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민족·화해·일치] 가톨릭 신자 매카시 / 강주석 신부

강주석 신부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총무)
입력일 2021-09-14 수정일 2021-09-14 발행일 2021-09-19 제 3262호 22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1950년대 초반 미국에서 ‘반공산주의 광풍’을 일으킨 조지프 매카시(Joseph McCarthy)는 아일랜드 이민자 가정에서 자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성실한 신자 부모님으로부터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은 매카시의 종교적 정체성에는 가톨릭 재단인 마켓대학교(Marquette University)에서의 학업도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매카시는 ‘가톨릭 공대생’으로서 4학기 동안 신학 과목을 들었는데, ‘자연종교’(Natural Religion)에서 첫 두 학기에 모두 A학점을 받았지만, ‘사회 정의-성사’에서는 첫 학기에 B학점을, 두 번째 학기에는 C학점을 받았다.

그런데 매카시에게 신학 공부보다 더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교회의 반공주의 노선과 ‘금서목록’과 같은 전통이었다고 한다. 당시 교회 당국은 이단적 혹은 외설적으로 판단되거나, 가톨릭 신자가 읽기에 적합하지 않은 내용을 담은 책들을 금지했는데, 금지된 서적을 읽은 마켓대학교 학생들의 명단이 매 학기 교회 당국 앞으로 보내졌다. 이러한 전통은 성 바오로 6세 교황 때인 1966년이 돼서야 중단됐다.

1950년대 초반 미국 가톨릭교회 인사들 가운데 상당수는 반공주의에 앞장서면서 현대판 ‘마녀사냥’으로 평가받는 매카시의 활동을 지지했다. 그리고 이러한 가톨릭의 열성적인 반공주의는 사회에 만연했던 반가톨릭적 정서를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실제로 20세기 중반까지 가톨릭 신자들은 미국 사회에서 늦은 이민자 그룹으로 취급됐으며, 가난하고 낮은 계급으로 인식되는 차별받는 소수자였다.

특히 다수가 가톨릭 신자인 아일랜드 출신에 대한 인식은 흑인이나 유다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예를 들어 채용공고에는 ‘아일랜드 사람은 지원할 필요가 없다’(Irish needs not apply)는 문구도 흔하게 사용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냉전이 형성되던 시기를 가톨릭이 미국의 주류사회에 접근할 수 있는 호기로 생각했다. 공산주의와의 ‘십자군 전쟁’을 통해 가톨릭이 진정한 미국의 애국자라는 사실을 보여주려 했다는 것이다.

2000년 전 이 땅에 화해의 복음을 선포했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분명 기존 질서에 편입하지 못하는 ‘이방인’이었다. 복음서는 선교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이 방랑자가 될 것을 요구했던 스승의 가르침을 기억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교회의 첫 번째 제자들은 ‘제국의 평화’와는 다른 그리스도의 평화를 전하기 위해서 ‘안주’하지 않는 이방인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이 땅의 순례자인 한국천주교회 역시 세속에 동화되지 않고 ‘희생양’ 스승님을 닮으려고 노력했던 제자들의 모습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반도의 새로운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짠 맛을 잃지 않는 교회’가 될 수 있는 은총을 청하자.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강주석 신부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