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교회

[글로벌칼럼] (114)죽음의 달, 11월/ 윌리엄 그림 신부

입력일 2022-11-16 수정일 2022-11-16 발행일 2022-11-20 제 3319호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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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죽음과 부활 기억하며
확실한 희망 갖고 죽음 대해야

고대부터 북반구, 특히 유럽에서 11월은 죽음의 시기였다. 나뭇잎은 시들어 떨어졌고, 나무들은 땔감으로 베어졌다. 작물들은 수확됐고, 가축들은 도살돼 겨우내 먹을 음식으로 저장됐다. 사람들은 봄에 뿌릴 씨가 충분히 남아 있길 기대하면서 곡물을 창고에 보관했다. 해는 낮게 뜨고 낮은 짧아졌다. 사람들은 해가 다시 과거처럼 높이 떠오를 수 있을지 아니면 이대로 사라져버릴지를 걱정했다. 차갑고 무거워진 공기에 더 많은 눈이 내렸다.

이런 11월 풍경을 고스란히 받아들인 그리스도교에서는 유럽은 물론 남반구에서도 11월을 죽음의 달로 기념했다.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을 시작으로 한 달 동안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어느 저녁식사 자리에 함께한 사람에게 “죽은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세요?”라고 물었다. 그 사람은 러셀의 질문을 무시하려고 애썼지만 러셀이 계속 물어보자, “글쎄요, 영생을 얻지 않겠어요? 하지만 지금 이런 불편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네요”라고 답했다.

이 역설적인 대답은 죽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이란 새로운 생명으로 향하는 문’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실제 죽음을 마주하게 되면, 강하게 반발한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니 언덕에서 기도하실 때 보여준 것처럼 죽음을 밀어내려고 했다.

우리는 죽음을 죄의 결과, 즉 하느님, 이웃, 진정한 자기 자신과 멀어진 데에 대한 벌이라고 말한다. 바로 우리가 부르는 원죄에 대한 결과인 것이다.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죄가 죽음의 결과라고 할 수 있지도 않았을까?

분명, 죽음은 우리 삶의 일부다. 모든 생명체는 죽는다. 죄를 짓지 않더라도 말이다. 죽음은 창조 때부터 짜여 있었다.

몇몇 동물들이 죽음에 대해 인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인간을 제외한 그 어떤 종도 죽음이 그저 저승에 가는 것 이상의 것이라고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 인간에게 죽음은 아주 가까이에 있다. 죽음은 어느 날 각자에게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외면하면 할수록 인간은 한계에 직면한다. 나는 스스로 최고가 되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권력을 잡으려 했고, 죽음도 나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믿으려 애썼다. 명성을 얻으려고 노력했으며, 나는 너무 중요한 사람이어서 죽을 수 없을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사실 이런 것들은 예수님께서도 사막에서 받았던 유혹들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유혹을 물리치셨고, 십자가로 향해 가셨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우리는 유혹에 굴복해 왔다. 우리는 죽음이 하느님과 이웃, 진정한 자기 자신과 멀어지게 하도록 내버려 뒀다. 죽음을 마주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 어느 면에서는 죽음을 그저 수용하는 것이 우리 죄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의사이자 저술가였던 토머스 브라운은, 죽음에게는 “우리에게 매일 죽어가는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형제가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죽음의 형제는 누구이고 무엇일까? 매일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상기시키는 상황에 맞닥뜨리고, 이 상황은 우리의 희망과 행동에 제약을 가한다. 이런 상황은 또 우리가 우리의 삶과 이 세상에 온전한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들이 바로 죽음의 형제다.

계획이 실패하고, 희망이 내동댕이쳐지고, 우정이 끝나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고, 젊은 활력과 건강이 시들해진다. 자연재해와 다양한 인재가 불시에 우리 앞에 닥친다. 나의 과거와 그 과거의 일부였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원히 사라졌다. 매일 나의 삶은 유연해지거나 다른 길로 바뀐다. 내가 한 선택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지만, 내가 하지 않은 선택은 차단된다.

이 죽음의 형제는 항상 우리와 함께 있고, 죽음이 올 때까지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대개 우리는 이 죽음의 형제를 싫어하고 두려워하고, 멀리 쫓아내고 싶어 한다. 우리는 이 죽음의 형제를 죽음에서 떼어놓으려 한다. 우리는 그를 기만하고 욕보인다. 우리는 그에게서 눈길을 돌리고 그의 존재를 거부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지 않는 일, 할 수 없는 일을 하시기 위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감을 갖고 있었지만 이를 무릅쓰고 죽음을 향해 다가가셨다. 죽음보다 더 강한 하느님 사랑에 대한 확신으로 순명하며 죽으셨다.

우리는 모두 죽음이 올 것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피하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보여주신 하느님의 생명은 영원하다는 것을 알기에 희망을 갖고 죽음에 맞설 수 있다. 그 어떤 죽음도 이 사랑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매 주일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한다. 11월의 주일에는 특히 더 주님의 부활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윌리엄 그림 신부

메리놀 외방전교회 사제로서 일본 도쿄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일본 주교회의가 발행하는 주간 가톨릭신문 편집주간을 지내기도 했다. 현재는 아시아가톨릭뉴스(UCAN) 발행인으로 여러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