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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3. 최창무 대주교(5)

정리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22-07-26 수정일 2022-07-26 발행일 2022-07-31 제 3305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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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생들 향한 애틋한 마음으로 사제양성에 매진
교재 부족했던 후배 신학생들 위해
유학 중인 동기들과 성경 입문 교재 번역
6개 교구 관할하는 관구 신학원장 맡고 
다양한 소임 거치며 후학 양성에 힘써

최창무 대주교(왼쪽에서 세 번째)가 1987년 3월 28일 독서직을 받은 신학생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광주대교구 제공

신학교 교수 시절, 신학생들은 나를 ‘칼창무’라 부르곤 했습니다. 원리원칙을 잘 지킨다는 뜻을 담은 별명인데요. 제가 원리원칙을 좋아하는 이유는 순리에 맞닿기 때문입니다. 내심 그게 편하다는 이유도 큽니다. 교통법칙을 잘 지키면 가장 먼저 자신이 보호받는 것과 같은 맥락이죠. 반면 원리원칙을 잘 지킨다는 것은 융통성이 없다는 말이 되기도 하는데요. 모든 것은 양면성이 있으니까요. ‘외강내유’, 사제로서 살면서 제가 지켜온 대표적인 모습인 듯합니다.

석·박사 학위를 동시에 받자마자 저는 신학대학 교수로 발령받아, 사제양성 소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됐습니다. 사제양성을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성장하고 영성을 키우는 과정이었죠.

사실 신학생들을 향한 애틋한 마음은 독일 유학 중에도 컸습니다. 하느님을 깊이 알아가는 학문에 흠뻑 빠져들어 보니, 교재도 부족한 상황에서 공부하는 후배 신학생들이 자꾸 생각났죠. 유럽 곳곳에서 유학 중인 동기 신부들과 처음 모인 자리에서, 우리는 후배들을 위한 신·구약 성경 입문 책자를 함께 번역하자고 합의했습니다. 각자의 학업 분량만도 벅찬 상황이었지만 모두가 기쁘게 분담했고, 분도출판사를 통해 한국어 성경 신학 교재를 발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유학 과정을 다 마치지 못했는데요. 독일 유학 중 사제품을 받았는데,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끝난 후인 1966년 한국으로 불려 들어와 서울 명동성당에서 사목실습을 해야만 했거든요. 공의회 교부들은 사제양성에 대한 관심도 매우 컸습니다. 이에 따라 사목실습도 권고사항으로 마련됐죠. 동기 중에선 저만 불려 들어왔는데요. 그래도 명동본당 수석보좌로서 정말 신나게 사목했었습니다. 예비자들 중 청년들이 엄청나게 몰려들던 때였습니다. 청년 예비자 교리를 열심히 지원했는데요, 유명 대학 강의실을 방불케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다른 보좌신부 2명과 믿을교리편, 은총편, 성사편 등으로 과정을 나눠 맡았는데요. 이때 했던 믿을교리 강의 내용은 나중에 「빛을 찾아서」라는 교재로 나오기도 했습니다. ‘성삼회’라는 청년모임도 있었는데, 저도 청년들과 함께 분야별 봉사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던 중 노기남 대주교님께서 퇴임하시고 당시 수원교구장이셨던 윤공희 주교님께서 서울대교구장 서리를 맡으셨는데요, 저를 부르시더니 가톨릭대(신학교)로 가라고 하시는 겁니다. 저는 ‘대학을 중퇴했기에 대학에서 봉사할 자격이 없다’라며 고사했더니, 윤 대주교님께서는 다시 독일로 돌아가서 공부를 마치라고 허락하셨습니다.

독일로 다시 가자마자 쓰던 논문 마무리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지도 교수님께서도 기쁘게 도와주셨습니다. 박사 학위를 취득한다는 것은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과정을 배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능력을 키우고 독립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이죠. 공부는 죽을 때까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톨릭대 교수 발령을 받자마자 정말 가르치면서도 배우고 또 배우면서 가르치는 일상이 시작됐습니다. 윤리신학은 물론 신학원론 등 신설 과목을 가르쳐야 했고 성서학자가 부족해 성서 입문 강의도 맡았고, 교회사와 히브리어 및 독어 강의도 해야 했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학교 안에서도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거든요. 가톨릭대는 6개 교구 신학생들을 아우르는 관구 신학교가 됐습니다. 각자 자기 나라 언어로 전례를 거행하게 되면서 기존에 로마 교황청에서 일괄 발간하던 라틴어 교재도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1976년 안식년엔 독일 프라이부르크대 연구교수로 가서 신학생들을 위한 교재를 만들기 위해 힘썼습니다.

1977년엔 관구 신학원장을 맡았죠. 사제양성 지원을 좀 더 탄탄히 하기 위해 영성 협력자들도 초빙했습니다. 예수회 이한택 신부님, 베네딕도회 이덕근 신부님 등을 모셨죠. 이에 앞서서는 학생처장을 시작으로 대학원 교학감, 신학부장 겸 교무처장으로도 활동했고요. 사제양성을 위해서는 신학공부만이 아니라 사목자 양성을 위한 지원은 물론 연구도 필수적인데요, 나중에 가톨릭대 부설 사목연구소 소장도 역임했습니다. 1972년엔 학제 개편으로 가톨릭대와 신학원이 이원화됐고, 저는 제11대 가톨릭대 학장의 소임까지 겸해야 했습니다. 석·박사 과정 개편은 물론 교직 과목도 신설했습니다.

당시 가톨릭대에는 신학부와 의학부 2개 단과대학만 있었습니다. 종합대학교가 되려면 3개의 단과대학 이상이 있어야 했는데, 법령이 바뀌면서 이듬해인 1992년 가톨릭대학교로 승격되고 동시에 저는 총장이 됩니다. 1994년엔 성심여대와 통합, 성심·성의·성신 3개의 캠퍼스를 갖춘 통합 가톨릭대학교로 자리매김합니다. 그래서 왜 교회가 대학과 병원 등을 운영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념 교육 등에도 적극 힘쓰게 됐지요. 대학교육과 사제양성을 통합해서 추진해야 하니 더욱 소임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정리 주정아 기자 stell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