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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16)신앙의 시선으로 읽기 – 읽기의 신학

정희완 신부 (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입력일 2021-08-10 수정일 2021-08-10 발행일 2021-08-15 제 3257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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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눈으로 보는 것은 ‘가엾은 마음’으로 바라보는 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텍스트 인간과 삶에 관한 이해 넓혀줘
사람과 세상을 읽는 일은 세상 속 희로애락을 읽는 것
세상은 선교와 사목의 현장 정확히 읽어야 교회 사명 수행
교회와 신앙인의 읽기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읽는 것
슬픔을 기억하는 행위와 슬퍼하는 사람과 주님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행위이기도

신앙의 시선으로 읽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태도로 읽는다는 뜻이다. 그것은 연민 어린 슬픈 눈으로 바라본다는 의미이다.

■ 읽는 즐거움

늘 읽어왔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적어도 나에게 산다는 것은 읽는 일이었다. 나에게 익숙한 동사는 ‘읽는다’와 ‘걷는다’이다. 모두가 잠든 밤늦은 시간, 책상에 앉아 책을 읽는 내 모습을 발견할 때, ‘아, 참 행복하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저녁 무렵 동네를 산책하는 일은 또 얼마나 평안한 즐거움인지. 물론 ‘사제로 살아서 이런 호사를 누리는구나’ 하는 미안함도 있다. 가끔 상상한다. 더 늙어, 요양원에 누워 걷지도 못하고 읽지도 못하는 시간이 온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할 것인지. 그저 건강히 살아, 읽고 걷다가 며칠만 누워 있다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생의 운명은 주님의 몫이니, 내 생의 마지막 모습을 내가 선택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읽기의 주된 대상은 책, 신문, 잡지라는 텍스트다. 오늘날 사람들은 유튜브와 시청각 매체를 좋아한다. ‘읽기’보다는 ‘보기’와 ‘듣기’가 대세인 시대다. 얼핏 생각하면 읽기와 보기는 인간의 시각을 활용한다는 점에서 비슷할 수 있지만, 텍스트를 읽는 것과 영상을 보는 것은 분명 다르다. 나는 활자와 인쇄 매체를 사랑하는 옛 시대 사람이다. 전자책보다는 종이라는 물성을 더 좋아한다. 물론 인터넷을 통한 글 읽기도 좋아한다.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의 글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블로그를 통해 사람들의 글을 읽었다.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과 정서를 엿볼 수 있었다. 블로그 읽기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의 사유와 정서를 읽었고, 삶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 타인의 글을 읽는 일은, 비록 간접적인 방식이지만, 그를 만나고 경험하고 이해하는 일이다. 몸의 행동반경이 좁은 나에게 블로그 읽기는 체험과 이해의 확장을 뜻했다. 요즘은 페이스북을 더 많이 읽는다. 블로그의 글은 시간의 숙성과 성찰의 과정을 거친 것들이 많다. 페이스북의 글은 시간적 민첩성과 정서적 반응의 성향이 더 강하다. 물론 블로그에서든 페이스북에서든 나는 소위 말하는 ‘눈팅족’이다. 블로그와 페이스북은 적어도 나에게는 자신의 글을 쓰는 장이라기보다는 타자의 글을 읽는 장이다. 대화와 커뮤니케이션의 공간이라기보다는 이기적 읽기의 공간이라는 뜻이다. 저마다 삶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듣는 일은 이승의 생에서 내가 누리는 작은 즐거움이다.

■ 사람과 세상을 읽는다

읽기는 소극적인 의미에서 일종의 대화다. 읽기는 저자와 독자, 텍스트와 독자의 대화다. 또 한편으로, 읽는 행위 안에는 언제나 읽는 사람의 생각이 투입된다. 읽기는 일종의 해석이다. 왜 읽기라는 대화와 해석을 나는 좋아하는가? 나에게 읽기는 삶과 인간에 관한 관심과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삶과 인간을 알고 싶어 읽는다. 세상의 모든 텍스트는 인간과 삶을 알려주는 텍스트다. 문학과 철학과 사회과학의 텍스트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연과학의 텍스트 역시 인간과 삶에 관한 이해를 확장해준다고 나는 믿는다. 인간과 삶에 관해 정색하고 쓴 글뿐만 아니라, 신문과 잡지의 시답잖은 것 같은 기사 역시 인간과 삶에 대한 진실을 때때로 더 많이 알려주기도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닥치는 대로 읽는다.

‘읽는다’는 동사는 다양한 함의를 갖는다. 읽는 행위 안에, 보고 듣고 관찰하고 분석하고 해석하는 일이 포함된다. 읽기는 공부다. 학문의 세계에서 많이 읽는 사람을 못 당한다. 읽기는 관심이다. 타자를 읽는다는 것은 그에 대한 관심이다. 세상을 읽는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관심이다. 읽기는 사랑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람을 읽고 세상을 읽는다. 관심과 사랑이 없는 사람은 읽지 않는다.

사람과 세상을 읽는 일은 겉으로 드러난 것만을 읽는 일이 아니다. 말과 행동 뒤에 숨어 있는 마음을 읽는 일이다. 문자와 표지 너머의 행간을 읽는 일이다. 생의 이면과 세상의 이면을 읽는 일이다. 사람을 읽는 일은 결국 마음을 읽는 일이며, 세상을 읽는 일은 감춰진 이면을 읽는 일이다. 한편으로, 사람과 세상을 읽는 일은 세상 속의 기쁨과 즐거움, 아픔과 슬픔을 읽는 일이다. 아픔과 슬픔을 읽는 일은 읽기의 윤리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읽기는 결국 타자와 세상이라는 거울을 통해 나를 읽는 일이다. 세상을 읽고, 타자를 읽고, 나를 읽는다.

■ 교회와 신앙의 현실을 읽는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시대의 징표를 읽는다는 말을 우리는 자주 듣는다. 세상을 향한 교회의 자세와 태도를 성찰하는 말이다. 선교와 사목의 현장인 세상을 정확히 읽을 때 교회의 사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는 의미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현실에 대해 교회는 관심과 사랑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세상의 징표뿐만 아니라 교회와 신앙의 현실을 정직하고 정확하게 읽는 일이 필요하다. 세상을 향한 관심과 사랑뿐만 아니라 교회와 신앙의 실재(reality)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요청된다는 의미다. 교회와 신앙은 추상적 개념(idea)이 아니라 언제나 구체적 실재다. 오늘의 교회가 사회교리나 사회적 사목의 맥락에서 세상을 읽는 일에는 익숙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읽는 일에는 소홀한 느낌도 든다. 반성과 성찰은 뼈아프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 읽기의 거룩함

읽기는 그 자체로 거룩하지 않다. 누가 읽느냐, 무엇을 읽느냐가 중요한 것도 아니다. 즉, 읽는 주체와 읽는 대상이 중요성과 거룩함을 좌우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언제나 문제는 ‘어떻게 읽고 있는가’, ‘어떤 시선으로 읽는가’이다. 명사와 동사가 거룩함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 부사가 거룩함을 표현한다. ‘열린 마음으로’ 읽을 때, ‘편견 없이’ 읽을 때, ‘정확하게’ 읽을 때, ‘식별하며’ 읽을 때, ‘정직하게’ 읽을 때, ‘따뜻한 마음으로’ 읽을 때, ‘공감하며’ 읽을 때, ‘공명하며’ 읽을 때, 바로 그때 읽기는 거룩한 행위가 된다. ‘읽는다’는 동사를 수식하는 부사가 무엇인가에 따라 읽기의 거룩함은 그 농도가 달라진다.

‘하느님의 시선으로’ 읽는다. ‘신앙의 시선으로’ 읽는다. 교회와 신앙인의 읽기를 표현하는 말이다. 하느님의 시선으로, 신앙의 시선으로 읽는다는 것은 교리와 윤리적 규범의 틀로 읽는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태도로 읽는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시선으로 읽는다는 것은 ‘가엾은 마음’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마르 6,34)

연민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슬픈 눈으로 바라보는 일이다. 십자가의 슬픔에서 우리는 배운다. 슬픔은 슬픔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구원은 슬픈 응시와 기억하고 호명하는 행위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신앙인의 읽기는 슬픈 시선의 읽기다. 연민과 연대의 읽기다. 그 슬픈 읽기는 슬픔을 기억하는 행위와, 슬퍼하는 사람들과 주님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행위를 포함한다. 신앙인의 읽기는 응시와 기억과 호명의 행위다.

정희완 신부 (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