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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14) 나는 누구로 살아가고 있는가 – 정체성의 신학

정희완 신부 (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입력일 2021-07-06 수정일 2021-07-07 발행일 2021-07-11 제 3253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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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방식이 정체성…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결정한다
나는 나를 누구로 여기는가 타인은 날 누구라고 규정하나 정체성, 남들과 관계에서 구성 다양하고 복잡한 양상 지녀
정체성은 종교·성·인종·국가 등 개인마다 여러 요소들로 구성 상황 따라 고려할 정체성 달라
겉보기엔 그리스도인이지만 실제론 세속 논리 따를 수 있어
내가 ‘어떻게’ 내 일에 임하는지 삶의 자세·태도가 본래 정체성

나의 정체성은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결정한다. 삶의 자세와 태도가 진정한 정체성이다.

■ 정체성 질문

나는 나를 누구로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인의 시선에 비친 나는 같은 사람인가? 정체성은 ‘나’라는 인식인 동시에 타인이 나를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나는 나를 무엇으로 규정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더 나아가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내가 실제 삶에서 나를 타인에게 표현하고 있는 나가 언제나 같은가? 내가 생각하는 나, 타인이 규정하는 나, 내가 표현하는 나, 이 셋의 미묘한 불일치가 정체성의 위기를 낳는다.

정체성의 문제는 자신과 자신의 삶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로 타인에게 인식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정체성의 규정은 동일성과 차이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나와 유사한 것과 나와 다른 것을 통해 자기를 규정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진행되고 성취된다. 정체성은 하나의 요소가 아니라 복합적인 요소들로 구성된다. 정체성은 다양하고 복잡한 양상을 지닌다.

일반적으로 정체성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구성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는 타인과 나누는 상호작용에 달려 있다. 혹은 넓은 의미의 환경과 문화에 달려 있다.” “정체성은 타인들이 우리의 몸에 새겨 넣은 특성들의 집합으로, 대개 우리의 출신과 운명에 관한 견해들의 총체이다.”(파울 페르하에허) 정체성은 끝없이 타자와의 문제를 제기하며, 나와 타자 사이의 근본적인 틈새와 차이를 담고 있다.

우리에게 타자란 누구인가?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타자는 누구인가? 타자로서의 하느님, 타자로서의 사람들, 또 하나의 타자로서의 나 자신. 우리의 정체성은 이 셋의 관계에 따라 규정되고 구성된다.

■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사람의 사회적 정체성은 여러 요소로 구성된다. 젠더와 민족과 국가와 인종적 요소들이 있다. 한 개인은 다양한 사회적 정체성을 갖고 산다. 한 개인 안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등이 복합적으로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체성이 서로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선택과 결단의 자리에서 더 고려해야 할 정체성이 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항상 우선적 고려의 대상이 되는가? 일종의 종교적 정체성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성적 정체성, 민족적 정체성, 국가적 정체성, 인종적 정체성, 계급적 정체성을 뛰어넘어 우선성을 갖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에게 신앙은 삶의 자리에서 일차적이거나 중심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이차적이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또는 삶의 한 장식품으로 작동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체험하고, 닮고 재현하는 일이다. 신앙은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며, 이 지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성사적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신앙인의 정체성은 종교적 행위와 관습에 익숙해지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닮고 재현하는 데에 기초한다. 오늘날 신앙을 말하고 신앙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정작 그들의 모습과 태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을 찾기가 점점 어렵다는 사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외형적 정체성은 그리스도인이지만 실제적 정체성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경우가 많다. 외적 신앙생활(종교생활)은 하고 있지만, 실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신앙의 방식이 아니라 세속의 논리(자본과 권력의 논리)로 살아가는 경우다. 정체성의 분열과 괴리다.

■ 나는 사제로 살아간다

사제의 정체성은 부르심에 기초를 두고 있다. 사제의 정체성은 직무적으로 그리스도의 삼중직에 참여한다는 것과 사목자라는 특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신학적 관점에서의 정체성을 묻기보다는 일반적 관점에서 묻고 싶다. 사제는 누구인가? 사제는 무엇보다 예수의 제자를 자처하는 사람이다. 예수의 제자로 살고자 하는 이 시대의 사제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처럼, 예수와 늘 일치해 있어야 하고, 그래서 누구보다 더 예수를 닮은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그런데 이 시대의 사제에게서 예수의 모습을 발견하기보다는 때때로 종교권력자의 모습을 발견한다. 슬픈 일이다.

나를 봐도 그렇다. 사람들이 정말 나를 보고 예수를 떠올릴 수 있을까. 내가 하는 말, 내가 하는 행동, 내 삶의 모습 속에서 사람들은 예수의 그 어떤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까. 아, 저 사람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라서 확실히 세상 사람들과는 뭔가 다르다는 것을 사람들이 나를 보고 느낄까? 부끄러운 일이다.

성경의 개념들을 사용하고 교회 전통 안에서 전해진 신앙의 말들을 사용하고 있지만, 또한 미사를 집전하고 성사를 거행하고 있지만, 정작 예수를 닮은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는 못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사용하는 말들과 용어들은 신앙적이지만 구체적 내 삶은 예수를 닮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종교인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정작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다. 삶이 종교적이긴 하지만 복음적이지는 않다는 느낌이다. 아픈 일이다.

■ 내가 ‘나’로 살아간다는 것은

정체성은 고유성이기도 하다.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나의 사유 방식과 행동방식은 무엇인가? 나는 자신의 사유, 감정과 정서, 욕망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정확하게 이해하며 성찰하고 있는가? 나의 삶은 고유한 색깔을 가지고 있는가?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셰익스피어) 나는 어디에서 무엇이 되어 어떻게 살고 있는가?

나는 내 삶을 어떤 문장으로 서술하고 있는가? 나는 어떤 문장을 쓰고 있는가? 내가 쓰는 문장의 명사, 동사, 형용사, 부사는 무엇인가? 명사는 존재다. 나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가? 동사는 행위다. 나는 어떤 행위들을 하며 살고 있는가? 형용사는 성격과 특성이다. 나는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는가? 부사는 동사와 형용사를 수식한다. 진정한 정체성은 언제나 부사에 있다.

내가 어떤 명사(신분, 지위)인지, 내가 어떤 동사(행동과 일)와 관련이 있는지, 내가 어떤 형용사(특성)로 수식되는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명사와 동사와 형용사가 나를 거룩하게 하지 않는다. 나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내가 ‘어떻게’(부사) 내 직무와 일을 수행하는가에 있다. 성직자, 신학자라는 명사가 나를 거룩하게 하지 못한다. 미사를 거행한다고, 신학을 연구한다고 거룩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나의 거룩함을 결정한다.

살아가는 방식이 정체성이다. 삶의 자세와 태도가 진정한 정체성이다.

정희완 신부 (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