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25)한 해의 끝에서 – 신학적 단상

정희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입력일 2021-12-21 수정일 2021-12-21 발행일 2021-12-25 제 3275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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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늙음과 소멸을 견디어내야 할까?

세속 현자들은 지혜에 의지해 늙음과 소멸을 견디고 있어
지혜가 탐구·배움에서 온다면 신앙인은 어떻게 지혜 구할까
삶과 성경과 교회 전통에서 참 지혜를 찾고 발견해야

세속 현자들은 탐구와 배움에서 터득한 삶의 지혜에 기대어 소멸의 운명을 견디고 있다. 신앙인에게는 성경과 교회의 전통 안에서 참 지혜를 발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 세밑 마음의 풍경

또 한 해가 간다. “세월 참 빠르다.” 요즘 옆 방 동기 신부와 내가 산책하면서 이 상투적 문장을 입버릇처럼 되뇐다. 나는 늙어감이 쓸쓸하고, 몹쓸 병과 오래 싸우고 있는 동기 신부는 기약 없이 견뎌야 하는 병고의 시간이 막막하다. 새해가 온다는 것이 우리 둘 모두에게 그리 반갑지 않다. 새로 시작할 수 있는 희망의 시간이라기보다는 그저 견뎌내야 할 시간으로 다가온다. 이 마음의 감상(感傷)이 건강하지 않다는 사실도 안다. 신앙 안에서 다시 마음을 다잡으려고 애쓴다. 은총으로 허락된 생의 시간을 기쁘고 즐겁게 살아내자고 말이다.

코로나의 시절이 오래 지속되고 있다. 언젠가 곧 극복되리라 희망하며 견뎌온 시간이 벌써 두 해다. 아직 뚜렷한 전망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일상의 많은 것들이 제한되고 변했다. 물론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어떤 환경이든 그에 맞춰 살아낸다. 하지만 조금씩 보이지 않게 내상(內傷)이 쌓이고 있다. 이 무의식적 억압과 상처가 우리와 세상을 어떤 모습으로 변하게 할지 잘 가늠이 되지 않는다. 전망이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시대를 산다.

■ 늙음과 소멸을 견디는 방식 – 세속의 지혜

괜한 청승을 떨며 살고 싶지 않다. 유난하고 호들갑스럽게 응대하고 싶지도 않다. 그저 의연하게 생의 시간을 살아내자고 자주 다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틈이 보이면, 늙음과 소멸의 화두는 나를 사로잡는다. 노년과 죽음에 관한 좋은 책들이 나오면 자꾸만 눈길이 간다. 다른 사람들은, 세상의 현자들과 학자들은 어떻게 그것을 견디고 성찰하는지 늘 궁금하다.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를 읽었다. 소설가이자 철학자답게 저자는 노년의 생에 대한 통찰과 지혜를 아름답고 설득력 있게 들려준다. “과학 기술이 늘려준 것은 수명이 아니라 노년이다.” “삶의 변화를 꿈꾸기보다는 이미 있는 좋은 것들과 오래오래 함께하고 싶다.” “나이가 들어도 탐구와 관찰의 정신을 유지함으로써 의식을 풍요롭게 채울 수는 있다.”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찰나의 영원뿐이다. 사랑하는 동안, 창조하는 동안 우리는 불멸이다.” 이 몇 문장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저자의 생각과 사유에 공감하고 동의하는 것과 실제 내 생활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과 마음 사이에는 여전히 간극이 있다. 공감과 동의는 위로와 힘이 되지만 실제 내 삶의 현실에서 그렇게 살아내는 일은 전적으로 내 몫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신의 늙음과 소멸을 견딘다. 어느 서정 시인은 시적 탐구 속에서 자기 생의 여정을 건너가고 있다.

이기철 시인의 시집 「영원 아래서 잠시」를 읽었다. 노 시인의 정서적 회고와 담백한 성찰을 담은 시들과 당대의 탁월한 평론가 김우창의 긴 해설문이 인상적이었다. “수많은 책과 금언들을 지나왔지만/ 아무도 아름답게 세상 건너는 걸음걸이를/ 가르쳐 준 사람이 없다”(「이슬로 손을 씻는 저녁에」)고 탄식하는 시인은 자연을 ‘친구’와 ‘연인’으로 여기며, 자연의 ‘노복’이자 ‘도반’으로 살았다고 고백한다.(「생활에 드리는 목례」) “시는 현실의 한순간을 포착하고, 그 포착을 통하여 그 순간은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시간, 더 나아가 영원한 것으로 변성 승화(昇華)하는 시간의 길 찾기”(김우창)라면, 이기철 시인은 자연과의 교감과 일상의 순간에 관한 시적 탐구를 통해 잠시의 생을 견디며 영원으로 건너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시인은 소박하고 담담하게 진술한다. “나와 이 소목상(小木床)의 가족사는 오래되었다/ 나는 사람과 세계를 사랑하는 법을 이 평면의 지형학에서 배웠다”고(「책상의 가족사」), “파꽃을 보면 피는 일이 아픔이라는 걸 안다”고(「백서(帛書) - 시에게」), 자신의 “하루는 언제나 저녁이 오는 방향으로” 걷는 일이지만 “어김없이 오는 가을의 규칙을 생각”한다고 말이다.(「가을의 규칙」) 시인은 “컬러판 인생을 꿈꾸지 않았다/ 강물 휘는 어느 곳에서는/ 들깻잎같이 푸른 삶도 있으리라 믿었다”며(「살아오면서 나는 아무것도 미워하지 않았다」), “시 한 줄로 세상을 요약해 보이고 싶지만/ 세상은 일만 페이지의 행에도 저 자신을 담지 않”는다고 탄식한다.(「노령에 눕다 – 장수에서」) 시인이 보여주는, 삶을 향한 시적 탐구의 순정함과 정결함에 ‘경애의 마음’이 든다.

때때로 무신론자들이 보여주는, 삶의 의미에 대한 정직한 절망과 냉정한 현실 인식이 더 서늘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존 그레이의 「고양이 철학」을 다시 읽었다. 그의 중요 저작인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의 문제의식을 고양이에 빗대어 대중적으로 풀어낸 책이다. 의식의 비극적 속성과 인간 정신의 나약함과 무기력함을 그는 여전히 말한다. 의미와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 의식의 본능이 외려 인간을 불안과 절망으로 이끌게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좋은 삶이란 비극적인 우연성을 헤쳐나가는 데 있으며, 영적인 삶은 의미를 찾아 헤매는 삶이 아니라 의미에서 놓여나는 삶”(「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이라는 그의 핵심 주장이 거듭 반복되고 있다. “삶의 의미는 우연히 찾아와서 그게 무엇인지 당신이 알기 전에 사라져버리는 촉감과 향기”(「고양이 철학」)일 뿐이다. 행복과 의미를 추구하지 말고 그저 사심 없는 이기주의자로 살아가라고 말한다. “고양이는 오직 자기 자신과 자기가 사랑하는 다른 것들에만 관심을 가진다는 점에서 이기주의자다. 고양이는 보존하고 확대하려고 애쓰는 자아상이 없다는 점에서 사심이 없다. 고양이는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심 없이 자기 자신으로 살아간다.”(「고양이 철학」) 욕심 없이, 사심 없이 그저 자기 자신으로 사는 일의 아름다움을 존 그레이는 나직이 설파한다.

■ 지혜의 탐구 – 신앙의 지혜

세속의 현자들은 삶의 지혜에 기대어 소멸의 운명을 견디고 있다. 지혜는 탐구와 배움에서 온다. 세속의 지혜와 신앙의 지혜는 서로 다른 것인가? “지혜는 다정한 영”(지혜 1,6)이며, “모든 지혜는 주님에게서 온다”(집회 1,1)는데, 시간 속에서 늙음과 소멸의 운명을 견디며 영원으로 건너가려는 신앙인에게 지혜의 탐구는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일까? “모든 것이 허무요 바람을 잡는 일”(코헬 1,14)인 세상에서, 하느님께 의탁하고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며 성령의 인도에 따른다는 것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지혜는 자기에게 맞갖은 이들을 스스로 찾아 돌아다니고/ 그들이 다니는 길에서 상냥하게 모습을 드러내며/ 그들의 모든 생각 속에서 그들을 만나 준다”(지혜 6,16).

지혜는 생의 모든 길목에서 우리와 함께한다. 그런데 과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성경과 교회의 전통과 이 시대의 삶 안에서 어떻게 참 지혜를 찾고 발견하고 있는가? 신앙 공부와 세상 공부에 대한 마음을 다시 가다듬는다. 어쩌면 탐구와 공부가 늙음과 소멸을 견디며 영원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의 하나가 아닐까?

정희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