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중)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21-06-15 수정일 2021-06-15 발행일 2021-06-20 제 3250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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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로 이어진 수녀들의 선교 열망
1925년 함경남도 원산 진출
공산정권에 의해 박해받아

원산에 처음 파견된 4명의 수녀들.

“수녀들은 놀라울 정도로 그 요구들이 단순하며, 그들의 장상은 수도적 기풍을 유지하는데 엄격합니다. (중략) 수녀들은 그들이 받은 성소, 기도, 일, 노래 등을 빼어나게 잘 수행하려는 열의로 활활 타고 있습니다.”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창설자 안드레아스 암라인 신부는 선교 수도회를 위해 수녀들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선교 사도직을 위해서는 수녀들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던 것이다.

암라인 신부는 1885년 9월 24일 선교 성소를 지닌 4명의 첫 수녀 지원자를 입회시켰다. 초기에는 남녀 수도원이 한 지역에 있었지만, 1904년 수녀들은 툿찡(Tutzing)으로 모원을 이전하면서 남녀 수도원은 명칭과 제도, 관리면에서 완전히 분리됐다. 1924년에 교황청 포교성성은 수녀회를 교황청 수녀회로 인준했다.

수녀회는 현재 모원이 있는 독일을 포함해 유럽, 아프리카, 북미, 남미, 동남아시아, 한국 등 15개국 12개 프리오랏(수도원 본원)과 128개 분원에서 1300여 명의 수녀들이 활동하는 세계적인 선교 수도회로 성장했다.

이런 수녀회의 성장 뒤에는 “순교자의 피는 신앙의 씨앗”이라는 테르툴리아누스 교부의 말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많은 순교자들이 있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선교의 열망이 순교로 이어졌던 것이다.

순교는 수녀회 초창기부터 있었다. 동아프리카로 파견된 수녀들이 순교한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유럽의 젊은이들이 영감을 받고 수녀회에 입회했다. 남녀 수도회가 한 곳에서 지내던 쌍트 오틸리엔의 연혁에 따르면 1887년부터 1895년까지 69명의 남녀 선교사를 아프리카로 파견했는데 1895년 말에 남은 선교사는 17명뿐이었다고 한다. 그 기간 중 선교사의 4분의 3이 선교를 위해 투신하다 피살되거나 현지의 열병으로 사망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수녀회의 여러 수녀들이 순교했다. 수녀회가 우리나라에 처음 자리 잡은 것은 1925년 함경남도 원산에서였다. 독일 툿찡 모원에서 파견된 4명의 수녀들로 시작한 원산 프리오랏은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박해를 당했다. 수녀회는 강제 해산당했고, 수도자들은 수용소에 끌려가 중노동과 추위, 병과 굶주림으로 죽거나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이때 순교한 하느님의 종 에바 오이게니 슈츠 수녀·장 아녜다 헌신자(평신도 봉헌회원)·박진숙 루치아 수녀·푸룩토우사 수녀가 ‘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와 동료 37위’로 시복 심사 중이다.

박해 속에서 살아남은 수녀들은 해방 후 독일 정부의 요청으로 본국으로 귀환했다. 그러나 그 중 많은 수녀들은 다시 한국 땅으로 돌아가길 열망했고 한국에 남아있던 수녀들과 함께 1956년 대구에 다시 프리오랏을 세웠다. 그리고 수도공동체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1987년 서울에 새롭게 프리오랏을 세우게 됐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