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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37)살아있는 전례를 위하여①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입력일 2022-06-14 수정일 2022-06-14 발행일 2022-06-19 제 3299호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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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 목적은 하느님 현존 체험하고 신앙 올바로 살게 하는 것
전례에 담긴 풍요로운 신앙 의미
신자들은 제대로 느끼기 어려워
전례 통한 신자들의 신앙 실천
이뤄지는지 반성하고 성찰할 때

서울대교구 손희송 주교가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미사가 중단된 후 재개된 4월 26일 첫 주일미사에서 성체를 분배하고 있다. 팬데믹은 성사와 전례가 신앙인들에게 실제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어떤 역할과 기능을 담당했는지 다시 돌아보게 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포스트 팬데믹

사회적 거리두기 규정이 사라진 후 미사 참여 숫자가 회복되고 있다. 본당들은 잃었던 활력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다. 사제들의 표정도 밝아져 간다. 다른 한편으로 코로나19 이전의 미사 참여 숫자로 돌아가기 위해서 아직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완전 회복은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제기된다. 하지만 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정말 중요한 일은 ‘복구’(restoration)가 아니라 ‘쇄신’(renewal)일 것이다.

팬데믹의 시간은 교회와 신앙의 삶 전 영역에 많은 도전과 질문을 제기했다. 성사와 전례가 어떻게 거행되고 있는지, 성사와 전례가 신앙인들에게 실제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어떤 역할과 기능을 담당했는지 다시 돌아보게 했다. 성직자들의 사목과 신자들의 신앙생활이 어떻게 수행되어 왔는지, 본당이라는 공동체적 공간을 통해 이루어지는 가톨릭 신앙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성찰하게 했다. 포스트 팬데믹의 시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정직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다시 새롭게 시작할 것인지 말이다.

■ 제의(ritual)와 전례(liturgy)

종교사회학적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종교는 신화(myth)와 제의와 윤리적 가치체계를 통해 구성된다. 어떤 종교에 소속된다는 것은 그 종교가 선포하는 신성한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그 종교의 제의에 참여하며, 그 종교가 가르치는 사회문화적 가치체계를 수용하고 실천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 세 행위 가운데 제의에 참여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제의 안에서 신성한 이야기가 선포되고 가치체계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진다. 종교적 삶은 곧 제의적 삶을 의미한다.

제의는 종교가 행하는 의례와 예식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전례는 제의적 특성을 포함하지만, 신자들을 위한 더 공적인 성격을 지닌다. 신앙의 삶에 있어서 전례는 정점이며 핵심이다. 신앙은 전례 안에서 시작되고 성장한다. 교회 공동체 역시 전례 공동체이다. 전례 안에서 공동체가 시작되고 전례를 통해 공동체는 성장하고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신학적이고 종교학적인 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 신앙생활의 모습을 솔직하게 돌아보면 쉽게 발견하고 알 수 있다. 우리 신앙생활의 대부분이 전례 참여로 구성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전례 안에서 신앙 교육이 이루어지고, 신앙적 가치와 윤리를 실천할 힘을 얻고, 기도와 영성의 자세와 태도를 배운다.

■ 전례의 성사화

가톨릭교회에서 전례는 성사와 맞물려 있다. 성사의 전례적 거행이 가톨릭 신앙생활의 핵심이다. 전례의 성사화 또는 성사의 전례화는 가톨릭 신앙생활의 기본토대를 형성한다. 하지만 성사의 전례적 거행은 간혹 성사 전례를 지나치게 엄숙하고 엄격한 프레임으로 만들 위험이 있다. 전례의 의미를 살아내게 하기보다는 전례 예식 그 자체를 정확하게 거행하는 데 초점을 맞출 위험이 많다는 뜻이다.

성사 전례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성사 전례는 전례적 예식이며 동시에 은총의 표징이며 통로다. 성사에 대해 동사적으로 접근해도 두 개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성사를 ‘거행하다’(celebrate), 성사를 ‘집전하다’(administer), 성사에 ‘참여하다’(participate in)라고 말할 때 성사는 전례 예식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성사를 ‘주다’(give), 성사를 ‘받다’(receive)라는 표현 속에는 성사가 은총(grace)과 은사(gift)와 관련이 있음을 또한 알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성사에 관한 이 동사적 표현을 보면 성사는 공동체가 거행하는 것이지만, 성사 안에서 집전자와 참여자, 주는 자와 받는 자가 구별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자칫 이러한 구별은 성사 전례 안에서 참여자(받는 자)와 집전자(주는 자) 사이에 위계적 서열이 발생할 위험을 낳을 수 있고, 성사 전례가 집전자를 중심으로 구성될 위험을 발생시키기도 한다.

성사 전례에 대해 신학자는 은총의 표징으로서 중요성과 의미를 강조한다. 이러한 경향은 성사 전례를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방향으로 변하게 할 위험을 내포한다. 교회법 학자는 성사 전례가 유효하고 합법적으로 거행되었는가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는 성사 전례를 규범적 울타리에 가둘 위험이 있다. 전례학자는 성사 전례적 예식의 거룩함과 아름다움에 방점을 두는 경향이 있다. 이는 성사 전례를 형식적으로 만들 위험을 낳는다. 성사 전례가 추상적, 규범적, 형식적인 모습으로 변해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 참여자 중심의 전례

전례 성사의 보이지 않는 은총과 구원의 힘(성사의 사효성)에 대해서는 많은 신학적 설명을 할 수 있다. 교회는 오랫동안 전례가 가진 아름다움과 숨겨진 힘과 시간을 초월하는 장엄함에 관해 설명해왔다. 우리가 전례 성사의 깊은 의미와 힘을 잊었기 때문에 전례와 신앙생활이 연결되지 않고 따로 놀았다. 전례 안의 경문과 상징과 동작들은 풍요로운 신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진정한 전례 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 하지만 단순히 가르치는 교육만으로 되지 않는다. 실제 전례 안에서 그 깊은 의미와 효과와 힘을 느끼지 못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즉, 전례의 신학적 의미와 효과에 대한 인식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 전례 안에서 신자들이 느끼고 공감하고 변화되는 정서적 차원의 문제다.

성사 전례의 신학적 의미와 효과뿐만 아니라 사회학적 의미와 효과에 대해서 성찰해야 한다. 전례의 실제적 모습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 팬데믹의 시간은 집전자인 성직자 중심의 전례보다 참여자인 신자 중심의 전례로 전환해야 할 때가 도래하고 있음을 예감한다. 기존의 전례가 신자들에게 과연 어떤 모습과 의미로 받아들여졌는지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요청하고 있다.

신자들이 습관적이고 형식적인 형태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방식과 태도로 전례에 참여한다면 하느님의 현존을 더 깊이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전례의 중요한 목적은 전례 예식을 올바르게 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고 신앙의 삶을 올바르게 살게 하기 위해서다. 오늘의 가톨릭 전례가 정말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현존을 구체적으로 느끼게 하고 있는지, 전례를 통해 신자들이 삶의 모든 자리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표현하고 실천하고 수행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고 있는지 정직하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전례 안에서 생각과 마음과 몸의 모든 감각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전례가 우리의 신앙 감각을 성장하게 하고, 하느님을 향한 그 감각으로 우리의 일상과 삶을 기쁘고 즐겁게 살아낼 수 있어야 한다. 오늘의 우리 전례가 과연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가?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