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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34)1858년 10월 4일 오두재에서 보낸 열여섯 번째 서한

민경화 기자
입력일 2022-08-30 수정일 2022-08-30 발행일 2022-09-04 제 3309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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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를 구원할 빛’ 복자 김기량과의 운명적 만남
무역길 풍랑 만나 중국서 구조된 김기량
신학생 이만돌과 조우하고 세례 받아
귀국 후 만난 최양업 “훌륭한 사도 될 것”
‘신앙 불모지’ 제주 복음화에 헌신·순교

제주시 조천읍에 있는 김기량순교기념관 전경. 건물 왼쪽에 복자 김기량 순교 현양비가 보인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한반도의 최남단에 있는 제주도는 예로부터 중국과 우리나라, 일본을 잇는 해상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해왔다. 또한 육지와 격리된 절해고도(絶海孤島)라는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조선조 약 500년 동안 200여 명이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이러한 제주도의 폐쇄성은 복음을 전파하는 데도 걸림돌이 됐다.

최양업은 1858년 10월 4일 서한에서 제주도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정부로부터 파견된 관원들이나 관청으로부터 허가를 받은 장사꾼들 외에는 제주도 상륙이 금지돼 있습니다. 또 제주도에서 육지로 나가는 것도 관청의 허가가 있어야 하고 여인들은 엄금하고 있습니다. 그 섬에 교우가 있다 하더라도 현재로서는 선교사 신부가 들어갈 방도가 없습니다.”

아직 복음의 씨가 떨어지지 않은 제주도. 최양업은 열여섯 번째 서한에서 하느님께서 신앙의 불모지였던 제주도에 구원의 길을 열어준 사건을 소개한다.

복자 김기량 영정. (고보형 화백 작품)

■ 신앙 불모지 제주도 구원할 빛 만난 최양업

최양업은 편지를 시작하며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중국에서 구조된 제주도 사람의 이야기를 꺼낸다. “그는 상해에서 중국 관원에 의해 북경으로 인도됐고, 거기서 조선으로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그는 바울리노가 전해준 편지와 신자들을 찾기에 필요한 안내 정보를 가지고 교우들을 찾았습니다.”

1855년 최양업은 신학생 세 명을 선발해 말레이시아의 페낭으로 보냈고, 그 중 이만돌(바울리노)이 병을 얻게 돼 홍콩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최양업이 언급한 ‘하느님이 제주도 주민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준 사건’이 시작된다. 구조된 제주도 사람은 조선으로 바로 돌아가지 못하고 홍콩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에서 잠시 머무른다. 복자 김기량(펠릭스 베드로)의 이야기다. 그곳에서 신학생 이만돌과 만난 김기량은 80여 일간 머무르면서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는다.

이후 조선으로 돌아온 김기량은 1858년 배티 인근 교우촌에서 페롱 신부와 최양업을 만난다.

“그는 크게 고생은 하였으나 하느님의 은혜로 다행히 교우촌을 발견하고 또 그곳을 거쳐 저와 페롱 신부님이 함께 있는 교우촌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그가 겪은 모든 이야기를 듣고 참으로 하느님의 무한하신 인자와 섭리에 감탄해 마지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기묘한 방법으로 그에게 뿐만 아니라 제주도 주민들에게까지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3개월간 교우촌에 머물렀던 김기량은 최양업에게 교리를 배우고 신자들과 함께 공부하며 신심을 다졌다. 최양업은 김기량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과 교우를 찾으려는 열성을 보면 진실한 사람이고 믿을 만한 사람이며 장차 좋은 교우가 될 사람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아직까지 복음의 씨가 떨어지지 않은 제주도에 천주교를 전파할 훌륭한 사도가 될 것입니다. 그는 우리와 작별하면서 고향 제주도에 돌아가면 먼저 자기 가족에게 천주교를 가르쳐 입교시킨 후 저한테 다시 오겠다고 말하였습니다.”

■ 훌륭한 사도가 될 거라 믿었던 김기량

김기량(펠릭스 베드로)은 1816년 제주 섬 함덕리(현 제주도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배를 타고 장사를 했던 그를 사람들은 ‘김 선달’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1857년 2월 18일 동료들과 함께 무역을 하려고 바다로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한 김기량. 동료들이 죽고 홀로 살아남은 그는 중국 광동 해역에서 영국 배에 의해 구조된다.

홍콩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에 보내진 그는 그곳에서 조선인 신학생 이만돌(바울리노)을 만난다. 이만돌에게 교리를 배우고 1857년 5월 31일 루세이유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그는 조선에 귀국해서 신앙생활을 이어간다. 조선에서 그는 가족과 그의 사공들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육지로 나와 교구장인 베르뇌 주교에게 성사를 받기도 했다.

베르뇌 주교는 1858년 8월 14일자 서한에서 김기량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이 새 신자는 제주도 사람인데 총명하고 신앙이 발랄합니다. 집안이 40명 가량 되는데 그는 그들이 모두 개종할 것을 의심치 않고 있습니다.”

제주도 복음화를 위한 김기량의 노력은 1866년 병인박해의 기세에 꺾이고 만다. 무역을 하려 경상도 통영에 간 그는 게섬(현 경남 통영시 산양읍 풍화리)에서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체포됐고, 1867년 1월 51세의 나이로 순교한다.

모진 문초와 형벌에도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켰던 그는 함께 갇힌 교우들에게 “나는 순교를 각오하였으니, 그대들도 마음을 변치 말고 나를 따라오시오”라고 권면했다고 전해진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