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현장에서] 나는 간다 뻔하디 뻔한생들아 / 염지유 기자

염지유 로사 기자
입력일 2022-09-05 수정일 2022-09-06 발행일 2022-09-11 제 3310호 23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 등불순교자축제에서 전경협(아가타) 성녀의 삶을 다룬 순교극 ‘나는 간다 뻔하디 뻔한생들아’를 관람했다.

성녀는 궁녀였다. 궁녀는 궁에 한번 들어가면 죽기 전에는 나오지 못하고, 혼인조차 못하는 가련한 삶이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조선의 궁녀는 평생 생계 걱정 없이 안락한 삶이 보장된 궁중여관(宮中女官)이었다.

전경협 성녀와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순교한 박희순(루치아) 성녀도 궁녀였다. 심지어 성녀는 순조의 둘째딸 복온공주를 가르칠 정도로 왕실의 신뢰를 받는 상궁이었다.

하지만 두 성녀는 탄탄대로가 보장된 뻔한 삶을 마다했다. 풍족한 궁궐을 떠나 고생길로 들어서기를 택했다. 모진 고문조차 예수님의 고통을 헤아려보는 기쁨으로 여기며 피 흘리기를 기꺼워했다.

순교극을 보면서 뻔하지 않은 삶을 살아내는 것이 우리 신앙인의 숙명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우리는 믿지 않는 이들과는 다른 삶을 살겠다고 목숨을 내놓은 순교자들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신앙선조들처럼 피 흘리는 순교는 할 수 없지만, 일상에서 무혈의 순교자는 될 수 있다. 나를 박해하는 사람 용서하기, 아까워서 나누고 싶지 않은 것도 이웃과 나누기, 모두가 꺼리는 일에 먼저 나서기, 수틀리는 순간에도 마음을 꽈배기로 만들지 않기.

우리 삶에는 받아들이기 힘들고 도무지 내키지 않는 일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사랑을 기억하고, 순교자들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려는 마음으로 ‘눈 딱 감고’ 그 어려운 일들을 해내는 순간, 우리 삶은 더 이상 뻔한 삶이 아니게 된다.

염지유 로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