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 (11)청주교구 배티성지와 최양업 신부 박물관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입력일 2022-05-25 수정일 2022-05-25 발행일 2022-05-29 제 3296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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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숨 바쳐 전한 그 신앙, 지금 우리 곁에 있으니…

‘배나무 고개’로 불렸던 배티성지
차령산맥으로 둘러싸인 교우촌 자리
소나무 숲과 어우러져 아름다움 더해

박물관 맞은 편 낮은 산에서 만날 수 있는 최양업 신부 동상. 지팡이를 짚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최양업 신부의 모습을 표현했다.

올해의 주님 부활 시기를 마감하면서 배티순교성지를 산책했다. 배티 지명은 마을 어귀에 꿀배나무가 많아서 ‘배나무 고개’로 불리다가 배티로 굳어지게 되었다. 충북 진천군 배티 지역에는 1820~1830년대부터 교우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배티는 내륙 교통의 요지며 차령산맥으로 둘러싸여 박해 때 교우들이 피신하기에 좋은 장소였다. 배티 교우촌은 1837년 성 모방 신부(Pierre Philibert Maubant, 1803~1839, 파리 외방 전교회)에 의해 공소로 설정되었다.

첩첩산중에 위치한 배티에서는 우리나라 첫 번째 신학생이며 두 번째 사제인 가경자(可敬者) 최양업 신부(토마스, 1821~1861)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소년 최양업은 김대건, 최방제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1836년 마카오로 유학하여 1849년 4월 중국 상하이 예수회 신학원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잠시 요동의 차쿠성당에서 사목하다가 귀국한 최양업 신부는 진천을 사목 중심지로 삼아 여러 지역을 순방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서양선교사들이 갈 수 없는 교우촌을 방문하여 열정적으로 교우들을 돌보았다.

배티가 순교성지로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이후였다. 1976년 진천본당에 부임하여 배티에 큰 관심을 기울이던 장봉훈 신부(가브리엘·1947~)가 1993년 배티 사적지 전담으로 다시 임명되었다. 본격적으로 성지를 조성하던 중 장 신부는 1999년 제3대 청주교구장 주교로 서임되었고 지난 4월 이임하기 전까지 배티순교성지 조성에 앞장섰다.

성지의 옛 성당에는 노아와 요나, 예수 탄생과 수난 등을 담은 아름다운 유리화(최영심 제작) 등이 설치되어 있다. 주변의 소나무 숲을 따라 올라가면 성모동산이 있다. 산세 지형에 따라 동산을 자연스럽게 만들어 사람들이 차분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선종 150주년 기념성당’(2012년 준공, 정종철 설계)은 지역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을 기원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내부에서는 최 신부 일대기와 관련된 순교자들을 표현한 유리화(최성호 제작)를 볼 수 있다.

2014년 개관한 ‘최양업 신부 박물관’은 두 개의 건물을 연결하여 만들었다. 한 건물은 최양업 신학생이 마카오에서 공부했던 신학교(파리 외방 전교회 극동 대표부)를 참조한 것이며, 다른 것은 마카오의 성 안토니오 성당을 본뜬 것이다. 박물관 앞의 돌다리 양업교는 마카오와 조선을 오가던 배를, 흐르는 시냇물은 황해를 상징한다.

최양업 신부 박물관.

박물관은 전체 6개관으로 나누어져 있다. 1관 한국천주교회사, 2관 최양업 신부 생애, 3관 사목활동 체험, 4관 최양업 신부 유물, 5관 멀티홀, 6관 기획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실 끝에는 최양업 신부와 진천 배티 순교자들 그리고 모든 신앙선조를 위한 기도 공간이 있다.

특히 박물관에는 최양업 신부의 신앙이 서려있는 라틴어 서한 20점과 한국 가톨릭교회의 귀중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기도실에는 박해시기 교우촌의 움막에서 두 팔 벌리고 미사를 집전하는 최양업 신부의 동상이 있다. 이곳에서 하느님과 성모님, 최양업 신부에게 편지를 쓰고 봉헌할 수 있다

박물관 맞은 편 낮은 산의 ‘103위 성인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야외 제단과 십자가의 길 14처가 있다. 그곳에서는 지팡이를 짚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길 떠나는 최양업 신부를 만날 수 있다.

최양업 신부 동상 옆에는 2칸의 초가집이 복원되어 있다. 1850년에는 다블뤼 신부(Daveluy, 안토니오, 1818~1866, 1857년 주교 수품)가 배티 교우촌 안에 최초의 조선대목구 신학교 건물을 매입하고 배티본당도 설립했는데, 초가집은 그때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착한 목자 최양업 신부는 1851년 진천 백곡면에 머물며 순교자들의 행적에 관한 자료를 수집 정리하다가 1852~1853년 무렵에는 사목 중심지를 진천 배티로 옮겼다. 1853년에 다블뤼 신부에 이어 최양업 신부가 배티본당 주임 겸 신학교 지도 사제로 임명되었다. 1855년에는 거처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가 1858년 이후에는 경상도 지역으로 다시 이전하였다. 그는 충청도, 경기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등 5도에 흩어진 127곳의 교우촌을 방문하였다. 사제생활 12년 동안 9만 리를 걸어 다니며 복음을 전했던 최양업 신부는 경북 문경 교우촌(혹은 충북 진천)에서 과로와 질병으로 40세에 하느님 품에 안겼다. 초대교회 성 바오로 사도와 선교활동의 수호성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 Xavier, 1506~1552)를 닮은 최양업 신부는 ‘백색의 순교자’라고 부를 수 있다.

최양업 신부는 글을 알지 못하는 교우들을 위해 여러 편의 천주가사(天主歌辭)를 지었다. 이 책은 우리나라 전통 가사 형식을 빌려 주요 교리를 외우기 쉽고 알기 쉽게 설명한 교리서이다. 또한 한국천주교회 최초의 한글 기도서 「천주성교공과」(天主聖敎功課)와 한글 교리서인 「성교요리문답」(聖敎要理文答)의 번역과 편찬 작업에도 참여하였다.

최양업 신부가 머물렀던 사제관 마당에는 세 명의 흉상이 있다. 최 신부의 아버지 성 최경환(프란치스코, 1804~1839)과 어머니 복자 이성례(마리아, 1801~1840), 가경자 최양업 신부의 상이다. 최양업은 6형제 가운데서 장남으로 성가정에서 태어났다. 증조부 때부터 신앙을 받아들인 가족은 1827년에 박해를 피해 충청도 청양 다락골을 떠나 서울 회현동과 강원도 김성을 거쳐 경기도 부평, 과천 수리산으로 이사하면서 신앙생활을 다졌다.

배티순교성지에서는 최양업 신부와 가족들, 박해 시대에 이 산중에 피신해 온 신앙선조들과 유명·무명 순교자들을 떠올리며 기도할 수 있다. 특히 박물관을 둘러보면 하느님께 대한 강한 믿음으로 교우들을 사랑하며 품어주었던 참 사제요 목자인 최양업 신부를 가까이서 만날 수 있다. 거룩한 땅 배티순교성지에서 신앙은 하느님의 은총이며 신앙선조들이 건네준 고귀한 선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앙의 선물을 우리가 어떻게 잘 품고 가꾸어 후손들에게 전해 주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한다.

지역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을 기원하기 위해 2012년 준공된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기념성당’ 내부 전경.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