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주말 편지] 평화의 인사를 나누십시오 / 노수민

노수민(아가다) 소설가
입력일 2021-05-17 수정일 2021-05-18 발행일 2021-05-23 제 3246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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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 10주기가 되는 기일이었다. 3남 2녀인 우리 5남매는 뭐 그리 형제애가 아주 돈독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싸운다거나 등지고 사는 사이도 아니었다. 그런데 6개월 전쯤부터 두 자매 사이에 오해가 생겨 여동생이 ‘앞으로 큰 언니는 안 보고 살고 싶다’고 선언했다. 중간에서 문제를 일으킨 둘째 남동생은 작은 누나에게 ‘농담으로 한 말을 잘못 전한 내 책임이니 그러지 말라’고 말리다가 두 오누이 사이에도 서로 화가 난 사건이 발생해 세 사람이 불편한 관계에 놓였다. 둘째 남동생과 온라인 메신저를 하며 농담처럼 여동생을 ‘왕싸가지’라고 불렀는데 남동생이 같은 동네에 사는 여동생(작은 누나)과 술 한잔 마시며 웃고 떠들다가 그 말을 했던 모양이었다. 여동생은 뒤에서 자기를 험담했다고 오해하고는 화가 난 것이었다. 장남과 지방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다른 동생은 전혀 이런 사실을 몰랐다.

이번 기일에는 ‘우리 세 사람 모두 불편한 마음으로 만나겠구나’하고 나는 은근히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불편하게 만나는 것이 싫어서 기일이 다가오자 나는 여동생에게 ‘농담 끝에 그렇게 말했던 것뿐이지 뒤에서 험담한 건 아니야’라고 문자를 보내며 마음 풀라고 했지만 동생은 읽고 답도 하지 않았다.

기일을 이틀 남겨두고 제사를 모실 장남에게서 연락이 왔다. 가족이 제주도로 놀러 갔다가 불법 유턴하는 자동차가 장남 가족이 탄 차를 들이받아서 교통사고가 났다는 것이었다. 뒷좌석에 탔던 아이들 둘은 아무 데도 다친 데가 없어 다행인데 앞좌석에 탔던 부부는 약간씩 타박상, 골절상을 입었다고 했다. 검사받느라 모두 병원에 입원하여 제사를 모실 수 없게 되었으니 누나가 조처를 해 달라고 했다.

천주교 신자인 나는 기일에 맞춰 기일 미사 봉헌을 접수하고 동생들에게 미사 시간을 알렸다. 마침 토요일 저녁 미사라서 모두 참석할 수 있었다. 유난히 아버지 사랑을 많이 받았던 여동생도 불편한 마음이지만 아버지 제사를 대신하는 기일 미사에는 참석했다. 장남을 제외한 4남매는 성당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맨 나중에 나타난 여동생은 나와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고 내가 ‘잘 있었어?’ 하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고 성당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두 사람의 찬바람 도는 표정에 남동생들이 흘깃거리며 눈치를 보았다. 맨 안쪽 자리에 내가 들어가고 눈치 빠른 남동생들이 쭈뼛거리는 여동생을 밀어 넣었다.

그날 신부님 강론은 마음을 열어 남을 용서할 줄도 알고, 자기 자신을 성찰할 줄도 아는 사람만이 진정한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거라는 내용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동생의 긴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려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진지하게 귀담아듣는 눈치였다. 미사가 진행되며 ‘평화의 인사’ 부분에서 나는 두 손을 합장한 채 여동생을 향해 돌아서서 ‘평화를 빕니다’라고 허리를 숙여 인사를 전하고 두 손으로 여동생의 어깨에 얹고 토닥거렸다. 여동생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더니 입술을 꽉 깨무는 사이로 ‘흑’하는 작은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미사가 끝나고 근처 생맥주 집으로 향하는 사이 나는 여동생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우리의 불편한 관계는 아버지 10주기 기일 미사에서 6개월 만에 막을 내리고 평화가 찾아왔다.

‘평화를 빕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인사인가요?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께도 이 인사를 전합니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노수민(아가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