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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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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57) 남북 신자 첫 통일 세미나

“남북한 천주교 신자들이 분단 반세기 만에 만났다. 남북한 및 해외 천주교인들은 10월 30일 뉴저지 포트리시 힐튼호텔에서 ‘조국 통일을 위한 천주교인의 역할’과 ‘남북 해외 천주교인의 연대 강화’를 주제로 세 차례의 세미나를 가졌다. 이 세미나에서 남측의 장덕필(니콜라오) 명동본당 주임신부와 손병두(요한 보스코) 평신도사도직협의회 국제분과위원장이, 북측에서는 장재철 조선천주교인협회 중앙위원장, 김유철 조선천주교인협회 중앙위원회 부부장이 각각 주제발표했다. 남북 참가자들은 일요일인 29일 뉴욕 소재 퀸즈한인성당에서 1000여 명의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주일미사를 봉헌하고 교민 신자들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최창무(안드레아) 주교는 미사 강론에서 ‘이 미사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전제, ‘평양의 장충성당 교우와 남한과 해외 신자들이 함께 미사를 드리면서 하나임을 느낄 수 있다’고 양측의 만남에 기쁨을 표시했다. 이어 차성근 장충성당 회장은 ‘북측 신자들은 미흡하나마 주일을 거룩히 지켜왔다’며 ‘오늘 우리가 처음 만나지만 여기에 그치지 말고 통일의 그날까지 함께 하기를 기원하자’고 인사했다.”(가톨릭신문 1995년 11월 5일자 1면) 1995년 뉴욕에서 역사적 만남 남북 천주교 신자 친교 이루며 체제·이념 초월한 형제애 나눠 분단 50년 만의 감격스러운 만남 1995년 10월, 분단 50년 만에 남한과 북한의 천주교 신자들이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여 체제와 이념을 초월한 형제애를 나눴습니다. 남북 대표단은 28일 상견례와 만찬, 29일 공동 주일미사에 이어 30일 뉴저지 포트리의 힐튼호텔에서 통일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그동안 남한 천주교 인사들의 간헐적인 북한 방문은 있었지만, 남북한과 해외 천주교 신자들이 직접 모임을 갖고 통일을 위한 논의를 한 것은 분단 이후 처음이었습니다. 당시의 감격적인 만남의 순간들을 가톨릭신문은 11월 5일자 1면 보도기사에 이어 3면에서 상세하게 전했습니다. 미국 뉴욕 퀸즈본당 주임 안상인(요셉) 신부는 “여기 특별히 반가운 손님들이 오셨다”며 “우리 모두 북한의 형제들을 뜨겁게 환영하자”고 인사했습니다. 이어 북한 장충성당 차성근 회장은 “해외 교우들에게 장충성당 교우들의 뜨거운 인사를 전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번 만남에서 특히 북한에 고향을 두고 온 노인들은 북측 참가자들을 붙들고 눈물을 흘려 새삼 분단의 아픔을 실감하게 했습니다. 황해도 출신 신자들은 앞다퉈 북한 신자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고, 북한 신자들은 미사에 앞서 안상인 신부에게 북에서 신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가톨릭 기도서를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28일 열린 만찬에서는 남과 북의 신자들이 함께 식사하며 일치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신자들은 아쉬운 이별의 시간이 되자 서로의 어깨를 껴안고 정을 나눴고, 숙소인 힐튼호텔로 돌아오는 길에는 아리랑, 도라지 등 남북한 신자들이 함께 부를 수 있는 우리 민요를 열창했습니다. 남북 교류와 인도적 지원 물꼬 터 1995년은 통일과 민족화해 분야에서 큰 의미가 있는 상징적인 해였습니다. 서울대교구가 3월 1일 민족화해위원회를 공식 출범시키면서 북한을 바라보는 교회의 사목적 인식에도 중요한 전환이 이뤄졌습니다. 이제 더 이상 북한을 침묵의 교회나 타도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대화와 화해를 통해 일치를 이뤄야 할 상대로 여기게 됐습니다. 주교회의도 1999년 기존 ‘북한선교위원회’의 명칭을 ‘민족화해위원회’로 바꾸고 북한 선교를 형제적 나눔으로 재정의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남측의 민화위와 북측의 조선천주교인협회간의 소통이 이뤄지고 마침내 뜻깊은 만남이 성사된 것입니다. 당시 세미나는 학술 토론 자체보다 단절됐던 남북 교회 구성원들이 공식적으로 만나 끊어졌던 관계를 잇는 데 더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남북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임을 확인함으로써 향후 남북 간의 인도적 지원과 인적 교류를 상설화하는 공식적인 고리를 만들어내는데 그 참된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남측에서는 최창무 주교(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를 포함해 7명이, 북측에서는 장재철 위원장(조선천주교인협회 중앙위원장)과 차성근 회장(평양 장충성당 회장) 등 5명이 대표단으로 참석했습니다. 해외 대표단은 박창득 신부(아우구스티노·미주 교포 사목부 총대리) 등 5명으로 구성됐습니다. 신뢰 구축·교류 위한 대화로 남측 사제단 공식 방북 성사 민족화해 사목 지속 기반 마련 통일세미나의 성과와 영향 1995년의 뉴욕 세미나는 일회적인 교류에 그치지 않고, 남북 천주교 관계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됐습니다. 1년 반 뒤인 1997년 6월 4일부터 7일까지 중국 베이징에서는 제2차 만남이 성사됐습니다. 베이징 세미나는 일회성 만남을 넘어 지속 가능한 교류와 민족화해 노력의 토대를 구축하고자 실무적 성격의 대화로 진행됐습니다. 이 세미나에서는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의 방북 추진과 이에 앞선 남측 관계자의 방북, 명동성당과 장충성당의 자매결연, 상호 방문 등이 논의됐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두 차례의 세미나를 통해 구축된 신뢰를 바탕으로, 1998년 5월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 최창무 주교 등 7명으로 구성된 남측 대표단의 공식 방북이라는 역사적 결실로 이어졌습니다. 북측 조선천주교인협회 중앙위원회의 공식 초청으로 성사된 이 방북에서 남한 사제단은 평양 장충성당에서 북한 신자들과 함께 직접 미사를 봉헌함으로써, 분단 이후 한국 주교가 사목적 목적으로 북한을 공식 방문해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한 첫 사례가 됐습니다. 이는 한국교회의 대북 인도적 지원이 본격적으로 확대되는 계기로 이어졌습니다. 가톨릭신문에 따르면, 1995년부터 2000년 6월까지 서울대교구 민화위를 통해 총 78억 3000여만 원에 달하는 식량과 긴급 구호 자금이 북한 수재민과 취약계층에 전달됐습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여정 1995년 남북 가톨릭 신자 간의 첫 공동 세미나는 단지 50년 만의 악수나 일회성 만남에 그치는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남한교회가 북한 가톨릭 공동체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공식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계기가 됐으며, 남한교회 내부에 지속적인 민족화해 사목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2026년 7월 현재 한반도는 분단 81년, 6·25전쟁 정전 73년을 맞이했지만 남북 관계에 있어서는 대화 채널이 전면 단절된 극단적인 경색 국면에 놓여 있습니다. 북한은 2024년 대한민국을 ‘적대국가’로 규정한 데 이어 2026년 개헌에서는 통일 관련 표현을 삭제하고 영토 조항을 신설하는 등 ‘두 국가’ 노선을 명확히 제도화했습니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여전히 실천적이고도 다각적인 화해의 노력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주교회의 민족화해주교특별위원회 위원장 김주영(시몬) 주교는 2025년 8월 15일 발표한 ‘한반도 분단 80년 특별 사목 서한’에서 “불신과 미움 속에서 무기와 군사력을 방패 삼아 상대를 굴복시켜 얻은 평화는 참 평화가 아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북한 동포를 형제자매로 존중하고, 호혜적 협력에 기반한 교류를 지지하며 함께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발행일 2026-07-19 제3500호 8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56) 역사상 첫 명동성당 공권력 투입

“6월 6일 오전 8시 명동성당 내에 농성 중이던 장현일 쟁의실장 등 한국통신 노조원 6명에 대한 경찰의 기습적 구속 연행으로 한국교회 사상 첫 공권력 투입 사태가 벌어진 가운데 명동본당 사제단은 ‘현 정부는 2000년 동안 지켜온 교회의 관례법을 침해했다’고 규정하고 ‘2~3일 내로 사제단회의 소집을 요청하고 서울대교구 차원에서 이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밝히겠다’고 발표했다. 사제단은 ‘정부의 공권력 투입은 5공과 6공 군사 독재 시절에 지탄받던 비도덕적인 권력의 남용과 현 정부의 모습도 다를 바 없음을 드러낸 것’이라고 전했다.”(가톨릭신문 1995년 6월 11일자 1면) 1995년 6월 6일, 현대사에서 가장 상징적이고 거룩한 공간으로 여겨지던 명동성당과 종로구 조계사에 경찰이 전격 투입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는 정부의 임금 가이드라인과 통신시장 개방, 한국통신 민영화 추진, 노조 간부 징계·사법처리 방침에 반발해 투쟁하던 한국통신(현 KT) 노동조합 간부들을 강제 연행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명동성당은 1970년대 유신 체제와 1980년대 제5공화국의 군사 독재 시절에도 민주화 운동가들과 약자들을 품어 안았던 ‘성역’이었습니다. 그러나 군사 독재 정권조차 넘지 못했던 이 성역의 문턱을, 민주화 운동의 성과를 안고 탄생한 ‘문민정부(김영삼 정부)’가 무력으로 유린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1995년 명동성당서 농성하던 한국통신 노조원 강제연행 종교계, “성역 침탈” 강력 반발… 4개 종단 공동 침묵시위 사태의 사회적 배경 우선 당시 한국 사회를 관통했던 세계화 질서로의 편입과 신자유주의적 노동 재편 과정을 살펴봐야 합니다. 한국통신 파업 사태는 단순한 사업장 내의 임금 협상 결렬이 아니라, 국가의 거시적 경제 정책과 노동계의 생존권이 정면으로 충돌한 구조적 모순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정부는 ‘세계화’를 최우선 국정 지표로 내걸고, 노동시장의 유연화와 공기업 민영화를 강도 높게 추진했고, 노조는 통신 시장 개방 반대와 대기업 위주의 통신 산업 민영화 중지를 요구했습니다. 노사 간의 갈등이 극한으로 치닫는 가운데, 김영삼 대통령의 발언이 사태를 파국으로 몰아갔습니다. 그는 노조의 주장을 ‘국가 전복의 저의’라고 규정하고 엄중한 사법 처리를 지시했습니다. 경찰, 두 차례 명동성당 난입 정부의 강경 대응 방침에 따라 경찰은 노조 간부 20여 명에 대한 검거에 돌입했습니다. 노조 지도부는 5월 22일 공권력의 출입이 제한되는 명동성당과 조계사로 피신해 무기한 천막 농성에 들어갔습니다. 농성 초기, 명동성당 측은 당혹감 속에서도 이들을 보호해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는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노조 간부들에게는 극한투쟁을 자제할 것을 설득하고, 사측과 정부 관계자들을 만나 타협안을 마련하기 위한 중재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6월 초, 정부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악화된 국정 지지율을 만회하고 보수층을 결집하기 위해, ‘통신 대란’을 구실로 대화와 타협 대신 무력 진압을 선택했습니다. 심지어 당시 경찰의 명동성당 난입은 두 차례에 걸쳐 이뤄졌습니다. 경찰은 6일 오전 8시, 5월 22일 이후 3주째 농성 중이던 한국통신 노조 간부 등 6명을 전원 연행했습니다. 전날인 5일 조계사 측과 중재안을 마련해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노력하던 명동성당 측은 정오에 사제단 기자회견을 갖고 배신감과 당혹감을 표명했습니다. 7일 저녁 9시 40분경 경찰이 재차 명동성당 내에 진입해 시위를 마치고 귀가하던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소속 대학생들을 무차별로 연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학생과 시민, 성당에서 교리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던 신자들, 성당 직원들까지 연행됐습니다. 법치주의와 인권 보호 놓고 보수·진보 단체 극심한 대립 변화하는 사회 속 교회 역할 새로운 방향성 찾는 계기로 성역 침탈에 거센 분노 전두환 정권의 군홧발마저 멈춰 세웠던 성역이 유린당하자, 종교계와 시민사회는 비통함과 함께 정권의 비도덕성에 대해 크게 분노했습니다.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은 이틀 뒤 특별 메시지를 발표, 명동성당이 독재 시절에도 성역으로 지켜진 것은 ‘치외법권 지대’여서가 아니라, 불의에 쫓기는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종교적 양심과 이를 존중해 준 시민사회의 도덕적 합의 덕분이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명동성당을 짓밟은 것은 곧 “(문민)정권 탄생의 모태를 짓밟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비판했습니다. 들불처럼 번지는 분노에 정부는 다급해졌고, 6월 16일 이홍구 국무총리가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담화는 법 집행의 정당성을 강변하고 명동성당이 치외법권 지대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해 사태를 악화시켰습니다. 한국 사회는 교회가 법치주의를 훼손한다는 보수 세력과, 노동자의 정당한 권익 주장을 폭력으로 짓밟고 종교를 모독했다는 진보 단체와 종교계의 규탄 사이에서 극심한 대립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습니다. 정치적 역풍과 명예 회복 정부가 명동성당 난입이라는 자충수를 둔 것은 6월 27일로 예정됐던 전국동시지방선거 때문이었습니다. 지지율이 폭락한 상황에서 정부는 보수 기득권층의 결집을 겨냥, 강한 정부의 이미지를 연출하려 했지만,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종교계와 시민사회의 거센 분노가 반정부 여론에 불을 질렀고, 집권 여당은 참패해 문민정부의 정치적 기반은 더욱 위태로워졌습니다. 국가 전복 세력으로 낙인찍혀 명동성당에서 끌려 나갔던 노동자 대부분에 대해서도 그 혐의가 벗겨졌습니다. 결정적인 역사적 평가는 2006년에 내려졌습니다. 국무총리 산하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 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1995년 당시 해직 및 구속된 한국통신 노조 간부 26명 전원의 투쟁을 ‘민주화운동’으로 공식 인정하고 복직을 권고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성역’의 자발적 해제 이 사건은 한국교회와 명동성당에도 정체성의 위기를 초래했습니다. 1995년 공권력 투입 이후, 명동성당은 각종 단체와 노조의 농성장으로 변모하며 몸살을 앓게 됐습니다. 그해 12월, 결국 명동성당은 정상적 신앙 활동을 저해하는 집회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밝혔습니다. 이후 1997년 민주노총 지도부와 한총련 학생 농성, 1998년 퇴출 은행 노조 농성, 2000년 한국통신 노조 2차 농성 등 수많은 농성에서, 성당 측은 적극적 개입을 통해 자진 해산을 유도했습니다. 2000년 12월에는 관할 중부경찰서에 ‘시설보호요청’을 하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교회 안에서는 종교 본연의 기능 회복이라며 지지하는 입장과, 약자를 배제하고 교회의 기득권 계층화라는 비판이 동시에 제기됐습니다. 이러한 상반된 견해들은, 2010년대에 이르러 명동성당 구역에 대한 대규모 재개발이 이뤄짐에 따라 어느 정도 그 방향성이 드러나게 됩니다. 즉,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자본주의적 거대 소비 공간으로 재편된 명동성당 일대에서, 더 이상 사회적 약자의 농성이나 공권력과의 대치가 벌어지던 ‘성역’의 면모를 찾아보기는 어렵게 됐습니다.

발행일 2026-07-12 제3499호 12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55) 평화방송 케이블 TV 개국

“재단법인 평화방송은 3월 1일 오전 10시 서울 중구 저동 본사 사옥에서 평화방송 케이블 TV 개국식을 가졌다. 다매체 다채널 시대를 맞아 변화하는 시대의 새로운 선교적 요청에 따라 설립된 평화방송 케이블 TV의 개국으로 한국 천주교회는 역사상 처음으로 영상 선교의 새장을 열었다.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은 축사를 통해 ‘전국적으로 방송하는 케이블 TV가 전국 교회를 하나로 묶는 뜻깊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며 ‘이는 곧 지역 간, 계층 간, 세대 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추기경이 개국 선언문을 낭독하고 송출 버튼을 누름에 따라, 평화방송 케이블TV는 시그널이 행사장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역사적인 선교 TV 방송 첫 프로그램을 전국으로 송출했다. ‘시대의 빛 가정의 벗’을 캐치프레이즈로 하는 평화방송 케이블 TV는 채널 33을 통해 미사 중계, 성극, 종교영화 등의 직접 선교 프로그램과 생명, 환경, 가정 문제를 다루는 다큐멘터리 및 토론 프로그램을 통해 사회의 복음화와 인간화를 추구하게 된다.”(가톨릭신문 1995년 3월 12일자 1면) 영상 선교의 막 올려 한국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영상 매체를 통해 복음을 선포하는 케이블TV 방송국이 1995년 3월 1일 시작됐습니다. 평화 케이블TV 방송이 채널 번호 33번을 통해 가톨릭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영상 프로그램을 최초로 송출함에 따라, 평화방송·평화신문은 TV와 라디오, 신문을 모두 갖춘 가톨릭 종합 매스컴의 면모를 갖추게 됐습니다. 평화방송·평화신문의 설립이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1987년 11월 20일 개최된 서울대교구 사제총회 자리였습니다. 당시 서울대교구는 급변하는 사회 환경 속에서 복음적 가치를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해 인쇄 매체와 방송 매체를 동시에 아우르는 미디어 설립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이듬해 1월 설립 추진 위원회가 구성됐고, 1988년 5월 15일 홍보 주일을 기해 주간 ‘평화신문’이 창간됐습니다. 당시까지 유일한 교회 신문이었던 가톨릭신문은 그 소식을 다음과 같이 전했습니다. “서울대교구가 발행하는 주간 ‘평화신문’이 지난 15일 홍보 주일을 기해 창간됐다. 매주 8면으로 발간되는 평화신문은 직접적인 교회의 이야기를 다루지는 않으나 시사 문제를 교회의 시각으로 분석하고 비평하는 방향으로 편집될 예정이다. 12면으로 발행된 창간호에는 광주 사태 해결 방안에 관한 김수환 추기경의 회견 내용을 비롯해, 한반도 핵 문제 및 공해 문제 등의 시사 문제가 폭넓게 다뤄졌다.”(가톨릭신문 1988년 5월 22일자 1면) 평화신문 창간 다음 해인 1989년 재단법인 평화방송 설립이 허가됨에 따라 초대 재단 이사장으로 김수환 추기경이 취임했고, 초대 사장으로는 함세웅(아우구스티노) 신부가 임명됐습니다. 이어 1990년 4월 15일 평화방송 라디오(FM 105.3㎒)가 공식 개국했습니다. 가톨릭신문은 평화방송 라디오 개국에 대해서도 크게 환영하며 다음과 같이 보도했습니다. “서울대교구 평화방송이 부활대축일인 4월 15일 오전 11시 개국, 본격적인 정규 방송에 들어간다. 국내 처음으로 보도, 사회, 교양, 음악, 오락, 종교 등 모든 것을 다루는 FM 종합 방송 매체로 개국하는 평화방송은 매일 아침 5시부터 다음 날 새벽 2시까지 하루 21시간 주간 총 8820분간 방송된다.”(가톨릭신문 1990년 4월 15일자 1면) 초창기 전파 송출 시설은 남산타워에 가설됐고, 서울 중구 저동의 평화빌딩에 제작 스튜디오를 마련해 개국을 준비했습니다. 1990년 3월 6일 시험 전파를 첫 송출한 평화방송은 4월 1일부터 지상파 텔레비전을 통한 대대적인 광고를 시행하며 인지도를 높였고, 4월 15일 ‘맑은 소리, 밝은 세상’이라는 공식 캐치프레이즈 아래 FM 라디오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개국 초기 라디오 편성은 종교 18.1%, 보도 12.7%, 사회 교양 26.1%, 음악 및 오락 43.1%의 종합 편성 정책을 따랐습니다. 케이블TV 개국으로 종합 매스컴으로 발돋움 그런데 라디오 방송국 개국 직후인 1991년, 평화방송은 종교 방송의 사회적 역할과 보도 영역의 한계를 둘러싼 내홍을 겪게 됩니다. 갈등의 근원은 복음 선포와 영성 교육 중심의 순수 선교 방송을 지향했던 경영진과, 사회 정의 실현 및 비판 보도 기능을 우선시했던 제작진·기자들 간의 인식 차이에 있었습니다. 제작 거부, 파업과 농성, 공권력 투입과 대량 해고로 이어진 ‘평화방송 사태’는 국제기자연맹(IFJ)이 김수환 추기경에게 항의 서한을 전달할 정도로 대내외적 파장이 컸고, 결과적으로 사회적 보도 비중을 대폭 낮추고 선교 및 종교 프로그램을 확대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내부 갈등을 수습한 평화방송은 1993년 8월 종합유선방송 가톨릭 채널 사업자로 허가를 받으며 영상 미디어 영역으로 진출, 다매체 선교 시대를 열게 됐습니다. 동시에 지방 방송국 네트워크 건립 사업을 추진, 1996년에 광주와 대구 평화방송이 개국했고, 2000년에는 부산과 대전 평화방송이 문을 열었습니다. 2002년에는 위성방송 가톨릭 채널(SKY-평화)을 개국했고, 2009년부터는 초고속 인터넷망 기반의 IPTV(Olleh TV, B TV, U+TV) 송출을 개시해 전국 어디서나 가톨릭 영상 프로그램을 가정에서 실시간으로 시청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평화방송은 2016년 11월 23일, 창립 이래 사용해 오던 영문 약칭 ‘PBC’를 ‘cpbc’로 개칭하고, 법인 및 매체 명을 ‘가톨릭평화방송’과 ‘가톨릭평화신문’으로 변경했습니다. 이는 ‘평화방송’이라는 사명이 가톨릭교회의 공식 매체임을 명확히 드러내지 못한다는 한계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과 스마트 OTT 미디어 사목 2020년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 팬데믹은 공동체 미사의 중단이라는 전례 없는 영적 단절을 야기했습니다. 이에 가톨릭평화방송은 비대면 사목의 핵심적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감염병 확산 방지를 위해 대면 미사가 전면 통제된 시기에 가톨릭평화방송의 TV 미사 중계와 유튜브 성경 공부 콘텐츠는 신자들의 신앙 공동체적 유대감을 보존하는 가장 유력한 대체재로 부상했습니다. 이러한 뉴미디어 사목의 경험은 단발성 대응을 넘어 장기적인 디지털 플랫폼 생태계 구축으로 이어졌습니다. 2023년 3월 3일, 가톨릭평화방송은 국내 최초의 가톨릭 전문 모바일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플랫폼인 ‘cpbc플러스’를 공식 출시했습니다. 46만 개에 이르는 방대한 가톨릭 콘텐츠 라이브러리를 스마트폰과 PC로 무료 제공함으로써, 현대 가톨릭 신자들의 일상에 최적화된 유비쿼터스 미디어 사목의 지평을 개척한 것입니다.

발행일 2026-07-05 제3498호 12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54) 한국 사목지침서 공포

“주교회의는 3월 20~23일 3일간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1995년 봄 정기총회를 갖고 … 한국 지역 교회법전으로 성청이 인준한 ‘한국 천주교 사목지침서’를 부활대축일인 4월 16일자로 공포키로 하고, 6월 4일 성령강림대축일부터 시행키로 했다.”(가톨릭신문 1995년 4월 2일자 1면) 교회 사목과 행정 부문의 쇄신 1995년은 한국교회의 사목행정 부문에서 혁신을 이룬 해입니다. 주교회의가 그해 확정한 교회 사목과 행정 부문 쇄신은 「한국 천주교 사목지침서」 공포, 「한국 사제양성지침서」 제정, 교회 종합전산망 착수, 2천년 대희년 주교특별위원회 구성, 미사통상문 개정안 확정, 농민주일 제정 등입니다. 그중에서도 교황청이 인준하고 한국 주교회의가 총회에서 확정한 「한국 천주교 사목지침서」는 당시 전 세계 전교지역에서 지역교회가 자국어로 만든 유일한 지역 교회법전이었습니다. 이로써 한국교회는 전교지역에서 자국어로 번역된 보편 교회법전과 자국어로 작성된 지역 교회법전을 모두 갖춘 유일한 교회로 기록됐습니다. 주교회의는 동시에 「한국 사제양성지침서」를 승인해 사도좌에 인준을 신청했습니다. 이 지침은 한국 내 모든 대신학교 학칙과 내규에 적용될, 한국교회가 현대 세계와 교회에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사제를 양성하기 위한 기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1988년부터 8년 동안 작업해 온 「미사통상문」 개정안도 확정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처럼 2000년대 복음화를 대비해 미래 사목의 발판이 될 지역교회법과 사제양성 지침, 전례서 개정 문제 등을 확정, 시행함으로써 성숙한 지역교회로서의 자치권을 더욱 공고히 확립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전교지역 최초의 자국어 교회법전 「한국 천주교 사목지침서」의 제정은 20년이 넘는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노력의 결실이었습니다. 그 시발점은 1974년 주교회의가 기존 ‘한국 천주교 공동 지도서’(1932년 반포)의 개정 작업에 착수하면서부터였습니다. 이 공동 지도서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년) 이전의 트리엔트 공의회적 신학과 제도를 담고 있어, 현대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공의회 이후 쇄신된 교회의 모습을 반영하기에는 역부족이었으며 사실상 사문화된 상태였습니다. 이에 따라 현대 사목 환경에 부합하고, 1983년 공포된 새로운 보편 교회법전의 정신을 지역교회 안에서 구체화할 수 있는 새로운 개별 교회법의 제정이 요구됐던 것입니다. 이러한 요청에 부응해 주교회의는 산하 교회법위원회를 중심으로 이뤄진 길고 고된 작업 끝에 초안을 작성했습니다. 1988년과 1989년에는 입법예고 형식의 공개 시안이 배포되었고, 1992년 최종 시안과 영문 번역본이 로마에 제출됐으며, 마침내 1995년 1월 23일 사도좌 인준을 거쳐 4월 16일 공포, 6월 4일 시행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제정은 사실 원래 계획보다 다소간 늦게 이뤄졌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습니다. 우선 교황청의 심사 과정이 길고 복잡했으며, 수정과 보완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좀 더 핵심적인 이유는 1984년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 사목회의의 결실을 담아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200주년 사목회의를 통해 수많은 평신도와 사제들이 고백한 공동체적 식별의 성과물들을 법적인 조문 구조 안으로 담아내기 위한 나름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후대의 평가에서는 200주년 사목회의의 성과는 불과 일부만이 사목지침서에 수용됐다고 비판받기도 합니다. 즉, 성직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 토착화, 교회 운영의 민주화, 분단 현실 인식 같은 특징적 의제가 부분적으로만 반영됐다는 지적입니다. 내용과 역사적 의의 사목지침서는 보편 교회법의 복잡한 규정들을 압축하고, 한국의 사목 현장에서 신부들이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 ‘5분 안에 해답을 얻을 수 있는 실무 참고서’ 역할을 하도록 고안됐습니다. 총 1752조에 달하는 방대한 보편 교회법전의 체계를 긴밀하게 구조화하여 단 256개 조항으로 집약했으며, 이 중 성사생활에 관한 규정이 전체의 4분의 1 이상을 차지할 만큼 실천적이고 사목적인 유연성을 극대화한 것이 특징입니다. 총 6편 256개조의 본문과 부록으로 구성된 사목지침서는 제1편 하느님 백성(1~32조), 제2편 전례와 성사(33~136조), 제3편 사목(137~197조), 제4편 선교와 신자 단체(198~214조), 제5편 사회(215~256조)의 순서로 돼 있습니다. 제5편 사회에서는 한국 천주교 200주년 사목회의 의안을 대폭 수용했으며 제6편에서는 교회법이 준용하는 국내법 중 참고될 만한 법규를 발췌 수록했습니다. 사목지침서의 역사적 의미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라틴어에 기반을 둔 선교지 지도서 체제에서 벗어나 한글로 편찬한 지역 교회법을 갖게 되었다는 점에서 한국교회의 자치성과 법적 자기 정체성이 크게 강화됐습니다. 둘째, 전례·성사·혼인·본당 운영·교구 구조·신자 단체·사회 참여 등 사목 전반을 표준화해 전국 교회의 공통 기준을 제공했습니다. 셋째, 200주년 사목회의의 선구적 문제의식 특히 성직주의 비판, 교회 운영의 민주화, 토착화, 분단 현실에 대한 더 넓은 응답이 모두 동등한 강도로 법전 안으로 수렴된 것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이 문서는 ‘수렴’과 ‘선별’이 동시에 일어난 결과물이었습니다. 미완의 쇄신 사목지침서의 본질은 ‘한국교회의 자기 조직화’에 있습니다. 이 문서는 1930년대의 라틴어 지도서를 대체해 한글로 편찬한 지역 교회법으로서, 보편 교회법전·공의회 문헌·사목회의 의안·한국 사회 현실을 하나의 규범 체계로 묶은 것입니다. 전교지역에서 자국어로 작성된 지역 교회법전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되며, 이 평가의 핵심은 한국교회가 자신의 사목 환경 속에서 자기 언어와 사목적 감각으로 사목의 기준을 세웠다는 데 있습니다. 동시에 이 문서는 ‘완결된 쇄신’이 아니라 ‘절충된 쇄신’의 산물이었습니다. 1984년 사목회의가 던진 토착화, 평신도 참여, 권위주의 비판, 사회·민족 현실에 대한 더 깊은 응답은 사목지침서 안에서 부분적으로만 제도화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서를 과대평가하면 쇄신의 미완이라는 점을 간과하게 되고, 과소평가하면 전국 사목 표준화와 자치성 강화라는 실질적 성과를 놓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1995년 사목지침서의 최대 성과는 법적·사목적 공통 언어를 전국 교회에 부여한 데 있었고, 최대 한계는 그 법적 통합이 곧바로 시노드적 참여, 세대교체, 세속화 대응, 성직주의 극복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1995년에 하나의 법전을 가졌지만 그 법전을 복음적 가치와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도록 고쳐나가야 하는 사명을 여전히 부여받고 있습니다.

발행일 2026-06-28 제3497호 12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53) 르완다 난민 돕기 특별 모금 운동

“최악의 내전과 기아, 질병으로 죽어가는 르완다 난민을 도웁시다.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와 가톨릭신문사는 오늘부터 약 3개월 동안 르완다 난민 돕기 특별 모금 운동을 함께 전개합니다. 거듭되는 종족 간의 분쟁으로 인구 700만 명 중 100만 명이 학살됐으며 죽음을 피해 이웃나라로 피신한 200만 명의 르완다 난민들은 물, 식량의 부족과 콜레라 등 질병으로 인해 1분에 한 명꼴로 하루 수천 명이 죽어가는 실정입니다. 지구 저편에서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가는 르완다 난민들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어진 우리의 한 형제자매이며 ‘목마르다’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이번 특별 모금을 통해 모아진 성금은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로마 본부인 국제 카리타스를 통해 르완다 난민 구호 사업에 직접 전달될 예정입니다.”(가톨릭신문 1994년 8월 21일자 1면 사고) 탈냉전 시대의 도래는 세계 평화에 대한 장밋빛 기대를 낳았지만, 실상은 민족, 종교, 인종 간의 갈등으로 인한 유혈 분쟁의 시기였습니다. 특히 아프리카 대륙은 자연재해에 내전과 학살이 겹치면서 극심한 인도주의적 위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1994년 르완다에서 발생한 집단학살(Genocide)은 100여 일 동안 100만 명이 희생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국제사회는 초기 대응에 실패하며 수많은 무고한 생명이 마체테(정글용 칼)와 수류탄에 스러져가는 것을 무기력하게 방관했습니다. 그러나 사태의 참상이 전 세계로 전해지면서 각국 정부와 비정부기구(NGO), 그리고 종교계를 중심으로 뒤늦은 자성과 함께 대대적인 구호 움직임이 시작됐습니다. 당시 한국교회는 서구 선진국의 원조를 ‘받는 교회’였지만, 1990년대를 기점으로 ‘주는 교회’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도모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와 가톨릭신문은 1994년 8월부터 약 3개월간 대대적인 ‘르완다 난민 돕기 특별 모금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식민 지배가 초래한 참극 르완다의 집단학살극은 우발적인 부족 갈등이 아니라, 서구 제국주의의 폭력적 식민 통치 방식이 자아낸 구조적 모순의 폭발이었습니다. 원래 르완다에서는 트와족, 후투족, 투치족 등이 평화롭게 공존해왔습니다. 하지만 독일에 이어 르완다를 식민 지배한 벨기에는 효과적인 식민 통치를 위해 인위적으로 인종을 구분하고, 소수(15%)인 투치족이 다수(약 85%)인 후투족을 지배하는 구조를 고착화했습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권력을 장악한 후투족은 과거의 억압에 대해 보복하기 시작했고, 이는 지속적인 내전으로 이어져 르완다는 극도의 분쟁과 갈등의 늪에 빠져들었습니다. 여기에 가파른 인구 증가에 따른 토지와 자원 소유 경쟁의 심화로 종족 간 분쟁이 임계점으로 치달았습니다. 그러던 중, 1994년 후투족 출신 대통령이 암살되자 후투족 지배자들은 이를 투치족 반군의 소행으로 규정하고 모든 투치족을 말살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에 따라 투치족과 온건파 후투족들은 ‘바퀴벌레’로 불리며 집단학살의 희생자가 됐는데, 그해 4월 7일부터 7월 중순까지 100만여 명이 학살당하는 참극이 벌어졌습니다.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학살을 피해 인접국으로 탈출한 200만 명의 난민들이 겪는 고통은 참담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내전 책임자들에게 즉각 살상 행위 중단을 촉구했고, 전 세계에 긴급 원조를 호소했습니다. 가톨릭교회의 국제원조기구인 ‘국제 카리타스(Caritas Internationalis)’는 즉각 르완다 국내와 탄자니아, 우간다, 부룬디 등지의 난민수용소에 인력과 자원을 지원했습니다. 한국교회도 이에 적극 동참했습니다. 1990년대 초반은 한국교회가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도약하는 중대한 전환기였습니다. 1989년 서울 세계성체대회를 계기로 시작된 ‘한마음한몸운동’ 등을 통해 나눔 의식을 고양한 한국교회는, 1992년 주교회의 추계 정기총회에서 공식적으로 사회복지위원회에 해외원조 사업을 위임했습니다. 1993년 소말리아 돕기 모금 운동은 한국교회가 공식적인 해외원조를 시작한 중요한 기점이 됐습니다. 르완다 사태가 발생하자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는 7월 11일 국제 카리타스를 통해 1차로 미화 5만 달러(한화 4000만 원)를 긴급 송금했고, 이어 10만 달러(한화 8000만 원)를 추가로 송금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수백만 명의 난민이 콜레라와 기아로 1분에 한 명꼴로 사망하는 아비규환의 한계 상황에 다다르자,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는 8월 8일 총회를 통해 전 교회 차원의 대대적인 특별 모금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작은 정성으로 엮는 구원의 연대 가톨릭신문은 주교회의의 모금 결의에 적극 호응해 8월부터 3개월 동안 대대적인 르완다 난민 돕기 특별 모금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미 1993년 소말리아 돕기 모금에서 보여준 독자들의 놀라울 정도로 높은 관심과 참여는 르완다 돕기 모금에서도 이어졌습니다. 당시 가톨릭신문은 르완다 사태를 단지 먼 나라의 정치적 상황이나 재난으로 대상화하지 않았습니다. 비참하게 죽어가는 르완다 난민들을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어진 형제자매이자, 목마름을 호소하는 주님의 모습으로 여겼습니다. 그럼으로써 한국 신자들이 르완다 돕기를 신앙적 의무이자 십자가 고통의 동참으로 해석하도록 이끌었습니다. 또한 일반 언론이 정치적 이해관계나 선정적 폭력성에 주목할 때, 가톨릭신문은 난민들의 구체적인 고통과 생명의 위협, 인간의 존엄성에 집중했습니다. 아울러 3개월에 걸친 캠페인 기간 내내 전국 각지에서 접수되는 성금 현황과 미담 사례를 지속적으로 보도함으로써, 독자들이 자신들의 작은 정성이 교회를 통해 거대한 구원의 연대망으로 결속되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나눔의 기적’ 보여준 경이로운 참여율 한국교회 신자들은 최악의 참상에 대한 간절한 호소에 전례 없는 규모와 열기로 응답했습니다. 모금이 시작된 지 불과 석 달 만에 총 12억여 원이라는, 당시로서는 초유의 성금이 모였습니다. 이는 1993년 한국교회가 1년 동안 아프리카 전체 국가를 돕기 위해 모금했던 해외 원조 성금 총액(약 10억 원)을 단일 캠페인으로 뛰어넘은 놀라운 기록이었습니다. 이러한 물리적 액수보다 더욱 값진 성과는 참여한 기부 주체들의 광범위함과 헌신적인 사연들이었습니다. 거액의 뭉칫돈이 아니라 평범한 신자들과 사회적 약자들의 십시일반으로 모여 이룬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이들은 “부족한 가운데서도 어려운 이들을 돕는 것이 진정한 나눔”이라며 모금에 동참했고, 고통받는 이가 또 다른 고통받는 이에게 내미는 연대의 손길이야말로 복음의 진수임을 보여주었습니다.

발행일 2026-06-21 제3496호 12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52) 안중근 의사 복권

“일제 수탈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암살해 일제 치하의 제도교회에 의해 단죄됐던 안중근(토마스) 의사가 84년 만에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의 공개 사과로 의거의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한국 가톨릭교회 역사상 첫 공식미사로 김수환 추기경과 사제단이 공동 집전하여 8월 21일 오후 6시 서울 혜화동 가톨릭교리신학원 성당에서 봉헌된 안중근 의사 추모미사는, 안 의사 의거의 정당성을 기원하는 300여 명의 신자들과 학계 인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안 의사의 의거를 현양했다. 이날 안 의사 추모미사를 주례한 김 추기경은 미사 강론에서 ‘안 의사의 의거는 가톨릭 신앙과 상치된 것이 아니며 그 안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인정하고, ‘신앙심과 조국애는 분리될 수 없으며 일제의 무력 침략 앞에 민족의 존엄과 국권을 지키기 위해 행한 모든 행위는 정당방위와 의거로 보아야 한다’고 엄숙히 선언했다.”(가톨릭신문 1993년 8월 29일자 1면) 안중근 의사 의거, 84년 만에 정당성 인정 일제 강점기, 식민 지배하에서 독립에 대한 민족적 열망과 신앙에 바탕을 둔 의거를 행했던 안중근(1879~1910) 의사에 대한 공식적인 복권이 1993년 처음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은 8월 21일 서울 혜화동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봉헌된 안중근 의사 추모미사에서 안 의사에 대한 교회의 단죄를 두고 84년 만에 공개적으로 사과했습니다. 김 추기경은 이토 히로부미 암살 후 뮈텔 주교에 의해 살인죄로 단죄받았던 안 의사와 관련해, “가톨릭교회는 민족과 조국을 불의의 폭력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전쟁 중에 행한 살인 행위는 범죄로 단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따라서 안 의사의 의거는 정당한 행위였으며, 우리는 그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날 미사는 제도교회를 대표하는 현직 교구장이 공식 집전한 첫 번째 추모미사였습니다. 일제 치하의 한국교회가 범한 과오를 사과하고 바로잡은 이 사건은 한국 현대교회사의 일대 전환점으로 평가되었습니다. 이날 미사에 앞서 한국 가톨릭 문화사 연구회는 ‘안중근의 신앙과 민족운동’ 심포지엄을 가톨릭신문사와 한국 가톨릭 문화선양회의 후원으로 개최했습니다. 한국교회사연구 발표회 100회를 기념해 열린 심포지엄은 안 의사의 신앙과 민족운동을 학술적으로 재평가하고, 민족사 앞에 친일 행각의 과오를 범했던 한국교회에 올바른 자기 성찰의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신앙인 안중근의 의거와 교회의 단죄 신앙인 안중근에게 있어서 조국의 국권 회복은 신앙적 양심과 분리될 수 없는,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도정이었습니다. 그는 조선 천주교회의 존재 양식이 고통받는 민족을 구원하는 실천적 행동과 결부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하느님이 부여한 인류 공동의 평화를 파괴하고 대한의 독립을 짓밟는 일본 제국주의의 폭압을, 신앙인으로서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죄악으로 인식했습니다. 따라서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결행된 이토 히로부미 처단은 개인의 사사로운 원한이나 이념적 맹신에서 비롯된 단순 살인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을사늑약과 정미7조약이 황제와 국민의 동의 없이 군사적 위압으로 체결된 원천 무효의 조약임을 직시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의거는 국외에서 조직된 의병 부대인 ‘대한의군’의 일원이자 ‘의병 참모중장’ 자격으로 국권 회복과 동양 평화의 수호를 위해 감행한 전쟁의 일환이자 전술적 작전이었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주장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사법 재판과 신문 과정에서도 자신을 단순 살인범이 아닌 국제법상의 ‘전쟁포로’로 대우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교회는 그를 단죄하고 자동파문의 죄를 범한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뮈텔 주교는 안 의사의 거사를 살인 행위로 단죄했고, 그가 살인자로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공적인 참회의 표지를 보여주지 않는 한 가톨릭교회의 자녀로서 어떠한 성사도 받을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당시 원산본당의 브레 신부 역시 독립운동이라는 정치 활동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안 의사에 대한 성사 집전을 거부했습니다. 다만 빌렘 신부는 1910년 3월 초 뤼순 감옥으로 직접 찾아가 안 의사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그의 마지막을 지켰습니다. 빌렘 신부는 이로 인해 성무집행정지 처분을 받았습니다. 안 의사에 대한 단죄는 일제강점기 후반기로 갈수록 심화된 천주교회의 조직적 친일 행태와 궤를 같이합니다. 당시 제도 교회는 식민지 통치 질서 안에서 교회의 안녕과 선교의 자유만을 확보하려는 ‘교회보호론’적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웠으나, 이는 실질적으로 일제 군국주의에 대한 적극적인 협력과 굴종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일제 전시 체제기 경성교구에서는 수많은 친일 부역 행위가 자행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일제 강점 말기의 천주교회는 안 의사의 독립 투쟁을 철저히 외면한 것을 넘어, 식민 정권의 전쟁 수행을 적극적으로 보필하는 가슴 아픈 과오를 범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자기 성찰과 반성 1993년의 안중근 의사 복권은 한국교회 역사에서 획기적인 이정표를 제시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지속되어 온 ‘일제하 친일 행위’라는 교회의 뼈아픈 역사를 감추거나 변명하려 하지 않고, 진실 앞에 마주 서서 철저히 반성하고 사죄하는 용기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교회가 민족사의 고통과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음을 선언한 사건이었으며, 굴절된 교회사적 평가를 정상화함으로써 민족 복음화의 새로운 기원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복권으로 시작된 한국교회의 ‘기억의 정화’ 작업은 새로운 천년기를 여는 2000년 대희년을 맞아 민족사 속 교회의 잘못에 대한 성찰로 이어졌습니다. 주교회의는 2000년 12월 3일, 200년 한국교회사 안에서 범한 잘못을 고백하는 과거사 반성 문건 「쇄신과 화해」를 발표했습니다. 총 7개 항으로 구성된 과오의 성찰 중 제2항은 일제 식민 지배하에서 정교분리를 빌미로 독립운동에 나선 신자들을 제재한 데 대한 안타까움을 표명하고 용서를 청했습니다.

발행일 2026-06-14 제3495호 8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51) 세기말, 시한부 종말론과 휴거 신드롬

“‘휴거’는 일어나지 않았다. 10월 28일 자정 서울 마포구 성산동 다미선교회 총본부와 부산을 비롯한 전국 각 지역의 선교회 지부에서는 1000여 명에서부터 적게는 수십 명에 이르는 신자들이 예배에 나와 ‘휴거’를 기다렸으며, 이들 주위에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경찰 병력이 파견돼 동태를 파악하는 등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휴거가 무위로 끝난 10월 29일 현재 이를 지켜본 신자들과 시민들은 허탈감에 빠진 일부 맹신도들에 의한 집단자살, 혹은 시한부 종말론 때문에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의 보복성 폭력과 같은 비상사태가 일어나지 않을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와 함께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모태는 사실상 기성 교회라는 자성의 목소리와 이들을 다시 교회의 품 안으로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방법을 연구하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지적이 교회 내에서 높게 일고 있다.”(가톨릭신문 1992년 11월 1일자 1면) 휴거는 없었다 세기말을 앞둔 1992년 10월 28일 밤, 다미선교회 산하 전국 173개 교회에는 흰옷을 입고 가슴에 ‘휴거’ 신분증을 단 8000여 명의 신도들이 예수의 공중 재림을 기다리며 광신적인 통성 기도를 소리 높여 바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휴거(携擧, the rapture)’란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 시 죽은 성도들이 부활하고, 살아있는 성도들은 육체의 변화를 받아 공중으로 들어 올려지는 종말적 사건을 가리킵니다. 미국 복음주의 계열의 세대주의(世代主義, Dispensationalism) 종말론에서 발전한 개념으로, 천주교 정통 교리와는 거리가 멉니다. 다미선교회 총본부 앞은 취재진과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방송사들은 내부 집회 실황을 전국에 생중계했습니다. 신도들은 “주님을 의심하지 말자”며 자정이 지나기 직전까지 영적 도취감 속에서 춤을 추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지만 시계가 자정을 알려도 예수의 재림과 신도들이 하늘로 들어 올려지는 초자연적 휴거 현상은 ‘당연히’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무거운 적막이 감돌았고, 곧이어 분노와 허탈함이 교차하는 아수라장이 펼쳐졌습니다. 일부 신도들은 찬송가 책을 단상에 내던지며 ‘사기’라고 절규했고, 부산과 대구 등지에서는 격분한 신도들이 목사의 멱살을 잡고 거칠게 항의하며 기물을 파손했습니다. 교회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신도들의 가족은 “그대로 받아줄 테니 안심하고 나오라”며 오열 속에서 휴거를 기다리던 신도들을 설득했습니다. 집단 투신이나 동반 자살과 같은 최악의 상황은 다행히 벌어지지 않았고, 대부분은 경찰과 가족들의 부축을 받으며 허탈한 표정으로 귀가했습니다. 되풀이되는 시한부 종말론의 폐해 1992년 우리 사회를 뒤흔든 시한부 종말론과 휴거 소동은 종교적 일탈을 넘어 세기말적 사회 불안과 기성 종교의 취약성이 결합돼 폭발한 복합적 병리 현상이었습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고조된 극단적 종말 사상은 1990년대 초반에 이르러 노스트라다무스의 1999년 지구 멸망 예언 등 세속적 종말관과 결합하면서 급속히 확산됐습니다. 대중의 불안 심리를 파고든 이 신드롬은 급격한 현대화 과정에서 소외된 빈곤층과 영적 갈증을 느끼던 기성 교회 신자들을 흡수하며 우리 사회에 깊은 상흔을 남겼습니다. 이 사태의 정점에는 다미선교회를 설립한 이장림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주장한 휴거설은 자의적 왜곡을 일삼는 신학과 소위 ‘직통계시’의 결합물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극단적으로 왜곡해 1999년을 종말의 해로 규정하고, 7년 대환란이 시작되기 전에 성도들의 공중 휴거가 일어나야 하므로 1992년 10월 28일이 바로 그 시점이라고 선전했습니다. 휴거 예정일이 다가오면서 다미선교회·다베라선교회·갈릴리선교회 등 80여 개 종말론 집단에 속한 약 2만 명의 신도들은 일상을 포기한 채 집단적 광신 상태에 빠져들었습니다. 가정을 팽개치고 기도원에 들어가거나, 전 재산을 헌납했습니다. 일부 집단에서는 통제와 복종 강요 과정에서 폭행과 인권 침해도 빚어졌습니다. 사태가 사회 병리 현상으로 비화하자 공권력이 개입했습니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강력부는 이장림을 사기 및 외국환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 수사했습니다. 수사 결과, 그는 신도들에게 1992년 10월 28일에 세상이 끝난다고 주장하면서 정작 자신은 1993년이 만기인 환매조건부채권(RP) 등에 거액을 투자한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결국 이장림의 행태는 종교 사기극에 불과했습니다. 천주교회까지 침투한 종말론 개신교 이단 신흥 종단의 시한부 종말론은 기성 교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당시 개신교 주류 교회들은 다미선교회의 극단적 행동에 제동을 걸지 못하고, 오히려 그 말세적인 분위기에 편승하거나 동조하는 도덕적 해이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한국 개신교계 전체의 대사회적 신뢰도에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개신교 신흥 종단에서 일어난 이 광풍은 천주교회에까지 불어왔습니다.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천주교 신자들을 주요 포교 대상으로 설정하고 공격적이고 지능적인 선교 전술을 구사했습니다. 가톨릭신문 1992년 7월 5일자 ‘시한부 종말론, 천주교회 안에 침투’ 기사에 따르면, 종말론자들은 이른 새벽 영남 지방(부산, 대구 등)의 천주교 교우 가정만을 골라 가톨릭 신자들의 무지와 각성을 촉구하는 유인물을 배포하며 전국적인 영적 혼란을 획책했습니다. 종말론의 모태는 기성 교회 가톨릭신문은 ‘92년 종말설의 실상’, ‘시한부 종말론의 허구’ 등의 기획 연재를 통해 신자들이 종말론의 허구성과 폐해를 분명히 인식하도록 촉구했습니다. 특히 10월 25일자에는 4개월에 걸친 기획 기사를 마무리하면서 전문가 특별 좌담을 마련했습니다. 좌담에서는 특히 종말론자들의 대부분이 이미 기성 교회를 다니던 신도들이며, 그들이 중산층 중심의 게토화된 교회 안에서 소외감을 느끼는 것이 시한부 종말론의 원인 중 하나라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즉, “기성 교회에서의 영적 보상의 불평등한 분배 구조가 이들을 교회에서 떠나게 만들고, 세상의 종말과 천년왕국의 임박을 알리는 시한부 종말론을 발생시키게 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시한부 종말론의 모태는 기성 교회라는 지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가톨릭신문은 11월 1일자 사설을 통해 다음과 같이 교회와 신앙 공동체의 근본적인 대처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첫째, 어머니답게 어떤 처지의 자녀라도 차별 없이 품에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정확한 교리 지식과 신앙인으로서 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이 두 가지 일에 소홀해 허위 종말론이 출현하고 추종자들이 피해를 입게 된다면 우리도 그 책임을 면하기는 어렵다.”

발행일 2026-06-07 제3494호 12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50) 낙태법 폐지 100만 서명운동

“태아의 생명을 죽이지 말라. 한국 천주교 주교단은 정부의 낙태 합법화에 대한 일련의 법 개정 사안과 관련, 7월 13일 CCK 강당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낙태를 사실상 허용하고 있는 형법 제135조 개정안에 대한 반대 성명을 발표하고, 이 법안의 국회 통과 저지를 위한 100만 서명운동에 들어갔다. 낙태법 반대 성명과 낙태법 폐지를 위한 100만 서명운동 등 낙태 문제에 관한 일련의 주교단의 결단은 하루 평균 4100여 명의 태아가 살해되고 있는 현 사회 풍토와 이를 허용, 법적으로 묵인하고자 하는 정부 시책에 대해 인명 경시 사상을 척결하고 새 생명을 수호하려는 교회의 단호한 의지 표명이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주교단은 ‘새로운 낙태법의 제정, 시행으로 인한 개개인의 인간성 황폐화는 물론 사회 전체의 윤리도덕성 추락을 묵과할 수 없다’며 ‘교회는 수태 순간부터 인간 생명이 시작됨을 믿고 태아의 생명이 어떠한 경우라도 보호되고 존중되어야 함이 교회 공식 입장’이라고 공포했다.”(가톨릭신문 1992년 7월 19일자 1면 중에서) 1992년 한국 천주교회가 전개한 낙태법 폐지 100만 서명운동은 한국 현대 교회사와 사회 운동사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이 운동은 종교적 교리를 수호하기 위한 교회 내부 운동이 아니라 국가의 인구 정책이라는 거대 담론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생명권’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공론장에 끌어올린 최초의 대규모 시민운동이었습니다. 특히 주교단이 태아의 생명 수호를 위해 실정법 폐지를 요구하며 낙태 반대를 주장하고 서명운동을 전개한 것은 한국교회 200년 역사상 최초의 큰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한국 사회는 수십 년간 지속된 국가 주도의 가족계획 정책으로 인해 낙태를 도덕적 죄악보다는 경제적 선택이나 피임의 보조 수단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가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105만 명 이상의 서명을 끌어낸 것은 보이지 않는 생명에 대한 사회적 양심을 일깨운 사건이었습니다. 낙태 묵인으로 출산율 낮춰 1992년의 서명운동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1960년대부터 시작된 정부의 강력한 인구 억제 정책과 그로 인해 조성된 사회적 분위기를 이해해야 합니다. 1961년 박정희 정권은 경제 발전을 위해 인구 증가를 억제해야 한다는 논리 아래 강력한 가족계획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당시 정부는 피임 기구 보급, 불임 수술 장려, 그리고 사실상의 낙태 묵인을 통해 출산율을 급격히 낮추려 했습니다. 이에 교회는 1961년 9월 「인구 문제와 산아 제한」이라는 주교단 사목교서를 통해 이러한 국가적 개입이 자연법과 하느님의 질서에 위배된다고 경고했으나, 경제 성장의 열망에 사로잡힌 사회적 흐름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낙태 논쟁의 법적 분수령은 1973년 유신 정권 아래에서 제정된 「모자보건법」이었습니다. 이 법은 제14조에 인공임신중절의 허용 한계를 명시함으로써, 형법상 낙태죄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광범위한 낙태의 합법적 통로를 열어주었습니다. 당시 허용된 사유는 본인 또는 배우자의 우생학적·유전적 장애, 전염성 질환, 강간 및 근친상간에 의한 임신, 그리고 보건학적 이유로 인한 임신부의 건강 위험 등이었습니다. 주교단은 이 법이 “생명 경시 풍조를 초래하고 모체 건강을 파괴”한다며 강력히 반대했으나, 유신 체제의 강력한 국가 권력 앞에서 제도의 시행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형법 개정안 제135조 1980년대 이후 인구 정책은 더욱 급진적인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둘도 많다’는 구호 아래 1자녀 갖기 운동이 전개되었고, 이 시기 한국의 낙태 건수는 연간 150만 건을 웃돌며 세계 1위 수준의 낙태율을 기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신생아 출생 수보다 낙태되는 태아의 수가 두 배 가까이 많았으며, 이는 낙태가 일종의 사후 피임 수단으로 전락했음을 보여주는 비극적 지표였습니다. 그러던 중 1992년 4월, 당시 법무부는 기존 형법의 낙태 처벌 조항을 유지하면서도, 실제로는 「모자보건법」의 허용 범위를 완화하는 개정안을 발표했습니다. 이에 대해 교계가 가장 우려했던 점은 개정안이 배우자의 동의 없이도 임신한 여성과 의사의 결정만으로 낙태를 가능하게 했고, 시술 의사와 심의 의사를 구분하지 않아 사실상 ‘낙태 자유화’를 초래할 가능성이 컸다는 점입니다. 특히 당시 산부인과 병원 수입의 상당 부분이 낙태 시술에서 발생하고 있었는데, 개정안이 통과되면 무제한적인 낙태가 조장될 것이 자명했습니다. 교회 전체 참여, 석 달 만에 100만 서명 달성 서명운동은 6월 12일 청주교구 사제단의 서명과 입법 반대 선언으로 시작됐고 전국 교구로 빠르게 확산됐습니다. 7월 13일, 주교단이 「형법 개정안 제135조 반대 성명서」를 발표하고, 100만 서명운동의 개시를 선포했습니다. 각 본당은 주일 미사를 통해 서명운동의 취지를 설명해 신자들의 동참을 이끌었고, 신자들은 길거리 서명운동을 벌이며 시민들의 양심에 호소했습니다. 서명운동은 네 가지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진행됐습니다. 첫째, 영성 및 교육적 접근이었습니다. 태아의 발달 과정과 생명의 신비를 알리는 시각 자료를 배포하고 순회 강연회를 개최해 주일학교 어린이부터 노년층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자에게 생명의 존엄성에 대해 교육시켰습니다. 둘째는 시각적 실상 고발이었습니다. 낙태 현장의 참혹함을 보여주는 사진전을 열어, 낙태가 추상적인 권리의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인 ‘살인 행위’임을 알렸습니다. 셋째, 범종교 및 사회적 연대입니다. 천주교뿐만 아니라 이웃 종교 지도자들이 서명에 동참함으로써 낙태 반대가 보편적 가치임을 입증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정치적 압박입니다. 서명운동이 고조되던 1992년 말은 대통령 선거 국면과 맞물려 있었습니다.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을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은 대선 후보들에게 낙태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요구했고, 유력 후보들이 낙태 반대 의사를 공식 표명했습니다. 결국 서명운동 시작 단 3개월 만인 1992년 10월, 최종 집계 결과 105만9000명의 서명을 모아 국회에 제출했습니다. 100만 서명운동의 성과 서명운동의 가장 직접적인 성과는 독소 조항들의 일방적 통과를 저지한 것입니다. 비록 형법상 낙태죄가 크게 강화되거나 「모자보건법」이 폐지된 것은 아니었으나, 정부로 하여금 낙태 허용 범위를 무분별하게 확대하는 정책이 거센 국민적 저항에 부딪힐 수 있음을 명확히 인식시켰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성과는 한국 사회 전반의 ‘생명 경시 풍조’에 경종을 울리고 낙태를 심각한 윤리적·사회적 문제로 부각시킨 점입니다. 특히 서명운동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교회 내부에 강력한 생명 수호 인프라를 구축하는 계기가 됨으로써, 2000년대 이후 더욱 전문화되고 조직화된 생명운동을 전개하는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발행일 2026-05-24 제3492호 8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49) 교회 환경운동의 본격 태동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평화로운 사회 발전의 토대인 수많은 윤리 가치들은 생태 환경 문제와 구체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면서 ‘오늘날 자연에 대한 마땅한 존중의 결여, 자연 자원의 피폐, 점차 악화되는 생활의 질적 저하로 인해 세계 평화가 위협당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1990년 1월 1일 「세계 평화의 날」 담화문을 통해 이같이 강조한 교황은 ‘과학기술 발전의 무차별 적용으로 오늘날 생태계는 위기에 직면했다’면서 ‘환경의 오염이나 파괴는 생명과 인간 존엄성의 가치를 점차 상실시켜 인간 경시에 이르고 마는 비자연적이고 환원주의적인 세계관을 낳게 됐다’고 개탄했다.”(가톨릭신문 1990년 1월 1일자 1면) 한국교회 환경운동의 공식적인 출발점은 1991년입니다. 1984년 울산 온산 지역의 대규모 공단 폐수 오염에 따른 ‘온산병’ 발병과 1991년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 등으로 당시 큰 사회적 파장이 일었습니다. 이는 국가 주도의 압축적 산업화가 낳은 환경 재난들이었습니다. 이런 재난들로 인해 우리 사회는 환경오염과 파괴가 인간 삶의 질적 저하, 심지어 생존의 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인식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가운데,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1990년 세계 평화의 날 담화문 ‘창조주 하느님과 함께하는 평화, 모든 피조물과 함께하는 평화’를 발표했습니다. 이 담화는 무분별한 산업 개발과 소비주의가 자연환경을 훼손하고 있음을 경고하며, 생태계 보호가 신앙인의 도덕적 의무이자 참된 평화를 향한 과제임을 천명했습니다. 이 담화는 한국교회가 환경 문제를 공식적인 사목 과제로 채택하는 결정적인 신학적 근거를 제공했습니다. 환경보전 인식의 대전환 한국교회가 교황 담화에 응답하면서 교회 환경운동이 본격적으로 태동했습니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는 1991년 환경 보전에 관한 교황 담화 자료집을 발간하고, 개인과 본당, 교구 단위의 구체적인 실천 과제를 제시했습니다. 이어 서울대교구 한마음한몸운동본부가 산하에 ‘하늘땅물벗’이라는 생태 사도직 모임을 구성하고 월례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1992년에는 한마음한몸운동본부 주관으로 교회 내 22개 환경운동단체가 참가한 ‘푸르름을 만드는 잔치’가 처음 열렸고 이듬해에는 ‘환경상’도 제정됐습니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가 1991년 ‘창조질서 보존을 위한 생활 수칙 70가지’ 포스터와 자료집 ‘생명과 해방으로 가는 길’을 제작, 보급한 데 이어, 한마음한몸운동본부는 ‘창조질서 보존을 위한 공청회’를 개최했습니다. 이 공청회는 교회 안에서 환경 문제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보다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를 이끌어낸 중요한 계기가 됐습니다. 농촌사목 분야에서는 보다 근본적인 생명공동체 운동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1990년 가톨릭농민회는 제20차 대의원대회에서 사람과 땅, 자연을 살리는 생명 농업 실천을 공식 결의했습니다. 안동교구의 생명 공동체 운동이나 대구대교구의 푸른평화운동본부 등은 이러한 유기적 생명관에 기초해 비신자를 포함하는 폭넓은 연대 활동을 전개하며 초기 환경운동의 외연을 확장했습니다. 1994년에는 환경교육의 내실화, 환경운동의 정착 및 확산, 타 단체와의 연대 활동 등에 있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됩니다. 서울과 대구대교구 등에서 환경전담사제가 임명됐고 전국 환경사제모임이 결성됐습니다. 한마음한몸운동본부 생활실천부는 환경 문제를 전담하는 ‘환경보전부’로 개칭했고, 대구대교구 푸른평화운동본부가 지역 환경운동의 구심점이 됐습니다. 교회 환경운동의 정체와 답보 한국교회는 환경운동을 신앙 실천의 하나로 수용하게 됐지만, 초기의 열정과는 달리 1990년대 중반 이후 교회 환경운동은 제자리걸음에 머물게 됩니다. 초기의 환경운동은 쓰레기 분리수거, 합성 세제 감축, 자원 재활용 등 생활 실천 운동에 집중됐습니다. 공해 문제에 대한 구조적, 정치적 해결책을 모색하는 데는 한계를 보였고, 주로 개인의 도덕적 절제와 희생을 요구하는 윤리적 차원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나마도 점차 운동의 동력과 방향성을 잃고 답보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 가톨릭신문은 기획기사를 통해 주기적으로 교회 환경운동의 이러한 문제를 진단했습니다. 1996년에는 교회 환경운동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으며, 본당 환경 분과나 단체가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답보 상태임을 지적했습니다.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곳은 10여 개가 못 되고 이들 단체의 책임자들은 ‘기존의 환경운동이 개인적 희생과 노력을 요구하는 만큼 눈에 띄는 성취감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가톨릭신문 1996년 4월 21일자 1면) 2003년에는 ‘본당 중심 환경운동 답보 상태’라는 취지의 기사에서, “교회 환경운동의 손발이 없어 환경보전운동이 생활 속의 실천 운동으로 확산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상황은 더 나빠졌습니다. “서울대교구의 경우 교구 전체 본당 가운데 환경분과가 설치된 본당은 불과 7곳뿐이고 실질적으로 활동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곳은 단 2곳으로 집계되고 있다.”(가톨릭신문 2003년 6월 1일자 1면) 본당 환경분과는 생활 실천 운동을 추진하거나, 지역사회의 환경 관련 사안들에 대한 참여가 이뤄지는 현장이라는 점에서 환경운동의 ‘손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 환경운동, 특히 본당 단위의 풀뿌리 교회 환경운동은 사실상 오랫동안 침체 상태였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태 관련 현안에 대한 범종교 연대 1990년대 중반 이후 교회 환경운동이 초기의 활력을 잃고 정체기에 접어들었지만, 2000년대 초반 거대한 환경 파괴 현장에서는 천주교의 예언자적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높았습니다. 국가 주도의 대규모 토목 공사인 새만금 간척 사업과 천성산 고속철도 터널 공사 반대 운동 등에서 천주교는 피조물의 생명권을 수호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새만금 갯벌 살리기 운동은 종교계 연대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했습니다. 당시 문규현 신부와 불교계 수경 스님 등은 도심 한복판에서 ‘3보 1배’의 고행을 통해 생명 살상의 실체를 고발해 전국적인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이를 계기로 2001년 결성된 5대 종단 연대 기구인 ‘종교환경회의’를 통해 천주교는 이웃 종교와 함께 생태 보전, 탈핵, 기후위기 대응을 공동으로 논의하고 실천하는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1990년 교황의 세계 평화의 날 담화를 계기로 본격화된 교회 환경운동은 오랜 기간의 정체기를 거쳐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생태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반포로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회칙은 인류의 환경 위기를 ‘근본적인 영적 위기’로 규정하고, 자연환경의 위기가 인간 및 사회의 위기와 별개가 아니라는 ‘통합적 생태론(Integral Ecology)’을 제시하며, 인류 전체의 가치관과 삶의 양식을 전면적으로 바꾸는 ‘생태적 회개(Ecological Conversion)’를 촉구했습니다.

발행일 2026-05-17 제3491호 8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48) 임수경·문규현 신부 방북 사건

“전대협 대표로 평양축전에 참가한 임수경(수산나) 양을 보호하기 위해 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 의해 파북 된 전주교구 문규현(바오로) 신부가 임 양과 함께 8월 15일 오후 2시 22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의 군사 분계선을 넘어 귀환했다. 문 신부와 임 양은 군사분계선을 넘는 즉시 유엔군사령부 경비병에 의해 연행됐으며 유엔군사령부 측은 공동경비구역 외곽에서 우리 측에 신병을 인계했다. 문 신부는 군사분계선을 넘어오기 전 판문점 북측 지역인 판문각에서 거행된 환송집회 중 연설에서 ‘우리는 결코 헤어질 수 없는 하나의 동포라는 것을 이번 기회에 확신했다’고 밝혔다.”(가톨릭신문 1989년 8월 20일자 1면) 1989년 대한민국은 6월 항쟁으로 쟁취한 민주화 열기가 ‘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제로 전이되는 격동기였습니다. 당시 노태우 정부는 1988년 ‘7·7 선언’으로 북한을 동반자로 규정했으나, 통일 논의는 철저히 국가가 주도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한 임수경의 방북과 문규현 신부의 동행 귀환은 국가의 독점적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한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특히 이 사건은 해방 이후 반공주의를 존립 기반으로 삼던 한국교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결과적으로 ‘북한 선교’라는 시혜적 태도에서 ‘민족 화해와 일치’라는 사목 노선으로 대전환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민주화 투쟁에서 통일을 향한 갈망으로 1987년 6월 항쟁 이후 학생 운동권은 6월 항쟁의 동력을 조국 통일로 연결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분단의 고착화가 남한 내 독재 권력의 유지 수단으로 이용된다고 보았으며, 따라서 통일이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의 완성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1988년 서울 올림픽의 남북 공동 개최와 남북 학생 회담 추진 등이 이어졌습니다. 그 와중에 1988년 5월 15일,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당시 서울대생 조성만(요셉) 군이 조국 통일을 외치며 할복 투신했습니다. 그의 의로운 죽음은 한반도 전역에서 통일 운동이 더욱 세차게 번져가는 불쏘시개가 됐습니다. 바야흐로 통일 논의의 주체가 정부를 넘어 민간으로 확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부는 7·7 선언을 발표해 북한을 ‘민족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하고 남북 교류를 추진하겠다고 했지만, 민간 차원의 접촉은 철저히 통제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에 반발한 재야인사들의 방북이 이어지는 가운데, 1989년 7월 전대협은 정부의 불허에도 불구하고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임수경을 대표로 파견해 거대한 파장을 불러왔습니다. 분단의 장벽을 넘어, 사제단의 결단 임수경은 6월 21일 서울을 출발해 30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정부는 즉각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사에 착수했고, 그녀의 안전한 귀환은 초미의 관심사가 됐습니다. 이에 정의구현사제단은 분단의 장벽을 깨기로 결단을 내리고 문규현 신부를 평양으로 파견했습니다. 광복 44주년인 8월 15일, 두 사람은 남북 및 유엔군의 경고 속에서도 나란히 손을 잡고 민간인 최초로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통과했습니다. 판문점을 넘기 직전 임수경은 “주님, 저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바쳤다고 합니다. 이 극적인 귀환 장면은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으며, 남측 경계를 넘자마자 체포된 두 사람은 징역 5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충격과 당혹감 정부는 이를 체제 전복을 꾀하는 불순 세력의 도발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공안 정국을 조성했습니다. 교회 당국 역시 충격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주교단은 7월 27일 담화문을 발표해 충격과 유감을 표명하고 “통일을 촉진하고 싶은 사제들의 마음은 이해한다”면서도 “우리 사회 상황에서 수용하지 못할 행동이 앞섬으로 인해 많은 국민에게 우려와 불안을 준 것은 마땅한 행동이 아니었다”고 말했습니다. 평신도들 사이에서도 불법적인 정치 개입이라는 비판과, 교회가 비로소 분단 문제에 온몸으로 응답했다는 지지가 극명하게 엇갈렸습니다. 이러한 내부의 갈등과 토론은 사실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여전히 엄혹한 공안 정국 속에서, 정치적 민주화를 이제 막 이뤄 노동 문제 등 국내의 정치적, 사회적 현안들을 공론화하기 시작한 국민 대중의 의식 수준은 아직 냉전 이데올로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진보적 학생 대표와 사제단의 ‘불법적’인 방북은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거센 내부 갈등은 한국교회를 포함한 전 국민이 냉전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민족 화해’라는 새로운 가치를 정립하는 고통스러운 산고의 과정이었습니다. 반공주의에서 민족의 화해와 일치로 이 사건은 북한을 ‘침묵의 교회’, ‘타도의 대상’으로 보던 교회의 시각을 ‘대화와 화해의 상대’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인식의 변화는 1995년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출범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주교회의도 기존 ‘북한선교부’를 ‘민족화해위원회’로 개칭하며 북한 선교를 형제적 나눔으로 재정의했습니다. 이후 한국교회는 인도적 지원, 민족 화해 미사 봉헌, 평화 교육 등을 적극 전개하며 물리적 장벽보다 ‘마음의 장벽’을 허무는 일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임수경과 문규현 신부의 방북은 비록 당시의 법체계와 사회적 금기, 부분적으로는 교계의 질서를 혼란스럽게 함으로써 충격과 당혹감을 던졌지만, 통일과 민족 화해의 여정에서 획기적 전환점을 이룬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국가가 독점해 온 통일 담론을 시민사회와 종교계의 영역으로 확산시켰으며, 분단의 물리적 장벽보다 ‘마음의 장벽’을 허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웠습니다. 방북을 보는 가톨릭신문의 시각 여기에서 우리는 이 문제를 가톨릭신문이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톨릭신문은 1989년 8월 6일자 2면에 실린 사설에서 방북 사건에 대해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이 사설은 사제단의 행동으로 교회 기강이 심각하게 무너졌으며, 거기에는 사제단이 창설된 1974년 이후 이를 방치해 온 주교단에 책임을 묻고 영웅주의에 사로잡힌 사제들을 질타했습니다. 충격적인 방식에 우려를 표할 수는 있으나, 민족 화해라는 본질적 가치와 통일에 대한 열망을 외면한 채 교회의 기강 확립에만 집중한 점은 시대의 징표를 읽지 못한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특히 사설은 기강의 해이함이 1974년 정의구현사제단이 창설된 후부터 시작됐다고 단정했습니다. 이로써 1970년대와 1980년대 독재 청산의 과정에서 보여준 사제단의 역할까지도 송두리째 부정했습니다. 결국 후대의 역사적 평가에 기반해 볼 때, 이 사설은 오점으로 남을 가능성이 큽니다. 시대의 징표를 읽지 못했고 예언직의 수행에 소홀했으며, 그럼으로써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을 가로막았다는 평가를 받기 쉽습니다. 다행히 1년 뒤인 1990년 6월 24일자 특집 기사에서는 “사제단의 방북이 교회 내 통일 인식을 제고하는 계기가 됐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통일 논의를 억압한 정부의 책임을 지적하며 한층 균형 잡힌 시각을 보여주었습니다.

발행일 2026-05-10 제3490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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