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12) 우리는 서로 말을 나누고 있는 것일까? – 공동합의성에 관한 하나의 단상

정희완 신부 (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입력일 2021-06-08 수정일 2021-06-08 발행일 2021-06-13 제 3249호 12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다양한 교회 구성원의 정직한 목소리 존중·경청돼야 한다
조직과 집단의 회의 안에서 모든 참여자 동등한 자격으로 생각과 의견을 조정하면서 결정하는 과정 쉽지 않아
교회 공동체의 생활·행동 방식 교황은 ‘공동합의성’ 되길 바라
경청·대화·소통·친교 태도 지향
식별과 수용의 방식 안에서 결정에 도달할 수 있어야

2015년 가정을 주제로 열린 제14차 주교시노드 한 회기에서 아기를 안은 여성이 시노드 진행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공동합의적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 구성원들의 참여를 끌어내고 그들 목소리가 존중·경청되고 있음을 느끼게 해야 한다. 특히 오랫동안 소외됐던 여성들과 젊은이들의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는지 여부에 시노드 결과가 달려있다는 주장도 있다. CNS 자료사진

■ 공동체 안의 대화와 회의 문화

신부로 살다 보니 회의를 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신부들과의 회의도 있고, 수도자와 신자들과 함께 하는 회의도 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형태의 회의들이 있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솔직히 고백하면, 세상의 모든 공식적 회의들은 지겹다. 뜻 맞는 사람들끼리의 사적 모임과 대화는 즐겁지만, 공적 회의는 언제나 불편하고 힘들다. 적어도 내가 참여한 교회의 많은 회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정직한 의견 표명과 진솔한 대화가 이루어지기보다는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말들이 난무한다. 회의 구성원들이 대등한 입장에서 서로의 의견을 말하기보다는 지위에 따른 불평등한 의견 표현과 수렴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교회의 회의는 자주 위계적이다. 교계적 구조가 교회의 삶과 문화 속에 깊이 뿌리내려져 있음을 발견한다. 위계적 구조에서 평등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나누기는 정말 어렵다. 물론 현실 교회가 교계적인 제도인 이상, 식별과 결정은 위계적인 구조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참여와 대화는 평등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상상을 한다.

함께 의논하고 함께 일하는 것은 어디서나 쉽지 않다. 역할 분담의 문제, 역할의 차이에 따르는 질서와 책임의 문제, 질서와 책임의 무게가 필연적으로 가져오는 차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어처구니없는 상상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교회의 회의가 세속의 회의보다는 덜 위계적이지 않을까? 세속의 일반 회사들의 회의는 어떨까 가끔 상상해본다. 아마도 우리 교회보다 더 위계적이지 않을까? 사장과 부장과 과장과 대리와 평사원이 동등하게 회의에 참여할 수 있을까? 그리고 정부 기관과 군대의 회의 역시 더 위계적이지 않을까? 이런 엉뚱한 상상을 하며 위안을 삼는다. 사실, 교회는 집단과 조직이 아니라 공동체다. 공동체의 회의는 집단과 조직의 회의와는 다를 것이고 또 달라야 한다.

■ 말의 무게도 자본과 지위에 따라 달라지는가

가끔 의문이 든다. 모든 인간은 정말 평등한지 말이다. 물론 근대 이후 인류는 적어도 형식적 민주화는 이루었다. 귀족과 평민, 양반과 평민의 형식적 구별은 사라졌다. 하지만 세상에는 여전히 신분질서가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았든지 스스로 성취한 것이든지 간에, 자본을 많이 소유한 사람은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 대통령, 국회의원, 검사, 의사 같은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가진 사람 역시 특별한 인정을 받는 것 같다. 자본과 사회적 지위는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 어떤 보이지 않는 경계와 질서를 낳는다. 세상이라는 인정투쟁의 장에서 사람들이 돈과 권력적 지위에 목숨을 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슬픈 일이다. 너무 부정적인 시선인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을 냉정하게 분석하는 것이 실제적 변화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사적 대화의 장이나 학문적 토론의 장에서는 의견과 주장의 논리와 설득력에 무게중심이 놓인다. 누가 어떤 지위에서 주장하고 말하는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하지만 조직과 집단의 회의 안에서, 말의 무게와 설득력은 논리적 정합성과 설득력의 여부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자주 목격한다. 모든 참여자가 동등한 자격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서로의 생각과 의견을 조정하면서 어떤 바람직한 결정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그런 회의가 가능할까?

■ 공동합의적 여정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1년에서 2023년까지 3년에 걸친 시노드의 과정을 시작했다. 이 공동합의적 여정은 교구와 국가와 대륙적 차원의 과정을 거쳐 보편교회 차원으로 확장된다. 2023년 10월 로마에서 열리는 제16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가 정점이다.

공동합의성이 교회 공동체의 생활 방식과 행동 방식이 되기를 프란치스코 교황은 간절히 원하고 있다. 공동합의적 여정 안에는 하느님 백성의 친교와 참여를 통해 교회의 사명 수행을 강화하려는 비전과 지향이 담겨있다. 물론 현실 교회가 과연 얼마나 공동합의적 지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또 그 여정에서 발생하는 어려움과 위험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은 학자들마다 조금씩 다르다. 한편으로, 지역 교회들의 사정과 개별 주교들의 협력과 능동적 참여의 방식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것이라고 추측되기도 한다. 하지만 교회 역사가들과 신학자들은 이 여정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가장 큰 교회적 행사이며 교회 구성원들에 대한 전례 없는 초대임을 강조한다. 특정한 주제와 특별한 사람들이 교회의 대화를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구성원들 모두에게 교회 안의 모든 문제에 대해 자유롭게 대화하기를 요청하는 초대이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소외되었던 여성들과 젊은이들의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는지의 여부에 시노드 여정의 결과가 달려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 공동합의적 태도와 방식

진정한 쇄신은 구조의 변화와 의식과 문화의 변화가 함께 이루어질 때 가능하다. 하지만 현실에서 법과 구조의 변화는 언제나 늦다. 생각의 방식과 문화의 변화가 시작점이 될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사목적 회심을 강조하는 이유다.

공동합의적 태도는 토론과 논쟁과 투표의 과정을 밟는 의회주의적 형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경청과 대화와 소통과 친교를 지향한다. 토론과 논쟁이 상대의 약점을 찾는 일이라면, 경청과 대화는 상대의 장점과 가치를 찾는 일이다. 공동합의적 방식은 투표가 아니라 식별과 수용의 방식을 택한다. “결정에 도달하려는 작업은 공동합의적 과제이고, 결정을 내리는 것 자체는 직무적 책임인 것이다.”(「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공동합의성」 69항)

공동합의적 방식은 ‘권력’(Power)의 방식이 아니라 ‘권위’(Authority)의 방식이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권력과 권위를 구별하는 지혜가 절실히 필요하다. 권력은 강제하는 힘이고 권위는 설득하는 능력이다. 권력은 수동성과 피동성을 낳지만, 권위는 참여와 능동성을 유발한다. 예수는 권력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 권위가 있는 존재였다. 예수의 말과 행동은 권위가 있었다. 명령과 강요가 아니라 동의와 수용을 끌어낼 수 있는 권위의 존재가 교회 안에 절실히 요청된다. 권위는 지위의 높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영성과 인격의 깊이에서 온다.

공동합의적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 구성원들의 참여를 끌어내고 그들의 목소리가 존중되고 경청되고 있음을 느끼게 해야 한다. 진정한 대화는 정직한 의견 표명이 가능할 때 시작된다. 말할 수 있는 자리와 기회가 많아져야 한다. 어느 대교구에서 신자, 수도자, 성직자 각 14명씩 참여하는 ‘하느님 백성의 대화’를 시작했다는 뉴스를 봤다. 우선 이렇게 시작하면 되지 않을까?

정희완 신부 (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