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생활 속 영성 이야기] (83) 엄마와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여행

고유경(헬레나·ME 한국협의회 총무 분과 대표),
입력일 2021-08-24 수정일 2021-08-24 발행일 2021-08-29 제 3259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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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라는 이름의 소녀와 함께한 시간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연일 네 자릿수를 기록하고 있는 요즘, 우리 가족은 속초로 휴가 여행을 다녀왔다.

한 주 전 엄마는 갑작스러운 빈혈로 응급실에서 수혈을 받았다. 치매를 앓고 계시긴 해도 큰 병이 없어 병원 신세를 많이 지지 않았던 엄마가 갑자기 수혈을 받는 상태가 되니 엄마에게 남은 시간을 가늠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수혈만으로도 기운을 차린 엄마는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어. 나이가 이렇게 많으니 그만 살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지만 내 솔직한 마음은 더 살고 싶어. 지금 나는 아무 불만이 없어. 아픈 데도 없고 편안하고 행복해”라고 말했다.

엄마는 응급실에서 하룻밤을 보냈다는 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엄마의 더 살고 싶다는 말을 들으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이제 엄마는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고 돌아가실 날을 향해 하루하루 가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나이가 많다고, 치매가 걸렸다고 살아갈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나도 이대로만 계셔 주어도 너무 감사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엄마, 이대로 잘 유지하면 잘 살 수 있어요. 잘 살아 봅시다”하며 웃어 드렸다.

올봄 예로니모와 나는 엄마를 모시고 하동 여행을 했다. 자동차로 네 시간 이상 걸리는 길을 엄마가 감당할 수 있을까 싶긴 했지만, 엄마에게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 드리고 싶다는 생각에 살살 가보기로 했다. 그런데 엄마는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며 여행을 즐겼다. 식사도 잘 하시고 잠자리를 가리지 않고 잘 주무시고 장시간 차를 타는데도 멀미 한 번 안 하셨다. 기분이 좋아서인지 치매 증세도 거의 없이 사위와 즐거운 대화를 이어 가셨다. 엄마와 함께 여행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용기를 내서 오길 잘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모시고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번 속초 여행도 다행히 엄마의 컨디션이 나쁘지 않아 모시고 갈 수 있었다. 세 시간 정도 차를 타고 가는데 멀미도 안 한다며 내가 나이를 거꾸로 먹나 보다 하며 좋아하셨다. 바다를 보며 소녀처럼 좋아하시고 맛난 음식도 잘 드시는 엄마를 보니 역시 모시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내 마음속에서 자꾸만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이번 여행이 엄마와 마지막 여행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면 그동안 더 많이 함께하지 못했던 시간들이 새삼 아쉽고 미안했다. 지금부터 가는 여행은 매번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될 것 같고 그 마지막이 과연 몇 번이나 더 허락될지 알 수 없다.

엄마의 컨디션은 롤러코스터 같았다. 첫날은 식사도 잘 하시고 걷기도 잘 하셔서 이대로라면 몇 번이고 여행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초저녁에 자고 한밤중에 깨어 계속 말을 거는 바람에 함께 잠을 설쳤고, 다음 날은 오전에 휠체어를 빌려 두 시간 정도 바닷가와 소나무 숲을 산책하고 숙소로 들어와 온종일 주무셨다. 흔들어 깨워서 밥을 드시도록 할 정도로 잠에 취해있는 엄마를 바라보니 내가 괜한 욕심을 부렸나 하는 생각도 들고 이러다 그대로 돌아가시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고 차를 타고 올라올 일도 걱정이었다. 그대로 다음 날 아침까지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신 엄마는 말수도 부쩍 줄고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식사만 겨우 할 정도였다. 집에 와서는 저녁도 못 드시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날 밤 예로니모에게 엄마와의 마지막 여행에 대한 내 마음을 이야기했다. 예로니모는 내 애틋한 마음을 가만히 들어 주었고 다음 마지막 여행도 미루지 말고 다녀오자고 말해주었다. 예로니모가 그렇게 말해 주니 안심이 되었다. 엄마와의 다음 마지막 여행도 엄마의 마지막 길도 이 사람과 함께 맞이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걱정과 두려움이 조금 작아지는 것 같았다.

엄마가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더 많이 웃고 즐거워할 일을 만들어 엄마가 살고 싶어 하는 하루하루를 소중히 채워 드리고 싶다. 예로니모와 함께.

고유경(헬레나·ME 한국협의회 총무 분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