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요한묵시록 저자, 요한

‘요한묵시록은 누가 썼을까’라는 물음에 우리는 주로 역사의 한 인물을 찾으려 애쓴다. 예컨대, 파트모스섬에 갇힌 사도 요한을 떠올리는 것이다. 2세기의 유스티노나 이레네오 교부의 증언을 시작으로 교회는 사도 요한을 요한묵시록의 저자로 여기고 있다. 그럼에도 요한이라는 이름은 ‘원로 요한’ 혹은 ‘마르코라는 요한’(사도 12,12.25; 13,13 참조)으로도 소개되기에 역사적 저자에 대한 질문은 또 다른 질문으로 혼재되어 흩어진다. 물론 여기에 ‘요한복음의 저자와 요한묵시록의 저자가 같은 요한인가’라는 질문이 덧붙여지기도 한다. 현대 주석학의 발전으로 요한묵시록이 한 시대, 한 사람의 작품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음을 알게 된 이후 요한묵시록은 이른바 ‘요한계 학파’라는 어떠한 사상을 공유하는 하나의 ‘공동체적 작품’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여, 우리가 주목할 것은 역사의 한 인물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요한묵시록이라는 책이 소개하는 저자의 문학적 실루엣이다. 요한이라 명명된 저자는 ‘하느님의 종’(묵시 1,1 참조)이자 ‘환난을 함께 겪는 형제이고 동반자’(묵시 1,9 참조)이다. 또한 자신이 본 것을 직접 써 내려가는 작가의 면모 또한 요한으로 소개된다.(묵시 1,11.19 참조) 이것이 끝이 아니다. 요한은 모든 민족에게 ‘예언’해야 할 사명을 부여받기도 한다.(묵시 10,11 참조) 그러나 그는 파트모스섬에 갇혀 있다. 형제와 함께 환난을 겪고 형제들에게 자신이 본 것을 써 보내야 하고, 나아가 세상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할 요한은 공간적으로 고립되어 떨어져 있다. 그의 공간적 단절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에 대한 증언’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증언은 역설적이게도 두 가지 대립 개념을 하나의 통합적 사유로 조망하도록 독자들을 이끈다. 증언 때문에 요한은 ‘환난’을 겪고 있고, 그럼에도 증언을 통해 독자들을 행복으로 이끌고자 한다는 것.(묵시 1,3;22,7 참조) 요한이라는 인물의 묘사는 물리적 거리감을 기반으로 한 어느 영웅의 희생적이고 특별한 삶을 기리는 데 소용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환난’을 ‘함께’ 겪는 형제적 일치가 하느님과 어린양이신 예수님과의 일치가 된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문학적 장치로 기능한다. 그리고 그 일치는 요한묵시록을 읽는 수많은 형제와의 일치로 확장되고, 그 일치를 요한은 ‘행복’이라는 단어로 환치해서 소개하고 있다. 요컨대, 요한은 특정 시공간의 범주를 뛰어넘어 신과 인간의 일치를 위해 보고 쓰고 선포하는 행복의 매개체다. 요한을 따라 요한묵시록을 읽어나가면서 맞닥뜨리는 모든 환시는 신과 인간의 일치가 행복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장치가 된다. 요한이 처음 본 ‘사람의 아들’이 대표적 경우다.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살아 있는 자다. 나는 죽었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묵시 1,17-18) 요한이 본 것은 특별하고 생소한, 그리하여 흔한 유다의 묵시문학들이 제공하는 천상의 화려함에 있지 않다. 다만, 여느 ‘사람’, 그 ‘사람’을 통해 신적 신비를 보게 될 뿐이다. 종말의 시대에 천상과 지상을 이어주는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람의 아들’(다니 7장 참조)을 예수님께 적용한 요한묵시록은 신적 신비를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환시는 사람에 대한 사유, 예수님을 통해 사람의 운명이 어떻게 변모했는지, 신적 가치가 사람의 가치 안에서 어떻게 사유되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다시 요한이 갇힌 파트모스섬이라는 공간과 요한의 선포가 끝없이 펼쳐질 무한한 공간의 연결성에 대해 사유해 보자. 한 사람이 겪는 환난의 공간이 행복의 공간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사유 말이다.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에 대한 증언으로 머물게 된 환난의 공간에서 요한은 이미 형제들과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요한은 파트모스라는 단절의 공간에서 이미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그리하여 모든 대립과 단절을 뛰어넘는 ‘사람의 아들’을 보았고 전하게 된다. 단절이 초월이 되고 환난이 행복이 될 수 있는 건, 놀랍게도 철저하게 한 공간에 머물며 자신이 보고 듣고 쓰는 것에 집중한 요한 덕택이다. 하나의 공간에서 수많은 공간과 시간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초월적 지식이나 정보 때문만이 아니다. 인간의 삶이 제한적이고 한계적이라 해서 천상의 하느님을 읽어낼 수 없다는 것에 요한묵시록의 저자 요한은 저항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굳이 우리가 천상적 삶과 거기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을 염두에 두는 입장에 선다면, 모든 인간적 삶과 거기서 오는 행복은 얼마간 부족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요한은 달랐다. 시공간의 한계를 있는 그대로 고백하고 제 삶의 환난을 기꺼이 짊어지며, 자신이 보고 듣는 것은 진솔하고 담담히 적어 내려갔을 뿐이다. 요한은 자신의 시공간과 다른 또 하나의 시공간을 꿈꾸지 않았다. 그렇다고 주어진 시공간을 저만의 왕국으로 만들지 않았다. 갇혀 있으되 열려 있는, 고요하되 수많은 말들이 이곳저곳에 울려 퍼지는, 그러한 자리를 요한은 파트모스에서 만들어 갔다. 제 삶에 두 발을 디디고 굳건히 서 있을 때, 하늘의 계시는 가장 찬란하고 완전하게 온 세상에 드러날 것이다. 제 삶에 가장 순수하고 진솔할 때, 하늘의 계시는 가장 선명한 행복으로 그 삶 안에 육화할 것이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대구대교구 사제로 2001년 6월 사제품을 받았다. 2009년 프랑스 리옹가톨릭대학교에서 ‘요한묵시록에 나타난 어린 양의 그리스도론적 고찰’ 주제 논문으로 성서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말씀묵상] 주님 공현 대축일

이번 주일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공현”은 예수님의 신성이 처음 공식적으로 나타난 일을 뜻합니다. 곧 이는 하느님의 아드님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신 첫 사건을 경축하는 날로서, 구약 시대부터 약속된 메시아가 드러난 날입니다. 마태오 복음 2장에 따르면, 마구간의 아기 예수를 맨 먼저 방문해 경배한 이들은 동방 박사들입니다. 성경에서 ‘동방’은 이스라엘 기준이므로 메소포타미아 방향이고, 동방 박사는 페르시아 전통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의 사제들로 추정됩니다. 조언자로서 임금을 섬겼다고 합니다. 참고로, ‘조로아스터’는 독일 철학자 니체의 책으로도 유명한 ‘차라투스트라’입니다. 말하자면, 조로아스터교는 예언자 조로아스터(차라투스트라)가 세운 종교로서 우리 문화권에서는 불을 숭배하는 종교라는 의미의 배화교(拜火敎)로도 알려진 바 있습니다. 별을 보고 찾아온 동방박사 세속보다 천상의 일 중요시 메시아 만나는 큰 기쁨 누려 동방 박사들은 별의 움직임을 보고 시대의 흐름을 읽던 점성술가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박사’는 학식이 뛰어난 이를 뜻하는 그리스어 ‘마고스’를 번역한 말로, 페르시아어로는 ‘마구쉬’입니다. 이들은 하늘의 천체 운동을 관찰해 인간의 운명을 점치고, 꿈도 풀이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동방 박사는 동방의 세 왕으로도 일컬어지는데, 이는 3세기 초에 들며 이들의 신분을 왕으로 격상했기 때문입니다. “타르시스와 섬나라 임금들이 ··· 세바와 스바의 임금들이 조공을 바치게 하소서. 모든 임금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모든 민족들이 그를 섬기게 하소서.”라는 시편 72장 10-11절처럼 모든 권세가들이 메시아께 복종하리라는 예고가 실현되었음을 강조하려던 목적으로 보입니다. 다만 성경에서는 점성술가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이방의 임금도 도구로 쓰시고(예레 25,9 등 참조) 이방의 점술도 때로 진실을 말하게 하십니다.(에제 21,26-28 참조) 동방 박사들은 별의 움직임을 보고 예루살렘까지 왔고(마태 2,1 참조) 헤로데의 왕실에서 현인들의 조언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갑니다.(마태 2,6 참조) 그 현인들이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 나오리라.”라는 미카 5장 1절을 들려주며, 유다 임금의 탄생지는 베들레헴이어야 한다고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그 조언 덕에 동방 박사들은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아기 예수를 찾아내는데, 그 장소는 현재 베들레헴의 ‘예수님 탄생 성당’ 안에 자리해 있습니다. 4세기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짓고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재건한 유서 깊은 성당입니다. 더구나 전쟁 많은 이스라엘에서 이 성당만은 보존되었는데, 이는 ‘동방 박사와 아기 예수’의 성화 덕분이었습니다. 7세기 페르시아군이 침공하였을 때 탄생 성당의 성화 속에 그려진 동방 박사들이 페르시아 복장을 한 걸 보고, 자기들과 무슨 관계가 있는 줄 알고 파괴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멀리서 메시아를 알아보고 찾아온 동방 박사들이 죽어서도 메시아의 탄생지를 보호해준 셈입니다. 우리는 동방 박사를 셋으로 보지만, 사실 성경에는 몇 명인지 나오지 않습니다. 그들이 바친 선물이 셋이라 세 명으로 추정해온 것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왕권을 상징하는 ‘황금’, 예수님의 거룩한 사제직을 예고하는 제사 ‘유향’,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암시하는 ‘몰약’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임금에게 하듯 무릎을 꿇으며 예를 표하였습니다. 사진 속의 제대가 그 장소를 상징합니다. 페르시아 왕실을 섬긴 이들이 초라한 구유 속의 아기에게 무릎을 꿇었음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님을 알았다는 뜻입니다. 세속의 처세술에 따르면, 자신에게 와 줄 것을 청한 헤로데에게(마태 2,8 참조) 돌아가 보고 들은 것을 보고하는 편이 더 이익이었겠지만, 동방 박사들은 세속보다 천상의 일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마태 2,12 참조)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베들레헴까지 왔고, 이스라엘 백성보다 먼저 메시아를 만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이런 이들의 행보는 세속의 일에 몰두하느라 천상의 일을 잊곤 하는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그리고 그들이 먼 데서 구세주를 알아보고 찾아온 일은 이후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일 이방인들의 예표도 되어줍니다. 동방 박사들의 방문은, 예수님이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메시아이심을 드러내 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위험을 감수하며 메시아를 찾아 나선 동방 박사들을 별이 인도해 주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밤은 어두워도 별은 빛난다는 사실을, 그래서 우리가 때로 칠흑 같은 곤경에 빠져 길을 잃어도 주님께서 늘 희망의 별빛을 뿌려주고 계심을 배울 수 있습니다. 글 _ 김명숙 소피아(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김명숙 교수는 이스라엘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에서 구약학 석·박사 학위를 받고 2012년부터 2024년 1월까지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으로 활동해 왔으며 그해 2월 광주가톨릭대학교 조교수에 임명됐다.

2025-01-05

[하느님 계획 안의 인간 사랑 – 몸 신학 교리] 한 처음에

이 교리서의 본 내용은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마태 19,3; 마르 10,2)라는 바리사이들의 질문에서 출발한다.(1과 2항) 이어지는 내용에서 바리사이들은 이혼을 허락한 모세의 율법으로 권위와 정당성을 세우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라고 응답한다.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4절과 8절에서 거듭 언급한 ‘한처음(처음)’에 시선을 모으게 한다. ‘한처음’은 창세기 1장과 2장의 인간창조를 말한다. 바리사이들이 근거로 내세운 모세의 율법은 원죄의 열매이지, 원래 하느님 계획 안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예수님께서 처음을 거듭 언급한 것은 역사 안에 실존하는 모든 인간이 죄로 기우는 경향을 가졌지만 한처음의 상태, 곧 하느님의 원래 계획은 여전히 인간에게 빛나고 유효하다는 것이다.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인간 양심의 작동과 성장이다. 지금 내 앞에 사과가 하나 놓여 있다고 상상해 보자. 이 사과는 내가 보는 각도에 따라, 빛이 비춰지는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사과는 자기가 바라본 모습만 말할 뿐, 사과의 전부를 알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보는 것만이 아니라 맛도 보아야 하는데 그 맛에 대한 평가도 모두 다르다. 이제 이 사과를 ‘나/인간’이라고 생각해보자. 나는 ‘나’를 어느 부분에서 보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나’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이 기준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나에 대한 이해와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기준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빛을 받는 위치에 따라 사과는 더 선명하고 잘 생겨 보인다. 나/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에서 빛은 하느님이다. 창조하신 하느님의 눈으로 나를 보고, 왜 ‘낳음’ 했는지 그분의 계획을 만나야 한다. 이는 세상에 태어난 내가 해야 할 가장 크고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참 나를 알게 되면 덤으로 너를 알 수 있고, 인격적 친교를 이루는 참된 행복을 살 수 있다. 하느님이 하늘을 탈출해, 만질 수 있는 육으로 세상에 그리고 가정에 들어오셨다. 콜로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1장 15절은 이렇게 노래한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실제로 그 사건이 오늘 나에게도 일어났다. 몸 그 자체가 페르소나(persona)로서 성사요 인격의 전부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말한다. 이것은 신학적 사고뿐만 아니라 현시대에 깊이 뿌리내려 있는 이원론적 사상에 엄청난 변화를 주는 기재가 됐고, 이 새로운 사유의 논리가 인간 몸이 영과 육으로 분리되지 않는, ‘몸 신학’이라는 가르침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다. 하느님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나, 나의 삶에 관심을 둔다. 나를 홀로 버려둔 것이 아니라 이미 지을 때 나를 위한 계획도 함께 작정해 뒀다. 이 계획을 발견하고 자신의 삶을 자신의 모습으로 자유롭게 실현하는 것이(나침반과 지도), 이름을 가진 자, 불림 받았고, 선택한 자의 삶이다. 세상이 개인주의와 개인성을 당연한 권리처럼 포장해 주지만, 다른 한편에선 개인의 인격이 침해되고 가정이 지닌 고유한 빛은 퇴색되고 성장기의 젊은이들이 방황하는 현상을 우리는 보고 있다. 이는 한 인간이 ‘낳음’ 받고 인격의 틀이 짜이는 중요한 곳이며 복음의 장소인 가정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김혜숙 선교사는 교황청립 혼인과 가정 연구를 위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대학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고, 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회원으로, 현재 ‘몸·혼인·가정 신학 연구회’ 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 「사랑, 그 아름다운 역동성-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랑의 신학」, 「그대, 나의 얼굴」 등이 있고, 역서로는 「사상과 영성」,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몸 신학」 등이 있다.

2025-01-05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구약과 신약을 이어주는 다리, 세례자 요한

튀르키예는 6·25전쟁 때 우리나라에 파병했고, 튀르키예군은 유엔군 안에서도 가장 용감하게 싸웠고 후퇴를 모르는 군대라는 칭송을 받았다. 지금도 튀르키예 국민들은 우리나라를 형제의 나라라며 친근감을 보이고 있다. 수도 이스탄불에는 아시아와 유럽을 가르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연결하는 보스포루스대교가 유명하다. 2016년에는 튀르키예의 군부가 쿠데타를 시도했지만, 이틀 만에 실패했다. 당시에 인기가 하락한 에르도안 대통령을 축출하려던 시도는 불발로 그쳤다. 당시 쿠데타가 실패한 데에는 SNS가 큰 역할을 했다. SNS로 시민들은 거리로 일시에 쏟아져 나와서 보스포루스대교는 시민들로 가득 찼다. 군사 작전에서 보안이 생명인데 쿠데타군과 시민들의 대치가 개인 스마트폰으로 생중계되었다. 방송국 몇 곳을 장악한 쿠데타군은 모든 시민들의 눈과 귀를 막을 수 없었다. 보스포루스대교에서 쿠데타군의 탱크를 막아서는 수많은 시민들은 세계에 아주 큰 인상을 남겼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로 불린다. 성경에서 보면 구약과 신약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했다. 요한은 제사장 가문의 후손이었고, 아버지는 제사장인 즈카리야, 어머니는 엘리사벳이었다. 요한은 어린 시절부터 광야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는 시험과 시련의 장소이기도 했다.(탈출 15,22-26) 동시에 하느님과의 친교 장소로 그분의 보호와 은총을 체험하는 장소였다.(탈출 16,32) 신약성경에서 광야는 고행이나 수련, 정화, 기도의 장소로 묘사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은 유다 광야에서 극기 생활을 하면서 회개와 세례를 촉구했다. 군중들은 세례자 요한을 메시아, 혹은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인물로 믿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선포하며 사람들에게 회개를 권고하고 그 표지로서 세례를 받을 것을 외쳤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심판이 임박했고 회개의 필요성이 절박하다고 생각했다. 세례자 요한은 세례를 받고 생활에서도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난한 이들과 나누고 세리들은 정해진 세금 외에는 징수하지 않아야 하고 군인들은 무력한 백성들을 억압하여 착복하는 것을 금지했다. 세례자 요한의 교훈들은 당시에 만연한 과중한 징세와 권력의 남용이 공공연한 부패한 사회상의 반영이라고 수 있다. 예수님도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세례자 요한은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마르 1,7-8)라고 하며 예수님을 메시아로 선포한 구약이 마지막 예언자가 된다. 세례자 요한은 헤롯왕에게 동생 필립보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한 것에 대해서 책망을 하며 정권과 정면으로 부딪히고 결국 사형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세례 운동은 이후에도 한참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퍼져나갔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5-01-05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왜 그에게 길을 물어야 하는가?

가톨릭교회 신학을 대표하는 최고의 교회학자 성 토마스 아퀴나스. 우리는 그를 위대한 신학자로 칭송하지만, 정작 그의 저작을 읽기란 쉽지 않기에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학술적인 영역으로 치부하곤 한다. 그러나 성 토마스는 우리가 행복에 이르는 길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성인이다. 성 토마스가 보여주는 행복의 길은 어떤 것일까. 성 토마스 탄생 800주년을 맞아 가톨릭대 박승찬(엘리야) 교수의 글을 통해 성 토마스가 전하는 진정한 행복을 찾는 여정에 독자들을 초대한다. 과거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이라는 엄청난 참화를 겪었던 우리나라는 산업화에 성공하여 세계에서 유례없이 놀라운 경제 발전을 이뤘다.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보릿고개’라는 말은 사라졌고, 이제는 비만을 걱정하며 다이어트를 통해서 건강을 유지해야 할 정도로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됐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첫 20년 동안 우리나라는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하면서 문화적으로도 K-드라마, K-영화 등으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상황에 있었다. 이러한 성장과 발전은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 같았다. 이런 안정된 사회 안에서 많은 이는 ‘소확행’, 즉 ‘작지만 확실한 행복’에 만족하며 살고 싶었다. 그러나 이 소박한 꿈은 2020년부터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19’로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 K-방역이 부분적으로 성공했던 우리나라에서도 평범한 일상은 사치스러운 꿈처럼 여겨지는 시간이 2년 넘게 지속됐다. 간신히 팬데믹 상황을 벗어나서 일상이 정상으로 돌아오자 기상 이변이 이어지고 있다. 기상 관측 사상 유례가 없는 엄청난 폭염, 상상조차 못 할 폭설로 변한 첫눈 등이 우리의 미래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코로나19와 기상 이변에 이어 도대체 이해하기 힘든 ‘비상계엄’ 선포로 인해 상상하지도 못했던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계엄군을 막아선 일반 시민들과 일부 정치인들의 발 빠른 대처로 간신히 민주주의와 인권을 유린할 최악의 상황은 피했지만 더 이상 각 개인이 ‘소확행’만을 꿈꿀 수 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그렇지 않아도 점차적으로 나빠지던 경제 사정은 정치적 불안정 때문에 나날이 악화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위기 앞에서 우리는 모든 이가 추구하지만 도달하기는 쉽지 않은 ‘행복’에 대해서 다시 한번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그리고 여전히 개인의 힐링과 워라밸을 추구하는 주관적 행복의 심리학이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행복을 ‘주관적 안녕감’이라고 규정하고 이를 추구하는 데에만 몰두한다면, 과연 지금과 같은 사회적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까? 개인주의라고 지탄받던 MZ 세대가 비상계엄의 위중한 시기에 소중히 간직했던 응원봉을 들고 거리로 뛰어나와 추위에 떨면서 “계엄 반대”를 외쳤다. 이들은 더 이상 소극적인 삶의 태도만으로는 자기 개인의 행복조차도 방해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듯하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여 그동안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추구되던 개인의 주관적 ‘행복’은 생각할수록 더 많은 의문을 만들어낸다. 근대 이후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과학의 발전은 인간들을 괴롭히던 질병과 고된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 줬다. 많은 현대인은 과학 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는 낙관적인 꿈을 꾸면서, 인간에게 진정으로 근원적인 질문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러한 경향 안에서 전통적으로 종교가 강조하던 내세의 행복은 신기루에 불과하게 됐고, 현세적인 행복에 매몰되어 버린 수많은 대중이 양산됐다. 그렇지만 과학과 기술이 발전한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더욱 행복해졌을까?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의 승리를 미덕으로 여기며 살아온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별나게 낮은 행복지수와 높은 자살률로 고통을 받는다는 사실은 이런 추정을 근본적으로 의심하게 만든다. 또한 인간 이성과 과학에 대한 과도한 신뢰는 이미 실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사상에 의해 강하게 비판받았다. 근대 사상과 산업화가 야기한 심각한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 이성과 이에 근거한 과학기술을 부정적으로 볼 수만도 없다. 이제 AI와 이를 탑재한 로봇으로 상징되는 과학 발전은 상상조차 힘든 놀라운 기회를 인류에게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것들이 가져올 긍정적인 효과를 정당하게 평가하면서도, 그 한계를 정확히 인지함으로써 이를 함께 극복하기 위한 합리적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렇다면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현대 기술의 발전을 활용하면서도 인간이 그 안에서 소외되지 않고 진정한 행복을 찾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답해 줄 멘토가 바로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완성해 가톨릭교회의 스승으로 선포된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4/5~1274)이다. “실상 그(토마스 아퀴나스)의 성찰 속에서 이성의 요구들과 신앙의 힘이, 일찍이 인간 사고에 의해서 이룩된 가장 고상한 종합을 발견합니다.”(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회칙 「신앙과 이성」, 78항). 성 토마스는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한다(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perficit)”는 확신에 차서 신학과 세속 학문의 고유한 영역과 역할을 인정했다. 이렇게 그는 ‘영원불변한 진리를 추구하는 항구한 자세’를 유지하면서도 ‘다른 학문에 대한 존중과 개방성’을 가지고 인간 이성이 지닌 가능성을 높이 평가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제시했다. 이러한 성 토마스의 가르침이 집대성된 작품이 바로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이다. 「신학대전」의 분량은 엄청나서 보통의 책 크기로 출판한다면 어림잡아 1만 쪽에 달하고, 현재 국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신학대전」 번역 작업이 완료된다면 총 72권에 달할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이 대작을 공식 가르침의 튼튼한 토대로 삼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신학대전」을 통독한 사람은 전문가 중에서도 극히 드물다. 국내의 성 토마스 연구도 대부분 철학적 내용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신학대전」 제1부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구체적인 일상에서 활용할 수 있는 엄청난 충고들이 담겨 있는 「신학대전」 제2부는 아직도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 안에는 인간의 최종목적인 행복, 올바른 행위를 판단해 줄 수 있는 다양한 기준들, 이를 실천하는 것을 수월하게 해 주는 덕과 이를 방해하는 악덕들, 악을 피하고 고통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될 구체적인 충고 등 무수한 보화가 가득 담겨 있다. 더욱이 2025년은 바로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탄생한 지 800년이 되는 해이다. 그를 특별히 기념하기 위해 이번 특별 연재에서는 「신학대전」에서 가장 방대한 양을 차지하고 있는 제2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가르침을 따라 물질적인 풍요 안에서도 삶의 의미를 스스로 발견하지 못해 방황하는 많은 이들이 ‘진정한 행복’을 찾아 나서는 여행을 함께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한국중세철학회장, 한국가톨릭철학회장 및 김수환추기경연구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알수록 재미있는 그리스도교 이야기」(세종도서 우수교양도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삶의 길을 묻다」, 「신 앞에 선 인간」, 「토마스 아퀴나스」 등이 있고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요강」, 「대이교도대전II」, 「존재자와 본질」, 「신학대전: 31 & 32(STh II-II, qq.1-13)」 및 안셀무스의 「모놀로기온 & 프로슬로기온」을 라틴어 원문으로부터 번역했다.

2025-01-05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인간을 묻다

자극적이고 감각적인 뉴미디어 홍수 시대에 숏폼 플랫폼은 단 몇 초 만에 다음 또 다음을 클릭하게 할 만큼 인간의 심리를 뚫고 들어왔다. 4차 산업혁명의 과학과 기술들은 국가와 사회의 시스템에 변화를 주었고, 이제 개인의 영역에까지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거대한 물결을 막을 순 없지만 진정 ‘사람이 중심이 되는 변화인가?’를 물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 우리 신앙인의 삶의 태도가, 교회는 인간 존재의 가치를 성찰하고 인간을 더 깊은 차원으로 본질적인 차원으로 초대하고 있는가? 왜냐하면 인간은 과학 기술이 그 존재와 가치를 대신할 수 없는 창조주의 모상으로 낳음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분과 친교를 하기 때문이다. 사랑, 생명, 혼인, 가족… 이 거대한 담론들을 어떻게 새롭게 만나야 할까? 아니 어떻게 원래의 모습대로 회복할 수 있을까? 이 질문들은 다시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 ‘나는 누구이지?’ ‘너는 누구이지?’를 대면하도록 한다. ‘나’가 ‘나’로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다. 보이는 영역과 보이지 않는 영역을 가진 나/인간, 비참함과 위대함을 동시에 가진 나/인간, 고통으로 가득 차 있지만 동시에 눈물이 쏟아질 만큼 아름다운 나/인간이다. 결국 아름답고 큰 존재로 만들어 주는 어떤 원리가 내 안에 있음을, 또 다른 영역으로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어 주는 어떤 원리 또한 내 안에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만나게 될 이 연재는 바로 이러한 질문들에 답을 찾아가는 나침반과 지도가 되려고 한다. 어디에서 왔고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는지를 교회의 가르침으로 전달하려고 애쓸 것이다. 이 가르침은 우리나라와 미국에서는 ‘몸 신학’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 원제목은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교리서다. 이 교리는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79년 9월 5일 시작해 1984년 11월 28일까지 5년 동안 129회에 걸쳐 선포된 교회 가르침이다. 교황은 전 세계에서 온 순례객들을 하나의 교회로 보고, 교황을 만나러 온 그들에게 매주 수요일 '일반 알현' 시간을 통해 목자로서 그들을 안내했던 것이다. 전체 129과로 이루어진 이 교리는, 몸의 구원에 관한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출발한다. 창세기 1장과 2장을 근거로 둔 인간의 근원과 그 정체성의 특징을 말하는 한처음편(1-23과), 창세기 3장 이후 욕구에 의해 변화된 인간의 시각을 어떻게 회복하는지에 대한 마음의 구원편(24-63과), 육의 부활을 믿지 않았던 사두가이들과의 대화에서 육의 부활편을(64-72과), 구약시대에는 없었지만 예수님에 의해 선포된 하늘나라를 위한 독신과 동정편(73-86과) 그리고 혼인과 혼인성을(87-113과), 문헌 「인간 생명」(114-129과)에 관한 주석으로 이루어졌다. 성경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그 바탕 위에 이 가르침은 펼쳐지고 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이 가르침을 환영하고, 자신의 사고와 삶을 변화시키고, 자신이 얻은 기쁨과 행복으로 주변에 그 영향을 주고 있다. 함께 나아가는 모습으로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다. 만약 몸(육-정신-영혼), 사랑(에로스-아가페), 자신과 공동체(개인과 사회)를 규범론과 단일론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나를, 너를, 그리고 하느님과의 만남과 친교를 더 깊이 할 수 있을 것이고, 인간의 존재와 가치에 변화를 줄 것이다. 그러므로 이원론적, 결의론적 사유의 원리에서 벗어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김혜숙 선교사는 교황청립 혼인과 가정 연구를 위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대학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고, 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회원으로, 현재 ‘몸·혼인·가정 신학 연구회’ 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 「사랑, 그 아름다운 역동성-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랑의 신학」, 「그대, 나의 얼굴」 등이 있고, 역서로는 「사상과 영성」,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몸 신학」 등이 있다.

2025-01-01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고통 중에도 희망의 기도 드린 토빗

‘교황곡의 아버지’로 불리는 하이든(1732-1809)은 열성적인 그리스도교인, 늘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하이든은 사람들에게 “우리 집에는 작은 기도방이 있습니다. 무한하신 하느님이 그의 유한한 피조물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 작은 기도방에서의 기도 때문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이든은 동료 음악가에게 “나는 일에 지치게 될 때 작은 기도실로 들어가서 기도합니다. 제 경험으로 이 방법이 성공하지 못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라고 기도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하이든의 곡은 특별히 기쁨에 넘쳐 있는 것이 특징인데, 이 역시 기도 중에 주님을 묵상할 때 무한한 기쁨이 넘쳐나며 행복으로 춤추는 악보들이 떠오른다고 했다. 이처럼 하이든의 곡들은 기도 자체였다. 1808년 그가 작곡한 <천지창조>가 비엔나에서 연주되었다. 연주가 끝나자 공연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열광하며 일어나 하이든에게 감격의 박수를 쳤다. 하이든은 “내가 아닙니다. 이 음악은 하느님에게 나온 것입니다. 나의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라고 말했다. 토빗기는 아시리아 임금 살만에세르 시대에 티스베에서 포로로 끌려간 토빗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다.(토빗 1,2 참조) 토빗은 살만에세르 시대에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에서 궁궐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관리였다. 이후 살만에세르가 죽고 그 아들 산헤립이 왕이 되었다. 어느 날 그는 비참하게 죽은 이스라엘 사람의 장례를 지내다 임금의 눈 밖에 나 벗어나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어느날 토빗은 낮잠을 자다가 불행하게도 새의 배설물에 의해 두 눈의 시력을 잃게 되었다. 고통스러운 생활을 이어나가던 토빗은 자신의 어려운 생활을 하소연하는 기도를 하느님께 바쳤다. 기도를 들은 하느님은 라파엘 천사를 보내 문제들을 해결해 주었다. 토빗의 이야기는 사실 유배로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의 유다인들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토빗기의 주제는 하느님의 섭리가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있다. 보통 사람들이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일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과 결과를 연결시킨다. 토빗서는 유배 시대, 특히 페르시아의 영향 아래 신앙이 어떻게 발전하는지 보여 준다. 토빗은 자기의 개인적인 운명뿐만 아니라 유배를 당한 동포들의 운명도 예언자들의 빛으로 해석한다. 토빗은 때가 되면 모두 고국으로 돌아가고 예루살렘은 눈부시게 화려한 모습으로 재건되리라는 밝은 희망을 선포한다. 모든 문제가 해결된 뒤 토빗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이 책의 절정도 기도로 장식된다.(토빗 13장 참조) 포로 생활과 나그네 살이라는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희망을 안고 미래를 향하면 시간을 뛰어넘어 영원한 행복에 이른다는 것을 알려준다. 고통 중에서도 희망을 노래하며 기도하는 토빗의 모습은 유배지에 있는 모든 유다인들, 하늘나라를 향한 여정 중에 있는 기도하는 이의 전형이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5-01-01

[말씀묵상]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2024년의 마지막인 주일인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한국교회는 성가정 축일부터 한 주간을 ‘가정 성화 주간’으로 지내며, 가정 공동체의 소중함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삶의 터전인 가정의 의미를 묵상하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시간으로 다가옵니다. 성가정의 모범은 축일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 성모 마리아, 성 요셉이 이루신 가정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구세주인 예수님과 성인들이 그저 함께 사는 것만으로도 성가정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신앙이 자라고 삶의 경험이 쌓이자, 이분들의 가정이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결코 쉽지 않은 상황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들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어머니의 입장에서 이는 자녀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가슴 아픈 삶이었을 것입니다. 아버지 요셉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모습이 마지막으로 기록된 것을 보면, 예수님이 열두 살 이후 일찍 세상을 떠나신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어려움이 많았음에도 이분들의 가정이 성가정이라 불리는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는 가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가 알린 하느님의 초대를 처음에는 두려움과 의구심을 가졌지만, 결국 “예”라는 응답으로 하느님 뜻을 살아가는 인생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응답은 단순히 하느님께서 알아서 모든 것을 하실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생각이나 감정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초대임에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배운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으로의 초대를 신뢰했기에 가능했던 용기 있는 응답이었다고 느껴집니다. 아버지 요셉의 응답도 깊은 감동을 줍니다. 약혼녀의 임신 소식에 너무도 마음이 상했지만, 조용히 파혼하려는 인내심을 보였던 요셉에게 하느님은 파혼하지 말고 마리아와 함께 가정을 이루라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초대를 하십니다. 요셉 성인이 이러한 쉽지 않은 초대에 응답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착한 성품 때문만이 아니라, 마리아와 그녀의 태중에 있는 아이를 향한 따뜻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처럼 마리아와 요셉은 하느님의 뜻 안에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과정에서는 부부 관계뿐 아니라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큰 비중을 차지하며 중요합니다. 한 사람이 성장함에 있어 부모가 끼치는 영향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지대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예수님의 성장에도 마리아와 요셉 두 분의 영향이 매우 컸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면서도 온전한 인간이셨기에, 한 인간으로서 성장의 과정을 겪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 점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갖춘 어른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가장 작고 약한 어린아이로 오셔서, 하느님의 총애뿐 아니라 사람들의 총애를 받으면서 인생에서 겪어야 할 것을 겪으며 성장하셨습니다. 그 여정을 함께 한 이들이 바로 가정 공동체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하느님께서 그분들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뜻을 신뢰하며 예수님과 함께하셨습니다. 따뜻한 사랑의 마음을 가졌던 부모의 깊은 신뢰 속에서 예수님은 어린 시절 날로 지혜와 키가 성장했을 것입니다. 성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삶이라고 느껴집니다. 부모와 자녀가 서로를 이해하며 따듯하게 사랑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많은 부모가 자녀를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자녀 역시 부모의 마음을 모른 채 살아가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 안에서 예수님을 키우신 마리아와 요셉의 태도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영감은 줍니다. 많은 부모는 자녀가 자신의 기대를 실현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자녀는 부모의 소유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고유한 선물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자신의 뜻과 다르게 살아갈 때조차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자녀를 키우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부모는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의 뜻을 찾는 여정을 통해 성화 됩니다. 자녀 역시 부모의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합니다. 자녀는 자신이 알지 못했던 수많은 시간 동안 부모가 자신을 위해 애쓰고 헌신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사랑이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아갑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자녀가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하느님께 감사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부모님께 순종했다는 구절은 단순히 부모의 말씀을 잘 따랐다는 의미만이 아닙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부모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며 성장하셨음을 보여줍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하느님 사랑의 모형이며, 이러한 관계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게 됩니다. 성가정은 단순히 서로가 함께 사는 가족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며 그 뜻을 이뤄가는 공동체입니다. 가정은 하느님의 사랑이 시작되고 구체화되는 자리이며, 세상 속 교회의 출발점입니다. 성가정을 이루며 살아가는 삶은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며, 서로를 격려하고 지지하는 여정입니다. 이번 ‘가정 성화 주간’ 동안, 우리 가정 안에서 체험한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서로를 더욱 깊이 이해하며,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성가정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합니다. 글 _ 현재우 에드몬드(한국평단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장)

2025-01-01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연재를 시작하며 - 사막 교부란

신문사로부터 올해부터 격주로 사막 교부의 삶을 소개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는 그들의 삶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의 지혜를 나누어 달라는 요청이 아닐까 한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 장소는 우리와는 너무도 먼 4세기 이집트 사막이었다. 이렇듯 큰 시공의 차이로 인해 그들의 삶이 우리에게는 너무도 낯설고 심지어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적 욕망과 싸우며 하느님을 향해 나아갔던 그들의 치열한 삶, 그 삶이 가르치는 지혜는 그리스도교 영성의 토대가 되었고 시공을 초월하여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이 지면을 통해 앞으로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란 주제로 그들의 가르침을 하나씩 다루어 나갈 것이다. 그에 앞서 이번 첫 회에서는 먼저 사막 교부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를 통해 이해를 돕고자 한다. 사막 교부 어떤 이에게는 ‘사막 교부’(Desert Father)란 표현이 다소 생경하게 들릴 것이다. 사막 교부라고 말할 때, 엄밀한 의미로 4세기 이집트 북부(나일강 하류)의 사막에서 생활했던 유명한 독수도승을 일컫는다. 초세기 교회에서 ‘교부’는 본래 주교를 가리키는 말로,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사이에 성립되는 부자 관계를 적용한 데서 생겨났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교 신학의 토대를 놓고 교회 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준 분을 교회 교부(Church Father)라고 칭한다. 한편 실천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수도승 생활의 토대를 놓은 거룩하고 위대한 수도승은 수도승 교부(Monastic Father)라고 불린다. 사막 교부는 수도승 교부에 속하며 그리스도교 수도승 생활의 시조라 하겠다. 4세기 이집트 사막으로 들어갔던 그리스도인들 안에 점차 새로운 영적 부성(父性)이 생겨났다. 이 영적 부성은 더 이상 교회 안의 공적인 기능과 교계제도에 연결되지 않고 ‘지혜’(분별력)와 ‘말씀의 특별한 은사’에 연결되었다. 이 은사를 얻은 사람만이 남을 지도하는 영적 사부가 될 수 있었다. 사막에 새로 도착한 사람은 자기 압바(Abba, 영적 사부인 원로)에게서 가르침을 받는다. 따라서 독수도승을 지도하는 원로를 ‘사막 교부’라고 부르게 되었다. 사막으로 간 이유 사막은 사람이 살 수 없는 불모의 땅이자 악령들의 본거지였다. 또한 온갖 유혹과 시련을 통한 정화의 장소, 하느님을 체험하는 장소였다. 4세기 초 박해가 끝나자 열심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을 뒤로하고 이집트 사막으로 들어갔다.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살며 ‘한 가지 필요한 일’, 곧 ‘하느님 찾는 일’에 투신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위해서는 세상의 소음과 동요, 근심 걱정으로부터의 자유, 깊은 고독과 침묵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철저하고 근본적인 포기와 물러남은 하느님이 당신 아드님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에 더 잘 응답하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들은 사막에서 새로운 박해자 악령들과의 치열한 싸움과 엄격한 금욕생활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증거하고자 했다. 이러한 삶 자체가 자신을 포기하는,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또 다른 순교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수도승 생활을 순교의 지속이라 하였고 피를 흘리지 않는 순교라고 해서 ‘백색 순교’라고도 했다. 그들의 삶이 중요한 이유 사막 교부의 삶은 그리스도인 삶의 이상적 모델을 제시한다. 사막 교부들은 복음을 더 철저히 살려는 그리스도인이었기에, 그들의 삶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인 삶의 심화였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의 삶과 가르침은 수도승 생활과 영성의 뿌리와도 같다. 그리고 수도승 생활은 그리스도인 삶을 충만히 실현하는 삶의 한 양식이며, 수도승 영성은 그리스도교 영성의 토대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사막 교부의 모범적인 삶과 가르침은 현대 그리스도인의 삶과 영성에도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기에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치를 지니며 우리에게 중요하다. 우리가 사막 교부의 삶과 그들의 가르침을 접하는 것은 그들의 외적 삶의 모습이나 방식을 모방하자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 오늘 우리를 위한, 나를 위한 어떤 가치와 정신을 뽑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정신과 가치다. 구체적 삶의 양식은 그것을 담는 외적인 그릇에 불과하다. 외적인 틀은 시대와 장소, 상황에 따라 언제나 변화될 수 있고 또 변화되어야 할 것이다. 금언을 통해서 우리는 온갖 인간적 욕정과 악습에 맞선 치열한 싸움, 인간의 나약함, 하느님의 자비. 좌절과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불굴의 의지와 용기, 신앙과 희망 등 우리 삶을 위한 지혜로운 가르침을 보게 된다. 여전히 영적 사부인가? 사막 교부의 영웅적인 삶과 성덕은 당시 수많은 사람을 사막으로 끌어들였다. 마치 벌이 향기를 맡고 꽃을 찾듯 수도승들의 거룩한 삶과 성덕의 향기를 맡고 사람들이 물밀듯 몰려들었다. 그들은 구원에 필요한 한 말씀을 듣기 위해 유명한 원로들을 찾아갔다. “압바, 한 말씀 해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은 사막의 원로를 찾아간 이들의 전형적인 질문이었다. 동시에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유효한 질문이다. 우리는 영적 스승, 영적 사부를 갈구한다. 우리에게는 가시적인 모범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복음의 가르침을 충실히 실천하려 노력했던 참 신앙인의 모범이 필요하다. 사막 교부들은 바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복음에 나타난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고 스승의 인격을 본받으려 노력했던 훌륭한 신앙인의 모범이자 영적 사부다. 이 연재를 통해 우리는 제자가 스승에게 다가가듯 그들에게 다가가 영원한 생명을 위한 삶의 지혜를 청해보자. “압바, 제가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한 말씀 해주십시오.” ▶ 이 연재에서 소개하는 내용이 대부분의 독자에게는 낯설 수 있기에 관심 있는 분들을 위해 참조할만한 자료를 소개한다. 「수도 영성의 기원」(분도출판사, 2015), 「사막 교부들의 금언」(분도출판사, 2017), 「사막 교부, 이렇게 살았다」(분도출판사, 2006), 「담화집(제1-13담화)」(분도출판사, 2022), 「담화집(제14-24담화)」(분도출판사, 2023), 「천국의 사다리」(분도출판사, 2020), 「프락티코스」(분도출판사, 2011).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련장) 1995년 사제품을 받고 교황청립 로마 성안셀모대학교 수도승 연구소에서 수도승 신학을 전공했다. 미국 뉴멕시코주 성 베네딕도회 사막수도원에서 3년간 수도생활에 전념하고 성 베네딕도회 화순수도원 원장, 분도출판사 사장,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본원장 등을 거쳤다. 「수도 영성의 기원」, 「천국의 사다리」 등 여러 책을 번역했다.

2025-01-01

[말씀묵상]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세계 평화의 날

2025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의 시작은 축복과 결심과 변화를 위한 때입니다. 그중에서도 축복은 우리가 다른 이에게 해주는 것으로, 그 사람을 위한 것이면서 또한 그가 어떤 복을 누렸으면 좋겠다는 나의 소망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좋은 축복은 결심과 변화의 방향을 제시해 주기도 합니다. 그러니 어떤 축복을 할지가 중요합니다. 세태를 따르는 “부자 되세요”, “대박 나세요”와 같은 축복의 인사는 그 사람의 새해가 물질과 이득을 따라 매진하는 삶이 되기를 기원하는, 그다지 신앙인답지는 못한 인사가 아닐지 싶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사제가 백성을 축복할 때 사용하도록 하느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기도문입니다. 세 문장으로 되어 있는데, 첫 번째 문장은 두 가지 축복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그리고 뒤의 두 문장은 그것들을 다시 설명해 줍니다. 다음 문장은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그다음은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입니다.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하고 좋은 것이라면 ‘평화’는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여건입니다. 생명의 위협, 시기와 질투, 사회 모순과 혼란으로 나 자신과 이 세상이 평화 속에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것을 누릴 수 없습니다. 평화는 모든 복의 전제 조건이며, 그 완성입니다. 이 축복에는 두 번 다 하느님의 얼굴이 등장합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느님과의 만남을 감당할 수가 없어 구약은 하느님의 얼굴을 뵙는 이는 죽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축복은 말 그대로 실현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성탄으로, 아버지가 아드님을 내어주시고 아들은 여인에게서 탄생하시어 온전한 인간이 되심으로써, 비로소 이 축복이 실현됩니다. 하늘에서 빛나는 태양처럼 우리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는 주님이 성부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우리에게 얼굴을 들어 보이시는 주님은 복음 속에서 가난한 이와 병든 이를 자비로이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인간으로 오시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심으로써 당신의 평화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 우리에게도 큰 응답 요구 성모님의 모범 기억하며 하느님 뜻 따라 걸어가길 그러면 우리는 그 평화를 어떻게 받아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택배 기사처럼 잘 포장된 평화를 건네주고 휙 떠나가시지 않습니다. 그보다 훨씬 깊은 초대와 응답, 그리고 친교와 일치의 과정이 계획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이 어마어마한 사건은 우리에게도 큰 응답을 요구합니다. 하느님의 얼굴을 보는 이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은 헛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그분을 경배하고, 그분과 머물며, 그분께 배워서 그분의 길을 함께 걷습니다. 그분과 함께 죽고 그분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 그분을 통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느님 사랑의 일치에 참여합니다. 평화는 선물이지만 그저 받아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이 협력하여 완성해 가는 구원 역사 자체입니다. 복음에서 목자들을 비롯한 성모님과 성 요셉, 예수님은 모두 평범하고 가난한 이들입니다. 구유에 누우신 한없이 무력하고 무고한 아기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표징입니다. 그분은 천사의 찬양을 받으시는 세상의 구원자입니다.(루카 2,8-14 참조) 목자들이 전한 이 소식에 모두가 놀라워하지만, 경탄은 순간적인 느낌으로 끝나기 쉽습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이 놀라운 사명을 곰곰이 마음에 간직하십니다. 아홉 달 동안 뱃속에 품어주셨던 주님을 이제 가슴에 품으시고, 그분과 함께 걸어갈 내일의 사명까지 마음에 품으신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 우리의 어머니로서 주님과 함께 앞장서 걸으실 준비를 마치신 것입니다. 이런 성모님의 모습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한 해를 맞으며 어떻게 기도하고 축복하고 결심하고 살아야 할지 보여주십니다. 우리도 눈을 감고 침묵 중에 곰곰이 새겨봅시다. 두려움도 경탄도 분노나 슬픔도 근심 걱정도 잠시 가라앉히고 아기 예수님과 성모님을, 그리고 부족하기만 한 우리를 모아 주시어 구원의 길, 평화의 길, 희망의 길을 함께 걷도록 불러주신 하느님의 뜻을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주님께 드립시다. 그것은 분명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새해에는 이 땅에서 선한 뜻을 지닌 모든 이가 주님 평화의 길을 함께 걸어가기를 기도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 14) 글 _ 변승식 요한 보스코 신부(의정부교구 사목연구소 소장)

2025-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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