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우물] 되찾은 아들의 비유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 참조) 다들 아실 테죠. 유명한 이 비유에는 잃었던 아들의 비유, 탕자의 비유 등 여러 이름이 붙여집니다. 잃었던 양을 되찾은 기쁨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주인(루카 15,6 참조), 잃었던 은전을 되찾고 이웃과 기쁨을 나누는 부인(루카 15,9 참조)에 이어 잃었던 아들을 되찾고 기쁨에 젖어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루카 15,24 참조)의 비유가 나란히 나옵니다. 세 비유는 100분의 1(양 100마리 중에 한 마리), 10분의 1(잃었던 은전 열 닢 중에 한 닢), 2분의 1(두 아들 중에 한 아들)로 긴박함이 급상승하며, 한결같이 우리 독자로 하여금 회개하여 그 기쁨에 동참하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비유를 들려주시는 동기가 다음에 나옵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루카 15,1-2) ‘탕자의 귀환’을 통하여, 우리는 작은아들이 회개하여 아버지께 돌아왔을 때, 회개한 동생을 조건 없이 받아주시는 아버지 모습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크신 자비와 인류 구원 의지를 봅니다. 회개한 친동생을 보고 ‘저 아들(그리스어 본문: 당신의 저 아들은)’이라 부르면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친형에게 아버지는 ‘너의 저 아우는’이라고 부르시면서 큰아들의 빗나간 자세를 바로잡아 주십니다. 이는 죄를 짓기 전에든 후에든 형과 아우, 곧 형제자매 관계는 전과 다름없이 또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가르침이 아닐까요? 2009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초청 강연을 마치고, 이튿날 몇몇 자매님과 함께 부근에 있는 발달장애인 공동체 ‘라르쉬 데이브레이크(L’Arche Daybreak)’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오전 9시경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침 식사를 하던 이들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우리 일행을 반겨주었습니다. ‘낯선 우리를!’ … 천사들이 운영하는 천상 공동체에 들어선 느낌이었습니다. 네덜란드 출신의 사제이자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영성 신학자 헨리 나우웬 신부(Henri J. M. Nouwen, 1932~1996)님은 미국 하버드대학교 교수로 지내던 중, 자신은 아직도 ‘회개하지 못한 큰아들’이라면서 교수직을 접고 토론토의 이 장애인 공동체에 들어가 살다가 세상을 떠납니다. 그분은 저서 「탕자의 귀환(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A Story of Homecoming)」에서 말합니다. “내가 믿는 하느님은 창조의 시작부터, 자비 가득한 축복을 주시려고 두 팔을 벌리고 계십니다. 그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고 언제나 기다려주십니다. 실망 속에서도 두 팔을 내리지 않고, 언제나 당신 자녀들이 당신께 돌아올 때, 그들에게 사랑 가득한 이야기를 건네시며 그들의 어깨 위에 당신의 팔을 올려 놓아주고자 하십니다. 그분의 유일한 소망은 (우리 죄인을)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96페이지) 나우웬 신부님의 다음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내가 그분을 필요로 하는 만큼 나를 필요로 하십니다.”(106페이지)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말씀묵상] 연중 제11주일

사람들이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에게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가요?”라고 물었습니다. 이 물음에 톨스토이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첫째는 지금 여기, 둘째는 옆에 있는 사람, 셋째는 그 사람에게 잘해 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바로 내 옆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 옆의 사람을 그렇게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때로는 미워하면서 내 옆에서 밀어냅니다. 다른 것이 더 좋다면서 밀어내기도 합니다. 또 나와 같지 않다고 밀어냅니다. 그래서 가장 귀한 것들이, 내 안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가족, 친구, 직장 동료, 본당 교우, 그밖에 만나는 모든 사람이 귀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언제 귀할까요? 지금 그 귀함을 깨달아야 하는데, 먼 훗날에 그들이 내 옆에 있지 않을 때 비로소 깨닫습니다. 저의 경우도 부모님께서 주님 곁으로 가신 뒤에야 얼마나 귀한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알게 되어 행복했을까요? 아닙니다. 그 귀함을 보지 못했음에 후회하게 되었고, 한동안 힘들었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 옆에 있는 사람에게 잘해 주는 것이 가장 귀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이었고, 예수님께서 직접 그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36)고 시작합니다.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단순히 불쌍히 여긴다는 것이 아니라, 창자가 뒤틀리는 듯한 연민을 느끼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은 지금 상처받고 억눌린 인간을 향한 사랑에서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타락한 종교, 정치 지도자들을 통해 어떤 보호도 받지 못했기에, 오히려 율법의 무거운 짐만 지웠기에 예수님께서 직접 착한 목자로 다가가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지금 여기,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사랑으로 다가가십니다. 그들이 가장 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면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신 열두 명의 사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완벽한 사람,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눈으로는 부족함이 더 많이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로마에 세금을 가져다 바치는 세리 마태오도 있었고, 로마에 무력으로 항거하던 민족주의자 열혈 당원 시몬도 함께 있었음을 봅니다. 이렇게 지향점이 다른 사람을 제자로 뽑으시고, 심지어 당신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까지 명단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완벽한 의인들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 나약함과 실패의 가능성까지 품고 있는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거저 받았을 뿐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거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뜻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 특히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 가장 귀한 것임을 잊어버리고, 대신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데 온 힘을 기울이곤 합니다. 내가 지금 기쁘고 행복한 것이 가장 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귀하게 여기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탈출 19,5)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야 주님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미니코회 신학자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하느님은 언제나 준비되어 계시지만, 우리는 준비되어 있지 않다. 하느님은 우리 가까이에 계시지만, 우리는 그분에게서 멀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준비됨을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께 가까이에 있는지를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친구에게 “너는 하느님을 믿어?”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럼. 나는 매주 성당에 다녀”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그러면 하느님께 기도 많이 하겠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에 그 사람은 더 말하기 힘들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기도는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할 모든 준비를 마치셨고, 또 우리 가까이에 계십니다. 이제 우리의 움직임이 필요할 때입니다. 주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그 뜻을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주님과 함께할 주님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글 _ 조명연 마태오 신부(인천교구 성 김대건본당 주임, 인천가톨릭대학교 카펠라관장)

발행일 2026-06-14 제3495호 18면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걸리버 여행기」 - 약자에 대한 공감

현대 영국 소설을 대표하는 이언 매큐언은 어느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9·11 테러범들이 치명적인 ‘상상력의 실패’를 겪었다는 유명한 말을 하였다. 만약 그들이 피해자들의 마음과 감정으로 들어가, 자신들의 폭력으로 인해 겪을 고통을 인식할 수 있었다면, 그토록 잔혹한 행위를 실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갈등을 감내하면서도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은 상대방에 대한 연민의 마음 혹은 공감 능력이다. 성경도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타인의 내적·외적 상황을 깊이 살피도록 초대한다. 마태오복음은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라는 황금률을 선포한다. 1726년 「걸리버 여행기」가 출판되었을 때, 이 책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완판되었을 정도로 당대에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소인국, 거인국, 날아다니는 섬 등의 놀라운 상상력은 독자들의 관심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아동문학으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사실 인간 본성과 문명의 어두운 면들 그리고 18세기 영국 사회의 문제들을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있는 조너선 스위프트의 대표 풍자소설이다. 제2부에서 유럽의 정치 제도, 전쟁, 화약과 총기의 사용에 대한 걸리버의 이야기를 들은 거인국 브롭딩낵의 왕은 이렇게 말한다. “자네 나라의 인간들은 자연이 이제껏 이 지구상에서 기어다니게 한 벌레 중에서도 가장 고약한 벌레들이라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네.” 가장 자주 인용되는 이 말은 특히 인간의 이기적 오만함과 거만함에 대한 일침이다. 돈을 벌기 위해 선원들을 대상으로 진료하는 의사였던 걸리버는 어느 날 자신이 타고 있던 배가 난파되어, 우연히 소인국에 표류하게 된다. 지극히 평범했던 주인공은 소인국에서 자아와 우월감이 극대화되는 오만함을 경험한다. 개미 같은 소인국 사람들과의 압도적인 신체 차이로 인해 주인공은 보통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절대적 존재가 된다. 그의 우월성은 신체적 감각을 통해 느껴진다. 그들이 쏘아대는 수많은 화살은 그에게 거의 상처를 입히지 못하고, 사람들을 장난감처럼 다루며, 수백 명분의 식사를 한 번에 먹어 치운다. 걸리버는 아무리 많은 군인이 자신을 공격하더라도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소인국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뿐만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자각한 것이다.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릴리퍼트인들을 짓밟을 수 있는 절대적 지배의 가능성을 통해 우월감이 내면에 자리 잡는다. 걸리버는 블레푸스쿠 제국의 군함 50척을 밧줄로 엮어 릴리퍼트 왕국의 항구로 모두 끌고 와 적의 침략을 막아낸다. 뭍에 상륙한 그를 황제는 온갖 찬사로 반겼고, 즉석에서 그 나라 최고의 호칭인 나르닥이라는 작위를 수여한다. 걸리버 자신의 우월한 정체성은 내면에서뿐만 아니라, 외적인 인정으로 한층 부풀어 오른다. 소인국에서 우월했던 주인공…거인들 앞에서는 미약한 존재 식민 지배 횡행했던18세기…오만한 권력을 향한 신랄한 비판 복음적인 가치 강조하면서도…실천하기 힘든 현실 드러내 그러나 제2부 거인국에서 주인공은 소인국 사람들의 처지가 되어 굴욕과 무력감을 겪게 된다. 소인국에서 부풀어 오른 자만심에 주변 사람들의 상황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그는, 홀로 남은 땅에서 거인들을 목격하고 처음으로 소인국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게 된다. “릴리푸트 사람 하나가 영국인들 속에 있다면 아주 우습게 보일 것처럼, 내가 현재 이 나라에서 앞으로 얼마나 가소롭게 보일 것인지 생각하면 괴롭기 짝이 없었다.” 소인국에서 엄청난 힘을 발휘했던 그 신체는, 이제 거인들 앞에서 왜소하고 미약한 존재가 된다. 평소 상대조차 되지 않았던 대상들 앞에서 살아남기 위해 쩔쩔매야 한다. 농부의 어린 아들은 그의 한쪽 다리를 붙잡아 공중에 매달아 올린다. 갓난아기는 걸리버를 꽉 움켜쥐고 그의 머리를 입에 넣으려 하다, 그의 비명을 듣고 놓아준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걸리버가 여성과 비슷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는 면이다. 당시 여성들은 독립적 주체로서 인격과 존엄성을 보장받기보다는, 신체를 타인의 사용이나 쾌락을 위한 대상 혹은 상품으로 취급받으며, 남성에게 종속되었다. 주인공도 어른이지만 항상 상자 속에 들어 있는 채로 옮겨 다니고 보호받아야 하는, 즉 강요된 의존 상태를 경험한다. 농부의 딸인 글럼달클리치는 인형 침대를 개조해 걸리버를 재우며, 옷을 입혀주기도 하고 벗겨주기도 했다. 옷도 여러 벌 만들어 주었다. 18세기 여성 패션의 확산과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패션 인형처럼, 걸리버의 몸은 상품화된다. 상품화된 여성의 몸은 응시(gaze)의 대상이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농부의 아홉 살 된 딸에게 종속되어 인형처럼 다뤄지는 걸리버도 응시의 대상이 된다. 그의 작은 몸은 호기심 혹은 신기함의 대상으로 관찰되고 전시되며, 구경거리로 돈벌이가 되었다. 심지어 왕비의 시녀들은 그를 ‘구경도 하고’, ‘완전히 발가벗겨서는 품에 껴안’기도 하는 등, ‘아주 역겨’운 행동을 했다. 18세기 영국은 아일랜드를 식민 지배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토지 소유권을 박탈당하고 종교 차별을 받았으며,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다. 아일랜드 성공회 신부였던 스위프트는 누구보다도 억압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걸리버 여행기」뿐만 아니라, 다른 저서들에서도 사람들을 억압하는 권력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주저하지 않았다. 「걸리버 여행기」 제1부와는 대조적으로 제2부에서 주인공이 겪는 굴욕과 무력함은 바로 억압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작가는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지배하는 자들의 자기중심적 오만함에서 벗어나, 억압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헤아려보도록 초대한다. 미약한 존재가 된 걸리버는 그리스도교 윤리에서 강조하는 소외된 존재들과 구조적으로 비슷한 위치에 있다. 예수님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라고 가르침으로써, 작은 이들이 예수님만큼 중요한 존재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중요한 존재라는 인식에 멈추지 않고, 그들의 아픔을 함께 느끼신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감옥에 갇힌 이들을 여러분도 함께 갇힌 것처럼 기억해 주고, 학대받는 이들을 여러분 자신이 몸으로 겪는 것처럼 기억해 주십시오.”(히브 13,3) 비록 걸리버는 거인국에서 ‘체구가 작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우습고 골치 아픈 일을’ 당해야 했지만, 그 이후 나머지 이야기에서 도덕적 변화를 보여주지 못한다. 여기에 저자의 중요한 통찰이 있다. 억압받는 사람들에 대한 공감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반드시 실천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지내면서, 교회의 반석인 베드로 사도는 물 위를 걷다 믿음이 흔들려 물에 빠져버리거나,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 복음사가가 이런 이야기를 전해주는 이유는 베드로 사도를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복음의 가치를 실천하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발행일 2026-06-14 제3495호 19면

[교회상식 더하기] 성체를 모시면 죄가 사라진다?

우리는 미사를 드리기 전에 죄가 있다면 먼저 고해성사를 청하곤 합니다.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그분의 잔을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게”(1코린 11,27)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꼭 죄가 없는 깨끗한 상태에서만 성체를 모실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영성체는 우리 죄를 정화하고, 또 죄에서 보호해 준다는 것 알고 계신가요? 트리엔트공의회 교부들은 성체성사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통해 살아 있는 사람들을 양육하고 굳건하게 하는 영혼의 영적 양식이며 또한 우리를 일상의 잘못들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고 죽을죄로부터 지켜 주는 해독제로 받아 모셔지기를 원하셨다”고 가르칩니다.(「성체성사에 관한 교령」 제2장) 이처럼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죄에 물든 인간을 치유하는 치료약에 비유하곤 했습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성사론」에서 “내가 계속 죄를 지으니 치료약이 늘 필요하다”면서 “언제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도록 언제나 성체를 모셔야 한다”고 영성체의 효과를 가르쳤습니다. 이 말씀을 바탕으로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성찬례는 성사 생활의 충만함이지만 완전한 이들을 위한 보상이 아니라 나약한 이들을 위한 영약이며 양식”이라고 강조하셨지요.(「복음의 기쁨」 47항)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마태 26,28)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영성체는 우리를 죄에서 떼어 놓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체성사가 죄를 용서해 주는 효과가 있지만, ‘죽을죄’를 용서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성체성사는 어디까지나 교회와 일치된 사람들을 위한 성사이기 때문입니다. ‘죽을죄’를 용서하는 성사는 고해성사입니다. 대죄를 부르는 말인 ‘죽을죄’는 “인간이 하느님보다 못한 것을 하느님보다 낫게 여김으로써 그의 최종 목적이며 행복이신 하느님께 등을 돌리게” 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855항) ‘죽을죄’가 성립되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먼저 그 죄가 십계명 등에 해당하는 ‘중대한 문제’고, 그것이 죄라는 사실을 완전히 의식하고 있으며, 이를 고의로 저지른 경우에 해당합니다. 반면 중대한 문제가 아닌 가벼운 문제에 대해 죄를 지었거나, 중대한 문제를 어겼지만 이를 완전히 인식하지 못했거나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았다면 ‘용서받을 죄’, 즉 소죄입니다. 간혹 죄를 반복적으로 짓게 되니 고해성사를 하는 것에 회의감이나 부담감을 느껴서, 미사를 드리더라도 성체를 모시지 않는 분도 계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체는 우리의 소죄를 씻어주고 미래의 ‘죽을죄’로부터 보호해 주는, 죄 앞에 나약한 우리를 위한 해독제라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인간적인 의지만으로 극복하기 어렵다면,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통해 예수님께 의탁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발행일 2026-06-14 제3495호 20면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믿음을 통해 구원은 시작되고, 사랑을 통해 구원은 완성된다

구원은 인간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에게서 온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서 온다. 그리스도교는 구원의 주도권이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깨달음을 추구함으로써 얻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이루어진다. 사이비 교주가 아니라 참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이루어진다. 바로 이것이 복음이다. 아무런 공로도 없는 인간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 복음이다. 따라서 구원은 믿음을 통해 이루어지며 하느님의 선물이자 은총인 것이다. 결국 믿음을 통해 구원은 시작되고 사랑을 통해 구원은 완성된다. 따라서 정의로운 삶과 사랑의 삶 없이는 구원은 완성되지 않는다. 하느님이 살아 계시다는 믿음 속에서 구원은 시작되는 것이다. 이 살아 계신 하느님이, 나를 예수님을 통해 구원하셨다는 믿음 속에서 구원은 시작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라는 존재는 이미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은 존재’이며, 하느님이 창조하신 자연과 인간 그리고 교회를 통해 ‘나라는 존재는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존재’라는 믿음 속에서 구원은 시작되는 것이다. 이 믿음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정의와 사랑의 삶을 살 때 구원은 완성되는 것이다. 속된 말로 절이나 암자에서 ‘도 닦으며 앉아 있다’고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다. 길거리에서 “불신 지옥, 믿음 천국” 한다고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이미 나의 믿음을 통해 시작되었으니, 나의 정의로운 삶과 사랑의 삶을 통해 완성하는 것이 가톨릭교회의 신앙이다. 혼자 어려우니까 하느님의 백성과 함께 완성하는 것이 신앙이다. 말로만 하는 신앙은 반쪽짜리며, 교회의 신앙과는 거리가 멀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으로 받아들인 이 믿음 안에서 정의와 사랑의 삶을 살 때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자라고 해서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고, 사제와 수도자라고 해서 다 구원받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께 대한 굳센 믿음 안에서 정의와 사랑의 삶을 살 때 구원은 완성되고 더 큰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내가 죄인이고 정욕을 지닌 인간이지만, 예수님께서 가신 사랑의 길을 걸을 때 구원받음을 믿는 것이다. 내 의지를 통해 율법을 지키고 깨달음을 얻을 때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해도, 깨달음을 다 얻지 못해도 나의 연약함을, 나의 ‘죄성’을 거룩한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 고백하고 사랑의 길을 가겠다고 다짐하고, 사랑의 길을 가는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다. 이 사랑의 길을 걸음으로써 나의 죄까지도 씻어진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구원의 길이고 이 길을 가는 자는, 사랑의 길을 가는 자는 누구나 구원받는다. ‘오로지 사랑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이 진리를 믿는 것이다. 예수님이 가신 사랑의 길을 가는 자, 누구나 구원을 받는 것이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도룡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6-06-07 제3494호 20면

[교회상식 더하기] 왜 성혈은 모시지 않을까?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우리가 성찬의 전례 때마다 듣는 말씀입니다. 문득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모두에게 당신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하셨는데, 정작 미사 때 우리는 성체만 모시는지 궁금해집니다. 성혈은 왜 모시지 않는 걸까요? 그 이유는 성체와 성혈 안에 “온전한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실재적으로, 그리고 실체적으로 담겨 계신다”는 우리의 믿음에 있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374항) 비록 우리의 눈에는 빵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의 살이고, 또 모든 지식과 감각을 동원해도 포도주로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님의 피라는 것을 믿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아주 작은 성체의 한 조각이나 성혈 한 방울일지라도 그것이 예수님의 일부분이 아니라 완전하고 온전하게 계신 예수님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 성체나 성혈 중 어느 한 가지 형상만을 모시더라도 “그리스도를 참된 성사로, 온전하게, 그리고 모두 다 모시는 것”이고 “구원에 필요한 은총을 얻는 데 아무런 결함이 없다”는 것입니다.(「미사 경본 총지침」 282항) 트리엔트공의회 교부들은 요한복음의 말씀을 들어 이 내용을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해주시려고 내어주시는 당신의 몸과 피에 관해 설명하시는데요. 이때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생명의 빵”(6,48)이심을 강조하셨습니다. 교부들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6,53)고 말씀하신 분께서 또한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6,51)이라고 하신 것을 상기시키면서 “단형 영성체로도 구원에 충분하다는 것”을 가르칩니다.(트리엔트공의회 제21회기 「영성체에 관한 교리와 법규들」 제1장) 물론 단형 영성체로도 충분하지만, 역시 양형 영성체가 성찬 잔치의 표지를 한층 더 완전하게 드러냅니다. 양형 영성체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새롭고 영원한 계약이 주님의 피로 맺어졌다는 사실이 더욱 뚜렷이 표현되며, 성찬 잔치와 아버지 나라에서 이루어질 종말 잔치의 관계가 더욱 분명히 나타나기 때문”입니다.(「미사 경본 총지침」 281항) 그래서 세례 후 첫영성체 등 전례서에 규정된 경우나 피정·영성 모임·사목 모임 등의 경우 양형 영성체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거룩한 빵과 포도주를 모독할 위험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당부합니다.(교황청 경신성사부 「구원의 성사」 101항) 아무래도 성체와 달리 성혈은 분배할 때 엎지르거나 흘릴 염려가 크니 조심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미사 때 성체의 수가 부족할 때 신부님께서 성체를 작게 쪼개서 나눠주시기도 하지요. 우리 눈에는 너무도 작은 조각이지만, 온전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신비를 기억하면 어떨까 합니다. “그 한 방울만으로도 온 세상을 모든 죄악에서 구해 내시리이다.”(‘성 토마스의 성체 찬미가’ 중)

발행일 2026-06-07 제3494호 20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인간 행복을 보장하는 정당한 법의 기초: 자연법

지난 회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법이 인간이 지닌 이성적 본성을 실현하고 공동체 안에서 번영을 이룰 수 있도록 보호하는 울타리 역할을 수행한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그는 결코 소크라테스의 말로 오해되어 널리 퍼져나갔던 ‘악법도 법이다’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악법이란 “법이 아니라 법의 타락”(I-II,95,2)이나 “폭력”(96,4)이라고 주장했다​. 만일 어떤 법이 공동선을 지향하지 않고 특정 집단의 이익이나 권력자의 욕망을 위해 작동한다면, 그것은 법의 본성을 잃은 것이다. 이런 경우 법치주의의 위기를 넘어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된다. 그래서 법의 정당성은 형식이나 절차만으로 결정되지 않고, 그 내용이 정의와 선에 부합하는지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 실제로 역사적으로 많은 규칙이 법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지만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경우들도 있었다. 인종차별을 제도화한 법, 특정 종교나 민족 집단의 권리를 박탈한 법, 정치적 반대자를 침묵시키기 위해 제정된 긴급조치 등은 모두 외형상 법일 수 있다. 그러나 토마스의 기준으로 보면, 그것들은 공동선을 지향하는 이성의 질서가 아니라 권력의 왜곡된 의지를 제도화한 것에 가깝다. 나치 독일의 인종차별법이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법제는 이런 점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특히 현대 사회가 직면한 실증주의의 위기 속에서, 도덕적 기초가 결여된 법은 인간의 양심을 따르기는 커녕 사회적 혼란만을 야기할 뿐이다. 법의 보호적 기능과 타락 가능성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정당한 법’의 기준을 명확히 세우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그 기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제기된다. 과연 무엇이 정당한 법을 정당한 법이게 하는가? 토마스의 대답은 자연법과 영원법의 관계 속에서 제시된다. 자연법의 제1원리: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 토마스는 우선 사변적 학문의 영역에서 이성의 제일원리인 모순율이 있는 것처럼, 도덕의 영역에는 ‘선을 행하고 추구하며, 악을 피해야 한다’(I-II,94,2)는 윤리의 제1원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극히 단순해 보이는 이 원리에서 제시된 객관적인 선이 무엇인지를 토마스는 ‘자연법(lex naturalis)’의 사상 안에서 찾는다. 이미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 그리고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연적인 윤리 법칙’이라는 사상과 용어를 사용했다. 토마스는 이를 받아들여, 이성적인 피조물은 “영원한 이성 자체를 분유하게 되어, 그것을 통하여 마땅한 행동과 목적으로의 자연적 경향성을 갖는다”(I-II,91,2)고 말한다. 이러한 인간의 도덕률은 인간의 본성 자체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자연법’이라고 불린다. 따라서 자연법은 인간 안에 새겨진 선(善)의 기준이다. 토마스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적으로 생명을 보존하려 하고, 진리를 알고자 하며, 타인과 함께 사회를 이루어 살고자 한다​. 이러한 성향들은 단순한 본능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선한 방향을 드러낸다. 따라서 법은 이런 기본 성향들을 보호하고 질서 있게 실현하도록 도와야 한다. 예를 들어서, 생명 보존의 성향은 살인 금지와 안전 보호의 기초가 되고, 진리 추구의 성향은 교육과 양심의 자유를 뒷받침하며, 사회적 삶의 성향은 정의와 약속의 준수라는 원리로 이어진다. 자연법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최소한의 도덕 질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이 만든 ‘인정법’은 이러한 자연법에 어긋나면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성에 의해서 반포된 자연법은 어떠한 초월적 근거도 지니고 있지 않을까? 토마스는 자연법을 ‘이성적 피조물의 영원법에 대한 참여(participatio)’(I-II,91,2)라고 정의한다. 즉, 모든 인간이 이성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자연법도 그 뿌리를 신적인 영원법에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영원법’이란 무엇인가? 법에 도덕적 기초가 결여되면 인간 존엄성 해치고 혼란 야기 영원법에 근거한 자연법으로 실증법의 자의적 횡포에 맞서야 인간 본성 속의 선을 실현하고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어 법의 형이상학적 토대: 영원법 ‘영원법(lex aeterna)’은 온 우주를 다스리는 신적 지혜 그 자체로서, 모든 피조물을 각자에게 적합한 행위와 목적으로 인도하는 궁극적인 근거가 된다.(I-II,93,1) 토마스는 자연법이나 영원법이 자의적이거나 독단적이라는 주장을 피하기 위해, 영원법이 본래 신의 의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범형적인 이데아를 생각하는 신의 지성에 근거함을 밝혔다. 우주의 질서와 만물의 운동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영원법에 의해 규정된 목적론적 체계 속에 존재한다. 따라서 모든 정당한 인간 법체계는 영원법이라는 거대한 질서의 한 부분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인간의 법은 영원법이 가리키는 객관적 진리를 반영할 때만 진정한 법으로서의 권위를 갖는다.(I-II,93,3) 영원법은 법이 권력자의 자의적인 의지로 변질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최후의 보루가 된다. 인간은 이 영원법 전체를 직접 파악하지는 못하지만,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에 참여할 수 있다. 자연법을 통한 인간 존엄과 행복의 수호 토마스 아퀴나스가 정초한 자연법과 영원법의 체계는 인간의 행복을 지키기 위한 가장 견고한 형이상학적 울타리다. 인간이 추구하는 영원한 행복(지복직관)이 그의 자연적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신의 힘으로 주어진 영원법에 의해서 인도되어야 한다. 이러한 토마스의 통찰은 현대 법치주의가 망각하기 쉬운 도덕적 좌표를 제시한다. 법은 힘의 논리가 아니라 인간 존엄성이라는 보편적 실재를 수호하기 위한 이성적 기획이어야 한다. 이 점은 현대 인권 개념과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 평등권, 신체의 자유와 같은 기본권은 국가가 임의로 부여한 혜택이 아니다. 그것들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존엄을 지키기 위한 조건들이다. 토마스의 사상은 ‘인간 존엄성’이 법적 관습이나 합의에 의해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법에 참여하는 이성적 본성으로부터 유래하는 형이상학적 실체임을 일깨운다. 자연법은 실증법이 저지를 수 있는 자의적인 횡포에 맞설 수 있는 절대적인 비판 기준을 제공한다. 결국 자연법을 따르는 ‘정당한 법’만이 인간을 억압하거나 통제하지 않고, 모든 인간이 자신의 본성적 선을 온전히 실현하고 공동체 안에서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글 _ 박승찬 엘리야(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발행일 2026-06-07 제3494호 19면

[말씀묵상]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영적 고전 「러시아에서 그분과 함께」의 저자인 월터 J. 취제크 신부님은 1940년 위장 이주노동자로 소련에 잠입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체포되었습니다. 강제노동 수용소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그분은 비밀리에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23년 만에 미국으로 귀환하기까지의 긴 세월 속에서, 마지막 미사를 봉헌한 지 5년 만에 다시 드린 어느 날의 미사를 신부님은 잊지 못했다고 회고합니다. 건포도로 만든 미사주와 부엌에서 간신히 구한 빵, 위스키 유리잔과 회중시계 뚜껑을 성작과 성반 대신 사용해 봉헌한 그 미사의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강제노동 수용소라는, 인간의 존엄이 철저히 짓밟히던 자리에서 이루어진 그 미사의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 거룩한 양식이 그들의 참된 생명이었습니다. 그들을 지탱한 힘은 더 많은 음식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삶을 붙들고 계심을 깨닫게 해 준 성체였습니다. 우리가 먹는 양식은 단순히 생존을 유지하는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신앙을 형성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길러낸 양식은 만나였습니다. 그래서 신명기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신명 8,3) 우리는 살기 위해 매일 양식을 먹습니다. 주님의 기도에서도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청합니다. 그런데 성찬례에서 우리가 먹는 양식은 단순한 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과 피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먹고 마심으로써 그분과 하나가 되어 예수님의 마음과 삶의 방식을 닮아가게 됩니다. 이 양식은 우리 존재 깊은 곳에서 하느님을 갈망하는 굶주림을 채우며 우리를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빚어 갑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5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신다는 것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그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1코린 10,16) ‘살과 피’는 성경에서 한 인간의 생명과 존재 전체를 뜻합니다.(마태 16,17; 1코린 15,50; 히브 2,14 참조)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그분의 생명 전체,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시는 선물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를 통해 우리를 당신과의 친교 안으로 초대하시며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장 일상적인 빵과 동일시하며,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요한 6,51)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그분이 우리의 일상과 배고픔 속으로 들어오신 분임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빵을 매일 먹어야 하듯이, 성체는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양식이며 우리는 이를 통해 그분과 점점 더 일치하게 됩니다. 성체는 우리의 내면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화합니다. 우리가 먹는 양식이 우리를 형성하듯이, 영적 양식인 성체는 우리를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이끌어 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빵을 먹는 사람은 그분과의 친교 안에 머무릅니다. 우리는 성찬례에 참여함으로써 개인의 영적 성장 안에서 성체의 소중함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동시에 공동체적으로도, 성찬례에 참여하는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이라도 한 몸입니다”(1코린 10,17)라는 진리 안에서 상호 일치와 친교의 형제애를 살아가게 됩니다. 성체를 모시는 우리는 서로 나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우리는, 서로에게 형제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체는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를 묻는 양식입니다. 우리가 모시는 그 빵이 오늘 우리의 삶이 되게 합시다. 글 _ 전봉순 그레고리아 수녀(예수 성심 전교 수녀회)

발행일 2026-06-07 제3494호 18면

[말씀의 우물] 성령의 열매는?

사도 바오로는 육의 행실(부도덕)을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갈라 5,19-20) 등 열다섯 가지나 나열합니다. 이어서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를 열거합니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갈라 5,22-23) 여기 나오는 부도덕(악덕)을 네 종류로 나누어 봅니다. 첫째, 불륜, 더러움, 방탕 등은 우리의 사랑을 빗나가게 합니다. 둘째, 우상 숭배와 마술은 하느님 예배(경신례)를 빗나가게 합니다. 셋째, 분열과 분파 등은 사랑의 끈을 풀어 서로 갈라지게 만듭니다. 넷째, 만취와 흥청대는 술판 등은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며 인간성을 타락시킵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가운데 사랑은 뒤따르는 여덟 가지 덕목의 으뜸 개념입니다. ‘육(肉)의 행실’을 나타내는 그리스말 본문은 본디 ‘육의 행실들(ta erga te-s sarkos)’로 복수로 쓰인 데 반해, 성령의 열매 ‘사랑(agape-)’은 단수로 쓰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다양하지만, 그 모든 열매는 결국 사랑이라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신약에서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가장 짧게 설명해 주는 구절을 대라면 다음 둘을 꼽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은 영이시다.’”(요한 4,24) 요한의 첫째 서간 저자는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한마디로 서술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 훗날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요한의 첫째 서간 주해에서 말합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바를 행하라.” ‘신비의 하느님이 누구신가?’에 한마디로 요한의 첫째 서간은 ‘사랑(agape-)’이시라고 서술해 줍니다. 첫째가는 계명이 하느님 사랑이라면 둘째가는 계명은 이웃 사랑입니다.(마르 12,29-31 참조) 따라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저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쭈그러들 때는 소화력도 떨어지고 기쁨도 줄어들지만, 거꾸로 사랑이 충만해질 적에는 의욕도 생기고 기쁨도 솟아남을 느낍니다. 지난해 무더운 여름 7월과 8월을, 산골짜기 작은 농장에서 작물도 가꾸고 닭과 개 두 마리를 돌보며 지냈습니다. 처음에는 1~2m씩 거리를 두던 닭들에게 3주 정도 지나면서, 기본 먹이 외에 씀바귀, 참비름, 상추 등 즐기는 것을 뜯어다 주었더니, 닭들이 거의 손에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오면서 부리로 손등이나 신발을 장난치듯 툭툭 건드리기도 하면서 마치 친구를 대하듯 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 생각이 났습니다. ‘사랑을 주면 식물도 동물도 친근해지고 기쁨과 풍요로움으로 보답하는구나.’ 아울러 시편 노래가 마음속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숨 쉬는 것 모두 주님을 찬양하여라. 할렐루야!”(시편 150,6) 함께 시편으로 기도드리시겠습니까?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주님께서도 복을 베푸시어 우리 땅이 그 열매를 내어 주리라.”(시편 85,11-13)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6-07 제3494호 18면

[말씀묵상]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청소년 주일

오늘 교회는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한 분 하느님이시지만 세 위격으로 존재하시는 신비입니다. 삼위일체는 인간 이성으로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삼위일체를 단순히 ‘이해해야 할 어려운 교리’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야 할 ‘하느님의 삶’으로 가르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모세는 시나이산으로 올라갑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금송아지를 만들며 하느님을 배반했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이렇게 드러내십니다.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다.” 이는 구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하느님의 자기 계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먼저 전능함보다 자비를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느님을 무서운 심판자로 상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느님의 가장 깊은 중심이 자비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그 앞에 엎드려 말합니다.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 걸어가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복음이 말씀하는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습니다”라는 것은 삼위일체 신앙의 핵심이며 그리스도교 전체를 요약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세상’은 단순한 자연만이 아니라 때로 하느님을 거부하는 인간 세계까지 포함합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그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사랑의 신비입니다. 저는 얼마 전 교구에서 인공지능(AI)에 관련된 사제연수에 참여하여 AI에 대한 장점과 문제점을 듣고 매우 놀랐습니다. 영성과 가장 극한이 되는 물성의 끝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AI는 ‘머뭇거림이 없습니다.’ ‘빠릅니다.’ ‘물음에 답을 완성합니다.’ AI가 ‘인간의 뇌를 닮게 만들었다’ 해서 인공지능일 텐데, 현대의 바벨탑 곧 하느님의 자리에 오르고 있는 신격 모사처럼 보였으며, 인간이 하느님의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인간이 1만 년 동안 읽을 책의 단어를 48시간 만에 읽어댄다니, AI는 수학입니다. 그래서 최소한의 인문학적 가치와 특히 신학적 가치로 검증하지 않으면 인류의 재앙이 될 것을 간파했습니다. 연수의 마지막 메시지는 AI와 대화하지 말고, 필요한 때만 도구처럼 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AI가 불가역적 사건이고, 기왕에 하느님을 닮으려면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따랐으면 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삼위일체의 성부께서는 성자를 내어주시고, 성자께서는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시며, 성령께서는 그 사랑을 우리 마음 안에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삼위일체는 닫혀 있는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친교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삼위일체를 설명하면서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성부는 성자를 향하고, 성자는 성부께 응답하며, 성령은 그 사랑의 일치라고 설명합니다. 즉 삼위일체의 중심은 고독한 힘이 아니라 사랑 안의 관계입니다. 동방 교부들은 이것을 ‘페리코레시스’라고 불렀습니다. 즉, 서로 안에 머무시는 사랑입니다. 성부는 성자 안에 계시고, 성자는 성부 안에 계시며, 성령은 그 사랑 안에서 일치하십니다. 삼위일체 안에는 경쟁도 없고, 지배도 없으며, 고립도 없습니다. 완전한 자기 증여와 완전한 사랑의 일치만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추상적 감정이 아니라 실제로 세상을 구원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하느님의 가장 깊은 뜻은 멸망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하지만 AI는 하느님의 뜻과 충분히 반대로 갈 수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에서 우리는 삼위일체 신앙의 핵심을 다시 봅니다. 삼위일체는 혼자 계시는 분이 아니라 친교의 하느님입니다. 성령께서는 인간을 하느님과 그리고 서로 연결하시는 분입니다. 삼위일체는 사랑의 방식입니다. 가정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자기주장만 하면 일치는 깨집니다. 그러나 서로 들어주고, 기다려 주고, 용서해 줄 때 사랑은 살아납니다. 본당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완벽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사랑을 배워가는 공동체입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때 흩어진 우리의 마음은 조금씩 하나가 되고, 우리는 마침내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참된 평화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글 _ 곽승룡 비오 신부(대전교구 태안본당 주임)

발행일 2026-05-31 제3493호 18면
기사 더보기더보기아이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