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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4. 이병호 주교(1)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22-09-05 수정일 2022-09-06 발행일 2022-09-11 제 3310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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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최고 순간은 바로 오늘, 바로 지금”
매일 아침마다 걷는 이유는
예수님 향해 걸어가기 위해
사제로 살아온 50여 년
모두가 귀하고 의미있는 삶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마다 성경말씀을 외우며 걷는 이병호 주교는 우리는 매일 성경과 대자연이라는 두 개의 성경 속에 살아간다고 말한다. 사진 박원희 기자

“하느님께서는 당신 곁을 떠나지만 않으면, 그저 막 쏟아 부어주시는 분입니다. 덕분에 매일매일이 놀라운 나날입니다. 그리고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은 바로 오늘, 바로 지금입니다.”

이병호(빈첸시오) 주교님은 오늘 아침에도 어김없이 ‘온샘이 머무는 곳’을 향해 걷습니다. 1시간40분에서 2시간 남짓, 전주 인보성체수도회 본원을 나서 전주천을 거쳐 치명자산성지 근처에 이르러 발걸음을 멈춥니다. ‘온샘이 머무는 곳’이라고 새겨진 자그마한 나무 현판이 눈에 띕니다. ‘온샘’은 통일운동가로 잘 알려진 한상렬 목사님이 지어주신 이병호 주교님의 호(號)입니다. 공동번역 성서 작업에도 동참하셨던 이현주 목사님이 글씨를 써주셨습니다. 그 글씨를 현판에 새긴 이는 지리산에 계신 한 스님이시고요. ‘각기 다른 믿음의 길을 따라 마음속 깊은 목마름 안고 먼 길을 걸어오신 분들을 여기에서 만남은….’ 이곳에 모인 이들을 향해 이 주교님께서 쓰신 ‘옹달샘’이라는 제목의 글 첫 구절입니다. 뭔가 엄청난 공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이 주교님은 ‘온샘’이란 예수님, 우리에게 진짜 샘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매일 아침 하루도 빠짐없이 사제관을 나서 걷는 이유는 바로 진짜 샘인 예수님을 향해 걷는 것이라고요. 아참, 대단한 기운이 느껴지는 이곳은 그저 자그마한 농막입니다.

이병호 주교님을 만나뵙기 한주 전엔 엄청난 폭우가 내렸는데도 주교님은 걸으셨다고 합니다. 비옷 하나 걸쳐 입고 말입니다. 비가 와도 우산을 쓰지 않고 걷는 주교님의 모습을 수년째 보는 동네 주민들이 이제 주교님이 지나가는 시간 즈음이면 하나둘 뛰어나와 제발 우산 좀 쓰라고 닦달합니다.

왜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아침 걷느냐고 여쭸습니다. 걷는다는 것 자체가 아주 의미있는 행동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보다 매일 두 개의 성경 속에서 살아간다고 하십니다. 손에 들고 끊임없이 외우는 성경과 대자연이라는 또 하나의 성경입니다. 아침마다 길을 나서는 이 주교님의 손에는 그날의 복음말씀 등이 프린트된 종이가 있습니다. 걷는 내내 그 성경 말씀을 외우고 또 외웁니다. 마음에 와닿는 묵상과 성찰의 말이 떠오르면 잠시 멈춰서서 휴대폰에 메모를 합니다. 외운다는 것은 어떤 효과,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요. 이 주교님께선 성경 말씀을 외우는 것은 그저 뇌에서 기억하는 차원이 아니라고 합니다. 말씀을 외울 때 그 속에 확 빠져들어 갈 수 있다고 합니다.

사제로 살아온 시간이 오십 년도 훌쩍 넘어섰습니다. 1969년 사제품을 받은 직후 전주 주교좌중앙본당에서 사목했던 시간, 처음으로 본당주임을 맡아 정읍에서 보낸 시간, 프랑스 가톨릭대에서 교의신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고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했던 시간 등 모두가 귀하고 의미있는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사제로서 살아온 삶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시간, 그것은 전주교구장 주교로 헌신해온 27년입니다. “교구장직을 내려놓았다고 해서 사제의 삶을 내려놓은 건 아니죠, 저의 현직은 인보성체수도회 지도신부”라고 소개하는 주교님의 얼굴엔 흡사 하회탈 같은 함박미소가 번집니다.

어린 시절부터 무조건 신부가 돼야겠다는 그런 생각을 하며 성장하진 않았다고 합니다. 신학교 입학시험까지 치려고 나섰지만 당시 교구장이신 김현배(바르톨로메오) 주교님께서 ‘중학교는 졸업하고 신학교에 오라’는 말씀을 하셨다고요. 그 말씀을 들은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이 주교님은 ‘이 세상에 예쁜 여성이 얼마나 많은데, 그때 내가 신학교에 갔으면 어쩔 뻔 했나. 천 길 낭떠러지에서 되돌아온 기분’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은 정말 어느 순간에 번개처럼 빛을 발할지 모르는 일인가 봅니다. 어느 날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책 한 권을 집어들었는데 다시 내려놓을 수가 없어서 학교 수업도 빼먹고 뒷마당 짚불더미에 숨어서 책을 다 읽었습니다. 그 책은 「준주성범」이었습니다. 이후 사제 외의 다른 삶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이 주교님은 강론을 잘하기로도 유명한 분이죠. 하지만 그런 주교님도 강론을 하는 것이 총 맞아 죽는 것만큼 힘든 시기를 보냈었다고 합니다. 강론에 대한 부담이 말도 못하게 커서, 치열하게 기도하고 기도하던 어느 날, “야 인마! 내가 너를 보낼 때 내 말을 하라고 보냈지 니 말을 하라고 보냈냐!”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합니다. ‘하느님 말을 전하면 되는데 내가 왜 고민을 하고 있었지’란 생각에 가슴이 뻥 뚫리는 경험을 한 것이죠.

이 주교님께선 기도하는 시간을 하느님과 1대1로 ‘맞짱뜨는’ 시간이라고도 하시는데요. 온 일생이 하느님과 씨름해온 시간이라고 하시고요. 무슨 뜻일까요? 다음 호부터 이병호 주교님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봅니다.

주정아 기자 stell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