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대림 제2주일을 인권 주일로 지낸다. 전례력으로 새해를 맞이하며, 인권(人權)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수호하고, 공정하고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어야 할 사명이 신앙인에게 있음을 상기시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창세 1,27 참조) 모든 인간은 누구나 동등한 존엄성을 지닌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권리, 즉 인권이 모든 이에게 보장돼야 함은 변함없이 이어져 온 교회의 가르침이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장 김선태 주교는 올해 인권 주일과 사회 교리 주간 담화에서 특별히 이주 노동자의 인권 수호를 강조했다. 18명의 이주 노동자가 목숨을 잃은 아리셀 공장 참사를 언급하며, 주님 안에서 ‘서로 다른 지체이지만 한 몸’을 이루는, 그럼에도 여전히 ‘소모품’처럼 외면받는 우리 사회 이주 노동자들을 기억하자고 청했다. 이주 노동자들 또한 우리 사회를 이루는 하나의 구성원이자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으로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인권 주일을 맞이하며 인재(人災)의 위험에 노출된 채 홀대받는 이주 노동자의 현실을 한 번쯤 새겨 성찰해야 한다. 이주 노동자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는 장애인과 성소수자, 비정규직 노동자, 소외된 노인과 아동 등 인권의 사각지대에 처한 이들이 많다. 그들 또한 주님의 형제들이자 우리의 형제들이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마태 25,40 참조)임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답게 대접받지 못한 채 고통받는 사회적 약자들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힘쓰며 인간 존중에 바탕을 둔 인권 수호에 누구보다 앞장서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평신도들의 우리신학 연구를 표방한 우리신학연구소의 30년에 대해 치하하고 지지한다. 우리신학연구소(이하 우신연)가 올해 창립 30주년을 맞아 11월 30일 감사미사를 봉헌했다. 신학 연구를 하기에 척박한 우리나라에서, 평신도들이 신앙을 바탕으로 평생의 소명으로 함께 일군 우신연의 30년 여정에 대해 우리는 높이 평가하고 격려하고자 한다. 우신연의 설립 취지는 먼저 평신도 신학운동이었다. 그 소명의 바탕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제시한, 현대 세계와 교회의 나아갈 바에 대한 가르침이었고, 이는 지난 10월 막을 내린 세계주교시노드에서 논의한 시노달리타스 정신과 다르지 않다. 비록 저변이 충분하게 확장되지 못했다는 자체적인 성찰이 있지만, 우신연은 시대를 앞서 평신도의 정체성을 밝히고 역량을 키우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 또한 명칭이 분명하게 드러내듯이, ‘우리신학’을 표방한다. 역사와 전통은 중요하지만, 전통에 대한 존중이 경직된 사고와 구태의 답습, 혹은 창의성과 현실성의 상실로 이어지기도 한다. 서구 신학의 풍요한 자산을 바탕으로 우리 전통과 문화, 작금의 사회 현실 안에서 복음의 진리를 발견하고 실천하려는 노력은 본질적인 과제다. 때마침 시노달리타스를 주제로 한 세계주교시노드가 끝나고 이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치고 초대교회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됐으며,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촉구한 시노드적인 교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이제 새로 시작한 그 여정에서 평신도들의 소명과 역할은 더욱 강조될 것이고, 여기에서 우신연이 기여할 바는 무궁할 것이다.
서울 대학동 고시촌에 있는 독거 중장년을 위한 쉼터 ‘참 소중한...’의 센터장인 이영우(토마스) 신부의 사제관은 작은 고시원이다. 교구는 고시촌에서 떨어져 있는 편안한 사제관을 제안했으나 이 신부는 가난한 사람들 곁에 살길 택했다. 이 신부가 그런 선택을 한 이유는 간단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으니까요.” 우리는 줄곧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가난한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 소외된 이들을 후원하며 나의 것을 나누기도 한다. 성당 안에서는 적극적으로, 기꺼이 소외된 이들을 위해 했던 일들이 성당 밖을 나오면 어려워지곤 한다. 소외된 이들을 외면하는 정치를 하는 이들에게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신앙생활과 무관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세상의 일에 목소리를 내는 사제들에게 정치적 편향성을 드러낸다는 비난이 쏟아지기도 한다. 신앙생활과 삶은 떨어뜨려 생각하는 것이 맞을까? 「간추린 사회교리」는 “정의, 자유, 발전, 민족들의 관계, 평화에 관한 문제들이나 상황처럼 인간 공동체와 관련된 것이라면 그 어느 것도 복음화와 무관하지 않으며 복음과 인간의 구체적인 개인 생활과 사회 생활이 서로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것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복음화는 완성될 수 없다. … 만일 정의와 평화로 참된 인간 발전을 증진시키지 못한다면 어떻게 사랑의 새 계명을 선포할 수 있겠는가?”(66항)라고 설명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사회교리는 지킬 교리, 즉 생활지침서와 같은 것이다. 그릇된 정치로 가난한 이들의 가난이 심화되고, 한 형제였던 이들이 분열되고 다투고 있는 현장에서 예수님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셨을지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해질 것이다.
세상을 선물로 받고 세상에 선물로 와준 리사(가명)와 엄마 카티(가명) 씨를 만났다. 카티 씨는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에게 와준 소중한 생명을 지켜 낳은 딸 리사에게 세상을 선물로 준 강직한 엄마다. 이제 3살이 된 리사의 눈망울 안에 가득 들어있는 사랑스런 귀여움은 쉽게 발길을 돌리지 못하게 했다. 리사는 어떤 꾸밈도 없는 그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을 누구보다도 신나게 살고 있다. 카티 씨는 완벽한 엄마로서의 준비는 부족했지만 아이의 생명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을 채워주는 리사를 보며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낼 마음의 준비로 건강하고 밝은 미래의 삶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 몇 년 전 E6 비자를 발급받아 우리나라에서 일 해온 외국인 노동자 카티 씨는 일터에서 한국인 남성을 만났고 얼마 후 임신한 것을 알게 됐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한국인 아이 아빠는 그녀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오히려 낙태할 것을 종용하며 지금까지 모습을 감추고 있는 상태다. 몹시 두려웠고, 무서웠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상태로 홀로 이 낯선 나라에서 아이를 출산하게 되면 현실적으로 마주해야 할 여러 문제가 너무 무서웠다. 그사이 아이 아빠는 자취를 감췄다. 가톨릭 신자인 카티 씨는 배는 불러오고 갈 곳도 없고 일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뱃속에서 꿈틀거리는 소중한 생명을 지켜야 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생명문제는 강자에 의해 약자의 생명이 유린당하는 것이며, 낙태, 안락사, 폭력, 전쟁 등을 통해서 위협받는 생명들은 힘센 자들의 부당한 폭력으로부터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보호할 힘이 없는 약자들이다.”(박정우 신부, 가톨릭신문 2007년 5월 20일자 칼럼 중에서) 그렇다, 강자에 의해 생명이 생겼지만 그 강자에 의해 다시 생명은 위협을 받는다. 그리고 그 생명을 지켜내려 위험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은 대부분 약자들이다. 그 약자들은 여성이며 엄마다. “당신의 길을 걸어 생명을 얻었나이다.”(시편 119, 37) 하느님의 길을 걸어 얻은 생명은 그분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기에, 존재 자체만으로도 존엄성을 갖추기에 그 누구도 타인의 생명에 대한 권한을 가질 수 없고 또 가져서도 안 된다. 리사는 아직 아빠를 만나지 못했다. 카티 씨가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 리사와 함께 한국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지청구 소송, DNA 검사를 통해 가족관계 확인을 해야만 엄마와 함께 안전하게 한국에서 살아갈 수 있다. 이 두 가지 방법은 모두 아빠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 외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카티 씨에게 그는 이를 계속 거부하며 아이의 존재를 회피하고 있다.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한 리사는 아빠의 존재를 묻기 시작하고 있다. 카티 씨는 미래가 보장되지 않은 상황과 아빠를 찾는 리사를 보며 불안한 마음이 커지고 있다. 아이의 존재가 인정되지 않으면 카티 씨는 아이를 데리고 한국을 떠나야 한다. 꼭꼭 숨어서 나타나지 않는 아빠의 행동은 안타깝지만 아이의 행복을 위해 또다시 가족관계 확인을 위한 인지청구 소송을 시작했다. 이런 소송 없이도 아이가 살아가야 할 미래를 위해 어딘가로 자취를 감춘 아빠들에게 책임을 지게 하는 법적인 대안이 필요하다. 18세까지 양육비를 주도록 돼있는 법은 이렇게 자취를 감추고 나타나지 않는 나쁜 아빠들에겐 강제할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아직도 외줄타기를 마다하지 않고 아이를 지키려 하는 많은 카티 씨 같은 약자들의 삶에 희망이 피어나 생명의 소중함과 생명 있는 동안 책임을 다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스스로 선택한 리사와의 삶을 살고 싶은 나라에서 웃으며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생명은 하느님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글 _ 강성숙 레지나 수녀(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 회)
드디어 기다리던 세례식 날.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성당으로 향했다. 하늘은 어쩜 이리 맑은지. 진짜 맑은 가을 하늘이다. 어제까지 추웠는데 또 나를 위해 이렇게 좋은 날을 주셨나? 콧노래가 절로 나올 것만 같았다. 무슨 노래를 할까? 그래, 이런 날은 성가를 부르면 좋겠다. 근데 내가 아는 성가는 대영광송 307번 밖에 없잖아.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참, 여기는 신부님이 부르셨지. “땅에서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난 이 부분이 특히 좋은 것 같다. 예비신자 교리 선생님이 성가는 두 배의 기도 효과가 있다고 하셨으니, ‘다른 성가들도 얼른 배워야겠군’이라고 생각했다. 차 안에서 혼자 큰 소리로 대영광송을 부르며 성당으로 향했다. 수원교구 모전동성당은 집에서 신호에 걸리지 않으면 차로 5분도 안 걸린다. 가까운데 사는 사람이 꼭 지각한다고 했던가? 날이 날이니만큼 다른 날보다 약간 꾸미느라 조금 늦었다. 주차 봉사를 하고 계신 처음 뵙는 형제님께 오늘 세례받는다고 자랑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후다닥 뛰어가니, 기다리고 있던 선교분과 봉사자분께서 가슴에 생화 코르사주를 달아주셨다. 숨 쉴 때마다 장미향이 바로 코밑에서 계속 올라오니 기분이 더 좋아졌다. 사실 내가 성당에 첫발을 들여놓은 건 좀 오래되었다. 친하게 지내는 가타리나 언니로부터 같이 성경 공부하러 가자는 권유를 받고 성경은 상식적으로도 알면 좋겠다 싶어 ‘여정’ 공부를 시작했던 게 벌써 다섯 학기째가 되었다. 코로나19 때 쉬었던 것까지 합치면 5년 정도 된 것 같다. 그러던 중 예비신자 교리반이 열려 친한 동생 안젤라가 일방적으로 등록을 해놓았다고 통보했다. 원래 나는 성경 공부만 하고 하느님을 믿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뭔가에 이끌리듯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당에만 오면 좋은 일이 많이 생기는 것 같았다. 우리 여정 식구들은 원래 모두 좋은 사람들인 것 같았지만 특히 내가 예비신자라고 미안하리만큼 더 친절하게 대해주셨다. 성당만 갔다 오면 뭐라도 좋은 일이 생겼다. 정말 하느님이 나를 부르시는 건가? 생각될 정도로. 가톨릭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던 내가 예비신자 교리를 통해 배우는 시간은 정말 새롭고 흥미로웠다. 성호경 긋는 법부터 기도하는 법, 기도의 종류, 한국 천주교 역사 등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이 가득했다. 10개월간 주일 아침마다 해온 교리 공부를 끝내고 드디어 오늘 세례를 받게 되었다. 오늘 함께 세례받는 고등학생 지형이가 하얀 코트를 입고 왔는데 어찌나 예뻐 보이던지, 나는 까만색으로 온몸을 감싸고 온 게 좀 아쉬웠다. 나도 밝은색 옷을 입고 빛나는 느낌을 내고 싶었지만, 세례식이 끝나고 구역별 연도 대회에 참석할 예정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나도 이미 우리 구역의 한 명이 된 것이다. 세례식이 시작되고 드디어 내 이름이 세례명 ‘에스테르’로 불렸다. 신부님이 머리에 손을 얹어 기도해 주실 때는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처음으로 ‘예수님의 몸’도 받아 모셨다. 모든 게 새롭고 신기했다. 오늘 하루 넘치게 축하를 받았다. 생각보다 더 복된 날이었다. 대모님이 미사보랑 파우치를 준비해 주셨고 여정 식구들은 성경, 성가책, 기도서, 십자고상 등을 선물해 주셨다. 또한 구역 식구들이 주신 꽃다발과 성모상을 비롯해 신부님이 주신 가톨릭신문 구독권까지 너무 많은 선물과 축하를 받아 몸 둘 바를 모를 정도였다. 오늘 하루 너무너무 행복한 날이었다. 나중에 하느님께 가는 길도 이렇게 행복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교리 선생님이 각자 좋아하는 성경 문구를 정한 다음 예쁜 글씨로 써서 코팅해 주셨는데 나의 세례 문구는 ‘네 자선을 숨겨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4)이다. 나는 이 말이 참 좋다. 착한 일을 남들 몰래 할 기회가 있을 때 하느님은 알고 계실 테니 말이다. 나도 하느님께서 좋아하실만한 자녀가 되고, 또 새로 세례받는 후배가 들어올 때 이 기쁨을 느낄 수 있게 많이 축하해 줘야겠다. 드디어 하하하! 나는 이제 당당한 천주교인이 되었다. 글 _ 임은옥 에스테르(수원교구 모전동본당)
진리를 알려고 하는가 진리를 살려고 하는가 사랑을 가지려 하는가 사랑을 하려고 하는가 글·사진 _ 박노해 가스파르 ※ 작품은 서울 종로구 통의동 '라 카페 갤러리'(02-379-1975)에서 열리는 사진전 ‘다른 오늘’에서 무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2025년 3월 2일까지.
누군가 내게, 일을 해 돈을 버는 것과 글을 쓰는 것 두 가지 중 무엇이 더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돈을 버는 것’이라고 대답할 거다. 먹고 사는 일이 내겐 그만큼 중요하다. 나이 쉰이 넘어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젠 아이들이 다 커서 예전처럼 악착을 떨고 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글이 돈이 되기 위한 길은 멀고도 험하다. 워낙 책이 안 팔리는 시대라 거기에 기대 살 수는 없다. 가끔 원고청탁이 들어오긴 하지만 원고료가 언제 지급되는지 물어보지 못한 채 글을 써 보내기도 했다. 우리나라 정서상 돈 얘기를 꺼내는 건 왠지 속물처럼 느껴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서울 봉천동에서 잠시 살았던 적이 있다. 서울에서 집을 구하러 돌아다니다 봉천동 산꼭대기에 있는 빌라를 월세로 얻었다. 아토피가 있는 큰아들 때문에 반지하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남편 월급의 반이 월세로 들어가다 보니 늘 돈이 모자라 허덕였다. 그때는 아이들이 어려 내가 일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남편의 월급 말고는 따로 돈이 들어올 데가 없었다. 하지만 가끔, 가뭄에 단비 같은 돈이 생겼다. 그게 바로 남편의 ‘강연비’였다. 지방에 가서 강연을 하면 교통비까지 해서 20만 원. 서울에서 하면 10만 원 남짓. 그 돈이 들어오면, 우리 가족은 돼지갈비도 사 먹고 애들 데리고 바람도 쐬러 갈 수 있어 그게 참 좋았다. 통장에 돈이 똑 떨어졌던 어느 날, 남편에게 강의 제안이 들어왔다. 서울 변두리에 있는 어느 성당에서였는데 보통 성당에서 강연을 하면 주임 신부님이 알아서 강연료를 챙겨주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어쩔 땐 강사비를 못 받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어쨌거나 그날 아침, 애들도 나도 신이 나 남편을 따라나섰다. “아빠 일 끝나면 우리 맛있는 꼬기 먹자~~.” 미사가 끝날 때까지 성당 마당에서 아이들과 기다리고 있는데 강연을 마치고 걸어 나오는 남편의 표정이 왠지 어두워 보였다. “강사비는 받았어?” “별말이 없네. 좀 기다려 보자.” “뭐야, 그런 게 어딨어?” 성당 마당을 서성이며 기다리고 있는데 주임 신부로 보이는 분이 느릿느릿 걸어나왔다. 그리고는, 애들 머리를 한 번씩 쓱쓱 쓰다듬어 주더니 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했다. 저 말은 강연비 줄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주말에 사람을 불러내 일을 시켰으면 당연히 줘야 할 돈이었다. 우리는 약속이 있어 그냥 가보겠다 말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그곳을 나왔다. 그날, 아이들에게 돼지갈비를 사주지 못해 얼마나 미안하고 초라한 기분이었는지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일을 하면 정당한 노력의 대가를 받는 게 당연하지만 혼자 속앓이를 하면서도 당당하게 요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곱창집에서 일을 할 때, 외국인 노동자들이 몇 달째 월급을 못 받고 있다며 울분을 토하는 모습도 보았다. 가끔 TV 프로에서 우스꽝스럽게 써먹는, “우리 사장님 나빠요”라는 말이 실상은 참 가슴 아픈 말이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이런 말을 서슴없이 잘하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원고료는 언제 입금되나요?’ ‘그 일을 하게 되면 얼마를 줍니까?’ 그건 돈에 대한 것이기 이전에 부당함을 거부하겠다는 의지이다. 봉사나 재능기부 같은 일도 스스로 원하고 합의 된 이후에 하는 것이 맞다. 일을 시키는 상대가 그걸 판단하고 정해서는 안 된다.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고 돈을 버는 것은 종교만큼이나 성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글 _ 김양미 비비안나(소설가)
주말이라 조용히 공원 산책이나 할까 싶어 나선 길, 저만치 앞에서 아저씨 한 분이 벤치에 앉아있는 젊은 남녀에게 뭔가를 열심히 떠들고 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아 얼른 지나가려 했지만 티 나게 빨리 걸은 게 오히려 눈에 띄었던지 아저씨가 방향을 획 틀더니 나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예수 믿으세요. 불신지옥! 아시죠?” 아저씨는 계속 따라오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처음엔 못 들은 척 앞만 보고 걸었지만 웬만해선 떨어져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랜만에 조용히 산책하며 이런저런 생각 정리나 좀 하려고 했더니, 갑자기 짜증이 확 솟구쳤다. “예수님 믿어야 천국 가요. 이거 읽어보면 다 나옵니다.” 화를 꾹꾹 참으며 처음엔 점잖게 말했다. “아 네, 괜찮습니다. 그만 따라오세요.” 하지만 아저씨는 껌딱지처럼 내 곁에 달라붙어 계속 말을 시켰다. 할 수 없이 나는 아저씨 쪽으로 돌아서서 눈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아저씨. 예수님 믿으면 진짜 천국 가요?” “그럼요. 천국 갑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저희에게...” “그러니까 언제든 믿기만 하면 된다는 거잖아요.” 갑자기 내가 적극적으로 나오자 잠시 주춤하는 아저씨. 그 틈을 노려 쐐기를 박았다. “그럼 전 죽기 하루 전부터 믿을게요. 언제든 상관없다 그러셨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따라오지 마세요. 아셨죠?” “아니 그래도, 우리가 언제 죽을지 알고...” 손에 전단지를 잔뜩 들고 서있는 아저씨를 바라봤다. 후줄근한 차림에 볼이 움푹 들어갈 정도로 마른 얼굴. 언제든 천국이 보장된 삶을 사는 사람치고는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아저씨 손에 들린 ‘불신지옥’ 종이를 받아주고 잠시 얘기라도 들어주면 될 일이었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도 하느님을 믿는 가톨릭 신자지만 여태 살면서 누구에게 성당을 다녀야 구원받는다는 말을 해본 적 없다. 하물며 내 자식에게도 말이다. 첫째는 불교 쪽이 끌린다기에 그럼 절에 다니라 했고, 군대에 들어가 늘 배가 고팠던 둘째는 초코파이를 얻어먹기 위해 성당에 열심히 다녔다고 했다. 본인의 선택으로 믿기 시작한 종교가 아니라면 별 의미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자기가 믿는 종교를 남에게 강요하고 불지옥에 간다고 겁을 주는 건 일종의 협박이다. 그러므로 내가 좀 전에 한 행동은 ‘정당방위’라 볼 수 있다. 영화 ‘신과 함께’에 이런 말이 나온다. “이승에서 진심어린 용서를 받은 자는 저승에서 누군가가 다시 심판할 자격이 없다.” 죄를 지었으면 죽기 전에 잘못한 사람에게 용서받아야 하는 거지, 실컷 죄짓고 살다가 예수님만 믿으면 천국 간다는 게 말이 되냔 말이다. 저 교회 목사가 누군진 모르겠지만 전단지에 나와 있는 번호로 전화해서 한 마디 해주고 싶었다. “이 추운 날, 사람들 내보내 고생시키지 말고 당신이나 부끄럽지 않게 사세요. 믿지 않아 지옥을 가는 게 아니라 자신이 남들에게 무엇을 잘못하고 사는지 모르기 때문 아니겠어요? 올바른 종교는, 전단지 나눠주며 겁이나 주는 게 아니라 힘들고 아픈 사람들을 위해 오늘 하루 당신이 무엇을 했는지 몸소 보여주는 겁니다. 신앙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거지 구원 팔이나 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라고 입을 놀렸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야산에 파묻힐 수 있으니, 일단은 안 하는 걸로. 아저씨는 불신지옥에 떨어질 나를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노상 전도의 발걸음을 돌렸다. ‘천국에 가기 위해선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어라’ 말씀하신 예수님의 뜻은 따르지 않으면서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공허한 헛소리가 종교라는 이름을 달고 더 이상 돌아다니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평화로운 주말 아침을 망쳐놓지도 말고! 글 _ 김양미 비비안나(소설가)
중단하지 않는 한 실패가 아니다 글·사진 _ 박노해 가스파르 ※ 작품은 서울 종로구 통의동 '라 카페 갤러리'(02-379-1975)에서 열리는 사진전 ‘다른 오늘’에서 무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2025년 3월 2일까지.
최근 몇 달 동안 보도된 뉴스의 젠더폭력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잔인했다. 교제 중 폭력을 당하던 피해자가 살해당한 사건, 불법 동영상을 유포하겠다고 협박받으며 온·오프라인의 성폭력을 당한 사건, 사진을 도용당하고 딥페이크 동영상 유포를 협박받고 금품을 갈취당한 사건 등이 있었다. 한 유명 여성 유튜버는 전 남자친구에게 불법촬영 동영상을 유포하겠다는 협박을 받고 많은 돈을 갈취당했다고 고백했다. 다른 남성 유튜버들이 이 사실을 알고 피해자를 협박해 돈을 요구했다는 내용은 충격적이다. 우리는 존중과 배려를 기본적 예의로 생각하기보다 나의 이익, 욕망을 관철한다면 상대방의 피해는 상관없다는 태도가 팽배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폭력에 대한 감수성 부족은 가난, 연령, 성, 장애 등의 층위에서 주변화된 집단을 위한 복지나 정책을 특혜나 역차별로 해석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교육, 고용 등 성평등에서 진보가 없다고 할 수 없으나, 과소대표성은 해결되지 않고 여성들은 남성중심적 사고나 여성혐오에 기초한 폭력에서 안전하지 않다. 젠더폭력은 성별 권력 관계를 이해하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다. 하지만 공정성이나 독립, 동등한 주체로서 여성들에게 행동하라고 요구할 때 여성들이 경험하는 폭력적 피해들은 사소화된다. 이러한 문화는 여성들이 피해를 자초했다고 비난하는 통념을 지지한다. 가해자가 권력을 이용하거나, 초범인 경우 처벌이 경감되는 것 또한 납득되지 않는 일이다. 미국 코넬대 철학과 교수 케이트 만(Kate Manne)은 「다운걸: 여성혐오」에서 남성 가해자들에 대한 과도한 동정심을 ‘힘퍼시’(Himpathy)로 명명한다. 피해자를 비난하는 이면에서 가해자를 연민하고 가해자가 범죄를 저지를 만한 이유가 있다고 해석하는 문화를 비판하는 것이다. 가해자가 괴물이나 뿔 달린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이라는 사실은 가해자의 상황에 대해 연민으로 작용한다. 피해자에게 연민이 부족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우리 사회에는 피해자가 유혹하지 않았는지 의심하면서 피해 상황을 이해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여성학 연구자 김보화는 「시장으로 간 성폭력」에서 성폭력 피해에 관한 법적 처벌 규정을 만들어낼수록 가해자들이 악랄해지는 상황을 기술한다. 성범죄 이력은 열람되고 취업의 제한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성폭력 가해자들은 처벌을 피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하고 피해자를 명예훼손으로 역고소하기도 한다. 여성단체에서는 성폭력 가해자의 기부금 계좌이체를 발견하고 당황한다. 이러한 기부는 가해자가 범죄에 대해 반성하는 자료로 악용되면서 형량을 낮추는 데에 도움이 된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피해자와 가족의 고통에도 가해자가 응당한 법적 처벌을 받지 않아 개인이 응징하는 내용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들은 정의의 이름으로 가해자를 심판하면서 공분을 가라앉히고 피해자와 가족들을 위로한다. 하지만 사법체제가 부정의를 심판하지 않을 때 사적 처벌은 성찰의 부재로 권력이나 폭력의 남용을 낳을 수 있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은 「분노와 용서」에서 피해자에게 용서할 마음이 없는데도 용서를 강요하는 문화를 비판한다. 또한 피해자와 가족이 개인적으로 복수를 하는 것이 이들의 분노나 고통을 완화시킬 수 있지만 같은 범죄의 피해를 반복하는 악순환을 막지 못한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한 사회가 피해자와 가족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아낌없이 위로를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피해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은 범죄, 폭력을 예방하고 피해자를 양산하지 않도록 예방 및 대처의 사회적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장치는 처벌을 위한 감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회 구성원들이 젠더폭력에 민감해질 때 여성들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 글_이동옥 헬레나(경희사이버대학교 후마니타스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