥락 없는 공정에 집착”하는 현상과, “청년의 문제가 실력주의의 얼굴을 하며 탈정치화되고 또 다른 약자를 혐오하는 방식으로” 표출되는 것은 사회의 건강한 변화를 더디게 할 뿐이다.

오늘의 청년 세대는 희망을 갖지 못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지난 시대보다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정치와 경제와 사회 문화적 흐름이 건강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지 않다. 형식적 민주화는 이루어졌지만, 실제로는 봉건적 질서가 더 강화된다는 느낌이다. 계층 상승의 사다리는 점점 사라지고 자본주의적 신분 질서가 세습화되고 고착화되어 간다. 예전에는 다 함께 가난했고, 노력하면 많은 것들이 가능한 시대였다. 당연히 미래를 위해 오늘의 불편함을 견딜 수도 있었고, 현재를 노력하고 준비하는 시간으로 살아낼 수 있었다.

오늘의 시대는 이성과 사유보다는 감정과 정서, 의지와 욕망을 더 중시한다. 최첨단 자본주의와 물질문명은 쾌락의 문화와 감각주의를 추동한다. 이성적 사유와 성찰보다 편파적 감정과 분노와 혐오가 더 쉽게 정치적 매개와 수단이 되는 사회다. 개체화되고 파편화된 개인들은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넘사벽의 사회 체제에는 순응하면서, 주변의 약자들에 대한 분노와 혐오를 통해 사회적 카타르시스를 모색한다. 사람들은 점점 더 파편화되고 이기적이 되어 간다. 당연히 자신들의 목소리를 한데 모아 변화의 힘으로 작동시키지 못한다. 변화를 위한 투쟁은 사라지고, 각자의 생존을 위한 경쟁만 치열해지고 있다.

어제의 청년 세대와 오늘의 청년 세대가 마주친 현실은 다르다. 청년 시절에 공통된 목표를 두고 공동체적 열망 속에서 공동의 노력을 기울이고 변화된 세상을 경험했던 옛 세대는 오늘의 청년 세대들의 사정과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물론 언제나 문제는 개인의 입장과 관점과 태도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의 선택과 태도의 문제로 돌려버리기에는 오늘의 청년들이 처한 현실은 어제의 청년들이 마주했던 현실보다 더 엄혹하고 복잡하다.

■ 청년 세대에게 교회는 희망을 선포할 수 있을까

솔직히 고백하면, 사제로서 노년의 시기를 살고 있기에 젊은 세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오늘의 교회 역시 청년 세대의 생각과 주장과 정서와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청년 세대에 관한 교회의 선포는 실재에 가 닿지 못한다는 느낌이다. 선포된 내용의 아름다움과는 별개로 현실에서 젊은이들이 점점 교회를 떠나고 있다. 오늘의 교회는 자신이 선포하는 내용을 스스로 살아내고 있는지 늘 반성하고 성찰해야 한다.

교회는 ‘청년 예수’를 선포하고 있다.(「그리스도는 살아계십니다」 22~33항) 복음적 의미의 청년이란 육체적 나이를 말하기보다는 자기 삶을 독창적이고 활력 넘치게 사는 일이며 자기 사명을 수행한다는 뜻일 것이다. 삶에 대한 자세와 태도, 종말론적 완성을 향한 지향과 방향성이 신앙적 청년성을 규정할 것이다.

교회는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통찰력과 독창성과 지식을 활용하여 자신들만의 언어로 자신들의 문제와 관심사를 다루도록 도와야 한다.(「그리스도는 살아계십니다」 203항) 성직자와 기성세대가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젊은 세대가 주역으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젊은 세대를 위한 희생과 헌신의 삶을 말하기보다는 그저 중심의 자리를 양보할 줄 아는 미덕이 기성세대에게 더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모든 세대는 자신의 세대를 살아갈 뿐이다. 다른 세대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아니라 다른 세대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소통과 협력이 필요할 뿐이다. 소통과 협력의 부재가 세대 갈등을 낳는다. 오늘의 세상에서 필요한 것은 가르침보다 경청과 배움의 태도다. 급변하는 사회 현실은 세대 간에 다른 경험과 지혜를 갖게 한다. 각 세대의 경험과 지혜를 서로 나누고 배우는 태도가 절실히 요청된다. 오늘의 기성세대는 먼저 젊은 세대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그들의 경험과 지혜를 배워야 할 것이다.

정희완 신부 (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