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순교자 성월 특집] 무명순교자의 흔적을 찾아서

염지유 기자
입력일 2022-09-21 수정일 2022-09-21 발행일 2022-09-25 제 3311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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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조차 모르지만… 결연했던 순교 의지 반드시 기억해야
행적 기록 남지 않은 순교자들
낮은 신분이 대부분으로 추정
글 몰라도 교리·기도문 외우고
어린아이도 두려움없이 순교

인천교구 일만위순교자현양동산 ‘무명순교자상’. 순교자가 단두대 위에 머리를 올려놓고 죽음의 칼을 기다리는 모습이다. 십자가가 너무 무거워 자신도 모르게 던져버릴 것을 걱정이라도 한듯 등과 가슴을 관통하도록 꽂아둔 익명의 작가 작품이다. 사진 염지유 기자

목숨으로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의 삶을 기억하는 순교자 성월이다.

한국교회의 순교자 수는 1만여 명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중 신원이 밝혀진 순교자는 2000명도 되지 않는다. 나머지는 이름도 행적도 알 수 없는 무명순교자다.

하느님의 구원을 믿고 기쁘게 죽음을 택한 순교자들은 그 이름을 알 수 없을지라도 우리 신앙의 뿌리로서 마땅히 기억돼야 한다.

순교자 성월을 맞아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한 이들의 삶을 기억하고 묵상하기 위해 박해 시대 무명순교자들의 흔적을 찾아본다.

수원교구 손골성지에 있는 무명순교자 묘.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이름 모를 민초들의 신앙생활

무명순교자는 행적이 기록으로 남지 않았기 때문에 사료(史料)에 등장하는 평범한 신앙인들의 모습을 토대로 이들의 삶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초기교회 양반 지도층의 전교 활동으로 천주교는 평범한 민중 사이에 점차 뿌리를 내렸다. 특히 하층민과 부녀자들이 ‘만인 평등’을 외치고, ‘내세의 복락’을 약속하는 천주 신앙에 이끌리며 큰 무리를 이뤘다. 교회 안에 여러 신분이 공존했지만, 평민 이하가 대다수였다는 여러 사료를 토대로 무명순교자 중에 신분이 낮은 이가 많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박해자들의 기록도 이를 뒷받침한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내포 홍주에서 천주교인을 색출하던 무관 노상추가 쓴 「노상추 일기」 1801년 2월 13일자에는 “사학에 빠진 이들은 남녀에 차이가 없으며 상놈이 대부분”이라고 기록돼 있다. 또 노상추는 글을 모르는 수많은 이들이 입으로 교리를 외워 학습하고, 구슬 고리를 지니고 자주 외운다고 밝혔다. 문맹 신자들이 교리를 입으로 외우면서 익히고,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쳤다는 증언이다.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조선왕조실록에도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어리석고 우둔한 무리들이 성사나 영세와 여러 가지 의식을 달게 여기고 있다”고 기록돼 있다.(고종실록, 고종 3년 8월 3일) 사제를 쉽게 못 만나고, 언제 붙잡혀갈지 모르던 신자들에게 성사와 미사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귀했다. 병인박해 때 순교한 푸르티에 신부는 “신자들은 매우 초라한 오두막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살아있는 신앙과 순박한 마음으로 예배하며 경멸과 모욕과 괴롭힘을 견뎠다”고 전한다.(1865년 11월 20일,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

순교자들이 천주의 가르침을 몸소 살아내려 노력한 모습도 사료 곳곳에 나온다. 박해를 피해 깊은 산 속에 숨어 살던 교우촌 신자들은 신분 구분 없이 서로를 섬겼다. 화전을 일구고 옹기를 구워 팔며 곤궁히 살면서도 콩 한쪽도 서로 나누고, 과부와 고아까지 거두며 사랑을 실천했다.

대전교구 신리성지의 무명순교자 묘. 1972년 32기의 유해가 발견됐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대전교구 해미국제성지 ‘진둠벙’. 많은 순교자가 수장됐다고 알려진 곳이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죽음을 고향 돌아가듯 여기는 마음

“듣건대, 야소(耶蘇·예수)는 가장 참혹하게 죽은 자라고 하는데 이를 보고 징계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죽는 것을 즐거운 장소로 여기며 칼과 톱을 견디고 혼몽하게 두려움조차 알지 못한 채 취한 듯이 하여 꺼내어 깨우칠 수가 없으니….”(헌종실록, 헌종 5년 10월 18일)

순교자들은 박해로 온갖 잔혹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죽음 앞에서 결연했다. 오히려 죽음을 아버지 계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처럼 즐겁게 여겼다. 노상추는 1801년 4월 7일 일기에서 “사학에 미혹된 이 무리들은 형벌도 겁내지 않고 죽임을 당해도 후회하지 않는다”며 “이 무리들이 장(杖)을 참아내는 것이 지극히 통탄스럽다”고 분개했다.

이런 믿음은 성인 신자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무명순교자 중에 어린이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일화가 있다. 리델 신부는 병인박해 때 안드레아라는 신자의 집에 잠시 은신하던 중 그의 12살짜리 딸 안나와 어린 두 아들이 “천주를 배반하지 말고, 죽어서 천당에 가자”고 약속하는 것을 들었다. “우리가 천당에 가려면 천주께 기도해야 된다. 우리 머리칼과 이와 손을 뽑고 굵은 몽둥이로 때릴 거야. 기도를 잘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것이다.” 남매는 어린 나이에도 어른 못지않은 굳은 신앙심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1866년 12월 23일, 가족에게 보낸 편지)

「근세조선정감」에도 “천주교인들은 장을 맞고 피부가 낭자하게 터지는데도 ‘내 몸에서 혈화(血花)가 나니 장차 천당에 오르겠다’고 환호하고, 어린아이들도 부모를 따라 천당에 오르기를 원했다”고 기록돼 있다.

인천교구 일만위순교자현양동산 ‘무명순교자의 길’ 입구.

■ 기록 없어도 잊힐 수 없는 이들

단편적인 문자 기록과 달리 땅에는 무명순교자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대전교구 해미국제성지는 병인박해 당시 1000명이 넘는 신자가 희생된 순교터다.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는 132명뿐이다. 군졸들은 충청도 각지에서 끌려온 신자들을 빠르게 처형하기 위해 깊은 구덩이를 파고 한꺼번에 생매장했다. 팔을 묶어 진둠벙이라는 웅덩이에 수장하고, 자리개질로도 죽였다. 이 처형의 흔적들이 현재 성지에 보존돼 있다.

무명순교자는 보통 머리 없는 유해로 발견되는 경우가 많고, 썩어 부서진 묵주와 십자가도 함께 출토돼 이들의 존재를 알렸다. 대전교구 신리성지에는 1972년 머리 없는 시신으로 발견된 32기 무명순교자의 묘가 있다. 목격자들은 “발굴 당시 유골과 함께 나온 묵주의 양이 시골 바가지로 한 바가지였다”고 증언했다.

수원교구 죽산성지도 병인박해로 많은 이가 피 흘린 곳이다. 이름이 알려진 순교자는 25명에 불과하다. 이곳은 박해 때 “거기로 끌려가면 죽은 사람이니 잊으라”하여 ‘잊은 터’로 불렸다. 지명에 깃든 사연이 순교자의 발자취를 알리기도 한다.

청주교구 배티성지 무명순교자 6인 묘는 살아남은 교우촌 신자들이 순교자들의 시신을 직접 수습해서 만든 묘다. 이 밖에도 대전교구 다락골성지와 성거산성지, 원주교구 배론성지, 수원교구 손골성지와 미리내성지, 제주교구 황사평성지 등 많은 성지에서 무명순교자 유해를 모시고 있다.

무명순교자를 포함해 1만 명 순교자의 넋을 기리는 순례지로 인천교구 일만위순교자현양동산이 있다. 이곳에 있는 무명순교자 길에는 이들의 삶을 묵상하게 하는 여러 상징이 설치돼 있다. 순교자 현양은 이름 모를 무명순교자까지 기억할 때 완성된다는 뜻에서 조성한 길이다.

내포교회사연구소 방상근(석문가롤로) 연구위원은 “무명순교자는 기록이 없다 해도 잊힐 수 없는 존재”라며 “유해가 발견된 분뿐만 아니라 어디에 묻혀 계신지 조차 알 수 없는 모든 무명순교자를 우리의 신앙선조로서 기억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라고 강조했다.

수원교구 죽산성지 무명순교자 묘.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염지유 기자 gu@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