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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1. 윤공희 대주교(3)

정리 남재성 기자
입력일 2022-04-06 수정일 2022-04-13 발행일 2022-04-10 제 3289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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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차 평양교구 재건을 다짐하며 고향을 떠나오다
공산정권의 한국교회 탄압 점점 심해져
부제 둘은 남아 신자들 돌보려 했으나 
신부들도 줄이어 잡혀가는 긴박한 상황
지학순 신학생과 천신만고 끝에 월남
서울 대신학교에서 수학 후 사제수품

1950년 3월 20일 사제 서품식 후 윤공희 대주교가 고향 진남포 교우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광주대교구 제공

■ 해방 무렵의 평양교구

나는 평양교구 소속 신학생으로 덕원신학교에서 공부했다. 평양교구가 메리놀 외방 전교회 신부님들의 전교와 후원 등으로 겨우 꾸려지는 시기였다. 1943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홍용호 주교님께서 평양교구장이 되셨다. 홍 주교님의 노력으로 신학생들도 많이 모였다. 히지만 메리놀 외방 전교회(메리놀회)의 지원 없이 신학생 양성을 위한 재정을 마련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컸다. 교구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신학생 양성비 모금을 위한 캠페인도 벌였다. 당시 교구 총대리 신부님께선 각 본당을 돌면서 신자들에게 신학생 양성과 그 모금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때 캠페인 표어가 ‘우리 신학생은 우리 손으로’였다. 큰 본당이든 작은 본당이든 각 본당의 규모와 신자 개개인의 형편에 맞게 십시일반(十匙一飯) 모금을 했다. 그 결과 재정 문제는 단번에 해결이 됐다. 신학생을 귀하게 여긴 홍 주교님과 전쟁 속 힘든 시기임에도 더욱 마음을 모으고 행동한 평양교구 신자들 덕분이었다. 교구의 어려운 상황은 신자들에게는 이러한 각성의 계기가 됐다.

1945년 8월 꿈에 그리던 해방이 왔다. 태평양 전쟁 때문에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던 메리놀회 신부님들은 즉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들은 평양교구로는 돌아갈 수 없어 서울에 머물러야 했다.

해방이 되고 소련군이 이북에 침입해 들어오자, 얼마 안 돼서 평양교구에서는 첫 희생자가 발생했다. 교구 재단법인 사무를 전담하고 평신도로서 홍용호 주교님의 비서를 맡아 교구청에서 근무하던 강창희씨가 어느 날 새벽, 평양시내 한 큰길 모퉁이에서 총살된 채로 발견됐다. 마침 주교관에서 지내고 있던 나는 소식을 듣고 장선흥 부제와 함께 달려가서 시신을 수습했다. 총알이 가슴에서 잔등으로 뚫고 나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제6대 평양교구장(대목구장) 홍용호 주교.

■ 공산정권의 박해와 고난

북한에서는 공산정권에 의한 종교박해가 점점 심해져 갔다. 평양교구와 덕원수도원에 대한 억압도 심해졌다. 1949년 5월 7일 덕원에서 함흥교구장 겸 덕원수도원자치구장이신 신상원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와 독일인 신부들이 납치되고, 이어서 모든 외국인 신부와 수사들 그리고 한국 신부들까지 다 납치됐다. 수도원과 신학교는 강제 폐쇄됐다. 덕원신학교에 있던 우리 평양교구 소속 신학생들은 그 길로 기차를 타고 평양으로 돌아왔는데, 같은 날 오후에 평양교구장 홍용호 주교님이 행방불명(납치)됐다.

우리가 평양주교관으로 가니, 주교님이 안 계신 집에 교구 신부님들이 침통한 표정으로 모여 있었다. 주교님이 공석이 되어 교구 책임자가 된 김필현 신부님이 신학생들에게, 각자 재간을 다해 월남을 해서 공부를 계속하라고 지시하셨다. 그러면서 부제 둘(장선흥과 나)에게는 그대로 남아, 신부들이 다 잡혀가게 되면 신자들을 좀 돌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장 부제는 빈집이 된 주교관을 지키기로 하고, 나는 고향 진남포로 내려가 조문국 본당 신부님과 함께 지내기로 했다.

그렇게 지내고 있는 동안 안타깝게도 김필현 신부님을 비롯한 다른 신부님들도 하나둘 잡혀가기 시작했다. 김필현 신부님 다음으로 (그와 로마에서 동기였던) 박용옥 신부님이 교회법에 따라 교구 책임을 맡게 됐다. 박용옥 신부님은 이처럼 교구 형편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결국은 신부들이 하나도 남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셨다. 우리 두 부제들도 결국 다 붙잡혀가고 말 것이니, 부제 둘도 월남을 해서 신부가 되어 장차 평양교구의 재건을 위해 대비하는 것이 낫겠다며 남쪽으로 피난하라고 하셨다.

■ 1950년 사제서품

1950년 1월, 나는 지학순 신학생(후에 원주교구장 주교가 됨)과 함께 천신만고 끝에 월남에 성공하였다.

이어 3월 20일, 나는 서울 대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서울 중림동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했다. 고향인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월남한 신자들과 평양 출신 신우회원들이 성대히 축하해줬다. 첫 소임지는 한국천주교회의 중추인 명동본당의 보좌였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 겨우 3개월, 짧은 기간이었지만 명동본당 보좌신부로 신명나게 사목을 수행했다.

정리 남재성 기자 namj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