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세계 각국에서 안락사 합법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유사한 입법 시도가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은 인간 생명의 본질과 존엄성을 깊이 위협하는 일이다. 가톨릭교회는 안락사를 단호히 반대한다. 안락사는 어떤 이유에서든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죽음을 유발하는 행위로, 그 본질은 ‘살인’이다.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께서 주신 고귀한 선물이며, 시작부터 끝까지 하느님만이 그 주인이시다. 따라서 생명을 해치는 어떠한 행위도 교회는 용납하지 않는다. 특히 사회적으로 안락사에 대한 찬성이 높아지고 있는 현실은 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한 증거다. 삶의 가치에 조건을 두고, 고통 중에 있는 생명은 죽어도 된다는 생각이 점점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가치는 고통이나 건강 상태로 측정될 수 없다. 모든 생명은 병들고 약해졌더라도 여전히 존귀하며 보호받아야 한다. 우리는 그 어떤 생명도 예외 없이 소중하다는 인식을 회복해야 한다. 생명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써 주신 선물이자 우리가 지켜야 할 소명이다.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 위에, 모든 생명을 끝까지 지켜내는 것이 우리가 세워야 할 참된 인간 문명이다. 안락사 허용은 문명의 진보가 아니라 퇴보다. 지금 우리 사회가 해야 할 일은 생명을 죽이는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이 지켜질 수 있도록 연대하고 돌보는 공동체를 세우는 일이다. 생명을 위한 법, 생명을 위한 문화, 생명을 위한 사회를 향해 나아가자. 생명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지켜야 할 하느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AI)이 미래 세계의 화두로 떠오르면서, 교회 안에서도 AI를 신앙생활과 사목활동에 활용하려는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최근 수원교구가 사제들을 대상으로 생성형 AI의 기본 원리와 활용 방법을 배우는 자리를 마련한 것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교회의 AI에 대한 첫 번째 관심은 신앙과 윤리적 측면에서의 고민이다. 교회는 인간 문명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첨단 과학기술에 대해 늘 신중하면서도 적극적인 접근 방식을 취해 왔다. 영화와 TV 등 영상 매체의 발달, 통신 수단과 디지털 기기의 통합으로 형성된 사이버 세계에 대해서도 교회는 사목적 우려와 더불어 복음 선포에 기여할 가능성을 높이 평가해왔다. AI의 발달은 지금까지의 그 어떤 과학기술보다도 더 깊고 광범위한 영향을 사회와 세계에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대해 교회는 어떤 과학기술이나 문명의 이기(利器)든, 인간의 존엄성을 중심으로 활용돼야 한다고 가르친다. AI가 인간 삶에 미치는 영향이 클수록, 그것이 항상 인간 중심으로 활용돼야 한다는 당위성은 더욱 커진다. 그러나 교회는 AI에 대한 고민과 두려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오히려 AI의 오용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교회가 더욱 적극적으로 이를 배우려는 자세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 안에 AI의 기본 원리와 활용법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문명의 이기는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교회의 기본 가르침은 AI에도 그대로 적용되며, 교회가 이를 적극적으로 선용하는 것은 신앙적 소명이기도 하다.
“성경을 모르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손상희 베드로 수녀님의 말씀에 자극을 받고 성경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지금껏 성경을 제대로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나는 참 어이없는 신자다. 수녀님 말씀을 못 들었다면 성경 공부에 열중하는 지금의 나도 없을 것이다. 복음을 안내하고 성경 공부를 권유하는 한 사람의 역할이 나에게 미치기까지 수고하신 많은 분의 노고를 귀하게 받아들인다. ‘성서 그룹공부’를 하고 있다. 말씀 봉사자와 그룹원 합하여 8명이다. 앞으로 적지 않은 시간 동안 함께 공부할 내 믿음의 이웃이다. 몇 번 모임을 했는데 한 번도 8명 모두 모인 적은 없다. 이 사람 저 사람 번갈아 가며 빠진다. 그날 누가 빠지면 그 사람을 생각한다. 왜 빠졌을까? 그냥 궁금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속으로 짧게 기도한다. 안 좋은 일이 없기를! 다음 주엔 함께 공부할 수 있기를! 나눌 줄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부자가 아니라고 한다. 그렇지! 혼자만 잘 사는 것보다 나도 잘살고 너도 잘살고 이웃과 함께 우리 모두 잘살면 그게 좋은 세상이지! 재물 나눔, 재능 나눔뿐 아니라 말씀 나눔도 마찬가지다. 음식을 나누어 먹듯이 영혼의 양식인 성경 말씀이나 묵상도 나누면 미처 알지 못했던 것도 깨닫게 되고, 내가 겪어보지 않았던 다른 사람의 경험도 귀 기울여 듣다 보면 감동과 은혜가 더 크게 다가올 때가 있다. 성경 말씀을 반복해서 함께 읽고 묵상을 나눌 때 언제 어떤 사람이 이야기하는 말씀 한 구절, 묵상 한 마디가 내 가슴을 ‘쿵’ 하고 울릴지 모른다. 성경 공부하러 갈 때마다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되고 감동과 기쁨이 넘치는 말씀과 묵상을 만나게 해주십사 기도한다. 아울러 지금의 배움과 묵상이 나중에 이웃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공부에 열중하고, 신앙적으로 크게 성장하여 신앙의 열매를 맺게 되기를 기대한다. 그저 기계적으로 겨우 주일미사만 참례하던 지난날의 소극적인 신앙생활을 자주 돌아본다. 나는 내가 이웃을 예수님께 인도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지만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싶은 친구가 몇 있다. 그 믿지 않는 친구를 믿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성경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도 이해 못 한 것을 친구에게 잘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고 차분히 묵상하는 생활에 기쁨이 있고 보람이 있어 스스로 뿌듯하고 행복하다. 틈날 때마다 성경을 필사해서 마태오 복음을 끝내고 나니, 이렇게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는 성경 전체를 다 필사할 날이 오겠지 하며, 벌써 설렌다. 성경을 공부하면서 어느 때는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깨달음을 얻었고, 또 어느 때는 고통을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의 섭리에 감탄하기도 하였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배우고 경험했던 일들이 성경 이해에 의외로 종종 도움이 되어 놀라기도 하였다. 어쩌면 청년일 때 성경 공부를 시작했더라면 더 좋았겠다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노년에 시작한 공부도 아직 늦지 않았고 어떤 의미에서는 더 잘 이해되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아 그나마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 이대로 꾸준히 공부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믿을 만한(?) 신자가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어본다. 글 _ 배정수 프란치스코(서울대교구 답십리본당)
‘자기결정권’(헌법 제10조) 행사는커녕 기초 의사소통도 어려운 중증 발달장애인들 편에서 강제 탈시설에 반대해 온 가톨릭 사회복지계에 상처를 준 사건이 석달 전 있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4월 프란치스코 교황 선종 애도 기간에 서울대교구 혜화동성당 종탑을 무단 점거하고 탈시설 주장 플래카드를 내걸며 농성과 집회를 벌였다. 한 수도권 교구 주교좌성당에도 허락 없이 들어가 교황 빈소의 영정을 배경으로 플래카드를 내걸고, 조문 온 신자들에게 ‘성부와 성령의 이름으로 투쟁’이라는 공격적 언사도 했다. 6월 30일 서울 여의도동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장애인거주시설 혁신방안을 위한 토론회’에서 발제자로 나선 이중교 신부(야고보·수원교구 중증 발달장애인 거주시설 ‘둘다섯해누리’ 시설장)는 이를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으로 해석했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계 독일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을 분석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제시한 개념이다. 개개인으로 보면 상식과 대화가 통하던 인간이 집단화하자,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비합리적 수단도 동원하고 아무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 개개인은 선량할 시민들이 집단 논리에 매몰돼 ‘대수롭지 않게’(Banal) 이행한 이해타산 때문에 최중증 발달장애인들이 실제로 피해를 봤다. 2022년 1월부터 탈시설 시범 사업이 진행되며, 장애인 당사자 중 3개월 만에 욕창 패혈증으로 사망하거나 2주 만에 장폐색으로 죽는 일이 속출했다. 그래서 기원하게 된다. 우리 모두 집단 헤게모니를 떠나 사람 대 사람으로 관계를 맺으며 더 큰 참극을 막을 수 있기를.
왕복 10시간이 걸리고 준비하는 데도 시간이 만만치 않지만, 그래도 내가 서울 구치소 사형수 미사 봉사를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무엇보다 현재 사형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마당에 마땅한 봉사자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고, 23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만나며 지금은 나의 친구가 된 우리 사형수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더 큰 이유겠지만 아마 다른 이유도 있지 싶다. 이번 달에도 세 시에 일어나 준비를 마치고 다섯 시 반에 길을 떠났다. 잠을 설친 탓인지, 아주 힘들었다. 커피 몇 잔으로는 도저히 달랠 수 없는 엄청난 피곤을 견디며 들어선 교도소에서, 그러나 지난달보다 훨씬 맑아진 얼굴로 우리를 만나러 나오는 사형수 형제들을 보면 사실 이런 피곤은 사라진다. 다섯 명의 사형수 형제를 네 팀의 봉사자들이 돌아가며 만나기 때문에 매달 보는 일은 없고 몇 달 만에 한 번 보기 때문에, 그의 삶의 흔적은 얼굴에 금방 나타나는데 거의 틀린 적이 없어 신기했다. 이번 달에 만난 형제는 내가 봉사자 일을 그만두려고 생각할 때 가장 맘에 걸렸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여태까지 본 적이 없는 가장 환한 얼굴로 우리를 만나러 나왔다. 첫마디에 내가 “그동안 기도 많이 하고 잘 살았군요” 했는데, 그는 칭찬을 처음 받은 어린아이처럼 수줍게 웃었다. 그는 지난번 내가 이 칼럼에 쓴 사람으로 무더위 속에서 묵주 120단을 하루 종일 바친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묵주 많이 하죠?” 내가 물으니 그는 이번에는 “네” 하며 그냥 웃었다. 복음 나누기 시간에 그가 입을 열었다. “지난주에 소 내에서 참을 수 없을 일을 당했어요. 예전의 나라면 그를 가만두지 않았을 겁니다. 화를 내야 하나 보복을 해야 하나 사흘을 고민했어요. 그러다 깜짝 놀라 생각했어요. 내가 이걸 고민하고 있구나. 예전 같으면 그냥 보복했을 텐데… 그래도 묵주를 계속했어요. 억지로 묵주를 굴렸죠. 억지로 했는데, 그래도 되나요? ” 구치소 방문 중에 우리들은 지난날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우리는 오늘 이야기만을 나눈다. 그가 괴로워할 때마다 나는 가끔 그에게 말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당신은 죄인이고 나는 깨끗할지도 모르겠지만, 하느님 저울로 달면 어떨지 몰라요. 우리 모두 고만고만한 죄인일 수도 있어요. 게다가 당신은 이 연옥 같은 벌을 견디고 있고, 나는 내가 죄 없다고 생각하며 바리사이파 사람처럼 지내고 있죠. 그래서 기도해야 하는 듯해요. 기도는 원래 억지로 하는 게 대부분 아닌가요? ” 면회소의 희미한 에어컨 아래서 우리는 함께 웃었다. 그의 범죄는 유명하고, 그걸 본 사람들은 예외 없이 “저런 놈은 바로 사형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쩌면 나도 그런 사람이었을지 모른다. 처음 이 봉사를 시작했을 때, 나는 절망적이었다. “죄송해요. 하느님, 차라리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믿어도 사람은 못 믿어요”라고 기도하던 때였다. 그러나 이 사형수 봉사를 시작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인간에게 희망을 보았다. 내 주변의 모든 지식인과 부유한 사회지도층들에 느꼈던 절망을 이들이 치유해 준 셈이다. 미사 때마다 나는 기이한 체험을 했었다. “어쩌면 천국이 이와 같지 않을까?” 내가 봉사를 그만둘 수 없는 이유는 아마 이것일 것이다. 내가 봉사 받아 치유되고 있기 때문에. 이번에도 나는 다시 생각했다. 하늘나라는 이와 같은지도 모른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신, 주님께서 부르시는 사람들이 여기 있으니까. 나까지 모두. 글 _ 공지영 마리아 (소설가)
전시공연 PD라는 업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회화사의 걸작들을 전시한다거나 언제 들어도 위안이 되는 명곡들을 무대에 올리는 공연이기에 처음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했으나, 경험하면 할수록 어렵고 힘든 막노동에 가까웠다. 전시는 우선 국내 애호가들이 좋아하는 화가와 작품을 골라야 하고, 에이전시와 계약을 체결해야 한다. 명화일수록 조건이 까다롭기는 말로 다할 수 없다. 교통 편의와 수용 인원을 고려해 전시장을 택해야 하고, 수익을 감안해 적절한 대관료를 산정하고 계약해야 한다. 또 시장의 흐름과 수지를 따져 합리적인 매표 단가를 산정해야 한다. 각종 인허가, 안전관리, 홍보와 마케팅, 미디어 플레이…. 한 번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출퇴근도 모르고, 밤낮도 알 수 없는 몇 달이 훌쩍 지나곤 했다. 그와 달리 공연은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진행되니 수월할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오페라나 뮤지컬, 연극은 공연 기간도 짧지 않을뿐더러 클래식이냐 대중음악이냐, 출연자가 한 명이냐 여럿이냐에 따라 저마다 완전히 다른 설계를 해야 한다. 공연장, 무대, 세트, 음향, 조명, 특수효과 등은 전문적인 인력이 동원되어야 하기 때문에 수많은 관계자와 협의를 해야 한다. 출연자의 구매력과 객석 수에 따라 객단가를 책정해야 하고, 선곡을 해야 하고, 큐시트를 짜고 대본을 작성해야 한다. 어떤 전시나 공연도 제작자의 입장에 서면 결코 예술이 아니다. 중노동일 뿐이다. 꽤 오래 방송사를 다니며 여러 분야의 업무를 경험했지만, 유독 전시공연 PD라는 직함에 마음이 머무는 것은 그때의 노동에 대한 심리적 반응인지 모르겠다. 누구나 가장 힘든 기억, 가장 아픈 기억은 오래 품고 사는 법이다. 그렇게 노동하던 전시공연 PD는 7년 전 회사를 나왔다. 직장 생활에 치여 시인으로서의 삶에 충실할 수 없었던 데 대한 반성이기도 했고, 더 늦기 전에 문학 공부를 하고 싶다는 열망 또한 적지 않았다. 재직 중에도 “몸의 90%는 회사에 있지만, 정신의 90%는 문학에 가 있다”며 푸념을 토로하곤 했으니, 그다지 어려운 결정도 아니었다. 시간이 흘러 학위를 받고, 시간강사가 되어 학생들을 만나고 있다. 퇴직 후에만 두 권의 시집을 더 냈고, 문학평론가란 직함도 얻었다. 첫 평론집을 냈고, 연이어 두 번째 평론집과 연구서가 곧 세상에 나온다. 시인들의 작품 세계를 분석하는 논문을 써서 학술지에 게재하고, 문예지의 편집위원으로서 회의도 하고 원고도 쓰고 있다. 시집 해설도 쓰고, 시가 오면 무릎을 꿇고 받아 적고 있다. 분주하고 바쁜 나날이다. 늘 꿈꾸던 전업 시인의 길이 당당하고 자랑스러운가 하면, 불비한 생활 여건에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알게 된 건지 몇몇 성당에서 작은 공연을 준비한다며 연출을 부탁해 오고 있다. 이미 다섯 번의 공연을 진행했다. 모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려는 깊은 신앙심의 발로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거절하지 못했다. 그렇게 ‘달빛콘서트’와 ‘별빛콘서트’는 퇴직한 지 7년이 된 한 전업 시인에게 다가와 정신 바짝 차리고 하느님의 부름에 응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글 _ 김재홍 요한 사도(시인•문학평론가, 가톨릭대 초빙교수)
몇 년 전 「도시의 생존」이란 책이 출간되었다. 하버드대 경제학과 에드워드 글레이저, 데이비드 커틀러 교수가 코로나를 계기로 쓴 책이다. 두 저자는 묻는다. “도시는 늘 재해, 전쟁, 전염병 같은 위기를 맞게 되는데 과연 소멸하지 않고 생존할 수 있을까?” 저자들의 답은 매우 낙관적이다. 도시의 역사는 늘 위기의 연속이었지만 슬기롭게 대응해 생존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란다. 한국어판 추천사 부탁을 받아 원고를 읽고 찾아낸 두 낙관론자의 논거는 ‘이타심’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 존재이지만 공동체에 위기가 닥치면 이기심을 누르고 이타심을 발휘한다. 위기 앞에서 모두가 이기적으로 행동한다면 공멸할 것이니, 나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서라도 이타적으로 행동해야 함을 본능으로 안다. 코로나 덕분에 ‘행복하지 않은 선진국 대한민국’의 원인과 해법을 일깨워준 귀한 책을 만났다. 대한민국은 단기간에 선진국으로 도약한 빛나는 나라다. 문화예술 역량은 세계 최고다. 그런데 이처럼 빛나는 부자나라 국민의 행복도는 매우 낮다. 우리는 지금 한편으론 빛나지만, 다른 한편으론 많이 아픈 나라에서 살고 있다. 중증 질환을 드러내는 증후들은 많다. 서울 강남 어느 산후조리원의 2주 사용료는 4천만 원이 넘는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막 태어난 신생아 의대 보내기 커뮤니티가 여기서 만들어진다고 한다. ‘4세 고시’의 진원지다. 성공하려면 무조건 경쟁하라고 몰아치는 ‘경쟁교육’이 아직도 지속되는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서울대 공대와 자연대에 합격한 신입생 수백 명이 의대를 가려고 자퇴하는 걸 어찌 보아야 할까? 월급을 평생 모아도 살 수 없을 만큼 치솟은 부동산도 아픈 대한민국의 한 증상이다. 집값은 내려가야 마땅한데 내려갈 수 있을까? 국민의 절반 이상이 내 집을 보유하고 있는데, 집값 하락을 바라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집값 안정화가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선진국들은 일찍이 문제를 간파하고 대응했다. 19세기 말부터 주택법이 제정된 이유는 집을 ‘재물’이 아닌 ‘인권’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유럽 선진국들의 임대주택과 사회주택 비율은 20~30%를 차지한다. 10%에도 못 미치는 우리나라와 사뭇 다르다. 가장 살고 싶은 도시로 손꼽히는 오스트리아 수도 빈 시민들 가운데 자기 소유 집에 사는 사람은 25%에 불과하다. 인구가 급격히 줄어 가장 먼저 ‘인구 제로’에 도달할 것이라는 예측이 현실이 되어가는 것도 우리가 많이 아프다는 방증이다. 인구문제의 핵심은 감소보다 쏠림이다. 수도권으로 인구가 쏠려 한쪽은 극심한 경쟁으로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고, 다른 한쪽은 지탱할 인구가 없어 소멸로 다가가는 악순환에 갇혀있다. 나라는 선진국이 되었는데, 국민은 왜 행복하지 않을까? 원인이 무엇일까? 지금 우리는 이기심과 이타심의 균형감을 잃고 마냥 이기적으로 내달리고 있는 건 아닐까? 내 자식만 잘된다면 경쟁교육도 좋고, 집값은 절대 내려가면 안 되며, 나고 자란 내 고향이 사라져도 상관없다는 무심한 그 마음 때문 아닐까? 가난했던 시절에도 우리 마음에는 ‘이타심’이 늘 살아있었다. 어디에나 어려운 사람들은 있었지만 품고 살았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허리춤 조이고 노력해 ‘부자 나라’는 되었지만, 요람에서 무덤까지 경쟁해야 하는 ‘행복하지 않은 국민’으로 살고 있다. 어떻게 해야 이 병을 고칠 수 있을까? ‘이타가 곧 이기’라는 깨달음, ‘이타적 이기주의’가 치유의 길일 것 같다. 위기에 빠진 공동체가 생존하려면 이타심을 앞세워야 한다는 상식의 회복이다. “부자되세요!”란 말을 거리낌 없이 주고받던 때부터 이 병이 깊어진 것 같다. 균형감을 회복해 고쳐보자. 어디서나 누구나 함께 행복한 진짜 선진국을 만들어보자. 따뜻했던 본래 우리의 마음으로. 글 _ 정석 예로니모(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
독수리 날듯이 Peru, 2010. 안데스 산정의 높고 깊은 콜카 계곡에는 콘도르가 산다. 거대한 콘도르가 3미터에 달하는 날개를 펴고 태양빛을 받으며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는 순간, 묵묵하던 산맥이 전율과 생기로 깨어나는 듯하다. 안데스인들은 콘도르가 억압받는 자들의 슬픔과 분노를 그 날개에 실어 전하는 ‘하늘의 전령’이라고 믿어왔다. 오랜 식민지배 속에서도 안데스인들은 아이들과 함께 이곳을 찾아와 산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노래했다. 마침내 콘도르가 계곡에서 하늘을 향해 솟구쳐 날아오면 ‘정의는 독수리처럼!’ 다시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는다. - 박노해(가스파르) 사진 에세이 「산빛」수록작 글·사진 _ 박노해 가스파르 ※ 서울 종로구 통의동 ‘라 카페 갤러리’(02-379-1975)에서 박노해 시인 상설 사진전을 무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 남동부 프로방스 지방 바르(Var) 지역의 울창한 계곡 속에는 12세기경 건축된 르 도로네(Le Thoronet) 수도원이 있다. 수도원 입구의 성물방에 들른 나는 이 수도원의 복도를 찍은 사진 액자를 보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힘이 다 빠져나가면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성물 하나 못 사고 나는 서둘러 성당 안으로 들어섰다. 오래오래 광야를 떠돌다가 아버지 집에 돌아오면 그런 느낌일까, 나는 성당을 다 돌아보지도 못하고 아무 의자에나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르 뚜르네 수도원을 짓기 전 건축가 르 꼬르뷔지에가 이 수도원에 들렀다가 예정에도 없이 한 달을 더 머물며 책을 썼다고 했다. ‘진실의 건축’, 나는 그때 건축가의 영성이 콘크리트나 돌 혹은 나무에 스며들어, 그곳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말을 걸고 자신의 영성을 나누어 준다는 사실을 처음 체험했다. 그리고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건축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 많은 잘못들의 기억이 해일처럼 밀려오기 시작하는 이상한 경험을 했다. 나는 설명을 다 듣지 못하고 일행과 떨어져 홀로 울었다. 즐거운 스페인 여행 중 왜 갑자기 내 잘못들이 떠올랐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성당의 정식 이름이 ‘Temple Expatori De La Sagrada Famillia’, 즉 ‘성가정의 참회의 성당’이었다. 성인 품에 오를 가우디의 영성이 내게 전해져 왔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은 왜관의 성 베네딕도 문화영성센터. 이 건물에서 머물면 하염없는 평화가 온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어떤 곳에든 여행을 가면 아침마다 늘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어제 집으로 갔어야 했어“라고. 그런데 이곳에서는 생각하곤 한다. ”이 고요에 이 평화에 하루 더 머무르고 싶다“고. 생각해 봤는데, 이건 건축가 승효상의 영성이었다. 그는 개신교 신자이지만, 이 건물을 짓는 이 년여 동안 거의 수도원에 머무르며 다섯 번의 매일 시간 전례 기도에 모두 참례했다. 그의 가족은 오래된 개신교 신자들로, ‘신앙의 자유'를 위해 북한에서 남으로 이주하여 가난을 견딘 것으로 유명했다. 나는 가끔 그에게 100세에 돌아가신 그의 어머니의 신앙에 대해 듣곤 했는데, 그 역시 내색하지 않았지만 뼛속까지 그리스도인이었다 . 어쨌든 그런 건축가 승효상의 강연을 들으러 하동에서 남양 성모 성지까지 나는 먼 길을 떠났다. 나는 십여 년 전 그곳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정말 시골 냄새가 풀풀 풍기는 논두렁 사이에 서 있던 가난하고 작은 성당. 그런데 십여 년 만에 방문한 그곳은 엄청난 변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십여 년 전 이상각 신부님은 미사에서 강론을 한 시간 넘게 한 것도 모자라, 자신이 묵주기도를 하루에 백단 이상을 한다는 말을 계속했다. 고상한(?) 신자였던 내가 그런 물량에 질려버렸던 것은 물론이고, 그에게는 약간 광신의 냄새도 난다며 투덜거렸던 기억도 났다. 그런데 그 남양 성모 성지를 오르면서 나는 다윗 같은 한 인간을 느꼈다. 가난한 그 사제는 묵주 딱 하나만을 들고 있었다. 대성당에 들어섰을 때 나는 그래서 울고 있었다. 이런 경험 또한 처음이었는데, 이번에는 대성당을 건축한 유명한 건축가 때문이 아니었다. 그 건물을 지은 건축주, 이상각 신부님 때문이었다. 돌아오는 길, 나는 묵주를 다시 집어 들었다. “어차피 기도해도 하느님 맘대로 하실 거잖아요” 반항하며, 이즈음 나는 우울함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왜 또 기도를 시작하는가. 그러니 어쩌면 신앙은 횃불과 같은가 보다. 그 곁에 가면 싫어도 기어이 불이 옮겨붙고 마는. 글 _ 공지영 마리아(소설가)
유난히 맑은 봄날이었다. 막 교실을 빠져나온 한 무리의 남학생들이 뛰어가기에 골목은 너무 비좁았으나, 빛나는 봄의 화음은 그들의 내면에 드리워진 그늘을 아주 말끔하게 씻어주었다. 그들은 소리치고 노래 부르며 뛰고 달렸다. 그 순간 그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솟구치는 청춘의 열정만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날은 백일장이 열리는 날이었다. 수업을 빼먹고 대낮에 경주까지 간다는 건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들에겐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 기회였다. 골목을 빠져나온 학생들은 큰길을 따라 거침없이 울산역으로 향했다. 그들은 모두 입상을 목표로 했지만, 그렇다고 상을 받는 데만 몰두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수업시간에 열차를 타고 경주에 간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게 희열에 달뜬 한 무리의 불덩이들 사이에 한 시커먼 1학년 학생이 있었다. 그는 조금 전 문예부 교실에서 선배들로부터 ‘줄빠따’를 맞은 터였다. 문예부장을 비롯한 3학년들이 차례로 2학년과 1학년들을 때리고, 다시 2학년들이 1학년을 때렸다. 밀대자루로 한 사람이 10대씩은 매질을 하니 1학년은 적어도 200대 정도는 맞아야 했다. 이번에는 반드시 대구나 경주 애들보다 더 많은 상을 받아야 한다는 다짐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입상자는 겨우 한 명이었다. 갈 때와 달리 돌아오는 객차 안에서 말을 꺼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3학년도 2학년도 1학년도 침묵뿐이었다. 다짐의 매질을 시작한 문예부장부터 막 입학한 1학년까지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유일한 수상자였던 그 시커먼 1학년 학생은 달랐다. 꼴찌 상인 입선(入選)이었지만, 그에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자부심과 환희가 끓어올랐다. 땅을 디뎌도 구름 속을 걷는 것 같았고, 하늘을 보면 구름 위에 올라탄 것 같았다. 실로 그 도화지 한 장의 힘은 거대했다. 추위와 우울 속을 살던 아직 어린 영혼에게 그것은 좀처럼 식지 않는 시인에의 꿈을 심어주었다. 그날 이후 시커먼 1학년 학생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참으로 많은 상을 받았다. 입선이 아니라 장원과 차상을 무수히 받았다. 그것을 통해 만성적 우울을 이겨내고, 그것을 통해 생의 활력을 얻었다. 시의 길을 쉬지 않고 걸어 이제 등단 22년 차의 중견 시인에다 비평가이자 문학 연구자란 호칭까지 달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안다. 시인은 영광의 궁전에 무늬를 덧대는 사람이 아니라 고통의 움막에 희망의 불씨를 지피는 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시인은 언제나 詩詩하며, 진짜 ‘시시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시는 한없이 낮고 낮아져서, 더는 자기 아래에 아무것도 남은 게 없을 때까지 낮아져서 마침내 세상의 모든 것을 우러러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하느님을 따르는 길임을. 글 _ 김재홍 요한 사도(시인·문학평론가, 가톨릭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