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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15) 삶이 하나의 이야기가 될 때 – 이야기 신학

정희완 신부 (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입력일 2021-07-20 수정일 2021-07-20 발행일 2021-07-25 제 3255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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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 ‘살아있는 이야기’로 선포되면 말씀 실천으로 이어진다
공적 서사가 힘을 얻으려면 자신의 이야기와 결합돼야
말 속에 생각과 체험 있으면 강한 설득력 가질 수 있어
자신을 이야기하기 위해선 스스로 성찰하는 자세 필요
자기 삶 냉정하게 살펴보고 정직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복음이 진정으로 선포되려면 나와 공동체 이야기 결합돼야
진솔한 이야기가 힘 합친다면 성경은 ‘살아있는 말씀’ 될 것

성경의 이야기가 오늘의 우리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와 만날 때 살아있는 말씀이 되고, 우리는 복음을 머리로 이해하고 가슴으로 느끼고 몸으로 실천할 수 있다.

■ 자기를 말하는 일

신부로 살면서 자기를 말하는 순간이 많아졌다. 강론을 하거나 글을 쓸 때, 자기의 생각과 경험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물론 자기를 말하는 것과 자신을 내세우는 것은 서로 다르다. 신학생 시절 하느님을 앞세우고 자신을 뒤에 두어야 한다는 말을 귀따갑게 들었다. 교만의 죄와 겸손의 미덕에 대해 숱하게 말하고 들었다. 자기를 말한다는 것은 하느님보다 자신을 앞세운다는 의미가 아니다. 자신의 정직한 생각과 느낌을 먼저 성찰한다는 맥락이다. 자기 생각과 자신의 정직한 느낌을 말하지 않고, 객관적이라는 명분 안에서 추상적이고 당위적인 말을 반복하는 것만큼 지겨운 일도 없다. 말의 힘은 화려한 수사와 매끄러운 표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발화되는 말 안에 그 사람의 정직한 생각과 느낌과 체험이 들어있다면, 그 말은 살아있는 말이 된다. 오늘의 세상 안에 공허한 말들, 추상적인 말들, 윤리적 당위의 말들, 죽어있는 말들이 너무 많이 떠돌고 있다.

공적 이야기 안에 사적 이야기를 집어넣는 것은 선포를 왜곡하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공적 서사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한다고 흔히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공적 서사가 실제적인 힘을 갖기 위해서는 나의 이야기와 결합해야 한다. 어떤 공적 주제에 대한 개인의 생각과 체험을 정직하게 말함으로써 듣는 사람들이 그 개인을 매개로 그 주제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또 한편으로 나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와 결합해야 한다. 개인의 생각과 체험은 편파적이고 일방적일 수 있다. 그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공동체의 생각과 경험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하느님과 복음을 선포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하느님과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공적 서사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공적 서사가 진정으로 살아있는 선포가 되기 위해서는 나의 이야기와 교회 공동체의 이야기를 포함해야 한다. 즉, 하느님의 이야기와 교회 공동체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가 만날 때 진정한 복음 선포가 이루어진다. 살아있는 이야기로 전달될 때 우리는 복음을 머리로 이해하고 가슴으로 느끼고 몸으로 실천할 수 있다.

공적 서사에서 자기를 말하는 것이 중심일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필수적이다. 자신의 정직한 질문과 자기 이야기가 없는 모든 말과 글은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물론 자기를 말하는 일에는 자기 정당화, 자기 미화, 자기 확인 욕망, 과장과 확대의 위험이 있다. 이 위험을 늘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사람이 하는 모든 말과 글에는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그 사람의 생각과 해석이 담겨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정직하게 자기를 말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를 반성하고 성찰한다는 의미다. 자기를 말한다는 것은 타자와 하느님을 진정으로 만나기 위해 먼저 자기를 개방한다는 뜻이다.

■ 이야기로서의 성경

학문적 관점에서 보면, 성경 안에는 신학적 차원과 역사적 차원과 문학적 차원이 포함되어 있다. 성경을 학문적으로 공부할 때 성경 신학, 성경의 역사적 비평, 양식 비평과 편집 비평 등의 용어를 자주 접한다. 성경 안에는 신앙적 진리와 역사적 사실과 문학적 서술이 서로 섞여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성경은 이야기다. 성경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이야기, 하느님과 함께하는 교회 공동체의 이야기, 하느님을 체험한 개인들의 이야기다. 성경은 추상적이고 신학적인 개념을 설명하지 않는다. 성경은 체험과 삶의 이야기다.

성경이 이야기라는 사실이, 우리가 성경을 문학 비평의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성경학자의 일이다. “성경의 이야기를 좀 더 온전히 이야기로서 즐기는 법을 배울 때 그들(성경 저자들)이 우리에게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위험할 정도로 중요한 역사의 영역에 대해서 말하고자 했던 바를 보다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된다.”(로버트 알터) 성경은 우리 신앙인에게 언제나 살아있는 이야기로 다가온다. 성경의 이야기는 오늘의 우리 이야기와 지금 나의 이야기와 만날 때 살아있는 말씀이 된다.

■ 자기를 말하고 기록하는 일 – 자서전적 삶

자기를 말하는 것과 자신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미묘한 차이가 있다. 구술성과 문자성은 비록 결이 다르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다. 글로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은 말로써 자기를 이야기할 수 있다. 자기를 말한다는 것, 자기 생애를 말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당사자에게 일종의 ‘존재 확인’이 된다. 자기의 말을 갖지 못해서, 자기 삶을 이야기화하지 못해서 소외되고 잊혀 가는 사람들이 구술 작가들의 문자화와 다큐멘터리 작가들의 영상과 녹음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는 것을 우리는 자주 목격한다.(최현숙의 저서 「할배의 탄생」과 「할매의 탄생」, 김재환의 다큐멘터리 ‘칠곡 가시나들’) 말과 이야기는 존재의 탄생을 의미한다. 존재는 말과 이야기로 자기를 드러낸다.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알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이야기한다.”(유호식)

자기 삶을 기록한다는 것, 자기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 자기의 생각과 감정과 욕망을 기술한다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자서전적 글쓰기다. 모든 글쓰기는 자서전적 요소를 담고 있다. 소설가 이청준은 소설 「자서전들 쓰십시다」에서 글쓰기는 “자기 삶의 근거를 마련하려는 일종의 복수심”에서 출발한다고 고백한다. 자기 글쓰기는 자기 삶을 텍스트화해서 이해하는 행위다. 자신을 말하고 이야기하기 위해서 먼저 스스로를 돌아보고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모습을, 자기의 삶을 냉정하게 살펴보고 거짓 없이 서술할 수 있어야 한다. 정직한 자기 고백은 그 고백의 행위만으로도 상처를 위로하고 자기를 구원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찰과 고백이 구원과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진정한 구원은 하느님만이 이루시는 일이지만 말이다.

■ 정직한 이야기가 되기 위해서

누구나 자기의 생각과 감정과 욕망을 말하고 쓰는 시대를 살고 있다. 블로그나 페이스북 등을 통해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말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자서전적 서술의 과잉이다. 자기 서술을 통해 인정 욕망을 충족하려는 시대다. 정직한 자기 서술에 머물기보다는 꾸밈과 과장과 거짓 서술로까지 나아가기도 한다. 그래서 더, 진솔하고 소박한 이야기가 필요한 시대다. 말과 글로 서술된 이야기보다 몸과 삶으로 표현하는 이야기가 더욱 그리운 시대다. 삶 그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인간은 서사적 존재다. 삶은 이야기다. 문제는 어떤 이야기인가에 달려있다. 화려한 이야기보다 진솔한 이야기가 힘을 갖는다. 정직한 이야기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어떤 이야기를 말하고 쓰고 살고 있는가?

정희완 신부 (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