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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11) 경향신문 폐간

“정부 당국은 지난 4월 30일 밤 10시를 지난 경향신문사에 대해 ‘군정법령 제88호를 적용하여 발행 허가를 취소’한다는 통지서를 보냄으로써 폐간 조치를 취하였는데, 이 한 조각의 통지서로 인하여 이 나라가 자유를 얻은 이듬해인 1946년 10월 6일에 복간된 이래 13년간 다른 어떤 신문에 못지않게 민주주의를 수호하는데 열렬하였으며 민국의 수립과 반공전선에 빛나는 발자취를 남기고 발행부수 20만 수천부를 헤이게 되어 한국에서 둘째가는 대신문의 지위를 차지해 온 가톨릭의 일간지는 지령 제4324호를 마지막으로 뜻하지 못한 죽음을 당한 것이다.”(가톨릭시보 1959년 6월 10일 자 1면 사설 중에서) 천주교회가 운영하던 경향신문의 폐간은 한국 언론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필화사건입니다. 1959년이 시작되면서, 당시 84세의 이승만이 다음 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뜻을 밝히자, 경향신문은 “대통령이 잘못하면 국민이 갈아치울 수 있다”며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가뜩이나 이승만 정권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천주교회와 경향신문이 눈엣가시 같았던 터라, 정부는 결국 그해 4월 30일 군정법령 제88호를 적용해 경향신문 폐간 명령을 내리고 밤 10시를 기해 윤전기를 멈추도록 했습니다. 이승만 정권과 천주교회가 원래부터 이처럼 정치적 갈등을 겪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반공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바탕으로 교회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폭적 지지를 보냈었습니다. 하지만 6·25전쟁 발발 이후,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장기 독재 야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면서 교회는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유력한 신자 정치인인 장면(요한, 1899~1966) 총리에 대한 공공연한 지지를 표명했습니다. 장기 독재 꿈꾸던 이승만 정권, 교회 운영 언론사 탄압 가톨릭시보, 정부 조치 강력 비판…4·19 혁명 이후 경향신문 복간 장면 박사를 부통령으로 노기남(바오로) 대주교는 1969년 발간한 자신의 회고록 「나의 回想錄: 병인교난에 꽃피는 비화」(가톨릭출판사, 335쪽)에서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박사는 이런 난국(6·25전쟁)에서 민심을 수습하기보다 다가온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의 재선을 노리고 자유당을 조직하여 자기 세력 확장에 급급했다. ⋯ 이 박사의 독재는 점점 심해갔고, 한편 경향신문은 이 박사의 독재를 규탄하는 논조로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장(면) 박사는 이 박사의 정적(政敵)이 되고, 나도 이 박사에게 정치가가 아닌데도 야당 정치 주교로 낙인찍히고 말았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당시 시대 상황 속에서 교회는 신자 정치인에 대한 정치적 지지와 투표를 적극적으로 권고하는 일이 가능했습니다. 1956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교회는 장면으로 대표되는 가톨릭 신자 정치인들의 정치권 진입을 위해서 힘을 모았습니다. 천주교회보는 1956년 5월 6일 자 2면에서 ‘병든 민주주의를 바로잡기 위하여 신앙 깊고 학식 넓은 인격자 장면 박사를 부통령으로’라는 제목의 기사와 함께 장면 박사의 출마 인사와 공약을 사진과 함께 실었습니다. 그리고 맨 아래에는 “투표하실 때는 부통령 후보자 여덟 명 중에 첫 번째로 적혀 있는 두 자 이름 ‘장면’ 밑에 표를 찍으시기 바랍니다”라는 친절한 안내까지 덧붙였습니다. 이승만 정권의 교회 탄압 선거 결과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 장면 박사가 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자유당 대통령과 민주당 부통령이라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정권이 창출된 것입니다. 장면 박사의 부통령 당선은 기쁜 일이었지만 이승만과의 정치적 공존과 예상되는 대립에 대한 우려가 컸습니다. 그리고 우려는 현실로 나타나 부통령으로서 장면 박사의 정치적 삶은 유배 생활과도 같았습니다. 이승만 정권의 천주교회 탄압은 갈수록 심각해졌습니다. 정치 깡패를 동원해 1955년 대구대목구가 운영하던 매일신문사를 습격하고, 노기남 대주교를 탄핵하고자 1958년부터 1959년 사이 교황청에 압력을 넣었습니다. 신자 공무원들은 파면과 좌천의 불이익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서울대교구가 운영하던 경향신문을 폐간시켰습니다. 폐간 조치의 신속한 재고 요청 가톨릭시보는 폐간 조치가 내려진 4월 30일 이후 발행된 6월 10일 자 사설에서, 정부의 경향신문 폐간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바탕으로 정부 조치의 부당함을 조목조목 지적했습니다. 가톨릭시보는 1면 전체의 절반 가까운 지면을 할애한 이 사설에서 정부의 폐간 조치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비극적 사건임을 강조했고, 정부가 제시한 폐간 사유 다섯 가지는 전혀 설득력이 없다고 반박했습니다. "⋯ 오직 민주적 힘에 의해서 인도되고 교정되어야 할 것이지 관권에 의해 그 존재마저 말살되어야 할 성질의 것은 아니었으니, 민주주의를 지향한다는 대한민국 정부가 반공과 민주 언론 창달의 한 횃불이었던 유력한 일간신문을 자기 손으로 죽였다는 사실은 너무도 슬픈 일이다.“ 사설은 이어, 경향신문이 순수한 종교 신문은 아니었기에 이번 폐간 조치가 교회에 대한 직접적인 탄압은 아닐 수 있지만, “무신론적 공산주의라는 공동의 적을 대항해 반공의 대열을 지어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전우’인 가톨릭 교회와의 우호적 관계에 금이 가게 하는 유감스러운 처사”라고 지적했습니다. 정부가 경향신문을 폐간한 이유는 다음 다섯 개 기사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첫째는 1959년 1월 11일 자 사설 ‘정부와 여당의 지리멸렬상(支離滅裂相)’에서 스코필드 박사와 이기붕 국회의장 간의 면담 사실을 날조, 허위 사실을 보도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2월 4일 자 단평 ‘여적(餘適)’이 폭력을 선동했다는 이유, 셋째는 2월 15일 자 홍천 모 사단장의 휘발유 부정 처분 기사가 허위 사실이었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4월 3일 자에 보도된 공산 간첩 하모 씨의 체포 기사가 공범자의 도주를 도왔다는 점, 마지막으로 4월 15일 자 이승만 대통령의 회견 기사 ‘교안법 개정도 반대’가 허위 기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정부의 폐간 사유를 반박한 후 사설은 경향신문의 폐간이 영구적인 조치, ‘완전한 죽음’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정부가 이 결정을 하루속히 재고해 주기를 요청했습니다. 361일 만에 복간 경향신문은 정부의 폐간령에 대해 행정처분 취소 청구 소송과 가처분 신청을 냈고, 서울고등법원이 6월 26일 행정처분 효력 정지 가처분 판결을 내려 발행이 가능해졌습니다. 하지만 법원 판결 직후, 정부는 폐간 처분을 철회하는 대신 다시 무기한 발행 정지라는 행정 처분을 내려, 발행은 여전히 불가능했습니다. 이후 대법원 특별부는 연합부를 구성해 군정법령 제88호의 위헌 여부 심사를 헌법위원회에 제청키로 했습니다. 하지만 대법원 확정판결 전인 1960년 4·19 혁명이 발생했고, 대법원 연합부는 4월 26일 경향신문에 대해 행정처분 집행 정지를 결정했습니다. 이에 따라 경향신문은 정간 361일 만인 1960년 4월 27일 복간됐습니다.

2025-06-25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10) 한국에 주교 3명 동시 임명

1953년 휴전으로 남북 분단은 안타깝게도 기정사실이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남한과 북한은 같은 민족이면서도 가장 먼 나라가 되었고, 피를 나눈 형제들은 갈라진 채 서로를 그리워하며 오랜 세월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멈추고 사회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자, 남한의 교회는 황폐해진 조국에서 다시 교회를 복구하고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많은 교회 인사가 희생되었고, 할 일은 많았지만 일손은 부족했습니다. 다행히 외국의 선교사와 수도회의 지원은 큰 힘이 되었습니다. 특히 외국 교회의 물질적 지원은 남한 교회의 피해 복구에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가톨릭구제회(NCWC), 독일의 미세레올(Misereor), 오스트리아의 부인회 등은 한국 교회 재건을 위해 많은 도움을 제공했습니다. 남한 교회는 각고의 노력 끝에 교회를 재건하고 선교 활동에 힘쓰며 교세를 크게 확장시켰습니다. 이를 보여주듯, 1957년에는 한국에 주교 3명이 동시에 임명되었습니다. <가톨릭시보> 1957년 3월 14일 자는 이 반가운 소식을 1면 첫머리 박스 기사로 전했습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3월 7일, 지금까지 지목구(Prefect Apostolic)였던 한국의 전주교구(전북지구)와 광주교구(전남지구)를 대목구(Vicariate Apostolic)로 승격시키는 한편, 대구교구 관할의 감목대리구로 있던 경상남도지구를 독립 교구(대목구)로 설정한다고 발표하셨습니다. 동시에 이상 3개 교구의 주교를 임명하셨는데, 전주교구에는 김현배(발도로메오) 교구장을 감목으로 승격시키고 ‘아그비아’ 주교의 명의를 부여하며, 광주교구 감목에는 하롤드 헨리(玄) 현 교구장을 승진시키고 ‘코리다라’ 주교의 명의를 부여하셨습니다. 또한 신설되는 부산교구(경남지구)의 감목으로는 현 대구교구 주교좌성당 주임신부 최재선(요왕) 신부를 임명하고 ‘푸사렌시스’ 주교의 명의를 부여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성청 발표에 따라, 전주와 광주 양 교구는 1937년 4월 15일 지목구로 설정된 지 20년 만에 대목구로 승격되었고, 부산교구는 1954년 6월 18일부터 감목대리구로 발족하여 교구 설정을 준비한 지 약 3년 만에 독립 교구가 된 것입니다."(가톨릭시보 1957년 3월 14일자 1면) 1957년 전주·광주·부산대목구 승격·신설되며 각각 주교 임명 수도회·사도직 단체 성장…휴전 이후 급격한 신자 증가세 교세 신장 따라 교구 증설 이 기사에 따르면, 당시 비오 12세 교황은 광주지목구와 전주지목구를 대목구로 승격하는 동시에 부산대목구를 신설하고 각각 주교를 임명했습니다. 전주와 광주교구는 1937년 지목구로 설정된 지 20년 만에 대목구로 승격되었으며, 부산교구는 1954년 대구교구 산하 감목대리구로 설정된 후 3년 만에 독립 교구가 되었습니다. 한반도에 처음 교구가 설정된 것은 1831년의 일이었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그해 9월 9일 조선대목구를 설정하고, 초대 교구장으로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했습니다. 이후 조선교회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꾸준히 성장하여, 1911년 4월 8일 조선대목구는 서울대목구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대구대목구가 분리되어 설정되었습니다. 1920년에는 원산대목구가, 1927년에는 평양지목구가 설정되었으며, 1928년에는 황해도 감목대리구와 연길지목구가 설정되었습니다. 1931년에는 조선대목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서울에서 다채로운 기념행사가 열렸습니다. 이어 1937년에는 연길이 대목구로 승격되고, 전주지목구와 광주지목구가 설정되었으며, 1939년에는 춘천지목구가 새로 설정되었습니다. 6·25 전쟁 발발 이후인 1952년에는 왜관 감목대리구가 설정됐고, 1955년에는 춘천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되었습니다. 그리고 1957년에는 전주지목구와 광주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되고, 부산교구가 독립교구로서 대목구로 설정되었습니다. 이후 1958년에는 청주대목구와 대전대목구, 1961년에는 인천대목구가 새로 설정되었습니다. 특히 1962년에는 그때까지 존재하던 13개 대목구가 모두 정식 교구로 승격되고, 서울·광주·대구교구가 각각 대교구로 승격되어 3개 대주교 관구로 나뉘었습니다. 이로써 한국교회의 교계 체제가 온전한 틀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전후 신자 증가율 경이로워 이처럼 조선교회에 교구가 빠르게 증설된 것은 휴전 이후 급격한 신자 증가율을 반영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1953년 당시 남한의 신자 수는 약 17만 명이었으며, 1950년대 신자 증가율은 연평균 무려 16.61%에 달했습니다. 특히 1958년에는 전년도보다 24.18% 증가하는 경이로운 성장률을 보였습니다. 이에 따라 1961년 신자 수는 50만 명에 육박했으며, 1962년에는 50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1961년 말 기준으로 신자 수는 총 49만2464명이었고, 한국인 주교와 외국인 주교가 각각 4명, 몬시뇰은 4명이었습니다. 신부 수는 한국인 271명, 외국인 232명이었고, 수사는 한국인 51명, 외국인 45명, 수녀는 한국인 1,039명, 외국인 131명이었습니다. 대신학생은 330명, 소신학생은 323명에 이르렀으며, 본당은 261개, 공소는 1550개였습니다. 병원이 28개, 시약소 18개, 보육원 24개, 양로원 5개, 한센인 시설 3개였습니다. 교육기관으로는 유치원 62개, 초등학교 6개, 중학교 26개, 고등학교 20개, 직업학교 3개, 대학교 3개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1950년대 전후 한국 교회의 놀라운 성장에는 수도회의 역할이 매우 컸습니다. 북한에서 혹독한 박해를 받은 덕원의 성 베네딕도회는 경상북도 왜관에 정착했으며,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도 새로운 도약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예수회를 비롯한 여러 남자 수도회가 새로 설립되거나 한국에 진출했으며, 여자 수도회도 눈에 띄게 성장했습니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가르멜 여자 수도회,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 성가소비녀회 등 많은 수녀회가 자리를 잡고, 한국교회와 사회 발전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 활성화된 각종 신심 사도직 단체들의 봉사와 활동은 한국 교회가 성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특히 한국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신심 단체인 레지오 마리애가 1953년 전라남도 목포 산정동성당에서 처음 출발, 개인 신심 수양을 넘어서 선교와 교회 활동에 대한 신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냈습니다. 또한 전후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됐던 빈곤을 극복하기 위한 신용협동조합 운동은 이후 한국사회 안에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됩니다.

2025-06-18

[새 교황의 사목적 과제 – 신학자 70인에게 묻다] (4·끝) 무관심한 세계서 ‘평화’ 찾는 교회

가톨릭신문은 새 교황 레오 14세의 선출을 맞아 ‘새 교황의 사목적 과제 – 신학자 70인에게 묻다’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이끄는 교황의 가장 중요한 사목적 과제들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곧 가톨릭교회 전체의 소명을 드러내며 하느님 백성 전체가 그 소명의 실천에 어떻게 협력하고 투신할 것인지를 가르쳐준다. 총 4회에 걸쳐 새 교황의 사목적 과제와 하느님 백성의 나아갈 길을 살펴본다. 1. 시작하며 - 설문조사 결과 종합 2. 시노드 교회를 향해 - 시노달리타스의 실현 3. 교회는 쇄신돼야 -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의 실현 4. 세상과 교회 - 빈곤과 폭력을 넘어 그리스도의 평화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게서 영감을 받아 자신의 교황명을 선택했듯이, 레오 14세 교황은 19세기 레오 13세 교황에게서 이름을 따왔다. 레오 13세 교황은 노동과 자본의 문제에 대해 교회가 처음으로 공식 입장을 밝힌 사회회칙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를 반포했다. 사회교리, 세상과의 관계 방식 ‘레오 14세’라는 이름은 사회교리의 현대적 적용을 통해 새로운 세기의 도전에 응답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며, 그의 교황직 수행에 있어서의 우선순위가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나타낸다. 레오 14세 교황은 지난 5월 10일 추기경단 전체 회의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개혁 노선을 이어갈 것과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의 실현에 헌신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 교회는 또 다른 산업혁명과 인공지능(AI) 분야의 발전에 직면해, 인간 존엄성과 정의, 노동을 수호하기 위한 새로운 도전에 응답하고자 사회교리를 전 인류에게 선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교황으로서 과거의 교도권을 계승할 뿐만 아니라, 사회교리를 교회의 ‘세계와의 관계 방식’으로 여기며, 시대적 변화가 제기하는 새로운 물음에 신앙적으로 응답할 자세를 강조했다. 특히 그가 인공지능을 19세기의 산업혁명에 견주어 인공지능이 가져올 심대한 변화에 대응할 것을 요청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빈곤, 그리고 가난한 교회 설문에 응답한 70명의 신학자들은 시노드 교회 건설 다음으로 ‘빈곤, 경제적 불평등과 세계화 문제’(27명, 19.3%)를 새 교황이 해결해야 할 두 번째 중요한 과제로 지목했다. 여기에서 가난과 빈곤은 단지 절대적인 궁핍의 상태에 대한 우려에 그치지 않는다. 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지는 양극화, 부익부 빈익빈의 문제를 야기하는 경제적 ‘불평등’의 상태다. 이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적한 ‘무관심의 세계화’ 현상과 연관되며, 갈수록 공고해 지는 제도적, 구조적 사회악으로서, 신자유주의가 판을 치는 맹목적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을 드러낸다. 오늘날 빈곤의 문제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라는 이념과 경제 체제가 만들어내는 극단적 양극화의 문제로 인식된다. 안전하게 자신들의 땅에 정주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도는 이주민과 난민은 그 상징적 존재일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의 피해자들이다. ‘레오 14세’ 교황명으로 나타낸 주요 사목 방향 ‘사회정의 실현’ 빈곤·분쟁·자연 파괴 등 원인…관계 단절에 의한 위기로 파악 만연한 폭력과 그리스도의 평화 ‘폭력과 무력 분쟁 해소 및 평화 회복’(12명)과 ‘기후위기와 생태환경 보전’(8명)이 각각 4위, 5위를 차지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크라이나와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력 충돌을 포함해 현재 세계가 직면한 수많은 분쟁 상황을 ‘제3차 세계대전’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레오 14세 교황 역시 새 교황으로서 처음 맞은 주일인 5월 8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 발코니에서 평화를 위한 노력을 촉구했다. 교황은 이 자리에서, “다시는 전쟁이 없기를 바란다”며 전임 교황의 경고를 이어받아 “현재 우리는 ‘조각난 형태의 제3차 세계대전’을 겪고 있다”고 우려했다. 우리신학연구소 박문수(프란치스코) 소장은 “자칫 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할 수 있는 오늘날의 무력 분쟁들의 해소는 현 단계 인류 사회의 가장 시급한 과제”라며 “교회는 모든 수단을 동원한 이 비극적 상황을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가톨릭대학교 교수 방종우(야고보) 신부는 “현대 사회에 만연한 전쟁과 민족주의, 난민 문제 등 폭력적 상황은 교회의 최우선 과제”라며 “레오 14세 교황은 교황 선출 직후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라는 인사말로 시작해 시종 ‘평화’를 강조했다”고 말했다. 의정부교구 사목연구소 소장 강한수(가롤로) 신부도 분쟁이 끊이지 않는 현대 세계의 상황을 지적하고 “한반도의 종전을 통한 평화 구축과 강대국에 의한 무력 분쟁이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한다”며 “인류는 세상의 평화를 구축하는 가장 시급한 과제를 안고 있고 교회가 그 평화를 위해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후위기와 「찬미받으소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게서 자신의 교황명을 따온 프란치스코 교황은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통해 공동의 집 지구를 돌보는 일이 신앙인의 본질적 소명에 속하며, 인간 생태계와 자연 생태계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통합적 생태론을 일깨웠다. 특별히 기후위기로 인해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이 살아가는 공동의 집이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의 길로 굴러가고 있다는 절박한 인식은 그리스도인들의 투신을 요구한다. 신학자들은 생태 문제를 단순한 자연 보호라는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을 넘어, ‘관계’의 문제로 인식했다. 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 박용욱(미카엘) 신부는 빈곤, 분쟁, 자연 파괴 등을 모두 ‘관계의 단절과 그로 인한 부작용’으로 파악한다. 박 신부는 “관계를 잃어버리고 자본과 권력의 작동 기제에 소모된 현대인의 파편적인 삶인 인간 자신뿐만 아니라 생태 정의마저 파국으로 밀어 넣고 있다”고 지적했다. 서강대 신학연구소 홍태희(스테파노) 선임연구원은 “현시대의 절제 없는 인간 중심주의를 경계하며, 「찬미받으소서」로 상징되는, 모든 피조물을 향한 교회적 관심이 식지 않고 더욱 열매를 맺을 것”을 희망했다. 한국 외방 선교회 학술연구소 소장 김병수(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기업이나 국가는 모두 자본주의적 논리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기후위기 극복과 생태계 보호를 위한 노력은 교회가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25-06-11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9) 당대 지성인들의 개종 이야기

“나는 왜 가톨릭에로 개종하였는가 - 六堂 崔 베드루 南善 대개 가톨릭은 인류 문화의 종교 분야를 담당한 ‘이스라엘’ 민족으로 말미암아 계시되고 연마되고 완성된 교문(敎門)에 희랍의 철학과 라마(羅馬, ‘로마’의 음역어)의 조직력과 내지 근지사상(近至思想)의 정화까지가 융회(融會, 자세히 이해함) 합성(合成)한 것이다. … 저 조물주로서 천지만물 제일원인을 명시하고 신의 권능과 섭리로서 만물상호의 질서와 조화를 설명한 것이, 그 일단(一端)이다. 이만할진대 개인의 구령으로나 민족의 부활 지도력으로나 아무 부지(不知)함이 없지 아니할까. …나는 이에 유교 불교 모든 교문에 광구(廣求)하여 얻지 못하던 바를 이제 가톨릭에서 얻은 느낌이 났도다. 그리고 아울러 백여년 전 선정(先正, 선대의 현인)의 가톨릭 도입(導入)의 진정신(眞精神)에 신합명계(神合冥契, 신과 하나가 되어 통하는 상태)를 깨달아 못내 기뻐하는 자로다.” (가톨릭時報, 1955년 12월 25일자 5면) 6.25전쟁 이후 사회가 안정되면서 교회에서도 전쟁 이전에 조직됐던 각종 단체가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선교 활동도 활기를 띠었습니다. 1949년 조직됐던 한국천주교중앙위원회는 1952년 활동을 재개, 1955년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로 확대 개편됐으며 1959년에는 전국 교구장을 구성원으로 하는 사단법인으로 설립 허가를 받았습니다. 당대 지식인들의 개종기 흥미롭게도 당시 상당한 수의 저명한 지식인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했는데 이들의 개종기가 천주교회보에 자주 실렸습니다. 예컨대 감리교 총이사였던 정춘수(천주교회보, 1952년 11월 1일자), 육당 최남선(가톨릭시보, 1955년 12월 25일자) 등 당시 지식인들의 가톨릭으로의 개종은 상당한 화젯거리였습니다. 천주교회보는 1953년 3월 7일 제122호부터 ‘가톨릭新報’로 제호가 변경됐고, 다시 1954년 1월 15일 제137호부터 ‘가톨릭時報’로 변경됐습니다. 가톨릭시보 1955년 12월 25일 자는 5면 전면을 할애해 당대의 지성 육당 최남선 선생이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유를 상세하게 소개했습니다. 이 글은 원래 개종 직후인 12월 17일 자 한국일보에 발표된 것으로, 당대의 지성인답게 자신이 파악한 가톨릭 신앙의 요체를 설명하고, 불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당위성과 명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육당은 이 글에서 먼저 인생과 종교의 관계를 인체와 공기의 관계에 비유함으로써, 인간 삶에 있어서 종교가 불가분의 관계임을 전제합니다. 이어 계시로서의 신(神)의 개념을 제시하고, 인간이 신에게서 무한한 생명과 권능을 발견함으로써 신인합일의 경지에 도달하며, 그것이 종교의 구원 능력으로 인간 앞에 드러나게 된다고 말합니다. 불교 신자였던 육당 최남선…1955년 가톨릭으로 전경 개종 현대사 관통하며 지식인·정치인 등 귀의 이어져 종교적 구원은 개인 넘어 민족적 요청 육당은 나아가 종교적 구원은 개인의 구령인 동시에 국가와 민족의 공동체적 요구에도 적용되는 것이며 따라서 당대 한국 땅에서 요구되는 종교는 개인 영혼의 구원이기도 하지만 국가와 민족적 문제 해결에 있어서도 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처럼 육당은 개인과 공동체를 아우르는 종교적 이상으로부터 인간 삶과 종교 문제에 깊이 천착해왔으며 불교로부터 혼탁한 세상의 구제를 기대했으나 얻은 바가 없다고 토로합니다. 이어 한국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돌아보며 그 찬란한 빛을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 정신에서 찾았습니다. 육당은 또한 서양 근세의 문화, 그리고 그 바탕을 이루는 희랍의 정신 문화와 과학적 기초, 르네상스 이래의 인문 정신과 중세 스콜라 철학을 훑어보고 특히 2천 년 가톨릭교회가 보유하고 전하는 진리를 서양 문화의 진수로 파악했습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그는 정신적 빈곤을 느낀 조선이 서학의 전래로부터 받은 정신적 충격을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2천 년 역사를 영위해오면서도 여전히 흔들림이 없는 가톨릭교회에서 그토록 자신이 찾아 헤매던 바를 마침내 찾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개인적 구원을 넘어 조국의 내일을 위해서도 가톨릭을 선택해야 할 명분이 있음을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오늘날 이 정세에서 한국의 내일을 믿음직하게 맡길 곳이 이 가톨릭을 빼고 또 무엇이 있다 하랴! 1955년 11월 17일에 과거 50, 60년간의 종교적 체험을 청산하고 가톨릭에 입교하여 영세하니 이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개인적으로 구령(救靈)인 동시에 국가, 민족에 대하여는 조국 근대화의 밑바탕이라고 생각한다. 우둔한 나에게 이러한 식견을 열어주신 천주께 무한한 성총을 감사하면서 이 붓을 놓는다.” 시대 넘어선 지식인의 개종 열풍 육당 외에도 저명한 지성인들의 개종기가 가톨릭시보에 종종 실렸습니다. 전 감리교 목사였고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정춘수 씨의 개종기(가톨릭시보, 1952년 11월 1일 자)는 당시 지성인 개종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힙니다. 극작가인 이서구 씨도 6.25전쟁 체험 후 치유와 신앙적 필요에서 개종한다(1951년 12월 12일 자)고 밝혔습니다. 국문학자 서창제 씨는 1952년 8월 15일, 김홍섭 판사는 1953년 9월 26일 세례를 받았습니다. 김홍섭 판사는 특히 중죄수에 대한 교회의 활동과 교회사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사도법관(使徒法官)’으로 불렸습니다. 1955년 12월 24일에는 서울대 교수인 국문학자 이숭녕 박사, 이듬해인 1956년에는 훗날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국회의원 김대중 씨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민주당의 집단 개종’으로 불릴 정도로 제2공화국의 정치인들이 대거 입교했습니다. 그리고 1970년대와 1980년대는 이보다 더 많은 수의 저명한 지식인이 가톨릭에 입교했습니다. 이처럼 지성인들과 사회 지도층이 대거 가톨릭에 귀의한 동기는 시대별로 조금씩 다르게 나타납니다. 먼저 1950년대에는 해방의 감격과 전쟁의 참상을 겪은 이들이 예측할 수 없는 미래와 민족사의 굴곡 속에서 가톨릭교회에서 정신적인 의지처를 찾으려는 경향이 엿보였습니다. 1960년대에는 두 차례의 정치적 혁명과 극심한 사회 변화 속에서 삶의 의미를 궁구하려는 지적 구도 의식이 작용했습니다. 1970년대에는 억압적인 정치 권력과 경제 성장 지상주의 속에서 교회가 정의 구현과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는 모범적인 모습에 공감한 지식인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1970년대 이후에는 우리 사회의 큰 어른으로서 김수환 추기경의 지적인 면모와 잘 훈련된 신학 교육을 받은 가톨릭 성직자들의 지적 수준이 지식인과 대학생들의 호감을 얻은 면도 있습니다.

2025-06-11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8) 민족 상잔의 비극, 6·25전쟁

해방 후, 한국교회는 반공과 멸공을 지상 최대 과제로 삼고, 공산주의 세력을 ‘악마’로 규정하고, 이에 맞서는 전쟁이 시작됐다고 선언했습니다. 공산주의와의 싸움은 반그리스도교를 대항하는 십자군 전쟁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 4시. 선전포고도 없이 시작된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일제의 억압 속에서 고통을 받다가 간신히 해방된 우리 민족은 열강에 의해 강제로 분단된 것도 모자라 이제는 서로를 향해 증오에 찬 총부리를 겨눠야 했습니다. 1953년 7월까지 3년 1개월간 한반도에서 벌어진 이 야만의 전쟁으로 우리 민족의 인적·물적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온 나라가 황폐해졌고 수많은 소중한 생명이 희생됐습니다. 천주교회보는 전쟁 발발로 휴간했다가 1950년 11월호부터 다시 발행되기 시작했습니다. 회보는 1950년 11월 10일 자에서 ‘양을 위해 희생된 거룩한 목자들’이라는 제목으로, 전쟁 와중에 희생된 성직자들의 소식을 전하고 교구별로 희생자와 피해 상황을 보고했습니다. “교황사절 이하 세 위 주교를 납치당하는 잊지 못할 비분과 함께 적에게 잡히어 피살당한 성직자가 4명, 납치되어 끌려가신 주교와 신부와 수녀가 23명이며 교우 중 교회 단체의 간부가 13명, 행방불명된 성직자가 10명이다.”(천주교회보, 1950년 11월 10일) 남침으로 비롯된 전쟁…남·북한 교회 모두 심각한 타격 한국 교회, ‘반공주의’ 내세우며 ‘멸공 총궐기’ 주장 평화 조약 없이 휴전…민족 화해·일치 노력 아쉬움 남아 3년여의 전쟁으로 희생된 사람은 300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유독 민간인 희생자가 많았으며, 정확한 수치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최대 100만 명에 달한다고 추정됩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민간인 희생자 수보다도 많습니다. 극단적인 이념 갈등이 원인인 전쟁이었기에 서로 대치를 하다가 사상이 다르면 무작정 학살을 자행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교회의 경우에도 남한과 북한 교회 모두가 심각한 타격을 받았는데, 특히 북한 지역 교회 활동은 거의 정지됐습니다. 북한 교회는 전쟁 이전인 1949년부터 이미 타격을 입기 시작했습니다. 평양교구 홍용호 주교가 체포됐고, 함경남도 덕원의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 원장 신 보니파시오 주교도 체포돼 감옥에서 사망했습니다. 북한 지역의 성직자들은 사실상 전쟁 발발 전에 거의 모두 체포되거나 전쟁 중 살해되고 행방불명됐습니다. 대부분의 성당과 교회 기관은 폐쇄됐는데, 성 베네딕도 수도원은 1949년, 평양의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 수녀원은 1950년 해산됐습니다. 남한 교회 또한 대구교구 일부 지역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에서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 지도자들의 납치와 죽음으로 큰 인적 손실을 보았습니다. 당시 한국인 성직자 수는 모두 144명이었는데, 전쟁 전후에 체포돼 피살되거나 행방을 알 수 없는 한국인 성직자가 40명에 달해 4명 중 1명꼴로 희생된 셈입니다. 또 외국인 성직자와 수도자 대부분도 체포되었으며, 끌려간 153명 중 전쟁 후 돌아온 사람은 96명뿐이었습니다. 28명이 수감 중 사망했고, 17명이 살해됐으며, 12명은 행방불명으로 집계됐습니다. 이처럼 전쟁은 한국교회에도 심대한 타격을 입혔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교회는 의료봉사와 사회복지 활동을 통해서 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각종 순교 신심 운동과 성모 신심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해 공포와 불안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외국교회의 구호물자를 피난민에게 나눠주며 굶주리는 이들을 구제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깊이 성찰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맹목적인 반공과 멸공주의 그리고 같은 동족과의 전쟁에서 무력과 폭력을 통한 말살을 유일한 목표로 삼는 것이 과연 복음적인 것이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남과 북이 서로에게 가한 야만적인 처사와 그로 인해 생겨난 증오와 적개심은 실로 엄청났습니다. 하지만 교회마저 민족의 분열과 분단, 전쟁이 가져온 비극적인 참상 앞에서 증오와 대결을 유일한 길로 여긴 것은, 적어도 후대의 우리들이 생각할 때 복음의 정신과 배치되는 것은 아니었는가 하는 의구심입니다. 전쟁 후 발간된 천주교회보는 예외 없이 공산주의라는 악마와의 대결에서 무력으로 승리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1950년 11월 10일 2면에는 서울교구장 노기남 주교가 신자들에게 보내는 서한이 실렸습니다. 이 서한에서 노 주교는 무신론적 공산주의가 있는 한 세계에 평화 수립은 불가능하다며 모든 신자에게 “멸공에 총궐기하라”고 촉구했습니다. 노 주교는 당시 로마를 거쳐 파리에 머물다 전쟁 소식을 듣고 홍콩과 일본, 부산을 거쳐 서울에 돌아왔습니다. “형제상살의 비극의 원인은 오직 무신론 공산주의 침략자들의 마수였습니다. …저 악독한 공산주의자들도 이전에 천주를 믿고 그리스도 신앙을 가졌을 때는 가장 사랑할 민족이었으며... 한번 저 사상에 물들리자 저렇게 악독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의 진정한 회개를 위하여 기구와 보속하는 동시에 이 사상의 박멸을 위하여 총궐기할 것을 맹세합시다.”(천주교회보, 1950년 11월 10일) 같은 신문 4면, 편집부가 작성한 ‘전란의 교훈’이라는 글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안일에 흐르며 부패해지는 근성이 있으며 재난을 당해서 반발해서 향상함으로 전쟁도 가열한 자연계의 시련과 같이 인류를 타면에서 각성시키고 이를 이끌어 진진한 건설과 진보에로 향하게 하는 데 효과가 큰 것이다.”(천주교회보, 1950년 11월 10일) 민족적 비극의 참상이 되고, 분단의 원죄를 자아낸 전쟁이 각성과 진보로 나아가는, 정당하고 필요한 것으로까지 합리화되는 구절입니다. 무신론자들에 대한 철저한 말살의 신념을 확고히 한 교회는 같은 민족에게 총부리를 겨눠야 하는 참담한 전쟁에 대해, 새로운 탄생을 위한 종교적 수난과 시련으로 포장하기도 했습니다. 한 핏줄 한 가족들이 생이별해 그 그리움과 안타까움으로 눈을 감을 수조차 없는 비극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휴전 협정이 체결됐지만 이는 잠시 전쟁을 멈춘 것일 뿐, 평화 조약이 체결되지 않아 여전히 전쟁 상태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반공과 멸공보다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은 훨씬 더, 수십 년이나 지난 뒤에야 조금씩 우리 민족의 마음에 생겨나기 시작했으니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2025-06-04

[새 교황의 사목적 과제 – 신학자 70인에게 묻다] (3) 하느님의 백성 ‘교회’

가톨릭신문은 새 교황 레오 14세의 선출을 맞아 ‘새 교황의 사목적 과제 – 신학자 70인에게 묻다’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이끄는 교황의 가장 중요한 사목적 과제들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곧 가톨릭교회 전체의 소명을 드러내며 하느님 백성 전체가 그 소명의 실천에 어떻게 협력하고 투신할 것인지를 가르쳐준다. 총 4회에 걸쳐 새 교황의 사목적 과제와 하느님 백성의 나아갈 길을 살펴본다. 1. 시작하며 - 설문조사 결과 종합 2. 시노드 교회를 향해 - 시노달리타스의 실현 3. 교회는 쇄신돼야 -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의 실현 4. 세상과 교회 - 빈곤과 폭력을 넘어 그리스도의 평화 교회는 항상 쇄신의 요구를 받는다. 교회의 역사는 끝없는 자기 쇄신의 여정을 보여준다. 교회사의 어느 시기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과 그분이 가르친 복음에 비추어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에게 주어지는 쇄신과 변화의 요청에 부응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중세시대 수도원 운동, 현대 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열어준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가장 주목할 만한 교회의 쇄신 노력이었다. 교회 쇄신에 대한 ‘긴급 요청’ 새 교황의 사목적 과제에 대한 가톨릭신문의 조사에서 신학자들은 오늘날 교회가 자기 쇄신의 긴급한 시대적 요청에 직면해 있다는 데 공감했다. 특히 응답자들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교황직 수행이 교회 안팎의 시대적 요청에 응답하는 쇄신의 여정을 열었고, 새 교황 레오 14세는 전임 교황의 이 쇄신 여정을 이어갈 것이고, 이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조사에서 ‘교회 쇄신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새 교황의 가장 중요한 사목적 과제라고 응답한 신학자는 모두 18명이다. ‘시노달리타스 구현과 시노드 정신에 따른 교회 건설’(35명)과 ‘경제적 불평등과 세계화 문제’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응답이다. 하지만 시노드 교회 건설과 교회 쇄신,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 실현’(5명)이 같은 목표를 지향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교회 쇄신의 요청과 필요성은 모든 응답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교회 쇄신의 노력이 가장 긴급하게 요구되는 영역이 ‘평신도의 소명과 역할 강화’, ‘여성의 교회 내 지위와 역할 확대’와 ‘직무사제직 문제(사제 독신제와 여성 사제 등)’ 등임을 고려하면, 모든 응답자가 교회 쇄신의 요청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교회 내 보수와 진보의 통합과 일치’ 문제 역시 교회 쇄신의 영역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교회 쇄신의 아이콘 프란치스코 교황 재위 12년은 그야말로 획기적인 쇄신의 길을 보여준 기간이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교회가 하느님 자비를 드러내는 얼굴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고, 이는 교회 개혁과 쇄신으로 이어졌다. 프란치스코 교황 선출 당시 가톨릭교회는 교회의 세속화, 성직자 성 학대 추문 등으로 사회적 위신과 도덕적 권위를 모두 상실할 위기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는 쇄신의 긴급한 과제를 염두에 두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바탕으로 ‘더는 미룰 수 없는 교회 쇄신’을 강조했다. 교회 쇄신은 모든 면에서 요구되는 것이지만 당시 교회 상황 안에서 두 가지 중대한 개혁이 요구됐다. 하나는 서구 교회 전체를 뒤흔든 성직자 성 학대 추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교황청의 부패한 재정 운영이었다. 물론 이와 관련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혁신적인 새 법과 제도의 틀을 마련함으로써 ‘교황직과 보편교회 중앙 조직들’의 개혁과 쇄신의 기초를 놓았다. 교회 쇄신의 방향성은 이론의 여지 없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명확하게 제시한 ‘교회는 하느님 백성’이라는 친교의 교회론에 바탕을 둔다. 그는 자신을 ‘세례받은 이들 중 한 명’으로서 ‘로마의 주교’라고 칭하며 다른 주교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협력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전에는 남성 고위 성직자에게만 유보됐던 교황청 각 부서와 교회의 여러 직무에 여성을 포함한 평신도들의 참여를 대거 확대했다. 그러한 쇄신 노력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총회는 교회 쇄신과 동의어라고 할 수 있는 ‘시노달리타스’를 주제로 열렸다. 고위 성직자들의 포럼처럼 열렸던 이전 시노드들과 달리 이번 시노드는 3년 동안 교구와 본당 단계에서부터 시작, 하느님 백성의 폭넓은 의견을 실질적으로 경청하는 단계를 강화했고, 특히 시노드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을 포함한 평신도와 수도자들이 투표권을 갖고 온전한 대의원으로 참여했다. 그리스도교 신앙 핵심 근거한 교회 전반의 근본적 개혁 필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제시한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 조명 전방위적 쇄신의 요청 이번 조사에서 신학자들은 교회의 모든 영역에서 쇄신이 요구된다는 점에 공감했다. 서강대학교 박현준(아우구스티노) 대우교수는 “문화적 변동에 따른 교회 전반 즉 교회 운영과 조직 구조, 교의 해석, 신학교 교육 등을 개혁해야 한다”며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에 근거한 근본적 쇄신 없이는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고, 특히 후속 세대와의 신앙 단절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고 말했다. 수원가톨릭대학교 기획처장 한민택(바오로) 신부는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적한 ‘영적 세속성’ 내지 ‘교회의 세속주의화’가 만연해 있다”며 “한국교회 현실에 대한 진단과 대책 마련, 이를 위한 전 신자의 회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여성, 평신도의 역할 확대 신학자들이 특별히 주목한 쇄신의 영역은 여성을 포함한 평신도의 역할 강화다. 광주가톨릭대학교 안준상(유스토) 교수는 “평신도 사도직의 다양성과 세속적 전문성이 거룩한 사도전승 위에 서 있는 보편교회의 교도권에 더 적극 협력할 때 새천년기의 복음 선포가 풍성한 내용과 더불어 더 견고한 일치의 방향성을 지닐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우(에드몬드) 한국천주교 평신도단체협의회 평신도사도직연구소장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세상 속에서 복음을 살아가는’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재발견”이라며 “평신도의 소명을 고무하고, 그 역할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교회의 분위기가 변화돼야 하고 그에 걸맞은 구조적 전환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평신도 신학자 김연희 박사(마크리나·벨기에 루뱅대학교 교의신학)는 “사제 수가 급감하는 추세 속에서 평신도 신학 교육 및 신앙 강화 노력을 통해 평신도들이 교회 안에서 더 주체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과감한 제도적 뒷받침을 해야 한다”며 “특히 평신도 신학자들을 사제들에 대한 보조적 역할이 아닌, 학자로서 인정하고 교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신학연구소 조현진(알렉시오) 연구위원은 “여성의 교회 내 지위와 역할 확대는 바람직한 교회 문화 변화의 추동력이 될 수 있다”며 “남성 중심의 비민주적인 교회 운영을 바로잡기 위해서 소극적이고 주변적인 역할과 위치에 머물러 있는 여성의 지위와 역할 확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평신도의 소명과 역할 확대는 성직주의로 비판받는 직무사제직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가톨릭일꾼 한상봉(이시도로) 편집장은 “성직자 권위주의는 교회 안에서 가장 오랜 문제로 지적돼 왔다”며 “성직자의 일방성이 평신도의 무기력한 선교 노력을 낳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교회가 다시 활력을 찾고 세상을 성화하기 위한 여정에서 평신도 역량이 아주 중요하다”며 “시노달리타스나 동반사목에 대한 관심이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2025-06-04

[새 교황의 사목적 과제 – 신학자 70인에게 묻다] (2) 함께 가는 교회로

가톨릭신문은 새 교황 레오 14세의 선출을 맞아 ‘새 교황의 사목적 과제 – 신학자 70인에게 묻다’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이끄는 교황의 가장 중요한 사목적 과제들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곧 가톨릭교회 전체의 소명을 드러내며 하느님 백성 전체가 그 소명의 실천에 어떻게 협력하고 투신할 것인지를 가르쳐준다. 총 4회에 걸쳐 새 교황의 사목적 과제와 하느님 백성의 나아갈 길을 살펴본다. 1. 시작하며 - 설문조사 결과 종합 2. 시노드 교회를 향해 - 시노달리타스의 실현 3. 교회는 쇄신돼야 -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의 실현 4. 세상과 교회 - 빈곤과 폭력을 넘어 그리스도의 평화 설문조사에서 신학자들이 새 교황의 가장 중요한 사목적 과제로 꼽은 것은 ‘시노달리타스 구현과 시노드 정신에 따른 교회 건설’이다. 70명 중 절반인 35명이 시노드 교회 건설만이 교회가 참된 하느님 백성이 되는 유일한 길이라고 응답했다. 광주대교구장 옥현진(시몬) 대주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노달리타스의 구현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해오신 일을 지속하는 일입니다. 이제 경청하는 교회의 모습은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동안 하느님 백성이 무엇을 원하는지 묻지 않고 가르치려고만 해왔습니다. 같이 걸어가면서 함께 묻고 답해야 합니다. 교회가 쇄신하려 하지 않고 머물러 있으면 더 이상 희망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이제는 세상의 흐름에도 발맞추어 갈 수 있는 쇄신의 각오가 필요합니다.” 신학자들이 시노달리타스를 교황의 가장 중요한 사목적 과제로 선택한 이유는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프란치스코 교황의 쇄신 노력이 집약적으로 담긴 것이 시노달리타스이고 레오 14세 교황은 그 개혁 노선을 이어가겠다고 공언했다. 둘째, 시노달리타스는 교회 쇄신의 다른 이름이며, 원리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이다. 이는 다른 사목적 과제들의 상위 개념이다. 셋째, 시노달리타스는 교회를 넘어 세상과 자연과의 친교로 나아간다. 전쟁과 평화, 빈곤과 불평등, 기후 위기 등 세상의 모든 불의와 불합리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서도 시노드 교회의 목표는 실현돼야 한다. 넷째, 여전히 시노달리타스의 실현으로 나아가는 여정은 멀다. 대부분의 지역교회 안에서는 여전히 시노달리타스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실천의 실마리를 풀어내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새 교황 레오 14세는 시노달리타스의 온전한 실현을 위해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신학자들의 생각이다. 시노달리타스, 프란치스코 교황 개혁의 집약 시노달리타스라는 용어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5년 세계주교시노드 설립 50주년 기념 연설에서 언급한 단어로 이후 교회의 생활과 활동의 기본 원리로서 강조됐다. 특히 시노달리타스를 주제로 2021년부터 3년 동안 열린 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총회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교회 쇄신 노력의 정점이자 종합이었다. 교구와 본당 단위부터 하느님 백성 전체의 의견을 묻고, 경청과 대화, 식별의 과정을 거쳐 두 차례의 본회의 끝에 시노드 최종문서가 작성됐다. 교황은 이 문서를 명시적으로 승인함으로써 그 자체를 교황의 교도권적 문서로 삼고, 앞으로 3년 동안 각 지역교회에서 시노달리타스 구현을 위한 각고의 노력을 다하고 그 성과를 나누도록 했다. 그럼으로써 이제 보편교회 전체가 시노달리타스를 구체적으로 교회 생활 안에서 실천하는 이행 단계를 본격화하고 있다. 시노달리타스, 교회 쇄신의 명확한 ‘로드맵’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과 일치 교회 내부로만 한정짓지 않고 세상과 친교 도모해야 구체적 변화·성과 요원…일선 본당 관심부터 이끌어야 프란치스코 교황의 유산 신학자들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핵심적 쇄신 과제가 시노달리타스에 담겨 있다며 새 교황이 그 과제를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의정부교구 사목연구소장 강한수(가롤로) 신부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제삼천년기의 교회에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시노드 여정이고, 시노달리타스가 교회의 본질이고 존재 방식이라고 말했다”며 “시노드 교회 건설이 새 교황의 중요한 과제”라고 말했다. 우리신학연구소 경동현(안드레아) 연구실장은 “프란치스코 교황은 시노달리타스라는, 교회 쇄신의 명확한 로드맵을 제시했다”며 따라서 “레오 14세 교황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2028년까지 예정된 후속 조치 일정을 충실히 이행하며 교회가 지속적으로 쇄신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시노달리타스는 쇄신이다 신학자들은 시노달리타스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교회 쇄신이 필요하며, 이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과 일치된다고 말했다. 나아가 시노달리타스와 교회 쇄신, 공의회 정신의 실현을 다른 모든 사목적 과제들을 포괄하는 상위개념으로 인식했다. 우리신학연구소 박문수(프란치스코) 소장은 “시노달리타스는 공의회 정신의 실현이고 교회 쇄신을 바라는 신자들의 기대와 희망을 함축하는 개념”이라고 밝혔다. 우리신학연구소 황경훈(바오로) 선임연구원은 “시노드 교회는 평신도 역할 확대, 교회 개혁, 보수와 진보의 통합, 주교 단체성의 시노달리타스로의 통합 등의 과제를 모두 포괄한다”고 말했다. 서울대교구 대신학교장 민범식(안토니오) 신부 역시 “교회 쇄신과 시노드 교회 건설은 동일한 목표를 지칭한다”며 “교회가 복음 정신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이 곧 ‘쇄신’이며 ‘시노달리타스의 구현’”이라고 전했다. 수원가톨릭대학교 기획처장 한민택(바오로) 신부는 “시노달리타스는 교회 쇄신의 핵심 축”이라며 “아직 초기 단계이지만 지속적으로 시노드 교회 건설을 위한 양성에 매진한다면 교회가 변화될 것을 확신한다”고 했다. 세상과의 친교로 나아가기 한편 신학자들은 시노달리타스의 구현을 교회 내 친교의 과제로서만이 아니라, 세상과 자연과의 친교의 관계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로 인식했다. 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 박용욱(미카엘) 신부는 “하느님과 단절되고, 자연 및 사람들 서로 간의 관계를 상실한 현대 사회에서, 교회는 삼위일체의 관계를 드러내는 친교의 공동체를 이뤄야 한다”며 “교회가 삼위일체의 친교에 뿌리를 두고, 관계 속의 인간이 누리는 충만함을 체험하는 곳이 될 때, 인류와 모든 생명에게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 김선필(베드로) 선임연구원은 “시노드 교회란 일차적으로 교회 내적 쇄신을 의미하지만, 교회는 세상과도 함께 걸어가야 한다”며 “이 시대가 교회에 요구하는 것은 곁에 있어 주는 것, 곧 세상의 아픔을 자기 것으로 공감해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전히 요원한 시노드 교회의 여정 신학자들의 응답에 의하면, 시노드 교회로의 여정은 여전히 첫걸음에 지나지 않고, 그 성과는 기대와 희망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러한 현실이 오히려 새 교황이 시노달리타스를 가장 중요한 사목적 과제로 삼아야 하는 당위성이 된다.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박진수(요한 사도) 교수는 “시노드 여정을 시작한지 오래 지났지만 구체적인 변화와 성과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고 평가했다. 수원가톨릭대학교 대학원장 겸 교학처장 정진만(안젤로) 신부는 “각 지역교회의 개별적 상황들 안에서 시노달리타스의 정신을 실현하려는 노력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새 교황님의 관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가톨릭일꾼 한상봉(이시도로) 편집장은 “가장 개혁적인 사람이 프란치스코 교황이라고 할 만큼 지역교회 안에서 개혁된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없고, 시노달리타스 역시 일선 본당에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현실”이라며 “교회의 모든 계층 안에서 개혁의 의지를 체감하고 시노달리타스를 긴급한 과제로 인식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2025-05-28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7) 한국 천주교회의 반공주의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던 우리 민족은 다시 한번 민족적 비극을 만나게 됩니다. 남과 북에 각각 소련군과 미군이 진주하여 열강의 다툼 속에 놓인 한반도에서 6.25전쟁이라는 민족 상잔의 참극을 맞게 됩니다. 1949년 4월 1일 자로 16년 만에 복간된 「천주교회보」도 전쟁이 발발하면서 6개월 동안 다시 휴간됩니다. 그리고 11월 10일 자로 다시 발행된 814호에서 사설을 통해 반공주의를 가톨릭 신자의 마땅한 자세로 선언합니다. “우리는 만천하 가톨릭 신자에게 또한 만천하 애국 동포에게 대하여 다시 한번 반공정신을 강조하지 아니치 못하겠다. 1. 무신론은 우리의 적이다. 어떠한 이름을 가장하던지 천주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의심하거나 또는 무관심하는 모든 주의사상은 우리의 적이다. 2. 유물론은 우리의 적이다. 물질을 과도히 존중하고 과학을 너무나 과대평가하는 자 역사를 물질 방면으로만 고찰하고 인간의 자유를 한경의 지배에 예속시키고자 하는 자들이 사람의 영혼을 무시하고 진리의 영원성을 부인하므로써 가장 새로운 이치를 깨달은 듯이 체계의 사조를 혼돈케하는 모든 주의사상은 우리의 적이다..... 위에 말한 몇 가지 가장 중요한 정신으로 공산주의 및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국가를 비판하여 본다면 우리는 명백히 알 바, 그들에 대한 철저한 말살의 신념이 생길 것이다. 지금 우리가 북한 괴뢰와 싸우는 근본 이유가 곧 이것이다. 동족에게 대한 그리스도교적 사랑 때는 이미 지났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정의가 앞서야겠다.”(「천주교회보」 1950년 11월 10일 자 사설) 「천주교회보」는 해방과 함께 복간됐던 「가톨릭청년」, 「경향잡지」 등과 함께 한국천주교회의 반공주의를 열렬하게 선전하는 매체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공산주의에 대한 경계와 비판적이고 적대적인 태도는 역대 교황과 교황청의 입장이었습니다. “종교는 아편”이라는 카를 마르크스의 명제대로 공산주의는 종교를 사회 변혁의 장애로 여겼습니다. 역대 교황들은 공산주의의 위험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경고해 왔는데, 1891년에 회칙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을 반포한 레오 13세 교황은 공산주의가 발호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병폐에 대한 지적과 함께 공산주의자들의 폭력 혁명 노선에 대해 분명한 반대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1917년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국가가 탄생하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탄압이 현실화됩니다. 이에 비오 11세 교황은 계급투쟁과 사유재산제의 완전 철폐를 주장하는 공산주의를 비판했고, 무신론적 공산주의를 ‘전염병’이라고까지 표현했습니다. 비오 12세 교황(1939~1958)은 가장 강력한 반공주의자 교황이었습니다. 그는 러시아를 성모 성심에게 봉헌하고 소련의 ‘붉은 군대’에 대항하는 의미에서 파티마 성모의 뜻을 따르는 ‘푸른 군대(파티마의 세계 사도직)’를 승인해 러시아의 회개와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하도록 권고했습니다. 한국교회 강한 반공주의 노선, 천주교회보 등 언론이 앞장서 탄압으로 고통받은 북한교회 외면한 역사적 과오 아쉬워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때는 이처럼 공산주의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비판이 거센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한국 교회 역시 공산주의에 대한 보편교회의 비판적 입장을 따르게 됩니다. 하지만 한국교회가 본격적으로 반공주의를 명확히 표명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 소련이 북한 지역을 점령하고 이에 따라 교회가 큰 피해를 보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북한 지역의 공산주의 정권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3월 토지개혁을 전격 시행합니다. 이미 적지 않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천주교회는 큰 피해를 보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함흥 덕원에 소재하고 있던 성 베네딕도회가 수도원 내 정원과 일부 건물 대지 외의 모든 토지를 몰수당했습니다. 이로 인해 생계 유지 자체가 어려운 절박한 사정에 내몰리게 됩니다. 「경향잡지」는 당시 상황을 전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덕원을 바라보면 역시 점점 더 곤궁에 빠지고 있다. 수도원 전체와 대소신학생 47인은 모두 식량난으로 굶주리고 있는 형편이다. ⋯가톨릭과 악마의 전쟁은 벌어졌다.”(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47, 「경향잡지」 90-91쪽) 이제 한국 천주교회는 공산주의 세력을 ‘악마’라고 부르면서 악마와의 전쟁이 시작됐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러한 반공주의 노선에 앞장섰던 것은 교회가 펴내는 매체들이었습니다. 특히 해방 후 1947년 4월부터 속간된 「가톨릭청년」이 대표적입니다. 1950년까지 실린 기사 가운데 반공과 관련된 기사가 절반은 넘습니다. 「가톨릭청년」은 특히 조선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양대 진영의 투쟁이 벌어지는 현장이라며 그 의미를 세계사적으로 확장하고 바티칸과 소련의 대리전의 모습을 띠고 있다고 묘사했습니다. 이러한 논리는 「천주교회보」의 여러 사설과 기사에서도 거의 유사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공산주의와의 싸움은 순교자의 정신으로까지 이어집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반공 투쟁을 강조하면서 “일반 신자들에게 순교 정신을 가지고 반공 투쟁에 나서기를 호소”했습니다. 「가톨릭청년」은 ‘볼셰비키적 공산주의를 배격함’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암흑의 권력, 천주를 저주하는 마귀가 천주께 항전하였으니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은 우리 모든 신자뿐만 아니라 천주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일치단결하여 최후의 승리를 천주께 의탁하며 그 보호를 믿고 이 도전에 응전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가톨릭청년」, 1947년 11월호, 6-11쪽) 교회의 반공주의 노선은 남한 지역뿐만 아니라 북한 지역에도 전해졌고 북한 공산주의 정권과 교회의 적대적 관계와 충돌은 더욱 극심해졌습니다. 특히 북한 정권의 교회에 대한 탄압은 점점 더 강화됐습니다. 사제와 수도자들이 연이어 체포되거나 추방됐고 교회 건물이 폐쇄되고 재산은 몰수됐습니다. 남한 교회에서, 천주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반공 투쟁은 다른 모든 일체의 가치를 앞섰습니다. 반공과 멸공주의에 대한 반성은 역사적으로 훨씬 먼 후대에 와서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성찰되기 시작했습니다. 시대적인 한계를 고려하더라도 천주교회의 맹목적인 반공주의는 민족 분단의 현실에 대한 반성, 북한 교회의 고통에 대한 외면,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노력의 부족이라는 측면에서 비판적 성찰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침내 발발한 6.25 전쟁과 그로 인한 결과로써의 민족 분단은 지금까지도 우리 민족의 가장 뼈아픈 상처로 남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은 이른바 ‘침묵의 교회’가 됐습니다.

2025-05-28

“새 교황 최우선 과제는 시노달리타스 실현”

한국 천주교회의 신학자들은 시노달리타스의 실현을 제267대 교황 레오 14세의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사목적 과제로 꼽았다. 이는 가톨릭신문이 새 교황 레오 14세의 선출을 계기로 실시한 ‘새 교황의 사목적 과제 - 신학자 70인에게 묻다’ 설문조사 결과에서 드러났다. 조사는 한국교회 신학자 70명을 대상으로, 네이버폼에서 작성된 온라인 설문조사를 통해 5월 8일부터 18일까지 실시됐다. 응답자들은 ‘새 교황의 사목적 과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17개 응답 문항 중 두 가지를 선택하고, 그 배경과 이유를 기술했다. 응답자 70명 가운데 절반인 35명(25%)이 ‘시노달리타스 구현과 시노드 정신에 따른 교회 건설’을 새 교황의 가장 중요한 사목적 과제로 꼽았다. 이들은 시노달리타스의 실현을 프란치스코 교황이 시작한 교회 쇄신과 개혁의 핵심 과제로 인식했으며, 교회가 참된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달성해야 할 목표로 봤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빈곤과 경제적 불평등, 세계화 문제(양극화, 난민과 이주민 등)’를 선택한 응답자는 27명(19.2%)으로 두 번째로 많았고, 이어 ‘교회 쇄신을 위한 지속적 노력’이 18명(12.9%), ‘폭력과 무력 분쟁 해소 및 평화 회복’이 12명(8.6%)으로 나타났다. ‘기후위기와 생태환경 보전’과 ‘세속주의 및 상대주의에 대한 대응’은 각각 8명(5.7%)이 선택했다. 특히 높은 응답률을 보인 항목들은 대부분 프란치스코 교황이 역점을 두고 추진해온 사목 방향이나 교회 정책과 긴밀히 연관돼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재임 기간 내내 난민과 이주민 등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을 몸소 실천해 왔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 지역의 분쟁 등 잇따른 국제 갈등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노력했으며,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통해 통합적 생태론을 제시함으로써 자연 생태와 인간 생태를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기후위기 등 환경 파괴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이들이 가난한 이들임을 강조했다. 한편 신학자들은 이러한 과제들을 해결해 나가기 위해 교회의 지속적인 쇄신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데 공감했다. 이들은 특히 이러한 개혁 과제들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바탕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하며, ‘평신도의 소명과 역할 강화’, ‘여성의 교회 내 지위 확대’, ‘공의회 정신의 실현’, ‘직무사제직 문제’ 등에 대한 깊은 관심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2025-05-21

[새 교황의 사목적 과제 – 신학자 70인에게 묻다] (1) 교회가 나아갈 방향은?

가톨릭신문은 새 교황 레오 14세의 선출을 맞아 ‘새 교황의 사목적 과제 – 신학자 70인에게 묻다’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이끄는 교황의 가장 중요한 사목적 과제들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곧 가톨릭교회 전체의 소명을 드러내며 하느님 백성 전체가 그 소명의 실천에 어떻게 협력하고 투신할 것인지를 가르쳐준다. 총 4회에 걸쳐 새 교황의 사목적 과제와 하느님 백성의 나아갈 길을 살펴본다. 1. 시작하며 - 설문조사 결과 종합 2. 시노드 교회를 향해 - 시노달리타스의 실현 3. 교회는 쇄신돼야 -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의 실현 4. 세상과 교회 - 빈곤과 폭력을 넘어 그리스도의 평화 이전 조사 대비 ‘기후 위기 시대’ 생태 문제 주요 과제로 부상 가톨릭신문은 2005년 베네딕토 16세 교황 선출, 8년 뒤인 2013년 프란치스코 교황 선출에 즈음해 신학자 100인을 대상으로 같은 조사를 실시했다. 2005년 조사에서는 ‘서구 문화와 전통적 그리스도교 가치의 충돌’과 ‘대화와 증거를 통한 선교’의 중요성이 가장 많이 지적됐다. 전자는 서구 사회에서 그리스도교적 가치와 윤리가 더 이상 기꺼이 수용되지 않는 상황을 보여준다. 후자는 그리스도인이 소수인 지역에서 더 절실한 과제로, ‘말씀’보다 ‘증거’가 더 설득력을 갖는 현대인의 심성, 그리고 개방적 ‘대화’와 삶을 통한 ‘증거’가 강조되는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다. 2013년 조사에서는 문항이 보다 세분화되었고, 국제 평화와 기후위기 등 사회적 가르침에 대한 항목들이 중요하게 다뤄졌다. ‘세속주의와 상대주의에 대한 대응’이 최우선 과제로 꼽혔으며,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의 실현과 빈곤·세계화 문제가 그 뒤를 이었다. 교황청의 재정 비리와 불법적 자료 유출 등에 따른 ‘교황청의 쇄신’도 중요한 과제로 지적됐다. 성직주의의 폐해, 여성 부제직을 포함한 직무사제직 문제, 평신도 특히 여성의 더 활발한 교회 참여, 생명과 가정 윤리 문제 등은 두 차례 조사에서 모두 지속적으로 지적된 과제들이다. 기후위기 시대에 요구되는 생태 문제에 대한 통합적 접근도 주요 과제로 부상했다. 조사 결과, 총 17개 과제 제시돼 이번 조사에서도 “새 교황의 사목적 과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두 가지 응답을 중복 선택하고, 그 배경과 이유를 기술하도록 했다. 총 17개 항목이 제시됐으며, 이전 항목들에 더해 세계 평화, 시노달리타스, 교회 쇄신 관련 항목이 추가되었다. 조사 결과, 70명 중 절반에 해당하는 35명(25%)이 ‘시노달리타스 구현과 시노드 정신에 따른 교회 건설’을 가장 시급한 사목적 과제로 꼽았다. 뒤를 이어 ‘빈곤과 경제적 불평등, 세계화 문제(양극화, 난민과 이주민 등)’가 27명(19.2%), ‘교회 쇄신을 위한 지속적 노력’이 18명(12.9%), ‘폭력과 무력 분쟁 해소 및 평화 회복’이 12명(8.6%)으로 나타났다. ‘기후위기와 생태환경 보전’ 및 ‘세속주의와 상대주의에 대한 대응’은 각각 8명(5.7%)이었다. 시노달리타스와 자비 실현 등 프란치스코 교황 개혁 과제들 이어갈 것 요청 빈곤·경제적 불평등, 기후 위기, 보수·진보 통합 등 주요 사목 과제로 떠올라 시노달리타스의 구현 응답률이 가장 높았던 항목들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강력히 추진해온 교회 개혁과 하느님 자비의 표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2021년부터 3년간 진행된 ‘시노달리타스’를 주제로 한 세계주교시노드는 프란치스코 개혁의 정점이었다. 주교회의 의장 이용훈(마티아) 주교는 “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못지않은 열정으로 세계주교시노드를 개최했다”며, “시노드 과제 실천만이 교회가 본질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며, 세상 안에서 성사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광주대교구장 옥현진(시몬) 대주교도 “이제 경청하는 교회의 모습은 되돌릴 수 없다”며, “하느님 백성 모두의 목소리를 듣고 함께 걸어가야 한다”고 답했다. 정진만 신부(안젤로·수원가톨릭대학교 대학원장 겸 교학처장)는 “시노달리타스 구현은 아직도 요원한 과제”라며 “각 지역교회의 고유한 상황 속에서 이를 실현하기 위한 새 교황의 각별한 관심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빈곤, 세계화, 전쟁의 문제들 두 번째로 높은 응답을 받은 과제 역시 프란치스코 교황이 강조했던 핵심 주제다. 그는 평생을 통해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관심을 드러냈고, “사람을 죽이는 자본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으며, 난민과 이주민의 고통을 위로했다. 분쟁과 폭력으로 수많은 이들이 희생되고 있는 현실의 개선 역시 시급한 사목 과제로 지목됐다. 김선필(베드로) 서강대 신학연구소 선임연구원은 “현대 세계의 위기, 특히 전쟁의 원인은 대부분 빈곤과 경제적 불평등에 뿌리를 두고 있다”며 “교회는 세상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며 분명한 가르침과 실천을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통해 통합적 생태론을 제시했으며, 이는 지구와 피조물을 보존하는 일이 곧 가장 가난한 이들을 위한 실천이기도 하다는 깊은 책임의식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계속돼야 할 쇄신의 여정 ‘교회의 쇄신’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응답자 모두가 동의했다. 사목적 과제로 제시된 모든 항목은 교회 쇄신의 목표이자 과정이고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응답자들은 쇄신의 기준으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을 가장 큰 지표로 제시했다. ‘평신도의 소명과 역할 강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 실현’, ‘여성의 교회 내 지위와 역할 확대’, ‘직무사제직 문제(사제 독신제, 여성 사제 등)’ 등은 각각 3~5명의 응답률을 보였다. 이 항목들은 모두 ‘하느님 백성의 교회론’에 입각해 있으며, 교회 안 모든 계층이 고유한 직무를 지니고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의 사명을 수행한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이 응답 항목들은 사실상 공의회 정신 실현이라는 같은 방향의 사목 과제를 지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지역교회의 자율성 확대’, ‘주교단의 단체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 ‘신앙과 문화의 토착화’, ‘종교 간 대화와 그리스도교 일치’ 등에 대한 응답은 거의 없었다. 또한 이전 조사에서 중요하게 여겨졌던 ‘가정과 생명 윤리 문제(낙태, 피임, 동성애 등)’와 ‘대화와 증거를 통한 선교’는 이번 조사에서는 상대적으로 후순위로 밀려났다. 통합의 리더십 특히 눈에 띄는 항목은 ‘교회 내 보수와 진보의 통합과 일치’가 6명(4.3%)의 응답을 얻은 점이다. 비율은 높지 않지만, 이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개혁이 보수층의 저항을 불러온 체험을 반영한다. 레오 14세 교황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개혁 노선을 이어갈 것이라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재위 기간 중 드러났듯, 보수층의 우려와 저항도 깊이 고려해야 한다. 새 교황에게는 교회 내 통합과 일치를 이끄는 지혜로운 통치가 더욱 요구되고 있다.

2025-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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