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하느님 섭리가 완전히 드러난 시간
마지막 일곱 번째 나팔이 울려 퍼지기 전, 작은 두루마리를 펴 들고 있는 천사가 나타난다. 구름에 휩싸인 천사의 모습은 마지막 시대 메시아의 개입을 알리는 ‘사람의 아들’(다니 7,13 참조)과 닮았고 당신 백성 앞에 장엄히 나타나시는 하느님에 대한 서술과도 닮았다.(탈출 16,10; 1열왕 8,10 참조) 천사는 땅과 바다를 발판 삼아 서 있다.
천상과 지상의 공간적 구분은 천사의 형상 안에서 희미해지고, 희미해진 만큼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다. 인간 역사 안에, 백성들 삶 한가운데 천상의 섭리가 천사를 통해 구현된다. 천사의 머리 위 무지개는 그래서 특별하다. 하느님과 인간 세상을 연결하는 계약의 상징인 ‘무지개’(창세 9,13 참조). 천사는 하늘과 땅, 하느님과 인간이 비로소 하나가 되었다는 메타포로 등장한다.
천사를 둘러싼 시간적 구성도 매한가지다. 천사가 등장하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묵시 10,6 참조)이다. 우리말 성경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라 번역했지만, 그리스말 본문은 ‘더 이상 존재할 시간이 없는 시간’을 가리킨다. 머뭇거리거나 기다릴 시간이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 시간은 도대체 어떤 시간일까. 천사의 모습을 다시 한번 살펴봐야 한다.
더 이상 머뭇거리거나 기다릴 시간이 없는 그 시간에 천사는 창조의 하느님을 호출하고 그분을 두고 맹세한다. 이 맹세는 마지막 때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을 두고 맹세한 대목과 겹친다(다니 12,7 참조). 다른 시간을 허용하지 않아 더 이상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그 시간은 사실 마지막, 완성의 시간이(어야 한)다. 태초에 하늘과 땅을 만드시는 하느님께 맹세하는 천사는 마지막 종말의 때를 이야기 한가운데로 끌고 들어온다. 처음과 끝이 하나가 된다.
우리의 이야기는 ‘일곱 번째 나팔 소리가 울리는 시간’ 또한 소개하고 있다.(묵시 10,7 참조) 혹자는 ‘아직 다다르지 않은 종말의 시간’이라고 해석하고 종말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과도기적 시간이 우리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런 관점으로 해석하다 보면 우리말 성경처럼 하느님의 섭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 그 완성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식의 해석이 가능해진다. “일곱째 천사가 불려고 하는 나팔 소리가 울릴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선포하신 대로 그분의 신비가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묵시 10,7)
그러나 그리스말 본문은 ‘과거형’ 동사를 사용한다. 일곱째 천사의 나팔 소리가 울리는 장면은 이야기의 서술상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11장 15절에 가서야 등장한다), 그 시간을 물리적 시간의 미래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수이고 충만함을 가리키는 것으로 일곱째 천사의 나팔이 울리는 시간은 하느님의 섭리가 ‘이미, 완전히’ 이루어진 것을 가리키는 시간적 지표다.
요컨대, 천사가 외치는 이야기의 현재가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는 ‘진공(眞空)의 시간’이라면 그 시간이 바로 일곱째 나팔이 울려 퍼지는 시간이라는 것이고, 하느님의 섭리가 완전히 드러난 시간이라는 것이다. 사실 믿는 이들의 시간은 늘 ‘완성의 시간’이고 ‘마지막 시간’이다. 지난 시간에 대한 회한이나 다가올 시간에 대한 설렘은 믿는 이들의 몫이 아니다. 믿는 이들은 온전히 지금을 전부로, 마지막으로 살아가는 이들이다.
그래서 더 이상의 기록은 필요치 않다. 더 이상 읽어야만 하고 그래서 깨달아야 하고, 깨달음을 기반으로 무언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외침이나 환시의 시간은 무용하다. 우리의 이야기는 이제 마지막이고 완성된 시간을 살아갈 ‘주체’, 곧 ‘예언하는 주체’를 소개한다. 천사가 요한에게 제시하는 작은 두루마리는 읽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먹히기 위해 등장한다.
대개의 주석학자들은 두루마리를 먹는 행위를 두고 말씀을 받는 것, 그러니까 예언자적 소명을 받는 것으로 이해한다.(에제키엘서 2장 참조) 요한의 캐릭터는 본 것을 글로 옮기는 필자에서(묵시 1,19 참조)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자로 변모한다. 글이 말로써 생명력을 얻어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선포된다. 이어지는 요한묵시록 11장에 두 증인이 등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묵시 11,3.6.10 참조)
일곱째 천사 나팔 울리는 때를
물리적 ‘미래’로 해석해선 안 돼
믿는 이들에게 시간은 언제나
완성의 시간이며 마지막 시간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언자의 운명은 혹독하다. 작은 두루마리를 삼키는 것이 입에는 달지언정 배 속은 쓰리기 때문이다.(묵시 10,10; 예레 15,10.15-18 참조) 예언의 말씀은 고맙거나 기쁘거나 만족스러울 때도 있지만, 때론 반감과 대립의 대상이 되어 사람들 사이에서 비난의 근거로 이용되기도 한다.(예레 20,3 참조) 예언의 말씀이 불러오는 반응의 양면성을 이해하기 위해, 오늘 우리의 이야기가 꾸며놓은 시간의 성격을 다시 되짚어 보면 어떨까.
마지막이라서 더 이상의 기대와 바람이 필요 없는 시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미래에 대한 설렘이나 지금에 대한 비판이 아닐 것이다. 빗대자면, 생의 마지막에 내놓아야 할 마지막 말이 앞으로의 계획이나 세상에 대한 비판, 혹은 제 삶에 대한 후회가 전부일 수 없듯이 마지막에 외쳐야 할 예언의 말씀은 그저 마지막 꼭 해야 할 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꼭 해야 할 그 말은 머뭇거림이 없어야 하고, 계산이 없어야 한다. 그 마지막 말이 예언의 말씀이라면, 그 마지막 말을 듣고 기뻐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실은 마지막을 살지 못하는 이들의 섣부른 편견 때문이 아닐까. 하느님의 섭리가 완전히 드러난 이 마지막 시간에 예언자들의 등장은 울려 퍼져야 할 말들을 늘어놓는 도구가 필요해서가 아닐 것이다.
우리의 이야기는 두루마리를 삼킨 요한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려주지 않으며 요한묵시록 어디에도 요한이 설파하는 예언의 말씀을 찾아볼 수 없다. 요한은 그저 말씀이 체화된 한 ‘주체’가 된 것이고 그 주체가 있음으로 되었다고, 그것이면 충분하고 그것으로 마지막 시간에 하느님의 섭리가 완전히 드러난 것이라고 요한묵시록 10장은 우리에게 말하는 듯하다.
말씀의 사람, 예언자는 온 생애 매 순간, 마지막을 살듯 살아가는 사람이고, 삶의 모든 순간에 일곱째 나팔이 울려 퍼지길 제 몸으로 증거하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입에서 터져 나오는 말은 제 속으로 삼켜져 말씀 자체로 거듭나는 이가 예언자일 것이다. 예언은 늘어놓는 말과 언변이 아니라 살아내는 인격을 통해 하느님 말씀으로 선포되는 것이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