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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시간을 걷다] (15) 김대건·최양업, 모험하다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21-08-17 수정일 2021-08-17 발행일 2021-08-22 제 3258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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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아시오?” 풍랑도 막지 못한 필사의 선교 의지
감시 피해 다녀야 했던 선교 ‘예수와 마리아’를 암호로 삼고 신자들과 접촉해 소식 주고받아
폭풍우에 당당히 맞선 김대건 중국 관리 의심 슬기롭게 극복
성사 거행에 계책 동원한 최양업 외교인 집 빌려 미사 봉헌 성공

라파엘호를 타고 조선과 중국을 왕복했던 김대건 신부는 폭풍우와 갖은 위기를 마다않고 조선 복음화에 헌신했다. 사진은 제주교구 용수성지에 복원 제작돼 있는 라파엘호의 모습.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우리는 흔히 어떤 목적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미지의 땅을 찾아나서는 일을 모험이라 부른다. 이런 면에서 봤을 때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와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여정은 대단한 모험이었다. 늘 위기와 위험이 도사리는 길을 걸었던 두 사제에겐 수많은 모험담이 있다. 김대건과 최양업의 모험담 중 몇 가지를 지면을 통해 소개한다.

■ 정체를 숨겨라, 암호명 ‘예수’

김대건은 1844년 중국 훈춘을 경유해 조선 입국을 시도하고 있었다. 조선 경원의 관장이 정한 교역날이 되자 김대건은 중국 상인들 틈에 섞여 경원의 시장으로 갔다. 김대건은 허리띠에 붉은색 차주머니를 차고 손에 흰 손수건을 들고 군중 사이로 들어갔다. 조선 연락원과 약속한 표지였다. 마침내 낯선 사람이 김대건 일행에게 다가왔다. 김대건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예수의 제자요?”

“그렇소.”

김대건 일행과 신자들이 모인 모습과 대화 분위기가 주변의 이목을 끌게 되자 김대건 일행은 재치 있게 대응했다.

“이것 얼마 받겠소?” “80냥이오.” “그건 너무 비싸오. 자, 50냥 줄 터이니 당신 가축을 팔고 가시오.” “안 될 말씀이오. 조금이라도 덜 주겠다면 안 팔겠소.” 가축을 흥정하는 척 주위를 속인 김대건은 다시 신자들에게 조선교회의 상황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예수’. 외교인들은 알 수 없지만, 신자라면 모를 수 없는 이름이었다. 신자들에게는 신앙 그 자체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비밀스러운 암호가 됐다. 최양업에게도 그랬다.

1847년 당시 부제였던 최양업은 조선으로 향하는 프랑스 함선에 올랐다. 하지만 배는 조선 근해의 섬에 다다라 심한 돌풍에 좌초되고 말았다. 최양업은 고군산도에서 한 달 이상 천막을 치고 생활해야 했다. 조선 입국이라는 희망은 좌절됐지만, 최양업은 조금이라도 신자들 소식을 알아낼 수 있을까 해서 매일 같이 인근 고을에 숨어들어 탐문하며 기웃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가까운 고을에 다녀오기 위해 작은 배를 탄 최양업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배에 오른 사람들과 필담으로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를 유심히 지켜보던 한 사람이 조용히 최양업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예수와 마리아를 아시오?”

드디어! 최양업은 방금까지의 조심성마저 잊은 채 희열에 차 조급하게 대답하고 물었다.

“알고말고요! 잘 압니다. 당신도 압니까? 당신은 그들을 공경합니까?”

그 신자도 그렇다고 하면서도 외교인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대화를 중단했다. 그들은 몰래 필담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그 신자는 가족 모두가 신자고 또 모레 신자의 작은 배 한 척이 이곳에 올 것이라는 말을 하고 헤어졌다.

안타깝게도 이 비밀스러운 만남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최양업은 고군산도에 남아있고 싶어했지만, 함장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양업은 “서원까지 하면서 간절히 소망해 마지않았고 또 천신만고 끝에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손안에까지 들어온 우리 포교지를 어이없게 다시 버리게 됐다”며 “저도 모르게 눈물을 줄줄 흘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탁희성 作 ‘서해의 풍랑을 헤치고’. 거센 파도가 휘몰아치는 서해를 작은 배로 건너는 김대건 신부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위험을 슬기로 헤치다

김대건이 조선에서 중국으로 갔다가, 사제품을 받고 다시 중국에서 조선으로 온 사건은 유명하다. 작은 배로 거대한 폭풍우에 맞선 것도 대단한 모험이었지만, 항해에서 헤쳐 나가야할 위험은 바다만이 아니었다. 김대건은 해적을 만나기도 했고, 김대건을 조선으로 돌려보내려는 중국 관리들과도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당시 중국은 허가 없이 입국한 조선인들을 조선 조정에 알리고 인계했기 때문이다.

특히 1845년 조선에서 상하이에 도착했을 때는 한 중국 관장의 의심을 샀다. 김대건이 영국인들과도 친하게 지내는 것을 보고 수상하게 여겼던 것이다. 이에 관장은 관헌을 보내 김대건에게 언제 떠나느냐고 따졌다. 그러자 김대건은 슬기를 발휘했다.

“나는 배를 고치기 위해 여기에 더 머물러야하오. 그뿐 아니라 당신들의 상급 관장한테서 들은 말인데 얼마 후 세실 함장이 여기 온다고 하니 나는 그를 만나기 위해서라도 더 머물러야 하겠소.”

김대건의 말에 관장은 자칫 자신의 관직을 잃게 될까 두려워 더 이상 김대건에게 시비를 걸지 않게 됐다. 김대건이 상하이를 관할하는 송강부의 상관과 교류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김대건은 영국과 중국의 관계, 또 중국인들의 문화 등을 파악하고 있었고, 영국 영사관을 통해 중국 관리와 소통하고 유리한 관계를 만들어냈다. 사실 김대건은 배 수리를 이미 끝낸 상태였다.

1851년 최양업은 흡사 첩보영화의 한 장면처럼 성사를 거행했다. 당시 남자들은 얼마든지 집을 떠나 성사를 받을 수 있었지만, 양반 신분의 여자들은 집 밖을 나가는 것이 어려웠다. 그런데 두 여신자가 외교인들과 함께 살고 있어 성사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최양업은 대담한 계책을 세웠다. 먼저 신자 집에 이웃한 외교인의 집 남자에게 그럴듯한 사업을 제안해 얼마 동안 외출을 시켰다. 그리고 신자들이 그 외교인의 집을 찾아가 손님을 모시기 위해 필요하다는 핑계로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집을 하루 빌려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최양업은 비어있는 외교인 집에 공소를 차렸고 모두가 잠든 밤중에 신자들이 모여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다. 단 두 명의 신자를 위해 펼친 작전이었다.

김대건과 최양업의 모험은 드라마나 영화에서처럼 신나거나 멋진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두 사제가 목숨을 건 모험을 셀 수 없을 만큼 강행했던 것은 모두 신자들을 돌보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최양업은 편지를 통해 “우리가 일을 꾸미는 때에는 악의에서가 아니라 필요에 의해 비신자들에게 여러 가지 거짓말로 폐를 끼친다”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즉시 천주교를 비난하거나 그 자리에서 모두 끌려가 순교하고 만다”고 전했다.

■ 김대건 최양업의 시간을 함께 걸을 수 있는 곳 – 제주교구 용수성지

제주교구 용수성지(제주도 제주시 한경면 용수1길 108)는 라파엘호를 타고 조선을 향하던 김대건 일행이 풍랑을 만나 표착했던 포구다. 제주교구는 1999년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이곳을 성지로 선포했다. 용수성지에는 복원 제작된 라파엘호와 표착기념성당, 표착기념관 등이 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