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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세이] 운수 좋은 날 / 오한나

오한나(한나·제1대리구 죽전1동본당)
입력일 2021-12-08 수정일 2021-12-08 발행일 2021-12-12 제 3273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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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차해 놓은 차량에 흠집이 생겼습니다. 기말시험이 끝난 딸아이가 먹고 싶다던 음식을 사려고 잠시 세워놓은 차에, 배달 오토바이가 쓰러지며 차 앞문에 긴 생채기가 생겼습니다.

보상과 상관없이 저는 허술하게 주차한 오토바이 주인에게 사고 발생에 대한 책임을 제대로 지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남편은 크게 난 사고가 아니니 그냥 넘어가자고 했습니다.

할부도 끝나지 않은 차에 흠집이 생겼는데 상대의 보험수가까지 걱정하며 그냥 넘어가자고 하는 남편이 저는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자꾸 발끈하자 남편은 “소설 「운수 좋은 날」을 읽어보았냐?”며 자신이 오늘 겪었던 일들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공들였지만 결과가 없어 내심 마음을 접고 있던 계약이 갑자기 성사되고, 예상치 못했던 거래처에서 주문까지 들어오는 ‘운수 대통한 날’이었다고 합니다. 갑자기 일이 술술 풀리는 것이 기쁘면서도 ‘어찌 이리되었을까’ 의문이 들었다고 합니다.

결국 남편은 보상받지 않기로 했습니다. 손가락으로 위를 쓱 가리키며 “저 양반 때문에…”라고 말을 합니다. 이내 이어진 남편의 말이 마음을 뒤흔듭니다. “간절히 원하던 기도들을 들어주셨는데 이 작은 사고 하나 가볍게 지나치지 않는다면, 후에 큰 일로 되갚음을 받을 것 같다”고 저를 설득하는데 번뜩 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분께서 지나가실 때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깨닫지 못할까봐 두렵다”는 한 성인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아차’하는 순간에 예수님께서 제 곁을 지나가셨습니다. 이런 상황을 겪을 때, ‘주님이 나를 스쳐 가시는구나 하고 느껴진다’는 제 말에 남편이 대답합니다.

“당신은 그렇구나, 난 ‘주님의 기도’가 떠올랐어.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난 오늘 받았거든….”

이번 대림 시기를 어느 때보다 묵상과 기도로 보내겠다고 다짐해놓고는, 이뤄주신 큰일은 생각 못 하고 작은 일에 책임을 묻겠다며 저는 이리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습니다.

베풂과 자비에 인색한 제 모습을 안타까워하시며 예수님은 오늘 제 곁을 그냥 스쳐 지나가셨을 것입니다. 매일 아침 함께 나누는 복음 속에서,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 속에서, 하루를 지내며 겪게 되는 수많은 상황 속에서, 주님은 제 곁을 수없이 오가시며 제가 하는 모든 선택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머물렀다 가시기에 오늘의 저는 참으로 비좁았습니다.

남은 대림 시기를 보내는 동안에 더 버리고 비우고 고치겠습니다. 그래서 다음 번 제 곁을 지나가실 때는 놓치지 않고 그분의 옷자락을 살며시 잡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한나(한나·제1대리구 죽전1동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