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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27)1857년 9월 15일 불무골에서 보낸 편지

민경화 기자
입력일 2022-07-06 수정일 2022-07-06 발행일 2022-07-10 제 3302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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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정신에 위배되는 신분제의 부당함 비판

‘고을의 작은 왕과 같았다’ 묘사할 만큼
서민들 핍박했던 양반들의 횡포 지적
인권 무시되는 사회구조 문제점 짚고
재능에 의한 인재 등용 피력하기도

프랑스 리옹 포교사업후원회가 1868년부터 발행한 기관지 「가톨릭 선교」(Les Missons Catholiques)에 소개된 이 그림은 ‘조선에서 남녀가 따로 앉아 미사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조선의 신분제 사회 안에서 남녀 구별이 엄격했음을 알 수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1863년 2월 20일, 베르뇌 주교가 누아르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는 조선 양반사회의 폐단이 생생히 묘사된다.

“양반은 많은 특권을 누립니다. 모두가 그에게 양보하고 복종하며 그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됩니다. … 양반이 여행하는 중에 주막에 빈방이 없으면 주막 주인과 그의 식구들은 아무 데서나 잘지언정 당연히 자신들의 방을 양반에게 내 주어야 합니다. 양반이 강을 건너야 하게 되면 나룻배에 손님이 다 차도록 기다려서도 안 되고 즉시 양반을 태워 강을 건너야 합니다.”

‘고을의 작은 왕과 같았다’고 묘사할 정도로 절대권력을 휘둘렀던 이들의 횡포는 가난한 백성들을 향했다. 최양업은 양반들로부터 갖은 핍박을 받는 가난한 백성, 즉 신자들의 가련함을 내내 마음에 새겼을 것이다. 불무골에서 보낸 열네 번째 편지에서는 그리스도교 정신에 위배된 계급사회를 향한 최양업의 비판의식을 엿볼 수 있다.

■ 형제의 우애와 애덕 찾을 수 없는 조선 사회에 대한 비판

모든 것을 버리고 험악한 산속에서 하느님만을 섬기며 궁핍하게 살아가는 신자들과 만나 온 최양업에게 그들의 삶을 더욱 힘들게 만드는 신분제도가 마뜩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편지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현재 조선의 양반제도는 일부 양반에게는 모든 권리를 인정해 줘서 그들만을 위해서 남용할 수 있게 해주고, 그 반면 일반 서민은 양반들의 온갖 부당한 횡포를 에누리 없이 당하도록 강요하는 제도입니다. 그리하여 교만한 양반들은 언제나 더욱 오만방자해지도록 부추기고 비참한 백성들을 언제나 더욱 비참해지도록 내리누르는 것이 조선의 사회구조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신분이 나뉘고, 높은 계급을 가진 이가 낮은 계급을 억압하는 조선의 모습은 하느님이 가르쳐 준 형제애나 애덕이 실현되지 않는 사회였다. 그리스도 정신에 위배되는 모습이기에 최양업은 이를 완전히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제도 하에서는 형제의 우애와 애덕이란 있을 수 없고 천부적 인권은 완전히 무시됩니다. … 그리스도께서는 말씀과 실행으로 항상 가난한 사람과 소외된 사람들의 편을 드시고 교만한 자와 권세 있는 자에게는 혹독하게 대하셨습니다.”

또한 조선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양반 제도가 사라져야 하며 재능과 인격만으로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피력했다.

“이러한 고질적인 신분 차별은 쉽게 시정될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높은 벼슬에 사람을 등용할 때 그 사람의 출생 성분을 따지지 않고, 재능과 인격만 평가해 등용한다면 양반 제도는 강제적인 노력이 없더라도 쉽게 무너지리라고 생각합니다.”

■ 양반 편에선 서양 선교사에 대한 지적

특히 성직자는 가난한 이들 편에 서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최양업은 그렇지 못한 이들에 대한 비판도 서슴없이 드러냈다.

최양업이 사목방문을 시작한 지 얼마 안됐을 무렵, 이미 신자들 사이에 계급 차이로 인한 갈등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1854년 11월 4일 쓴 편지에서 “우리 포교지의 상태는 신자 중에서 신분의 계급 차이로 서로 질시하고 적대시하므로 분열이 일어나서 큰 걱정입니다”라고 전하는가 하면 1857년 9월 15일 쓴 편지에서는 서양 선교사들이 양반을 중심으로 교회를 운영하는 것에 대한 거센 비판을 쏟아낸다.

“고 주교님(페레올 주교)의 복사들은 크게 비난받을 짓을 많이 범하고서도 양반임을 내세워 항상 너무 거만하게 행세를 부려 모든 교우들에게 미움을 샀습니다. 그러나 유독 고 주교님께서는 그들만을 사랑하시고 신임하시어 그들하고 모든 일을 의논하셨습니다. … 그리하여 신자들 사이에 나날이 불화가 심해지고 많은 이들이 의분을 느끼고 자포자기에 빠졌습니다.”

실제로 몇몇 서양 선교사들은 안전하고 편하게 선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양반의 편에 서기도 했다.

다블뤼 주교는 “우리는 기품을 하나도 잃지 않고 어디든지 양반 행세를 하며 다녔습니다. 그날부터 우리는 계속 우리가 가는 주막마다 방을 차지하고 있던 사람들을 몰아냈죠.”(1848년 8월 동생에게 보낸 편지)라고 전하는가 하면, 베르뇌 주교는 “저 역시 그 유혹에 이끌려 사람들 눈에 띄는 위험에 노출되지 않고도 강을 건너고 주막에서 묵고 또 포교들의 방문에서 안전하게 머물 수 있기 때문에 조선의 양반이 되고 싶었습니다”라고 고백한다.(1863년 2월 20일 누아르 신부에게 보낸 서한)

이러한 서양 선교사들의 양반에 대한 편애는 신자들의 신앙심을 감퇴시키는 요인이 됐고, 최양업은 전교에 지장을 줄 것을 우려해 이에 대한 시정을 요구했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