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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40) 풍성한 신앙 유산 깃들어 있는 배론성지

민경화 기자
입력일 2022-10-19 수정일 2022-10-19 발행일 2022-10-23 제 3315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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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기초 다진 신앙 역사의 숨결 고스란히
신해박해 이후 형성된 배론 교우촌
조선 유일의 신학교 ‘성 요셉 신학교’
장주기 성인이 봉헌한 초가집에서 운영
황사영이 숨어 지낸 토굴도 보존돼 있어

1855년 프랑스 선교사 메스트르 신부에 의해 설립된 성 요셉 신학교.

1791년 신해박해 이후 신앙을 지키기 위해 신자들이 모여들었던 배론 교우촌. 이곳에서 최양업은 부모님의 순교행적을 서한에 적어 내려갔다. 최양업이 서한을 보냈던 1855년 무렵, 배론에는 성 요셉 신학교가 세워졌다. 배론 교우촌 회장이던 장주기 성인의 봉헌으로 마련된 세 칸짜리 작은 초가집에서 신학생들과 서양선교사들은 조선교회의 장밋빛 미래를 꿈꿨을 것이다. 백운산과 구학산 산줄기 아래 고요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배론성지는 한국교회의 기초를 다진 풍성한 신앙의 역사가 깃들어 있다.

■ 신앙선조들의 신앙을 향한 열정 엿볼 수 있는 배론성지

충북 제천군 봉양면 구학리에 위치한 배론성지. 1791년 신해박해 이후 충청도 남부에서 피신해온 신자들이 옹기점을 운영하며 신앙을 지켜온 배론의 본래 이름은 ‘팔송정의 도점촌(陶店村)’이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는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고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순교하는 것을 목격한 황사영이 이곳에 숨어든다. 배론에서 옹기점을 운영하고 있던 신자 김귀동은 황사영을 돕고자 옹기점 뒤에 토굴을 파고 은신처를 제공한다. 이곳에서 황사영은 중국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편지를 쓴다. 황사영 백서로 알려진 이 문서에는 신유박해의 진행과정, 순교자 열전, 교회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5가지 방안 등이 적혀있다. 하지만 이 문서는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되지 못한 채 압수됐고, 황사영은 1801년 11월 5일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 형을 받고 순교한다.

백서에 연루된 신자들이 체포되거나 순교하는 큰 사건을 겪었으나 배론 교우촌의 신앙은 무너지지 않았다. 50여 년이 지난 1855년 성 요셉 신학교가 세워지면서 한국교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최양업 신부의 묘.

■ 최양업 신부, 마침내 배론성지에서 걸음을 멈추다

배론성지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다. 황사영이 백서를 썼던 황사영 백서 토굴과 성 요셉 신학당, 그리고 최양업 신부의 묘지다. 12년간 사목 활동을 하던 최양업은 과로와 장티푸스로 쓰러져 푸르티에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고 1861년 6월 15일 선종했다. 그의 시신은 배론에서 약 70㎞ 정도 떨어진 작은 교우촌에 묻혔다가 5개월가량 지난 11월 초, 성 요셉 신학당 뒷산으로 이장됐다.

성 요셉 신학당을 지나 숲길을 따라 올라가면 최양업 신부 동상이 순례자들을 맞는다. 동상 앞에 선 순례객들은 조선의 신자들을 위해 애쓴 최양업 신부를 위해 기도하며 오랫동안 그곳에 머무른다. 다시 길을 오르면 산 중턱에 있는 최양업 신부의 묘지를 만날 수 있다. 쉬지 않고 걷고 또 걸어 신자들과 만났던 최양업 신부가 마침내 걸음을 멈춘 곳. 그 노고를 묵상하며 순례자들은 최양업 신부에게 전구를 청한다.

성 요셉 신학교는 1855년 프랑스 선교사 메스트르 신부에 의해 설립됐다. 교우촌 회장 장주기 성인이 봉헌한 세 칸짜리 초가집에서 사제들이 양성됐다. 조선에서 유일한 신학교였지만 형편은 녹록지 않았다. 학생 수는 6명에 불과했고 교재도 변변치 않았다. 방 하나는 교실 겸 숙소로, 다른 방 하나는 선교사 신부의 거처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성 요셉 신학교 교장이었던 푸르티에 신부는 1865년 11월 20일자 서한에서 신학교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감옥, 즉 신학교 역할을 하는 오두막집에 8년간 갇혀 있었기 때문에 내 건강이 완전히 악화됐습니다. 그러나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학생들과 나는 방 두 개밖에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이 두 방이 형편없이 잘 닫히지 않는 칸막이로 나누어져 있어서 공기와 발산하는 냄새가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조금도 어렵지 않게 침투합니다. 이번 겨울에 나는 발진티푸스에 걸렸었는데 학생들에게 옮겨져서 차례차례로 앓고 있습니다.”

신학교의 외관은 낡고 초라했으나 그 안에서 공부를 했던 신학생들의 열정은 전혀 초라하지 않았다.

1856년부터 푸르티에 신부가 교장으로, 프티니콜라 신부가 교수로 재직했고, 신학생들은 라틴어를 비롯해 수사학, 천문학, 음악, 지리, 역사,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일반교양 과목과 신학의 전문 지식을 이곳에서 배웠다.

황사영이 백서를 쓰기 위해 숨어 지낸 토굴.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