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계획 안의 인간 사랑 – 몸 신학 교리] 한 처음에

이 교리서의 본 내용은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마태 19,3; 마르 10,2)라는 바리사이들의 질문에서 출발한다.(1과 2항) 이어지는 내용에서 바리사이들은 이혼을 허락한 모세의 율법으로 권위와 정당성을 세우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라고 응답한다.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4절과 8절에서 거듭 언급한 ‘한처음(처음)’에 시선을 모으게 한다. ‘한처음’은 창세기 1장과 2장의 인간창조를 말한다. 바리사이들이 근거로 내세운 모세의 율법은 원죄의 열매이지, 원래 하느님 계획 안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예수님께서 처음을 거듭 언급한 것은 역사 안에 실존하는 모든 인간이 죄로 기우는 경향을 가졌지만 한처음의 상태, 곧 하느님의 원래 계획은 여전히 인간에게 빛나고 유효하다는 것이다.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인간 양심의 작동과 성장이다. 지금 내 앞에 사과가 하나 놓여 있다고 상상해 보자. 이 사과는 내가 보는 각도에 따라, 빛이 비춰지는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사과는 자기가 바라본 모습만 말할 뿐, 사과의 전부를 알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보는 것만이 아니라 맛도 보아야 하는데 그 맛에 대한 평가도 모두 다르다. 이제 이 사과를 ‘나/인간’이라고 생각해보자. 나는 ‘나’를 어느 부분에서 보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나’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이 기준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나에 대한 이해와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기준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빛을 받는 위치에 따라 사과는 더 선명하고 잘 생겨 보인다. 나/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에서 빛은 하느님이다. 창조하신 하느님의 눈으로 나를 보고, 왜 ‘낳음’ 했는지 그분의 계획을 만나야 한다. 이는 세상에 태어난 내가 해야 할 가장 크고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참 나를 알게 되면 덤으로 너를 알 수 있고, 인격적 친교를 이루는 참된 행복을 살 수 있다. 하느님이 하늘을 탈출해, 만질 수 있는 육으로 세상에 그리고 가정에 들어오셨다. 콜로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1장 15절은 이렇게 노래한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실제로 그 사건이 오늘 나에게도 일어났다. 몸 그 자체가 페르소나(persona)로서 성사요 인격의 전부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말한다. 이것은 신학적 사고뿐만 아니라 현시대에 깊이 뿌리내려 있는 이원론적 사상에 엄청난 변화를 주는 기재가 됐고, 이 새로운 사유의 논리가 인간 몸이 영과 육으로 분리되지 않는, ‘몸 신학’이라는 가르침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다. 하느님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나, 나의 삶에 관심을 둔다. 나를 홀로 버려둔 것이 아니라 이미 지을 때 나를 위한 계획도 함께 작정해 뒀다. 이 계획을 발견하고 자신의 삶을 자신의 모습으로 자유롭게 실현하는 것이(나침반과 지도), 이름을 가진 자, 불림 받았고, 선택한 자의 삶이다. 세상이 개인주의와 개인성을 당연한 권리처럼 포장해 주지만, 다른 한편에선 개인의 인격이 침해되고 가정이 지닌 고유한 빛은 퇴색되고 성장기의 젊은이들이 방황하는 현상을 우리는 보고 있다. 이는 한 인간이 ‘낳음’ 받고 인격의 틀이 짜이는 중요한 곳이며 복음의 장소인 가정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김혜숙 선교사는 교황청립 혼인과 가정 연구를 위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대학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고, 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회원으로, 현재 ‘몸·혼인·가정 신학 연구회’ 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 「사랑, 그 아름다운 역동성-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랑의 신학」, 「그대, 나의 얼굴」 등이 있고, 역서로는 「사상과 영성」,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몸 신학」 등이 있다.

2025-01-05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왜 그에게 길을 물어야 하는가?

가톨릭교회 신학을 대표하는 최고의 교회학자 성 토마스 아퀴나스. 우리는 그를 위대한 신학자로 칭송하지만, 정작 그의 저작을 읽기란 쉽지 않기에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학술적인 영역으로 치부하곤 한다. 그러나 성 토마스는 우리가 행복에 이르는 길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성인이다. 성 토마스가 보여주는 행복의 길은 어떤 것일까. 성 토마스 탄생 800주년을 맞아 가톨릭대 박승찬(엘리야) 교수의 글을 통해 성 토마스가 전하는 진정한 행복을 찾는 여정에 독자들을 초대한다. 과거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이라는 엄청난 참화를 겪었던 우리나라는 산업화에 성공하여 세계에서 유례없이 놀라운 경제 발전을 이뤘다.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보릿고개’라는 말은 사라졌고, 이제는 비만을 걱정하며 다이어트를 통해서 건강을 유지해야 할 정도로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됐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첫 20년 동안 우리나라는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하면서 문화적으로도 K-드라마, K-영화 등으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상황에 있었다. 이러한 성장과 발전은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 같았다. 이런 안정된 사회 안에서 많은 이는 ‘소확행’, 즉 ‘작지만 확실한 행복’에 만족하며 살고 싶었다. 그러나 이 소박한 꿈은 2020년부터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19’로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 K-방역이 부분적으로 성공했던 우리나라에서도 평범한 일상은 사치스러운 꿈처럼 여겨지는 시간이 2년 넘게 지속됐다. 간신히 팬데믹 상황을 벗어나서 일상이 정상으로 돌아오자 기상 이변이 이어지고 있다. 기상 관측 사상 유례가 없는 엄청난 폭염, 상상조차 못 할 폭설로 변한 첫눈 등이 우리의 미래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코로나19와 기상 이변에 이어 도대체 이해하기 힘든 ‘비상계엄’ 선포로 인해 상상하지도 못했던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계엄군을 막아선 일반 시민들과 일부 정치인들의 발 빠른 대처로 간신히 민주주의와 인권을 유린할 최악의 상황은 피했지만 더 이상 각 개인이 ‘소확행’만을 꿈꿀 수 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그렇지 않아도 점차적으로 나빠지던 경제 사정은 정치적 불안정 때문에 나날이 악화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위기 앞에서 우리는 모든 이가 추구하지만 도달하기는 쉽지 않은 ‘행복’에 대해서 다시 한번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그리고 여전히 개인의 힐링과 워라밸을 추구하는 주관적 행복의 심리학이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행복을 ‘주관적 안녕감’이라고 규정하고 이를 추구하는 데에만 몰두한다면, 과연 지금과 같은 사회적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까? 개인주의라고 지탄받던 MZ 세대가 비상계엄의 위중한 시기에 소중히 간직했던 응원봉을 들고 거리로 뛰어나와 추위에 떨면서 “계엄 반대”를 외쳤다. 이들은 더 이상 소극적인 삶의 태도만으로는 자기 개인의 행복조차도 방해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듯하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여 그동안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추구되던 개인의 주관적 ‘행복’은 생각할수록 더 많은 의문을 만들어낸다. 근대 이후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과학의 발전은 인간들을 괴롭히던 질병과 고된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 줬다. 많은 현대인은 과학 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는 낙관적인 꿈을 꾸면서, 인간에게 진정으로 근원적인 질문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러한 경향 안에서 전통적으로 종교가 강조하던 내세의 행복은 신기루에 불과하게 됐고, 현세적인 행복에 매몰되어 버린 수많은 대중이 양산됐다. 그렇지만 과학과 기술이 발전한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더욱 행복해졌을까?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의 승리를 미덕으로 여기며 살아온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별나게 낮은 행복지수와 높은 자살률로 고통을 받는다는 사실은 이런 추정을 근본적으로 의심하게 만든다. 또한 인간 이성과 과학에 대한 과도한 신뢰는 이미 실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사상에 의해 강하게 비판받았다. 근대 사상과 산업화가 야기한 심각한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 이성과 이에 근거한 과학기술을 부정적으로 볼 수만도 없다. 이제 AI와 이를 탑재한 로봇으로 상징되는 과학 발전은 상상조차 힘든 놀라운 기회를 인류에게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것들이 가져올 긍정적인 효과를 정당하게 평가하면서도, 그 한계를 정확히 인지함으로써 이를 함께 극복하기 위한 합리적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렇다면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현대 기술의 발전을 활용하면서도 인간이 그 안에서 소외되지 않고 진정한 행복을 찾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답해 줄 멘토가 바로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완성해 가톨릭교회의 스승으로 선포된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4/5~1274)이다. “실상 그(토마스 아퀴나스)의 성찰 속에서 이성의 요구들과 신앙의 힘이, 일찍이 인간 사고에 의해서 이룩된 가장 고상한 종합을 발견합니다.”(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회칙 「신앙과 이성」, 78항). 성 토마스는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한다(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perficit)”는 확신에 차서 신학과 세속 학문의 고유한 영역과 역할을 인정했다. 이렇게 그는 ‘영원불변한 진리를 추구하는 항구한 자세’를 유지하면서도 ‘다른 학문에 대한 존중과 개방성’을 가지고 인간 이성이 지닌 가능성을 높이 평가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제시했다. 이러한 성 토마스의 가르침이 집대성된 작품이 바로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이다. 「신학대전」의 분량은 엄청나서 보통의 책 크기로 출판한다면 어림잡아 1만 쪽에 달하고, 현재 국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신학대전」 번역 작업이 완료된다면 총 72권에 달할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이 대작을 공식 가르침의 튼튼한 토대로 삼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신학대전」을 통독한 사람은 전문가 중에서도 극히 드물다. 국내의 성 토마스 연구도 대부분 철학적 내용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신학대전」 제1부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구체적인 일상에서 활용할 수 있는 엄청난 충고들이 담겨 있는 「신학대전」 제2부는 아직도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 안에는 인간의 최종목적인 행복, 올바른 행위를 판단해 줄 수 있는 다양한 기준들, 이를 실천하는 것을 수월하게 해 주는 덕과 이를 방해하는 악덕들, 악을 피하고 고통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될 구체적인 충고 등 무수한 보화가 가득 담겨 있다. 더욱이 2025년은 바로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탄생한 지 800년이 되는 해이다. 그를 특별히 기념하기 위해 이번 특별 연재에서는 「신학대전」에서 가장 방대한 양을 차지하고 있는 제2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가르침을 따라 물질적인 풍요 안에서도 삶의 의미를 스스로 발견하지 못해 방황하는 많은 이들이 ‘진정한 행복’을 찾아 나서는 여행을 함께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한국중세철학회장, 한국가톨릭철학회장 및 김수환추기경연구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알수록 재미있는 그리스도교 이야기」(세종도서 우수교양도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삶의 길을 묻다」, 「신 앞에 선 인간」, 「토마스 아퀴나스」 등이 있고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요강」, 「대이교도대전II」, 「존재자와 본질」, 「신학대전: 31 & 32(STh II-II, qq.1-13)」 및 안셀무스의 「모놀로기온 & 프로슬로기온」을 라틴어 원문으로부터 번역했다.

2025-01-05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인간을 묻다

자극적이고 감각적인 뉴미디어 홍수 시대에 숏폼 플랫폼은 단 몇 초 만에 다음 또 다음을 클릭하게 할 만큼 인간의 심리를 뚫고 들어왔다. 4차 산업혁명의 과학과 기술들은 국가와 사회의 시스템에 변화를 주었고, 이제 개인의 영역에까지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거대한 물결을 막을 순 없지만 진정 ‘사람이 중심이 되는 변화인가?’를 물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 우리 신앙인의 삶의 태도가, 교회는 인간 존재의 가치를 성찰하고 인간을 더 깊은 차원으로 본질적인 차원으로 초대하고 있는가? 왜냐하면 인간은 과학 기술이 그 존재와 가치를 대신할 수 없는 창조주의 모상으로 낳음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분과 친교를 하기 때문이다. 사랑, 생명, 혼인, 가족… 이 거대한 담론들을 어떻게 새롭게 만나야 할까? 아니 어떻게 원래의 모습대로 회복할 수 있을까? 이 질문들은 다시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 ‘나는 누구이지?’ ‘너는 누구이지?’를 대면하도록 한다. ‘나’가 ‘나’로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다. 보이는 영역과 보이지 않는 영역을 가진 나/인간, 비참함과 위대함을 동시에 가진 나/인간, 고통으로 가득 차 있지만 동시에 눈물이 쏟아질 만큼 아름다운 나/인간이다. 결국 아름답고 큰 존재로 만들어 주는 어떤 원리가 내 안에 있음을, 또 다른 영역으로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어 주는 어떤 원리 또한 내 안에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만나게 될 이 연재는 바로 이러한 질문들에 답을 찾아가는 나침반과 지도가 되려고 한다. 어디에서 왔고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는지를 교회의 가르침으로 전달하려고 애쓸 것이다. 이 가르침은 우리나라와 미국에서는 ‘몸 신학’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 원제목은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교리서다. 이 교리는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79년 9월 5일 시작해 1984년 11월 28일까지 5년 동안 129회에 걸쳐 선포된 교회 가르침이다. 교황은 전 세계에서 온 순례객들을 하나의 교회로 보고, 교황을 만나러 온 그들에게 매주 수요일 '일반 알현' 시간을 통해 목자로서 그들을 안내했던 것이다. 전체 129과로 이루어진 이 교리는, 몸의 구원에 관한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출발한다. 창세기 1장과 2장을 근거로 둔 인간의 근원과 그 정체성의 특징을 말하는 한처음편(1-23과), 창세기 3장 이후 욕구에 의해 변화된 인간의 시각을 어떻게 회복하는지에 대한 마음의 구원편(24-63과), 육의 부활을 믿지 않았던 사두가이들과의 대화에서 육의 부활편을(64-72과), 구약시대에는 없었지만 예수님에 의해 선포된 하늘나라를 위한 독신과 동정편(73-86과) 그리고 혼인과 혼인성을(87-113과), 문헌 「인간 생명」(114-129과)에 관한 주석으로 이루어졌다. 성경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그 바탕 위에 이 가르침은 펼쳐지고 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이 가르침을 환영하고, 자신의 사고와 삶을 변화시키고, 자신이 얻은 기쁨과 행복으로 주변에 그 영향을 주고 있다. 함께 나아가는 모습으로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다. 만약 몸(육-정신-영혼), 사랑(에로스-아가페), 자신과 공동체(개인과 사회)를 규범론과 단일론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나를, 너를, 그리고 하느님과의 만남과 친교를 더 깊이 할 수 있을 것이고, 인간의 존재와 가치에 변화를 줄 것이다. 그러므로 이원론적, 결의론적 사유의 원리에서 벗어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김혜숙 선교사는 교황청립 혼인과 가정 연구를 위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대학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고, 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회원으로, 현재 ‘몸·혼인·가정 신학 연구회’ 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 「사랑, 그 아름다운 역동성-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랑의 신학」, 「그대, 나의 얼굴」 등이 있고, 역서로는 「사상과 영성」,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몸 신학」 등이 있다.

2025-01-01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연재를 시작하며 - 사막 교부란

신문사로부터 올해부터 격주로 사막 교부의 삶을 소개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는 그들의 삶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의 지혜를 나누어 달라는 요청이 아닐까 한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 장소는 우리와는 너무도 먼 4세기 이집트 사막이었다. 이렇듯 큰 시공의 차이로 인해 그들의 삶이 우리에게는 너무도 낯설고 심지어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적 욕망과 싸우며 하느님을 향해 나아갔던 그들의 치열한 삶, 그 삶이 가르치는 지혜는 그리스도교 영성의 토대가 되었고 시공을 초월하여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이 지면을 통해 앞으로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란 주제로 그들의 가르침을 하나씩 다루어 나갈 것이다. 그에 앞서 이번 첫 회에서는 먼저 사막 교부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를 통해 이해를 돕고자 한다. 사막 교부 어떤 이에게는 ‘사막 교부’(Desert Father)란 표현이 다소 생경하게 들릴 것이다. 사막 교부라고 말할 때, 엄밀한 의미로 4세기 이집트 북부(나일강 하류)의 사막에서 생활했던 유명한 독수도승을 일컫는다. 초세기 교회에서 ‘교부’는 본래 주교를 가리키는 말로,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사이에 성립되는 부자 관계를 적용한 데서 생겨났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교 신학의 토대를 놓고 교회 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준 분을 교회 교부(Church Father)라고 칭한다. 한편 실천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수도승 생활의 토대를 놓은 거룩하고 위대한 수도승은 수도승 교부(Monastic Father)라고 불린다. 사막 교부는 수도승 교부에 속하며 그리스도교 수도승 생활의 시조라 하겠다. 4세기 이집트 사막으로 들어갔던 그리스도인들 안에 점차 새로운 영적 부성(父性)이 생겨났다. 이 영적 부성은 더 이상 교회 안의 공적인 기능과 교계제도에 연결되지 않고 ‘지혜’(분별력)와 ‘말씀의 특별한 은사’에 연결되었다. 이 은사를 얻은 사람만이 남을 지도하는 영적 사부가 될 수 있었다. 사막에 새로 도착한 사람은 자기 압바(Abba, 영적 사부인 원로)에게서 가르침을 받는다. 따라서 독수도승을 지도하는 원로를 ‘사막 교부’라고 부르게 되었다. 사막으로 간 이유 사막은 사람이 살 수 없는 불모의 땅이자 악령들의 본거지였다. 또한 온갖 유혹과 시련을 통한 정화의 장소, 하느님을 체험하는 장소였다. 4세기 초 박해가 끝나자 열심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을 뒤로하고 이집트 사막으로 들어갔다.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살며 ‘한 가지 필요한 일’, 곧 ‘하느님 찾는 일’에 투신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위해서는 세상의 소음과 동요, 근심 걱정으로부터의 자유, 깊은 고독과 침묵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철저하고 근본적인 포기와 물러남은 하느님이 당신 아드님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에 더 잘 응답하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들은 사막에서 새로운 박해자 악령들과의 치열한 싸움과 엄격한 금욕생활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증거하고자 했다. 이러한 삶 자체가 자신을 포기하는,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또 다른 순교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수도승 생활을 순교의 지속이라 하였고 피를 흘리지 않는 순교라고 해서 ‘백색 순교’라고도 했다. 그들의 삶이 중요한 이유 사막 교부의 삶은 그리스도인 삶의 이상적 모델을 제시한다. 사막 교부들은 복음을 더 철저히 살려는 그리스도인이었기에, 그들의 삶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인 삶의 심화였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의 삶과 가르침은 수도승 생활과 영성의 뿌리와도 같다. 그리고 수도승 생활은 그리스도인 삶을 충만히 실현하는 삶의 한 양식이며, 수도승 영성은 그리스도교 영성의 토대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사막 교부의 모범적인 삶과 가르침은 현대 그리스도인의 삶과 영성에도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기에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치를 지니며 우리에게 중요하다. 우리가 사막 교부의 삶과 그들의 가르침을 접하는 것은 그들의 외적 삶의 모습이나 방식을 모방하자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 오늘 우리를 위한, 나를 위한 어떤 가치와 정신을 뽑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정신과 가치다. 구체적 삶의 양식은 그것을 담는 외적인 그릇에 불과하다. 외적인 틀은 시대와 장소, 상황에 따라 언제나 변화될 수 있고 또 변화되어야 할 것이다. 금언을 통해서 우리는 온갖 인간적 욕정과 악습에 맞선 치열한 싸움, 인간의 나약함, 하느님의 자비. 좌절과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불굴의 의지와 용기, 신앙과 희망 등 우리 삶을 위한 지혜로운 가르침을 보게 된다. 여전히 영적 사부인가? 사막 교부의 영웅적인 삶과 성덕은 당시 수많은 사람을 사막으로 끌어들였다. 마치 벌이 향기를 맡고 꽃을 찾듯 수도승들의 거룩한 삶과 성덕의 향기를 맡고 사람들이 물밀듯 몰려들었다. 그들은 구원에 필요한 한 말씀을 듣기 위해 유명한 원로들을 찾아갔다. “압바, 한 말씀 해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은 사막의 원로를 찾아간 이들의 전형적인 질문이었다. 동시에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유효한 질문이다. 우리는 영적 스승, 영적 사부를 갈구한다. 우리에게는 가시적인 모범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복음의 가르침을 충실히 실천하려 노력했던 참 신앙인의 모범이 필요하다. 사막 교부들은 바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복음에 나타난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고 스승의 인격을 본받으려 노력했던 훌륭한 신앙인의 모범이자 영적 사부다. 이 연재를 통해 우리는 제자가 스승에게 다가가듯 그들에게 다가가 영원한 생명을 위한 삶의 지혜를 청해보자. “압바, 제가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한 말씀 해주십시오.” ▶ 이 연재에서 소개하는 내용이 대부분의 독자에게는 낯설 수 있기에 관심 있는 분들을 위해 참조할만한 자료를 소개한다. 「수도 영성의 기원」(분도출판사, 2015), 「사막 교부들의 금언」(분도출판사, 2017), 「사막 교부, 이렇게 살았다」(분도출판사, 2006), 「담화집(제1-13담화)」(분도출판사, 2022), 「담화집(제14-24담화)」(분도출판사, 2023), 「천국의 사다리」(분도출판사, 2020), 「프락티코스」(분도출판사, 2011).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련장) 1995년 사제품을 받고 교황청립 로마 성안셀모대학교 수도승 연구소에서 수도승 신학을 전공했다. 미국 뉴멕시코주 성 베네딕도회 사막수도원에서 3년간 수도생활에 전념하고 성 베네딕도회 화순수도원 원장, 분도출판사 사장,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본원장 등을 거쳤다. 「수도 영성의 기원」, 「천국의 사다리」 등 여러 책을 번역했다.

2025-01-01

[성경 속 기도 이야기] 죽음을 눈앞에 둔 시메온의 기도

“주여 말씀하신 대로 이제는 주의 종을 평안히 떠나가게 하소서. 만민 앞에 마련하신 주의 구원을 이미 내 눈으로 보았나이다. 이교 백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시오,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되시는 구원을 보았나이다”(루카 2,29-31, 성무일도의 본문)라는 시메온의 기도로 성무일도가 하루를 맺습니다. 이 기도는 모사의 달인인 루카 복음사가가 ‘이방인들의 빛’이라는 희망의 인물을 다루는 제2이사야서의 신학을 이용해서 직접 지었으리라 추정됩니다.(이사 40,5; 42,6; 46,13; 49,6.9; 52,10 참조) 루카는 구약을 대표하는 노인인 시메온과 안나가 구약을 상징하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하면서 구약과 신약을 매끄럽게 연결합니다. 두 노인을 통해 복음의 길이 시작되기도 전에 ‘세상 끝’까지 이르는 구원의 예표인 아기 예수님이 드러납니다. 루카의 두 번째 작품인 사도행전은 바오로 사도가 당시 세상의 끝 또는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에서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사도 28,31)는 말로 끝납니다. 루카는 이로써 시메온이 노래한 만민의 구원이라는 자신의 전망이 실현되었음을 기록합니다. 구약과 신약을 아우르는 루카의 전망에서 이방인들의 구원은 이스라엘 백성의 빛을 감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백성을 더욱 빛나게 한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방인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위해서 복음을 집필한 루카이지만 복음 앞에서 주저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배척하지 않고 통합합니다. 평생 메시아를 고대했던 노인은 죽기 전에 부르는 마지막 노래에서 ‘이제는!’이라고 외칩니다. 이 외침은 오랫동안 신앙 속에 희망을 간직했던 이만이 할 수 있습니다. 저출산 노령화 사회 안에서 젊은이들이 더 귀하게 여겨지고 노인분들은 무시당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그분들의 경험과 지혜와 신앙은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줍니다. 일찍 남편을 잃고 두 아들을 뒷바라지하시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하시고 10년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시는 나이 칠십 자매님이 “저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라며 당신의 마지막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지금은 제가 그 노랫말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것을 깨달을 날이 언젠가 오리라 기대합니다. 하루를 마치면서 끝기도를 바치듯이, 지난 반년 동안 연재를 마치면서 성경의 도움으로 기도에 대해서 함께 나눌 수 있었음에 독자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새해에는 세상이 제 자리를 찾기를, 권력을 지닌 이들이 정신을 차리고 모든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이룩하기를 기원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2,34-35)라는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 성모님께 고통을 초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분으로 상징되는 이스라엘 백성을 고통스럽게 갈라놓을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신앙은 결단을 요구합니다. 세상의 풍파에 휩쓸릴 것인지, 세상의 풍파에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과 함께 앞으로 나갈 것인지는 신앙의 선택입니다. 예상되는 온갖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구원은 이루어진다”는 루카의 전망에 기대어 여러분들과 함께 새해를 맞이합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2-25

[교회 상식 팩트 체크] 희년에는 로마 성문만 통과해도 직천당이다?

12월 24일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 성문(聖門)을 열면서 2025년 희년이 시작됐음을 선포하셨습니다. 희년이란 25년마다 돌아오는 거룩한 해인데요. 이 시기에는 특별히 많은 순례자들이 로마로 모여듭니다. 무려 약 3000만 명의 순례자들이 로마를 방문할 것이라 예상되고 있는데요. 바로 성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도대체 성문이 뭐길래 전 세계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일까요? 여기서 성문이란 희년에만 열리는 ‘거룩한 문’(聖門)을 말합니다. 어떤 분들은 “성문만 통과하면 직천당”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천국에 갈 수 있다면 3000만 명이 아니라 전 세계 사람 모두 모여도 이상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희년에 로마의 성문을 통과하기만 하면 무조건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물론 희년의 가장 중요한 표징인 성문은 ‘천국의 문’을 상징합니다. 구약성경 시대의 사람들이 부채를 탕감 받고 자유를 얻었듯이, ‘구원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 죄를 용서받고 은총을 얻는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희년은 구약성경에서 유래했는데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법에 따라 50년마다 한 번씩 축제를 거행했는데, 이때 모든 부채를 탕감하고, 노예들에게 자유를 주라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1300년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이 이 축제에서 유래한 희년을 선포하면서 교회 안에서 희년을 지내게 됐고 5번째 희년부터 성문을 여는 예식이 시작됐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요한 10,9)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성문을 통과한다는 것은 이 말씀처럼 구원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 죄를 버리고 은총으로 들어가겠다는 결심을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물론 상징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문을 통과하는 사람은 희년의 대사(大赦)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용서 받지만, 이미 지은 죄에 대한 벌은 갚아나가야 합니다. 이 벌을 면해주는 것이 대사입니다. 대사는 나를 위해서도 얻을 수 있지만, 돌아가신 다른 분을 위해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문을 통과해야만 희년 대사를 얻을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각 교구가 정한 희년 행사 참여나 순례지 방문, 자비의 활동 등으로도 대사를 얻을 수 있고, 또 희년 중 수도원, 병원, 요양원, 교도소 등에서 장소 이동이 불가능한 사람들은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며 주님의 기도와 신앙고백, 희년의 목적에 맞는 기도, 희생 봉헌 등을 통해서 대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들어가야 할 문은 우리와 아버지 하느님을 이어주시는 ‘문’이신 예수님입니다. 성문은 그것을 보여주는 상징이지요. 희년에 성문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성문은 희년에만 열리지만 예수님의 문은 회개하는 이들을 위해 언제나 열려있으니까요.

2024-12-25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산타클로스의 빨간 옷은 주교복이다?

주님 성탄 대축일이 다가오면 어린이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산타 할아버지’입니다. 아시다시피 이 산타 할아버지, 바로 산타클로스는 성탄 전야에 착한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인물입니다. 산타클로스라고 하면 붉은 모자와 붉은 옷, 그리고 하얀 수염이 인상적인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산타클로스의 이미지를 한 음료회사에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특히 이 음료의 로고 색깔을 떠올릴 수 있도록 산타클로스의 옷을 빨간색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물론 산타클로스는 나라에 따라 묘사되는 이미지가 다릅니다. 러시아 등의 나라에서는 파란 계통의 옷을 입고 있기도 하고, 산타클로스가 미국에 알려지기 시작한 19세기 무렵에는 검은 옷을 입은 산타클로스의 그림이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산타클로스는 원래 어떤 색의 옷을 입었는지를 알려면 ‘원조’ 산타클로스를 찾아야겠습니다. 산타클로스의 원조는 많은 분들이 아시는 것처럼 니콜라오 성인입니다. 니콜라오 성인은 4세기경 지금의 튀르키예 남해안에 해당하는 ‘미라’(Myra)라는 도시의 주교였습니다. 성인은 생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자선을 많이 베풀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성인의 전설 중에는 3명의 어린이를 살려낸 일화도 있지요. 이런 이유로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 등의 나라에서는 성인의 축일인 12월 6일 즈음에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풍습이 생겼습니다. 이 풍습은 17세기경 네덜란드 사람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해 이 풍습을 소개하면서 미국에도 널리 알려지게 됐습니다. 네덜란드어로 성 니콜라오를 신터 클레스(Sinter Claes)라고 부르는데요. 이 말이 영어로 옮겨지면서 산타클로스(Santa Claus)가 됐습니다. 앞서 니콜라오 성인이 주교였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산타클로스의 빨간 옷은 주교복을 상징합니다. 음료회사가 산타클로스에게 빨간 옷을 입히기 전에도 이미 산타클로스는 빨간 옷을 입었던 것이지요. 산타클로스의 모델이 된 네덜란드의 신터 클레스도 빨간 옷을 입고, 심지어 주교관 형태의 빨간 모자를 쓰고, 지팡이도 들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니콜라오 성인이 ‘주교’였음을 묘사한 것입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서 이콘이나 성화에서도 니콜라오 성인은 붉은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오늘날 이 빨간 옷의 산타클로스는 성탄의 대표적인 이미지가 됐고, 성탄에 떠오르는 색깔이라고 하면 역시 빨간색을 빠뜨릴 수 없게 됐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진홍색 옷은 추기경이 입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추기경을 ‘홍의주교’(紅衣主敎)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 붉은 색은 교회에 봉사하기 위한 피(血), 바로 순교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우리는 거리를 수놓은 빨간색을 바라보면서 무엇을 떠올리나요? 순교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다시금 떠올려 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2024-12-15

[성경 속 기도 이야기] 성모님의 찬양 마니피캇

즈카르야의 노래(루카 1,68~79)와 성모의 노래(루카 1,46~55)와 시므온의 노래(루카 2,29~32)는 성무일도의 아침기도·저녁기도와 끝기도에서 불리는 복음서의 찬가로, 구약의 오랜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 실현된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레지오 단원들이 매일 바치는 까떼나(사슬 기도)의 주요 부분인 성모의 노래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마주치는 곳에 자리합니다. 천사와 만난 마리아는 두려운 마음으로 믿을만한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 나섭니다. 마리아의 인사말만 들은 엘리사벳이지만, 태 안에서 아기가 뛰노는 것을 느끼며 성령으로 가득 차 외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마리아가 수태 사실을 입에 올리기도 전에 그것이 알려지는 놀라운 순간에 마리아에게서 하느님 찬양이 터져 나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노래(1사무 2,1~10)가 큰 영향을 끼치고, 시편 및 구약의 여러 대목을 인용하는 이 노래는 마리아의 찬양 시편입니다. 그 전반부는 메시아의 어머니인 마리아 개인의 감사를, 후반부는 높이고 낮추는 세 개의 반대되는 움직임 속에 당신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을 노래합니다. <1절>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1사무 2,1; 시편 34,3~4)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시편 35,9; 이사 61,10; 하바 3,1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창세 29,32; 1사무 1,11)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창세 30,13; 시편 72,17; 루카 1,45 참조)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신명 10,21)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시편 72,19; 111,9)  <2절>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시편 89,2; 100,5; 103,11.13.17)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시편 89,11; 118,15-16)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시편 147,6; 집회 10,14).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시편 107,9)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시편 98,3)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이사 41,8-10)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2사무 22,51; 미카 7,20) 마리아는 자신의 힘을 믿지 않고 모든 것을 하느님으로부터 기대하는 가난한 여인입니다. 기도하는 이는 마리아와 같이 겸손함과 경외심을 가지고 하느님께서 채워주시리라 기대하며 그분께 자신의 빈손을 내밀며, 실제로 하느님이 당신의 이들을 구하시기 위해 ‘능하신 팔’을 뻗치신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분은 당신의 계약에 충실하시고 약속을 지키십니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에서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은 불가능한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시고, 달리 보인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분이십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을 ‘나의 구원자’로 칭하는데, 이는 아들인 예수의 이름과 같고 루카 복음과 사도행전의 핵심 주제와(루카 1,69.71.77; 2,11.30; 사도 5,31; 13,23 등) 동일합니다. 이름 ‘예수’는 하느님이 구원하신다는 뜻을 지닙니다.(하바 3,18; 마태 1,21; 루카 1,31 참조)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은 없는 이를 구원하는 분으로 드러나십니다. 하느님은 도움을 주시고 구하시는 분입니다. 이 노래는 끊임없이 백성을 향하는 하느님의 충실한 모습을 강조합니다. 그분은 나에게 충실하신 분이고 나를 알고 계시며 자비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항구함에 걸맞은 응답은 결코 끊이지 않는 우리의 감사와 찬양일 것입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2-15

[교회 상식 팩트 체크] 크리스마스트리에는 예수님이 없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거리를 수놓는 특별한 장식이 있습니다. 형형색색으로 아름답게 꾸민 크리스마스트리입니다. 아시다시피 크리스마스트리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마음이 담긴 장식입니다. 그래서 신앙 유무를 떠나서 크리스마스트리의 우듬지에는 별 모양 장식이 달리곤 합니다. 바로 예수님이 태어나신 마구간 위에 떠 있었다는 별(마태 2,2)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크리스마스트리에는 별은 있지만, 별 아래 태어나 계실 아기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종종 나무 아래에 구유 등의 성물을 두기도 합니다만, 일반적인 경우에는 아기 예수님의 성상 등을 두지 않는 것 같습니다. 원래는 계셔야할 예수님이 왜 보이지 않는 걸까요? 아니면 크리스마스트리가 너무 상업적으로 이용돼서 예수님을 모시는 걸 잊어버린 걸까요? 답변을 먼저 드리자면, 크리스마스트리에는 아기 예수님 성상을 두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크리스마스트리, 푸른 잎을 지닌 나무가 그 자체로 예수님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크리스마스트리를 언제부터 두기 시작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16세기경 독일 남서부 지역에 성탄을 앞두고 나무를 장식한 기록 등에서 크리스마스트리의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시 이 지역에서는 주님 성탄 대축일을 맞아 낙원극(樂園劇)을 공연하는 전통이 있었는데요. 낙원, 즉 에덴동산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표현하는 이 낙원극 중에는 에덴동산의 ‘생명의 나무’(창세 2,9)를 나타내는 상록수에 과자를 달거나 촛불로 꾸몄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에덴동산의 이야기에는 중요한 연결고리가 있는데요. 바오로 사도는 연결고리에 관해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라고 설명합니다. 에덴동산의 ‘생명의 나무’는 수난과 죽음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해 주신 예수님의 ‘십자 나무’(1베드 2,24)로 연결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크리스마스트리에는 전통적으로 두 가지 형태의 열매를 장식합니다. 첫 번째로 빨간 구슬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 죽음이 찾아왔음을 기억하게 해주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하얀 구슬은 ‘생명의 빵’(요한 6,22-59)이신 예수님의 몸, 성체를 상징하는 장식입니다. 이런 크리스마스트리의 풍속은 가톨릭, 개신교를 막론하고 전 유럽으로 퍼졌고, 미국으로도 전파됐습니다. 1891년에 처음으로 워싱턴 백악관에도 크리스마스트리가 전시됐고, 이제는 종교를 넘어 세계의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대표적인 성탄 장식이 됐습니다. 올해 성당과 거리 곳곳에 서있는 크리스마스트리를 볼 때마다 우리를 위해 ‘생명의 나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십자 나무’가 돼주신 아기 예수님을 향한 감사와 사랑을 기억해 보면 어떨까요.

2024-12-08

[성경 속 기도 이야기] 노래하는 공동체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그리스도 찬가(필리 2,6-11)

“오 주여, 당신께 감사하리라, 실로암 내게 주심을. 나에게 영원한 사랑 속에서 떠나지 않게 하소서.” 개신교 목사님이 만드시고 천주교 생활성가로도 불리고 심지어 야구 응원가로도 쓰이는 ‘실로암’이라는 성가를 들으면 가슴이 벅차고 마음이 열립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노래하는 사람은 두 번 기도하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필리피서 그리스도 찬가(필리 2,6-11)는 전해지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그리스도교의 기도이고, 전례 중 공동체가 함께 부르던 성가였습니다. 1절: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필리 2,6-8) 2절: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필리 2,9-11) 가장 오래된 기도인 그리스도 찬가 인간 모습으로 태어난 그리스도 스스로 낮추며 높아지는 모습 담겨 찬가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 하느님 곁에 계셨다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그분은 아버지께 순종하시면서 종살이와 죽음이라는 인간의 운명에 동참하시기 위해 당신이 지니셨던 신성에 연연하지 않고 그것을 포기하셨습니다. 십자가 죽음이라는 자기 낮춤의 밑바닥에서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우주의 모든 권능을 위로 높이 올리십니다. 왕좌에 오르는 임금처럼 그분의 이름이 선포되고 모든 이가 그분을 경배하는 가운데 그분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으로 드러나십니다. 여기서 사도 바오로는 “정녕 모두 나에게 무릎을 꿇고 입으로 맹세하며 말하리라. ‘주님께만 의로움과 권능이 있다.’”(이사 45,23-24)는 예언서 말씀을 인용합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홀로 높으심을 강조했습니다. “나 주님(야훼)이 아니냐? 나밖에는 다른 신이 아무도 없다. 의롭고 구원을 베푸는 하느님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이사 45,21) 사도 바오로는 여기서 예수님을 유일하신 하느님과 같은 분으로 선포하며 유다교의 하느님 상을 확장합니다. 하느님은 저 높은 하늘에 홀로 계신 분이 아니라 아드님을 통해 세상에 내려오시고, 누구보다도 저 삶의 밑바닥에서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들과 함께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인간과 완전히 다르신 분이시지만 아드님을 통해 인간 곁에 오시며 인간 세상을 완전히 변화시키셨습니다. 당장 망할 것 같은 세상과 이 순간이 예수님을 통해 해방되고 중심을 잡고 목적을 얻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일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심오한 그리스도론을 이용합니다.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필리 2,3-4) 믿는 이들과 교회 공동체가 자기 자신에 사로잡혀 자신 주위만을 맴맴 돌며 다른 이들을 돌보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바오로는 이기심과 선입견과 질투심에 사로잡힌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닮아 자기를 비우고 겸손해져 다른 이들을 섬기기를 권고합니다. 자신보다 타인을 먼저 돌보는 이는 예수님과 함께 들어 높여질 것입니다. 신앙의 여정에서 자꾸 넘어지는 우리는 저 밑바닥까지 내려가셨다가 현양 된 예수님과 함께 다시 일어설 힘을 청하며 함께 노래합니다. “오 주여, 당신께 감사하리라!” 글_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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