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연중 제27주일·군인 주일 - 성실한 종

박용욱 미카엘 신부 (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
입력일 2022-09-27 수정일 2022-09-27 발행일 2022-10-02 제 3312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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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하바 1,2-3; 2,2-4 / 제2독서  2티모 1,6-8.13-14 / 복음  루카 17,5-10
억압받고 고통에 찬 현실 속에서도
주님께 의지하고 사명에 충실해야
인간적인 실망과 조급함 떨쳐내고
하느님의 겸손한 종으로 살아가길

장 프랑수아 밀레 ‘괭이를 든 남자’.

요즘 많이 인용되는 심리학 용어 중에서 ‘더닝-크루거 효과’가 있습니다. 능력 없는 사람은 자기 실력을 높게 평가하지만, 반대로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이론입니다. “선 무당이 사람 잡는다”, “책 한 권만 읽은 사람이 가장 무섭다” 같은 말을 보면 그다지 틀린 이론 같지 않습니다. 반면, 충분히 남을 도울 만하고 생산적인 일을 해낼 만한 사람이 겸손을 핑계 삼아 뒤로 숨는 경우도 더러 있지요. 더닝-크루거 효과를 방증하는 또 다른 사례입니다. 아무튼 자기를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하지 않고, 자기 자리와 역할을 잘 알아서 그에 맞춰 제 몫을 하는 것은 삶의 근본 지혜요 의무에 속합니다.

오늘 첫째 독서는 고통스런 현실 앞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고뇌하는 하바쿡 예언서의 한 부분입니다. 하바쿡 예언서는 총 3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오늘 첫 번째 독서는 그 세 장 전체를 몇 줄로 간추려서 핵심을 전합니다.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억압받고 고통받는 이라면 누구나 던질 법한 질문이 독서의 첫머리를 엽니다. “주님, 당신께서 듣지 않으시는데 제가 언제까지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까? 당신께서 구해 주지 않으시는데 제가 언제까지 ‘폭력이다!’하고 소리쳐야 합니까?”(하바 1,2-3)

폭력이라고 번역된 히브리 단어 하마스는, 교만하고 탐욕스런 사람들이 다른 이들을 이용해 먹으면서 충만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 기회를 빼앗는 의도적 행동을 말합니다. 하바쿡이 보기에 세상은 폭력 천지입니다. 곳곳마다 파괴, 고발과 소송, 시끄러운 논쟁, 그리고 불행이 넘쳐납니다. 쥐꼬리만 한 권력이라도 가지면 그 힘에 도취되어 남을 해칩니다. 이렇게 동서남북 위아래를 가리지 않고 폭력이 퍼져 있으니 몇 군데 악하고 썩은 부분을 도려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힘센 손으로 저 악한 무리들을 모조리 후려치셔야 속이 시원해지겠습니다. “하느님, 언제까지 기다려야 제 생각대로 세상을 갈아엎으시겠습니까? 제가 하느님이라면 당장 저 악한 이들을 처단하고 하느님 나라를 완성할 텐데, 왜 침묵하십니까?” 어쩌면 하바쿡의 질문에는 그런 속내가 숨어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고통과 악에 대한 문제의식과 억압받는 이들에 대한 연민으로 시작했다가, 어느덧 선을 넘게 되는 인간의 모습이 하바쿡의 질문에 투영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 자리와 역할을 잊고 하느님의 자리에 올라 하느님의 책임과 역할을 따지는 인간의 모습 말씀입니다.

그 질문을 두고 주님께서는 하바쿡이 원하는 방식으로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모든 종류의 압제자들이 몰락하고 하느님의 약속이 완전히 실현되는 환시를 기록하라고 하십니다. 무릇 “제비는 옷 폭에 던져지지만 결정은 온전히 주님에게서만 온다”(잠언 16,33)고 하지요. 사람에게는 사람이 할 일이 있고 하느님께는 하느님의 일이 있습니다. 시작은 인간이 할 수 있으되 맺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잊고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창세 3,5) 되는 것, 그러니까 사람이 하느님의 자리에 올라 스스로 선과 악을 가름하는 것은 역사의 시초부터 인간을 유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유혹에 넘어진 사람은 오늘 첫째 독서가 말하듯 ‘뻔뻔스러운 자, 정신이 바르지 않은 자’가 되고 맙니다. 바른 정신의 신앙인이 할 일은 따로 있습니다. 끝내는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하느님을 믿고 “의인은 성실함으로”(하바 2,4) 삽니다.

그런 맥락에서 화답송은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하고 권고합니다. “너희 조상들은 나를 시험하였고, 내가 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떠보았다.” 하느님의 업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자기 생각대로 하느님이 움직여주시길 바라는 무디고 닫힌 마음을 접어 두라는 말씀이겠습니다. ‘주님 목장의 백성’(시편 95, 화답송)이 할 일은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제2독서, 2티모 1,8)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하지 말고 우리에게 주어진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따라 자기 사명에 성실해야 합니다.

이어서 듣는 복음은 예수님의 두 가지 가르침을 묶어서 전합니다. 먼저 루카 복음사가는 과연 예수님이 믿을 만한 분인지 미심쩍어하는 제자들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삶을 과연 예수님께 믿고 맡겨도 될지 긴가민가하면서 믿음을 더해달라고 청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작디작은 겨자씨와 커다란 돌무화과나무를 대비시키면서 제자들의 불신과 의심을 지적하시지요. 세리 자캐오가 예수님을 뵙고 싶어 올랐던 나무가 돌무화과나무였습니다.(루카 19,4 참조) 그만큼 큰 나무도 작은 씨에서 시작되는 법이고, 그 큰 나무를 옮기는 일도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인간적인 실망과 조급함을 버리고 하느님의 약속과 성취에 의지하며 믿음의 길을 성실히 살아가면 하느님의 업적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음으로 오늘 복음의 두 번째 가르침은 제자들이 성실한 종의 태도를 배우고 실천하기를 권합니다. 자의식이 너무 강한 사람, 자기 뜻이 하느님 뜻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설사 그 뜻이 원대하고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실제로는 하느님 나라와는 관계없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낮추인 마음을 낮추아니 보시는”(시편 50) 하느님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치고,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하느님의 자리에 오르려 하지 않고 겸손하고 성실하게 직분을 다하는 사람, 자기를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을”(루카 17,10) 하는 겸손한 종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우리에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박용욱 미카엘 신부 (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