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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1. 윤공희 대주교(2)

정리 남재성 기자
입력일 2022-03-30 수정일 2022-04-13 발행일 2022-04-03 제 3288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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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사제의 삶, 후회한 적 없어
서포에 있는 예비신학생 기숙사에 살며
평양 시내 성모보통학교 통학하며 공부
음악 활동도 열심했던 덕원신학교 시절
대림 시기에 부르던 성가 아직도 선명해

1939년경 덕원신학교 학생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윤공희 대주교(앞에서 셋째줄 왼쪽에서 두 번째). 광주대교구 제공

■ 사제성소를 싹틔우다

왜 사제가 되고 싶었을까. 사제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언제 했을까. 난 사실 특별히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그냥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참 단순한 이유였다. 초등학생 시절, 학교 선생님들과 수녀님들께선 내가 초등학교 3~4학년에 올라갈 즈음부터 ‘신학교를 갔다 나온 네 맏형을 대신해 네가 신부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꾸준히 해주셨다.

나는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났다. 진남포에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운영한 기관들이 많이 있었다. 나는 그중 하나인 해성학교라는 초등학교를 나왔다. 신자들과 수녀님들이 선생님으로 계셨고, 수녀회 원장수녀님도 내가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있는 분이셨다.

어른들의 권유와 해성학교의 신앙적인 분위기 속에서 ‘내가 신부가 되는 것이 당연한가 보다, 사제의 길이 좋은가 보다’라는 마음을 갖게 됐다.

그리고 예비신학생으로, 서포에 있는 예비신학생 기숙사에 들어갔다. 초가집 두 채로 만든 기숙사였다. 당시 평양교구에서는 초등학교 6학년에 올라가는 아이들 중에서 예비신학생을 모집하여 서포로 보냈다. 서포는 평양에서 한 20리가량 북쪽에 있는 조그만 마을인데, 거기에 평양교구청(메리놀 외방 전교회 한국지부)과 서포본당이 있었다. 메리놀회 소속으로 서포본당 주임을 맡고 계시던 노요셉 신부님이 예비 신학생 지도 신부를 겸하고 계셨다.

예비신학생들은 기차로 한 정거장 남쪽에 있는 평양 시내 성모보통학교에 통학하며 공부했다. 6학년 공부가 끝나면 서울 동성신학교나 덕원신학교에 입학했다. 우리 학년 중에는 11명이 예비신학교에 입학했는데, 그중 네 명(이종순, 나, 장대익, 김진하)만이 신부가 됐다.

내가 사제의 길을 가지 않았으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신부를 안 했으면 귀여운 아이들을 가르치는 초등학교 교사를 했겠구나’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여태껏 살아오면서 사제가 된 것을 후회한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매일매일이 그저 좋았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여기저기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라 생각한다.

1936년 평양 성모보통학교 6학년 예비신학생 때의 윤공희 대주교. 우측은 은사인 노요셉 신부다.

■ 덕원신학교의 추억

덕원신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성가를 부르던 기억이 가장 먼저 난다. 내가 목소리가 좀 좋았다. 노래도 잘 불렀다. 신학생 중에 두 명만 선발하던 성가대 주창자(Cantor·선창)에 뽑혀 주교님이 집전하시는 대미사 때면 삭발례를 받은 후에는 카파(전례복)를 입고 노래할 수 있었다. 카파를 입으려 제의실에 들어설 때면 그렇게 마음이 떨리곤 했다.

서포에서 예비신학생 과정을 거쳐 덕원신학교에 들어갔다. 신학생으로서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그만큼 음악부 활동도 열심히 했다. 멋있어 보여서 무턱대고 클라리넷을 배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는 결핵 등에 감염되기도 쉬운 때여서 신부님들께서 어린 학생들은 호흡기로 부는 관악기는 다루지 않았으면 한다고 조언해주셨다. 그래서 바이올린을 배웠는데 음정이나 겨우 잡는 수준이었다. 오케스트라 때에 그래도 박자는 기가 막히게 맞춘다고 칭찬을 받았다. 성가 반주로 신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서 ‘풍금’(오르간) 등 이것저것 많은 악기를 다뤄 봤지만 난 악기 연주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역시나 성가 선창! 매주 성가대 연습을 하며 많은 노래를 불렀지만, 특히 대림 시기면 불렀던 ‘Rorate caeli desuper. et nubes pluant justum’(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라는 노래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종종 부르기도 한다.

이렇게 노래를 곧잘 부르다 보니, 흔히 듣던 대중가요도 흥얼거릴 때가 있었다. 한번은 학교에서 당시 유행하던 가수 현인씨의 ‘신라의 달밤’을 불렀다가 신학교 선생님께 야단을 맞기도 했다. 그때 서인석 신부의 부친인 서정덕 선생께서 신학교 교사로 계셨는데, 그분께 ‘신학생이 품위 없이 무슨 그런 유행가를 부르느냐’고 혼쭐이 나기도 했다.

덕원신학교에서 생활하던 중 1942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평양교구 전교를 맡고 있던 메리놀 외방 전교회 신부님들은 일제히 미국으로 소환됐다. 때문에 교구에는 신부가 많이 부족해져서 서울 쪽에서 신부를 파견해 도와주는 곤란한 상황이 됐다.

그런 상황에서 평양교구장으로 처음으로 한국인 주교님이 임명되셨다. 홍용호 주교님이었다. 홍 주교님께선 열성적으로 신학생 모집을 독려하셨고, 덕분에 많은 신학생들이 모집됐다.

정리 남재성 기자 namj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