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신앙에세이] 카이로스 / 오한나

오한나(한나·제1대리구 죽전1동본당)
입력일 2021-12-15 수정일 2021-12-15 발행일 2021-12-19 제 3274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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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한 해의 끝은 참으로 분주합니다. ‘워킹맘’으로 10년째 교육 관련 일을 하다 보니 학기가 끝나는 12월 이맘때부터는 상상할 수 없는 스케줄과 전화, 몰려드는 여러 업무들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냅니다. ‘전원이 있다면 잠깐 꺼놓고 싶다’는 싱거운 생각도 하며 열심히 시간을 달리다 보면 어느새 드디어 사방에 꽃이 피는 새 학기, 봄이 시작됩니다. 매년 그러려니 하면서도 늘 겪고 싶지 않게 겪어내는 저의 인고의 시간입니다.

제 일상의 속도가 빠르다 보니 숨 가쁜 주중을 보내고 맞이하는 주말의 봉사는, 세상 시간과는 속도가 다른 공간입니다. 동료 교사들을 만나 친교를 나누고 천사같은 아이들과 신앙을 이야기하는 이곳의 시간은 참으로 느리고 편안하여 두 배로 소중하고 세 배로 감사한 시간입니다.

그리스 단어로 시간을 나타내는 말은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져 흘러가는 물리적인 시간인 ‘크로노스’(Kronos)와 어떤 특별한 순간이나 변화를 경험하는 결정적 시간인 ‘카이로스’(Kairos)입니다. 히브리인들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때’(Kairos)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제게도 특별한 순간 ‘카이로스’가 있습니다. 만삭의 몸으로 개신교회에서 반주를 하던 어머니는 ‘한나’라는 이름을 지어 놓고 그렇게 기쁘셨다고 합니다. 제게 모태신앙을 물려주신 것을 참으로 자랑스러워하시던 어머님은 혼인예배가 아닌 혼배미사를 선택한 제게 적잖이 서운함을 비치셨습니다. 그렇게 가톨릭 신자인 남편과 가정을 꾸렸습니다. 잠에서 깬 어느 날, 어두운 방안에 켜져 있던 작은 불빛과 남편 손에 들려 있던 긴 묵주를 보았습니다. ‘그가 믿는 주님과 내가 믿는 주님이 다르지 않다’라는 것을 느꼈고 홀로 조용히 기도하던 남편 모습은 저를 가톨릭 신앙으로 이끌었습니다. 잠결에 흘려보내고 있던 저의 하찮은 시간이 ‘카이로스’로 바뀌는, 결정적 ‘때’(Kairos)가 되던 순간이었습니다.

지난 주일미사 시간, 어린 반주자 손을 통해 친구들이 좋아하던 성가의 익숙한 전주가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교사들의 고운 목소리가 성당에 울려 퍼지고, 친구들이 하나둘 손뼉을 치며 합류합니다. 갑자기 마스크로 입을 가린 채 밝게 웃으며 손뼉을 치는 아이들과 열정을 다해 성가를 부르는 교사들 모습이 ‘느린’ 화면으로 울컥 눈에 들어옵니다. 성당을 가득 메운 ‘카이로스’는 이렇게 ‘순간’이 아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함께 미사를 드리는 우리 모두를 동시에 ‘하느님의 시간’으로 초대하였습니다.

출근시간이 다가오는 오늘도 저는 매우 바쁠 것입니다. 당장 해결해야 하는 일상의 고민거리도 있습니다. 그래도 어느 한 순간이라도 카이로스의 ‘때’ 를 만드는 의미 있는 오늘이 되기를 기도하며 힘차게 하루를 시작합니다.

오한나(한나·제1대리구 죽전1동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