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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화해·일치] 대전 산내 골령골 이야기 / 박천조

박천조(그레고리오)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연구위원
입력일 2021-11-24 수정일 2021-11-24 발행일 2021-11-28 제 3271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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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산내 골령골을 들어 보셨는지요. 대전 산내 골령골은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고 불립니다. 그 이유는 희생자들이 긴 구덩이에 묻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11월 2일에는 올해 수습된 민간인 희생자들의 발굴 유해 안치식이 있었습니다.

올해 6월 7일부터 시작해 10월 15일까지 발굴되고 수습된 유해 962구를 안치한 것입니다.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는 2007년 34구, 2015년 18구, 2020년 234구, 2021년 962구 등 1248구의 유해가 발굴됐습니다. 실로 전국 최대 규모라 할 수 있습니다.

대전 산내 골령골을 비롯해 6ㆍ25전쟁 전후 대전지역에서 주요 민간인 피해자들은 그 상당수가 바로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 관계자들이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은 우리 현대사의 아픔입니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여수 주둔 국방경비대 제14연대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받고 출동을 거부하면서 시작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제14연대 군인 상당수는 6·25전쟁 전에 군사재판을 통해 사형이 집행됐지만 사형을 면한 분들도 6·25전쟁 시작과 함께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죽음을 맞았습니다. 역사 자료를 보면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 사이에 국군과 경찰에 의해 대전형무소 재소자를 비롯해 보도연맹원 등 최대 7000명 가량이 죽음을 맞이했고 그들이 대전 산내 골령골에 묻혔던 것이지요.

6·25전쟁을 그린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면 동생이 형의 유해를 보고 “형, 왜 이렇게 누워있어요. 그때 함께 왔어야 하는데”라는 멘트로 영화가 시작됩니다. 문득 대전 산내 골령골에 쓰러져 계신 유해를 보며 유족들은 무슨 말을 꺼낼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한숨과 신음소리만 내뱉지 않으셨을까 추측됩니다.

전쟁은 아무리 아름답게 미화하려 해도 희생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러한 살육이 카인이 아벨을 죽인 때부터 시작됐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때로는 영토를 얻기 위해, 때로는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는 다양한 이유와 명분으로 살육이 진행됐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픈 역사의 흔적을 그냥 묻어둔다고 해서 그 참혹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얼마 전 산내 골령골의 구체적인 현장을 찾던 한 관계자는 70여 년 전 찍힌 당시 사진 속에서 3개의 바위 형상들을 일일이 대조함으로써 구체적 살육 현장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라고 묻는 하느님 말씀에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 4,9)라고 답한들 사실은 언젠가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희생자들이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기를 기원합니다.

박천조(그레고리오)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