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던 어느 하루, 한밤중에 두툼한 갈치구이가 너무 먹고 싶어 잠이 안 왔다. 그래서 냉동실에 두 토막 남아있던 갈치를 모두 꺼내 프라이팬에 노릇노릇 구웠다. 그리고 찬밥을 물에 말아 두툼한 갈치 살과 함께 정신없이 퍼먹고 있는데 잠을 자다 냄새를 맡고 나온 남편이 부엌에 쪼그리고 앉아 뭔가를 먹고 있는 내 뒷모습을 본 거다. “뭐해??” 나는 무덤에서 간을 파먹고 있는 구미호처럼, 한 손에 갈치를 들고 남편을 돌아보았다. “밥 먹잖아….” “지금이 몇 신데?” 그 늦은 밤에 내가 왜 갈치를 들고 밥을 퍼먹고 있는지 설명해 준다고 이해할 수 있을까. 내가 먹을 갈치 뒷면을 아이들에게 모두 뺏겨버린 어미의 슬픈 비애는 어떻게 포장해서 말해본들 ‘쪽팔린 식탐’일 뿐이었다. 어쨌거나 그날, 두툼한 갈치 두 토막을 야무지게 발라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고 나 혼자 다 먹은 다음, 몹시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잠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딸기도 달콤하고 싱싱한 건 아이들에게 먹이고 짓무르고 덜 익은 건 내가 먹으며 ‘엄마니까 그래야 하는 거야’라고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나도 맛있고 좋은 거 먹고 싶다’며 억울해하던 철없는 엄마였다. 치킨을 먹을 때도 퍽퍽한 가슴살 말고 닭다리부터 뜯고 싶었지만 보고 듣고 배운 게, 엄마는 아이에게 더 맛있고 좋은 것을 먹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참고 양보했다. 세상에 어떤 엄마가 애들한테 먹이는 걸 아까워하냐고 한심해할지 모르지만 스물일곱에 엄마가 되어버린, 어리고 미숙한 시절이라 그랬다. 전역한 아들에게 전복을 구워주며, 군대 있을 때 누가 제일 많이 생각났냐고 물었다. “물론, 엄마죠.” “왜 엄마가 제일 많이 생각났어?” “엄마가 해주는 밥, 그게 먹고 싶더라고.” “내가 음식을 좀 잘하긴 하지. 너네 어려서부터, 자장면이고 피자고 집에서 만들어 먹였잖아. 그러고 보면 참 좋은 엄마였어, 안 그래?” “뭐 그런 것도 있지만, 엄마가 해주는 밥은 인간미가 있잖아. 군대라는 곳은 인간미가 없어. 때 되면 먹고 누가 더 먹으라고 챙겨주거나 맛없다고 타박도 못하고 그냥 욱여넣어야 하거든. 그래서 엄마가 해주는 밥이 먹고 싶었어요.” 인간미가 있는 밥. 아이의 표현이 참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아이들에게 최고의 엄마, 좋은 엄마였다고 자부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인간미 넘치는 밥을 먹여 키웠구나, 싶어서. 내가 해준 음식을 맛있게 싹싹 비우는 아들을 보며 엄마라는 게 뭐 대단하고 거창한 게 아니라 따뜻한 밥을 해서 먹이는 사람, 그 정도로 기억되는 것만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은 곧 생명이다. 그래서 우리는 음식을 먹기 전, 손을 모으고 기도한다. ‘주님, 은혜로이 내려주신 이 음식과 저희에게 강복하소서.’ 그리고 하나 더, 아이들을 위해 오늘도 따듯한 밥상을 차려내는 엄마들에게 강복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글 _ 김양미 비비안나(소설가)
2025-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