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 부엉골 : 신학교의 설립

경기 여주 강천면 부평리 581. 부엉이가 많았다고 해서 부엉골이라 불리던 이곳에는 박해 시기 조선인 사제를 양성하려던 선교사들의 열망이 가득했다. 전국 구석구석 교통이 발달한 지금도 포장되지 않은 산길을 걸어야 닿을 수 있는 외진 이곳은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아직 박해가 끝나지 않은 1885년 신학교가 세워진 곳이다. ■ 신학교 설립을 위한 노력 파리 외방 전교회는 조선대목구가 설정된 이래 꾸준히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첫 번째 목적으로 삼고 활동했다. 조선인 성직자를 양성해 조선인의 힘으로 교회가 유지되는 것이 파리 외방 전교회의 선교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836년 첫 번째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하자마자 성 김대건(안드레아)·가경자 최양업(토마스)·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선발해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다. 이후로도 신학생 양성을 위한 노력은 이어졌다. 페레올 주교는 1850년 병으로 사목 순방을 다니기 어려운 성 다블뤼 신부에게 신학생을 가르치도록 했다. 그리고 1854년에는 이렇게 국내에서 기초 교육을 받은 3명의 신학생을 말레이시아의 페낭 신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유학을 통해 사제를 양성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조선인 사제를 양성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지만, 여러모로 어려움이 컸다. 어린 신학생들이 유학길을 견뎌야 했을 뿐 아니라 현지 기후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병에 걸리거나 최방제의 경우처럼 목숨을 잃는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선교사들은 조선에서 신학생을 양성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조선에서 신학생을 양성하는 일도 쉽지는 않았다. 박해 때문이었다. 성 앵베르 주교도 성 정하상(바오로) 등을 비롯한 신학생을 국내에서 양성했지만, 1839년 기해박해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박해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신학생을 양성하려는 노력은 끊이지 않았다. ■ 성 요셉 신학교 설립 마침내 1855년 메스트르 신부는 배론에 성 요셉 신학교를 설립했다. 성 장주기(요셉)가 배론 교우촌의 3칸짜리 초가집을 봉헌해 신학교 건물로 사용했고, 1856년 입국한 푸르티에 신부가 교장으로 임명됐다. 초기 성 요셉 신학교는 열악하고 위험한 환경이었다. 박해를 피하기 위해 일부 신학생들은 다른 마을에 거주하면서 학교를 오가기도 했고, 비신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소리 내서 글을 읽는 것도 조심해야 했다. 신학생들이 박해를 피해 안전하도록 밤낮으로 좁은 방안에서 문을 닫아걸고 공부하다 보니 면역력이 약해져 병에 걸리기 일쑤였다. 1865년 푸르티에 신부는 서한을 통해 “빈약하기 짝이 없는 이 신학교의 학생들은 거의 환자로, 이러한 병의 원인은 장소의 협소함보다는 운동과 활동의 부족에 있다”면서 “우리는 가능한 한 가장 작은 공간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나의 불쌍한 학생들은 낮이나 밤이나 문을 굳게 닫고, 병에 걸린 상태에서 공부한다”고 전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성 요셉 신학교는 점차 발전해 나가고 있었다. 1861년에는 프티니콜라 신부가 신학교 교사로 합류해 교육체계를 다져나갔다. 신학교육은 라틴어과와 신학과로 나뉘어 있었고, 신학과에서는 수사학, 철학, 신학을 가르쳤다. 신학교 교사를 맡은 두 신부는 신학생들을 교육하면서도 교리서를 번역하고, 또 라틴어-한국어-한문 사전을 편찬하기도 했다. 페낭에서 유학하던 신학생들도 1861년과 1863년에 귀국해 성 요셉 신학교로 편입하면서, 10여 명의 신학생이 이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1864년에는 배론 교우촌을 방문한 베르뇌 주교가 신학생들에게 삭발례, 소품(小品)을 주는 성과도 있었다. 대품(大品)을 통해, 또 한 명의 조선인 성직자가 탄생하는 것도 머지않은 일처럼 보였지만,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면서 신학교는 10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문을 닫게 된다. 당시 성 남종삼(요한)을 체포하기 위해 제천에 왔던 서울의 포졸들이 서양 선교사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성 요셉 신학교를 급습했던 것이다.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는 이때 체포돼 3월 11일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 신학교의 부활 병인박해의 피해는 컸지만, 선교사들은 여전히 조선인 사제 양성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제7대 조선대목구장 블랑 주교는 로베르 신부에게 신학교 설립을 지시했고, 마땅한 자리로 찾은 곳이 부엉골이었다. 배론의 신학교처럼 박해로 신학교가 와해되지 않기 위해 안전한 곳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후에 부엉골본당 주임을 맡았던 가밀로(Camile Bouilon) 신부는 “로베르 신부는 오직 호랑이와 부엉이들만이 살고 있는 이 험난한 산속의 마을 부엉골보다 더 나은 장소를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1885년 부엉골 교우촌의 신자들이 숲에서 통나무를 베고 진흙 벽돌을 쌓아 초가집을 짓고 신학교를 세웠다. 20년 만에 다시 신학교가 세워진 것이다. 부엉골에 다시 세워진 신학교 교장을 맡은 마라발 신부는 신학교를 ‘예수 성심 신학교’라 명명했다. 페낭 신학교에서 귀국한 신학생 4명과 국내에서 입학한 신학생 3명이 예수 성심 신학교에서 수학했다. 부엉골에 자리했던 신학교는 2년 만에 용산으로 이전했다.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으로 박해가 종식되면서 더 이상 깊은 산골에 숨어있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신학교는 1945년 다시 서울 혜화동으로 자리를 옮겼고, 지금의 가톨릭대학교로 이어오기까지 수많은 한국인 사제를 탄생시키고 있다.

2024-04-21

[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 (21) 손골성지 : 파리외방전교회와 프랑스 교회

한국교회는 선교사 없이 신자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시작됐지만, 박해를 딛고 신앙을 지키며 교회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은인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프랑스교회의 헌신적인 도움은 한국 땅에 신앙이 깊게 뿌리내릴 수 있도록 큰 힘이 돼줬다. 프랑스교회는 어떻게 한국교회의 역사와 함께해왔을까. ■ 파리 외방 전교회의 헌신 손골성지 주차장 뒤편을 보면 벽돌을 쌓아 탑을 만들어 그 위에 십자가를 올린 듯한 모습의 순교비가 있다. 바로 성 도리 헨리코 신부를 기억하는 순교비다. 이 순교비는 프랑스교회와 한국교회가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함께했음을 기억하게 해준다. 순교비 위에 세워진 돌십자가는 도리 신부의 고향에서 보내온 것으로, 도리 신부의 부모가 사용하던 맷돌로 만든 두 개의 십자가 중 하나다. 프랑스 딸몽본당은 1966년 도리 신부 순교 100주년을 맞아 하나는 도리 신부의 생가에, 다른 하나는 도리 신부가 사목하던 손골에 보냈다. 이 돌십자가를 계기로 손골성지 개발이 시작됐다. 손골은 성 도리 헨리코 신부와 성 오메트르 베드로 신부를 비롯해, 여러 선교사들이 우리말과 풍습을 배우고, 사목을 하던 곳이었다. 이 선교사들은 모두 프랑스에 본부를 둔 파리 외방 전교회 사제들이다. 초대 조선대목구장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를 시작으로 많은 사제들이 목숨을 걸고 조선 땅을 향했다. 병인박해 직전 조선에는 12명의 사제가 활동하고 있었다. 파리 외방 전교회 사제들은 이른 새벽에 기상해서 묵상과 미사 봉헌을 하고 저녁 늦은 시각까지 활동했다. 오메트르 신부는 편지를 통해 “주교님은 초보 선교사들에게 7시간의 수면을 명령하시지만, 정작 당신은 절대 4시간 이상 주무실 수가 없다”고 전하기도 했다. 선교사들은 1년에 2차례가량 교우촌들을 순방했는데, 이 기간에는 신자들의 교육, 고해성사, 예비신자들의 시험을 비롯해, 사목 관할지에 필요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활동했다. 특히 선교사들이 이동 중에는 늘 상복을 입고 커다란 모자를 덮어썼다. 상복을 입은 이에게는 말을 걸지 않는 조선의 풍습 덕분에 서양인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고 이동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선교사들은 조선교회의 자립을 위해 헌신했다. 특히 조선인 사제 양성을 위해 매진했는데, 파리 외방 전교회는 원칙적으로 양성된 사제들을 회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온전히 현지 교회만을 위한 사제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17세기 무렵까지 해외선교를 맡은 수도회들은 대체로 현지에 해당 수도회 분원을 세우는 형태로 이뤄졌다. 이는 수도원의 영성을 전하고, 본원을 통해 선교사를 파견하고 지원하는 데는 유리했지만, 현지 교계제도 정착이나 복음의 토착화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반면 파리 외방 전교회는 전교회의 확장이 아니라 철저하게 현지인들을 통해 현지에 복음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하는데 목적을 뒀다. 그래서 파리 외방 전교회 회칙은 “방인 성직자단이 형성되고, 선교사들의 협력 없이 자립적으로 운영되면 흔쾌히 모든 시설을 방인사제들에게 넘기고 물러나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 전교회의 후원 조선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건은 비단 선교사들만의 노력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의 선교사 뒤에는 수많은 프랑스 신자들의 영적·물적 후원이 뒷받침되고 있었다. 파리 외방 전교회의 선교활동에 가장 크게 협력한 단체는 ‘전교회’다. 전교회는 복자 폴린 마리 자리코가 프랑스 리옹에서 시작한 평신도 단체다. 전교회 회원들은 함께 모여 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후원금을 모아 파리 외방 전교회에 전했다. 이런 후원금은 선교사들이 조선에서 활동하는 선교자금으로 활용됐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전교회 이사회가 내게 5600프랑을 기부했다”면서 “이는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걸작이며, (프랑스 선교사들이 파견된) 선교지들의 성공을 열렬히 바라는 강력한 동기”라면서 전교회 연보 편집장에게 감사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선교사들은 이런 든든한 후원에 힘입어 선교에 필요한 비용과 물품을 충당할 수 있었다. 조선까지 가서 생활하기 위한 경비는 물론이고, 성사를 위한 제의나 포도주, 기름, 신자들을 위한 성물, 선교사들의 생활용품에서 커피 같은 기호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원이 이뤄졌다. 이런 지원이 조선교회 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말할 것도 없다. 전교회의 지원 내역을 살피면 병인박해가 일어나기 전 해인 1865년에는 2만6789프랑을 조선교회를 위해 지원한 것으로 나타난다. 흥미로운 점은 전교회 회원이 프랑스에만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교회의 지원을 받고 있던 조선교회의 신자들도 전교회 회원으로 함께하고 있었다.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는 서한을 통해 “1년 동안 181명의 신자를 전교회에 가입시켰다”고 밝히기도 하고, 복자 김기량(펠릭스 베드로)도 전교회에 입회하기를 원했다는 일화도 전하고 있다. 프랑스 신자들과 조선의 신자들은 이 땅에 복음을 뿌리내리기 위해 한마음이었다. 피상적으로 마음을 모은 것 아니라 ‘전교회’라는 한 단체에서 활동하며 선교를 지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전교회는 1922년 교황청 소속 기구로 승격됐는데, 바로 오늘날의 ‘교황청 전교기구’다.

2024-04-07

[수원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 (20) 손골성지 : 조선의 두 번째 사제

광교산 기슭에 자리한 손골성지. 손골성지는 특별히 성 도리 헨리코 신부와 성 오메트르 베드로 신부를 현양하고 있다. 그러나 손골은 조선의 두 번째 사제,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가 다녀간 곳이기도 하다. ■ 동료 사제들과 함께 손골에 관한 최양업 신부의 기록은 그가 1857년 9월 14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찾을 수 있다. 최양업 신부는 “저는 두 번이나 페롱 신부님을 찾아가서 여러 날 묵었다”고 밝혔다. 이어 “저는 신부님이 미리 알려주신 덕분으로 페롱 신부님을 잘 알고 있었고, 페롱 신부님도 저의 외로운 처지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서로 우정을 느꼈다”며 “또 우리가 인연으로 함께 묶여있음을 미리 맛보고 있는 터였기에 우리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함께 나눴다”고 손골에서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최양업 신부는 당시 전국 방방곡곡 박해자들의 눈을 피해 신자들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 해에만 조선 신자의 28%를 만났다고 하니 그 고단함을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외롭고 고단한 여정을 이겨낼 수 있었던 힘 중 하나가 바로 함께 사목하는 동료 사제들이었다. 홀로 외진 교우촌을 찾아야 했던 최양업 신부는 대부분 혼자 사목할 수밖에 없었지만, 동료 사제들과 함께 사목하는 일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활동이 신학생 양성이다. 최양업 신부는 1854년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조선에서 말레이시아 페낭 신학교로 떠난 신학생 3명의 안부를 물으면서, 신학생을 지도하는데 필요한 각 신학생들의 특성과 신앙, 지식수준, 염려되는 점 등을 설명했다. 최양업 신부가 안부를 물은 신학생들은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와 최양업 신부 등에 이어 선발된 조선인 신학생들이었다. 최양업 신부 이후 신학생 양성이 본격적으로 이뤄진 것은 1850년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가 후에 제5대 조선대목구장을 맡게 되는 성 다블뤼 안토니오 신부에게 신학생 교육을 명하면서부터다. 이후 다블뤼 신부는 신학생을 양성하기 시작해 1854년 3월 신학생 3명을 페낭 신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다블뤼 신부는 이 기간 중 1853년 여름에는 손골에서 머물기도 했다. 자료의 부족으로 최양업 신부도 신학교 설립과 운영을 책임지고 있었는지, 그 장소가 구체적으로 어디였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최양업 신부와 동료 사제들의 서한에서 유추해 볼 때, 최양업 신부는 조선인 신학생 각자를 상세히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이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깊게 고민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최양업 신부가 직접 신학생들을 가르치지 않았다면 알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 경신박해와 최양업 신부의 선종 최양업 신부가 열정적인 사목을 펼친 결과, 조선교회의 교세는 크게 성장하고 있었다. 1859년 11월 베르뇌 주교는 예비신자를 1200명 이상으로 추산했는데, 그 수는 2개월 만에 2000명으로 증가했다. 최양업 신부도 1860년에는 자신이 맡은 사목지에서만 세례 받을 준비가 된 예비신자가 1000명 가량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신박해는 이런 희망을 무너뜨렸다. 경신박해는 1859년 말 개인적으로 천주교에 반감을 품고 있던 좌포도대장과 우포도대장이 조정의 허가 없이 교우촌들을 급습하면서 시작됐다. 이 박해로 많은 신자들이 잡혔는데, 이 과정에서 신자들의 재산을 가로채고 집을 불태우는 사건들이 발생했다. 당시 조정은 비교적 천주교에 관대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는데, 약탈과 방화 등의 만행이 저질러지자 두 포도대장을 파면시키고 박해를 중단시켰다. 경신박해는 국가가 주도한 대대적인 박해는 아니었지만, 최양업 신부에게는 큰 시련이었다. 전국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던 최양업 신부는 주요한 박해 대상이었다. 박해자들에게 붙잡힐 뻔한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이에 최양업 신부는 박해를 피해 경상도 남쪽의 죽림 교우촌에 머물렀지만, 그래도 사목을 멈추지는 않았다. 밤에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낮으로 인근 교우촌을 찾고 성사를 집전하면서 활동했다. 그 누구보다 자신이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최양업 신부는 그보다도 신자들이 박해의 위협에 신앙을 잃는 것이 더 걱정이었던 것이다. 박해가 잠잠해지자 최양업 신부는 1861년 성사 집전 상황을 보고 하기 위해 서울로 향했다. 그렇게 서울로 가던 중 과로에 장티푸스가 겹치면서 위중한 상태가 됐고, 결국 그해 6월 15일에 선종했다. 베르뇌 주교가 “우리 중에 가장 튼튼한 사람은 최 토마스 신부”라고 말했을 정도로 건강한 최양업 신부였지만, 경신박해로 정신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크게 쇠약해졌던 것이었다. 최양업 신부의 마지막 순간을 지킨 푸르티에 신부는 “그(최양업)는 아주 열정적으로 예수, 마리아 두 이름을 되풀이하고 있었다”면서 “두 이름을 죽기 직전의 고통 속에서도 그처럼 분명하게 발음하는 것을 보며 각별한 은총이라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미 경신박해로 침체된 조선교회는 최양업 신부의 선종으로 또다시 큰 슬픔에 빠졌다. 최양업 신부의 빈자리는 그가 아닌 다른 누가 메울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페롱 신부는 “그(최양업 신부)의 죽음은 조선교회 전체의 초상”이라고 슬퍼했다. 그는 특히 “그(최양업 신부)가 남쪽의 오지에서 방문하던 지역들은 지금까지 서양 선교사들이 갈 수 없는 곳이었고, 그의 한문 지식과 조선인으로서의 장점은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책을 번역하는 일에 누구보다 적격이었다”며 “종교 자유가 선포될 때까지는 이 곤경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

2024-03-24

[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 (19)한덕골 : 조선의 두 번째 사제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묵리 619-1 한덕골 사적지. 많은 교우촌이 그랬듯, 이곳도 박해를 피해 숨어든 신자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한덕골은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은이공소로 정착하기 전 머물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이곳에는 조선의 두 번째 사제,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발자취도 남아있다. 한덕골 전경. 최양업 신부와 관련된 국내 성지와 교우촌을 순례할 수 있도록 지정된 순례지 중 하나다. 신자 찾아 8만 리 한덕골에 도착하니 가장 먼저 입구에 ‘희망의 순례자’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희망의 순례자’는 최양업 신부의 시복시성을 기원하고자, 최양업 신부와 관련된 국내 성지와 교우촌을 순례할 수 있도록 지정된 순례지다. 한덕골은 최양업 신부의 둘째 큰아버지인 최영겸(베드로) 일가가 1837년부터 정착해 살던 곳이다. 기해박해로 최양업 신부의 부모인 성 최경환(프란치스코)과 복자 이성례(마리아)가 순교하자 최양업 신부의 막냇동생 최신정은 큰아버지가 살고 있는 이 한덕골로 와서 생활했다. 1849년 사제품을 받고 이듬해 귀국한 최양업 신부는 한덕골을 찾아 동생과 상봉하고, 이후에도 이곳에 들러 성사를 집전하곤 했다고 전해진다. 한덕골은 현재 천리요셉본당이 관리하고 있고, 용인시가 ‘청년 김대건 길’로 지정해 한덕골로 이어진 길을 정비하는 등 한덕골을 찾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박해 당시 이곳은 외딴 산속이었다. 김대건 신부의 가족이 머물 당시 집을 마련하지 못해 나무에 칡을 얽고 억새를 덮어 머물렀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질 정도다. 당시 교우촌들이 대부분 그랬다. 최양업 신부는 사목하던 전국 구석구석 이런 외딴 산속을 찾아다니며 신자들을 만나 사목했다. 최양업 신부가 맡은 사목구역은 충청도, 경상좌·우도, 전라좌·우도 등 5개 도에 걸쳐있었다. 강원도의 일부 교우촌도 방문했고, 한덕골처럼 경기도를 방문하는 일도 있었다. 최양업 신부가 국내에서 사목하기 시작할 무렵인 1851년에는 최양업 신부가 사목하는 교우촌이 127곳이었다. 이후 새로운 교우촌들이 계속 생겨나면서 최양업 신부가 찾아야 할 교우촌은 더욱 늘었다. 1861년 페롱 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 따르면 최양업 신부는 “낮에는 80리 내지 100리를 걸어야 했으며, 밤에는 고해를 들어야 하고 또 날이 새기 전에 다시 떠나야 했으므로, 그가 한 달 동안에 취할 수 있었던 휴식은 나흘 밤을 넘지 못했다”고 한다. 교회사 연구자들은 최양업 신부와 동료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최양업 신부의 이동거리를 가늠했는데, 적어도 8만 리, 약 3만km에 달했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평탄하고 잘 닦인 길이 아니라, 가파르고 험한 산을 걷고 또 걸어 오르내렸으니 그 고단함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그렇게 최양업 신부가 찾아다닌 신자 수가 1851년에는 5936명에 달했다. 당시 조선 전체 신자의 절반이 넘는 수다. 또 해마다 조선 전체 세례자의 30~40%가 최양업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세례만이 아니다. 매스트르 신부는 “최 신부는 한 해의 대부분을 신자를 찾아가 4500명의 고해를 들어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거의 초인적인 활동이었지만, 최양업 신부가 남긴 기록에는 힘든 내색을 찾기 어렵다. 오히려 최양업 신부는 1855년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들에게는 더 큰 기쁨이 있다”며 “하느님께서 많은 새로운 형제들을 우리에게 보태주시어 하느님 아버지의 밭에 풍년이 들었다”고 기뻐했다. 한덕골에 있는 성모상. 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다 최양업 신부는 단순히 성사만 집전하고 다닌 것은 아니었다. 최양업 신부는 자신의 모든 능력과 재능을 활용해 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연구하고 노력했다. 라틴어, 프랑스어, 중국어 등에 능통할 정도로 언어에 재능이 있었던 최양업 신부는 한글을 활용해 신자들이 쉽게 교리를 익힐 수 있도록 도왔다. 「천주성교공과」, 「성교요리문답」을 한글로 번역하는 데도 참여하고, ‘가사’(歌辭) 양식을 활용해 누구든 교리를 우리말로 쉽게 노래처럼 암송할 수 있도록 ‘천주가사’도 만들었다. 최양업 신부는 세례를 받고 싶어도 교리를 익히지 못하는 신자들이 있는 것에 늘 안타까워했다. 특히 “사본문답(四本問答)을 전부 배우자면 몇 해가 걸려야 하는 사람이 대다수”라며 “심지어는 죽을 때까지 교리 공부를 하여도 사본문답을 다 떼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고 신자들이 익히기 어려운 교리를 지적하기도 했다. 사본문답은 「교리문답」 중 세례·고해·성체·견진성사에 관한 문답이다. 이에 만든 것이 천주가사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 많이 불리던 ‘가사’ 양식을 활용한 천주가사는 다소 어려운 「교리문답」과 달리 누구나 쉽게 우리말로 노래처럼 암송할 수 있었다. 오늘날 최양업 신부가 만든 것으로 알려진 천주가사는 ‘선종가’, ‘사심판가’, ‘공심판가’와 칠성사를 노래하는 ‘영세’, ‘견진’, ‘고해’, ‘성체’, ‘종부’, ‘신품’, ‘혼배’와 향주삼덕을 노래하는 ‘신덕’, ‘망덕’, ‘애덕’이 있고, ‘칠극’, ‘제성’, ‘행선’ 등이다. 최양업 신부는 교리교육만이 아니라 신자들의 신심활동을 북돋는 데도 열의를 보였다. 특히 신학생 시절부터 성모성심회에 가입할 정도로 성모신심이 깊은 최양업 신부는 신자들에게 묵주기도를 가르치고 성모신심을 전했다. 최양업 신부는 단순히 묵주기도를 가르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신자들에게 묵주 만드는 법을 알려주기도 했다. 그 열성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최양업 신부는 리브와 신부에게 “조선 신자들이 묵주를 아주 잘 만든다”며 자랑하고, “묵주를 보내달라고 청하지 않겠다”고 전했다. 대신 “묵주를 만드는 도구를 보내주면 조선 신자들에게 묵주를 최대한으로 많이 선물하는 것”이라고 전하기도 했다.

2024-03-10

[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 (18)조선의 두 번째 사제

수리산성지 순례자성당 최양업 신부 유리화.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병목안로 408 수리산성지는 성 최경환(프란치스코)이 일군 교우촌이자 그의 유해가 묻힌 곳이다. 최경환 성인은 많은 면에서 모범적인 신앙 활동을 해왔는데,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자녀가 사제가 될 수 있도록 깊은 신앙을 물려준 것이었다. 최경환 성인은 아들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가 신학생으로 선발되자 수리산으로 이주해 정착했다.부모에게 물려받은 깊은 신앙 최양업 신부 집안의 신앙은 1787년 최양업 신부의 증조부 최한일이 하느님의 종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에게 교리를 배우면서 시작됐다. 최양업 신부의 집안은 박해를 피해 삶의 터전과 재산까지도 버리고 살아갔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신앙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그 신앙을 다시 회복시킨 것이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 최경환 성인이었다. 최경환 성인은 가족들이 신앙에 냉담해지자 가족들을 회유했다. 하지만 가족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편지를 남기고 신앙생활을 하기 좋은 곳으로 떠났다. 이 일을 계기로 최경환 성인 일가가 다시 신앙에 열심해졌는데, 이때 최양업 신부는 12살 무렵이었다. 최양업 신부는 최경환 성인의 첫째 아들로서 신앙을 위해 고향과 재물을 버리고 가난하고 험난한 삶을 받아들인 부모의 모습을 바라보며 성장했다. 최양업 신부는 특별히 아버지 최경환 성인에게서 모범적인 신앙인의 모습을 배웠다. 최경환 성인은 일할 때나 대화할 때 항상 교리와 신앙에 관한 것만 이야기했고, 형제들과 화목하며 부모를 섬기며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최양업 신부는 후에 최경환 성인에 대해 “얼마나 꾸밈없이 순박하게 그리고 몸짓을 해 가면서 말하는지, 듣는 사람은 누구나 탄복했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그의 열정은 이웃에 대한 애틋한 동정심과 결합돼 있었다”고 회고한다.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 복자 이성례(마리아)는 최양업 신부와 그 형제들의 교리 선생님이었다. 이성례 복자는 최양업 신부의 가족이 충청도에서 서울로, 강원도로, 경기도로 이주하던 중에는 이집트로 피난하던 성가정의 이야기를, 먼 길에 굶주리고 지쳤을 때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자녀들을 가르쳤다. 최양업 신부는 이성례 복자가 “아들들에게 구원에 유익한 말과 모범으로 천주교 교리와 기도문을 가르쳤다”고 전한다. 최경환 성인과 이성례 복자의 이런 신앙 전수는 최양업 신부에게 깊은 신앙심을 물려줬다. 이런 최양업 신부이기에 성 모방(베드로) 신부가 신학생을 선발하던 당시 가장 먼저 추천받을 수 있었다. 이성례 복자와 최경환 성인의 동상. 성실하고 촉망받는 인재 최양업 신부는 1836년 2월 6일 서울 후동에 있는 모방 신부의 거처에서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후 3월 14일 최방제(프란치스코)가, 7월 11일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모방 신부의 거처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뽑혀 신학 공부를 시작한 최양업 신부는 유학길을 떠나서도 촉망받는 신학생이었다. 최양업 신부의 스승들은 그를 높이 평가했다. 리브와 신부는 1842년 4월 파리 외방 전교회 지도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브뤼니에르(Bruniere) 신부는 이 학생에게서 많은 재능, 무엇보다도 좋은 판단력을 발견했다고 한다”며 “그래서 브뤼니에르 신부는 그를 가르치기에 아주 적절한 학생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전했다. 최양업 신부는 비교적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양업 신부는 학업에 있어서 만큼은 적극적이었다. 리브와 신부는 1839년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신학에 관해 최양업 신부와 김대건 신부가 자신의 주장을 펼치자 이들을 납득시키는 토론과정에서 애를 먹은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이런 과정이 불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확신하다”고 소감을 남겼다. 또 최양업 신부는 자신의 차분한 성품을 바탕으로 철학과 신학뿐 아니라 다방면의 기량을 갈고 닦아나갔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어학이다. 김대건 신부도 라틴어, 프랑스어, 중국어 등을 구사하고 조선 관료들에게 큰 학자로 여겨질 정도로 지식을 쌓았지만, 최양업 신부의 성취는 그 이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842년 김대건 신부가 보낸 편지를 보면 파리 외방 전교회가 조선인 신학생들이 신학 공부에 집중하도록 프랑스어 교육을 중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때 최양업 신부는 프랑스어책을 읽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스승들은 최양업 신부가 프랑스어책을 읽더라도 신학 공부에 지장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최양업 신부는 어학능력을 발휘해 1847년에는 페레올 주교가 작성한 ‘기해·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프랑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했다. 라틴어로 번역된 이 문서는 교황청으로 보내졌고, 이 자료에 기록된 82명은 1857년 모두 가경자로 선포됐다. 또 최양업 신부는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가 추진한 「천주성교공과」와 「성교요리문답」 번역작업에도 참여했다. 중국어, 즉 한문에서 한글로 번역한 「천주성교공과」와 「성교요리문답」은 각각 100여 년과 70여 년 동안 한국교회의 공식 기도서와 교리서로 쓰였다. 음악에도 재능이 있었고, 이를 잘 키워나간 것으로 보인다. 최양업 신부를 비롯한 조선 신학생들은 칼르리 신부에게 음악 지식을 배웠다. 최양업 신부가 이 수업을 통해 어느 정도 음악을 익혔는지는 알기 어렵다. 하지만 이후 신부가 돼 사목하던 1858년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여러 개의 건반이 달린 풍금을 요청한 것으로 봤을 때, 최양업 신부는 악기를 사목에 활용할 만큼 연주 실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런 지식은 훗날 최양업 신부가 ‘천주가사’를 지어 신자들이 쉽게 교리를 익힐 수 있도록 돕는 밑거름이 될 수 있었다. 수리산성지 내에 있는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 복자 이성례와 아버지 성 최경환의 묘. 최경환 성인 생가터에 지어진 수리산성지 고택성당.

2024-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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