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의 장례미사가 4월 26일 오전 10시(로마 현지시간)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엄수됐다. 2013년 3월 13일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된 교황은 12년 동안 재임한 뒤 4월 21일 향년 88세를 일기로 거처하던 교황청 성녀 마르타의 집에서 평화롭게 선종했다. 교황의 장례미사는 추기경단 단장 조반니 바티스타 레 추기경이 주례했고, 전 세계 추기경단과 주교단, 사제단이 공동집전했다. 장례미사에는 수도자와 신자, 시민 등 20여만 명이 참례했다. 세계 각국 전현직 정상들은 장례미사 제단 가까운 곳에서 교황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봤다. 장례미사가 시작되기 전 성 베드로 대성당 중앙 제대 앞에 안치된 교황의 관을 봉인하는 예식이 먼저 거행됐다. 관 봉인 예식은 교황청 궁무처장 케빈 패럴 추기경이 주례했다. 교황청 국무원 총리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은 교황의 생애와 사목활동을 기록한 문서에 서명했으며, 패럴 추기경은 이 문서를 낭독했다. 봉인된 관은 14명의 운구자들이 어깨에 메고 장례미사 장소인 성 베드로 광장 제단으로 운구했다. 미사가 시작되면서 교황청 전례원장 디에고 라벨리 대주교는 관 위에 복음서를 열어 올려놓았다. 곧이어 레 추기경이 관 주위를 돌며 분향 예식을 집전했다. 레 추기경은 미사 강론에서 “우리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12년간 수많은 성체성사를 집전하셨던 성 베드로 광장에 모여 슬픔을 안은 채 그의 시신 둘레에서 기도하고 있다”며 “우리는 인간의 삶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집, 해가 지지 않는 행복한 삶 안에서 마치는 것이라는 확신으로 서 있다”고 말했다. 또한 “우리가 기억하는 교황님의 마지막 모습은 심각하게 안 좋은 건강에도 불구하고 주님 부활 대축일에 우리에게 축복을 주기 원하던 모습”이라면서 “우리는 지금 기도를 통해 교황님의 영혼을 하느님께 맡기고, 하느님께서 영원한 행복을 그에게 허락하시기를 기원한다”고 밝혔다. 레 추기경은 강론을 마치며 “사랑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 이제 저희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하늘에서도 교회와 전 세계, 희망의 불을 높이 드는 모든 인류를 위해서도 축복해 주소서”라고 간구했다. 1시간30분에 걸친 장례미사가 끝난 후, 교황의 관은 교황이 재임 중 이용했던 차량에 실려 로마 베네치아 광장과 콜로세움 등을 지나 안장 장소인 로마 성모대성당에 도착했다. 교황의 관이 지나가는 약 6km 거리에는 장례미사에 참례하지 못한 시민 15만여 명이 나와 교황과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눴다. 안장 예식은 비공개로 간소하게 치러졌다. 교황의 유언대로 ‘프란치스코’라고만 적혀 있는 안장지 앞에 관을 놓고 패럴 추기경이 다시 관 덮개 위에 봉인 인장을 찍은 후 안장하면서 예식을 마쳤다. 교황의 무덤은 4월 27일 오전부터 신자들과 시민들에게 공개되기 시작했다. 추기경단도 27일 오후 교황 무덤을 방문해 조의를 표했다. 아울러 4월 23일 열린 추기경 전체회의 결정에 따라 5월 4일까지 9일간 교황을 추모하는 미사가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이어지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 추모 열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전국 각 교구는 주교좌성당 및 교구청에서 ‘프란치스코 교황 추모 미사’를 거행했다. 서울대교구는 4월 24일 주교좌명동대성당에서 교구장 정순택(베드로) 대주교 주례로 추모 미사를 봉헌했다. 서울대교구 주교단과 사제단, 주한 교황대사 조반니 가스파리 대주교가 공동집전한 이날 미사에는 한국정교회 암브로시오 조그라포스 대주교(한국명 조성암), 에밀리아 가토 주한 이탈리아 대사, 호르헤 엔리케 발레리오 에르난데스 주한 코스타리카 대사, 한홍순 전 교황청 대사를 비롯한 성직자, 수도자, 신자 2400여 명이 함께해 깊은 애도를 표했다. 정 대주교는 강론 중 “교황님께서는 즉위하신 이후 우리에게 참된 신앙의 길을 몸소 보여주셨다”며 “생전 늘 언제나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겸손히 부탁하셨던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기억하며, 우리 모두 한마음으로 기도하자”고 미사에 참례한 모든 이들과 함께 교황을 위해 기도했다. 가스파리 대주교는 추도사를 통해 “교회를 환대와 자비의 장소로, 신자 모두가 희망의 표징이 되도록 이끄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우리의 마음속에 간직할 것”이라며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로서 보편 교회를 위해 봉사하도록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불러주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교황 프란치스코를 맡겨드린다”고 말했다. 한국정교회를 대표해 미사에 함께한 조그라포스 대주교는 “교황님의 지극한 순수함과 주님의 고통 받는 형제들을 향한 사랑은 우리 모두의 행동과 봉사에 있어서 선한 본보기가 됐다”며 “교황님 영혼의 안식을 기원하고 기도하며, 가톨릭교회 형제자매들에게 따뜻한 애도를 표한다”고 전했다. 대구대교구는 4월 23일 주교좌계산대성당에서 교구장 조환길(타대오) 대주교 주례로, 24일 주교좌범어대성당에서 총대리 장신호(요한 보스코) 주교 주례로 프란치스코 교황 추모미사를 봉헌했다. 조환길 대주교는 “교황님은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 작은 이들,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이라는 복음 정신을 그대로 실천했던 분”이라며 “쉽지 않은 일이지만 마땅히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이라고 말했다. 조 대주교는 이어 “교황님은 유언에서 마지막까지 이 세상에 평화와 형제애를 호소하고 당신을 봉헌하신다”며 “우리가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동시대에 살았고 그분을 뵐 수 있었다는 것은 큰 행운이고 행복”이라고 덧붙였다. 광주대교구는 4월 25일 교구청 성당에서 교구장 옥현진(시몬) 대주교를 주례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추모미사를 봉헌했다. 추모미사에는 전임 교구장인 김희중(히지노) 대주교, 사제, 수도자, 신자 등 400여 명이 참례했다. 옥현진 대주교는 강론에서 “교황님께서 2014년 방한 중에 보여주신 모습은 사람에 대한 존중과 경험 그 자체이셨다”며 “이제 우리는 교황님이 보여주신 모범에 따라 살아가야 할 책무가 생겼다”고 말했다. 교황의 출신 수도인 예수회에서도 추모 미사가 마련됐다. 예수회 한국관구(관구장 김용수 파스칼 신부)는 4월 24일 서울 신수동 서강대학교 성 이냐시오 성당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을 추모하는 미사를 봉헌했다. 미사에는 김용수 신부와 서강대학교 총장 심종혁(루카) 신부 등 예수회 사제 50여 명을 비롯해 서강대학교 교직원, 신자 등 400여 명이 참례했다. 김용수 신부는 강론에서 “교황님께서는 예수회 설립자인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성인이 보여준 삶의 모범을 따라 선종하시는 그날까지도 예수님과 깊이 일치하는 삶을 끊임없이 추구하셨다”며 “교황님이 묻히시길 원하신 성모대성당도 이냐시오 성인이 사제품을 받고 첫 미사를 봉헌한 곳”이라고 말했다. 김 신부는 이어 “또한 교황님은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 수련을 당신 말씀과 행동을 통해 충실히 살아내신 분”이라고 회상했다. 참례자들은 특히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예수회 한국관구를 방문했던 생생한 기억을 떠올렸다. 김 신부는 “교황님은 한국 예수회 사제들에게 ‘성직자이기 이전에 양 냄새 나는 사목자로서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해야 한다’고 당부하셨다”며 “실제로 교황님은 몸소 한국 사회에서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들을 찾아가 위로의 사명을 수행하셨다”고 말했다. 한편 각 교구가 마련한 분향소에는 수만 명의 조문객이 줄을 이었다.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에 마련된 분향소에는 3만여 명의 신자들이 방문, 교황에 대한 애도를 표했다. 23일부터 25일까지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매시간 추모미사와 연도를 바치고, 분향소를 운영해 온 수원 정자동주교좌성당에도 2만 명 이상의 신자들이 미사참례와 연도, 분향으로 교황을 위해 기도했다. 또 청주교구의 분향소에는 2800여 명이, 마산교구의 분향소에는 2700여 명이 참석하는 등, 각 교구에 설치된 분향소에도 많은 이가 방문했다. 25일 주교좌명동대성당의 분향소를 방문한 박영숙(헬레나·79·서울 태릉본당) 씨는 “양 냄새 나는 목자의 모습으로 온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보여주신 교황님께 신자로서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분향소를 찾았다”면서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 낮은 이들 곁에 함께하신 교황님의 모습을 저희도 본받아 살아가려고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특별 취재팀>

가톨릭교회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톨릭교회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바탕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얼굴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교회의 개혁과 쇄신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그의 교황직 수행의 역사와 업적을 살펴본다. 2013년 3월 13일 아르헨티나 출신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추기경이 베드로 사도의 계승자로 선출됐을 때 그는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새 교황의 첫 모습을 보기 위해 어두워진 성 베드로 광장에 몰려든 수많은 인파들 앞에 그가 나섰을 때, 가톨릭교회의 새로운 면모가 시작됐다. 교황을 드러내는 아무런 상징도 없이 그저 소박한 흰색 수단을 입은 교황은 이탈리아인들의 일상적 저녁 인사인 ‘보나 세라’(Bouna sera)로 친근한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교황으로서 온 세상에 축복을 내리기 전에 자신이 먼저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며 고개를 숙이고 하느님 백성에게 겸손하게 기도를 청했다. 그리고 자신은 ‘세례받은 이들 중 한 명’으로 소개함으로 교황이기 앞서 하느님 백성의 일원임을 드러냈다. 그는 가톨릭교회 안에서 가장 사랑받는 성인, 아시시의 ‘가난한 작은 사람’ 프란치스코를 자신의 교황명으로 정했다. 선출 직후 그는 콘클라베 기간 머물렀던 숙소로 돌아가 자신의 짐을 직접 싸고 숙박비를 지불했다. 그리고 교황궁을 마다하고 ‘성녀 마르타의 집’에 거주하기로 했는데, 이는 흔히 짐작하듯 그저 가난하고 소박한 삶에 대한 지향만은 아니다. 교황궁 자체가 화려하거나 사치스럽다고 할 수 없고, 오히려 사람들이 모이는 곳과는 거리가 먼 곳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어쩌면 성녀 마르타의 집에서 사람들과 함께 지내며 복음의 기쁨을 나누기를 원했던 듯하다. 그는 ‘사목자’였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이민자 가정 출신 바티칸공의회 가르침 따라 살며 빈민들과 어울리고 청빈 실천 잘못 판단하고 단죄하기보다는 아픔 껴안고 자비 베풀던 사목자 ■ 사람들과 함께하는 사목자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는 1936년 12월 17일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1958년 3월 예수회에 입회한 그는 1969년 12월 13일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당시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큰 영향을 받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비록 공의회에 직접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삶과 사제직은 공의회로부터 깊은 영감을 받았고, 실제로 교황 재임 내내 공의회의 가르침을 모든 교황직 수행의 근간으로 삼았다. 1973년 예수회 종신서원을 한 그는 같은 해 아르헨티나 예수회 관구장으로 임명됐다. 불과 36살의 나이였다. 그리고 1992년 5월 베르골료 신부는 부에노스아이레스대교구의 보좌주교로 임명됐고 1998년에는 대교구장에 임명됐다. 그리고 2001년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추기경에 서임됐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주교직 수행의 시기는 훗날 그가 교황이 되어 전 세계 가톨릭교회를 이끌면서 보여준 신학적 전망과 사목직 수행의 바탕이 됐다. 그는 250만 명 이상의 교구민이 있는 대교구를 이끌면서 스스로를 ‘사람들 가까이 있는 목자’로 자리매김했다. 항상 버스로 이동했고 거리낌 없이 빈민가를 방문했으며 소박한 아파트에서 직접 요리를 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호르헤 신부’로 불렀다. 당시 그의 사목 활동의 요체는 크게 4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빈민가에 거주하며 사목하는 ‘빈민가 사제단’을 창설해 항상 가난한 이들과 함께했고 둘째, 민중 신앙과 대중 신심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셋째, 교회가 제대에 머무르지 않고 거리로 나아가야 한다는 선교적 전망, 그리고 넷째 성직자를 사회의 지배 계급의 일부로 보는 라틴아메리카의 전통에 거슬러 성직자의 특권을 거부했다. 이처럼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영향, 그리고 사제와 주교직을 수행했던 아르헨티나에서의 사목 활동의 체험과 가난한 이들과의 삶은 그의 교황직 수행 안에서 깊은 연관성을 드러내며 이어졌다. 여기에 더해 2007년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에서 발표된 ‘아파레시다 문서’ 수석 편집자로서의 체험이 더해진다. 이 문서는 대륙적 선교를 촉구하면서 사람들이 실제로 살아가는 삶의 현장으로 교회가 나아가야 한다는 핵심 사상을 담고 있다. ■ 하느님 자비의 교황 교황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7월 22일 교황은 첫 해외순방지인 브라질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동성애 사제와 관련된 질문을 받는다. 그리고 “누군가 동성애자인데, 그가 주님을 찾고 선의를 가졌다면 제가 그를 어떻게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답했다. 이는 판단과 단죄보다는 위로와 격려, 치유의 하느님을 선포하는 사목자의 모습을 드러냈다. 이러한 대답은 어쩌면 예정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2013년 3월 17일 교황이 된 후 첫 주일 삼종기도 자리에서 그는 위험한 진보주의자로 여겨졌던 발터 카스퍼 추기경의 말을 인용해 “자비라는 단어를 들으면 모든 것이 바뀐다”고 말했다. 교황 선출 당시부터 이미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비’가 교황직의 키워드가 될 것임을 예고했다. 자비로써 하느님 백성의 고통에 공감하고 치유하기를 원했던 교황은 2014년과 2015년 가정을 주제로 한 세계주교시노드를 소집했다. 피임, 동성애, 이혼 후 재혼자의 영성체 허용 등 민감한 현안들을 다룬 시노드 후속 문헌으로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Amoris Laetitia)이 반포됐다. 물론 교황은 성과 생명, 가정에 대한 교리를 바꾸지 않았다. 하지만 명백히 사목적 차원에서 그의 입장은 단호했다. 즉 현대 가정의 잘못된 행동들을 단죄하기보다는 고통을 겪고 있는 가정들을 위해서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황은 또 2015년 3월 13일 ‘자비의 특별희년’을 선포하고 4월 11일 희년 선포 칙서 「자비의 얼굴」(Misericordiae Vultus)을 반포했다. 교황은 「자비의 얼굴」에서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인종 학살, 집단 살육이 자행된 20세기에 이어 여전히 계속되는 비극적 상황들을 우려하며 특히 가난한 이들을 걱정했다. 그래서 교황은 가난한 이들을 항상 찾아 나섰다. 변방으로 나아가는 교회, ‘야전병원’으로서의 교회의 표상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목활동과 교회 통치의 바탕이다. 교황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의 크기만큼 이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불의에 단호했다. 불의한 현실과 세력에 대한 그의 분노는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삶의 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빈민가와 전 세계 빈곤 지역에서 목격하고 체험한 가난한 이들의 현실로부터, 그는 경제 정의를 교황직 수행의 주요한 주제로 삼았다. 그래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인간 생명을 해치지 말라는 절대적 금지인 것처럼 “배제와 불평등의 경제는 안 된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2015년 반포한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는 이른바 통합생태론, 즉 자연생태와 인간생태가 깊이 연관됐다고 피력했다. 공동의 집 지구 환경이 파괴될 위험에 직면해 있고 그 가장 큰 피해자는 가난한 이들이다. 여기에서 교황은 지구 온난화에 대한 과학적 증거들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인들과 선의의 모든 사람들이 지구 환경 보호를 실천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야전병원으로서의 교회 지향 불의한 헌신과 생태 위기 경고 교회 직면한 과제 해결하고자 새로운 법과 제도 틀 마련하고 ‘시노달리타스’ 주제 시노드 개최 ■ 개혁과 쇄신의 교황 교황은 교회가 하느님 자비를 드러내는 얼굴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고 이는 당연히 교회의 개혁과 쇄신으로 이어졌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교황직 수행의 또 한 가지 축은 개혁과 쇄신이었다. 그가 교황에 선출됐던 당시 가톨릭교회는 역사적 기로에 서 있었다. 교회 안에 침투한 세속화로 사회적 명성은 땅에 떨어졌고 수십 년간 이어진 고질적인 성직자 성학대 추문으로 도덕적 위신도 무너졌다. 교회는 사회적 위신도, 자신의 정체성과 방향성도 잃은 듯했다. 그는 자신의 교황직 수행의 청사진으로 여겨졌던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나그넷길에 있는 교회는 그 자체로서 또 인간적인 지상 제도로서 언제나 필요한 이 개혁을 끊임없이 계속하도록 그리스도께 부름받고 있다”(일치교령, 6항)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을 인용하면서 ‘더는 미룰 수 없는 교회 쇄신’을 강조했다. 교회 쇄신은 당시 두 가지 큰 과제의 해결을 먼저 요구했다. 하나는 교회를 근본적으로 뒤흔든 성직자 성학대 추문, 다른 하나는 교황청의 불투명한 재정 운영 문제였다.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남아있지만 교황은 이 두 가지 문제와 관련해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새 법과 제도의 틀을 마련함으로써 ‘교황직과 보편교회의 중앙 조직들’의 개혁과 쇄신을 위해 노력했다. 보편교회 쇄신의 방향성은 당연하게도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특히 「교회헌장」이 제시하는, ‘교회는 하느님 백성’이라는 친교의 교회론에 바탕을 둔다. 그는 스스로 ‘세례받은 이들 중 한 명’으로서 ‘로마의 주교’라고 칭하며 세계교회의 최고 지도자로서보다는 다른 주교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협력하고자 했다. 또 교황청 각 부서와 교회의 여러 직무에 평신도들, 특히 여성의 참여를 확대했다. 그 정점에 이른 것이 ‘시노달리타스’를 주제로 한 제16차 세계주교시노드였다. 3년 여의 긴 여정 동안 진행된 이번 시노드는 여러 면에서 이전의 시노드들과는 차원을 달리했다. 하느님 백성의 의견을 교구와 본당 단계에서부터 실질적으로 경청하는 단계를 강화했고, 특히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을 포함한 평신도와 수도자들이 투표권을 갖고 참여했다. ■ 긴장과 갈등 재위 초기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저항은 단지 스타일의 차이나 언론의 과장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2016년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이 이혼 후 재혼 신자의 영성체 허용 가능성을 부분적으로 열게 되자 보수파의 반발이 강경해졌다. 미국의 레이먼드 버크 추기경 등 5명의 추기경이 5가지 교리적 질문을 제기했다. 2018년에는 카를로 마리아 비가노 대주교가 교황과 교황청이 시어도어 맥캐릭 추기경의 성학대 사건을 은폐했다고 공개 비난하며 교황에게 사임을 요구했다. 도전은 보수진영 그 반대쪽으로부터도 다가왔다. 독일교회의 ‘시노드의 길’(Synodal Path) 추진 문제다. 독일의 주교와 평신도들은 교회 개혁의 ‘속도 조절’ 경고에 전혀 응답하지 않은 채 독자적인 논쟁적 개혁 방향을 추진하고 있다. 이제 프란치스코 교황의 개혁과 쇄신 작업이 온전히 궤도에 오르지는 않은 상태에서 후임 교황은 아직 성숙되지 않은 개혁과 여전히 이어지는 긴장과 갈등을 다시 하나로 이끌어야 하는 고된 사목적 도전을 안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개혁과 쇄신의 문이 아직 활짝 열리지는 않았더라도 적어도 잠금쇠는 열렸고, 그 문을 다시 잠글 수는 없는 일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제삼천년기 쇄신된 교회를 향한 돌이킬 수 없는 발걸음으로 우리 모두를 이끌었다. < 프란치스코 교황이 걸어온 길 > 1936년 12월 17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생 1958년 3월 11일 예수회 입회 1969년 12월 13일 사제품 1992년 6월 27일 주교품(부에노스아이레스대교구 보좌주교) 1997년 6월 3일 부에노스아이레스대교구 부대교구장 임명 1998년 2월 28일 부에노스아이레스대교구장 착좌 2001년 2월 21일 추기경 서임 2013년 3월 13일 교황 선출 2013년 4월 13일 교황청 개혁 위한 추기경위원회 구성 2013년 7월 5일 회칙 「신앙의 빛」 반포 2013년 7월 8일 람페두사 사목방문 2013년 11월 26일 권고 「복음의 기쁨」 반포 2014년 8월 14일 대한민국 사목방문 2015년 6월 18일 회칙 「찬미받으소서」 반포 2015년 11월 29일 ‘자비의 희년’ 선포 2016년 4월 8일 권고 「사랑의 기쁨」 반포 2018년 4월 12일 칠레 성직자 성추행 사과 2018년 4월 21일 신앙교리성(현 신앙교리부) 첫 여성 위원 임명 2018년 9월 22일 중국과 주교 선출에 관한 ‘잠정협약’ 체결 2019년 2월 21일 미성년자 보호를 위한 전 세계 주교회의 의장단 회의 소집 2020년 3월 27일 코로나19 팬데믹 겪는 인류 위해 특별 강복 2020년 10월 4일 회칙 「모든 형제들에게」 반포 2021년 10월 10일 시노달리타스를 주제로 세계주교시노드 개막 2022년 3월 19일 교황령 「복음을 선포하여라」 반포 2024년 10월 24일 회칙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반포 2025년 4월 21일 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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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선종] 장례미사 이모저모

가난한 이들의 벗으로 일평생 청빈한 삶을 살았던 프란치스코 교황이 영면에 들어갔다. 4월 26일 오전 10시(로마 현지시간)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추기경단 단장 조반니 바티스타 레 추기경 주례로 봉헌된 장례미사에 이어 성모대성당에서 안장예식이 거행됐다. 장례미사는 전 세계에서 로마에 모인 추기경단과 주교단 등이 공동집전했다. 교황이 항상 낮은 곳에서 겸손한 삶을 살며 남겨 준 뜻에 따라 치러린 장례미사와 안장 예식 모습을 모아 본다. 교황이 4월 21일 평소 거처하던 교황청 성녀 마르타의 집에서 88세를 일기로 선종하고 23일 교황의 관이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 운구된 뒤 같은 날 오전 11시경부터 25일 오후 7시까지 조문객 수는 25만여 명이나 됐다. 조문객들은 길게는 5~6시간까지 줄을 서서 기다리면서도 관 안에 고요히 누워 있는 교황을 조문했다. 장례미사 전날 오후 8시부터 성 베드로 대성당 중앙 제대 앞에서 진행된 교황의 관 봉인 예식 또한 교황의 평소 모습 그대로 단순하고 간소하게 치러졌다. 교황청 전례원장 디에고 라벨리 대주교가 교황의 얼굴에 흰색 비단을 덮은 뒤 교황청 궁무처장 케빈 패럴 추기경이 성수 예식을 집전했다. 이어 나무 관 위에 아무런 장식 없이 십자가, 교황명과 간략한 생애, 교황 문장만이 새겨진 아연 덮개를 씌움으로써 교황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패럴 추기경은 아연 덮개에 인장을 찍어 봉인된 사실을 확인한 후 아연 덮개 위에 다시 십자가와 교황 문장만이 새겨진 나무 덮개를 덮고 교황청 직원들이 테두리를 따라 못을 박으면서 관 봉인 예식을 마쳤다. 교황청 국무원 총리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이 서명한, 교황의 생애와 사목활동을 요약한 문서 마지막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인간성과 성스런 삶 그리고 보편적 형제애를 훌륭히 증거했다”고 기록됐다. 이 문서는 관이 봉인되기 전 관 안에 놓여졌다. 장례미사가 봉헌된 26일 성 베드로 광장에는 2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장례미사에는 교황의 고향인 아르헨티나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을 비롯해,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등 세계 각국 정상들은 물론, 이주민과 난민, 노숙자 등 교황이 재임 중 늘 가까이 다가갔던 외롭고 소외된 이들도 교황청의 특별한 배려로 참례할 수 있었다. 성 베드로 광장은 장례미사 시작 훨씬 이전부터 신자들로 가득 메워졌다. 일부 신자들은 전날 저녁에 미리 광장에 도착해 교황을 추모하는 기도를 바치고, 광장 바닥에 누워 잠을 청한 뒤 장례미사에 참례하기도 했다. 장례미사를 주례한 레 추기경은 강론에서 교황이 생전에 만났던 사람들에게 ‘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말하곤 했던 일을 회상하면서 교황에게 “이제는 지상에 남아 있는 저희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말했다. 레 추기경의 강론을 듣던 신자들은 슬픔을 억누르지 못해 눈물짓는가 하면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할 교황을 생각하며 밝은 표정을 짓기도 했다. 장례미사가 끝나고 교황의 관은 교황이 재임 중 사용했던 전용 차량에 실려 포로 로마나 유적지와 콜로세움 등을 거쳐 약 6km를 이동해 안장지인 성모대성당에 도착했다. 성모대성당에 이르는 운구 행렬 역시 패럴 추기경을 포함한 추기경 일부, 교황의 가족과 친지 등 소수만이 참여해 소규모로 이뤄졌다. 교황의 관이 지나가는 도로변은 교황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려는 군중들로 북적였다. 군중들은 교황의 관이 자기 앞을 지나갈 때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고, 박수를 치거나 “교황님, 감사합니다”, “교황님, 영원히 사세요” 등의 구호를 외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교황이 성모대성당에 묻히기를 원한다는 유언장은 교황청에 의해 21일 공개됐지만, 성모대성당 부수석사제 롤란다스 마크리카스 추기경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던 교황의 말을 25일 기자회견 자리에서 공개했다. 교황이 성모대성당에 묻힐지를 분별하고 있을 때 성모 마리아께서 교황에게 “무덤을 준비하여라”라는 말을 들려줬고, 교황이 “성모 마리아께서 나를 잊지 않고 계셔서 행복하다”고 말하며 마크리카스 추기경에게 성모대성당에 “무덤을 준비하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교황의 관이 성모대성당 안으로 옮겨지는 동안 교황에게서 각별한 관심을 받았던 이주민과 노숙자 등이 꽃을 들고 교황을 맞이했다. 로마에 사는 어린이들도 성모대성당을 찾아 성모 마리아 이콘 아래 꽃을 올려놓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안장예식은 패럴 추기경이 비공개로 주례했으며, 교황 유언장에 적혀 있는 대로 ‘프란치스코’라고만 새겨진 곳에 교황은 안장됐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잠든 성모 대성당은?

“저는 언제나 저의 삶과 사제직, 주교직을 우리 주님의 어머니이신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 마리아께 맡겨드려 왔습니다. 제 육신이 부활의 날을 기다리며 교황 대성전인 성모대성당에서 쉬게 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2년 작성한 유언을 통해 자신을 로마 성모대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Maggiore)의 지하에 묻어주길 희망했다. 성모대성당은 전 세계에 4곳뿐인 대(Major) 바실리카 중 하나로, 성모님께 봉헌된 성당 가운데 가장 으뜸으로 여겨지는 곳이다. 전설에 따르면, 성모대성당은 성모님의 지시로 세워졌다. 328년 8월 5일 성모님은 자녀가 없어 걱정하던 로마 귀족 조반니 부부의 꿈에 나타나 “눈이 내린 곳에 성당을 지으면 소망을 들어주겠다”고 말했다. 이른 아침 성 리베리오 교황을 찾아간 조반니 부부는 교황 역시 같은 꿈을 꿨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이들은 한여름의 로마 에스퀼리노 언덕에 눈이 쌓인 기적을 봤다. 그 자리에 세워진 성당이 성모대성당이다. 이런 전설로 성모설지전(聖母雪地殿)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모대성당에 묻힌 첫 번째 교황은 아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이전에도 호노리노 3세·니콜라오 4세·성 비오 5세·식스토 5세·클레멘스 8세·클레멘스 9세 등 6명의 교황 무덤이 성모대성당에 있었다. 성모 순례지로 유명한 세계의 많은 곳들이 성모대성당과 영적 유대를 맺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대구대교구 성모당,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순례지, 수원교구 남양성모성지 등 30여 곳의 성당이 성모대성당과 영적 유대를 맺고 있다. 성모대성당은 한국교회와도 깊은 인연이 있다.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1831년 9월 9일 조선대목구 설정 칙서를 반포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 선출 이전 부에노스아이레스대교구 보좌주교와 교구장으로 사목할 당시 로마에 올 때마다 이 성당을 방문했다. 교황 선출 다음날 첫 일정으로 성모대성당을 찾아 기도했고, 이후로도 사목 방문 전후나, 기회가 될 때마다 성모대성당을 찾아 기도했다. 특히 교황이 기도하기 좋아했던 곳은 ‘로마 백성의 구원 성모성화’(Salus Populi Romani) 앞이다.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님의 모습이 담긴 이 성화는 복음사가인 성 루카가 그렸다고 전해진다. 전 세계를 순회하는 세계청년대회의 상징물의 성모 성화가 이 성화의 사본이기도 하다. 교황은 유언을 통해 성모대성당에서 자신의 무덤이 자리할 구체적인 장소를 언급했는데, 바로 이 성화가 있는 파올리나 경당 옆의 공간이다. 교황은 자서전 「희망」에서도 “교황으로서 사도 순방을 떠나기 전과 돌아온 후에도 꼭 (성모대성당을) 들러,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저를 이끌어 주시고 해야 할 일을 알려주시며, 제 모든 행보를 보살펴 주시기를 청한다”며 “저는 성모님과 함께할 때 참된 평안을 느낀다”고 성모대성당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고백하기도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저서에서 찾는 영적 유산

4월 21일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재임 기간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자세에 대해 또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또 환경과 평화 등 인류 공동의 과제 앞에서 어떤 행동을 지녀야 할지 꾸준히 메시지를 전해왔다. 이제 소중한 영적 유산으로 남은 교황의 주요 말들을 저서들 안에서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 ■ 희망 “희망을 품는다는 것은 인류가 겪는 악의 비극을 외면하는 순진한 낙관론과는 다릅니다. 진정한 희망이란 어둠 속에 갇히지 않고, 과거에 발목 잡히지 않으며,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내일을 밝게 바라볼 줄 아는 마음의 힘입니다.” (「희망」 510쪽) 최근 출간한 자서전 「희망」(2025, 가톨릭출판사)에서 교황은 절망이 만연한 시대 속에서 끝까지 희망을 선택하는 삶이란 무엇인지 묻고, 자신의 생애 전체를 통해 그 답을 보여준다. ‘희망은 멈춰 서지 않는 것이다’는 신념이 삶 전체에서 증명되는 듯하다. 그는 희망을 막연한 낙관이나 위로의 말이 아니라, 두려움과 절망을 뚫고 나아가는 내면의 힘으로 보았다. 「그래도 희망」(2019, 가톨릭출판사)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바라고 지향해야 할 진정한 희망을 이야기한다. “희망은 우리로 하여금 한 발짝 더 나아가게 한다”고 역설한 교황은 “이 희망은 현재를 위한 원대한 목표, 즉 인류를 위한 구원, 자비하신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 맡기는 사람을 위한 지복을 제공해 준다”고 강조한다.(55쪽) 또 교황은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이미 이루어진 어떤 것에 대한 기다림”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바로 거기에 문이 있고, 그 문에 이르는 것을 희망하며 문을 향해 걷는 것 즉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어떤 것을 향해 걷고 있다는 확신을 갖는 데 있다”고 풀이했다.(148~149쪽) ■ 자비·믿음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2016년을 ‘자비의 특별 희년’으로 선포할 만큼 교황직에 머무는 동안, 이 세상이 그 어느 때보다 자비의 마음과 실천을 필요로 하는 시대임을 수시로 상기시켰다.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자비의 삶을 호소한 「아버지처럼 자비로워지십시오-프란치스코 교황의 성찰」(2015, 생활성서사)에서 교황은 “그리스도적 시간은 사랑의 시간이자, 사람들 사이를 결속하는 시간”이자 “그것은 또한 서로 간에 벽을 세우는 시간이 아니라 세대 간에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마음의 다리를 이어주는 시간”(149~150쪽)이라며 자비의 정신을 강조한다. 또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신다는 것은 빵을 나누는 행위를 모든 형제를 비롯한 삶의 모든 차원으로 넓혀가기 위해 책임진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서 빵을 나눌 준비를 당부한다.(163쪽) ‘믿음’은 ‘밖으로 나가는 것’이라고 촉구한다. 「하느님과 다가올 세계」(2020, 가톨릭출판사)에서 “선포되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고 말하고 “믿음은 설득을 통해서가 아니라 소중한 보물을 전달하듯이 전해져야 하고, 교회는 ‘밖으로 나가는 공동체’이기에 우리는 문을 활짝 열어 놓는 신앙을 살아가자”고 밝힌다.(70쪽) 또 예수님이 하셨듯이 믿음을 전하자고 청한다.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는 이렇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합시다. 시대와 장소에 관계없이 모든 이를 위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났듯이 말입니다. 선동하려는 목적이나 공격적으로 반박하려는 완고함을 버린 삶의 양식과 선포 방식을 채택해야 합니다.”(148쪽)

[프란치스코 교황 선종] 유흥식 추기경, “교황님은 이미 이 지상에서 부활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 유흥식(라자로) 추기경은 23일 프란치스코 교황 선종에 관한 메시지를 주교회의를 통해 한국교회에 전했다. 유 추기경은 “생명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그 순간에도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멈추지 않은 그분의 모습은, 그 자체로 이미 이 지상에서 부활의 모습을 보여주셨다”며 “영원의 삶을 보여주신 교황 프란치스코의 영원한 안식을 청하며, 한국의 교형자매 여러분, 동포 여러분도 같은 마음으로 애도하였으면 한다”고 청했다. 다음은 메시지 전문. 교형 자매 여러분, 동포 여러분 Farrell 추기경님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하늘 아버지의 집으로 가셨습니다”라는 선종 소식을 알리셨습니다. 이 소식을 접하며 저는 슬픔과 고통, 외로움보다는 고요한 평화를 봅니다. 그분은 슬퍼하기보다 우리가 평화롭길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멋있게 아름다운 삶을 살다 가신 교황님에 대한 큰 부러움도 있었습니다. 2025년 4월 20일 예수님 부활 대축일 미사 후 발코니에서 전 세계인에게 교황님이 마지막으로 전한 메시지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사랑이 증오를 이겼습니다. 빛이 어둠을 이겼습니다. 진실이 거짓을 이겼습니다. 용서가 복수를 이겼습니다. 악은 우리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고, 끝까지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고, 부활의 은혜를 환영하고 맞아들이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권세를 발휘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들은 그들의 연약한 손을 그분의 크고 강한 손에 위탁하여,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희망의 순례자가 되고, 사랑의 승리를 증명하는 증인이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말로만이 아니라 몸소 움직여 행동으로 조금 더 그들에게 가깝게 다가가고자 했습니다. 생명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그 순간에도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멈추지 않은 그분의 모습은, 그 자체로 이미 이 지상에서 부활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영원의 삶을 보여주신 교황 프란치스코의 영원한 안식을 청하며, 한국의 교형자매 여러분, 동포 여러분도 같은 마음으로 애도하였으면 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죽음에서 희망과 부활을 보았으며, 우리 자신이 또 다른 부활의 모습으로 이웃과 사회로 나아갈 용기를 얻습니다. 한국의 대전이라는 지방 교구의 교구장을 전 세계 성직자와 부제, 신학생을 담당하는 부서의 장관으로 임명하셨습니다. 사제의 쇄신없이 교회의 쇄신을 기대할 수 없다는 교황님을 가까이 보좌하면서, 그분이 바라는 교회와 성직자의 모습을 깊이 생각하며 앞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늘 상대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시고 눈높이에 맞춰 함께 고민하고 길을 찾으셨던 교황님의 발자취를 본받으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한국을 진심으로 사랑하시는 분이셨습니다. 대한민국의 분단 현실을 특별히 안타까워하시며 형제와 가족이 갈라진 이 크나큰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다면 당신께서 직접 북에도 갈 의향이 있다고 하셨을 만큼 한국에 대한 사랑이 남다른 분이셨습니다. 교황님의 기도 가운데 한국에 관한 기도에는 남과 북이 모두 포함된 기도였음을 기억합니다. 화해와 평화가 있는 곳에 하느님의 선이 있다고 믿으셨던 교황님의 다음 말씀이 오래 우리 안에 살아있길 함께 기도합시다. “선을 행하는 일에 지치지 말아 주십시오.” 희망을 잃지 않고 선을 행하는 여러분의 부활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영원히 우리 곁에 계실 것입니다. 2025년 4월 22일 바티칸에서 유흥식 라자로 추기경 드림

종합

한국카리타스, “가난한 이들에게 희망을”…48만km 여정 첫발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그리스도만이 참 희망임을 선포하는 순례자가 되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한국카리타스인터내셔널(이사장 조규만 바실리오 주교, 이하 한국카리타스) 설립 50주년을 기념하는 전국 릴레이 도보성지순례가 출범했다. 전국 15개 교구 사회복지회(국) 및 가톨릭 사회복지 기관·시설 관계자들, 남녀 수도자, 본당 사회복지 활동가 및 일반 신자까지 이르는 순례 참가자들이 가난한 이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카리타스’(Caritas, 라틴어로 사랑·애덕·자선) 정신을 북돋우는 48만㎞의 여정에 나섰다. 전국 릴레이 도보성지순례 출범식은 4월 23일 대전교구 정하상교육회관에서 열렸다. 한국카리타스·한국카리타스협회 이사장 조규만 주교(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와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위원들, 한국카리타스협회 회원 125명이 참석했다. 출범식에서는 전국 각지 순례단들을 인도할 깃발들의 전달식이 거행됐다. 조규만 주교는 ‘한국카리타스’가 적힌 깃발을 한국카리타스 사무국장 정성환(프란치스코) 신부에게, ‘50주년 기념’이 적힌 깃발을 대전교구 사회복지국 국장 노승환(요셉) 신부에게, 교구별 이름이 적힌 깃발들을 각 교구 사회복지회(국) 사제단 및 실무자들에게 전달했다. 이어 출범 선언문 낭독이 있었다. 사제, 수도자, 평신도 대표자 3명이 ▲새로운 형태의 빈곤에 용감히 맞서며 이 시대 곁에 있는 가난한 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도록 카리타스 정신과 나눔을 세상에 북돋우는 ▲교구 지역 내 다양한 문화와 아름다운 자연, 신앙 선조들의 거룩한 숨결을 체험하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만남, 사목, 순례이자 선교인 2027년 서울 세계청년대회 교구대회 준비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희망의 순례자’가 될 것을 선언했다. 4월 26일 제주교구 용수성지, 김대건길, 신창성당까지 걷는 제주교구 참가자들의 순례로 시작해 전국 각 교구가 두 라인으로 나뉘어 서로 이어 걸으며 각자 코스를 완주하고 있다. 참가자들은 합쳐서 48만㎞를 목표로 걷고 있다. 이는 지구 한 바퀴에 상당한 4만㎞ 거리에 열두 사도·지파를 뜻하는 12를 곱한 거리다. 참가자 각자가 스스로 1㎞ 걸을 때마다 1000원씩 기부한다. “‘카리타스’ 활동가인 우리가 가난한 이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희망, 하느님을 향한 믿음, 인류애…. 발걸음마다 우리가 담을 수 있는 소중한 가치는 많습니다. 그런 사랑과 믿음으로 희망의 순례길을 걸어 봅시다.” 조규만 주교는 격려사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고 나눔을 하는 우리의 정체성을 다시 돌아보고, 구체적 사랑 실천의 행위로 모금하며, 밀알과 겨자씨처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묵묵히 하자”고 전했다.

한국CPE협회, 100주년 맞아 전국 세미나 개최

1925년 6월 20일 미국에서 시작돼 임상 사목의 전문성이 필요한 이들에게 전문적인 영적돌봄 교육을 제공하는 CPE(Clinical Pastoral Education)가 올해로 100주년을 맞이했다. 한국CPE협회(KACPE, 협회장 정무근 다미안 신부)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4월 25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를 제목으로 하는 CPE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국 세미나를 개최했다. 세미나에는 한국CPE협회 소속 천주교, 개신교, 불교, 원불교 등 4대 종교의 성직자·수도자, 평신도와 의료인들 200여 명이 참석했다. 세미나에서 한국CPE협회 협회장 정무근 신부는 CPE 100년의 역사와 협회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시대가 요청하는 다양한 영적 돌봄터(영적 돌봄 현장)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다. 정무근 신부는 개회사에서 “CPE는 미국 장로교 소속 안톤 보이슨 목사(Anton Boison, 1876-1965)에 의해 처음 시작됐다”면서 “그는 신학생들이 신학교에서의 이론적 지식을 종교적 망상과 환청을 듣는 조현병 환자들의 영적인 고통을 이해하는데 사용하여야 된다고 주장하면서 미국 보스톤 근교의 우스터 주립 정신병원에서 CPE를 처음 시작했다”고 전했다. 이후 영적 돌봄터는 정신병원뿐만 아니라 일반병원으로도 확대되었고 그 이후 어린이 병원, 교도소, 학교, 요양원, 군대, 쉼터, 지역교회 등으로 확대됐다. 설립 이후 100년을 거치며 교육철학, 방법론, 실습지 등이 시대 상황에 맞춰 계속 변화하고 발전해 왔다. 정 신부는 이어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CPE가 지닌 이웃을 위한 영적 돌봄의 정신”이라고 말했다. 이어진 기조 강연에서 정 신부는 1900년대 초 미국 성직자들이 교회에서 강론이나 설교뿐만 아니라 영적 고통 중에 있는 신자들을 위한 상담을 시작한 이래, 교회가 ‘가르치는 교회’에 머물지 않고 ‘돌보는 교회’로 역할을 확장시켜 온 역사를 소개했다. 오후에는 호스피스 실제 돌봄 사례 분석과 다양한 실습지에서 CPE를 경험한 회원들이 나와서 자신이 돌봤던 영적 고통 중에 있는 다양한 이웃들에 대한 경험을 나눔으로써 앞으로 다양한 영적돌봄 실습지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다. 특히 의정부교구 파주 EXODUS 위원장 김항수(파스카시오) 신부, 이석곤 군종목사, 대전지역 지구대장 이화정 경찰관 등의 다양한 돌봄 경험에 대한 나눔은 기존 실습지인 병원 현장에서 벗어나 더욱더 확대된 경험이었기에 이날 참석했던 참석자들에게 신선한 감명을 줬다. 한국CPE협회는 2002년에 미국에서 CPE 수퍼바이저 자격증(수퍼바이저 과정 지도 자격증 포함) 취득하고 귀국한 정무근 신부가 창립준비를 하고, 이후 2007년 4월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4대 종교의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의료인들이 모여 창립총회와 함께 시작되었다. 한국CPE협회는 그동안 종교를 초월하여 전국에 CPE센터들(25년 현재 29개 센터)을 개설해 왔고, 꾸준히 수퍼바이저 교육과정을 통해 CPE 수퍼바이저들을 배출해 왔으며, 국내 임상 사목 교육의 최고의 전문성을 가진 협회로 자리매김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