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29일 전남 무안 국제공항에서 항공기가 동체착륙 후 벽에 부딪혀 폭발, 탑승객 181명 중 179명이 숨진 참사가 발생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분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고,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유가족의 슬픔은 위로조차 할 수 없다. 사랑의 하느님께서 희생자들을 품에 안아주시고, 유가족의 상처를 달래주시기를 간절하게 기원한다. 우리는 이번 참사 소식을 접하면서, 생각도 하기 힘들지만 세월호와 이태원 등 그간 여러 차례 있었던 또 다른 대형 참사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많은 고귀한 생명들이 영문도 모른 채 사랑하는 이의 곁을 떠나야 했던 그 참사들을 겪으면서, 우리는 세상 어떤 것보다 가장 귀하고 소중한 것은 평범한 일상이고 사랑하는 이들의 생명과 안전임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번 참사가 더 힘들고 아프게 다가온다. 이제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사고 원인을 규명하는 일이다. 이는 참사의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시는 이러한 사고가 또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아직 정확한 사고 원인은 규명되지 못한 상태다. 조류 충돌, 랜딩기어 오작동, 기체 결함과 짧은 활주로 등이 거론되고 있지만 면밀한 조사가 필요한 상황이다. 정부는 참사 직후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가동하고 무안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다. 안타깝게도 참사 수습을 이끌어야 할 정부 조직은 비상계엄 사태로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탄핵 정국 속에서 대통령은 물론 재난 안전을 책임지는 행정안전부 장관도 권한대행 체제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정부와 정치권은 사고 수습과 철저한 원인 규명에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다시 한번 희생자들의 영원한 안식을 기도하며 유가족들에게 애도의 마음을 전한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한 해의 운세를 엿보려는 사람들이 많다. 유행처럼 사주나 타로점을 볼 수 있는 카페가 우후죽순 생기고, 스마트폰 앱을 통해 온라인으로 운세와 점을 보는 이들도 크게 늘어났다. 특히 사회가 불안하고 미래의 불확실성이 크게 다가올 때 점술에 기대는 사람들의 심리가 크게 늘어나는 추세를 보인다. 이는 천주교 신자들도 예외가 아니고, 오히려 다른 이웃 종교의 신자들에 비해 이러한 점술에 대해 상당히 너그러운 태도를 보인다. 많은 신자들이 결혼을 하거나 이사를 갈 때 이른바 ‘손 없는 날’을 받기 일쑤고, 새로운 사업을 할 때 돼지머리를 앞세워 고사를 지내기도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러한 풍습이나 관례가 종교성이 없기 때문에 신앙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고 무의식적으로 수용한다. 하지만 우리는 교회의 가르침과 신앙적 계율에 따라서 점술에 대해 분명하고 단호한 태도를 갖춰야 한다. 점술에 대한 경각심이 없는 상태에서 점술에 기댈 경우 자신도 모르게 심리적으로나 영성적으로 신앙에 어긋나는 마음가짐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비록 처음에는 호기심과 재미로 시작했다고 해도, 미래의 행운과 불행에 대한 언명은 자신의 삶과 생활에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다. 신앙인이라면 호기심에서라도 결코 점술에 기대서는 안된다고 교회는 분명하게 가르친다. 정치 지도자나 권력가 등 사회 지도층은 물론이고 일반 시민들 역시 점술을 무의식적이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25년 전인 1999년, 선친 바오로 아버지께서는 우리 가족에게 천주교 신앙의 씨앗을 뿌리고 선종하셨습니다. 9남매의 장남으로 어린 시절부터 가장의 역할을 하시면서 홀로되신 모친과 동생들을 건사하며 힘들게 사신 까닭인지 육체의 병적 증상이 나타난 후 급성 혈액암으로 70세에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임종 전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서도 필사적인 힘으로 세례를 받고 떠나신 것은 저에게 깊은 삶의 감동을 남겨주셨습니다. 지금의 거주지로 옮긴 후 불과 10개월 만의 일이었습니다. 편찮으신 아버지를 위해 본당의 해당 구역 신자들이 지극 정성으로 방문해 기도해 주셨습니다. 덕분에 아버지께서 마지막 가시는 길은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자녀로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본당 연령회의 친절과 봉사는 천주교에 대한 신뢰를 다지는 기틀이 되었고 이내 저희 부부는 예비신자 교리반에 입교하여 10개월 후에 필자는 대건 안드레아로, 배우자는 데레사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1960년생 동갑내기인 저희 부부는 새로운 인생의 출발이라 여기며 의욕적으로 신앙생활에 임했고 본당에서의 각종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을 했습니다.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성모님의 군대인 레지오마리애는 오랜 기간에 걸쳐 신앙의 바탕이 되고 있으며 꾸르실료 과정 이수를 비롯한 복사단, 부부 독서모임, 그리고 성소후원회 및 기타 단체에도 가입해 신앙생활을 성실히 하고 있습니다. 그 까닭인지 2년 터울인 86년생 딸 율리아와 88년생 아들 바오로도 고등학교 시절에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제는 결혼을 해서 낳은 2020년생 동갑내기 외손자와 친손녀가 3살 되던 해에 같은 날 스테파노와 스텔라라는 이름으로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보다 앞서 며느리는 비비안나로 세례를 받아 아들 가족은 성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나의 직계 가족 중에서 사위만 비신자로 남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주일이면 가족들과 함께 미사에 참례할 정도로 신앙에 깊은 관심을 보입니다. 우리 부부가 열심히 해온 신앙생활은 주위에 선한 영향력을 전해 가까운 인척들, 본가의 누님(모니카)과 여동생(체칠리아), 삼촌(바오로), 그리고 처가의 가족들도 차례차례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제는 친가든 처가든 가족이 모이면 신앙공동체가 되어 성호를 긋고 한마음으로 기도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워졌습니다. 특히 최근에 타계하신 장인(요셉)과 장모님(마리아)의 세례를 위해 저희 부부가 공을 들여 노력한 것은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 모두가 하느님의 무한하고 크신 축복과 은총의 결과이며, 또한 성령의 보호하심에 따른 신앙의 신비라 믿습니다. 저희 부부는 늘 기뻐하고 감사하며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그 기도는 주님께서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라는 말씀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라는 약속에서 시작합니다. 지금은 폭풍 성장 중인 두 손주가 식사 전 기도를 바치기 위해 앙증맞고 예쁘게 두 손을 모아 성호를 그으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삶의 커다란 보람과 기쁨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더욱더 자랑스러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되도록 주님께 더욱 의지하며 예쁘게 신앙생활을 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더욱 선하게 살아갈 것을 다짐해 봅니다. 글 _ 전재학(대건 안드레아, 인천교구 부천 중3동본당)
‘핵심만 알려드리는 신년 운세’, ‘나의 타고난 결혼 상대는’, ‘오늘 하루 나의 기운은’ 등등. 점술 관련 취재를 하다 들여다보게 된 점술 애플리케이션(앱)은 시작 화면에서부터 눈을 끌었다. 마치 놀이를 하듯 ‘올해의 비밀은 무엇인지’, ‘운명의 흐름은 살풀이가 해답’이라는 식으로 클릭을 유도했다. ‘운세’라는 말에서 풍기는 다소 무거운 분위기가 아닌 경쾌함을 주는 광고 문구들…. 월간 고유 방문자 수가 많은 운세 점술 앱 1등 공신이 2030세대라는, 또 지속적으로 앱을 이용하는 고객이 젊은 층이라는 말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익명성을 보장하면서 간편하게 미래에 대한 불안과 기대감을 풀어주는 도구로 청년들에게 선호된다고 했다. 앱에서 뿐만 아니라 대형 플랫폼에서도 운세 서비스는 인기다. 요즘은 AI가 점사를 녹음 요약도 해주고, 문서로도 정리해 준단다. 점술업 특성상 전문성이나 신뢰성에 의문을 가질 수 있음에도, 호황이 이어지는 것은 그만큼 특히 젊은이들에게 시대가 주는 불안이 크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것은 한편 기성 종교가 사회적 정화작용을 하지 못하고 위로를 주지 못하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지 않을까. 최근의 인문학 열풍이나 명상, 요가 등 종교성을 띤 취미 활동이 많아지는 것도 사람의 타고난 종교성을 ‘종교’가 제대로 역할을 해주지 못하고 매력으로 다가서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한 전문가 분석이 떠오른다.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시대, 위로와 안정감을 찾는 이들이 점술 도구에 문을 두드리는 팍팍한 세태다. 12월 29일 거행된 올해 정기희년 개막 예식에서 주제곡 ‘희망의 순례자들’을 부르며 많은 상념이 일었다. 희년은 모두에게 세상을 거스르는 용기와 희망의 불꽃이 되어야 하리라.
2008년 2월 21일 새벽 미국 네바다주, 벤 옥슬리라는 남성이 자신의 집에서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오직 벤만이 죽었고 용의자는 그의 곁에서 잠자던, 재혼한 지 2년 된 아내 멜리사가 되었다. 이 의심은 벤이 거액의 사망 보험금을 들어놓은 것이 알려지며 더 확실해졌다. 벤에게는 전처에게서 낳은 딸 엘리사가 있었는데 엘리사는 세상에 없는 아빠 바라기였다. 새엄마가 용의선상에 오르자, 당국은 6세의 엘리사를 친엄마에게로 격리했다. 그러나 엘리사는 새엄마가 범인이라는 언론과 친엄마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경찰에게 사건이 있던 그날 밤 누군가 밖에서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고 어떤 사람이 어둠 속에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고 증언하게 된다. 6세 소녀의 이 믿기 힘든 그러나, 단호한 증언에 의해 경찰은 사건을 재수사 하게 된다. 죽은 벤과 원한이 있는 사람들이 조사받게 되었는데 벤에게는 평소에 원한을 살만한 사람이 없었다. 단 한 사람, 엘리사의 친모 돈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돈은 그날 남자 친구와 함께 집에 머물렀다고 하고 남자 친구 역시 그렇게 대답했다. 이 둘에게는 마약을 비롯한 다수의 전과가 있었지만, 뚜렷한 살인의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때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돈의 아들이며 엘리사의 이복 오빠가 경찰을 찾아온 것이다. 그는 군대에 입대하는 길이었다. 망설이다가 그는 말했다. 사건 전날 자신의 엄마 돈이 남자 친구와 벤의 살인을 모의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이다. 이로써 사건은 극적으로 전환되어 먼저 남자 친구가 이어 친엄마 돈이 살인을 자백한다. 그날 밤 6살 된 엘리사가 본 어둠 속의 사람은 자신의 친엄마였던 것이다. 돈은 무기징역에, 실제로 총을 쏜 남자 친구는 가석방 없는 종신형에 처해진다. 이 살인으로 아내인 멜리사에게는 물론 아빠만 바라고 살던 어린 엘리사에게는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가 새겨졌다. 엘리사는 아버지의 부재를 인정하지 못했고 정신과 상담을 받았다. 형이 확정될 때까지 4년의 세월이 흘러 10살이 된 엘리사는 뜻밖의 부탁을 재판장에게 하게 된다. 아버지를 죽인 범인인 엄마의 남자 친구를 만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만남이 있던 자리에서 엘리사는 그에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용서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끝까지 희망을 잃지 말기를 바라요.”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고 친엄마마저 감옥에 보낸 이 소녀의 얼굴은 담담했으나 눈에서는 끝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새엄마의 품에 안겨 함께 울었다.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이 새엄마와 10세 소녀는 이렇게 하여 치유의 어려운 첫발을 내디딘다. 치유의 시작은 비극의 받아들임 그리고 용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엘리사의 이복 여동생, 이제는 고아가 된 브랜디를 입양하기로 한 것이었다. 짧은 행복 뒤에 남편을 잃어버리고 경찰과 언론에 의해 살인자로까지 몰렸던 멜리사는 이제 두 딸의 엄마가 되었다. 훗날 가진 인터뷰에서 그녀는 말했다. “그날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요. 좋은 추억을 더 많이 생각하려고 해요. 지금도 그가 아주 그립지만 어느 때보다 그가 아직도 날 사랑하고 있는 걸 느껴요. 그에게 딸 엘리사와 평생 함께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거죠. 사랑하니까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우리는 어엿한 가족입니다. 저녁이면 모여 따뜻한 포옹을 하니까요.” 참혹한 범죄 속에서 상처 입은 여인과 소녀가 건져 올린 작고 위대한 사랑의 이야기를 되새겨보며 보내는 나의 성가정 축일은 복되다. 글 _ 공지영 마리아(소설가)
지난 12월 24일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거룩한 문이 열렸다. 2025년 희년이 시작된 것이다. 희년은 ‘희망의 순례자들’이라는 공식 표어로 2026년 1월 6일 주님 공현 대축일까지 이어진다. 모두가 아시다시피 희년은 유다교 전승으로부터 이어져 왔다. 희년이 되면 유다인들은 자기 가족의 땅으로 돌아가고 경작지는 쉬고 종들은 해방되며, 빚은 면제된다. 레위기 25장에 따르면 안식년을 7번 지낸 그다음 해를 희년으로 지정하여 가나안에 정착할 때의 상태, 곧 해방의 상태로 되돌려 해방을 마련하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지파별로, 부족별로, 가문별로, 집안별로 각자가 받았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형편에 따라 땅을 팔고 다른 집 땅을 소작하기도 하고, 종살이에 이르기까지 처지가 곤란해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 꺾인 처지를 단숨에 일으키고자 한 것이 희년이었다. 가망이 없으니 찌그러져 있으라는 것이 아니라, 게으른 사람들은 대책이 없다고 내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준 복은 사람을 가린다고 으스대는 것이 아니라 일으키고 품어 안고 다시 함께 사는 것이 희년의 의미였다. 오늘날 그 희년은 있지만 희년에 마땅히 해야 하는 실천은 사라졌다. 집 잃은 이들은 쫓겨나 거리를 방황해야 하고, 일터를 잃은 이들은 생계를 걱정해야 하고, 꿈을 잃은 젊은이와 몸과 마음으로 건강을 잃은 노인들은 철저하게 배제되는 세상이다. 되돌아가고 싶으나 되돌아갈 집과 직장은 사라졌다.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이주민들은 새로운 세계에서도 이방인이다. 유다인들의 희년이 처음 생겼던 그때도 그 희년의 실천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넘겨줄 수밖에 없었던 땅은 누군가의 재산이 되었다.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했던 종살이의 처지는 누군가의 재산 증식 도구가 되었다. 잃었던 땅과 처지를 되찾기 위해서는 처음 받았던 땅보다 더 많이 가진 이들이, 처음에는 이웃이었던 이들을 종으로 부린 사람들이 그 권리를 포기해야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더 많이 가진 것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잃어버린 하느님의 질서를 다시금 되찾는 구원의 핵심이었다. 2024년 12월을 뜨겁게 보내고 2025년을 맞이하는 우리는 광장에서 또다시 희년의 요청을 받고 있다. 때가 되어 문이 열리고 거룩한 전례로 선포되는 희년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대사라는 개인의 구원에 감사하는 희년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희망의 해를 갈망하고 있다. 세월호와 이태원의 종살이를 겪었던 세대들은 ‘다시 만난 세계’를 노래한다.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모두 함께 만들어가는 세상이다. 암울한 독재 시대에 함께 불렀던 ‘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어린이들 함께 뒹구는 참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와 다르지 않은 진짜배기 희년에 대한 노래다. 이제 희년은 유다 전통에서 이어진 그리스도교 전통으로 머무르지 않는다.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는 세상 모두의 평화이다. 피부색이나 이념이나 가진 것이나 학력이나 위치한 자리에 따라서 달리 누리는 평화가 아니라 그 누구도 저버리지 않는 모두의 평화이다. 세상이 평안해야 교회도 평안하다. 교회가 세상을 위해 헌신할 때 세상도 교회를 아끼고 돌볼 것이다. 글 _ 나승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서울대교구 금호1가동(선교)본당 주임) 나승구 신부는 1991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서울대교구 사목국 차장, 대학생연합회 지도신부, 신월동본당 주임, 빈민사목위원회 위원장 등을 거쳤다.
그러던 어느 하루, 한밤중에 두툼한 갈치구이가 너무 먹고 싶어 잠이 안 왔다. 그래서 냉동실에 두 토막 남아있던 갈치를 모두 꺼내 프라이팬에 노릇노릇 구웠다. 그리고 찬밥을 물에 말아 두툼한 갈치 살과 함께 정신없이 퍼먹고 있는데 잠을 자다 냄새를 맡고 나온 남편이 부엌에 쪼그리고 앉아 뭔가를 먹고 있는 내 뒷모습을 본 거다. “뭐해??” 나는 무덤에서 간을 파먹고 있는 구미호처럼, 한 손에 갈치를 들고 남편을 돌아보았다. “밥 먹잖아….” “지금이 몇 신데?” 그 늦은 밤에 내가 왜 갈치를 들고 밥을 퍼먹고 있는지 설명해 준다고 이해할 수 있을까. 내가 먹을 갈치 뒷면을 아이들에게 모두 뺏겨버린 어미의 슬픈 비애는 어떻게 포장해서 말해본들 ‘쪽팔린 식탐’일 뿐이었다. 어쨌거나 그날, 두툼한 갈치 두 토막을 야무지게 발라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고 나 혼자 다 먹은 다음, 몹시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잠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딸기도 달콤하고 싱싱한 건 아이들에게 먹이고 짓무르고 덜 익은 건 내가 먹으며 ‘엄마니까 그래야 하는 거야’라고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나도 맛있고 좋은 거 먹고 싶다’며 억울해하던 철없는 엄마였다. 치킨을 먹을 때도 퍽퍽한 가슴살 말고 닭다리부터 뜯고 싶었지만 보고 듣고 배운 게, 엄마는 아이에게 더 맛있고 좋은 것을 먹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참고 양보했다. 세상에 어떤 엄마가 애들한테 먹이는 걸 아까워하냐고 한심해할지 모르지만 스물일곱에 엄마가 되어버린, 어리고 미숙한 시절이라 그랬다. 전역한 아들에게 전복을 구워주며, 군대 있을 때 누가 제일 많이 생각났냐고 물었다. “물론, 엄마죠.” “왜 엄마가 제일 많이 생각났어?” “엄마가 해주는 밥, 그게 먹고 싶더라고.” “내가 음식을 좀 잘하긴 하지. 너네 어려서부터, 자장면이고 피자고 집에서 만들어 먹였잖아. 그러고 보면 참 좋은 엄마였어, 안 그래?” “뭐 그런 것도 있지만, 엄마가 해주는 밥은 인간미가 있잖아. 군대라는 곳은 인간미가 없어. 때 되면 먹고 누가 더 먹으라고 챙겨주거나 맛없다고 타박도 못하고 그냥 욱여넣어야 하거든. 그래서 엄마가 해주는 밥이 먹고 싶었어요.” 인간미가 있는 밥. 아이의 표현이 참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아이들에게 최고의 엄마, 좋은 엄마였다고 자부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인간미 넘치는 밥을 먹여 키웠구나, 싶어서. 내가 해준 음식을 맛있게 싹싹 비우는 아들을 보며 엄마라는 게 뭐 대단하고 거창한 게 아니라 따뜻한 밥을 해서 먹이는 사람, 그 정도로 기억되는 것만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은 곧 생명이다. 그래서 우리는 음식을 먹기 전, 손을 모으고 기도한다. ‘주님, 은혜로이 내려주신 이 음식과 저희에게 강복하소서.’ 그리고 하나 더, 아이들을 위해 오늘도 따듯한 밥상을 차려내는 엄마들에게 강복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글 _ 김양미 비비안나(소설가)
칼데라의 아침 Indonesia, 2013 브로모 화산이 하얀 입김을 날리며 깨어나는 아침. 태초의 시간인 듯 또 하루의 삶이 주어지면 탱거르인들은 산정에 올라 아침 기도를 바친다. 자신들이 맨손으로 일궈온 계단밭과 마을에 새겨진 삶의 터 무늬를 자부심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며 아이들에게 성실한 노동과 우애의 역사를 들려준다. 인생의 좋고 나쁜 일들은 시간의 강물로 사라지지만 내 삶의 터 무늬와 내 안에 새겨진 내면의 느낌은 신생(新生)의 아침처럼 언제나 새로운 경이로 빛나리라고. - 박노해 사진 에세이 「다른 길」 수록작 글·사진 _ 박노해 가스파르 ※ 서울 종로구 통의동 ‘라 카페 갤러리’(02-379-1975)에서 박노해 시인 상설 사진전을 무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기다림과 설렘으로 한해를 열었던 첫날 아픔보다는 기쁨을 기쁨보다는 보람을 느낄 수 있기를 소원하였는데 가슴이 아파서 할 수만 있다면 건너뛰고 싶었던 날들 가슴이 벅차서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었던 날들 소중한 인연들과 마음 나누며 주님의 집에서 산다면서도 참 많은 우여곡절 속에 은근슬쩍 담장 넘는 날들이 찰나처럼 느껴지는데 보내는 12월이 아쉬움으로 무겁게 느껴지고 내일은 무지개의 꿈보다 가슴을 채우는 행복한 이야기를 가득 채울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보내는 12월이나 맞이하는 1월이 세월의 흐름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는데 사람들은 시간의 매듭을 지어 세월에 마디를 만들고자 한다. 아마 이것도 하느님이 만드신 자연의 이치인 모양이다. 대나무가 마디를 이루며 성장하고 소나무가 나이테를 이루듯 우리 인간들도 세월이라는 공간에 시간이라는 나이테를 새기며 새로움을 더하며 성장하는 것 같다. 한 노시인이 “꽃이 아름답다고 하지만 그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사람의 마음이 더 아름답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분명 우리는 무지개의 영롱함과 아침이슬 같은 순수함,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마음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물질적 욕망과 자신의 편함만 추구하는 이기적인 개인주의로 바뀌어 가고 있다. 편리함이라는 명목으로 서양의 물질문명을 무조건 받아들인 산물인 셈이다. 얼마 전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행복하게 사는 비결 중 몇 가지를 소개해 보면 ‘주변을 단순화하라’, ‘적당한 운동을 하라’ 등등의 일상적인 것 외에 눈에 띄는 대목이 있었다. ‘끊임없이 봉사활동을 하고 이웃과 교감을 하며 살아라’는 것으로 이것이 노년까지 행복할 수 있는 길이다. 종교인이 아니라도 봉사와 이웃과의 화목이 평생 행복의 조건인데 하물며 믿음을 갖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는 주님의 말씀이 절실한 때인 듯하다. 새해에 뜨는 해는 나의 큰 뜻이고, 새해에 부는 바람은 나의 힘찬 기운임을 간직하면서 묵은 한 해를 보내고 밝고 희망찬 새해 새 아침을 맞이할 우리가 되도록 기도드리고 싶다. 글 _ 강병순 아우구스티노(마산교구 고성본당 상리공소)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 5,5). 2025 희년이 밝았다. 희년으로 다가온 새해는 두려움으로 빗장을 걸어두었지만 새로운 시간을 향해 빼꼼히 고개를 쳐든 설렘으로 우리 안에 스며들었다. 서민의 일상을 조여오는 인플레이션과 불안한 정치, 그리고 전쟁의 공포 속에 있는 우리를 빛으로 인도하시는 하느님, 그분께서 주신 새로운 시간을 맞으며 희망의 씨앗을 마음 중심에 심는다.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은 전쟁과 크고 작은 내전들은 우리 안에 있는 탐욕과 비정(heartless)을 성찰하게 했다. 미국과 G7 국가를 중심으로 한 친서방 진영과 중국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반서방 진영 간의 이념과 체제의 경쟁이 부추기는 전쟁의 시작점뿐 아니라 우리나라 정치계에서 드러난 부패는 그야말로 악이다. 그 자리에서 들끓는 탐욕의 작은 점들과 만나게 된다. 군사적 승리를 거둬 평화를 쟁취하려는 패권주의에 매몰된 나라들, 악의 자승자박이라 할 수 있는 비상계엄선포로 국민을 혼란에 빠뜨린 곳에서 평화는 벼랑 끝으로 밀렸다. 그러나 보라. 젊은이들이 일어섰다. 탄핵을 외쳐온 국민들의 응원봉 불은 꺼질 줄 모르고 어둠에 묻혀 있던 우리를 연결해 주었다. 시국미사와 선언이 이어지면서 두려움은 다시 희망이 되어 우리에게 전해졌다. 풀은 언제나 바람보다 먼저 일어서는 법이다. 아이러니는 「소년이 온다」의 저자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는 그 축제와 우리가 맞닥뜨린 암흑의 시점이 겹쳐진다는 점이다.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여전히 음모가 꾸며지고, 그 틈바구니에서 무모하게 죽어가야 했을 힘없는 민중들은 내란수괴에게 무엇인지 묻고 싶다. 끈질기게 질문해야만 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국제 관계 혹은 정치의 비틀림을 있게 한 근본 문제를 바로 보고 이를 풀어가기 전까지는 더 많은 사회적 약자들이 폭력적인 죽음으로 내몰릴 것이다. 거짓은 허용될 수 없다. 이 어둠 중에 다가온 희년이 주는 희망은 우리를 하느님의 평화와 질서로 초대한다. 희망은 어디에서도 희망할 수 없어 낙담하는 우리를 위로하며 용기 내어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도록 격려한다. 어둠을 뚫고 설렘이 고개를 내민다. 어느 곳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지점에서 희망하는 것이 신앙이다. 이 얼마나 위대한 유산인가. 신앙은 여정이다. 여정은 희망을 품고 목적지를 향하도록 우리를 부추긴다. 목적지는 바로 우리의 출발점인 하느님의 사랑이다. 사실 이 말이 이 비정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매 순간 눈앞의 일을 처리하느라 급급한 우리에게 얼마나 멀고도 추상적인 이야기처럼 다가오는가. 그러나 이보다 더 자명한 진실은 없다. 하루에 한 번쯤은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나는 무엇에 의해 재촉받아 서둘러 발걸음을 떼고 있는지를 묻고 답하면서 꼭꼭 짚어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욕망의 온상인 패권주의에 자리를 내주게 될 것이다. 이 혼돈의 시대에 늘 뿌리를 건드려 경종을 울려 주시는 교종 프란치스코는 네 번째 회칙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를 반포했다. 이 회칙은 신앙인의 내적 동인인 예수 성심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취약함으로 내몰린 이웃을 향하도록 우리를 독려한다.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다. 사랑을 살기 위해 고뇌하는 침묵의 극점에 도달해서야 우리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심하게 균열이 간 음지를 향해 단호히 촛불을 들 수 있다. 긴 침묵을 거쳐야만 탐욕과 시기로 폭력이 난무한 곳에서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그 준엄한 자리에서 비로소 희년이 주는 희망을 품게 될 것이다. 글 _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이은주(마리헬렌) 수녀 1990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입회한 이은주 수녀는 1998년 종신서원을 하고 쌘뽈여자중고등학교와 계성고등학교에서 20년간 국어·사서 교사로 소임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마음의 길」(가톨릭출판사)을 집필했고, 현재 수녀회 서울 관구에서 도서관과 편찬직, ‘영성생활’ 편집 위원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