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 (12)수원교구 ‘은이성지와 김대건 기념관’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입력일 2022-06-08 수정일 2022-06-13 발행일 2022-06-12 제 3298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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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의 삶 새겨져 있는 첩첩산중 마을
첫 한국인 사제 김대건 신부 살던 곳
사제품 받은 중국 성당 재현해 ‘눈길’
골배마실·미리내성지도 순례해보길

은이성지 전경.

녹음이 우거진 6월은 예수 성심 성월이다.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묵상하고 본받기 위해 교회에서 정한 거룩한 달을 맞았다. 예수님처럼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살았던 성 김대건 사제(안드레아, 1821~1846)를 보다 가까이 만날 수 있는 은이성지를 찾았다. 첩첩산중의 ‘은이’(隱里)는 ‘숨어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은이성지는 우리나라 출신의 첫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밀접하게 연관된 곳이다. 은이 교우촌은 1819년 이전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김대건 가족은 박해를 피해 고향 충청도 솔뫼를 떠나 서울 청파동과 용인 한덕골에 잠시 거주하다가 1827년경 은이의 윗마을인 골배마실로 이주하였다. 이때 김대건의 나이는 7세로 유년기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냈다.

최초의 서양인 선교사 모방 신부(Maubant,베드로, 1803~1839, 파리외방전교회)는 박해시대에 효율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방인 사제 육성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모방 신부는 교우촌을 순방하던 중 은이공소에서 김제준(이냐시오, 1795~1839)과 고 우르술라(1798~1864)의 장남 김대건을 만났다. 모방 신부는 1836년 봄, 15세 김대건에게 세례성사와 첫 영성체를 주고 신학생 후보로 뽑았다.

은이공소에서 선발된 소년 김대건을 비롯한 최양업, 최방제가 신학생으로 뽑혀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가 있던 마카오로 가서 신학 공부를 하였다. 1845년 8월, 김대건 부제는 중국 상하이에서 페레올 주교(Ferréol, 1808~1853, 제3대 조선 대목구장)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김대건 신부는 1845년 말까지 한양에서 사목한 후, 1846년 부활 때까지는 은이공소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사제로서 마지막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도 은이공소에서 봉헌한 것으로 여겨진다. 김대건 신부가 사목한 기간은 불과 1년 남짓이지만 하느님께 대한 굳건한 믿음과 사랑으로 박해에 시달리던 교우들을 품어 주며 순교하기까지 용맹하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은이 교우촌과 골배마실은 기해박해(1839년)와 병오박해(1846년) 때 고통을 당했고, 병인박해(1866년)로 다시 풍파를 겪었다. 일제 말기와 해방을 거치면서 교우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하면서 은이 교우촌은 거의 폐허가 되었다. 다행히 은이공소 자리는 1984년 한국 103위 성인의 시성 작업과 현양운동이 일어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수원교구에서 이곳을 순교사적지로 조성하면서 지금의 성지 모습을 갖추었다.

은이성지 김가항 성당에서 미사가 봉헌되고 있는 모습.

은이성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김가항(金家巷)성당이다. 이 성당은 김대건 부제가 사제품을 받은 중국 상하이의 진쟈샹성당을 본 딴 것이다. 상해의 도시 개발 정책에 따라 2001년 진쟈샹성당이 헐린다는 것을 알고 은이 성 김대건 현양위원회가 이 성당의 복원 계획을 수립하면서 상하이 현지를 방문했다. 성당의 이전 복원을 위한 실측조사 작업은 김정신(스테파노) 교수가 철거 직전에 하였다.

2016년 9월, 상하이 진쟈샹성당의 원형을 최대한 살린 은이성지 김가항성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위에서 성당을 내려다보면 티(T)자로 단순한 형태이다. 정면 상단에는 성모 마리아(Maria)를 나타내는 엠에이(MA) 문양과 천주당(天主堂) 현판이 있다. 제대 근처의 기둥 4개와 대들보 2개, 동자기둥(들보 위에 세우는 짧은 기둥) 1개는 상하이 진쟈샹성당에서 사용했던 것을 재사용했다. 250여 명이 들어가 미사와 기도를 바칠 수 있는 김가항성당은 은이성지에 핀 한 송이 꽃처럼 보인다.

김가항성당 옆에는 ㄷ자 모양의 김대건 기념관(2016년 준공)이 있는데, 한 면은 사무실이며 두 면은 전시공간이다. 첫 번째 전시실에는 김대건 신부의 생애와 신앙의 발자취를 보여주는 여러 그림과 자료가 있다. 두 번째 전시실에는 은이공소와 인근 양지성당에서 사용했던 유물과 오래된 교회서적들이 있다. 기념관 마당의 세례 작품은 이곳에서 모방 신부가 소년 김대건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은이성지 맞은편 길을 따라 올라가면 ‘기도의 숲’에 다다른다. 오솔길 곳곳에 있는 ‘십자가의 길 14처’ 앞에서 묵상하면 은이성지가 품은 깊은 뜻을 깨달을 수 있다. 녹음 가득한 나무들 사이에 있는 예수상과 십자고상, 성모상과 제대는 순례자의 마음을 하느님 아버지께 향하도록 한다.

은이성지에서 십리쯤 떨어진 곳에 김대건 신부 가족이 살며 신앙생활을 했던 ‘골배마실’ 집터가 있다. 깊은 골짜기에 뱀과 지네가 많아 ‘뱀 마을’(배 마실)이라고 불렸다. 이곳에서 부친 김제준(이냐시오) 성인이 기해박해(1839년) 때 관헌에게 체포되었고, 사제품을 받은 후 귀국한 김 신부는 이곳에서 어머니 고 우르술라와 다시 만났다.

복음서를 들고 강복해 주는 김대건 신부상이 골배마실 위쪽에 우뚝 서있다. 무성한 느티나무와 단풍나무, 고염나무와 소나무도 크게 자라 사람들을 대신해서 마실을 지킨다. 첫 번째 사제 김대건 신부가 탄생한 지 20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 사제 수는 2022년 3월 현재 6822명이다. 주변의 큰 나무는 김대건 신부 이후에 수많은 사제가 탄생하여 자랐다는 것을 보여준다. 골배마실이 양지 파인 리조트 골프장 내에 위치하여 은이성지 사무실에서 마실 안내와 대문 열쇠 번호를 받아 방문할 수 있다.

은이성지에서는 골배마실 도보순례길(믿음의 길, 4.4㎞/두 번째 토요일)과 미리내 도보순례길(사랑의 길, 10.3㎞/네 번째 토요일)을 만들어 순례자들을 초대하고 있다.

은이성지와 가까운 곳에 있는 미리내성지는 병오박해(1846년) 때 순교한 김대건 신부가 묻혔던 첫 번째 장소이다. 최근에 수원교구와 용인시는 은이성지에서 미리내성지로 가는 길을 ‘청년 김대건 길’로 조성하여 많은 사람이 순례하며 자신을 돌아보면서 가꾸도록 하였다.

김대건 기념관 전시실.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