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오늘은 연중 마지막 주일이며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고백한다는 말은 곧 우리가 그분이 다스리시는 나라의 시민임을 뜻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왕으로 고백하는 오늘, 수난의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하지만 이로써 우리의 왕이 수난하는 왕, 생명까지 내어주는 왕, 심지어는 죽기까지 사랑하는 왕이라는 사실을 천명합니다. 공관복음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다스림’의 비유가 요한복음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두 번 언급되기는 하지만(3,3.5), 요한복음은 십자가라는 왕위에 오르시는 예수님을 강조하며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통치권을 드러내는 것에 보다 초점을 맞춥니다. 또한, 공관복음에서 강조하는 하느님 나라는 미래의 일이지만 이미 현재에서 실현되는 것으로 그려지는 반면 요한복음에서는 시간적 표현보다는 공간적 표현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진리와 사랑이 머무는 하느님의 나라는 ‘위’로, 어둠과 거짓, 미움이 지배하는 영력은 ‘아래’, 흔히 ‘이 세상’으로 표현됩니다. 이 두 세계는 공존하지만 서로 다른 가치의 의미를 지녔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라는 문장 속 ‘당신의 나라’를 ‘어디에 있는’ 장소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당신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 본질에 대한 말씀으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재판은 여러 곳을 오가며 여러 사람을 통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재판받으시는 장면은 의외성으로 가득합니다. 누가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재판을 받는 사람은 오히려 평온한 데 비해 재판하는 사람들이 더 당황하고 당혹스러워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재판받는 사람의 죄보다 오히려 재판하는 사람들의 악함이 두드러져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빌라도의 재판에서도 이러한 특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재판받는 사람이 빌라도인지 아니면 예수님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재판하는 빌라도는 피고인 예수님의 죄목을 알지 못합니다. 도리어 유다인의 고발로 자신 앞에서 있는 예수님께 “당신은 무슨 일을 저질렀소?”라는 질문을 던지기까지 합니다. 그는 재판장이면서도 재판을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피고가 어떤 죄목으로 고발되었는지조차 제대로 모르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신원과 그분이 하신 일에 관한 질문 두 가지를 던집니다. 먼저,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라는 질문으로 예수님의 신원을 알고 싶어 합니다. 재판 과정에서 세 번이나 동일한 질문(18,33.37; 19,39)을 반복할 정도로 빌라도의 관심은 온통 그것에 몰두하여 있습니다. 이 질문으로 인해 ‘예수님의 왕권’이라는 주제가 재판 전체의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의 질문에 대한 답을 정치적 의미가 아닌 신학적 의미로 풀어내십니다. 직접적인 답변보다는 질문을 되돌려주는 방식을 택하여 빌라도가 자신이 한 말의 진실성을 바라보도록 하십니다. “그것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하여 너에게 말해 준 것이냐?”(18,34) 이렇듯 죄수가 재판장을 신문하는 묘한 아이러니가 질문과 뒤엉켜 인상적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제 빌라도는 신원에 대한 질문에서 그분이 하신 일로 질문을 바꿉니다. “당신은 무슨 일을 저질렀소?” 이 질문은 독자에게 그분이 주신 생명의 가르침과 생명의 활동을 반추하도록 이끄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처벌받아야 할 범죄가 아니라 사랑의 행위였음을 독자가 스스로 깨닫도록 만듭니다. 최고 정치 권력을 대변하는 상징적 인물인 빌라도를 통하여 예수님의 진정한 본성과 그분의 사명이 생생하게 계시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명패에 쓰인 ‘유다인의 왕 나자렛 예수’ 역시 그분의 신원을 드러냅니다. 마지막으로 빌라도는 자신이 하였던 첫 번째 질문을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18,37) 요한복음 저자는 이 구절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언어로 왕이신 예수님의 신원과 그분의 사명을 강력히 피력합니다. 그와 동시에 빌라도를 단죄하고 있습니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18,37)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렇게 우아한 방법으로 권력 때문에 진리에 눈멀고 거짓에 기울었다며 빌라도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온 누리의 임금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는지, 그리고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지 묻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며 살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왕을 섬기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물으시는 것 같아 괜스레 고개가 떨구어집니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그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성서 주간을 시작하는 오늘, 말씀 안에 머물며 다양한 목소리로 우리를 지배하는 거짓 왕들을 몰아내고 참 왕이신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글_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주님의 날, 표징을 알려준 요엘 예언자

‘메뚜기도 유월이 한철이다’라는 속담의 유래는 메뚜기는 여름에 한창 활동을 하기 때문에 나왔다. 누구나 어느 한 시기에만 번성할 뿐, 영원하지는 않으니 겸손하라는 속뜻을 담고 있다. 때로는 자기 세상을 만난 듯 마구 날뛰는 모습을 가리키기도 한다. 메뚜기는 벼의 잎을 먹으려고 몰려오는데 벼잎이 성장하는 시기는 정해져 있다. 메뚜기의 서식처는 다양하지만 대부분 열대우림의 저지대, 초원지대에 가장 많이 산다. 최근에도 아프리카 여러 나라와 인도, 브라질 등에서 메뚜기떼가 농작물에 큰 피해를 줬다. 2004년 가을에는 서아프리카에서 엄청난 메뚜기 떼가 농작물의 3분의 1을 먹어 치우는 막대한 피해를 줬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도 신라 시대, 조선 시대에 메뚜기(풀무치)의 습격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한 무리가 1000억 마리라면 상상이나 될까. 흥미로운 것은 메뚜기는 고단백 음식으로 레위기에는 메뚜기는 먹을 수 있는 벌레로 등장한다.(레위 11,22 참조) 메뚜기떼가 앞에 등장하는 장면 때문인지 메뚜기 하면 요엘서가 떠오른다. 요엘은 이스라엘에서 흔한 이름이다. 정작 요엘서에는 오직 “프투엘의 아들”(요엘 1,1) 외에는 그에 대한 단서가 될 내용은 전혀 없다. 요엘 예언서를 읽어보면 그가 경신례에도 밝았던 예언자이며, 뛰어난 시인이었음이 추측할 수 있다. 요엘은 옛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인용하면서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여 주님의 날에 이루어질 심판과 구원을 힘차게 선포했다. 주님의 날에 이루어질 주님의 응답과 축복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결국 요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있다. 기원전 5세기경, 남유다는 예루살렘 성전도 재건하고 성벽도 쌓고 유다교도 형성하여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사람의 성향이 그렇듯 안정기에 들어가면 안주하려는 경향이 많아진다. 이러한 때에 요엘은 메뚜기 재앙과 가뭄을 언급하며, 먼저 사제들에게 단식하고 기도할 것을 요청했다. 주님의 날이 가까웠고 전능하신 분께서 보내신 파멸과 멸망이 순식간에 들이닥치듯 다가온다는 것이었다.(요엘 1,15 참조) 성경에서 재앙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역사에 개입하시는 표징으로 나타난다, 요엘은 당시 상황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이 정신 차려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이 누구신지 바로 알도록 촉구한 것것이다. 요엘은 하느님께서 심판도 하시지만, 만민에게 영을 불어넣으시고 그 심판의 날을 ‘구원의 날’로 바꿔주신다는 그분의 약속을 전하며 희망을 전해준다. 온 마음으로 하느님께 회개하는 마음으로 돌아가 그분을 신뢰하며 그분 안에 머물 때,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의 삶의 순간에도 많은 표징, 즉 사인(sign)을 본다. 야구 게임에서 보면 사인을 못보고 잘못 이해해서 아웃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우리 인생도 똑같다. 사업이나 인간관계 등 교훈이 되는 표징을 지나쳐 인생에 큰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11-24

[성경 속 기도 이야기] 하느님을 신뢰하는 보잘것없는 이들: 루카복음서의 기도

성전에서 시작해서(1,8-10) 성전에서 기도하면서 끝나는(24,53) 루카복음서는 예수님을 기도하는 분으로 제시하고, 그분을 따르는 우리도 용기와 겸손을 가지고 기도하도록 이끕니다. 십자가 위에서 벌어진 그분 삶의 마지막 순간은 기도 자체입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 마르 15,34; 시편 22,19)라는 시편 말씀을 예수님의 입에 올리는 마태오나 마르코와 달리 루카는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23,34)와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23,46; 시편 31,6)를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 소개합니다. 기도하는 예수님 모습 제시한 루카 용서하고 화해하는 기도 드러내며 죽음도 봉헌의 의미로 달리 해석 같은 루카가 저술한 사도행전에서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59-60) 등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같은 내용을 입에 올리며 죽음을 맞이하는 스테파노는 그분의 첫 증인입니다. 분명 시편을 잘 모르는 이방인 독자들은 “왜 저를 버리십니까?”라고 외치는 예수님이 ‘과연 하느님의 아들이실까’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에, 루카는 다른 시편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을 과감하게 달리 해석합니다. 그에 따르면 예수님은 하느님의 부재중에 사람들 멸시를 받으며 처절한 외로움 속에 인류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 아니라,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용서하고 당신에게 죽음을 허용하시는 하느님과 화해하는 기도 중에 봉헌의 죽음을 맞이하십니다. 기도하시면서 죽으시고 죽으시면서 기도하시는 루카의 예수님은 믿는 이들의 모범이십니다. 루카는 우리에게 기도에 관한 뛰어난 비유 세 가지를 들려줍니다.(끊임없이 간청하여라: 11,5-8;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18,1-8;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 18,9-14) 끊임없는 간청의 자세를 이야기하는 첫 번째 비유는 바로 앞에 나오는 주님의 기도(11,2-4)를 해설합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지엄하게 드러나는 하느님께서 비유에서는 친구의 청을 귀찮게 여기는, 퉁명스러우면서도 마지못해 그에 응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지니십니다. 비슷한 모습이 과부와 재판관이라는 그다음 비유에서도 나옵니다.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로이 여기지 않는 어떤 재판관의 모습과 하느님이 비견됩니다. 과부가 자신의 권리를 되찾아 달라고 귀찮을 정도로 매달리는 재판관은 자칫 잘못하다가는 과부가 자신을 때릴 수도 있다는 염려에서 그에 응합니다. 항구한 신뢰와 용기가 기도에 필요합니다. 과부와 세리가 지닌 용기와 겸손 하느님 향한 따뜻한 신뢰가 핵심 어린이 같은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지만 겸손도 필요한데, 이것을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라는 세 번째 비유가 이야기합니다. 성전 앞에 나아가 자신의 남다름을 내세우며 장황한 감사기도를 바치는 바리사이에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둘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는 세리가 대비됩니다. 과부와 세리, 그들이 지닌 용기와 겸손을 연결하는 것은 잘난 사람이 아니라 보잘것없은 이들이 하느님 아버지께 품는 따뜻한 신뢰입니다. 기도에 대한 가르침은 어린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으로 마무리됩니다(18,15~17). 루카는 기도하는 이들이 부모 앞의 어린이들처럼 절대적인 신뢰를 지녀야 한다는 것을 기도의 골자로 가르칩니다. 우리도 늘 자신의 사정을 하느님께 아뢰고 그분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시리라 기대합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들어지지 않을 때 어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내가 깨닫지 못하는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하느님께서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적절한 때에 주리시라 신뢰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권고하십니다.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로마 12,12)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고, 우리를 그러한 삶에 초대하십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1-24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제2경전은 외경(外經)이다?

2005년 「성경」이 발행되기 전까지는 「공동번역 성서」를 썼습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성경」과 목차가 조금 다른데요. 몇몇 성경들을 ‘제2경전’이라는 목록에 따로 모아둔 점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개신교 신자분들은 이 제2경전을 ‘외경'(外經)이라 부릅니다. 외경이라 하면, 한자로는 ‘성경(經)의 바깥(外)’이라는 의미인데요. 그렇다면 제2경전은 성경이 아닌 걸까요? 아니면 성경이더라도 조금 덜 중요한 성경인 걸까요? 제2경전은 토빗기, 유딧기, 마카베오기 상·하권,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 그리고 에스테르기 일부와 다니엘서 일부에 해당하는 성경입니다. 이 성경들은 구약성경에 해당하는데요. 초대 교회 시기에는 두 종류의 구약성경이 있었습니다. 먼저 유다인들이 사용하던 히브리어로 된 성경과 여러 지방으로 흩어져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다인들이 사용하던 ‘칠십인역’이라 부르는 그리스어 번역본 성경이었습니다. 그리스어 성경을 ‘칠십인역’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성경 번역에 얽힌 전설 때문입니다. 기원전 3세기 경 당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이스라엘에서 70명(혹은 72명)의 번역가를 선출해 구약성경을 번역했는데, 이들이 각각 번역한 성경들이 토씨 하나 다르지 않고 똑같이 번역됐다는 전설입니다. 그런데 이 칠십인역에는 히브리어 성경에는 없는 성경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지금 우리가 제2경전이라고 부르는 부분입니다. 히브리어를 모르는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했던 사도들은 히브리어를 모르는 이들을 위해 편지나 복음서를 그리스어로 작성했습니다. 이때 구약성경도 인용했는데 대부분이 칠십인역이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그리스어 생활권에 살았기 때문에 칠십인역이 구약성경의 기준이 됐고 제2경전을 성경으로 사용했습니다. 교부이신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그리스도교 교양」 등의 책에서 성경 목록에 제2경전도 포함시켰습니다. 하지만 제2경전은 히브리어 성경이 없다는 점에서 여전히 논란이 있었습니다. 원래 없던 성경을 후에 만들어낸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었지요. 특히 개신교가 갈라질 당시 개신교는 이 의혹을 내세우며 제2경전을 외경으로 보고 성경에서 제외했습니다. 반면 가톨릭교회는 1546년 트리엔트공의회에서 「수용해야 할 성경과 성전에 관한 교령」으로 교회가 오래 전부터 성경으로 받아들여 온 제2경전을 포함한 신·구약성경을 정경(正經)으로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1947년에 흥미로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 사해 인근 쿰란동굴에서 기원전 2세기에서 서기 1세기 사이에 쓰인 히브리어 구약성경 사본들이 발견된 것인데요. 이때 발견된 성경 중에는 그동안 토빗기나 집회서 같은 제2경전들도 있었습니다. 제2경전도 히브리어에서 번역된 성경이라는 것이 밝혀진 순간이었습니다. 제2경전은 외경이 아니라 다른 성경과 마찬가지로 정경입니다. 그렇기에 미사 전례 중에도 제2경전 역시 봉독됩니다. 교리면에서도 제2경전에는 천사, 연옥 등 교회의 여러 교리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제‘2’경전이라 불린다고 중요도도 두 번째라고 생각하면 안 되겠습니다.

2024-11-24

[교회 상식 팩트 체크] 미사의 공식 신경은 사도 신경이 아니다?

우리는 주일미사마다 신앙의 핵심을 표현한 신앙고백문, 신경(信經)을 바치며 우리 신앙을 고백합니다. 신경이라 하면 먼저 ‘사도 신경’을 떠올리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 사도 신경을 외우고, 또 많은 본당에서 미사 중 사도 신경을 바치곤 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참 친숙한 신경입니다. 그런데 미사의 공식 신경은 따로 있다는 사실 아시나요? 바로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입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325년 니케아 공의회와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통해 결정된 교회의 공식 신경입니다. 사도 신경과 비교해 보셨다면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 더 ‘길다’는 점을 발견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냥 긴 것이 아닙니다. 조금 더 곰곰이 살펴보신다면 다른 내용들은 대체로 비슷한 반면, ‘예수님’과 ‘성령님’에 관한 내용이 특별히 더 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공의회인 니케아공의회와 그 다음 열린 콘스탄티노폴리스공의회가 열릴 당시에는 예수님과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니케아공의회에서는 예수님이 “성부와 한 본체로서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라는 점을, 콘스탄티노폴리스공의회에서는 성령님이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시”는 주님이라는 점을 천명하면서 우리의 신앙, 바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분명히 고백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 믿음은 가톨릭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교의 믿음이기에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다른 그리스도교들에서도 고백하는 신경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이렇듯 “초기의 두 세계 공의회에서 나온 신경”인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 “큰 권위를 가진다”고 가르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95항) 우리 신앙선조들이 사용하던 「천주성교공과」의 미사경의 경우에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만 수록돼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미사 경본에도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 먼저 나옵니다. 그리고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대신에, 특히 사순 시기와 부활 시기에는, 이른바 사도 신경 곧 로마교회의 세례 신경을 바칠 수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신경은 중요하지 않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신경은 사도들의 신앙을 충실히 요약한 신경인데요, 사도들의 숫자처럼 12가지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교회는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의 사도좌가 있고 그곳에서 공적인 결정을 내렸던 로마교회가 간직하고 있는 신경”이라고 사도 신경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95항) 사도 신경 역시 오랜 역사 속에서 교회에 내려온 중요한 신경입니다. 그러니 미사 중 사도 신경을 사용하는 것도 좋은 선택입니다. 그러나 미사의 공식 신앙고백문은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라는 점을 기억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교회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 단지 길다는 이유로 사도 신경을 선택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합니다.(‘새 미사전례서 총지침(2002)에 따른 간추린 미사전례지침’)

2024-11-17

[말씀묵상] 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 신앙 언어, 유일하고도 불완전한 도구 신앙은 체험에서 출발합니다. 체험이 신앙이 되려면, 어떤 의미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해석된 체험이 이야기(발화)되어, 신앙은 전해지고 기억이 재생산됩니다. 신앙은 체험이고, 체험의 해석이고, 여러 사람이 빚어낸 해석의 나눔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필수적인 도구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언어입니다. 사람은 언어를 통해 체험을 포착하고, 해석하고, 발화하며, 보존합니다. 언어는 체험과 기억을 담아내는 그릇이므로, 본질이 아니라 도구(수단)입니다. 하지만 신앙행위는 언어 없이 벌어지지 않으므로 본질적 도구입니다. 게다가 언어는 다른 도구가 없는 유일한 도구이지요. 신앙에 있어 언어는 대체 불가능한 도구입니다. 그러나 유일한 도구라고 해서 완전한 도구는 아닙니다. 언어는 불완전합니다. 성서에는 첫 번째 신앙인들의 하느님 체험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읽는다고 그들의 체험이 우리의 체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언어는 시대에 얽매여 있지요. 수천 년 전 사람들은 삶의 모습과 사고방식이 우리와는 완전히 달랐고, 언어에는 시대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언어를 아무리 잘 번역한다고 해도, 우리에게 바로 와닿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 묵시문학, 예수님 시대 사람들의 언어 서설이 길었습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들은 유다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종말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큰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마르 13,24-25) 이런 투의 언어를 ‘묵시문학’이라고 합니다. 묵시문학은 기원전 2세기 유다인들이 만든 문서입니다. 성전(聖殿)의 파괴, 기근, 전염병, 하늘의 징조, 전쟁과 반란 등은 모두 유다교 묵시문학의 주제들이었습니다. 첫 번째 신앙인들은 묵시문학에 아주 익숙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종말에 대해서 말할 때, 당연히 묵시문학의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묵시문학의 표현들을 가져다 쓰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언어의 이면에는, 혼란한 시대를 살아간 첫 번째 신앙인들의 체험도 있습니다. 기원후 66년, 유다인들은 로마제국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 전쟁은 4년 뒤, 완전한 패배로 끝이 났습니다. 로마제국은 예루살렘을 폐허로 만들어버립니다. 예루살렘의 성전도 처참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첫 번째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 그리고 자신들을 박해하던 유다인들의 몰락을 보면서 세상의 종말이 다가왔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던 ‘그날과 그 시간’을 떠올렸던 것이겠지요. 그렇게 그들은 물려받은 언어로 신앙을 표현했고, 자신들의 체험과 믿음을 우리에게 전하고자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들이 생각한 파국 이후에도 일상이 이어졌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들이 남긴 언어를 더듬어가며 그들의 체험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람들은 어두워진 해와 빛을 잃은 달을 보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일식과 월식은 지루한 일상에 소소한 재미를 주는 일이지요. 혜성의 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종이 위에 말라붙은 문자가 시간과 공간을 건너 다리 놓고자 합니다만, 그 사이는 너무나도 멉니다. 어제의 사람들이 두려움으로 외치고 있으나 우리는 알아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언어는 그들의 시대에는 분명히 잘 작동했을 겁니다. 그러나 2000년이 지나고 지구 반대편에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잘 작동하지 않습니다. 등불에 마음을 기대놓고 펜으로 이야기를 수놓아가는 복음사가는, 2000년 후 지구 반대편에서 이야기를 마주할 우리를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고, 우리의 질문을 도모하지 않았을 겁니다. ■ 일상과 성찰: 신앙언어가 담아야 하는 것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그곳에는 무화과나무가 지천으로 널려있고 어디서나 잘 자랐다고 하지요. 유다인들은 그 그늘에서 쉬고 어울리며, 그 열매로 허기를 달랬을 겁니다. 말하자면, 무화과나무는 일상 그 자체였던 셈이지요. 구약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무화과나무’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은 일상과 자신을 성찰하라는 말로 읽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것은 복음사가의 일이기도 했습니다. 복음사가는 당대를 읽고, 그런 읽기에서 나온 성찰을 언어에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그들의 언어가 낡고 빛바랬을지라도, 시대를 읽고 신앙을 성찰한 그들의 노력은 여전히 우리에게도 모범이 됩니다. 우리는 그들의 언어가 아니라, ‘언어활동’을 본받아 우리 시대의 신앙을 찾아 나갈 수 있겠지요. 우리의 일상을 유심히 읽으며 우리의 모습을 성찰하는 이런 순간을 ‘묵시문학적’ 순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은사 신부님이 소임하시는 성당에 가는 길에는 예배당 건물을 그대로 살린 카페가 있습니다. 지을 때는 하느님의 집이었겠으나, 팔 때는 교회건물이었을 그 카페를 보면서, 오늘의 종교현실을 들여다보고 우리의 내일을 가늠합니다. 이웃 교구는 점점 고령화되고 소멸되어 가는 농촌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웃 교구의 형제들과 만나, 공동체의 상황과 고민을 나눌 때면, 그들은 이미 교회의 미래를 살고 있다고 느낍니다. 제가 찾은 그런 순간들이 여러분에게도 있겠지요. 많은 신앙인들이 일상에서 길어낸 깨달음을 살아있는 언어에 담아 고백하기를 희망합니다. 그런 언어들이 쌓여 대화가 된다면 좋겠습니다. 그런 언어로 담론을 엮어가는 곳에서, 파국 너머의 신앙이 싹틀 수 있다고 믿습니다. 글 _ 전형천 미카엘 신부(대건중학교 교목실장)

2024-11-17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아버지 다윗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죽은 압살롬 왕자

‘삼일천하’로 불리는 갑신정변(甲申政變)은 1884년 12월 4일 김옥균과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홍영식 등 젊은 개화당(開化黨)이 청나라에 의존하는 수구당(守舊黨)을 몰아내고 개화정권을 수립하려 시도한 일종의 쿠데타이다. 우정국(郵政局) 낙성식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켜 당시 문제를 일으키던 민 씨 친인척들과 부패 관리들을 처형하고 축출하였다. 12월 6일에 개화당은 중국 내정간섭 배제, 문벌과 신분제 타파,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국민들의 평등권 확립, 조세 제도변화 등의 혁신적인 정책을 내놓았다. 당시 갑신정변이 실패한 근본적인 이유는 혁명에 대한 민중들의 이해가 적었고 일본을 너무 쉽게 믿고 많이 의존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족의 중흥을 위해 구습의 봉건체제를 변화를 시도했던 혁명이라는 점에서 실패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은 긍정적 가치를 두고 있다. 주동자 김옥균은 외국에서 살해당했고 그의 머리는 종로거리에 걸렸다. 한 영화의 대사 생각난다. “성공하면 혁명, 실패하면 쿠데타 아닙니까!” 다윗의 아들인 압살롬은 위로 두 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한 명은 장남 암논이었고, 둘째는 어릴 적에 죽었다. 압살롬의 왕위 계승 서열은 암논 다음이었다. 그런 둘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암논은 압살롬의 친동생이자 자신의 이복동생인 타마르에게 흑심을 품고 있었다. 하루는 꾀병을 부려서 병간호를 위해 찾은 타마르를 자기 침실에 끌어들여 몹쓸 짓을 했다. 한참 후 사랑이 식은 암논은 타마르를 쫒아냈다. 전후 사정을 알게 된 압살롬은 암논을 처치할 복수를 계획했다. 다윗 왕도 암논이 타마르에게 한 사건의 전모를 듣고 노발대발했으나 정작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는 않았다. 다윗 자신도 부하의 처인 밧 세바를 빼앗아 아들을 징계할 도덕적인 명분이 없었다고 생각했을까? 시간이 지나도 암논에 대한 징계는커녕 오히려 다윗의 마음이 암논에게 기우는 것을 눈치챈 압살롬은 자신의 부하들을 시켜 암논을 살해했다. 그 사건으로 압살롬은 국외로 나가 3년간 타향 생활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이스라엘로 압살롬이 돌아왔지만 다윗은 문전박대했다. 시간이 자꾸 흐르자 초조해진 압살롬은 자기의 세력을 늘리기 시작했다. 다윗에게 불만을 품던 상황에서 압살롬이 반란을 드디어 일으켰다, 압살롬은 큰 피해 없이 예루살렘을 점령한다. 압살롬의 책사였던 후사이라는 인물은 사실 다윗의 첩자였는데 그의 말을 듣고 추격을 멈추는 오판을 저지르고 말았다. 결국 전투 경험이 많은 다윗의 정예병들은 압살롬의 군대를 완패시켰다. 출정하는 부하 요압에게 다윗은 압살롬이 반란자지만 죽이지는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후환이 있을 거라 판단한 요압은 부하 열 명과 함께 압살롬을 죽였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다윗은 그의 이름을 부르며 크게 통곡했다. 압살롬의 다윗에 대한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다른 이스라엘 지파들의 불만 세력들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11-17

[성경 속 기도 이야기] 기도의 길잡이인 마태오(마태 6,5-8; 18,19-20)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님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는 산상설교(5~7장)의 한가운데 주님의 기도를(마태 6,9-13) 배치하고 그의 서두로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제시합니다. 마태오는 이렇게 기도를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5-6)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는 가르침은 그리스도인들의 기도 특성을 드러내면서, 당시 유다교의 지도층이었던 바리사이들의 기도와 구분을 시도합니다. 비슷한 시기 비슷한 환경에서 쓰인 디다케는 다음과 같이 기도를 가르칩니다. “너희의 단식은 위선자들의 단식과 같아서는 안 된다. 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한다. 하지만 너희는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해야 한다. 그리고 복음에서 주님께서 명하셨던 것처럼 너희는 위선자들처럼 기도하지 마라.” 여기서 단식과 기도 등 외적으로 표현되는 신앙의 실천이 사회 안에서 신앙 공동체의 신원을 확인하는 수단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마태오 공동체는 바리사이들이나 디다케가 쓰인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달리 다른 이들과 구분되는 행동을 통해서 사회 안에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던 듯싶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으로부터 마태오 복음서는 기도를 개인의 것으로 변화시키고 유일하신 분과의 친밀함을 기도의 핵심적인 특징으로 제시합니다. 사람의 마음속을 보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과의 대화가 기도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허풍을 떨거나 잘난 체를 하며 자신을 내세우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쓸데없는 일입니다. 입에는 오르지만, 마음에는 없는 기도는 의미도 재미도 없고, 그런 기도를 오래 할 수도 없습니다. 아버지를 신뢰하는 자식과 같이 그분을 신뢰하는 이만이 하느님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직한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몇 사람이 있어야 예배가 성립되는가?’라는 질문을 두고 많은 토론을 벌였습니다. 정통 유다교에서는 남자 10명을 정족수로 여깁니다. 여기에 마태오는 다른 기준을 제시합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중요한 것은 숫자나 양이 아니라 하느님과 나 사이, 또 공동체 구성원 사이의 관계가 지닌 질입니다.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가 튼튼한 공동체, 보이지 않게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주님께 기도하는 공동체, 그 공동체 가운데 현존하시는 그분이 바로 기도가 이루어질 정족수입니다. 골방에 들어가서 혼자 기도하는 것, 아니면 둘이나 셋이 모여 기도하는 것, 아니면 주일에 공동체가 모여 성대히 미사를 거행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맞습니까? 하느님을 푸근한 아버지로 느끼는 이에게는 이 모두가 맞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자신의 소원을 앞세우는 이들에게, 채무자에게 빚을 갚으라고 독촉하는 빚쟁이처럼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압박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이들에게 그중 어떤 것도 큰 의미는 없을 것입니다. 글_신정훈 미카엘 신부 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1-17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남북 이스라엘 분열의 책임이 있는 르하브암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의 폭력성으로 혁명가의 길을 가게 됐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는 아버지의 폭력으로 13세에 가출을 했고 평생 애정 결핍에 목말랐다고 한다. 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마오는 교육은 최소한이면 된다고 생각하는 아버지의 생각으로 유교 경전의 기초지식을 배우다 중단하고 집안의 농장에서 하루종일 일해야 했다.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은 마오는 잦은 구타로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당시 중국에는 노동력이 부족한 프랑스로 가서 일하면서 외화도 벌고 동시에 외국어와 선진문물을 배우자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마오쩌둥도 프랑스에 가고 싶었지만 수중에 여비가 없었다. 돈을 벌기 위해 북경대 도서관에서 일했는데 이 기간은 그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학구열이 높은 마오는 도서관에 산처럼 쌓인 책더미 안에서 지식을 쌓았다. 특히 역사 서적을 즐겨 읽었는데 고대의 제왕들은 유학을 가지 않고 정무를 통달함을 알게 되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결국 프랑스 유학을 포기하고, 중국의 역사서를 독파하며 혁명가가 되기로 마음 먹었지만 친한 친구에게도 함구했다. 역사에는 만약이란 게 없지만 르하브암도 겉으로 자신의 뜻을 이야기 하지 않고 안으로 품고 후일을 도모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스라엘 왕국 제4대 국왕인 르하브암(기원전 931~913년) 때 남북 이스라엘이 분열된다. 그는 다윗의 손자이자 솔로몬의 아들로 이스라엘 왕국을 물려받았다. 솔로몬으로부터 왕위는 물려받았지만 솔로몬의 과도한 부역과 세금징수 등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다윗 왕가에 대한 반감은 폭발 직전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로보암을 앞세워 부당한 부역과 높은 세금을 낮춰 달라고 요구했다. 르하브암은 사흘 뒤 답변하겠다고 하며 솔로몬을 보좌하던 관료들과 논의했다. 관료들은 솔로몬왕 때 세금이 너무 과했다며 예로보암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견에 긍정적 답변을 줄 것을 권고했다. 르하브암은 자신과 함께했던 소장파 신하들과도 회의를 했다. 그러나 젊은 귀족들은 백성들을 너무 풀어주면 새로운 왕을 우습게 보며 권위가 실추된다고 더 가혹하게 통치하라고 조언했다. 르하브암은 약속한 사흘이 지나 신하들을 만났는데 인생의 최고 악수(惡手)를 두었다. 이 한 마디가 바로 남북 이스라엘 분열의 도화선이 됐다. 지도자는 쉽게 속마음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내 아버지께서 그대들의 멍에를 무겁게 하셨는데, 나는 그대들의 멍에를 더 무겁게 하겠소. 내 아버지께서는 그대들을 가죽 채찍으로 징벌하셨지만, 나는 갈고리 채찍으로 할 것이오.”(1열왕 12,14) 불이 타고 있는데 휘발유를 부은 셈이다. 이미 실망으로 다윗 가문에 등을 돌린 10지파는 분노하며 ‘우리와 다윗과 무슨 연관이 있나. 이제부터 너나 잘 하세요’하며 떠났다. 르하브암의 통치 영역 안에는 유다 지파와 벤야민 지파만이 남았다. 르하브암은 부역 감독으로 아도람을 보냈으나 이스라엘 백성이 돌로 죽여 결국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르하브암 왕도 위기를 느껴 예루살렘으로 급히 도망하였다. 글_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11-10

[말씀묵상] 연중 제32주일

평신도 주일입니다. 매년 지내는 평신도 주일이 동료 평신도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궁금합니다. 1980년에 세례를 받은 저는 한동안은 평신도 주일이 뭔지 모르고 그냥 지내다가 언젠가부터 ‘매년 한 번씩 본당 사목회장이 강론 시간에 본당의 현황을 나누는 시간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를 좀 더 알게 되고 교회 안에서 성장하면서 이날의 중요성에 비해 평신도들에게 큰 의미로 다가가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생겼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특별히 평신도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의 태도에 대해 경고하시면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바라보시고 과부의 헌금이 갖는 의미를 제자들에게 알려주십니다. 저는 율법학자의 태도와 과부의 봉헌을 통해 예수님이 말하시고자 하는 신앙인의 삶, 특히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일지 질문해 보았습니다. 복음에서 보이는 율법학자들은 옳고 그름을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기준에 따라 다른 사람들을 단죄합니다. 또한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옳음을 말합니다. 하느님에 대해 말하지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 하느님에 대해 말하는 자신과 하느님의 가르침을 동일시하나 봅니다. 그러다 보니 인사받기 좋아하고 높은 자리, 윗자리에 앉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자신들이 무시하는 가난한 과부들의 가산마저 등쳐 먹으면서도 기도는 길게 합니다. 예수님이 보기에,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이 진정 어떤 분인지 알려고 하지 않으면서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배제하는 잘못을 저지릅니다. 이런 율법학자의 모습은 종교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무신론자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옳다는 것과 자신들의 가르침을 믿고 숭배합니다. 이런 율법학자들에게 분노하신 예수님의 눈에 가난한 과부가 보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과부는 저주받은 삶을 산다고 느끼며 살아가는 존재였을 것입니다. 남편을 여의고 도움받을 사람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먹고살기 위해 해야 할 험한 일들, 다른 사람들의 멸시하는 듯한 시선이 존재하는 슬픔이 배어 있는 삶입니다. 왜 이런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원망이 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과부가 헌금을 합니다. 그것도 생활비 전부를 다 넣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무모한 이런 봉헌은 어떤 마음에서 가능한 것인가요? 과부로서의 가난한 삶이 절망으로 다가올 수 있지만, 그녀는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오히려 하느님이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깊게 믿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에 현실의 삶이 비참하더라도 그 너머에 희망이 있음을 보는 듯합니다. 그녀에게 세상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중심으로 삶을 바라보기에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이런 마음 때문에 자신이 갖고 있는 생활비 모두를 봉헌하지 않았을까요? 평신도 주일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로 인해 생긴 날입니다. 공의회는 교회가 세상에 대해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방식이 아니라 세상과 대화를 하면서 복음을 증거 해야 하고, 그렇기에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평신도들이 현대세계의 복음 선포의 주인공이라고 선언합니다. 평신도들이 자신들의 삶의 자리에서 복음의 정신에 맞게 살아감으로써 복음의 증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일상과 사회적 활동 모두가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장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 뜻에 맞게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께 삶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간혹 하느님께 삶을 봉헌하는 것을 교회 봉사만 하면서 살라는 이야기로 받아들이거나 기도와 성사 생활하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으라는 이야기로 이해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 삶은 평신도의 삶이 아니라 사제와 수도자로서 봉헌하는 길입니다. 평신도는 세상 속에서 부르심을 듣고 일상을 통해 삶을 봉헌합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살고 있는 그 자리가 봉헌의 자리가 되기 위해서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과부가 보여주는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과 태도가 필요합니다. 삶이 녹록지 않더라도, 내 뜻대로 풀리지 않더라도, 비록 실패와 좌절을 겪더라도,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신뢰하며 그분에게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삶은 결국 하느님 사랑을 체험할 것임을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은 이야기하십니다. 이런 신앙의 여정은 혼자 걸어가는 길이 아닙니다. 이 여정을 동반하는 공동체는 서로 기도해 주고, 넘어졌을 때 일으켜 세우며 함께 성장하는 힘이 됩니다. 또다시 맞이한 평신도 주일입니다. 이날을 계기로 모든 신자가 하느님께 받은 사명을 의식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자신들의 삶 안에서 드러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기를 희망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평신도 주일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기쁨을 함께 나누는 축제의 날이 되면 좋겠습니다. 삶의 터전에서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살아온 신자들이 1년 동안 자신이 겪은 시행착오와 애씀에 대해 나누면서 서로를 격려하고, 한편으로는 성찰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자리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또한 평신도들이 자신들이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선교 사명을 살아가는 교회의 전망을 활발하게 나누는 시간이길 바랍니다. 그럴 때 많은 이가 평신도로 사는 삶의 의미를 배우고 우리 모두가 교회임을 공감하며 우리가 받은 사명과 새로운 전망 안에서 일치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런 평신도 주일을 지속적으로 지내며 살아가는 교회가 될 때, 교회는 진정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글 _ 현재우 에드몬드(한국평단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 소장)

2024-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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