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신앙에세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사도 17,23) / 전용혜

전용혜 로사,제2대리구 서판교본당
입력일 2022-05-25 수정일 2022-05-25 발행일 2022-05-29 제 3296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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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메이드 인 이탈리아(Made in Italy) ‘예쁜 상본’(像本)을 모으던 소녀였다. 중학교 때 친구로부터 생일 카드로 받은 상본은 처음 보는 그림과 내용이었다. 노래하는 천사와 나팔, 성경과 십자가, 성작과 성체, 밀과 포도, 별과 기도하는 어린이들, 그리고 텍스트로 보이는 ‘Α Ω’(알파 오메가), ‘κύ ριέ μου θεέ μου’(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αυτό εί ναι το σώ μα μου’(이는 내 몸), ‘ο ναός μου’(나의 성전), ‘τριά δα’(삼위일체) 등의 글자들이 더해져 분명 어떤 서사(敍事)를 담은 듯했다.

글자 내용은 훗날 알게 되었지만, 일반 카드와는 다른 기운의 상본은 나를 대신한 말과 메신저가 되었다. 명동대성당 성물방을 오가며 열심히 상본을 수집했고 성 바오로 서원 쇼윈도 안의 기도하던 성모님은 곧 ‘나’로 빙의되어 책꽂이에 모셔진 나의 첫 번째 성물이 되었다. 그렇게 점차 내 책상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사도 17,23)라는 제단이 되어 갔다.

어렸고, 열심한 불교 신자였던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결혼하면 성당에 다녀야겠다’라는 막연한 생각 속에서 그 시절은 지나갔다. 결혼하고 간호사로 근무하는 가운데 박사 학위를 위해 공부하는 남편과의 신혼생활은 힘겨웠다. 콩나물을 손에 들고 머리를 떼야 하는지 꼬리를 잘라야 하는지도 몰랐던 그 시절은 혼돈 그 자체였다. 기도가 필요했고 아무도 없는 성당에서 나는 숨을 쉴 수가 있었다.

그때마다 성당 한쪽에서 기도하는 한 사람이 자주 목격되었고, 어느 날 어둠 속에서만 보던 그 실루엣과 마주쳤다. 어디서 본 듯한데 너무도 다른 모습으로 나를 멈칫하게 만든 사람은 바로 수녀원 입회를 앞둔 초등학교 친구였다. 이 시간에! 이 공간에! 우리는 아무 말 없이도 안부를 대신할 수 있었다. 고단했던 내게 입교를 권했고 교리반에서 늘 나를 기다리며 내 곁을 지켰다. 그리고 세례식이 있던 날 아무 인사도 없이 떠났다.

세례는 받았지만 불규칙한 간호사 근무, 첫 아이 출산은 세례 후 첫 고백까지 또 몇 년의 시간이 흐르게 했다. 첫 고해성사 때 “세례받고 첫 고백입니다”라며 당당하게 그간의 시간을 잘 정리한 메모를 들고 시작했지만, 고백문을 더 이상 읽지 못했다. 안도의 눈물이었을까! 한참을 기다려주신 신부님은 “반갑습니다. 앞으로 미사 잘 나오시면 됩니다”하는 말씀을 주셨다. 그리고 끝이 났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준비한 모든 것이 무색해졌다.

그리고 나는 조금씩 새로운 것을 배울 준비가 된 듯했다. 하느님 앞에 아무것도 필요 없음을, 잘못을 묻지 않는 것이 ‘용서’라는 것을.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다르다는 것을. 나는 처음으로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새털처럼 가벼워진 내 몸은 하늘을 날고 있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

‘하느님 감사합니다.’

전용혜 로사,제2대리구 서판교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