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민족·화해·일치] 성지순례에서 느끼는 단상 / 박천조

박천조 그레고리오(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연구위원)
입력일 2022-10-04 수정일 2022-10-04 발행일 2022-10-09 제 3313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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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신자들과 함께 미리내성지를 다녀왔습니다. 예비신자들은 묵주기도와 십자가의 길, 그리고 미사에 참례하면서 여러 감회를 느끼신 것 같습니다. 박해시대의 참혹함과 함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신앙선조들의 믿음을 생각해 보며 마음가짐을 정돈하는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저도 읽어 볼 책을 한 권 샀습니다. 제목은 「피어라 순교의 꽃」(이충우 안드레아 작). 전국에 있는 성지를 소개하는 책이었습니다. 발간 년도는 다소 오래됐지만 수록된 내용들이 많은 생각을 떠오르게 합니다.

신해, 신유, 기해, 병인박해 등 100여 년에 걸친 박해시기는 우리 신앙을 증거하는 과정이기도 했지만 같은 인간으로서 차마 해서는 안 될 살육의 현장이었습니다. 문득 이런 우리 민족에게 하느님께서는 어떠한 벌을 내리셨을까 자문해 봤습니다.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무수히 많은 우상숭배와 배신의 과정을 거치고 심지어는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인 이스라엘 민족이 이후 2000년의 시간을 떠돌았던 것처럼 분명히 우리 민족도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고 있을 텐데…. 그러다가 우리가 겪고 있는 현대사의 비극이 바로 이 박해를 지켜보고 계셨던 하느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내린 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해시기 이후 진행됐던 일제 식민지배와 동족상잔, 그리고 분단의 아픔 등이 떠올랐습니다. 박해시기에 일부 정치세력들만이 죄를 지은 게 아니라 우리 민족도 하느님을 믿고 있던 분들을 치명에 이르게 한 대죄를 지었던 것이었습니다.

장탄식 끝에 하느님을 믿고 있던 분들을 박해했던 대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 민족이 해야 할 역할은 과연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됩니다. 결국 우리 민족의 대죄는 하느님을 믿는 우리 신앙인들과 교회가 속죄양처럼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용서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묵상해 봅니다.

세계가 점점 갈등의 길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최근의 한반도만 보더라도 선제타격이라는 단어와 핵무기 법제화라는 단어가 남북 사이에 오가고 있습니다. 벌을 받고 있는 우리가 더 큰 벌을 자청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더 큰 벌을 받기 전에 우리 신앙인과 교회가 속죄양처럼 평화를 갈구해야겠습니다. “그는 주님을 경외함으로 흐뭇해하리라. 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결하지 않고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 심판하지 않으리라”(이사 11,3)는 말씀이 와닿는 하루입니다.

박천조 그레고리오(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