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일리아드」 : 아킬레스의 눈물

“분노.” 10년째 이어지고 있는 트로이전쟁의 마지막 몇 주간을 묘사하고 있는 호머의 「일리아드」는 이 단어로 시작한다.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맹장 아킬레스의 분노이다. 기원전 1200년경 발발한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의 전쟁 이야기는 500년 후인 기원전 8세기경 대서사시로 승화되었다. 전쟁 막바지에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스는 두 번 분노한다. 그리스 총사령관인 아가멤논은 아킬레스가 선물로 받은 트로이 여인을 빼앗아 버린다. 전쟁의 영웅에게 주어진 선물은 단순히 전리품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 문화에서 명예와 영광을 상징한다. 아킬레스는 빼앗긴 소유물이 아니라, 짓밟힌 명예에 대해 분노한다. 단 한 번도 숙여보지 않은 자존심에 치명적 내상을 입었다. 여기에 대한 분노로 아킬레스는 더 이상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다. 자신의 아군에게 차마 분노를 적극적으로 표출할 수 없었던 그는, 간접적 침묵의 폭력을 행사한다. 문제는 그가 전장에서 철수하게 되자, 그동안 전쟁에 거의 이겨왔던 그리스 군대는 궤멸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아킬레스의 둘도 없는 친구였던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스의 투구와 갑옷을 입고 전투에 뛰어들며, 다시 아킬레스가 전장에 돌아온 것처럼 보여줌으로써 그리스 병사들의 사기를 드높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파트로클로스는 트로이의 왕자이면서 최고의 명장인 헥토르에게 죽임을 당한다. 형제와 같았던 파트로클로스가 죽자, 아킬레스는 두 번째 분노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킬레스가 트로이 적군들에게 직접 무자비한 폭력을 저지른다. 특히 제21권 강변에서의 전투는 피에 굶주린 아킬레스의 잔인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있다. 아킬레스의 인간성 파괴에 이르는 분노의 표출은 헥토르를 죽이고, 그 주검을 돌려주지 않고 갖은 모욕을 저지르는 장면에서 절정에 이른다. 작가의 상상력 안에서 가장 잔인하고 사악해질 수 있는 인간의 한 모습이 조각된다. 아킬레스는 전투에서 단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 안에 품었던 분노와의 싸움에서 패배하였다. 가장 무서운 적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 결과는 인간성 파괴까지 이르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였다. 어쩌면 작가는 트로이전쟁보다, 인간 본성 안에서 매일 매 순간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싸움에 더 관심이 있는 듯하다. 20세기 초 영국의 대표적 가톨릭 작가인 G. K. 체스터턴은 “모든 삶이 전쟁이기 때문에, 일리아드는 위대하다”라고 극찬하였다. 아는 선배가 가족들과 자동차로 유럽 여행을 하였다. 형수님과 자존심 대결하느라, 2시간 넘게 알면서도 잘못된 길로 운전하였다. 결과는 어린 두 아이의 몸과 마음의 탈진으로 하루를 까먹었다고 한다. 유다인과 이민족 사이의 적개심이 여전히 남아 있었던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문에서 바오로 사도는 “화가 나더라도 죄는 짓지 마십시오. 해가 질 때까지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4,26)라고 권고한다. 내면의 분노는 우리의 눈빛, 말, 행동을 통해 폭력적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비인간적인 폭력 극에 달하며 아킬레스에 죽임 당한 헥토르 적장 앞에 엎드린 헥토르의 부친 함께 눈물 흘리며 인간성 회복 호머는 동정심이라는 감정으로 용서와 화해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아킬레스는 당시 관행을 어기고, 적장 헥토르의 주검을 모욕하고 트로이 진영에 보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아들의 주검을 찾기 위해 늦은 밤 아킬레스를 찾아가는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암 왕은 인간성의 회복을 보여준다. 노구를 이끌고 홀연 단신으로 적진을 찾은 프리암의 모습에 아킬레스와 그리스 장군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더욱이 자기 아들을 무참히 살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온갖 모욕을 자행한 그 두 손에 입맞춤하는 프리암의 행동은 현실에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식의 주검을 찾기 위해, 용서할 수 없는 대상을 용서하는 아버지의 처절한 사랑이다. 그러면서 아킬레스에게 “그대의 아버지를 생각하여 / 나를 동정하시오. 나는 그분보다 더 동정받아 마땅하오”라고 호소한다.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주기를 간청하는 프리암의 호소에 분노로 가득 찼던 아킬레스의 마음은 누그러진다. 단단하게 얼어붙은 분노의 마음을 풀어주는 것은 강한 물리적 힘이 아니라, 한 아버지의 용서하는 연민이다. 프리암은 “아킬레스의 발 앞에 쓰러져” 헥토르를 위하여, 아킬레스는 자신의 아버지와 파트로클로스를 위하여 “엉엉 울었다”. 두 사람의 “울음소리가 온 집 안에 가득 찼다.” 학자들은 이 장면을 감정의 정점으로 여기며, 주제의 흐름이 아킬레스의 분노에서 연민으로 바뀌는 지점으로 해석한다. 아킬레스의 눈물은 프리암에게 느끼는 연민과 화해의 상징이다. 성경에서도 회심과 용서의 표시로 몇 날 며칠을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적시던 다윗 임금,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는 한 여인, 밖으로 나가서 몹시 많이 울었던 베드로 사도 등 다양한 눈물을 만날 수 있다. 초대 교부들도 눈물의 은사를 두 번째 세례라고 여기며, 신앙생활에서 눈물을 강조하였다. 눈물은 하느님의 마음도 움직인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들으며 울 때, 동정심을 가질 수 있도록, 자 잘못에 대해 울도록 권고하였다. 비슷한 맥락에서 사막의 철학자 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는 “무엇보다도 눈물을 구하라. 울음이 당신 영혼의 거친 완고함을 부드럽게 할 것이다”라고 초대한다. 그냥 눈물이 아니라 측은지심의 눈물이다. 아킬레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프리암에 대한 연민의 정으로 흘린 눈물을 통하여, 완고하였던 분노의 마음을 마침내 무너트렸다. 진정한 승자가 되었다. 호머의 작품들은 로마제국 귀족 자녀들의 필독서였다. 철인 황제라 불리는 제16대 황제 아우렐리우스는 마음의 평정심을 기초로 하는 스토아 철학의 정수인 「명상록」에서 “범법자들도 나와 같은 혈통이나 집안은 아니지만, 나 자신과 연관이 있는 본성을 지니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과 나는 신성을 지닌 동일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라고 고백한다. 프리암이 아킬레스를 찾아갔던 이유는, 분노의 폭력성과 잔인함을 극단적으로 보여준 아킬레스조차도 마음과 마음이 통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대략 180명의 인물을 다루면서, 24권의 책과 1만 5000행 이상의 운문으로 쓰인 「일리아드」는 서양 문학의 초석이다. 동시에 다양하게 갈라져 있던 고대 그리스인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었던 정체성의 뿌리였다. 더 나아가 작품에서 드러나는 인간 본성에 대한 날카로운 성찰과 묘사는 시대와 장소를 넘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사람 안에 내재하는 측은지심을 깨닫도록 빛을 밝힌다.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말씀의 우물] 혜성처럼 나타난 여인

유딧은 어떤 기적이나 외부의 도움도 없이, 자신의 지혜와 기도와 덕을 바탕으로 치밀한 계획 속에 유다 왕국을 전멸의 위기에서 구해냅니다. 원로 우찌아는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딸이여, 그대는 이 세상 모든 여인 가운데에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가장 큰 복을 받은 이요.”(유딧 13,18) 이 유딧 칭송은 “여인들 중에 가장 복되시다”는 천사 가브리엘의 성모 마리아 찬송과 맥을 같이합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루카 1,41-42) 일찍이 성 예로니모는 유딧을 훗날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여인이라고 보았습니다. 아울러 우리 신앙인들은 유딧처럼 악마와 죄(폭력과 전쟁)의 ‘머리를 잘라 내야’(유딧 13,7-8 참조) 한다고 했습니다. 유딧은 미인계를 쓰지 않고 기도와 고행을 통하여 품위 있게 행동하며, 매사에 철저하고, 치밀한 계획 속에 자신과 민족의 정당방위로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죽입니다. 고통과 재난은 어디서 올까요? 구약의 이스라엘은 고통과 재난을, 흔히 율법을 어기거나 ‘잡신 공경’(에제 36,18 참조) 등으로 인해 주님으로부터 멀어진 데 대한 징벌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유딧기와 욥기에서는 고통과 재난이 우리 자신이나 민족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닐 수 있음을 명백히 밝혀줍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하신 것처럼 지금 우리도 시험하고 계십니다. … 주님께서는 당신께 가까운 이들을 깨우쳐 주시려고 채찍질하시는 것입니다.”(유딧 8,25-27) 유딧기는 역사적 사건을 그대로 전해주는 책이 아니라 이를 재해석해서 교훈을 주고자 하는 해설서 「미드라쉬」로 이해됩니다. 그럼에도 그 핵심 줄거리는 실제 사건에서 나왔다고 봅니다. 유딧기의 주요 신학 몇 가지를 짚어 봅니다. 우선 하느님은 초월적 존재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유한한 인간이 지고의 하느님 뜻을 다 헤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분께서 인간에게, 곧 개인 또는 민족에게 허락하신 시련의 기간이나 범위를 그 누구도 예측하거나 잴 수가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분의 섭리와 우리 미래는 작은 요인들을 통하여 실현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습니다. 유딧기 안에는 위로부터 오는 기적이나 아무런 사건도 보이지 않습니다. 베툴리아 주민 모두가 벌벌떨 때 원로 우찌아는 제안합니다. “만일 닷새가 지나도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응답)이 오지 않으면”(유딧 7,31) 적군에게 항복하고 성을 내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 극한 상황에서 유딧이 혜성처럼 등장합니다. 또한 유딧기에서는 율법 준수의 테두리에 얽매이거나 선민 이스라엘 보호에만 머무르지도 않습니다. 율법이 금하는 암몬족 아키오르(신명 23,4 참조)를 이스라엘 공동체로 받아들입니다.(유딧 14,10 참조)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유딧에게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요?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1-18 제3475호 18면

[교회상식 더하기] 가톨릭교회에서 받은 세례만 세례다?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납니다. 이는 가톨릭교회만이 아니라 정교회, 성공회, 개신교 등 다른 그리스도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비신자가 많이 방문하는 성당이나 큰 행사 등에서는 미사 중 성체 분배에 앞서 해설자가 이렇게 안내하는 것을 들어보신 분도 계실 것 같습니다. “천주교(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으신 분들만 성체를 모실 수 있습니다”라고요. 세례를 받지 않은 비신자는 물론이고 가톨릭이 아닌 그리스도교 신자들도 가톨릭교회에서 성체를 모실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렇듯 성사를 교류할 수 없는 이유는 교리·신앙이나 성사, 제도 등에 있어서 가톨릭교회와 다른 그리스도교들은 온전한 친교를 이루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그리스도교에서 받은 세례는 유효한 세례가 아니라는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그리스도교에서 세례를 받든지 적법한 방식으로 이뤄진 세례라면 가톨릭교회에서도 유효합니다. 다른 그리스도교에서 가톨릭교회로 입교하는 분이 계시다면 먼저 물로 씻는 예절로써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는지, 세례를 받는 본인과 세례를 준 집전자의 의향이 적합했는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이것이 지켜진다면 꼭 가톨릭교회에서 받은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세례는 유효합니다.(「교회법」 제869조 2항 참조) 이 기준에 따라 한국 가톨릭교회는 성공회와 정교회에서 받은 세례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 밖의 그리스도교의 경우는 별도로 물로 씻는 예절과 천주 성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형식을 확인할 수 있으면 인정합니다. 만약 적법한 세례를 받았는지 확인하기 어렵다면 조건부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만일 세례가 불확실하거나 유효하지 못하다면”이라는 조건을 두고 세례를 주는 것입니다.(「비가톨릭 그리스도교파의 세례 유효성 관련 사목 지침」 참조) 이처럼 다른 그리스도교에서 받은 세례는 유효하지만, 그렇다고 바로 가톨릭교회 신자로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신앙과 직제에 있어 온전한 일치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다른 그리스도교에서 세례를 받은 분이 가톨릭교회에 입교할 때는 성체성사와 고해성사 등을 포함한 교리교육을 받은 후에 ‘일치 예식’을 하게 됩니다.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를 믿고 올바로 세례를 받은 이들은 비록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가톨릭교회와 친교를 이루고 있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여러 면에서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지만, 우리와 마찬가지로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제2차 바티칸공의회 「일치교령」 3항 참조) 교회는 해마다 1월 18일부터 25일까지 일치 주간으로 지냅니다. 이 시기에는 가톨릭교회뿐 아니라 여러 그리스도교가 교회의 일치를 위해 함께 기도합니다. 언젠가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수님 안에서 한 몸이 되어 하느님을 찬미하길 희망하며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발행일 2026-01-18 제3475호 20면

[말씀묵상] 연중 제2주일, 일치 주간

집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을 없애는 집이 많아졌다는 기사를 읽은 적 있습니다. 이 기사를 보면서, 책 읽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텔레비전 없애는 예전의 유행이 다시 반복되는 것인가 싶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함께 모여 텔레비전 볼 일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월드컵이나 올림픽 등과 같이 전 국민의 관심을 끄는 경기에서나 함께 보기 때문입니다. 몇 년에 한 번 거실에서 보기 위해 굳이 거실에 텔레비전을 둘 필요가 없었습니다. 텔레비전 채널 쟁탈전으로 서로 싸웠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각자 알아서 스마트폰으로 보면 됩니다. 가족과 함께 많은 시간 가졌던 거실은 이제 텅 빈 곳이 되었습니다. 예전의 채널 쟁탈전이 오히려 그리워지는 요즘이 아닐까 싶습니다. 현대는 ‘함께’하는 것보다 ‘혼자’가 익숙합니다. 친구나 가족보다도 스마트폰이 더 가깝고, 때로는 나의 전부이고 심지어 마치 배우자처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편하고 쉬운 것, 또 자극적인 것 등을 모두 이 스마트폰에서 얻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너 없이는 못 살아!”라고 말하는 것처럼, 스마트폰 없이는 못 사는 것처럼 사는 우리입니다. 이렇게 편하고 쉬운 것, 자극적인 것을 가까이하다 보니, 주님과 함께하는 삶이 어렵고 힘들어집니다. ‘주님도 스마트폰으로 만나면 안 되나?’, ‘성체도 그냥 스마트폰으로 보면 안 될까?’, ‘굳이 고해소에 들어가 고해성사 보는 것보다 스마트폰으로 이야기하면 되지 않을까?’ 등 인격적인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가져야 하는데, 편하고 쉬운 길로만 가려고 합니다.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기쁨과 행복도 얻기 힘들어집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쪽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사제는 미사 때 성체를 들어 올리며,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라고 외칩니다. 이 외침이 바로 오늘 복음의 재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석에 앉아 있는 신자들에게 그리고 세상을 향해 “여기에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해결해 주실 진짜 구원자가 있습니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순간이고,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벅찬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귀찮다’고, ‘지루하다’고, ‘힘들다’고, ‘믿지 못하겠다’고 등의 이유를 들어서 그 결정적인 순간에 함께하기보다 피하는 것을 더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세상이 중심이고, 자기 욕심과 이기심 채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할 수 없으며, 주님 안에서 은총과 평화를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사야서에 나오는 ‘주님의 종’의 노래 중 두 번째 노래로, 하느님께서 선택된 종의 사명이 확장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의지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적 경계를 넘어 땅끝까지 뻗어 나가게 됩니다. 이 말씀에 따라, 예수님께서 유다인만의 메시아가 아니라, 온 인류를 비추는 ‘민족들의 빛’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1코린 1,3) 파리에서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행기의 조종사가 실수로 북쪽으로 1도 다르게 설정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행기는 어디로 갈까요? 비행기가 60마일을 날아갈 때 1도가 틀어지면 1마일을 벗어난다는 60대 1의 법칙이 있습니다. 파리에서 인천까지 8,800km, 그래서 148km의 오차가 생깁니다. 인천 기준으로 북쪽 150km이면 평양에 도착하게 됩니다. 겨우 1도라 해도 목적지가 아예 바뀌게 됩니다. 우리 삶의 항로도 바꿔야 할 때가 아닐까요? 편하고 쉬운 길, 그래서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길이 아니라, 어렵고 힘들어도 주님을 만나고 함께할 수 있는 기쁨과 행복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혁신적인 변화가 필요할까요? 아닙니다. 딱 1도만 바꾸면 충분합니다. 매일 1도쯤 더 기도하고, 매 순간 1도쯤 더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매 순간 이루어지는 1도의 방향 전환이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게 할 것입니다. 글 _ 조명연 마태오 신부(인천교구 성 김대건본당 주임, 인천가톨릭대학교 카펠라관장) 1999년 사제품을 받았다. 인터넷카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를 운영하고 있으며, 하루에 수백 킬로미터를 왕복해야 하는 강연 요청도 마다하지 않는 열혈 사제다. ‘빠다킹’은 목소리가 느끼하게 들린다고 해서 아이들이 지어준 별명으로, 25년 넘게 이 별명을 버리지 않아 공식 애칭이 되었다. 저서로 「주는 것이 많아 행복한 세상」, 「날마다 행복해지는 책」, 「괜찮아 괜찮아 다 괜찮아」 등이 있다.

발행일 2026-01-18 제3475호 18면

[교회상식 더하기] 반려동물도 세례받을 수 있을까?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10가구 중 3가구(약 28.6%)는 집에서 동물을 키우고 있습니다. 「동물보호법」은 이렇게 집에서 키우는 동물을 ‘반려동물’이라고 부릅니다. 그만큼 가까이에서 교감하며 생활하는 동물이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가까이 지내다 보니 우리 집 강아지나 고양이도 세례받게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가족처럼 아끼고 사랑하다 보니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일 것 같습니다.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세례처럼 좋은 것이 또 있을까요. 하지만 동물에게는 세례를 줄 수 없습니다. 아직 세례를 받지 아니한 모든 ‘사람만’이 세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교회법 864조 참조) 기본적으로 세례성사를 비롯해 교회의 모든 성사와 전례는 ‘믿는 사람’을 위해 거행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세례성사에 관해 말씀하시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한 3,5-15 참조) 그래서 우리는 세례성사 때 “여러분은 무엇을 청합니까?”라는 주례자의 질문에 “신앙을 청합니다”라고 답하고, 이어 “신앙은 여러분에게 무엇을 줍니까”라는 물음에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동물은 사람도 아니고, ‘믿음이 있다’고도 보기 어렵지요. 그렇다고 동물이 구원과 관련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홍수 때 동물들도 방주에 태워 구해주시고, 홍수가 끝난 뒤 인간뿐 아니라 방주에 탄 모든 동물도 계약에 참여시켜 주십니다.(창세 9,9-10 참조) 이 홍수는 세례성사의 예표기도 하지요. 교회는 “짐승들도 인간의 속죄 의식에 참여해 다른 모든 피조물과 함께 그리스도의 구원에 참여한다”고 말합니다.(「축복 예식」 728항 참조) 또한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영혼을 식물의 생장혼, 동물의 감각혼, 인간의 이성혼으로 구분했는데요. 동물의 감각혼은 인간과 달리 자유의지와 이성을 지니지 않습니다. 죄는 “이성과 진리와 올바른 양심을 거스르는 잘못”(「가톨릭 교회 교리서」 1849항)입니다. 그러니 동물들이 ‘죄를 짓는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우리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통해 “죄를 씻는 유일한 세례”라고 고백합니다. 죄를 짓지 않은 동물에게 세례는 필요하지 않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아마 많은 분이 신앙 안에서 동물에게 좋은 일을 해주고 싶을 겁니다. 그렇다면 ‘동물 축복 예식’이 좋은 방법일 듯합니다. 동물 축복 예식은 이탈리아에서는 동물들의 수호성인인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1월 14일)에, 세계적으로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10월 4일)에 하는 등 성인의 축일에 열리곤 합니다. 최근에는 한국교회에도 ‘동물 축복 예식’을 하는 본당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발행일 2026-01-11 제3474호 20면

[말씀묵상] 주님 세례 축일

예수님은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갈릴래아에서 요르단강으로 세례자 요한을 찾아가 세례를 받으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기 위해 스스로 요한을 “찾아가셨다”(마태 3,13)는 표현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어 ‘파라기네타이’는 단순히 어떤 장소로 이동해 ‘왔다’는 의미를 넘어, 의도적이고 결정적인 공적 등장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사랑이 죄인들의 한가운데로 내려오신 현현이며,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신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이 세례 사건은 예수님의 사명이 어떤 방식으로 시작되고 전개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기 전에 먼저 죄인들과 연대하시기 위해 연약한 인간의 자리로 찾아오셨습니다. 더욱이 놀랍게도 죄 없으시면서도 죄인들과 함께 줄을 서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당시 종교인들은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을 세리들, 죄인들, 병자들과 분리시켰습니다. 그들은 규율을 지키고 제물을 바치는 데 구원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죄인 취급하였습니다. 완고하고 차갑고 동정심 없이 살피고 감시하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분리와 판단을 넘어서 그들 모두를 형제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오시는 예수님의 사명 수행 방식은 공생활 전반에 걸쳐 나타납니다. 제자들을 부르실 때, 죄인들과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들을 만나실 때(루카 19,5; 요한 4,7; 요한 5,6 참조), 엠마오로 향하던 낙담한 제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실 때(루카 24,15 참조), 그리고 부활 후 두려워하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요한 20,19 참조)도 예수님은 먼저 움직이는 분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요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죄인들과 함께 세례를 받기로 결단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마태 3,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로움(디카이오쉬네)’은 도덕적 올바름이나 법적인 정의를 넘어,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올바른 행위인 그분의 자비하신 마음을 드러내는 삶을 뜻합니다. 곧 연민과 자비의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사람들 한가운데서 이루어야 할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세례에서 드러난 이러한 ‘의로움의 실천’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주님의 종의 모습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이사 42,3)라고 약자와 함께하는 정의를 선포한 이 예언은, 예수님의 죄인들과의 연대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종에게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이사 42,6)라고 하신 약속 또한, 세례받으시는 예수님 위에 성령이 내려오시는 장면에서 완전히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그분 자신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죄인인 우리를 위한 사건입니다. 그날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찾아오신 날이며, 그 결과 하늘이 열리고 성령께서 우리 위에 머무르셨으며, 하느님 아버지께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딸들이다”라고 선언하신 순간이었습니다. 이 모든 은총은 예수님께서 먼저 요르단강으로 찾아오셨기 때문에 가능해졌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세례는 단순히 죄를 씻는 정화 예식이 아니라, ‘의로움’과 ‘성령의 삶’으로의 초대입니다.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영이 그 안에 머무시는 존재로 변화되고, 성령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을 실천하는 여정으로 초대된 것입니다. 이 의로움은 정의롭고 자비로운 태도, 곧 하느님의 마음을 닮은 삶 안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이사 42,1; 마태 3,17 참조)가 됩니다. 따라서 주님 세례 축일을 기념한다는 것은, 다시 한번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로 살겠다는 우리의 결심을 새롭게 하는 일입니다. 글 _ 전봉순 수녀(그레고리아·예수 성심 전교 수녀회) 1985년 입회했으며 서강대학교 대학원과 가톨릭대학교 대학원에서 신학을 수학했다. 그 후 동 대학원에서 강의했으며, 현재는 부산 가톨릭 신학원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 「구약성경 주해, 시편 Ⅰ- Ⅲ권」, 「시편 90편과 지혜로운 마음」 등이 있다.

발행일 2026-01-11 제3474호 18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덕 없이도 인간은 행복할 수 있을까?

니체는 “덕은 더 이상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을 단어이자, 사람들이 그에 대해 웃음을 자아내도록 하는 구식 단어”라고 말했다. 사실 근대 이후에는 전통 철학에서 윤리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자리 잡았던 덕에 대한 논의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의무론·공리주의·감정주의가 채웠다. 계몽주의와 근대 자연과학은 자연과 인간 안의 목적 개념을 배제했고, 이와 연관된 덕은 부수적이거나 개인적 성향 정도로만 취급됐기 때문이다. 그 결과 현대 생활에서는 도덕과 관련된 언어가 남아 있으면서도 윤리적 판단에 대한 공통된 기반이 붕괴돼 버렸다. 그나마 20세기 중반 이후에 상황이 변화되어, 앤스콤(E. Anscombe)과 매킨타이어(A. MacIntyre) 등의 학자들은 도덕 생활을 위해 덕에 관한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덕 윤리를 대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이 다시 주목받게 됐다. 그렇지만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고전적 덕 전통이 실제 삶을 포괄하는 도덕의 기준으로 작동하던 시대와는 달리 현대 사회에는 덕 윤리 자체가 하나의 ‘경쟁 이론’으로 취급될 뿐이다. 현대인들은 니체의 말처럼 덕을 강요된 사육이나 운동선수의 지나친 훈련처럼 여기며, 수도원에서나 적합한 것으로 취급한다. 철학 상담의 창시자 아헨바흐(G. Achenbach)에 따르면, 오늘날 덕이 사라진 곳에는 악덕들이 잡초처럼 무성하게 자라게 된다. 그러나 덕은 특별한 것이나 신비로운 것이 아니며 오히려 평범한 것으로서, 덕 없이 우리는 평범한 일상을 보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신학대전」에서 누구보다도 덕에 대해 상세하게 논의하고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덕에 대해서 어떤 내용을 설명할까? 본격적인 성찰에 앞서 우선 철학사 안에서 덕에 대한 이론이 어떻게 발전해 왔고, 토마스가 이를 어떻게 수용했는지에 대한 커다란 윤곽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해 보고자 한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발전한 덕 개념 이미 소크라테스는 덕 있는 습성이 올바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계속적인 행위의 수행을 돕는다고 강조했다. 그렇지만 그는 덕이 무엇이며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대한 정확한 규정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그의 제자 플라톤은 영혼의 세 부분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에 따라 인간의 윤리적인 특성도 드러난다고 주장하며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그에 따르면, 욕망혼에 따르는 이익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무절제’라는 상태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절제’의 덕이 필요하다. 또한 기개혼에 따르며 이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욕망에 종속되면 오히려 ‘비굴함’을 드러내게 되므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용기’의 덕이 필요하다. 나아가 이성혼을 따르는 사람이 국가 공동체 전체를 위해서도 유익한 지식을 가지려면 ‘지혜’의 덕이 필요하다. 인간의 영혼이 가장 올바르게 되는 상태는 영혼의 세 부분이 각각 ‘제 일을 하는’ 경우이며, 이때 영혼의 조화가 이루어지며, 이를 위해서는 ‘정의’라는 덕이 필요하다. 후대 학자들은 이 네 가지 덕이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에서 ‘4추덕(四樞德)’이라고 불렀다. 윤리적 판단 기반 붕괴된 현대사회…덕의 윤리도 경쟁 이론으로만 취급 ‘사추덕’으로 대표되는 고전적 이론…「신학대전」에서 종합해 계승·발전 하느님의 은총 통해 가지게 되는 신앙·희망 등 초인간적 덕까지 포괄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더욱 구체화시켰다. 그에 따르면 덕이란 기회가 왔을 때 언제나 주요한 기능을 잘 발휘할 수 있는 영혼의 상태다. 따라서 덕은 자신 속에 ‘잘함’ 혹은 탁월성의 계기를 함축하고 있으며, 그 계기를 통해서 올바른 행동들을 지속적으로 해 나갈 수 있다. 더욱이 영혼의 덕에 따라 살아갈 때 인간은 자신의 최종 목적인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 플라톤과는 대조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품성이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그 중간을 실행하는 것, 즉 ‘중용(中庸)’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덕이라고 가르쳤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정한 용기라는 덕은 만용과 비겁의 중용이라고 말한다. 절제도 인색과 마구 돈을 쓰는 낭비의 중용이라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중용은 자신의 상태와 그 상황에 맞게 찾아가야 하는, 개개인이 평생에 걸쳐 시도해야 하는 윤리적 과제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한 고전적 덕 이론의 체계화 플라톤의 4추덕은 단절되지 않고 이어온 플라톤주의의 전통에 따라 이미 초기 스콜라 학자들에게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에 대한 강조는 13세기 중반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번역 소개되면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두 가지 전통을 자신의 「신학대전」에서 절묘하게 종합해 낸다. 토마스는 “작용적 습성인 인간적 덕은 하나의 선한 습성으로서 선을 산출한다”(I-II,55,3)고 말한다.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토마스에 따르면, 덕은 획득된 능력이자 작용적 습성이며 훈련과 교육을 통해 획득된다. 또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덕에 관한 규정뿐만 아니라 지성적 덕과 도덕적 덕에 관한 구분도 그대로 수용한다. 이 구분에 따르면 플라톤이 강조한 지혜는 이해, 지식과 함께 지성적 덕에 속한다.(I-II,57,2) 따라서 그는 도덕적 덕의 핵심을 이루는 4추덕에서 지혜라는 용어를 ‘현명’(prudentia)이라는 용어로 대체한다. 또한 그 순서도 조금 변형시켰지만, 4추덕의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성의 규범에 ‘현명’, 의지의 규범에 ‘정의’, 탐욕적 욕구의 규범으로 ‘절제’, 분노적 욕구의 규범인 ‘용기’(I-II,61,2), 이 네 가지면 도덕적 덕의 핵심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지나침이나 부족 때문에 이성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토마스는 ‘올바른 이성과의 일치됨’인 “덕은 중용을 지키는 데 있다”(I-II,64,1)라고 주장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 이론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고대 그리스철학의 다양한 유산이 「신학대전」 안에서 종합되고 놀라울 정도로 체계화되는 것을 발견한다. 그렇지만 토마스는 덕에 관해서 단지 고대철학을 계승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철학자들이 언급했던 인간적 덕들과,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은총을 통하여 가지게 되는 신앙, 희망, 참사랑이라는 초인간적 덕들을 모두 포괄하는 체계를 마련하고자 노력했다. 토마스가 이 어려운 과제를 어떻게 수행하며 이를 통해 악덕이 잡초처럼 자라는 현대 사회에 어떤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지 다음 호부터 단계적으로 상세하게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6-01-11 제3474호 19면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어떻게 해석하냐에 따라서 신앙이 달라진다

유명한 의사가 강의하던 중에 “이것을 먹으면 가장 오래 사는데 무엇일까요?” 하고 질문했다. 이 질문에 사람들이 “밥을 잘 먹어야 오래 산다”, “욕을 먹어야 오래 산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깔깔깔 크게 웃었다. 그러나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나이”라고 대답했다. 이어서 의사는 다시 이렇게 질문했다. “이것을 먹으면 죽는데 무엇일까요?” 그러자 어떤 사람이 “나이요”하고 대답했다. 의사는 “정답”이라고 답했다. 인간은 나이를 먹어 오래 살기도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 죽게 된다. 나이라는 것은 늘 존재하는 것이지만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죽음도 늘 존재하는 것이지만 이방인들은 죽음을 모든 것이 끝장나는 날로 생각한다. 그래서 죽음이 두렵다. 그러나 신앙인은 죽음을 하느님과 만나는 날로 생각한다.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날,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날,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날로 생각한다. 그래서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이것은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신앙에 대해서 어떻게 해석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달라질 수 있다. 신앙의 민족인 유다 민족이 바빌론 유배 사건에 대하여 어떻게 해석했는가? 기원전 6세기 유다 왕국의 유다 민족은 이웃 나라 강대국 바빌론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가 유배 생활을 했다. 그 고난의 유배 생활 속에서 그들은 “우리가 왜 멸망했는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보통 다른 민족들이라면 멸망의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해석했을 것이다. “우리보다 강한 바빌론이 쳐들어와 전쟁에 졌기 때문이다.” 맞는 해석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원인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어서 “우리의 지도자들이 무능하고 부패했기 때문이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앙의 민족이었던 유다 민족은 이렇게 해석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석했을까? 이웃 나라가 강해서도 아니고, 우리가 부패해서도 아니다. 그러면 왜 멸망했을까? “우리가 하느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상숭배를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석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다시 우상을 버리고 하느님을 섬기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실 것이다. 우리가 생명을 주는 율법을 지키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실 것이다”라고 해석했다. 이렇게 해석했기 때문에 하느님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 오늘날 유다교가 탄생한 것이다. 하나의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진다. 사건을 해석하고 난 뒤에 그 해석에 따라 얼마나 실천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고, 민족이 달라지고, 신앙이 달라지는 것이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주교회의 엠마오연수원장)

발행일 2026-01-11 제3474호 20면

[말씀의 우물] 누구를 위한 성모송?

성모송은 성경 어디에 나올까요? 또 누구를 위한 기도문일까요? 우리가 미사를 비롯하여 기도를 시작하고 마칠 때 바치는 가장 짧은 기도문인 십자성호가 마태오복음 28장 19절에서 나왔듯이, 성모송 앞부분도 루카복음 첫 장에서 나왔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가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하고 인사합니다. 뒤이어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자,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차, 성모님께 찬미가를 읊어 올립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루카 1,42) 성모송 전반부는 천사의 인사와 엘리사벳의 인사가 합쳐져 이루어집니다. 성모송 후반부는 성모님께 올리는 기도입니다. 이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하며 주님께 올리는 기도와는 모양새가 다릅니다. 주님께 올리는 기도는 “베푸소서!”라는 형식으로 직접 청원 양식인 반면, 성모님께는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우리 대신’ 또는 ‘우리를 위하여’ 주 하느님께 전해달라는, 빌어달라는 전구기도입니다. 아울러 루카복음 첫 장에 나오는 두 여인의 만남은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두 여인의 만남입니다. 그때 태중에서는 선구자 요한 세례자와 온 인류의 구세주 예수님께서 만나십니다. 엘리사벳은 외칩니다.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요한 세례자)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루카 1,44) 그렇다면 성모송은 누구를 위한 기도문인가요? 전반부가 성모님 찬가라면 후반부는 청원기도입니다. ‘여기서 지금(hic et nunc)’ 성모송을 봉헌하는 나 자신과, 믿는 이들과, 나아가 온 인류를 위한 기도입니다. “저희 죽을 때에”라는 표현은 우리 모두에게 쉴 새 없이 매 순간 한 발짝씩 다가오는 죽음을 보다 잘 준비하도록 주 하느님께 전구해 달라고 도움을 청하는 기도입니다. 저는 2001년 안식년 어느 날 성모송의 참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아, 성모송은 우리 믿는 이들과 온 인류를 위하여 주 하느님께 빌어달라는 기도구나”라는, 평범하면서도 깊은 뜻을 깨닫는 축복을 누리게 됐죠. 특히 ‘이제(nunc)’와 ‘우리 죽을 때에(et in hora mortis nostrae)’라는 표현 안에서 그저 쉼 없이 주님께 전구해 달라는 뜻을 마음 깊이 새기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이제(지금)’를 한순간도 벗어나지 못하고 그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성모송을 봉헌하는 우리는 성모님께 실로 엄청난 부탁을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지금부터 죽는 순간까지 나와 우리 모두의 참 행복을 주님께 끊임없이 빌어달라는 기도니까요.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1-11 제3474호 18면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의 관계

신비주의의 영어 단어인 ‘mysticism’에 대한 성 존 헨리 뉴먼 추기경의 유명한 유머가 있다. 이 단어는 안개를 의미하는 ‘mist’와 분열을 뜻하는 ‘schism’으로 이루어졌는데, 신비주의란 안개 속에서 시작해 분열로 끝난다는 것이다. 농담처럼 들리지만, 명확하지 않은 개인의 영적 체험이 교회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고립될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신학이 시대와 장소를 넘어서는 보편적 가르침이라면, 영성은 각 개인의 실질적 경험에 대한 성찰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학자들은 영성에 대해 염려스러운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신학과 영성은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형성한다. 신학이 하느님에 대한 체계적이고 보편적인 이해와 그리스도교 진리를 다룬다면, 영성은 그러한 이해와 진리를 각 개인이 일상에서 실천하고 살아가는 영역이다. 영성은 신학의 가르침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공간이다. 또한 신학은 역사를 단일하며 보편적인 현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지만, 영성은 구체적 역사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 현존에 대한 개인의 살아 있는 경험이다. 영성은 신학의 보편적 역사성을 살아 숨 쉬게 한다. 따라서 신학의 보편성과 영성의 개별성은 이분법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작용을 통해 서로에게 매우 중요한 영향을 주고 받는다. 신학의 보편성을 통해 영성의 개별성은 그리스도교 진리의 빛 안에 머물게 되고, 동시에 신학의 보편적 가르침은 영성의 다양한 개별적 체험을 통해 확장되고 깊이를 더해갈 수 있다. 문학과 신학의 관계도 영성과 신학의 관계와 비슷하다. 문학의 기원을 종교적 신화와 의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길가메시 서사시」는 최초의 서양 문학작품이면서 최초의 종교적 신화로 여겨진다. 발터 부르케르트는 언어와 신화, 의례를 연구하면서, 언어가 시작되었을 때, 의례와 언어는 동시에 발생하였다고 주장한다. 즉 초기의 언어적 예술은 의례적 행위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종교 작가들에게 문학은 신앙을 확인하고 증언하는 중요한 방식의 역할을 했다. 물론 종교에 적대적인 작가들은 문학을 통해 신앙에 도전하였다. 동시에 하느님의 계시인 성경도 문학과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 헌장」은 성경이 문학의 영향을 받았음을 명시하고 있다. “성경 저자들의 진술 의도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것들 중에서 ‘문학 유형’들도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진리는 본문에서 역사적, 예언적, 시적 양식 또는 다른 화법 등 여러 양식으로 각각 다르게 제시되고 표현되기 때문이다.”(12항) 즉 문학의 요소들이 하느님 말씀의 의미를 표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T. S. 엘리엇은 문학이란 현재 있는 그대로의 삶을 다루고, 신학은 마땅히 있어야 할 모습을 다룬다고 이야기한다. 불완전하고 이기적 존재인 인간의 삶은 뭔가 결점과 어두운 면이 있다. 반면 신학은 그리스도교 진리의 선한 빛을 제시한다. 인간 삶의 본질에 대한 날카로운 성찰이, 그냥 성찰에서 멈춘다면 인간 성장은 기대하기 힘들다. 또한 진리의 빛이 현실의 인간 삶을 품지 못하고, 이상화된 모습만을 비춘다면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문학의 영역과 신학의 영역 사이에 존재하는 이런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상호 보완적 관계 형성이 요청된다.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의 주된 관심사는 바로 개인 삶의 경험이다. 색칠되고 꾸며진 경험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날 것으로서의 경험. 왜냐하면 하느님은 흠 없이 가공된 모습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를 찾으시는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찾고 계시기 때문이다. 윌리엄 제임스는 종교의 본질이 교리나 제도보다는, 개인의 감정과 행동 등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경험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도 계시는 마지막 사도의 죽음과 함께 완결되었다는 전통적 명제보다는, 역동적이고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영향으로 이해하는 관점을 드러낸다. 계시가 끊임없이 역동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모든 인간은 죽는 순간까지 길 위의 순례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영성은 그리스도교 진리 안에서 개인의 경험을 이해한다는 측면에서, 문학과 차별화된다. 하지만 문학에서 묘사되는 개인의 경험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언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리스도교 영성에서 드러나는 경험과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신앙인의 인간 본성과 비신앙인의 인간 본성은 근본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교도였던 사마리아인이 오히려 선한 빛의 길을 걷고 있는 인물이었다.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강조하였던 칼 라너는 ‘근본적인 인간의 경험들(foundational human experiences)’ 안에서 초월성을 제시하였다. 즉, 그리스도의 복음을 직접 듣지 못했거나 교회 밖에 있는 사람도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무의식적으로 절대자에 대한 초월적 경험이 가능하다. 서양의 고대부터 중세, 르네상스, 근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근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는 다양한 문학작품들에 관한 연구는 그리스도교 영성의 폭과 깊이를 더욱 풍부하게 하고 한층 강화할 것으로 기대된다. 비록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언어를 직접으로 사용하지는 않지만, 문학 작품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근본적인 경험들은 그리스도교 영성의 핵심적인 가치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호머의 「일리아드」는 용서를,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우정을,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순명을,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은 사랑을,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캣츠비」는 자존감을 흥미롭게 깊은 통찰력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별히 오늘날 현대 사회는 인공지능(AI)의 급속한 발달, 공동체 의식의 약화, 노인 문제, 인구 소멸, 물질주의와 자본주의 등의 심각한 문제들을 대면하고 있다. 이런 문제들은 궁극적으로 인간 존재의 의미와 직결된다. 그리스도교 영성의 시각에서 바라본 다양한 문학작품들의 세계가 의미 충만한 새로운 문을 열어 주길 희망한다.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1996년 예수회에 입회해 2007년 사제품을 받았다. 영국 런던대학교 히쓰롭 칼리지에서 영성신학 석사 학위, 워릭대학교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발행일 2026-01-04 제3473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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