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지난해 선포된 청주교구 ‘봉암성지’를 아시나요?

민경화 기자
입력일 2021-06-15 수정일 2021-06-25 발행일 2021-06-20 제 3250호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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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들의 얼 살아 숨쉬는 음성 지역 믿음의 뿌리
기해박해 이후 형성된 교우촌
최양업 신부가 신학생도 선발
순교자 6명이 신앙 증거한 곳
방축골·계미대 지역과 더불어
공소 중심으로 성지 조성 나서

지난해 11월 청주교구 봉암성지가 성지로 선포된 후 봉암공소 신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봉암성지 제공

고층 아파트와 잘 닦인 도로, 모든 게 새 것인 화려한 충북혁신도시에서 차를 타고 조금만 이동하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자동차 한 대로 꽉 차는 좁은 오솔길을 따라 가다 만나는 아담한 마을 어귀에서는 오래된 공소 건물과 십자가가 가장 먼저 외지인을 맞이한다. 충북 음성군 맹동면 봉현리에 위치한 봉암공소는 지난해 성지로 선포된 봉암성지의 중심으로 신앙의 뿌리를 단단하게 지탱하고 있다. 순교터도 아니고 순교자의 묘소도 없지만 180여 년 전 피로 신앙을 증거한 신앙선조들의 뜻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봉암성지. 피와 땀으로 신앙을 증거했던 신앙선조들의 삶이 맞닿아 있는 봉암성지 조성 현장을 찾았다.

■ 피로 증거한 신앙선조들의 삶 깃든 봉암성지

1년에 7000여리(약 2750㎞)를 걸으며 신자들을 만난 가경자 최양업 신부. 산간벽지만을 찾아다닌 최 신부는 순방 도중 지금의 맹동면 봉현로 방축골에 들어선다.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고 함께 미사를 봉헌했던 그는 신자 김백심(암브로시오)의 막내아들 김 사도요한을 보고 배티에 있는 조선대목구 신학교 신학생으로 천거한다.

방축골은 현 봉현리에 위치한 봉암방죽에서 유래된 골짜기 이름에서 따왔다. 방축골에서 700~800m 떨어진 계마대와 함께 이 지역에선 오래전 교우촌이 형성됐다고 전해진다.

방축골과 계마대 교우촌은 1839년 기해박해 이후 신자들이 이주해오면서 형성됐다. 1860년 경신박해 이후까지 이어진 박해로 교우촌 신자들이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고, 민윤명(프란치스코)은 박해를 피해 1861년 무렵 가족들과 계마대로 이주했다. 이후 민윤명은 방축골·계마대 마을에서 교리 실천과 나눔 운동을 앞장서서 이끌었고, 방축골·계마대 교우촌은 음성 지역 신앙의 뿌리가 됐다.

하지만 교우촌은 1866년 병인박해 때 폐허가 되고 그해 말 들이닥친 서울과 충주 포교배에 의해 김백심과 그의 차남 김성서(파비아노), 민윤명 등이 체포되고 남은 교우들도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이후 민윤명과 김성서는 1867년 초에 충주에서 순교하고 김백심은 서울 포도청으로 이송돼 문초와 형벌 끝에 순교했으며, 교우촌에 살았던 이 베드로도 수원에서 순교했다.

하느님의 종 민윤명은 압송되기 전 동생인 민 야고보에게 “타당하게 교회의 규구(規矩)를 지키다가 내가 순교한 표양을 따라 영복소(永福所, 즉 천당)에서 만나자”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김백심의 장남 김성회(바오로)와 삼남 김 사도요한 역시 1868년 체포돼 서울에서 순교했다. 두 형제가 순교했을 당시 나이는 각각 45세, 33세였다. 6명의 교우가 피로 신앙을 증거한 방축골·계마대 교우촌은 병인박해로 인해 와해됐고 현재는 신앙선조들이 살았던 터만 남아있다. 이후 1892년 정무선(요셉)이 봉암 마을로 이주해 다시 신앙 공동체를 꾸렸고, 이곳에 1897년 만들어진 봉암공소는 지금까지 신앙의 뿌리를 지키고 있다.

방축골과 계마대 지역의 사선을 친 작은 원이 마을이 있던 곳으로 흔적이 발견됐다고 전해진다.

1860년대에 신앙촌이 형성됐던 방축골.

하느님의 종 민윤명(프란치스코) 회장이 살았다고 전해지는 계마대.

■ 지역과 신자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성지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는 “1839년 기해박해 이후 천주교 신자들이 이주해 와서 교우촌을 이뤘던 이 마을은 최양업 신부가 김 사도요한을 신학생으로 선발한 곳”이며 “이곳 출신 6명의 순교자 중 민윤명 회장의 시복이 추진되고 있다”며 지난해 11월 29일 이곳을 성지로 선포했다.

성지로 선포된 이후 운영을 주관하는 맹동본당 주임 정광렬 신부를 비롯한 신자들이 성지 조성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힘을 모으고 있다. 정 신부는 “2019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봉암성지 땅 한 평 기부 운동은 벌써 540평을 넘어섰다”며 “뿐만 아니라 매 미사 때 봉암성지 조성에 지향을 두고 기도를 해주시는 신자들 덕분에 성지조성을 하는데 힘을 얻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는 190평가량의 봉암공소 땅과 인근의 540평 땅을 매입한 상태다. 신앙선조들이 살았다고 전해지는 계마대 땅은 기부를 약속받았지만 방축골 땅은 아직 확보하지 못했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소식을 듣고 곳곳에서 전하는 도움의 손길 덕분에 봉암성지는 하루하루 달라진 모습으로 순례객들을 맞고 있다.

정광열 신부는 “아무것도 없던 성지 주변에 신자분들이 조금씩 모아준 정성 덕분에 장미 화단이 생기고, 가로수도 심겨 성지가 아름답게 변하고 있다”며 “음성군청에서도 봉암성지의 역사적 중요성을 공감하며 지역주민 뿐 아니라 순례객들의 방문을 돕기 위해 진입로도 확장해 줄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정광열 신부는 “봉암성지로 인해 신앙선조들이살았던 곳이 재조명되면서 우리 신앙의 큰 밑거름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 봉암성지 담당 정광열 신부

“신앙선조 삶의 터전 돌아보며 신앙에 큰 밑거름 되길”

“봉암성지로 인해 신앙선조들과 순교자들이 살았던 곳이 재조명되면서 우리 신앙의 큰 밑거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봉암성지를 담당하고 있는 맹동본당 주임 정광열 신부는 성지의 의미를 이같이 설명했다. 박해를 피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신자들이 모였다고 전해진 방축골과 계마대. 이곳에 세워진 봉암성지는 180여 년 전 목숨으로 신앙을 증거한 선조들의 신앙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정 신부는 “음성군 신자 비율은 15% 정도로, 청주교구에서 가장 높은 수치를 나타내고 있다”며 “게다가 4㎞ 거리 안에 맹동, 유포, 봉암 3개 공소가 자리하고 있는데, 신앙이 오래전부터 이 지역에서 단단하게 뿌리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음성군 신앙의 뿌리 끝에는 오래전 방축골과 계마대에서 신앙을 지켰던 신앙선조들의 삶이 있다.

“계마대에 살았던 민윤명 회장은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포함돼 시복이 추진되고 있으며 방축골에 살았던 김백심(암브로시오)과 아들 셋이 모두 순교했습니다. 한국교회사 안에서 김 암브로시오 집안의 순교는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2019년 맹동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정 신부는 가장 먼저 봉암성지 땅 한 평 기부를 추진했다. 당시 영명축일을 맞아 받은 예물 전부를 성지 조성을 위해 기부한 정 신부는 “봉암성지를 많은 분들이 알 수 있도록 힘쓰는 것은 저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설명했다.

정 신부는 마을에서 ‘황소 신부님’이라 불린다. 미사가 없을 때는 늘 작업복을 입고 길을 닦고 나무를 베고 쉴 틈 없이 일을 하고 있어 신자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마을의 신자들도 누가 시키지 않아도 주변의 버려진 나무를 치우고, 화단을 가꾸며 함께 성지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정 신부는 “기도하고, 기도한 것을 선포하고,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그동안 숨겨져 있는 순교자들의 삶의 터전을 많은 분들이 알 수 있도록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했고, 기도하며 그것을 실천한 것 뿐”이라고 말했다.

첫 삽을 뜨고 이제 성지 조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봉암성지는 신앙의 뿌리를 묵상할 수 있는 공간으로, 영적 힐링 센터로 발돋움하길 기다리고 있다.

정 신부는 “봉암성지는 신앙선조들이 어렵게 신앙을 지키며 살았던 터전을 체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지역의 정신적, 영적 힐링 센터로서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설명했다.

※후원 계좌: 우체국 301341-05-001280 (재)청주교구천주교회 유지재단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