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생활 속 영성 이야기] (95) 고통 속에서 더 선명해지는 하느님의 사랑

고유경(헬레나·ME 한국협의회 부대표),
입력일 2021-11-24 수정일 2021-11-24 발행일 2021-11-28 제 3271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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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서 빛으로 이끄는 힘, 사랑

몇 달 전 ME 공동체 후배가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창 일할 나이에 병상에 누워 있어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고 좌절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부부의 태도는 달랐다. 이 모든 것에 감사하며 힘들지만 기쁘게 병상 생활을 했고 지금은 많이 회복되어 조금씩 일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더 큰 일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전조 증상이 와서 빨리 대처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서도 감사해했다. 이런 상황에서 열심히 아빠를 돌보며 엄마를 위로하는 아이들에게도 고마워했고, 무엇보다도 배우자의 헌신적인 돌봄을 고마워했다. 아내도 남편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마음 깊이 느꼈다며 ME가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미리 준비시켜 준 것 같아 신비로운 느낌까지 든다고 했다.

지금은 아내가 남편이 가는 곳 어디든 동행하며 약도 챙기고 무리하지 않도록 옆에서 살뜰히 돌보며 지내고 있다. 이 일을 겪기 전에는 때로 서로에 대한 불평불만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서로에게 부족한 부분에 대한 아쉬움 섞인 이야기를 많이 했었는데 이제는 그저 지금 가진 것에 대해 감사할 따름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전처럼 활발하게 일할 수 없게 되어 경제적으로도 힘들어질 것이 걱정스러울 텐데도 이 부부는 전보다 더 행복한 표정으로 변화되어 있었다. 이렇게 변화된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후배 부부이지만 진심으로 존경스럽다.

본당에서 가까이 지내는 한 부부는 몇 년 전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을 당해 사업에 크게 실패하고 남은 돈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났다. 인생의 절벽 앞에서 순례를 나서는 이들의 선택이 놀라웠고 존경스러웠다. 이 부부는 한층 맑아진 얼굴로 순례를 끝내고 돌아와 순례길에서 만난 예수님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며 순례길에서는 아주 작은 것 하나도 무게가 느껴질 정도이니 최대한 짐을 가볍게 꾸리는 것이 관건이었다며 인생에서도 꼭 가지고 갈 것은 그리 많지 않더라고 이야기했다. 당장 먹고 살 것은 물론이지만 거기에 남은 빚을 갚아야 하는 무거운 짐을 지고 다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이 부부는 의외로 담담했고 뚜벅뚜벅 갈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의 당당한 모습이었다. 꼬박꼬박 돈을 벌어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었는데 여러 가지 사건 사고까지 끊임없이 겪으면서도 서로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고 격려하며 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들이 구도자처럼 보인다. 지금도 이 부부는 서로에게 고마워하고 서로의 건강을 걱정하고 힘들게 한 것에 대해 미안해하며 힘든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채워 가고 있다.

신앙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닥치는 불행을 볼 때 하느님도 무심하시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면 하느님께서 불행을 비켜 가게 해 주실 거라고 믿고 싶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불행은 신앙심이 깊은 사람에게도, 기도도 많이 하고 봉사도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하느님이 있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청할 수 있고 그 고통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이 있고, 그 뜻에 순명할 수 있는 신앙이 있다. 그리고 그 불행 안에서 나를 구하기 위해 애쓰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고 미리 우리를 준비시켜 주신 하느님의 은총을 느끼고 감사할 수 있는 겸손이 있다. 그리고 함께 걱정하고 기도해 주며 서로에게 힘을 주는 신앙의 동료들이 있어 흔들릴 때마다 다시 일어날 용기를 얻고 힘들 때 도움을 청할 수 있다. 우리에게 불행이나 고통이 은총인 이유는 고통이 없을 때는 그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수많은 하느님의 사랑이 고통 안에서는 선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서로 사랑하는 부부는 고통 속에서 더 선명해지는 하느님의 사랑을 서로에게 더 밝게 보여 주는 거울이 되어 준다.

고유경(헬레나·ME 한국협의회 부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