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1. 윤공희 대주교(8·끝)

정리 남재성 기자
입력일 2022-05-10 수정일 2022-05-10 발행일 2022-05-15 제 3294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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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순간마다 협조자를 통해 이끌어주신 하느님
정부가 막아섰던 교황의 금남로 방문
시민들 위로하고자 강경하게 성사시켜
광주의 참상과 진실 알리기 위해 노력
“어떤 이유도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어”

1984년 5월 4일 광주무등경기장에서 성인입교예식미사 집전을 위해 제단으로 향하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윤공희 대주교. 광주대교구 제공

■ 교황 방한의 뒷이야기

1984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방한을 준비할 때 큰 역할을 하신 분이 있다. 전임 춘천교구장이셨던 장익(십자가의 요한) 주교님이다. 그때 로마에서 유학을 하고 있었던 장 주교님은 교황님의 해외 순방 업무를 총괄하던 바티칸 방송국장 신부와 함께 교황님의 방한 계획과 일정을 논의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 정부는 적극적으로 교황님의 한국 방문을 후원했다.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거세지고 신군부 정권에 대해 말들이 많았던 시기였던 만큼, 정부는 교황 방한을 일종의 이미지 개선의 기회로 여겼다. 얼마나 적극적이었던지 교황님 경호팀을 청와대에서 직접 꾸려서 준비할 정도였다.

교황님의 방한에 앞서 이 업무를 담당한 바티칸 방송국장 신부가 먼저 한국을 방문했다. 교황님의 일정을 사전에 똑같이 따라가면서 교통편이나 세부 일정에 대한 답사와 보완을 하기 위해서였다. 청와대 경호팀과도 이견을 조율할 필요도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역시 ‘금남로’였다.

교황님께서는 광주공항에서 출발, 금남로를 통과하면서 카퍼레이드를 진행하고 광주무등경기장으로 이동해 미사를 봉헌하도록 동선을 짰다. 이를 알게 된 정부 관계자들이 금남로 카퍼레이드를 취소해 달라고 요청했다. 당연히, 담당 신부는 카퍼레이드를 막는다면 정식으로 항의하겠다며 완강한 태도를 보였고 결국 교황님께서는 무사히 금남로를 지나가실 수 있었다.

1984년 5월 4일, 교황님은 광주무등경기장에서 미사를 주례하시면서 예비신자들에게 세례도 주셨다. 이날 강론 때 교황님은 ‘우리는 인간으로서 서로를 용서해야 된다’는 말씀을 하셨다. 광주의 아픈 역사를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인 것이다. ‘용서라는 것은 꼭 해야 하는데 참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세례를 받은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을 받았다고 할 수 있으니, 하느님의 은혜로 용서를 할 줄 알아야 된다’고 하셨다.

나중에 이를 들은 광주시민들은 ‘사건의 책임자들이 잘못을 시인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느냐’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 그리고 그 이후

2000년 광주대교구장에서 물러날 때까지 많은 일을 해 왔지만, 그중에 큰 숙제가 광주의 참상과 진실을 알리고 기억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내 후임 최창무(안드레아) 대주교님은 그 노력을 이어받아 교구 차원에서 남동성당을 5·18기념성당으로 지정했다. 그리고 나도 5월이면 이곳에서 미사를 드리고 교우들에게 5·18과 관련된 강론을 했다. 강론의 요지는 이렇다.

5·18이라는 큰 역사적 시련을 우리가 항상 되새겨야 한다. 과오를 기억하지 못하면 또 다시 잘못을 거듭할 수 있다. 독일은 유다인 학살과 같은 과오를 계속 인정하고 사죄를 청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 자신들이 다시는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않겠다 되새기고 있다. 우리도 5·18민주화운동의 진상과 의미를 항상 마음에 새겨야 한다. 그리고 이를 행하기 위해서는 미움을 내려놓는 화해와 화합의 정신도 필요하다.

구순이 넘는 세월을 살아오며, 나는 ‘광주와 5·18’에 관해 수없이 질문을 받았다. 이에 관련된 많은 이야기를 지금껏 해왔지만 분명한 것은 어떤 이유로도, 어떤 목적이라도 폭력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이 오늘날에는 5·18에 대해 왜곡된 정보를 가지고 잘못된 생각을 가진 이들, 이로 인해 분열되고 갈라서는 모습을 보면 참 안타깝다. 진실이 알려지는데도 이를 외면하고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분열되는 것을 어떻게 극복하고 화합할 것인가. 이것은 우리의 큰 과제일 것이다.

사목 일선에서 은퇴한 원로 주교로 내가 무언가 할 일이 더 있는가. 2001년 가톨릭신문 기자가 인터뷰를 청하면서 그런 질문을 했다. 무언가 대단한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영어, 일본어, 라틴어를 조금 할 수 있으니 그저 ‘책 몇 권 정도 번역해볼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컴퓨터 워드프로세서를 좀 배워두면 글 몇 자 좀 빠르게 적을 수 있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모니터 화면만 보면 눈이 따갑고 머리가 아파서 포기했다. 2022년에 이르기까지 결국 번역한 게 하나도 없는 셈이다. 그나마 최근 평양교구에 관한 기억을 구술로 정리한 책이 나와서 참 다행한 일이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어려움에 부닥칠 때마다, 당신의 도움을 주변 사람을 통해 보내주셨다. 아무것도 없는 신설 수원교구의 교구민들이 보여준 열성과 해외 원조의 손길들. 교구청에 빚쟁이들이 들이닥치던 서울대교구장 서리 시절. 흔쾌히 도움을 주셨던 이웃 교구와 수도회의 장상들. 이 땅에 역사에 남을 상처가 생기자 ‘평화의 사도’이신 교황님을 보내 주셨던 것. 이렇게 쓰인 내 얘기에 관심 가져 지켜봐 주시고 또 항상 기도해 주시는 모든 분에게,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이끄시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1테살 5,16-18)

정리 남재성 기자 namj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