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평신도 주일

오늘 제1독서의 예언자 에제키엘이 살았던 시대는 지금부터 26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기원전 587/6년 이스라엘은 가나안 건국 이래 처음으로 완전히 주권을 잃고, 많은 백성이 정복국인 바빌론으로 끌려갑니다. 에제키엘이 활동한 장소도 이스라엘이 아닌 바빌론 땅이었습니다. 그는 자신보다 먼저 예루살렘에서 활동을 시작한 예레미야와 더불어 ‘성전과 예루살렘 파괴’라는 충격적 사건을 극복하고 이스라엘 신앙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 공을 세운 예언자입니다. 그는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파기한 백성의 죄를 들며 예루살렘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혹독한 심판을 예고하였지만 멸망이 실현된 뒤에는 제2의 탈출, 곧 ‘바빌론 탈출’을 예고하여 동족을 위로하고 회복된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계약 파기 죄로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런 메시지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에제키엘서의 절정에 자리한 오늘 제1독서의 내용입니다.(에제 47,1-12) 이는 에제키엘이 환시 가운데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보고 그 생명력을 예언한 것입니다. 이 환시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시대에 성전이 재건되면 새 성전에서 생명수가 흘러나와 큰 강을 이룰 것입니다. 그 강은 지나는 곳마다 모든 것을 살아나게 하며 죽음의 바다인 사해(死海)까지 닿아 그곳 역시 살아나게 합니다. 제1독서 8절에 언급된 ‘바다’가 사해임은 ‘아라바’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습니다. 아라바는 예루살렘과 가까운 동편 계곡의 이름이며 사해는 성경에서 ‘아라바 바다’(신명 3,17; 여호 3,16 등)라는 이름으로 종종 등장합니다. 사해의 부활 예고는 당시 백성에게 매우 적절한 메시지였습니다. 왜냐하면 나라를 잃고 유배 생활하던 그들은 죽음의 바다에 빠진 듯이 절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사해는 죽음 같은 유배살이를 상징한 곳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백성을 용서하시고 성전으로 다시 돌아오시면 성전에서 생명수가 솟아나 사해를, 곧 죽은 듯 보인 이스라엘을 부활시켜 주리라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성전수 신탁에는 에덴동산 모티프가 많이 쓰입니다. 첫 번째 모티프는 산입니다. 에덴이 ‘하느님의 거룩한 산’이라 일컬어지듯(에제 28,13-14; 창세 2,8 참조) 에제키엘서 40장 2절과 43장 12절에 따르면 새 성전도 높은 산 위에 봉헌됩니다. 두 번째는 과일나무입니다. 에덴동산에 과일나무가 많이 자랐듯이(창세 2,9 참조) 제1독서의 12절에도 성전 생명수로 말미암은 과일나무, 시들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 나무들이 언급됩니다. 세 번째는 강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흘러나온 강 하나가 네 줄기로 갈라져 흘렀듯이(창세 2,10 참조) 제1독서에서는 성전에서 솟아난 물이 강이 되어 흘러갑니다. 히에로니무스와 안티오키아의 테오도루스는 생명을 주는 이런 성전수에서 죄를 용서받고 새로 태어나도록 돕는 세례수를 떠올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전수가 큰 강이 되어 흘러간다는 이 예언은 흥미롭게도 예루살렘의 실제 지형을 충실하게 반영한 신탁입니다. 사해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30km가량 떨어진 곳으로서 바다 밑 400m에 자리합니다. 그에 비해 예루살렘은 해발 750m의 고지대라 사해와 고도차가 1km 이상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수가 아라바로 내려가 강을 이룬다는 제1독서의 묘사처럼, 지금도 예루살렘에 비가 내리면 고도가 낮은 아라바 계곡으로 모여 휘몰아치는 강처럼 사해로 흘러들게 됩니다. 다만 에제키엘이 전달한 새 성전 신탁은 바빌론 유배 뒤에도 문자 그대로 실현된 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에제키엘서에서는 재건될 성전을 묘사하기만 할 뿐 그걸 지어야 한다는 명령도 빠져 있는데요. 의미심장하게도 이후 예수님께서 당신 몸이 성전이 되리라고 예고하십니다.(요한 2,19-22 참조) 교부들은 에제키엘이 예언한 새 성전이 마지막에 도래할 하느님 나라, 곧 이상적 교회를 표현한다고 보았습니다. 어쩌면 에제키엘은 실제 성전이 아니라 시대적으로 요구되는 관념상의 성전으로 예고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를 성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실현하셨고요. 이처럼 제1독서의 성전수도 성전이 되실 예수님에게 적용되기에 이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라 합니다.(요한 7,37-38 참조) 에제키엘서의 새 성전 환시는 요한 묵시록 21장에서 22장의 천상 예루살렘 묘사에도 큰 영향을 주었는데, 그 가운데 성전수 신탁은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의 강 이미지에 반영되기에 이릅니다.(묵시 22,1-2 참조) 글 _ 김명숙 소피아(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이는 큰 신비입니다”(에페 5,32)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 이는 큰 신비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에페 5,31-32) 사도 바오로는 남자와 여자의 혼인과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을 유비로 선포하면서 ‘큰 신비’라 했다. 큰 신비에 함축된 여러 의미를 적어도 세 가지 측면에서 짚고 갈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에서 남자와 여자의 혼인(창세 1~2장 참조)에 대한 재조명이고, 두 번째는 하느님께서 때가 찰 때까지(갈라 4,4 참조) 숨겨 두신 혼인의 계획이고, 세 번째는 그리스도와 교회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혼인에서 완성돼야 할 ‘한 몸’의 신비다. 혼인의 내적 의미인 이 세 가지가 혼인이 가야 할 길이고, 진리이며, 역동하는 생명, 곧 사랑의 길이다. 먼저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과 가장 오래된 혼인과의 관계다. 사도 바오로는 단순히 외적인 유사성을 설명하기 위해 이 둘의 관계를 유비로 사용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에서 그들의 혼인을 재조명하라는 이유는 부부가 나누는 사랑이 서로에게 구원성을 갖기 때문이다. 공적으로 동의하고 맺은 혼인의 계약은 존중과 신의 그리고 사랑의 충실을 담보로 한다. 그리고 변화 성숙의 여정을 거쳐 완성에 이른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기쁨과 고통, 슬픔과 즐거움의 일들은 거룩한 신비에 참여하는 길이고, 이 참여를 통해 혼인의 성사성이 갖는 본질을 드러낸다. 그리스도가 신랑으로 제시된 이유는 혼인이 영원한 신적 신비의 가시적 표징이 되는 성사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교회, 남편과 아내를 결합시키는 이 유비에 놀라움을 더하는 것이 있다. 티도 주름도 없는(에페 5,27 참조), 즉 추함도 늙음과 노쇠함도 없다는 죄에 대한 은유적 표현을 통해 사랑이 ‘영원한 청춘’에 머물러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 사랑을 영적인 아름다움의 표징으로 이해했다. 교회도 부부도 이런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중심축으로 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때 그들이 나누는 혼인적 사랑이 서로에게 구원적 사랑으로 변모되는 것이다. 사랑의 질서는 자신을 내어주는 방식이고, 아가페적 사랑이 그 정점이다. 이러한 사랑으로 변모하는 과정이 쉬운 것은 아니다. 눈물과 상처 그리고 좌절을 체험할 것이고, 후회와 간절함에도 포기하지 않는 과정을 통해 여물어진다. 즉 서로를 받아 내고 품는 과정을 통해 둘만의 새로운 시간들이 창조로 이어진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먼저 고찰한 후 사도 바오로가 말한 신랑 신부의 관계를 바라본다면 혼인의 의미는 사뭇 달라진다. 이는 둘이 하나되기 전 원고독의 이중성(본성 그 자체로서 오는 것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과 완전한 주체성, 상호주체성의 재발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교리서는 말한다. 결국 혼인의 본질은 인간과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의 신비가 그 원천이며,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혼인적 사랑으로 시간 안에서 완성되는 구원의 신비가 그 중심이다. 이러한 여정을 사랑의 신학 용어로 설명하면, 에로스적 특성이 넘치는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 어떻게 십자가 특성이라 할 수 있는 아가페적 사랑으로 화해할 수 있는가이다. 에로스적 사랑의 특징은 자신에게 갇혀 있지 않다. 자신을 열고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사랑에 그의 존재가 드러난다. 그리스도를 바라봄과 자신들의 체험 사이에서 역동하는 사랑은 그들이 하느님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그들에게 발견되고 드러나야 할 신비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11-09 제3465호 19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예수님을 죽인 바리사이파 사람들

지금은 이스라엘 성지순례가 어렵지만 시간이 지나서 전쟁 상황이 정리되면 많은 분들이 이스라엘의 성지를 찾을 것이다. 과거에도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할 때 안식일이 되면 상점들이 모두 문을 닫거나 시내가 텅텅 비고 호텔 엘리베이터도 정지되는 경우가 많다. 유다교의 중심은 율법이다. 율법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토라’는 본래 ‘가르침’이란 뜻이다. 율법이란 십계명을 중심으로 한 하느님 백성의 생활과 행위에 관한 하느님의 명령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 모든 이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도록 율법이 만들어진 것이다.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받은 십계명 등은 바로 율법의 뼈대가 된다. 사회가 복잡하게 발달하면서 율법도 세분됐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은 613개 조항으로 세분되고, 248개의 명령과 365개의 금령으로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율법 중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들 같은 경우에도 아주 자세하게 열거되어 있다. 나뭇가지와 잎을 뽑거나 자르기, 잔디 깎기, 화초에 물주기도 할 수 없다. 밭을 갈거나 씨를 뿌리기, 타작하기, 알곡 고르기, 빻기나 찧기도 금지된다. 심지어 불 켜기와 끄기도 할 수 없다. 특히 바리사이파(Pharisees)는 예수님이 활동하던 시기에 유다교의 중요한 분파이다. 기원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에 함락된 후 바리사이파는 유다교의 기초가 되었다. 신약성경에서도 바리사이파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되고 이들은 율법을 중심으로 한다. 율법 학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모세 율법을 가르치기 때문에 가장 존경받았다. 그런데 예수님이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라며 율법 학자들을 직접 공격하는 장면이 나온다.(마태 23,1-36 참조) 율법은 이스라엘 교육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은 교육을 받을 수 없고 율법을 모르니까 지킬 수 없어 이미 죄인으로 판단 받을 수밖에 없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죽이려 작정했을까? 예수님이 반대한 것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형식적으로 지키는 율법주의이다. 예수님은 율법의 중심은 바로 하느님과 이웃사랑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예수님은 율법의 준수와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율법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이 중요하다는 새로운 율법을 선언했다.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고 완성했다.(마태 5,38-48 참조) 시간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의 기본 정신을 잃어버렸고 모세가 전해준 율법은 변질되었다. 예수님 자신이 길이고 생명이므로 그분이 곧 율법의 완성이 되는 것이라 했다. 예수님이 선포하는 복음을 따르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사람들에게 인기도 높아졌다,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해칠 것으로 생각되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작정했다. 유다교에서는 현재도 예수님을 한 사람의 예언자로 여길 뿐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유다교는 여전히 다윗 왕조를 다시 회복할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11-09 제3465호 18면

[사막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죽음을 기억하라!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이는 사막 교부들의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다. 삶도 아닌 죽음을 기억하라니, 좀 낯설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의 전제이자 또 다른 삶(생명)으로 건너가는 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적 죽음은 생명을 품고 있는 죽음이라 할 수 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삶은 너무 허무할 것이다. 또 죽음이 없다면 삶은 어떻게 될까? 탄생만 있고 소멸은 없다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일이 벌어질 것이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삶은 곧 죽음이요, 죽음은 곧 삶이다. 플라톤은 참된 철학은 죽음에 대한 준비라고 하였다. 삶은 죽음에 대한 준비와도 같다. 결국 잘 죽기 위해 잘 사는 것이라 하겠다. 죽음을 기억함 거룩한 사람들은 죽음을 잘 맞이하기 위해 늘 준비했다. 특히 4세기 이집트 사막 수도승들은 끊임없이 죽음을 묵상하며 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살았다. 수도승은 매일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생각은 초기 수도승 문헌에서 자주 발견된다. 이는 낙담과 자포자기를 피하는 탁월한 수단이었다. 죽음에 대한 기억은 한편으론 수도승을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주고, 다른 한편으론 덕을 닦고 실천하도록 부추긴다. 금언들은 수도승들이 어떻게 이 규칙을 실천했는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압바 안토니우스는 이렇게 권고한다. “매일 죽어야 하는 것처럼 산다면,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매일 우리가 깨어날 때 저녁때까지 살지 못하리라고 생각해야 함을, 그리고 다시 침대에 눕는 순간에 우리가 더 이상 깨어나지 못하리라고 생각해야 함을 의미합니다.”(안토니우스 생애 19,2-3) 에바그리우스와 카시아누스는 마카리우스의 다음 말을 반복했다. “수도승은 마치 다음 날 죽을 것처럼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프락티코스 29; 규정집 5,41) 압바 루푸스는 이렇게 말했다. “언제 도둑이 오리라는 것을 모른다는 것을 기억하며 장차 닥칠 형제의 죽음을 기억하십시오.”(루푸스 1) 또 어떤 원로는 “나는 매일 아침저녁 죽음을 기다린다”고 말했다. 또 어떤 원로는 이렇게 권고하였다. “당신이 잠잘 때 당신 자신에게 물어보시오. ‘내일 아침 나는 잠에서 깨어날 것인가 깨어나지 못할 것인가?’”(익명의 압바 592) 이 외에도 많다. 결국 죽음을 늘 기억하는 것은 바로 오늘이 생애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교부들은 무엇보다 매일 새롭게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열정을 유지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우리가 매일 죽는 것처럼 산다면 결코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 항상 죽음 묵상한 수도승들…영원한 안식 얻기 위해 노력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매 순간 소중히 여기며 살길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 어느 날 갑자기 도둑처럼 찾아오는 이 손님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승리의 월계관을 얻으려고 경기장을 벗어나지 않고 끝까지 잘 달려간 사람들, 소위 거룩한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한 모습은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많다. 물론 모두가 똑같은 방식으로 죽음이라는 손님을 맞이하지는 않았지만, 거기에는 공통분모가 있다. 곧 모두 이 손님을 환대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특히 사막 수도승들은 자주 자신을 죽음으로 몰았던 질병과 마찬가지로 죽음 역시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계속 죽음에 대해서 생각했고 자주 이야기했다. 사막 교부들은 죽음을 두려운 불청객으로 맞이하지 않았고, 오히려 늘 깨어 죽음이라는 손님을 맞이하려고 준비했으며, 죽음을 이 세상의 노고에서 해방해 주는 고마운 친구로 생각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이처럼 거룩한 삶을 살아간 사람들에게 죽음은 불청객이 아니라 오히려 친구요 벗이었다. 하지만 죽음을 친구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늘 깨어 준비할 필요가 있다. 준비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죽음은 늘 불청객으로 머물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준비했느냐에 따라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은 판이할 것이다. 사막의 인상적 죽음 4세기 이집트 사막의 한 원로 수도승의 다음 일화는 죽음에 대한 수도승들의 견해를 잘 대변하고 있다. 임종 순간 머리맡에 둘러선 제자들이 울고 있자, 그는 갑자기 눈을 뜨고 세 번 크게 웃었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 이유를 물으니 이렇게 대답했다. “먼저, 나는 그대들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기에 웃었소. 두 번째는 그대들 가운데 아무도 준비된 사람이 없어서 웃었소. 마지막으로 내가 세상의 노고를 벗고 영원한 안식을 얻을 것이기에 기뻐서 웃었소.”(익명의 압바 279) 원로는 이 말을 마치고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원로는 이별을 목전에 두고 형제들이 느끼는 슬픔에 무감각하지 않았다. 그의 유쾌한 반응은 형제들의 정신을 딴 데로 돌려, 자기에게는 지극히 단순한 사건인 죽음을 극화시키지 않도록 권유하는 한 방법이었다. 거룩한 수도승들은 죽을 때가 다가와도 절대 놀라지 않았다. 고대 이집트인은 죽음 앞에서 침통해하지 않았다. 그들의 종교적 신념은 그들로 하여금 반은 이승에서, 반은 저승에서 살게 했다. 최후의 순간을 아름답게 맞이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평소 죽음을 잘 준비한 자만이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 “당신에게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다. 좋은 소식은 당신이 천국에 간다는 것이고, 나쁜 소식은 당신이 오늘 거기에 간다는 것이다.” 누구나 천국에 가기를 원하지만 지금 당장 가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그만큼 죽음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위에서 말하는 나쁜 소식이 우리에게 도둑처럼 갑자기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시한부 인생이다. 내가 언제 죽느냐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삶을 대하는 우리 자세는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다.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현재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감사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살며, 죽음을 잘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때 죽음이라는 손님은 우리에게 더 이상 불청객이 아니라 친구요 벗으로 다가올 것이다. 베네딕토 성인은 “매일 죽음이 눈앞에 있음을 명심하라”(규칙 4,47)는 말을 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아름답게 장식할 수 있도록 매일 죽음을 눈앞에 두고 모두 죽음을 잘 준비했으면 한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

발행일 2025-11-09 제3465호 17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번영의 뒷자리, 대탕녀 바빌론(묵시 17,1-6)

드디어 대탕녀가 모습을 드러낸다. 요한 묵시록의 무대 위에 나타난 그녀는 등장과 동시에 심판을 선고받는다. 처음부터 이 인물에게 허락된 존중은 없다. 그리스어 ‘포르네(πόρνη)’를 우리말 번역은 ‘탕녀’라 하여 방탕의 이미지를 강조하지만, 정작 본문이 고발하는 바는 더 노골적이다. 땅의 임금들과 몸을 섞은 여인(17,2), 그러니 차라리 ‘창녀’라 부르는 것이 정직하다. 이 단어는 듣는 이를 불편하게 한다. 그러나 불편을 피하려 돌려 말하는 순간, 이 계시의 순수성과 급진성이 희석된다. 그녀는 그냥 창녀가 아니다. ‘큰’ 창녀다. 이 과장된 수식은 우연이 아니다. 요한 묵시록 17장 5절에서 밝혀지는 그의 진짜 이름, ‘큰 바빌론’과 닿아 있고, 다시 예레미야서 51장 13절이 말하는 대바빌론의 패망을 반사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예레미야가 말하던, “큰 물 가에 살며 보화를 많이 가진 자”, 그 바빌론을 요한 묵시록은 ‘물 위에 앉은 창녀’라는 표현으로 다시 고치며 심판의 대상을 분명히 한다. 예레미야의 바빌론은 요한 묵시록 시대에 로마로 은유되며 심판은 그러므로 특정한 한 개인이 아니라, 당시 가장 강력하고 화려한 제국이라는 체제를 향하고 있다. 그녀가 심판받는 이유는 불륜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불륜은 육체적 타락의 문제가 아니다.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결탁의 비유다. 땅의 임금들은 바빌론, 즉 로마와의 동맹 속에서 경제적 평온함을 확보한다. 요한 묵시록은 이 현실을 곳곳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본다.(묵시 2,9.13; 13,16–17 참조) 요한은 이 상황을 한 단어로 비유한다. ‘취기.’ 그는 말한다. 땅의 임금들이 창녀의 포도주에 취해 있다고. 취한다는 것은 판단력을 상실한다는 뜻이다. 오로지 성장과 돈의 감미로운 향에 취한 삶, 그것이야말로 예언자들이 경고하던 영적 실명이다.(이사 29,9; 호세 4,11–12 참조) 구약의 예언자들은 정치·경제적 번영과 그에 수반한 우상숭배를 흔히 불륜과 창녀의 이미지로 그렸다.(이사 23,18; 1열왕 5,1–12; 아모 1,9; 요나 3,5–10; 에제 16,33–34 참조) 요한 묵시록은 이 오래된 언어를 끌어와 18장(3.9–19)에서 경제적 번영을 곧 ‘불륜’과 ‘취기’라고 단언한다. 고대 창녀가 몸을 팔고 돈을 받았듯, 제국의 번영을 함께 누리는 땅의 임금들은 경제적 이익을 위해 기꺼이 몸을 내어준 셈이다. 오늘의 독자에게 이 이미지는 낡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국제 무역의 복잡한 외교와, 그 틈바구니에서 소외되는 가난한 나라들의 현실을 생각해 보라. 번영의 논리는 언제나 누군가를 배제한다. 요한의 언어는 우리에게 묻는다. “네가 누리는 번영이 혹시 누군가의 피를 대가로 얻은 것은 아니냐?” 이 질문을, 우리는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장면은 갑자기 광야로 이동한다. 광야는 시선의 전환을 위한 공간이다. 하느님의 관점으로 현실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장소.(이사 21,10 참조) 이사야는 그곳에서 바빌론의 몰락을 보았고(이사 21,1–10 참조), 요한도 같은 자리에서 바빌론과 로마의 종말을 조망한다. 광야의 시선은 제국의 거대함을 상대화한다. 현실 세계에서 바빌론과 로마는 든든히 서 있다. 바빌론은 묵시록 쓰이던 시기 ‘로마’ 은유 종교·정치·경제적 결탁 현실 비판하며 오로지 성장과 물질에 취한 삶 경고 그러나 광야에 서면, 그 찬란함은 한순간에 사라진다. 권력과 돈과 명예는 광야에서는 설 자리가 없다. 영원하지 않은 것들에 과도한 무게를 실어 온 우리의 삶을 뚜렷이 보게 되는 자리. 광야는 그런 곳이다. 그런데 그 광야는 단순히 거룩한 공간만은 아니다. 그곳에서 요한은 진홍빛 짐승을 탄 여인을 본다. 머리 일곱, 뿔 열.(17,3) 12장 3절의 붉은 용과 동일한 형상이다. 광야는 하느님의 시선이 열리는 곳임과 동시에 악이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다. 요한 묵시록은 선과 악을 단순히 공간으로 분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적 통찰이 깊어질수록 악의 본질이 더욱 분명하게 보인다. 창녀가 그 짐승을 타고 있다. 이는 곧 제국의 경제적 번영이 악의 시스템과 분리 불가능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짐승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이름으로 가득하다면, 그 번영 역시 하느님을 모독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해석을 우리는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가. 번영이라는 이름의 신전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쉽게 무릎 꿇어왔는가. 4절로 넘어가면 창녀의 외양은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하다. 견고한 번영의 색깔인 자주와 진홍 그리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치장한 큰 창녀 바빌론. 그녀의 손에는 금잔이 들려 있는데, 그 안에는 불륜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 담겨 있다. 이 화려함은 로마 제국의 무역 품목들과 정교하게 연결된다.(묵시 18,12–14 참조) 상업적 성공이 창녀의 유혹과 동일시된다. 사람들은 이런 비유에 불쾌함을 느낄 수 있다. “부유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이 왜 창녀의 짓인가?” 그러나 질문을 바꿔보자. 그 번영이 만들어낸 자리는 누구에게 열리고, 누구에게 닫히는가. 고대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연대기」에서 로마를 이렇게 말한다. “세상의 모든 끔찍하고 수치스러운 것이 모여 유행이 되는 곳.” 요한은 창녀를 “역겨운 것들의 어미”라고 부른다. 유행과 번영이 결합한 자리를 ‘어머니’라 이름 붙인 것은, 문명이 만들어낸 모든 욕망의 근원을 가리키기 위함이다.(예레 27,12 참조) 다시 말해, 세상이 탐하는 모든 화려함의 모태가 그 창녀라는 선언이다. 그리스도인은 그 화려함 앞에서 박해를 받는다. 창녀는 성도들의 피와 예수님 증인들의 피에 취해있다는 것이다.(6절) 그리스도인은 번영의 행렬에서 낙오한 이들의 자리를 기억하는 사람들, 그 곁에 서려는 사람들이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가 운명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슬픔의 본질이다. 화려함의 앞줄에서 환호하는 대신, 뒤편에서 울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존재론적 운명, 예수님의 운명도 그러했다. 세상은 그런 그리스도인을, 그런 예수님을 미련하다 조롱할 것이다. 그러나 질문은 간명하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후손인가, 아니면 창녀의 후손인가. 나는 때때로 백화점에서 그 질문을 떠올린다. 명품매장 앞에 늘어선 줄, 그 긴장된 눈빛들. 갖고 싶고, 소유하고 싶고, 누리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을 나는 누구보다 이해한다. 우리 인간은 그러하니까. 그러나 그 눈빛들 사이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가? 단지 ‘좋은 삶’인가, 아니면 ‘옳은 삶’인가.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11-09 제3465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의 의미

“남편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에페 5,25)를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과 ‘목숨을 바쳐 아내를 사랑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어려운 사랑일까? 감정에서 출발한 사랑이 영혼을 확장시키는 사랑의 본질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첫걸음은 무엇일까? 사랑도 순종도 그 시작과 끝은 ‘나’가 아닌 ‘그리스도’가 근원이요 모델이다. 유비로 선포된 위의 말씀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노력도 있어야 하지만, 감을 따기 위해선 먼저 감을 바라봐야 하듯, 주님의 선물을 먼저 바라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랑으로 너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그래야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나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혼인에 담긴 신비는 거룩함 그 자체를 관조할 때, 윤리적 도리나 삶을 짓누르는 어려움도 넘어설 수 있는 여유를 얻게 한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에페 5,21)라고 했고,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에페 5,23) 그리고 “남편 여러분, …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에페 5,25)에서 그것이 가능함을 명확히 드러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 이유는 교회에 당신을 내어주기 위해서다. 자신을 내어준다는 말은 자신의 생명까지도 포기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혼인에 관계된 이 말씀들은 ‘처음’부터 혼인의 신적 제도를 지향하는 배우자적 사랑의 정신을 상기시킨 것이다. 이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혼인을 통해 “한 몸”(창세 2,24; 에페 5,31)을 이루게 된 그 특별하고도 유일한 관계 때문이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그 몸의 구원자이신 것과 같습니다.”(에페 5,23) 이 유비는 다른 서간과 함께 전체적인 맥락에서 살펴봐야 할 부분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남자의 머리”(1코린 11,3)를 연결해서 보면 몸은 아내와 동의어로 쓰였다.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모릅니까?”(1코린 6,15)에서 몸적-혼인적 교회론을 볼 수 있다. 예수는 머리이자 구원자이지만, 남편은 머리이나 구원자는 아니다. 남편과 아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사도의 설명이 모순처럼 보이는 이유는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5장 22절에 동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몸의 머리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완벽하고, 구원의 완성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서 순종은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준 교회에 해당되지만,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는 상호 순종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순종의 근원은 존중이다. 교리서에서는 존중을 인간 사랑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자각하는 것으로 봤다. 한 가정을 구성하는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 안에서 꽃피우는 자각이다. 존중은 인간 사랑 그 자체의 뼈대가 된 하느님과의 관계에 우리 눈을 열어준다는 것, 즉 다른 이들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 모습을 알아보는 시각을 의미한다. 말씀의 육화에는 겸손이 전제되어 있듯 타자에게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기 위해서는 겸손이 필요하다. 인간의 인격성을 바라보고 그 인격성 앞에 겸손해야 한다. 즉 인간의 정체성과 그 고유성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근원과 분리한다면 자기 자신의 내적 신비와 가까워지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 이를 부정하거나 소홀히 여긴다면, 서로의 몸은 경계선의 벽으로 남을 것이고 혼인의 위대한 신비를 자신들의 것으로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겸손함은 사랑의 위대함에 자기 자신을 종속시킴을 뜻한다.”(카롤 보이티와(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사랑과 책임」)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11-02 제3464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종말에 대한 성찰(묵시 16,17-21)

일곱 번째 대접은 일곱 번째 나팔과 닮았다. 번개와 요란한 소리, 지진과 엄청난 우박이 여전히 등장한다.(묵시 11,19 참조) 이집트에 내려졌던 다섯 번째 재앙과 역시 닮았다.(탈출 9,22 이하 참조) 완고함에서 벗어나 자유와 해방을 향한 이집트의 탈출이 실은 하느님을 향한 진정한 믿음의 길이었다는 사실과 그러므로 재앙들은 믿음의 길을 촉구하는 하나의 호소라는 사실을 우리는 몇 번이나 되짚었다. 대접이 쏟아지자 성전 안에 있는 어좌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등장한다. 대개 ‘하느님의 목소리’, 그러니까 하느님의 뜻이 선포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 목소리는 이렇다. “다 이루어졌다.” 이 외침은 단순한 종말의 선언이 아니다. 세상이 끝장난다는 ‘마지막’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 세상의 역사 안에 비로소 개입하신다는 외침이다. 이 외침은 하느님이 등장하는 서사들 안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현상들, 그러니까 천둥, 번개, 요란한 소리, 지진 등과 함께 묘사되기도 한다.(탈출 19,16; 묵시 4,5; 8,5; 11,19 참조) 하느님의 직접적 개입을 통해 악의 지배 질서를 심판하시고 새로운 창조 질서를 회복한다는 믿음이 “다 이루어졌다”라는 문장 안에 선명히 새겨져 있는 것이다. 어좌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에 이어 ‘큰 도성’이 세 조각으로 갈라진다. 대개의 주석학자는 ‘큰 도성’을 로마와 이방인의 세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물론 로마와 이방인의 세상이 역사적이고 사실적인 차원에서 단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로마와 이방인의 세상은 은유적 표현이고,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그 은유를 통해 인간 세상과 그 역사의 불의와 부패를 가늠하고자 했던 것이다. 어쩌면 로마와 이방인의 세계는 지금 우리이기도 하겠고, 내일의 우리이기도 하겠다. 하느님의 역사적 개입 앞에 어느 민족이, 어떤 세상이 지진과 같은 징벌의 대상이 될지를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프랑스 철학자 르네 지라르(René Girard)가 말하는 ‘희생양 메커니즘’적인 태도로 요한 묵시록의 징벌을, 세상의 불의를 살펴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특정 민족과 국가, 사람에게 세상의 잘못과 부패를 온전히 덮어씌우고 희생양으로 만들어서 그 특정 민족과 국가, 사람을 제거함으로써 평화와 안정을 꾀하는 자세 말이다. 요한 묵시록에 등장하는 로마 혹은 그 이전의 바빌론이라는 국가는 역사적 실재이나 그것이 오늘날 여전히 악의 축인 것인 양 이해하면서 마치 특정 세력이 악하므로 그 특정 세력을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철없는 의로움은 때론 폭력이 될 수 있다. 교회와 세상을 분리해 놓고 ‘세속’에 따라 살지 말자는 외침을 함부로 남발하는 신앙은 하느님을 따르는 의로운 길이 아니라 제 이데올로기를 사수하는 선동가의 아집일 경우가 많다. 교회든 세상이든, 하느님 입장에선 당신의 섭리가 펼쳐져야 할 하나의 공간이다. 교회는 우주 만물 안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고 그분의 정의가 온 누리에 울려 퍼진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선포해야 할 사명을 가진 공동체다. 교회는 세상과 분리된 저만의 무릉도원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 호흡하는 형제적 공동체다. 하느님은 ‘대바빌론을 잊지 않으신다’(묵시 16,19 참조)는 문장 역시 이러한 교회의 참모습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역사적 개입은 세상의 온갖 불의와 부패에 단호한 모습을 보인다. 그것은 공간적으로 이미 확고히 제 자리를 잡고 있는 것들, 예컨대 모든 섬과 산이 자취를 감출 만큼 결정적이다.(묵시16,20) 교회가 세상 속 하느님의 정의를 알리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면, 교회 역시 권태로운 타협이나 눈치에 휘둘려서는 안 될 것이고, 저만의 거룩함과 의로움에 기대어 세상을 등져서는 안 될 것이다. 세상이 더 이상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의 속성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새롭게 태어날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경고하고 움직여야 한다. 사실, 세상이라는 곳은 견고한 시스템과 복잡한 사상들이 얽혀 있는 곳이라 어느 하나도 쉬이 돌아서거나 변화되긴 힘들다. 21절에 엄청난 우박이 떨어져도 사람들이 하느님을 모독한다는 것은 그러한 세상의 완고함을 대변한다. 재미있는 것은, 우박의 무게가 한 탈렌트인데, 26~36kg의 무게다. 이 무게는 로마군이 쏘아 올린 투석기에 담긴 돌의 무게와 일치한다. 재앙 묘사는 종말의 의미 아닌 악의 지배 질서를 심판하시고 세상에 당신의 섭리 펼치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 담긴 표현 기원후 70년,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하려 할 때 쏘아 올린 그 투석기의 돌이 한 예다. 유다 사회는 로마의 그러한 군사적 행동으로 크나큰 상처를 입었고, 그 상처는 요한 묵시록이 쓰여지는 때 여전한 두려움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우박이라는 재앙을 로마 군대의 투석기를 통해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요한 묵시록은 하느님의 재앙이 그만큼 무섭고 두려운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강조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을 모독한다. 사람들의 모독이 그리 단단하고 두꺼운 것이므로 사람들의 죄악이 그만큼 독하고 무겁다는 식으로 해석하기엔 성급하다. 큰 도성이 갈라지는 일이 벌어져도, 우박이 매섭게 이 땅 위에 떨어져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삶의 자리에 익숙해져 있고, 익숙한 만큼 변화를 싫어한다. 단순한 정치적, 경제적 변화에도 온 나라가 갑론을박의 긴장과 그로 인한 피로감에 젖어 들게 마련이다. 요한 묵시록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모독한다는 사실을 특정 불의나 구체적 폭력을 행사하는 데서 찾지 않는다. 이어지는 17장부터 바빌론에 대한 이야기가 서술되는데, 그것은 일상의 경제적, 정치적 체계를 드러낼 뿐이다. 로마가 특별히 악한 것이 아니었고, 로마가 유독 잘못 살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로마 제국의 경제적, 정치적 상황이 요한 묵시록 저자의 입장에선 하느님의 뜻을 반한다고 여긴 하나의 ‘해석’ 이야기다. 결국 우리가 성찰해야 할 것은 지금, 여기 우리 삶의 익숙함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익숙해서 다른 것과 낯선 것에 귀와 마음을 닫고 있는 일들 말이다. 가까이는 내 이익을 위해, 멀리는 거대 담론을 무턱대고 수용한 무지하고 성급한 사상들을 위해 타인과 그의 다름을 무작정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일들에 대해, 우리는 완고한가, 유연한가. 요한 묵시록이 끝나기 전에, 우린 그 답을 찾아낼 것이다.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11-02 제3464호 19면

[말씀묵상]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오늘은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위령의 날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믿지만,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영역이고 인간의 노력과 공덕만으로 얻을 수 없는 선물인 까닭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그치지 않습니다. 그분들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먼저 가신 분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면서, 더 열심히 기쁘게 감사하며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또한 우리는 세상과 우리를 위해 그분들의 기도를 청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고인에 대한 기억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운명인 죽음을 기억하며 우리 삶의 의미와 지향을 새겨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죽을 것임을 알지만 평소에는 그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삶을 살아가는 데 바쁜 탓입니다. 세상의 가치와 희로애락들이 우리 마음을 온통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한지 가끔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욥은 고통 중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누가 비석에다 기록해 주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다 영원히 새겨주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흔적 없이 사라지지 않고 누군가가 끊임없이 기억해 주기를 바랍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고 세상에 대한 미련입니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남아를 선호하고 대를 잇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던 때가 있었습니다. 잘 생각해 보면 허점이 많지만, 주된 요지는 자신이 잊히지 말았으면 하는 소망입니다. 하지만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면 또한 그런 미련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그래서 욥은 자신의 희망을 바꿉니다. 구원자 하느님을 뵙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잃고 살갗이 벗겨져 죽음이 가까운 상황에서도 그는 살아계신 하느님을 뵙겠다는 희망과 믿음에 의지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이 희망입니다. 우리 삶에서 모든 것은 끝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도, 학교생활도, 일도, 인간관계도 끝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끝난다고 해서 그것들이 의미를 잃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은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집니다. 성공도 실패도, 기쁨도 후회도 모두 내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 완성되어 새로운 시작의 밑바탕이 되어줍니다. 하지만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까닭에, 우리는 죽음이라는 끝에 대해서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죽음이 두렵고 나이 드는 것을 싫어합니다. 사람들은 늙어가는 것은 익어가는 것이고 노년과 죽음은 결실과 완성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고 믿는다면 역시 허무와 두려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그리스도인은 세상 것에만 희망을 걸고 집착하지 않지만, 세상의 가치는 오히려 믿는 이에게 훨씬 큽니다. 그것이 죽음으로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롭고 영원한 삶의 바탕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바로 그 믿음에 근거한 새롭고 참된 행복을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을 잃은 욥이 세상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하느님을 만날 희망을 선택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의 부와 힘으로 좌지우지할 수 없는 든든한 힘을 지니게 됩니다. 위령의 날인 오늘, 우리는 세상 삶 속에서 잊기 쉬운 이 희망을 기억하며 하느님의 자비로운 계획에 감사하고 찬미합니다. 더 이상 우리에게 죽음은 두려운 저주가 아니라 승리의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두가 이 희망 안에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3. 8-9) 글 _ 변승식 요한 보스코 신부(의정부교구 안식년)

발행일 2025-11-02 제3464호 18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행복을 위한 준비운동: 고통을 경감시키는 구체적 방법

우리는 지난 호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고통의 문제를 회피하지 말고 이를 영적 성장의 계기로 삼으라’고 조언하는 것을 들었다. 그런데 이 충고를 듣고도 고통을 피하고 싶은 마음은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런 마음을 이해라도 하는 듯, 토마스는 고통에 대한 일반적인 고찰뿐만 아니라 고통과 슬픔을 줄이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들을 제시한다. 우리는 이 안에서, 현대 사회의 고통 경감법과 비교해 보더라도 전혀 뒤지지 않는, 유용하고도 흥미로운 내용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의 고통을 치유하는 현대의 의학은 인간의 고통을 단순히 조작 가능하고 제거할 수 있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리고 그 연구 방향은 고통의 근원을 줄이려는 노력보다 ‘어떻게 하면 고통을 느끼는 경로를 차단할 수 있을까’에 집중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마취나 무통분만이며, 이런 경향은 일반 생활에도 널리 퍼져있다. 또한 현대인들의 다수가 정신적인 고통이 다가오면 알코올이나 마약 등을 통해 고통을 잊어버리려 하고, 심지어 많은 이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서라도 고통을 차단하려 한다. 이에 반해 토마스는 고통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고통과 슬픔을 치유하기 위한 다섯 가지 방법을 제안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방법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즐거움을 통한 고통의 약화 토마스가 제시한 방법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치료법은 ‘잠과 목욕’이다. 이것들은 우리의 힘을 되찾게 해 주고 몸의 신체적 균형을 회복시켜 주어 우리의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게 해 준다.(I-II,38,5) 밤잠을 줄여도 된다는 특별 허가를 받아서까지 연구에 매진했던 토마스이기에 이런 충고는 더욱 유별나게 들린다. 그럼에도 잠이나 목욕 등이 심장 박동을 정상으로 돌림으로써 고통을 완화할 수 있다는 치료 방법은, 이미 현대 의학에 의해서 훨씬 더 효과적인 마취와 통증 완화의 방법을 통해서 대체되었다. 하지만 다른 네 가지 방법은 여전히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토마스는 기쁨이나 쾌락이 슬픔이나 고통과 상반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모든 종류의 ‘쾌락(Delectatio)’은 고통을 가볍게 해 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I-II,38,1) 만일 직면해 있는 고통으로부터 눈을 돌려 다른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겪고 있던 고통은 약화될 수 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음악은 환자의 슬픔을 감소시킨다. 때로는 슬픔을 잊을 정도로 우리를 매료시키는 좋은 영화는 우울함에 대한 최고의 치료책이다. 풍선에 바람이 빠질 때 바람을 조금 불어 넣으면 다시 팽팽해지듯, 인간이 느끼는 쾌락도 그것이 어디에서 오든 슬픔의 치료제로 작용할 수 있다. 눈물과 한숨을 통한 슬픔의 배출 그렇지만 진정으로 극심한 고통 앞에서는 잠깐의 즐거움이 마치 한 여름의 뙤약볕에 달구어진 바위 위에 몇 방울의 물을 떨구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토마스는 이런 극심한 고통을 덜기 위해 ‘눈물과 탄식(Lacrymae et Gemitus)’이 자연스럽게 고통을 바깥으로 배출시킴으로써 고통을 완화시킬 수 있다고 가르친다.(I-II,38,2) 마음속에 있는 모든 해로운 요소는 영혼의 주의가 그리로 쏠릴 때 더욱 고통스럽지만, 바깥으로 분출될 때는 주의가 분산되어 내면의 고통이 감소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울고 싶을 때는, 많은 눈물을 흘리는 것은 위로가 될 뿐 아니라 안정이 되고 슬픔을 이기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자연스러운 감정 표현과 수용, 즉 눈물 흘리기나 깊은 탄식 등도 스트레스 해소에 효과적임이 과학적으로 입증되면서 현대에도 적극 권장되는 방법이다. 가까운 이들의 위로와 공감…진리 탐구·종교적 묵상으로 육체와 정신 모두 포괄하는 통합적 치유 이뤄낼 수 있어 친구와 가족의 위로 토마스는 계속해서 친구들의 위로가 고통을 완화시켜 준다고 강조한다.(I-II,38,3 참조) 마치 무거운 짐을 함께 들었을 때 가벼워지는 것처럼, 영혼의 짐인 심적인 고통도 동료들의 위로를 통해 가벼워진다. 또한 친구들이 고통받는 이에게 가지고 있는 ‘공감(Compassio)’이나 사랑은 그에게 위로와 안심을 주기 때문에 그 자체로도 고통을 완화시키기 위한 좋은 방법이다. 현대사회에서도 친구나 가족, 공동체와의 교감과 위로는 고통 완화에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현대 사회의 고립과 단절 문제 속에서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고 슬픔을 나누는 것은 토마스가 중요시했던 위로의 힘이다. 진리의 관조를 통한 고통의 극복 이런 일시적인 고통의 완화와는 달리 강렬한 즐거움을 포함하는 더 지속적인 치료제가 있는데, 바로 ‘진리에 대한 관상(Contemplatio Veritatis)’이다. 토마스는 이 관상이 고통을 대단히 완화시킨다는 사실을 특별히 강조한다. 이 관상의 쾌락은 ‘흘러넘쳐(Redundat)’ 감정에 자리 잡고 있는 고통까지도 완화시켜 준다.(I-II,38,4) 지혜를 사랑하면 할수록 그 관상이 고통과 슬픔을 완화시킨다. 지복직관과 미래에 대한 행복으로부터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토마스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겪는 온갖 시련을 참된 즐거움으로 여겨야 합니다(야고 1,2)”라는 성경 구절을 인용한다.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다가올 기쁨 때문에 타오르고 있는 숯불 위를 마치 ‘장미 꽃밭’ 위를 걸어가듯이 걸어가는 순교자도 소개한다. 진리 탐구와 영적 명상, 신앙적 희망은 현대의 정신 건강과 영성 돌봄 분야에서 여전히 깊이 공감되는 부분이다. 다양한 종교들이 강조하는 명상, 마음 챙김, 종교적 혹은 철학적 묵상 방식들은 고통과 슬픔을 초월할 수 있는 내적 힘이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일반적이고 원칙적인 이야기만 할 것이라는 편견과는 달리, 「신학대전」 안에서 구체적인 상황에 바로 적용될 수 있을 만한 다양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의 슬픔 해소법은 현대 사회에서도 여러 면에서 적용될 수 있다. 그가 제시한 방법들은 단순히 과거의 뒤처진 기술이 아니라 인간 존재와 상호 관계, 몸과 마음을 모두 포괄하는 통합적 치유의 길로, 오늘날 심리치료와 영성 상담, 공동체 활동 등 다양한 현대적 실천에 영감을 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그런데 과학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도 질병, 사고 등으로부터 오는 고통이 ‘하느님의 벌’이라는 2차 가해에 가까운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다음 호에서는 이 문제와 같은 ‘고통에 대한 오해’를 집중적으로 성찰해 본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11-02 제3464호 17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신자가 되어 가치있는 삶을 산 노예 오네시모스

‘히브리 노예의 합창’은 베르디(Giuseppe Verdi)의 초기 오페라 <나부코(Nabucco)>에 나오는 유명한 합창곡이다. 나부코는 구약성경의 바빌로니아 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를 가리키며, 이 합창은 유다인들이 유프라테스 강가에서 노역을 하며 잃어버린 조국 예루살렘을 그리워해 부르는 노래다. 사슬에 묶여 바빌론으로 끌려간 유다인들이 노역 중 부르는 이 장면은 오페라의 압권으로 꼽힌다. 노예란 자유 없이 주인의 지배 아래 놓인 비천한 신분의 사람을 뜻하며, 본래 경멸적 의미가 담긴 단어다. 다만 유다 사회에서 유다인 노예의 법적 지위는 외국 노예와 크게 달랐다. 특히 유다인 노예는 대개 6년이 지나면 아무런 보상 없이 자유인이 될 수 있었다.(탈출 21,2 참조) ‘히브리인 노예를 산 사람은 상전을 산 것과 마찬가지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노예는 인권을 기대하기 어려운 힘없는 존재였고, 주인에게 노예는 재산이자 생사여탈권의 대상이었다. ‘유익하다’라는 뜻의 이름을 지닌 오네시모스는 콜로새 필레몬의 집에서 일하던 노예였다. 당시 노예들은 대개 전쟁 포로나 노예상에게 팔려 온 사람들이었고, 노예제도는 고대사회의 산업 활동을 떠받치는 중요한 노동력이었다. 오네시모스는 혈기 왕성한 젊은이로, 자라면서 자신의 처지와 환경을 견디기 어려웠고 노예 신분을 벗어나길 갈망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거의 없었다. 주인 필레몬은 부유한 사람이었고, 사도 바오로를 통해 가족과 함께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며, 집을 신자들의 모임 장소로 내어줄 만큼 신앙에 열정적이었다. 바오로와도 친구처럼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 오네시모스는 마침내 주인에게서 도망쳤다. 그 시대에는 도망 노예가 주인의 물건을 훔치거나 가족을 해치면 사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오네시모스는 주인의 재산을 훔친 뒤, 당시 세상과 문화의 중심지였던 로마로 향했다. 그는 로마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에 알맞은 곳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로마에 있던 오네시모스는 감옥에 수감 중이던 바오로를 운명처럼 만나 그의 말에 깊이 감화되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바오로는 오네시모스의 인성과 능력을 높이 평가했고, 함께 주님의 복음을 전하자고 권했다. 오네시모스는 이에 훌륭히 협력하며 바오로를 도왔다. 오네시모스의 사정을 들은 바오로는 편지를 써 주며 필레몬에게 돌아가라고 권했다. 필레몬은 편지를 손에 들고 돌아온 오네시모스를 노예가 아니라 형제로 맞이했다. 신앙을 통해 오네시모스의 삶은 완전히 새로워졌다. 과거에는 어둡고 쓸모없어 도망치고만 싶던 삶이었지만, 이제는 참으로 ‘쓸모 있고 유익한’ 인생이 된 것이다. 이 세상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가 넘치는 세상이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11-02 제3464호 18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고통이란 행복(묵시 16,10-16)

다섯째 천사가 나타나 자신의 대접을 ‘짐승의 왕좌’에 쏟는다. 대접은 정확히 짐승의 중심부를 향한다. 짐승의 권세와 통치를 가리키는 ‘왕좌’를 향하고 있어서 짐승의 영향력 자체를 무너뜨리려 하는 게 다섯 번째 대접이다. 그 결과 짐승의 나라는 어두워졌다. 탈출기 10장 22절을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다. 하느님은 이집트 파라오의 완고함에 어둠이라는 재앙을 내리셨다. 이집트는 태앙신 ‘라(Ra)’를 섬기고 있었으므로 어둠이 내린 이집트는 하느님의 재앙 앞에 속수무책 무너진 것이다. 지혜서는 어둠을 가리켜 하느님과의 단절을 가리키는 은유로 소개한다.(지혜 17,2 참조) 이 단절을 요한 묵시록은 혀를 깨물 정도의 고통으로 다시 해석한다. 하느님과의 단절이 인간에게 고통이 된다는 도식은 복음서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이를테면, ‘바깥 어둠 속에 던져져 이를 갈게 될 것’이라는 단절의 고통을 자주 언급한다.(마태 8,12; 22,13; 25,30 참조) 베드로의 둘째 서간과 유다서에서도 ‘어둠’의 자리는 배교자들이 심판받는 자리로 제시되기도 한다.(2베드 2,17; 유다 1,13 참조) 그럼에도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는다. 고통이 닥쳐도 회개하지 않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기도 하다. 인간의 본능은 불편함과 고통을 피하고 싶도록 작동할 터인데, 고통이 있어도 회개하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회개가 삶의 방향을 돌이켜 멀어진 것을 다시 가까운 것으로 만드는 전환의 행위라고 한다면, 하느님과 멀어진 것이 고통이지만 다시 하느님께 향하는 방향의 전환이 더더욱 싫은 것이거나 고통스러운 것일 때 회개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고통이 있어도 회개하지 않는 것은, 고통의 자리를 끝내 포기할 수 없는 현실적 이유가 넘쳐나기 때문은 아니겠는가. 힘들어도 그것을 놓아 버릴 때 오는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과 상실감이 회개를 가로막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혜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부드러운 질타를 받고도 훈계로 삼지 않는 자들은 그에 합당한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고통을 당하고 자기들이 신으로 여겼던 바로 그것들로 징벌을 받자 그것들에게 화가 난 저들은 사실을 보고서야 자기들이 전에 알아 모시기를 거부하던 그분께서 참하느님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들은 가장 무거운 단죄를 받았습니다.“(지혜 12,26-27) 고통과 질타를 받고도 회개하지 않는 이들의 운명이 징벌과 단죄라는 가르침은 성경 안에서 확연하다. 그럼에도 요한 묵시록의 ‘사람들’은 다만 하느님을 모독할 뿐이다. 고통은 더 이상 회개를 위한 장치로 작동하지 않는다. 회개에로의 초대는 계속되나, 그 초대에 응답하는 건, 하느님의 재앙이나 그로 인한 고통으로도 가능한 게 아니다. 고통의 재앙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여섯 번째 대접은 이제 유프라테스강으로 향한다. 유프라테스강은 말라버린다. 그 강이 마르는 것과 해 돋는 쪽 임금들의 길이 나는 것은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가 바빌론 제국을 제압하는 역사적 사건을 하느님의 심판으로 해석한 대목이다. 물을 마르게 하시는 분은 언제나 하느님이시고 그분의 심판으로 바빌론은 영원히 황폐해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의 묘사다.(예레 28,3; 50,39-40 참조) 바빌론은 하느님을 거역한 세상의 모든 세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하느님의 심판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의 완고함을 끊임없이 두드린다. 세상 그 누구라도 하느님의 심판은 여지없이 실행되어 회개를 촉구한다. 고통에도 물러서지 않는 사람들의 완고함은 그 위대한 바빌론마저 무너뜨리는 하느님의 심판 앞에 어떻게 될 것인가. 사람들은 끝내 항복할 것인가. 13절은 더 이상 사람들의 태도를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 대신 악의 세력 그 자체가 전면에 나선다. 개구리 같은 더러운 영은 용과 짐승 그리고 거짓 예언자의 입에서 나타난다. 유다 사회는 개구리 형상을 기만적인 헛된 소리, 파괴와 혼란의 울음 등으로 이해해 왔다. 그렇다면, 악을 가리키는 용과 짐승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헛된 것이고 혼란스러운 것이다. 개구리같이 생긴 더러운 영은 온 세계 임금들을 모아 하느님과 전투를 벌이려 한다. 전투는 ‘저 중대한 날’에 펼쳐지는 것으로, 구약의 즈카르야가 말하는 ‘종말론적 전투’를 떠올리게 한다.(즈카 12~14장; 스바 3장 참조) 종말론적 전투는 하느님의 승리로 끝이 나며 요한 묵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로 끝이 난다고 소개한다.(묵시 19,11-21 참조) 악의 세력 그것은 그리 힘센 것이 아니고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성경의 논리다. 악의 세력에 기대어 완고해진 사람들의 회개 문제도 그 끝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우린 유추할 수 있다. 완고함의 끝은 사람들에게 허무하다. 끝내 버리지 못해 움켜쥔 것이 무너진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고야 마는가. 깨어 있어 의로움 지키는 일 우리가 희망하고 촉구할 자세 신앙 안에 고통 겪는 신자에게 하느님은 ‘행복’을 선물하실 것 그러므로 우리가 희망하고 스스로 촉구해야 할 자세는 15절의 성도들을 통해 살펴보아야 한다. 성도들의 자세는 ‘깨어 있어 제 옷을 지키는 일’이다. 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실을 가리키고 벌거벗음은 우상숭배로 드러나는 수치를 말한다.(에제 16장; 나훔 3,5; 이사 20,4 참조) 이런 권고의 말은 악이나 그의 세력에 맞서는 대립적 자세를 부추기는 게 아니다. 오히려 상황이 어떻든 제 삶의 고유한 정체성을 다시 한번 되새기라는 격려에 가깝다. 우리가 읽고 있는 요한 묵시록은 더러운 영이 세상 임금들을 모은 곳이 ‘하르마게돈’이라고 한다. ‘므기또의 산’이라는 뜻을 지닌 ‘하르마게돈’은 의인들이 악한 왕국에 의해 공격받던 곳이고(판관 5,19 참조) 거짓 예언자들이 꺾인 곳이며(1열왕 18장 참조) 이스라엘의 슬픔이 가득한 곳으로(2열왕 23,29 참조) 이해되어 왔다. ‘므기또의 산’은 그러므로 또다시 한번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 그분이 공격받는 곳을 상징한다. 어떤 공격이든, 어떤 위협이든 성도들은 제 옷을 지켜야 한다. 성도들이 겪는 고통은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재앙의 고통과 다르다. 제 정체성과 신앙을 지키면서 겪는 고통은 거룩하고 보람되며 의미가 있다. 제 완고함에서 비롯된 재앙의 고통은 스스로 옥죄는 자기 파멸의 고통이다. 그런 고통은 겪고 나면 자신이 사라진다. 성도들이 겪는 고통은 겪을수록 자신이 단단해진다. 하느님은 그런 성도들에게 행복이란 선물을 주신다. 그 행복은 설익은 감정의 환희가 아니라 억척스럽게 달릴 길을 달리고 난 후 내쉬는 가쁘고 깊은 호흡에서 느껴지는 뿌듯함이 분명하다. 하느님을 믿고 있는 우린 행복하고 있다.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10-26 제3463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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