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덕원신학교의 추억
덕원신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성가를 부르던 기억이 가장 먼저 난다. 내가 목소리가 좀 좋았다. 노래도 잘 불렀다. 신학생 중에 두 명만 선발하던 성가대 주창자(Cantor·선창)에 뽑혀 주교님이 집전하시는 대미사 때면 삭발례를 받은 후에는 카파(전례복)를 입고 노래할 수 있었다. 카파를 입으려 제의실에 들어설 때면 그렇게 마음이 떨리곤 했다.
서포에서 예비신학생 과정을 거쳐 덕원신학교에 들어갔다. 신학생으로서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그만큼 음악부 활동도 열심히 했다. 멋있어 보여서 무턱대고 클라리넷을 배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는 결핵 등에 감염되기도 쉬운 때여서 신부님들께서 어린 학생들은 호흡기로 부는 관악기는 다루지 않았으면 한다고 조언해주셨다. 그래서 바이올린을 배웠는데 음정이나 겨우 잡는 수준이었다. 오케스트라 때에 그래도 박자는 기가 막히게 맞춘다고 칭찬을 받았다. 성가 반주로 신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서 ‘풍금’(오르간) 등 이것저것 많은 악기를 다뤄 봤지만 난 악기 연주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역시나 성가 선창! 매주 성가대 연습을 하며 많은 노래를 불렀지만, 특히 대림 시기면 불렀던 ‘Rorate caeli desuper. et nubes pluant justum’(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라는 노래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종종 부르기도 한다.
이렇게 노래를 곧잘 부르다 보니, 흔히 듣던 대중가요도 흥얼거릴 때가 있었다. 한번은 학교에서 당시 유행하던 가수 현인씨의 ‘신라의 달밤’을 불렀다가 신학교 선생님께 야단을 맞기도 했다. 그때 서인석 신부의 부친인 서정덕 선생께서 신학교 교사로 계셨는데, 그분께 ‘신학생이 품위 없이 무슨 그런 유행가를 부르느냐’고 혼쭐이 나기도 했다.
덕원신학교에서 생활하던 중 1942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평양교구 전교를 맡고 있던 메리놀 외방 전교회 신부님들은 일제히 미국으로 소환됐다. 때문에 교구에는 신부가 많이 부족해져서 서울 쪽에서 신부를 파견해 도와주는 곤란한 상황이 됐다.
그런 상황에서 평양교구장으로 처음으로 한국인 주교님이 임명되셨다. 홍용호 주교님이었다. 홍 주교님께선 열성적으로 신학생 모집을 독려하셨고, 덕분에 많은 신학생들이 모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