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상식 팩트 체크] 성모님께 바치는 기도는 없다?

성모 성월을 맞아 많은 분들이 성모님을 기억하며 기도를 바치시리라 생각합니다. 성모님하면 떠오르는 기도도 많은데요. 우리가 가장 가깝게 바치는 기도로는 성모송이 있겠고요. 그리고 묵주기도가 있습니다. 흔히 묵주기도는 로사리오(rosario), 바로 장미꽃다발이라는 의미로 성모님께 장미꽃다발을 봉헌하는 기도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런데 성모상을 유심히 살펴보신 분들이라면 성모상 중에 묵주를 들고 기도하는 성모님의 모습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셨을 것 같습니다. 성모님이 자기 자신에게 장미를 선물하고 싶으신 것은 아닐 테고요. 성모님은 왜 묵주를 들고 기도하시는 걸까요? 교회는 그 이유로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성모님께서는 구원 임무를 그치지 않고 계속하시어 당신의 수많은 전구로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얻어 주신다”고 말합니다. 성모님은 하느님 섭리의 계획에 따라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어머니이시자 겸손한 종이셨기 때문에 우리 구원을 위해 끊임없이 전구하고 계시다는 것이지요. 물론 구원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다만 성모님은 “영혼들의 초자연적인 생명을 회복시키고자 온전히 독특한 방법으로 구세주의 활동에 협력”하고 계십니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헌장」 61~62항) 전구는 누군가가 바라는 것이 이뤄지도록 함께 기도해주는 중재기도를 말합니다. 이를테면 기도가 필요할 때 가족이나 주변 신자들에게 “기도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경을 통해 고백하듯이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는 우리는 천상교회에 있는 성모님이나 성인, 복자들에게도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라고 전구를 청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송을 바칠 때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라 하고, 부활삼종기도에서도 “저희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 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우리가 성모님께 바친다고 생각하는 기도들이 실은 성모님께 바치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 바쳐달라고 성모님께 부탁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인 중에서도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의 첫 기적이 이뤄지도록 전구하신 성모님께 청하는 전구는 각별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단순히 기도를 청하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며, 교회의 어머니”로 공경하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성부의 뜻과 성자의 구속 사업과 성령의 모든 활동에 전적으로 헌신함으로써 교회를 위해 신앙과 사랑의 모범”이 되십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967항) 교회는 성모님을 어머니로 공경함으로써 성모님의 덕행을 본받아 신자들이 죄를 극복하고 성덕 안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물론 성모님을 향한 이 공경은 하느님께 드리는 흠숭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하지만, 성모님을 공경하는 일은 오히려 그 흠숭을 최대한 도와줍니다.(「교회헌장」 66항)

[알기 쉬운 미사 전례] 예물 준비 성가? 봉헌 노래?

오랫동안 성가대 봉사를 하신 신자분이 “예물 준비 성가라고 해야 하나요? 봉헌 노래라고 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이 질문은 전례위원회에서 2008년 라틴어 제3표준 개정판의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을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이 용어에 대해 논의했던 과정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라틴어인 ‘cantus ad offertorium’(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37, 74항)을 어떻게 번역하느냐가 관건이었습니다. 이미 2009년에 발간된 「한국 천주교 성음악 지침」에서는 ‘예물 준비 성가’라고 표현을 했었기에 이를 따를 것인지, 아니면 직역을 하여 ‘봉헌 노래’라고 할 것인지를 논의하면서 다른 언어권에서의 번역을 비교 검토한 결과 직역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2017년 「한국 천주교 성음악 지침」 개정판에는 ‘봉헌 노래’(57항)를 기본으로 하고 옆에 (예물 준비 성가)라고 하여,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지요. 봉헌 노래는 신자들이 예물을 제단으로 가져가는 행렬에 동반하며, 적어도 예물을 제대 위에 차려 놓을 때까지 계속하는데, 분향이 이어질 경우에는 분향을 마칠 때까지 노래를 계속합니다. 이렇게 상을 차리고 고유 음식인 빵과 포도주를 가져다 놓는 예식을 ‘예물 준비’라고 하며, 이는 최후 만찬 때 그리스도께서 당신 손에 드셨던 빵과 포도주와 물을 제대로 가져가는 행위에서 유래했습니다. 초기에는 교우들이 예물을 아무런 기도나 노래 없이 행렬을 지어 제대로 가져갔으나, 4세기 말경부터 행렬이 더욱 길어지고 예물 봉헌의 의미를 드러내는 행렬에 동반한 성가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8세기까지 동방이든 서방이든 누룩 든 일반 빵을 성찬 빵으로 사용했습니다. 9세기에 이르러 서방에서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 때 사용하는 누룩 안 든 빵 사용을 도입하였고, 11세기경에는 현재와 같은 작은 제병들이 일반화되었습니다. 그러나 동방은 여전히 누룩 든 빵을 성찬 빵으로 사용합니다.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들고 하는 ‘예물 준비 기도’는 유다인들의 전통적인 파스카 축제, 학가다에 포함된 축복 기도인 베라카의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빵 축복 기도는 빵이 하느님의 선물이고 땅의 열매이며 인간 노동의 결실임을 기억하고, 이 빵을 주님께 돌려드리면서 생명의 빵인 주님의 몸이 되게 해주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포도주에 물을 섞는 이유는 고대 관습이 그대로 예식에 들어온 것으로, 의미는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인간인 신자 공동체의 결합을 상징합니다. 잔 축복 기도는 포도나무를 가꾸어 얻은 결실인 술을 주님께 돌려드리니 구원의 음료, 곧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온 인류를 위해 흘리신 피가 되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빵과 포도주를 우리의 예물로 준비하며 아버지 하느님께 이 빵과 포도주를 마치 우리를 보듯 보아 달라고 청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준비합니다. 예물을 준비한다는 것은 예물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봉헌한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이것은 곧 주 예수님께서 감사 기도에서 아버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놓으시듯, 그분을 통하여,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서, 그분에 의해 봉헌되는 제물처럼 우리 자신을 ‘높이 들어 올리는’ 과정의 시작입니다. 글 _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 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2024-05-19

[말씀묵상] 성령 강림 대축일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부활 제7주간이 끝나고 맞이하는 주일, 곧 주님 부활 대축일 후 49일이 되는 날에 교회는 성령께서 한자리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내려오신 사건을 기념합니다. 사도행전 저자는 오순절에 일어난 성령 강림 사건을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현상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성령께서 내려오심은 귀로 들을 수 있는 현상입니다. “거센 바람이 부는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사도 2,2) 또한 성령 강림은 눈으로도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사도 2,3) 여기에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바람’과 ‘불꽃’은 성령의 활동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696항 참조) 히브리인들에게 이날은 ‘오순절’ 축제입니다. 그들은 과월절 첫날에서 일곱 주간이 지난 시반 달(5월) 6일에 축제를 지냈는데. 이 오순절 축제는 농경민족이었던 가나안인들이 첫 번째 보릿단을 수확할 때 지냈던 맥추절에서 비롯됐습니다(신명 16,9-13; 레위 23,15-16). 히브리인들은 이날 함께 모여 하느님께서 노아와 맺으신 계약을 되새기고, 또한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시나이 산에서 율법을 주신 사건을 기념했습니다. 성령 강림 사건으로 오순절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날이 됐습니다. 사도들에게 성령이 내려오심으로써 그리스도의 파스카 사건이 완성됐기 때문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731항 참조). 사도들은 성령으로 충만해져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파견됐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날은 노아와의 계약 또는 시나이산의 계약을 기념하는 오순절 축제일이 아니라 교회의 시작을 알리는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내려오심으로써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위업이 널리 알려지게 됐으며, 이는 모든 민족들에게 기쁜 소식이 됐습니다.(「강론지침」 56항 참조) 유학시절, 제가 거주하던 교구에서는 매년 성령 강림 대축일에 사제서품식을 거행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성령 강림 대축일에 사제서품식이 거행되는 사실에 특별한 의미 부여를 하지 않았습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을 보내면서 그 이유를 다시 한번 생각해봅니다. 아마도 제대 앞에 엎드려 서품을 받은 이들이 성령을 받고 파견을 받아 하느님께서 아들 예수님께 맡기신 구원의 사명, 곧 사도들에게, 그리고 사도들을 통해 후임자들에게 위임된 하느님의 일을 수행하도록 특별한 은총을 청하는 바람이 담겨 있지 않을까요? 성령 강림 대축일 미사전례에서 선포되는 복음은 오순절의 성령 강림 사건과 직접적 연관성이 없어 보입니다. 이 점은 흥미롭습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여러 사건 중 하나를 전해주는데, 이미 부활 제2주일에 선포됐던 복음 말씀으로 오늘 복음은 그 전반부에 해당합니다.(요한 20,19-31) 요한복음서 저자에 따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주간 첫날 저녁에 유다인들이 두려워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평화를 빌어주면서 숨을 내쉬어 ‘성령’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여기에서는 ‘숨을 내쉬다’ 혹은 ‘숨을 불어넣다’라고 번역할 수 있는 그리스어 동사 ‘엠퓌사오’가 사용되고 있는데, 이 단어는 구약성경의 창조 이야기에서도 발견됩니다.(칠십인역)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첫 번째로 사람을 만드시면서 당신의 영을 불어넣어 생명을 주신 것처럼(지혜 15,11 참조), 예수님께서는 부활, 곧 새로운 창조를 통해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어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성령 강림 대축일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가 ‘복음’으로 선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주간 첫날 저녁”에 일어난 사건이 오순절에 완성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적대자들의 손에 넘겨지시기 전에 당신의 제자들에게 ‘보호자’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요한 14,15-31 참조), 이 약속은 주간 첫날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성령을 받아라.”라고 말씀하시며 성취됐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약속이 성취됐음은 오순절에 제자들이 모인 곳에서 다시 한번 확인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세상으로 파견을 받습니다. 그들의 사명은 믿는 이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요한 6,39-40.57 참조)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았기에, 누군가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 또한 받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가 성령 강림 대축일의 복음으로 배정된 두 번째 이유는 성령 강림 사건이 부활 사건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기 위함입니다. 부활 제2주일에 선포된 복음이 성령 강림 대축일에 다시 한번 선포됨으로써 성령 강림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분리된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파스카를 완성하는 사건임이 증명됩니다. 50일 전 파스카 성야 미사에서 ‘알렐루야’를 다함께 노래 부르며 시작된 부활축제가 어느덧 끝나갑니다. 그러나 부활의 축제는 성령 강림 대축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은 축제의 새로운 시작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축제는 주님께서 당신의 충만함에서 풍성하게 부어주신 성령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축제입니다. 우리 각자의 삶이 파스카의 신비를 살아가는 증거가 될 수 있도록 성령의 은총을 청하며 기도합시다. “오소서, 성령님, 믿는 이들의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그들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성령 강림 대축일 복음환호송) 글 _ 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2024-05-19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무적 장사(壯士) 삼손

중학교 시절 단체 관람으로 친구들과 함께 영화 ‘삼손과 들릴라’를 보았다. 솔직히 지금 생각나는 장면은 삼손이 사자를 맨손으로 죽이는 것과 소경이 된 그가 기둥을 무너뜨려 사람들과 함께 죽는 것만 기억난다. 나중에 성경을 읽으면서 들릴라가 필리스티아인들의 계략으로 삼손에게 일부러 접근한 스파이인 것을 알게 되었다. 미인계는 일반적으로 예쁜 여자가 남자를 유혹하여 조종하는 작전을 의미한다. 현대의 가장 유명한 미인계 첩보전은 누구나 한 번쯤 들었을 만한 ‘마타 하리’ 사건이다. 네덜란드 출신인 마타 하리는 아름다운 미모와 춤 실력을 이용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정보기관에 포섭되어 연합군 고위 장교들을 유혹해 군사 기밀을 빼돌렸다. 그녀는 스파이 활동이 발각되어 1917년 10월 15일 프랑스 정부에 의해 총살형을 받았다. 마타 하리는 배짱이 좋아 총살을 당할 때도 눈가리개도 거부하고 군인들에게 ‘총을 계속 들고 있는 것도 힘들 테니 어서 쏘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마음에 거슬리는 생활을 하자 필리스티아인들의 지배를 받게 했다. 단 지파의 마노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아내는 아기를 낳지 못했다. 하루는 하느님의 천사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 이제 곧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몸을 조심하여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말고 부정한 것을 일절 먹지 말라고 당부했다. 천사는 또 한 가지 특별한 명령을 내렸다. 아들을 낳으면 그의 머리카락에 면도칼을 대지 말라며 모태에서부터 이미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으로 이스라엘을 필리스티아인들에게 구원할 것이라 전했다. 마노아의 아내는 천사의 말대로 아들을 출산했고 삼손이라 이름을 지었다. 삼손은 엄청난 힘을 가진 장사였다. 삼손은 당나귀의 턱뼈를 들어서 필리스티아인 1000명을 때려죽일 정도로 힘으로는 그를 상대할 수 없었다. 필리스티아 사람들은 꾀를 내어 미모가 출중한 들릴라를 포섭해 삼손에게 접근했다. 들릴라는 그의 힘이 근원이 머리카락임을 알게 되었다. 들릴라는 삼손이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그의 머리카락을 잘라버렸다. 머리카락이 잘린 삼손은 힘이 빠져 필리스티아 군인들에게 잡혀갔다. 필리스티아인들은 삼손의 눈을 빼어 소경으로 만들고 노예로 부리며 재주를 피우게 하며 복수하고 농락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삼손의 머리카락이 자라났다. 삼손은 축제가 있던 날에 한 소년의 도움을 받아 집의 기둥을 무너뜨려 많은 필리스티아인들과 함께 최후를 마쳤다. 삼손은 큰 힘을 발휘하며 승승장구했다. 삼손이 경각심을 잃고 방심한 것이 그의 죽음을 초래했다. 삼손의 괴력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힘이었다. 우리가 가진 탈렌트는 모두 하느님께서 주신 무상의 선물이다. 이것을 망각하고 교만해질 때 오히려 우리의 탈렌트가 오히려 독이 되어 멸망케 한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한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5-19

[알기 쉬운 미사 전례] ‘보편지향기도’인가 ‘신자들의 기도’인가?!

신학생 때 읽었던 책 중 요즈음 다시 읽는 책이 있습니다. 루이 에블리의 「어떻게 祈禱할 것인가」인데, 서두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는 아주 적게 기도하고 보기 드물게 기도하며 또 보잘 것 없이 기도한다. … 무엇보다도 우리는 몹시 분주한 사람들이다. 우리의 생활은 활동과 혼란, 때로는 선행으로 가득 차 있다. … 즉 우리는 일을 정지하고 정신을 집중시키며 기도하는 것을 피하려고 한다.”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이 통찰력있는 지적은 저를 부끄럽게 합니다. 예수님은 혼자보다는 이웃과 함께, 그리고 당신의 이름으로 모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과 약속에 힘입어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권고합니다.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청과 기도와 전구와 감사를 드리라고 권고합니다.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여, 우리가 아주 신심 깊고 품위 있게,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1티모 2,1-2; 2코린 1,11; 에페 6,18-19 참조). 이러한 모범에 따라 교회는 이미 1세기 말경부터 세상 구원을 위한 특별기도를 전례 중에 바쳤습니다. 95년경에 기록된 클레멘스 교황 저서에는 고통받는 이, 국가 지도자, 평화 등을 위한 여러 청원 기도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강론 후 예비 신자들을 보낸 다음 신자들만 남아서 이 기도를 바쳤는데, 기도 내용은 일정하지 않았지만 대체로 예비 신자들과 모든 이의 구원이 그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 전통이 남은 형태는 성금요일 주님 수난 예식에서 바치는 ‘보편지향기도’인데, 당대의 기도 내용과 형식을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기도가 사라진 원인은 전례 시간을 줄이려는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노력 때문이었다고 전례 역사가 테오도로 클라우저는 「서방 전례의 역사」에서 밝힙니다. 현재의 ‘신자들의 기도’와는 달리 기도의 수가 많았고, 각 기도 다음에 주례자의 본기도가 있어서 다소 장황했으며, 반복이 잦아서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축일 미사가 세 시간 이상 지속되는 것을 문제 삼은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개혁을 통해 신자들의 기도를 없앴습니다. 당시 ‘신자들의 기도’에 대한 회중의 응답이던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는 현재의 자비송이 되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는 1400여 년 전 사라졌던 ‘신자들의 기도’의 가치를 인정하여 복구시켰습니다. 그러면서 전통적으로 사용한 용어인 ‘신자들의 기도’(oratio fidelium)와 예전에 사용하던 ‘공동기도’(oratio communis)를 ‘보편지향기도’(oratio universalis)로 대신하면서, 누가 기도하고, 어떤 지향으로 해야 하는 지를 더욱 분명하게 했습니다. 이 기도는 세 가지 특징, 곧 ‘하느님을 향한 간청’이며, ‘보편적인 선’을 지향하고, ‘교우들의 참여와 그들의 현실 반영’을 특징으로 합니다. 세례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여 세상 구원을 위하여 헌신, 봉사하는 사람임을 이 기도를 통해 실천합니다. 물론 기도한 내용을 살아가려는 실천 의지가 있어야 결실을 볼 수 있음도 기억해야 하지요. 글 _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2024-05-12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성모상에도 종류가 있다?

성당 입구에서 신자들을 맞이하는 성상이 있지요. 바로 성모상입니다. 성모님은 가톨릭신자라면 아마 누구나 사랑하는 성인이 아닐까합니다. 그런데 여러 성모상을 자세히 살핀 분이라면, 성모상의 모습이 대체로 몇 가지 모습으로 나뉜다는 것을 발견하셨을 듯합니다. 성모상의 모습이 서로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저 유명한 작품을 따라 만들어서 그런 것일까요? 그 이유는 아무래도 많은 성모상이 ‘성모 발현’의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모 발현이란 성모님이 특별한 방법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 보이신 일입니다. 기적의 메달에 새겨져 있기도 하고, 레지오마리애 회합에 사용해서 볼 수 있는 성모상은 1830년 프랑스 파리 뤼드박에서 성 가타리나 라부레 수녀님에게 발현한 성모님의 모습입니다. 이 성모상은 머리에는 흰 수건을, 어깨에는 푸른 망토를 두르고 양손을 아래로 펼쳐 보이는 모습인데요. 발로 지구를 감싼 뱀을 밟고 있는 모습이 특징입니다. 혹시 성모상이 동굴에 모셔져 있다면, 1858년 프랑스 루르드에서 나타나신 성모님의 모습이 아닐까 살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루르드 성모상은 흰 머리 수건과 흰 옷, 푸른 허리띠를 착용하고, 묵주를 들고 기도하는 형상입니다. 발 등에는 노란 장미가 있습니다. 성모님은 루르드의 마사비엘르 동굴에서 성 베르나데트 수녀에게 이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1917년 포르투갈 파티마에서 세 어린 목동에게 발현한 성모님은 전신을 감싸는 흰 베일에 지구 모양을 한 금색 목걸이를 하고 있는 형상입니다. 묵주를 팔에 걸고 두 손을 모은 채 구름 위에 서 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성모상은 비오 12세 교황님이 1946년 ‘세계의 여왕’으로 선포해 왕관을 쓴 모습으로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또 푸른 망토에 붉은 옷, 검은 허리띠를 두르고 기도하는 인디언 여인 형상의 성모상이라면 1531년 멕시코 과달루페에서 발현한 성모님의 모습이고, 루르드 성모상 같은 복장인데 고개를 왼쪽으로 살짝 기울인 성모상이라면 1933년 벨기에 바뇌에서 발현한 성모님의 모습입니다. 성모님은 이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발현할 때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메시지를 전하셨지요. 물론 성모 발현과 관계없이 예술적으로, 또 성모님에 관한 교리를 담아 성모님을 표현한 성모상들도 다양하고 많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다양한 성모상을 통해 성모님을 기억하는 이유는 성모님을 공경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느님 백성의 성화를 증진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의 어머니로 세우신 천주의 성모 복되신 평생 동정 마리아께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특별하고 효성 지극한 공경을 권장”하고 “신자들이 성인들의 모범으로 성장하고 성인들의 전구로 도움을 받는 올바른 경배도 장려” 합니다.(교회법 제1186조) 성모상을 앞에서 그냥 고개만 숙이고 지나치기보다 이 성모상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 성모님은 이 성모상을 통해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계시는지 생각하며 기도하면 어떨까요. 성모님의 모범을 따라 예수님께 나아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2024-05-12

[말씀묵상]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이며, 대중매체를 통한 효과적인 교회 사도직 수행을 강화하기 위해 제정된 홍보 주일입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이 홍보 주일로 제정된 이유를 조심스럽게 짐작해보자면,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는 특별사명을 제자들에게 내리신 때문일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과 승천으로 인간의 품위를 들어 높이신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도록 ‘복음 홍보대사’로 부름받았습니다. 가톨릭신문사로부터 ‘말씀묵상’ 원고청탁을 받고 망설일 무렵, 친구 수녀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수녀님 모친 고 분다(베네딕타) 어르신은 시골 작은 동네에 사시는 여건상 주일미사를 대체로 공소예절로 하셔야 하는데, 부족한 부분 때문에 매주 가톨릭신문을 꼭 읽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가톨릭 홍보 매체에 대한 지평이 넓어진 순간인 것은 물론, 가톨릭신문이 수행하는 ‘집 안으로 찾아가는 교회’ 역할이 강렬하게 다가왔었습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은 주님께서 강복하시며 하늘로 오르신 사건으로, 언제나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신 영원한 축복의 복음입니다. 아울러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는 주님의 승천은 부활 사건의 완결입니다. 그런데 주님 승천과 같은 중요한 사건에 대하여 복음서가 매주 적은 지면만 할애하고 있다는 것이 조금은 의아합니다. 마르코복음의 승천 이야기는 단 한 구절에 불과하고 마태오와 요한복음은 승천 이야기를 아예 생략했으며, 루카복음 역시 후속책인 사도행전에 유보한 탓인지 매우 짤막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 간결한 서술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이 들려주는 주님 승천 이야기를 요약하면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승천은 주님의 지상 사명의 완성으로 사도들 앞에서 일어난 공개적 사건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주님 승천은 주님 재림의 약속과 더불어 성령의 약속까지도 주어집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듣게 되는 마르코복음은 승천하시는 주님께서 사도들과 우리 모두를 복음선포 홍보대사로 위촉하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신 이유는 그들에게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기 위함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사명은 세상을 향해 기쁜 소식을 선포(16,15)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마르코복음에 나타나는 부활 메시지 전체는 다른 이를 향한 기쁜 소식의 선포에 있습니다. 무덤에서 천사로부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여인들에게 선포되고, 여인들은 제자들에게 전해야 하는 책임을 부여받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부활 체험과 주님 부활 소식은 선교라는 사명으로 귀결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마르코복음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승천 후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셨음을 알려줍니다.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셨다’는 사실은 최초의 순교자 스테파노와 사도신경이 선포하지만, 복음서에서는 마르코만이 전하는 사건입니다. 시편(2편과 110편)의 말씀을 상기시키는 이 구절을 마르코가 전하는 이유는, 예수께서 하느님의 외아들이심을 확증하고, 그분이 우주의 통치자가 되심을 보여주기 위한 것 같습니다. 승천하심으로 주님의 일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늘에 계시면서, 동시에 선교 사명을 수행하는 이들과 함께하시며 다섯 표징으로 보증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쫓겨나고, 새로운 언어를 말하고, 손으로 뱀을 잡고 독을 마셔도 무해하며, 병자들을 치유하는 놀라운 이적들이 그 보증입니다.(16,17-18) 이것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 모든 일을 직접 목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명령은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당신께서 하시던 일을 위임하신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당신이 하셨던 귀한 일을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이렇듯 주님은 부재하면서도 존재하는 경이로운 방식으로 늘 우리와 함께하시며, 거리를 극복하고 계십니다. 마르코복음은 주님 승천 후 제자들이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파견받은 제자들이 표징과 더불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16,20) 주님의 약속이 그들에게 크고 대담한 배포를 선물한 듯 보입니다. 기적의 첫째 목적은 기적 그 자체에 있지 않고 사람들이 복음을 믿도록 도움을 주는 데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교회의 탁월한 본보기로, 그분의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선교 사명은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이라는 근원에 닿아있습니다.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는 말씀에서 우리의 선교지가 ‘온 세상’임을 확인합니다. 지역과 대상의 제한 없이 온 세상이 우리의 일터인 것입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한 가지는, 말씀의 첫 번째 선포 대상은 언제나 ‘나’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복음의 증거자입니까? 방관자입니까?’ 예외 없이 적용되는 이 사명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 우리의 존재가 말씀이 선포되는 현장 속에 있는지 되짚어 보아야겠습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에 우리 삶의 지표를 재정립하는 은총을 빕니다. 글 _ 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2024-05-12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유리천장을 깨트렸던, 드보라 판관

미국 최초 여성 대통령을 꿈꿨던 힐러리 클린턴은 선거 유세 내내 유리천장을 깨뜨릴 것이라 주장했다. 그는 대선에서 낙선한 후 “언젠가 누군가는 그 유리천장을 깨뜨릴 것이다”라며 의미 있는 메세지를 전했다. 유리천장(glass ceiling)은 충분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직장 내 성 차별이나 인종 차별 등의 이유로 고위직을 맡지 못하는 상황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경제학 용어이다. 유리천장이란 말은 우선 ‘성’(gender)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되기 쉽다. 대신학교 1학년 학보사 기자 시절 학보인쇄를 위해 하루 종일 어느 작은 출판사와 인쇄소에서 머무른 적이 있었다. 여직원은 경리를 맡은 한 사람이 있었고 나머지는 남직원들이었다. 남직원들이 여직원을 대하는 것을 보며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현재 법적 차원에서는 모두 성추행 등 위법행위가 될 말과 행동이 수없이 자연스럽게 행해졌다. 더 큰 문제는 여직원을 같은 동료가 아니고 다른 차원의 사람으로 차별을 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 유리천장은 존재한다고 느낀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가 죽은 뒤 왕정시대에 들어가기 전까지 이스라엘은 판관시대를 맞게 된다. 판관이란 왕은 아니지만 민족을 지도하는 통치자로서 사법과 행정을 관할하는 직분을 맡은 사람이다. 판관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위급한 국가위기 상황에서 군인들의 총사령관 역할도 담당했다. 이스라엘의 판관 중 드보라는 유일한 여성이다. 여성이 사회적 불평등을 당하던 당시에 여자 판관은 아주 예외적인 일이다. 여자 예언자 드보라는 이스라엘 백성을 통치하면서 재판을 주관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주변의 정세는 가나안 왕이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드보라는 만 명의 군인을 출동시키면서 자신도 함께 전선에 참여했다. 가나안 군이 상상할 수 없는 무기로 공격해 오는 것을 보고도 드보라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스라엘군에게도 계속 공격을 명령했다. 패배감에 젖어있는 이스라엘 군인에게 하느님께서 우리들 앞에서 전진하니 꼭 승리할 것이라 확신과 용기를 주었다. 결국 이스라엘 군인의 높은 기세에 눌려 적군은 도망쳤고 이스라엘은 승리를 쟁취한다.(판관기 4장 참조) 드보라는 지혜와 용기, 신앙을 겸비한 여성 정치가였다. 그녀는 용기 있는 결단으로 민족을 구한 이스라엘의 국모(國母)로 추앙받은 인물이다. 능력이나 역할의 차이는 있지만 인간성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고 누구나 평등하다. 신앙인에게는 어떠한 인종, 문화, 사회적이나 성적 차별이 존재해선 안 된다. 무엇보다 생각과 의식이 변화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 차별의 선입견이 존재하지는 않는지 늘 반성해야 한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5-12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성모님 축일은 얼마나 많을까?

누가 “성모님의 축일이 언제냐”고 물으면 언제라고 답을 할까요? 많은 분들이 1월 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떠올리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전례력을 잘 살펴보신 분이라면 ‘어? 성모님 축일이 또 있는데?’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것 같습니다. 성모님의 축일은 몇 번일지 궁금해지는데요. 그래서 「전례력」을 꺼내서 2024년에 성모님에 관련된 축일이 몇 번인지 하나씩 세어봤습니다. 축일은 크게 대축일, 축일, 기념일로 나뉘는데요. 먼저 성모님을 기념하는 대축일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성모 승천 대축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그리고 ‘성모 영보’를 기억하는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이 있습니다. 축일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이 있고요. 그리고 기념일들이 11개 있습니다. 이렇게 2024년 전례력에 있는 성모님 축일을 세어보니 16개나 됩니다. 성모님의 축일은 참 많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모님의 축일은 이게 다가 아닙니다. 실제로는 성모님의 축일이 더 있습니다. 이를테면 올해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9월 8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9월 15일)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2월 11일)들이 전례력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올해는 이 축일들이 주일과 같은 날이기 때문입니다. 축일과 같은 전례일에는 등급과 순위가 있는데요. 축일과 기념일은 주일과 같은 더 큰 전례일이 같은 날에 겹치면 그 해에는 지내지 않습니다.(「전례력 규범」 60항) 교회는 초기 교회부터 성모님을 공경하며 기념해 왔습니다. 특히 431년 에페소공의회를 통해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하면서 축일들이 제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에페소공의회가 끝난 후 곧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에서는 8월 15일에 하느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 축일을 거행했습니다. 순교자들의 죽은 날을 축일로 삼듯이, 성모님이 승천하신 날을 축일로 삼았던 것이지요. 이후로 성모님을 기념하는 다양한 축일들이 생겨나 오늘날처럼 많은 성모님의 축일이 생겼습니다. 비교적 최근에도 성모님의 축일이 새롭게 제정됐는데요.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지난 2018년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을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월요일에 지내도록 선포하셨습니다. 교회가 전례력에서 이렇게 많은 성모님의 축일을 기념하는 이유는 성모님의 축일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구원 신비와 끊을 수 없는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부들은 “그리스도의 신비의 이 연례 주기를 지내는 동안, 거룩한 교회는 당신 아드님의 구원 활동과 풀릴 수 없는 유대로 결합되어 있는 천주의 성모 복되신 마리아를 특별한 사랑으로 공경한다”면서 “그분 안에서 교회는 구원의 뛰어난 열매를 경탄하고 찬양하며, 이를테면 그 지순한 표상 안에서 자신이 온전히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열망하는 모습을 기쁨으로 바라본다”고 가르칩니다.(「전례헌장」 103항)]

2024-05-05

[알기 쉬운 미사 전례] 교회의 ‘신앙 고백’인 ‘신경’

정신없이 살다 보면 계절의 변화를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고 ‘덥다’와 ‘춥다’로 표현하는 단순한 삶을 살기 쉽습니다. 그러나 잠깐 멈추어 주변의 꽃과 나무,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에 취해서 ‘참 이쁘다’라는 감탄, 곧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고백은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만듭니다. 이렇게 감성에 열린 마음이면 인간 역사에 개입해 당신 사랑을 드러내신 하느님을 깨닫고 그분에 대해 고백하는 것도 쉬워집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에서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로마 10,10)라고 했지요. 신자들은 강론 후에 잠시 침묵을 하면서 막 들은 복음과 강론을 묵상하고 한 목소리로 ‘신앙 고백’(Professio fidei) 곧 ‘신경’(Symbolum)으로 하느님 말씀에 응답합니다. ‘신앙 고백’이 처음 행해진 곳은 ‘미사’가 아니라 ‘세례’입니다. 성 치프리아노(+258)가 처음으로 세례 때 행하는 신앙 고백에 ‘상징’을 뜻하는 ‘Symbolum’이라는 용어를 적용합니다. 특정한 세계에 속한 사람들 간의 상호 식별과 인정 수단인 ‘Symbolum’을 신앙 고백에 사용한 것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믿음이 다른 종교와 구분되게 하는 ‘상징’이라는 의미이지요. 다양한 신경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2세기경 예루살렘의 세례 고백문이었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러나 현존하는 것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3세기 초엽 히폴리투스 교부가 저술한 「사도전승」에 수록된 세례 고백문입니다. 미사 중에 신앙 고백을 하기 시작한 시기는 5세기 후반이며, 안티오키아 교회가 가장 먼저 도입하였고, 6세기 말경에는 스페인의 톨레도 시노드(589년)를 시작으로 하여 갈리아 등 서방에도 번져갔습니다. 당시 교회가 미사에 신경을 도입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던 아리아니즘 이단을 막고 믿음의 기본 도리를 확고히 심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신경의 위치가 현재와 같이 복음 후로 변경된 시기는 8세기경이었으며, 1014년에 이르러 로마 전례에서는 신경이 미사에 들어왔습니다. 현행 로마 전례에서는 두 신경, 곧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과 ‘사도 신경’을 바칩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예루살렘에서 사용하던 세례 신앙 고백이 발달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 신경은 니케아 공의회(325년)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381년)를 거쳐 칼케돈 공의회(451년)에서 결정된 교회의 공식 신경입니다. ‘사도 신경’은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서방 교회의 세례 신앙 고백에서 발달했으며, 3세기경에 이미 기본 골격이 형성됐습니다. ‘사도 신경’이라는 명칭은 성 암브로시오가 393년에 성 시리치오 교황(재위 384~399년)에게 보낸 편지에서 처음 발견됩니다. ‘신경’은 주일과 대축일 및 성대하게 지내는 특별한 미사 때에 사제와 교우들이 함께 노래하거나 낭송합니다. 신경을 바칠 때, 구원의 시작인 주님의 탄생과 관련된 구절에서 깊은 절을 하여 육화의 신비와 파스카 신비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합니다. 5000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보고 예수님께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 6,28)라고 묻는 군중처럼, 많은 신자들 경우 자신이 무엇인가를 행하는 것과 신앙생활을 동일시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9)라고 하시며, ‘먼저 참된 믿음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고백하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답하십니다. 글 _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2024-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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