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세상살이 신앙살이] (586) 도민증

강석진 신부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입력일 2021-05-25 수정일 2021-05-25 발행일 2021-05-30 제 3247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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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 속 ‘고창’이라는 지역엔 언제나 ‘선운사’와 ‘고인돌’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었습니다. 선운사는 한국 불교에서 선방이 있는 유명한 사찰 중의 하나이고, 특히 선운사 대웅전 뒤편에는 거대한 동백 군락지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3월의 어느 날 오후, 함께 사는 신부님과 동백 군락지를 보려고 선운사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차를 주차장에 주차해 놓고, 벚꽃 길을 따라 걸어갔더니 매표소가 나왔습니다. 당연히 입장권을 끊으려고 입장료를 보는데, ‘도민 무료’라는 내용이 눈에 확 – 들어왔습니다. ‘이런 행운이…!’

작년에 고창 지역으로 인사이동이 된 후, 의료 보험료 납부 문제로 심원면 사무소에 가서 전입신고를 했었습니다. 그래서 그 날짜로 나의 주민등록증에는 고창군의 수도원 주소가 찍혔고, 나는 자연히 고창군민이 되었습니다. 그 후로 그저 내 주소가 고창군으로 이전되었나 보다, 그렇게만 생각했었는데! 선운사의 동백 군락지를 보러 갔다가 고창 군민이라 사찰 입장료를 내지 않다니! 암튼 출입구에서 표를 받는 분이 우리 두 사람의 주민등록증 주소를 확인하더니 그냥 들여보내 주었습니다. 비록 몇 천 원인 입장료였지만, 공적인 장소를 공짜로 들어간다는 것이 왜 그리도 기쁜지!

우리는 대웅전 방향을 찾았고, 스님들과 여러 불자 분들의 엄숙함을 방해하지 않으려 조심조심 대웅전 뒤편의 동백 군락지로 갔습니다. 그곳엔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군락지가 형성돼 있었고, 초록은빛 반짝이는 동백나무 이파리 사이사이로 불그스레한 동백꽃이 지천에 피어 있었습니다. 사실 그날 동백꽃의 그 멋진 장관보다는, 그저 도민이라는 이유로 입장료를 내지 않았다는 사실에 마음 속 더 큰 기쁨을 안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주일 날, 10시30분 미사를 마치고 공소 마당에서 신자 분들과 담소를 나누다가 며칠 전 선운사를 방문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특히, 나는 입장할 때 고창 주소가 찍혀있는 주민등록증을 보여주면서 무료로 통과한 것을 자랑삼아 말했습니다. 이런 내 말을 듣고 있던 우리 공소 식구들이,

“아하, 우리 신부님들은 매표소 직원에게 주민등록증을 보여 주어야만 들어갈 수 있구나.”

“맞아. 우리 신부님들 얼굴이 고창 사람 같지 않아서 주민등록증의 주소를 확인해야 고창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지.”

나는 이게 뭔 말인가 싶어,

“아니 여러분들은 선운사 들어갈 때 도민증을 안 보여줘요?”

그러자 그분들은

“우리는 거기 갈 일도 거의 없지만, 만약에 가게 되면 그냥 ‘고창 살아요’라고 말만 해도 들어갈 수 있어요.”

“아니, 왜요? 입구에서 주민등록증의 주소를 다 검사하던데?”

“신부님, 우리는 안 해요.”

“에이 왜 안 해요. 다 검사하던데.”

“신부님, 우리는 주민등록증 검사를 안 해도, 그냥 얼굴에 고창 사람이라고 쓰여 있거든요.”

“그럼 제 얼굴도 그렇게 쓰여 있겠네요?”

“아뇨. 신부님들의 얼굴은 아직 고창 사람의 얼굴이 아니에요. 음, 앞으로 일 년만 더 고창의 햇볕에 피부도 타 보고 말투나 억양도 전라도 사람처럼 말해보고, 뭐 그렇게 살다보면 고창 사람이 될 수 있어요, 하하하.”

공소 식구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도민이 된다는 건 단지 주민등록증에 주소가 있다는 것만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피부를 검게 태우고, 지역 말이나 억양도 좀 배우겠다고 결심을 해 보다가, 문득 천국 시민은 어떻게 되는 걸까 묵상케 됐습니다. 천국 주소만 가지고 있다고 천국 시민이 되는 걸까, 천국 시민의 얼굴과 말과 표양이란 어떤 것일까…. 머리가 좀 복잡해지는 하루였습니다.

강석진 신부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