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민족·화해·일치] 도보순례 중 떠오르는 상념 / 박천조

박천조 그레고리오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연구위원
입력일 2022-05-17 수정일 2022-05-18 발행일 2022-05-22 제 3295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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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어린이날에 아내와 함께 서소문순교성지부터 당고개순교성지, 그리고 새남터순교성지까지 묵주기도를 하며 걸어 보았습니다. 기도 지향은 ‘인류의 평화’, ‘민족의 화해와 일치’, ‘신앙공동체의 회복’, ‘가정공동체의 평안’ 순서로 정했습니다.

출발지인 서소문순교성지에서 여러 순교자들의 이름을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38년의 기간을 두고 모두가 치명하셨던 정약종(아우구스티노) 가정이 기억납니다. 대를 이어 시간의 흐름을 넘어 하느님의 부르심을 당당히 맞이했던 성가정의 모습입니다. 지하의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에서는 조각품마다 놓여 있던 묵상내용을 읊조려 보기도 했습니다.

당고개순교성지에서는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며 또 다른 순교자들을 생각했습니다. 마지막 목적지인 새남터순교성지에서는 순례자를 위한 미사를 드리며 짧은 여정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도보순례 가운데 문득문득 어깨가 으스러지고 발이 부러지는 고문을 당하셨을 순교자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걸으셨을까 상상을 했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장소에서 처형을 시켰던 당시 위정자들의 잔혹함에 몸서리가 쳐졌습니다. 순교자들이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이렇게 참혹한 죽음을 당해야 했을까, 2000년 전 예수님 역시도 아무런 죄 없이 죽임을 당하셨는데 오늘날에는 과연 이런 죽음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피조물들이 같은 인간들을 대상으로 벌이는 이 잔혹함을 어떻게 끝내야 할까?

해답은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한켠에 씌어 있던 글귀로부터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한 사회에는 다양한 사상과 신념이 존재합니다. 다양한 사상이 존재하는 사회에는 필연적으로 대립과 갈등이 발생하며, 때로는 마찰과 충돌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고 짓밟는 것이라면 인간발전을 위한 공동선은 위기에 처할 것입니다….

타인의 다른 생각은 우리를 두렵게 만들지만, 그 다른 생각이 우리를 성장시킵니다”라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즉, 생각의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거만함과 오만함이 인간의 존엄성마저 침해하는 박해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거만한 눈과 오만한 마음 그리고 악인들의 개간지는 죄악일 뿐이다”(잠언 21,4)라는 말씀을 다시금 되새겨 봅니다.

박천조 그레고리오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