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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18) 문학적 상상력에 대하여

정희완 신부 (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입력일 2021-09-07 수정일 2021-09-08 발행일 2021-09-12 제 3261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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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은 인간과 삶을 이해하는 태도를 문학에서 배워야 한다
신학은 말과 상상력을 통해 하느님 신비 이해하려는 노력
이성적 사유 안에서 추론되는 주님이 생생히 다가오지 않아
문학은 인간과 삶의 통찰 담아 이해 확장과 정서적 소통 제공
언어와 풍부한 상상력을 통해 신비를 최대한 드러낼 수 있어
신학은 말과 상상력의 가능성 문학에서 배우려는 노력 필요
오늘의 삶과 인간을 탐구하고 이해하는 마음과 자세 배워야

서울 양재동본당 독서회 ‘사월애’ 회원들이 신심서적을 읽고 의견을 나누고 있다. 우리는 문학을 통해 인간과 삶에 대한 이해의 확장과 정서적 공감과 소통을 체험한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사람과 삶에 대한 호기심

늘 인간과 삶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세상 속에서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항상 궁금했다. 개인적이고 실존적 관심과 취향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사람과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살아온 것 같다. 역사학을 전공한 이유도 인간을 알고 싶어서였다. 역사가 인간에 대해 가장 잘 말해 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시절의 대학교 사학과에서 배운 것은 대부분 역사적 제도에 관한 것이어서 무척 지겨워했었다는 기억만 남아 있다. 정작 어슬렁거리며 기웃기웃했던 것은 국문과 수업들과 문학책 읽기였다.

신학교에 와서 철학과 신학을 배웠다. 여전히 인간과 삶에 대한 호기심은 채워지지 않았다. 철학자들의 사유 안에서 인간과 삶의 실존적 정황을 읽어내기에는 내 역량이 한참 부족했다. 정교한 사유의 논리 안에서 벌어지는 것들이 가끔은 흥미로웠지만, 추상적이라는 인상을 지우지 못했다. 신학은 더 답답했다. 신학은 하느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지만, 신학자들의 이성적 사유 안에서 개념과 논리를 통해 추론되는 하느님은 생생한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신학이 하느님 실재(reality)보다는 하느님이라는 관념(idea)에 대한 탐구 같다는 인상을 자주 받았다. 위대한 신학자들이 설명하는 하느님, 탁월한 신비주의적 영성가들이 말하는 하느님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이 체험하고 말하는 하느님을 알고 싶었다. 개념과 논리 안의 하느님보다 현실과 맥락(context) 속의 하느님을 알고 싶었다.

알량하지만 신학을 전공한 학자로 살고 있다. 신학책들을 읽고 신학적인 글을 쓰고 있지만, 아직도 막막하다. 신학이 실재에 대한 사유와 체험에서 발생하는 구체적 개념을 다루기보다는 추상적 개념을 더 선호한다는 인상을 여전히 받는다. 성경의 이야기는 역사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체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교회의 교도권적 가르침은 하느님에 대한 진리를 담고 있지만, 학자인 내 시선으로 접근해도, 이해하기가 무척 어렵다. 신학을 통해서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인간과 삶에 대해서 알고 싶었는데, 현실의 신학은 그 소망에 가깝지 않다는 사실이 가끔 슬프다.

■ 문학을 사랑하는 이유

인간과 삶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는 학자들의 글을 많이 읽었다. 오늘날 사회학자들의 글이 인간과 삶에 대한 통찰을 때때로 더 많이 담고 있다. 앤서니 기든스, 지그문트 바우만의 인문사회학적 글을 좋아했다. 에드워드 윌슨과 안토니오 다마지오 같은,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인간과 삶에 대해 통찰하는 학자들의 글이 더 많은 함의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자주 발견한다. 최근에 신학자의 글을 흥미있게 읽어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요즘도 문학책을 읽는다. 다양한 경험과 다채로운 관계를 갖지 못하고 살아왔기에, 문학 읽기는 인간의 복합성과 생의 이면을 바라보게 하는 가장 큰 통로다. 골방의 서생에게 소설 읽기는 세상 읽기였다. 최인훈, 이승우, 황정은 소설가는 내 인생의 선생들이었다. “내가 아는 한 소설은 인간이 누구인지를 묻고 탐구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이상적인 장르이다.”(이승우, 「소설가의 귓속말」) 구체적인 삶의 상황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고 그 행동의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지에 대해 소설 만큼 정직하게 말해 주는 것은 없다. 창세기의 이야기를 패러프레이즈(Paraphrase)한 이승우의 소설 「사랑이 한 일」은 신앙의 이름으로, 사랑의 이름으로 무엇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 질문이 던져지고 새로운 각도에서 이야기는 서술된다. 그 어떤 신학적 서술보다 신앙과 삶에 대한 깊은 이해를 담고 있다. 황정은 소설 「연년세세」는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화려한 색조를 지닌 묘사와 서술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무심히 우리의 일상을 그려내고 있다. 우리의 생은 ‘다가오는 것’들에 대한 응대일 뿐이다. 사람의 아름다움은 자기 생의 운명을 견뎌내는 방식을 통해 드러날 뿐이다. 소설을 통해 이러한 생의 진실을 배운다.

현대의 삶은 그 자체가 소설과 드라마 같아서, 예전처럼 소설을 많이 읽지 않는다. 소설의 재현 능력이 점점 상실되고 있다. 소설의 시대가 가고 영상의 시대가 오는 것 같다. 그래도 시는 꾸준히 읽는다. 행위의 재현은 영화와 드라마가 소설을 압도하지만, 감정과 정서의 미세한 숨결에 대한 탐색에 있어서 시를 능가하는 것들을 잘 찾지 못하겠다. 때때로 음악이 그것을 표현하고 재현하지만, 말이 갖는 신비한 힘을 통해 시는 자신의 본령을 지키고 있다. 시는 공감의 기쁨을 알려주는 전령이며 생의 비의(秘義)를 보여주는 지혜이다. 이성복의 시를 통해 말의 리듬과 섬세한 인식의 아름다움을 배운다. 김명인의 시 만큼, 시간의 흐름에 따르는 마음의 풍경을 보여주는 것을 다른 어느 곳에서도 잘 발견하지 못했다. 시인들은 시대의 전위(前衛)에 서 있다. 시인들은 섬세한 촉각을 가졌기에 우리보다 언제나 먼저 삶을 감각하고 시대의 징후를 느낀다. 시인들은, 그들이 가진 예지의 능력으로, 늘 우리보다 삶의 신비를 먼저 포착한다. 시인들과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라는 것을 거듭 절감한다.

■ 새로운 상상력으로서 신학 - 문학적 신학

문학을 통해 우리는 인간과 삶에 대한 이해의 확장과 정서적 공감과 소통을 체험한다. 생의 많은 부분을 문학을 통해 배워왔다. 글의 문학적 성취와 미학적 특성보다는 글이 보여주는 인간과 삶에 대한 어떤 통찰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문학은 언어와 상상력의 가능성과 한계, 말과 행동을 통해 살아가는 인간의 신비를 가장 잘 보여준다. 문학은 언어와 상상력에 대한 치열한 긴장을 놓치지 않으면서, 언어와 상상력을 통해 인간이 가 닿을 수 없는 곳의 신비를 최대한 드러낸다. 신학은 말과 상상력을 통해 하느님의 신비를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신학은 문학으로부터 말과 상상력의 가능성과 한계를 배워야 한다. 물론 신학은 계시와 신앙이라는 고유한 영역이 있다. 하지만 신학 역시 인간이 하는 학문인 이상, 말과 상상력을 통해 수행될 수밖에 없다. 신학은 다른 학문들, 특히 문학에 대해 겸손하고 열린 태도로 배워야 한다.

지금 여기에서 만나는 하느님에 대해 말하기 위해, 오늘의 삶과 인간을 탐구해야 한다. 사람과 삶의 사정을 살피고 이해하는 마음과 태도를 문학에서 배워야 한다. 삶의 총체성을 문학만큼 잘 재현한 것이 어디 있는가. 문학은 우리를 납작한 사유에서 벗어나게 하고 상상력을 확장시킨다. 공감적 상상력을 확대해서 타자를 포용하고 연대하는 길로 가기 위해서 철학은 문학적이어야 한다고 리처드 로티는 주장했다. 섬세하고 열린 시선의 신학은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어야 할까? 신학적 서술은 어떻게 공감과 연대의 힘을 가질 수 있을까?

정희완 신부 (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