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거스르는 희망

‘핵심만 알려드리는 신년 운세’, ‘나의 타고난 결혼 상대는’, ‘오늘 하루 나의 기운은’ 등등. 점술 관련 취재를 하다 들여다보게 된 점술 애플리케이션(앱)은 시작 화면에서부터 눈을 끌었다. 마치 놀이를 하듯 ‘올해의 비밀은 무엇인지’, ‘운명의 흐름은 살풀이가 해답’이라는 식으로 클릭을 유도했다. ‘운세’라는 말에서 풍기는 다소 무거운 분위기가 아닌 경쾌함을 주는 광고 문구들…. 월간 고유 방문자 수가 많은 운세 점술 앱 1등 공신이 2030세대라는, 또 지속적으로 앱을 이용하는 고객이 젊은 층이라는 말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익명성을 보장하면서 간편하게 미래에 대한 불안과 기대감을 풀어주는 도구로 청년들에게 선호된다고 했다. 앱에서 뿐만 아니라 대형 플랫폼에서도 운세 서비스는 인기다. 요즘은 AI가 점사를 녹음 요약도 해주고, 문서로도 정리해 준단다. 점술업 특성상 전문성이나 신뢰성에 의문을 가질 수 있음에도, 호황이 이어지는 것은 그만큼 특히 젊은이들에게 시대가 주는 불안이 크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것은 한편 기성 종교가 사회적 정화작용을 하지 못하고 위로를 주지 못하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지 않을까. 최근의 인문학 열풍이나 명상, 요가 등 종교성을 띤 취미 활동이 많아지는 것도 사람의 타고난 종교성을 ‘종교’가 제대로 역할을 해주지 못하고 매력으로 다가서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한 전문가 분석이 떠오른다.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시대, 위로와 안정감을 찾는 이들이 점술 도구에 문을 두드리는 팍팍한 세태다. 12월 29일 거행된 올해 정기희년 개막 예식에서 주제곡 ‘희망의 순례자들’을 부르며 많은 상념이 일었다. 희년은 모두에게 세상을 거스르는 용기와 희망의 불꽃이 되어야 하리라.

2025-01-05

비판하기 전에 관심을

12월 20일 서울 영등포 ‘토마스의 집’에서 거리 노숙인과 쪽방촌 주민들이 동절기 한파에 대비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응급구호활동’이 열렸다. 예정된 시각 전부터 주민들은 앞다퉈 토마스의 집에 몰려왔다. 오전 11시가 되자 요셉의원 앞은 물론이고 그 뒷골목 1호선 전철이 지나는 철도 옆까지 줄이 늘어섰다. 마치 ‘오픈런’을 보는 듯했다. 통제가 쉽지 않아 보였다. 대부분 주민이 질서를 지켰음에도 모두가 평화롭지는 않았다. 누군가 새치기를 시도했는지 이따금 고성이 오갔다. 봉사자들은 골목을 오가며 줄을 정비하고 싸움을 중재해야 했다. 한 봉사자는 취재 온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동선을 확실히 정해야 두 번 세 번 구호 물품을 받아 가려는 사람을 막을 수 있어요.” 이들에겐 남들의 시선이 중요치 않아 보였다. 시선을 신경 쓴다는 것 자체가 사치처럼 보였다. 이날 받게 될 점퍼와 떡, 핫팩이 더 중요했다. 다투고 싸우는 모습은 거칠고 힘겹게 살아온 삶을 투영하고 있는 듯했다. 사회의 무관심은 취약계층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더 강하게 만든다. 한국 사회에 ‘빈민’은 노력하지 않는 게으른 자들이라는 비판적 시각을 많이 접했다. 하지만 몇 가지 논리로 획일화시키기는 것 자체가 이들에 대한 무관심을 드러내는 것 아닐까. 이날 만난 주민 일부가 무료로 나눠주는 구호 물품에 왜 욕심 아닌 욕심을 부리는가를 생각해 본다. 어째서 따뜻한 옷 가게에서 옷을 고르지 못하고 이 추운 데서 줄을 서게 됐는지 사정은 잘 모른다. 그래서 섣부른 판단은 접기로 했다. 대신 빈민을 좀 더 들여다보고, 그들의 마음에 관심을 더 가지기로 다짐한다.

2025-01-01

산타 할아버지 왕요셉 신부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가사는 없었지만 노랫말이 또렷이 들리는 듯했던 살레시오회 왕요셉 신부의 트럼펫 연주 <고요한 밤 거룩한 밤> 한 소절이 서울 돈보스코 청소년센터 성당을 가득 채웠다. 스테인드 글라스 안의 아기 예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음률을 흥얼거리는 듯했다. 왕 신부는 “너무 오랜만이라 잘 안 불어진다”고 했지만, 아흔이 넘은 춘추에 직접 부는 트럼펫의 음색은 비교적 또렷했고 손놀림도 정확했다. 산타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아기 예수와 가장 닮은 아이들이 주인공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성탄. 그런 아이들을 가장 사랑하는 성인 중 한 명인 성 요한 보스코는 살레시오회를 창립했다. 살레시오회원인 왕 신부도 성 요한 보스코를 닮았다. 일본 선교 시절 고아원에서 아이들과 어울렸고, 한국에 와 돈보스코 청소년센터 설립에 참여하고 학교 교사도 지내며 사랑이라는 선물을 듬뿍 전했다. 마침 살레시오회는 현재 광주에서 청소년 대상 ‘돈보스코 농구대회’ 개최와 관련해 후원을 받고 있다. 어릴 적 스페인 내전, 제2차세계대전 등을 겪으며 신문에 자주 등장한 비행기를 보고 비행기 조종사를 꿈꿨었다는 왕 신부 이야기를 듣고는, 그가 루돌프 사슴 대신 비행기를 몰고 아이들을 찾아다닐 뻔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인터뷰 마무리 시간, 기자들에게 마지막까지 유쾌하게 인사를 건네는 왕 신부의 미소는 누구보다 산타 할아버지를 닮아 있었다. “다음에 또 놀러 오세요. 그때 저는 더 구부러진 할아버지가 돼 있겠지만요. 메리 크리스마스!”

2024-12-25

사랑은 혐오보다 강하다

나눔 현장을 취재할 때마다, 미풍 같은 사랑이 강풍 같은 힘보다 강하다는 걸 느낀다. 소외 계층을 위한 무료 생필품 공급매장 ‘희망을 여는 가게’ 부평점을 찾은 12월 5일. 시설장 김정(미카엘라) 수녀와 봉사자들이 실천하는 사랑은 15평 남짓한 반지하 빌라 공간을 넘어 150명도 넘는 지원 대상자들의 고장에 두루 미쳤다. 절망했던 마음들이 희망하도록 변화시키는 기적이었다. 한 대상자는 매달 수녀와 봉사자들이 배달을 올 때마다 장문의 감사 편지를 써서 안겨주고 있다.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삶에도 그는 수녀와 봉사자들에게 “힘이 됐으면 좋겠다”며 약과와 요구르트까지 편지와 함께 쥐여줬다. “하느님의 사랑을 나도 이웃에게 나누고 싶다”며 신앙까지 되찾았다. 대상자들은 수녀와 봉사자들의 ‘어떤 물건이 필요할지 우리가 많이 생각했어요’ 하는 묵묵한 진심에 변화했다. 희망이 가슴에 와닿은 적 없었을 사람조차 스스로 희망하게 하는 힘은 이렇듯 사랑에서 나왔다. 그러니 ‘사랑은 혐오보다 강하다’는 말을 믿지 않는 건 하느님(사랑)보다 힘(혐오)을 숭상하는 사람들뿐이 아닐까. 권력에 집착하는 내면은 가뭄보다도 메말라 붙지 않았을까. 12월 3일 밤 온 국민을 기습한 내란의 시발점이 된 비상계엄령의 해제를 도운 건 무장한 군인을 껴안듯 제지한 시민들, ‘나도 시민’이라는 공감으로 움직인 군인들 등 사랑의 힘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미풍 같은 사랑이 사실 얼마나 강한지 서막을 목격했다. 결국 콩쥐가 팥쥐를 이기듯 사랑이 이긴다는 믿음이 중요하지 않을까. 겨울을 무찌르는 봄의 훈풍은 원치 않아도 나부끼게 마련이듯 말이다.

2024-12-15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으니까요

서울 대학동 고시촌에 있는 독거 중장년을 위한 쉼터 ‘참 소중한...’의 센터장인 이영우(토마스) 신부의 사제관은 작은 고시원이다. 교구는 고시촌에서 떨어져 있는 편안한 사제관을 제안했으나 이 신부는 가난한 사람들 곁에 살길 택했다. 이 신부가 그런 선택을 한 이유는 간단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으니까요.” 우리는 줄곧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가난한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 소외된 이들을 후원하며 나의 것을 나누기도 한다. 성당 안에서는 적극적으로, 기꺼이 소외된 이들을 위해 했던 일들이 성당 밖을 나오면 어려워지곤 한다. 소외된 이들을 외면하는 정치를 하는 이들에게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신앙생활과 무관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세상의 일에 목소리를 내는 사제들에게 정치적 편향성을 드러낸다는 비난이 쏟아지기도 한다. 신앙생활과 삶은 떨어뜨려 생각하는 것이 맞을까? 「간추린 사회교리」는 “정의, 자유, 발전, 민족들의 관계, 평화에 관한 문제들이나 상황처럼 인간 공동체와 관련된 것이라면 그 어느 것도 복음화와 무관하지 않으며 복음과 인간의 구체적인 개인 생활과 사회 생활이 서로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것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복음화는 완성될 수 없다. … 만일 정의와 평화로 참된 인간 발전을 증진시키지 못한다면 어떻게 사랑의 새 계명을 선포할 수 있겠는가?”(66항)라고 설명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사회교리는 지킬 교리, 즉 생활지침서와 같은 것이다. 그릇된 정치로 가난한 이들의 가난이 심화되고, 한 형제였던 이들이 분열되고 다투고 있는 현장에서 예수님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셨을지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해질 것이다.

2024-12-08

“네 자녀이기 전에 내 자녀다”

지적장애를 지닌 자녀를 둔 부모와 인터뷰를 하다보면 가슴이 먹먹해지곤 한다. 자녀를 돌보는 것 자체도 벅차고 힘든 일이지만, 부모가 세상을 떠난 이후 남겨진 자녀의 삶이 그보다 더 큰 마음의 짐이다. 누가 부모처럼 자녀들을 돌볼 수 있을까. ‘사랑 나눌수록 커집니다’ 취재로 만난 이원명(페르페투아) 씨도 분명 그 짐이, 그 멍에가 무거운 부모였다. 그러나 이 씨는 자신이 떠난 이후 자녀들의 삶을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걱정이 되지 않을 리는 없었다. 예순을 넘은 그는 지적장애인 자녀를 하나도 아니고 다섯이나 돌보고 있었다. 심지어 경제적으로도 크게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씨는 자녀들로 인해 힘든 상황 중에 “기도를 하던 중 문득 ‘네 자녀이기 전에 내 자녀다’라는 말씀이 떠올랐다”며 “자녀들이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 하나만 알고 살아간다면 걱정이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씨의 믿음 어린 말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이는 비단 장애를 지닌 자녀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2027년 서울 세계청년대회를 지원하고자 의원연구단체를 구성한 김희영(루치아) 용인시의원도 인터뷰 중 “부모로서 아이들의 인생 전체를 책임져주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 부족함을 항상 느낀다”면서 “그래서 신앙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김 의원에게 세계청년대회도, 젊은이들에게 열린 성지도 우리 자녀들, 아니 앞으로 세상을 살아갈 하느님의 자녀들을 위한 일이었다. 자녀들을 위한다는 이유로 수많은 걱정을, 그리고 그 걱정 때문에 많은 일을 하고, 또 자녀에게 많은 일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본다.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예레 1,5)고 말씀하시듯, 우리 자녀는 우리가 낳기 전에 이미 하느님께 속한 자녀라는 것을 기억해야겠다.

2024-12-01

‘괜찮아’

2009년 선종한 영문학자이자 번역가·수필가 고(故) 장영희(마리아) 서강대 교수는 첫돌을 앞두고 발병한 열병으로 1급 소아마비 진단을 받고 평생을 목발에 의지해야 했다. 그런데도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스스로에게도 실의에 빠졌거나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늘 웃으며 ‘괜찮아’라는 말로 용기를 북돋웠다. ‘괜찮아’는 신체적인 불편함으로 성장하는 그가 숱한 어려움과 편견 속에서 자신을 지탱하는 힘이기도 했다. 어릴 적 다른 아이들이 골목에서 뛰놀 때 그저 자신은 목발을 세워두고 노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었을 때, 엿장수 아저씨가 깨엿 두 개를 손에 쥐여주며 했던 말이라고 한다. 그때 공짜 깨엿이 괜찮다는 것인지, 목발을 짚는 것이 괜찮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장 교수는 ‘이 세상은 그런대로 살만한 곳이고, 좋은 친구들이 있고, 선의와 사랑이 있으며, 용서와 너그러움이 있는 곳’이라는 마음을 정했다고 한다. 11월 16일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에서 봉헌된 장영희 교수 기림미사는 평소에 “유명한 학자나 역경을 이겨낸 신앙인이 아니라 그저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던 고인의 삶을 통해 소박하고 평범한 일상의 의미를 일깨웠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 속에서 나에게, 곁의 친구와 이웃에게 ‘괜찮아’라고 먼저 건넬 수 있는 고리가 됐다. 2001년 처음 암에 걸린 후 눈을 감을 때까지 힘든 병상 생활을 했던 고인이 암 치료 중에 써낸 에세이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를 다시 펼쳤다. 글 속에서 ‘천형(天刑) 같은 삶’이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삶은 누가 뭐래도 ‘천혜(天惠)의 삶’이라며 받은 사랑을 더 큰 사랑으로 나눴던 그를 거듭 떠올려본다.

2024-11-24

함께라면 어디든 그곳이 바로

푸른 초원, 한라산, 여유로운 말들….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이어돈 신부를 만나기 위해 제주도 성 이시돌 피정의 집을 찾았다. 기가 막히게 펼쳐진 풍경에 흥분해서 어디를 배경으로 인터뷰를 하는 게 좋을까 장소를 물색했다. “제주도 하면 한라산이지!” 함께한 선배의 선택에 처음엔 피정의 집과 가까운 목장 안에서 저 멀리 우뚝 선 한라산을 배경으로 촬영하려 했다. 하지만 바로 목장으로 들어갈 수 없어 차를 타고 이동했더니 안타깝게도 가까운 오름에 한라산이 가려져 버렸다. “그럼 목장 안에서 피정의 집을 배경으로 찍읍시다!” 우리는 목장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카메라 세 대를 설치했다. 그러자 곧 말들이 우리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어돈 신부는 수의사답게 익숙하면서도 친밀하게 말을 쓰다듬고 살폈다. 그렇게 한두 마리씩 접근한 말들은 내 등 뒤로도 콧김을 뿜어댔다. 처음엔 크고 낯선 동물이 다가오는 게 무서웠지만 나중이 되자 그럴 새가 없었다. 말들이 자꾸 (비싼) 카메라를 밀어대는 통에 두려움은 저 멀리 두고 손짓발짓을 해가며 카메라와 삼각대를 사수해야 했다. “도저히 안 되겠네요. 밖으로 나갑시다.” 촬영을 시작할 수 없을 정도가 되자 결국 우리는 울타리를 배경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조금 아쉬움을 느낀 찰나, 이어돈 신부 뒤로 어미 말과 망아지가 서로 부비며 울타리 근처에서 놀기 시작했다. 넉넉한 웃음의 이어돈 신부와 그 뒤로 예쁘게 장난치는 어미 말과 망아지라니. 이보다 더 멋진 장면이 어디 있을까? 사랑보다 멋진 배경은 없었다. ‘함께라면 어디든 그곳이 가장 근사한 장소’라는 말이 생각난 광경이었다.

2024-11-17

주거는 인간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자리’

공공임대주택 공급문제와 관련한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정책토론회에 다녀왔다. 내용을 보면 공공임대주택은 거스를 수 없는 정책의 흐름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여전히 국가가 취약계층에게 주택을 공급하는 것에 부정적인 시각도 만만찮다. 누군가는 세금 문제를 들고나오고 누군가는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한다. 빈민 자체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이도 적진 않다. 일부는 임대주택 거주민들을 비하하거나 차별한다. 빈민사목위원장 나충열 신부는 이에 대해 “보이지 않는 벽이 공공(共功)을 적(敵)으로 만들고 있다”며 “부동산이 ‘상품’이라는 인식을 가지면서 주거권이라는 권리 자체에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것이 현실”이라고 탄식했다. 주거를 인간의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지 않으니 정부의 주택 공급도 안 좋게 본다는 말이다. 빈민사목위가 활동을 시작한 건 1987년부터다. 이미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주거라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최소한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울부짖었는지 목격했다. 주거는 단순한 재산 증식 수단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최근 정치권에서 헌법에 ‘주거권’을 명시하는 헌법개정을 추진하겠다는 목소리가 나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고(故)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이 말했듯 취약계층에 대한 주거 마련은 말 그대로 ‘최소한의 자리’를 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정부가 공공임대주택 정책에 지출하는 것을 꺼리는 듯한 모습은 아쉽다. 누군가에겐 소유할 수 있는 ‘재산’이지만 누군가에겐 절실한 삶의 안식처라는 시선에서 바라본다면 정책의 방향이 바뀌지 않을까.

2024-11-10

탓이 없는 지옥을 살아가는 사람들

“‘하느님은 내 편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너무너무 많이 했어요.” 10월 23일 인천교구 노동자센터에서 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마련한 ‘이태원 참사 2주기 유가족 간담회’. 나눔을 하던 한 희생자 어머니가 이 말과 함께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탓이 없는 지옥을 살아가는 사람의 호소라 더더욱 서글펐다. 그날 성경에서 욥의 이야기를 읽었다. 욥 또한 자기 잘못도, 하느님의 잘못도 아닌 지옥을 살았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다. 전세사기 피해자, 임금을 빼앗긴 이주노동자, 성폭력 피해자…. 수많은 욥이 우리 사회 곳곳에, 모양만 다른 아픔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 욥의 친구들은 자신이 보고 듣고 아는 것이 전부인 양 욥의 고통을 설명하려 했다. 비슷한 아픔으로 냉담 중인 지인은 “알지도 못하는 고통을 감히 설명하려 들고, 참아내야 할 과정쯤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의 ‘말, 말, 말’ 때문에 하느님까지 미워졌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설명하려 드는 태도는, 고통에 근사한 이름을 붙이는 철학자 같을지는 모르겠네요. 하지만 십자가를 함께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는 신앙인답지는 않겠죠?” 평소 상담하는 한 신부님의 이 말씀이 큰 위로가 됐다. 신부님은 “고통은 함께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시는 성자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라고 말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서로 공감하고 편이 돼주라는 말씀이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서 이유 없이 고통받고 돌아가셨다. 어떤 이유도 설명도 힘을 잃고 마는 그 절망의 심연에서, 똑같이 아프셨던 하느님은 고통받는 이들에게 그저 손을 잡아주시지 않을까. 일단 나부터, ‘공감하시는 하느님’을 닮은 신앙인이 되겠다는 마음이 강렬해졌다.

2024-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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