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7 서울 WYD, 그리스도인 희망 전하는 표지 될 것”

‘세계청년대회’(World Youth Day, 이하 WYD)를 담당하는 교황청 평신도가정생명부 대표단이 7월 8일부터 13일까지 방한해 한국교회와 함께 ‘2027 서울 WYD’ 준비 상황을 공유하고, 현장을 답사했다. 아울러 대회의 성공 개최를 위한 기원 식수 행사에 참여하고, 대회 준비에 한창인 청년 봉사자들을 격려했다. 대표단이 방한한 것은 2024년에 이어 두 번째다. 글레이손 데 파울라 소자(Gleison De Paula Souza) 평신도가정생명부 차관은 일정 중 “다가올 2027 서울 WYD는 한국과 전 세계 청년들에게 그리스도의 희망을 전하는 표지가 될 것”이라고 기대를 표했다. 교황청 평신도가정생명부 대표단은 7월 9일 서울 합정동 절두산 순교성지에서 서울대교구 WYD 기획사무국 봉사자들과 함께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 성공개최 기원 식수’ 행사에 참여했다. 행사는 한국교회 청년들이 2년 뒤 서울 WYD에서 전 세계 청년들에게 기후위기 극복을 강조하고자 정한 실천사항 중 하나인 난지도에 ‘묘목 1만 그루 심기’를 대표단이 지지하고 응원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소자 차관은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공동의 집인 지구를 잘 가꾸고 ‘생태적 감수성’을 가지길 바라셨다”며 행사 취지에 깊이 공감했다. ‘나무 심기’에는 2027 서울 WYD 지역조직위원회 총괄 코디네이터 이경상(바오로) 주교와 4명의 청년 봉사자들이 대표로 함께했다. 참가자들은 무더운 날씨 속에서도 구슬땀을 흘리며 삽으로 흙을 퍼 나르고 물을 뿌리며 대회의 성공적 개최를 기원했다. 절두산 순교성지에 나무를 심은 것은 대회가 열릴 한국교회가 순교자들의 피와 땀으로 일궈진 교회라는 특별한 의미도 담겨있다. 기획사무국장 이영제 (요셉) 신부는 행사에서 “청년들의 생태 환경 개선을 위한 노력을 응원하는 이 자리가 특히 우리 선조들이 목숨을 바쳐 순교한 이 성지에서 그 후손인 청년들과 대표단이 함께한 가운데 열린 것은 의미가 깊다”고 설명했다. 대표단은 7월 10일, 대회를 준비하는 27개 팀 청년 봉사자 대표 모임이 열린 서울 명동 기획사무국도 찾았다. 봉사자 팀 간 소통과 교류를 위해 마련된 이 모임에서 소자 차관은 대표 청년들이 서로의 역할을 공유하고 모임의 지속을 위한 방안과 봉사자 업무 현황에 대해 회의하는 내용을 경청했다. 소자 차관은 봉사자들에게 “하느님 백성인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함께 만들어가는 대회가 돼야 하고, 여러분은 이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대표단은 7월 11일 서울 명동 서울대교구청에서 2027 서울 WYD 지역조직위원회 위원들과 만나 대회 관련한 주요 사항을 논의했다. 이어 서울 명동 갤러리1898 제2전시실에서 열린 ‘겨자씨 닮은 용기로: 2027 서울 WYD 주제 성구 묵상전’을 관람했다. 대표단은 전시에 출품한 청년 작가들에게 작품 설명을 직접 듣고, 포스트잇으로 소망을 적어 나무를 완성하는 설치 미술에도 참여했다. 소자 차관은 이번 방한에 대한 소회와 더불어 한국교회를 비롯한 전 세계 청년들에 대한 냉정한 현실을 짚고, 세계청년대회가 그 전환점이 될 것을 기대했다. 소자 차관은 “우리는 이 시대 청년들이 겪는 개인적인 문제들과 크나큰 고통, 답답함과 불안감을 잘 알고 있다”며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도 청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율이 높다는 점이 이런 모습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고 전했다. 이어 “비록 청년들이 빛을 볼 수도, 희망을 품을 수도 없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레오 14세 교황님이 함께할 2027 서울 WYD는 한국과 세계 청년들에게 그리스도의 희망을 전달할 것이라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를 위해 교회는 사람들 가까이 존재해야 하고 자기 손을 더럽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면서 “그리스도가 그랬듯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전했다. 소자 차관은 한국교회와 서울대교구를 향해 “잘 조직돼 있고 살아있는 교회"라며 대회 준비 역량을 높이 평가했다. 또 “절두산에서 흘린 순교자들의 피가 한강까지 흘러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이는 한국교회가 축복받은 땅 위에 세워졌다는 뜻이고, 그러기에 한국교회도 매일 순교자들의 희생을 체험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여름 특집-안녕夏세요?](2) 기후 재난 최전선, 응급구호 펼치는 이들

기후 변화가 초래하는 폭염과 폭우 등 이상기후는 이제 더 이상 예외적 현상이 아닌, 일상의 재난이 되고 있다. 레오 14세 교황은 7월 2일 발표한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9월 1일) 메시지에서 “인간이 초래한 기후 변화로 인해 극단적인 기후 현상이 점점 더 잦아지고 강해지고 있다”며 “이로 인해 가장 먼저 고통받는 이들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배제된 이들”이라고 전했다. 이어 “환경 정의는 추상적인 목표가 아니라 신앙과 인간성의 표현이고, 이제는 행동으로 옮길 때”라고 강조했다. 기후 재난의 최전선에 놓인 쪽방촌. 이곳에서 ‘안녕하지 못한 여름’을 살아가는 주민들과 함께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의 연대 현장을 소개한다. “수녀님, 오늘도 나오셨네요. 정말 잘 먹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형제님, 옷 갈아입으셔야겠다. 여기 옷이랑 양말 받아 가세요.” 7월 3일 오후 8시, 서울 영등포역 3번 출구 인근. 수도자들이 노숙인과 인근 쪽방촌 주민들에게 음식과 옷가지 등을 나눠 주고 있었다. 이날 서울은 밤 최저기온이 섭씨 25도를 웃도는 열대야였지만, 이들은 질서 정연하게 줄을 서 먹을 거리와 물품을 받고 있었다. 작은 자매 관상 선교 수녀회(지부장 천복련 사비나 수녀), 한국가톨릭노숙인복지협회(회장 이병훈 요한 세례자 신부, 이하 한가노협), 재단법인 바보의 나눔(이사장 구요비 욥 주교)이 마음을 모아 함께하는 ‘여름철 폭염 대비 응급구호 활동’ 현장 모습이다. 여름철, 작지만 꼭 필요한 것들 응급구호 활동은 2022년 시작됐다. 지난해부터는 영등포역 일대에서 이뤄지고 있으며, 올해도 7월 1일부터 9월 30일까지 석 달간 계속된다. 수녀회 서울 분원 소속 수도자들과 봉사자들이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직접 찾아가는 ‘아웃리치’(Outreach)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한가노협과 바보의 나눔은 이 활동에 필요한 재정과 물품을 지원하고 있다. 이날 현장에는 아녜스·안젤라 두 명의 수도자가 함께했다. 오후 7시부터 물품들을 준비한 이들은 8시부터 영등포역 일대에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수도자들은 각각 하나의 카트를 맡아 분주히 움직였다. 앞쪽 카트에서는 컵라면, 커피, 쌍화차, 생강차 등을 나눴고, 뒤쪽 카트에서는 라면과 종이컵에 뜨거운 물을 붓고, 필요에 따라 소금빵과 생수, 옷 등을 배분했다. 아녜스 수녀는 “노숙하는 분들에게만 옷과 양말을 드리고 있다”며 “중복 수령을 막기 위해 수령하는 이들의 이름을 따로 기록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원한 생수 또한 집이 없는 이들을 선별해 지급했다. 안젤라 수녀는 “운반할 수 있는 물의 양이 제한돼 있어, 꼭 필요한 분들에게만 드리려고 한다”고 전했다. 5년간 노숙 생활을 한 경험이 있는 길벗사랑공동체 서울역 해피인 이정윤(바오로) 멘토는 “여름철 노숙인과 쪽방촌 주민들에게 생수 지원은 가장 필요한 지원 중 하나”라며 “단순히 더위를 식히는 데 그치지 않고, 장마철에는 수돗물에서 약품 냄새가 나 마시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열대야 속 영등포역 ‘아웃리치’(Outreach) 물품 배급을 마친 수도자들은 이번엔 현장에 나오지 못한 이들을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영등포역 5번 출구 인근 광장에서는 수도자들과 매주 만난다는 노숙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광장 한쪽 구석에서 지내고 있는 박기범(가명) 씨는 “모기가 너무 많아 더워도 긴팔, 긴바지를 입고 잔다”고 했다. 무대 구석에서 잠을 잔다는 김민정(가명) 씨는 왼쪽 다리가 심하게 부어 있었다. 김 씨는 “모기 물린 곳을 계속 긁다가 염증이 생겼다”고 말했다. 수도자들은 모기 기피제와 가려울 때 닦을 수 있는 물티슈 한 통을 건네며, 증상이 심해질 경우 인근 자선의료기관인 요셉의원을 찾아가길 권했다. 수녀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리를 떴지만, 잠시나마 안부를 나눈 이들의 표정에는 온기가 돌았다. ‘교도소 같은 방에서 사느니 차라리 죽여라!!’ 요셉의원 뒤편 쪽방촌으로 들어서자, 공공주택지구 정비사업에 따라 임시주거시설에 가야할 주민들의 불만을 표하는 현수막들이 눈에 띄었다. 안젤라 수녀는 “정비사업으로 살던 곳에서 쫓겨난 주민들이 많아 근처 노숙인과 주민들이 많이 예민해진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골목 안은 바깥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거리에는 누워 자는 사람들, 술에 취해 소란을 피우는 이들, 구석에 모여 술판을 벌이는 무리도 보였다. 먹다 남긴 음식, 빈 술병, 천막과 매트로 급조한 집들이 곳곳에 있었다. 낯선 분위기였지만 수도자들이 도착하자 이들은 조용히 줄을 서서 음식을 받았고, 감사 인사를 건네며 미소를 지었다. 단 한 끼일지라도, 이들에게는 생명과 직결된 문제다. 아녜스 수녀는 “노숙인 중에는 음식 없이 술만 마시는 분들이 많아, 여름철에는 수분과 영양을 함께 보충해줘야 한다”며, 잠든 이들 곁에 조심스럽게 빵과 생수를 내려놓았다. 이어 “거동이 불편하거나 외부로 나오는 걸 꺼리는 분들이 많다 보니, 우리가 직접 찾아다니며 건강 상태를 확인하고, 필요 시 병원으로 연결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지속 가능한 연대를 위해 필요한 것 노숙인과 쪽방촌 주민들은 여름철 폭염에 특히 취약하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역대 가장 무더웠던 지난해 여름 ‘온열질환 응급실감시체계’를 통해 신고된 온열질환자는 3704명이며, 이 중 65세 이상 고령자는 30.4%를 차지했다. 서울시가 발표한 쪽방 거주민 실태조사 결과에서도 이 같은 취약성은 드러난다. 조사에 따르면 서울시 관내 쪽방 주민의 약 70%가 60대 이상으로, 더위에 특히 민감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다. 여름철 응급구호 활동은 결식과 탈수를 예방하고, 상담을 통해 병원이나 복지시설로 연계하는 등의 실질적인 성과를 내고 있지만, 장기적으로 지속되기 어렵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한가노협 조성증(프란치스코) 상임이사는 “홈리스 복지사업은 정부 예산 배정에서 항상 후순위로 밀려 단기 지원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며 “중장기 지원 체계를 만들고 싶어도 예산 문제로 번번이 막힌다”고 말했다. 조 이사는 예산 확대뿐 아니라 정부 정책의 전환도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홈리스 복지는 민관이 함께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해야 하는 영역”이라며 “홈리스가 다시 사회의 일원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중앙정부가 책임지는 사업으로 전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홈리스 등의 복지 및 자립지원에 관한 법률’은 관련 사업의 실질적 운영을 지방자치단체에 맡기고 있어, 일관된 정책 추진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발행일 2025-07-20 제3451호 12면

[농민 주일] 도·농 생명공동체 연결하는 ‘우리농 나눔터’

1980년대 급격한 산업화를 겪은 한국 사회는 특히 농업 분야에서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이 타결되고 수입 농산물의 유입이 확대되면서 농업 기반은 더욱 흔들렸다. 이후 농산물 가격의 반복적인 폭등과 폭락, 만성적인 적자 농사, 농촌 인구의 이탈과 고령화, 농민 자살의 급증 등 다양한 사회 문제가 이어졌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농민의 위기를 외면하지 않았다. 농업 회생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1994년 우리농촌살리기운동 전국본부를 설립했고 이듬해 농민 주일을 제정했다. 7월 셋째 주일에 농민의 가치를 생각하고 함께 기도하고 실천하기로 마음을 모은 지 30년. 여전히 어려운 농촌과 농민들의 현실 속에서도 농업의 지속 가능성과 생명 중심의 사회를 향한 길을 열어가고 있는 도시·농촌 생명공동체의 연결 고리, ‘우리농 나눔터’를 찾았다. 가톨릭농민, 생태적 삶 위해 생명농업 실천 농민 주일은 교회 내 모든 신자가 농업과 농촌, 그리고 농민의 가치와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고, 함께 기도하며 농민들과 동행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찾기 위해 제정되었다. 1995년 제정 당시, 농민들은 수입 농산물 확대에 따른 가격 불안정과 부채 증가 등으로 심각한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2025년 농민 주일 제정 30주년을 맞았지만, 농민들의 현실은 여전히 고단하다. 특히 생명농업을 실천하는 가톨릭농민의 삶은 더욱 혹독한 상황이다. 서울대교구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가 2024년 3월 가톨릭농민회 회원 32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우리농운동 30주년 진단을 위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4.3%는 ‘농민 고령화와 저출산에 따른 농촌사회 소멸’을 우리 농업이 직면한 최대 위기로 지목했다. 또한 ‘농업 후계자가 없다’는 응답은 80.2%에 달했다. 연간 농업소득이 2000만 원 미만이라는 응답도 30.5%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농사 인력 감소는 물론이고 기후위기로 인해 생산물 감소의 어려움까지 가중된 가톨릭농민들에게 화학비료나 제초제를 쓰지 않고 농업을 하는 것은 녹록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농민의 18.6%가 11~15년간, 18.3%가 21~25년간 생명농업을 실천하고 있었다. 가톨릭농민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생명농업을 실천하는 이유는 신앙적 신념 때문이다. 생명농업을 실천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49.1%가 ‘생태적 삶을 위해 자발적으로’, 17.7%가 ‘가톨릭 농민회원으로서의 결의’라고 답했다. 이들이 생산한 생명농산물의 주요 판로는 우리농본부(32.8%)를 통한 공급이 가장 많았고, 이어 개인 직거래(26.4%), 로컬푸드 및 학교급식(11.8%)이 뒤를 이었다. 본당과 교회 안에서 이뤄지는 직거래는 도시와 농촌이 함께하는 생명공동체를 확대하는 실질적 연결고리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분회 활성화를 위한 우선 과제로 ‘생명농산물 직거래 활동 확산’을 꼽은 응답자가 32%에 달해, 유통 기반 확대와 소비자 참여가 향후 우리농운동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는 핵심 요소로 지목됐다. 우리농산물 이용은 ‘하느님의 길 걷는 것’ 7월 10일, 서울의 우리농 상설나눔터 중 하나인 ‘서초나눔터.’ 뜨거운 햇볕에 몇 걸음만 걸어도 이마에 땀이 맺히는 날씨 속에서도, 우리농 활동가 이병임(루치아) 씨는 평소처럼 나눔터 문을 열었다. 소비자가 이틀 전에 주문한 농산물을 제때 전달하기 위해 매일 들어오는 물량을 꼼꼼히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날 매장에는 제철을 맞은 옥수수가 진열됐다. 곧바로 들어온 손님이 옥수수를 장바구니에 담자, 이 씨는 “춘천교구 농민이 유기농으로 재배한 옥수수라 알이 크지 않아도 아주 고소하고 맛있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이 씨는 어떤 농민이 어떤 마음으로 농산물을 재배했는지 친절하게 설명했다. 우리농 나눔터에서는 농산물의 모양과 가격보다 중요하게 공유되는 것이 농산물을 수확한 농민의 땀과 정성이다. 나눔터를 자주 찾는 손님도 익숙하게 이야기를 듣고는 그날 반찬에 쓸 유기농 두부와 콩나물을 함께 장바구니에 담는다. 서울 용산 ‘한강나눔터’는 신자가 아닌 지역 주민들도 자주 찾는다. 매장은 작지만 실속있는 유기농 제품들이 다양하게 구비돼 있다는 소문이 난 덕분에 매출도 높다. 초복을 앞두고 손님 두 명이 생닭을 찾는다. “미리 예약하시면 유기농 밤나무 아래서 자란 토종닭도 가져가실 수 있어요. 작은 우리에서 키우지 않고 밖에서 키운 닭이라 쫄깃하고 맛있답니다.” 항생제를 먹거나 비좁은 케이지가 아닌 건강한 환경에서 자란 토종닭이라는 활동가 오윤경(가브리엘라) 씨의 상품 설명은 일반 마트에서는 접하기 어렵다. 농산물을 생산한 농민이 직접 소비자를 만날 수 없기에, 우리농 활동가들은 곳곳의 나눔터에서 도시와 농촌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오 씨는 “활동가로서 우리농운동에 대한 교육을 받고 직접 농촌을 찾아 농민들과 만나다 보니 그분들이 어떤 마음으로 농산물을 키우고 있는지 소비자에게 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우리농 활동가의 역할은 농산물 판매로 국한되지 않는다. 각 본당에 우리농 생활공동체를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농촌을 방문해 농민들과도 꾸준히 교류한다. 환경보호를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이 씨는 “농사를 짓지 않는 도시 사람들은 농민들의 어려움을 알 길이 없으니 식재료가 어떻게 우리집 밥상에 오르는지 관심이 없다”며 “저도 쭉 서울에서 살았지만 활동가로 봉사하면서 농민들의 어려움을 듣다 보니 날씨가 덥거나 비가 많이 올 때면 자연스럽게 농민들을 걱정하고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농촌을 잃고 땅을 잃는다는 것은 자신을 잃는 것과 같다는 김수환 추기경님의 말씀을 항상 기억했으면 좋겠다”며 “생명과 땅을 살리는 일, 하느님의 길을 함께 걷는 데 많은 분이 함께해 주시길 희망한다”고 전했다.

발행일 2025-07-20 제3451호 13면

[서울대교구 최광희 보좌주교 임명] 이모저모·인터뷰

“레오 14세 교황님은 최광희 신부님을 서울대교구의 보좌주교이자 엘레판타리아 디 마우리타니아(Elefantaria di Mauritania)의 명의 주교로 임명하셨습니다. 새 주교님으로 임명되심을 축하하며 새 주교님께 필요한 모든 은총이 풍성히 내리기를 침묵 속에 기도하겠습니다.” 서울대교구장 정순택(베드로) 대주교는 7월 8일 오후 7시 서울대교구청에서 신임 보좌주교 임명 소식을 발표하면서, 가장 먼저 최광희(마태오) 주교를 위해 기도하자고 청했다. 기도로 시작된 최 주교의 임명 발표와 이후 모습을 전한다. “4보좌 인사드리겠습니다.” “신학교 시절을 떠올려보면, 본당 규모에 따라서 1보좌, 2보좌 신부님들이 계신 본당이 있었습니다. 아주 큰 본당은 잠시 3보좌 신부님까지 계셨던 기억도 납니다. 네, 서울대교구 4보좌 인사드리겠습니다.” 최광희 주교는 마치 처음 본당 보좌신부 발령은 받은 새 신부가 본당 신자들에게 인사하듯이, 주교로서의 첫인사를 전했다. 최 주교의 재치 있는 인사에 웃음소리와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최 주교는 “새롭게 주교님이 되신 분들의 모습을 떠올리면 항상 준비된 분들이고 꼭 맞는 옷을 입으셨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임명 소식에) 제게 맞지 않는 옷이 눈앞에 놓여 있다는 생각이 가득하다”면서 “아무런 준비 없이 갑자기 벼랑 끝에 몰린 것 같은 저를 위한 기도를 간절히 청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많은 신자분의 어렵고 고통스러운 이야기들, 사회 곳곳의 아픔과 괴로움들을 들을 때마다 예수님의 애달파 하시는 마음과 당신의 눈동자를 떠올린다”며 “교구장님 뜻에 따라 교구가 일치된 모습으로 함께 걸어갈 수 있도록 작은 발걸음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서울대교구 총대리 구요비(욥) 주교는 최 주교의 임명을 축하하며 “교구에 새롭고 젊은 주교님을 보내주신 것에 거듭 감사하면서, 서울대교구가 교구장님을 중심으로 혼연일체가 돼서 이 시대에, 한국 사회에 빛과 소금으로 나아가는 그런 새로운 출발이 되길 진심으로 기대한다”고 전했다. 정순택 대주교·염수정 추기경 예방 발표 후 최 주교는 서울대교구청 교구장 접견실을 찾아 교구장 정순택 대주교를 예방했다. 정 대주교는 최 주교를 맞이하며 “최 주교님을 하느님께서 선택해, 우리 교회를 위해 큰일들을 함께해 나갈 수 있도록 해주셔서 감사드린다”면서 기쁨을 전했다. 또한 “(최 주교가) 준비한 게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준비를 넘어서서 일하시는 분”이라며 “(우리의 역할은) 하느님께 내어 드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격려하고 최 주교에게 「주교예절서」를 선물했다. 최 주교는 주교 임명 다음날인 9일 구요비 주교와 함께 서울 혜화동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주교관을 찾아 전임교구장 염수정(안드레아) 추기경을 예방했다. 염 추기경은 “젊은 주교님이 나오셔서 더욱 기쁘다”며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YD)를 위해 전 세계 젊은이들이 모였을 때 특히 최 주교님이 희망의 전달자가 돼 달라”고 당부했다. 이어 최 주교의 사제 서품 성구인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탈출 3,12)를 친필로 적은 성경책을 선물하며 “이 말씀처럼 주교님도 ‘세상 끝 날까지’(마태 28,20) 우리와 함께해 달라”고 격려했다. 예방을 마친 최 주교는 가톨릭대 성신교정 대성당으로 이동해 제단 위에 안치된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 유해 앞에서 기도를 바쳤다. ‘2027 서울 WYD’ 준비로 분주 만 47세로 한국 주교단에서 가장 젊은 최 주교는 임명 후에도 ‘2027 서울 WYD’ 준비 일정으로 분주했다. 최 주교는 7월 8일부터 12일까지 한국을 방문한 교황청 평신도가정생명부 대표단과 함께 WYD 특별기획단 회의를 진행했다. 최 주교는 대표단과 함께하는 5박6일 간의 빼곡한 회의 일정에 더해 신임 주교로서의 여러 일정을 동시에 소화하는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동안 교구 문화홍보국장으로서 2027 서울 WYD 준비에 함께해온 최 주교에게 축하를 전하기 위해 교황청 평신도가정생명부 대표단은 주교 임명 발표 현장을 찾기도 했다. 이경상(바오로) 주교는 주교 임명 발표 자리에서 “함께 생활하고 일하면서 곁에서 보면 최 주교님은 항상 주어가 ‘최광희’가 아니라 ‘하느님’으로, 교회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일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면서 “후배고, 또 제가 신학교에서 가르친 제자였던 분인데, 마음속으로 든든하게 생각했고, 존경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특히 “중차대한 과제 중 하나인 2027 서울 WYD를 함께 준비하게 돼서 정말 기쁘게 생각한다”고 전했다. [인터뷰] 최광희 주교 - “교회 구성원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성령 움직임 따라 동행할 것” “제 뜻이나 의지가 드러나는 것보다는 교회 구성원의 목소리를 얼마나 담을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들과 만나 듣고, 기도하며 고민하는 가운데 우리가 함께 걸어가야 할 길이 드러날 것이라 믿습니다.” 서울대교구 보좌주교로 임명된 최광희 주교는 주교 임명에 자신은 “합당치 않은 사람”이라며 겸손한 마음을 비쳤다. 그러나 “대주교님과 추기경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준비해서 갈 수 있는 직무도 아니고 오히려 더 청하고, 더 기도하고, 제 부족함을 고백하면서 가는 자리라 생각했다”며 “당신께서 불러주셨으니 당신께서 채워주시길 기도한다”고 말했다. 최 주교는 앞으로의 주교 직무에 있어 시노드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시노드 정신은 최 주교가 그동안 사목해 온 방식에도 그대로 배어 있다. 특히 가톨릭청년성서모임에서는 시노드 정신으로 청년들과 함께해 왔고, 그를 통해 말씀을 살아낸 청년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면서 최 주교 자신도 성장해 왔다. 최 주교는 “명확한 비전을 제시하고 강력하게 추진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그것이 제 몫은 아닌 것 같다”면서 “‘성령의 움직임’을 통해 동행하고 함께 성장하는 길에 필요한 지혜와 방향성이 보이게 될 것이고, 그 길에 순종하면서 함께 걸어가고 싶다”고 밝혔다. 최 주교는 젊은 세대와 소통을 위한 자세로 ‘인내와 기다림’을 제시했다. 최 주교는 “경험이 많은 사람이 일하는 것이 훨씬 더 빠르고 효율적일 수 있지만, 교회의 모습은 효율적인 것보다는 혹시 늦어지고 무너지고 실패하더라도 동반하면서 성장해 나가길 기다려주는 모습일 것”이라면서 “꼭 젊은 세대만이 아니라 우리가 신앙 안에서 살아가는 공동체라면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가장 중심이 되고 기본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최 주교는 앞으로 주교로서 살아가는 데 있어 함께해 나갈 사제단과 신자들에게 가르침과 기도를 부탁했다. 최 주교는 사제단에 “신부님들이 얼마나 본인을 희생하고 사제로서 충실히 살기 위해 노력하시는지 늘 봐왔다”면서 “그래서 선배 신부님들께 많은 가르침을 청하고, 동료·후배 신부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걸어가고 싶다”고 전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우리의 삶이 정말 삶의 큰 힘과 기쁨이 되길 바랍니다. 그 길을 신자분들과 함께 걸어가고 싶습니다. 이 부족한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발행일 2025-07-20 제3451호 11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라파엘로 산치오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 1483~1520)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와 함께 르네상스 미술의 3대 거장으로 불립니다. 그는 특히 회화의 표현 기법에서 전성기 르네상스를 완성하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장식과 투시도 효과를 특징으로 하는 르네상스 건축을 발전시켰습니다. 라파엘로는 브라만테의 고향이기도 한 르네상스 예술의 도시 우르비노에서 1483년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조반니 산티(Giovanni Santi)는 화가이면서 인기 있는 미술 공방의 운영자로서, 라파엘로는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프레스코 기법을 비롯한 회화의 기본 기술을 배웠습니다. 문학적 소양을 갖춘 아버지 덕에 라파엘로는 미술적 기교뿐만 아니라 예술가가 갖추어야 할 자질에 대한 교육을 받았고, 그 영향으로 예술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 시기 어린 라파엘로는 자신의 첫 작품인 <산티 가정의 성모 마리아>를 그의 집 안 벽면에 남겨놓았습니다. 이후 아버지는 라파엘로를 움브리아 학파의 거장 페루지노에게 보내 훌륭한 스승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우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라파엘로에게 가장 훌륭한 스승은 아버지였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일생 아버지를 추모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예술과 문화에 있어서 이탈리아의 어느 도시보다도 탁월함을 지녔던 우르비노는 어린 라파엘로에게 그 자체로 미술 학교이고 미술 교사였습니다. 특히 라파엘로는 우르비노의 두칼레 궁전에서 많은 예술적 영향을 받았는데, 우르비노 공작의 서재에서 이름 있는 화가들의 작품을 접하고 나서는, 누구의 설명도 없이 작품으로부터 직접 회화 기술을 습득했다고 합니다. 브라만테의 것으로 알려진 적막하고 황량한 이상적인 도시의 그림 한 점도 이곳에 있었는데, 그 그림은 라파엘로의 건축적 잠재성을 크게 자극하였을 것입니다. 라파엘로는 열일곱에 이미 마에스트로로 불릴 정도로 세간의 인정을 받았고, 스무 살이 되던 해에는 <골고타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성모 마리아 대관식> 두 작품을 스승 페루지노에게 헌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페루지노의 같은 주제의 그림을 능가하는 <성모 마리아의 결혼>(1504년)을 통해서 라파엘로는 이제 동시대의 화가들보다 한 세대를 앞서가고 있음을 세상에 증명했습니다. 그즈음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를 피렌체에서 만나며 그의 피렌체 시대(1504~1508년)를 열었습니다. 이렇게 서양 미술의 위대한 예술가 세 명이 피렌체라는 한 도시에 머무는 시기에 라파엘로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에 관한 연작을 남겼는데, 대표적으로 <오색 방울새의 성모 마리아>와 <벨베데레의 성모 마리아>를 들 수 있습니다.(1506년) 이후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와 피렌체에서의 마지막 작품인 <발다키노의 성모 마리아> 등을 완성했습니다. 건축 분야에서 라파엘로는 이 시기에 브루넬레스키와 알베르티의 르네상스 건축물들을 접했고, 줄리아노 다 상갈로와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베키오 형제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습니다. 1508년 말 스물다섯 살의 라파엘로는 같은 우르비노 출신의 건축가 브라만테의 추천으로 율리오 2세 교황의 부름을 받았고, 로마에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그때 이미 서른세 살의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경당의 천장화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라파엘로는 훗날 바티칸 박물관의 ‘라파엘로의 방’이라고 불릴 교황의 아파트에서 작업을 시작했는데, ‘서명의 방’에 있는 <아테네 학당>과 <성찬례 논쟁>, ‘헬리오도로스의 방’에 있는 <성 베드로의 석방> 등의 걸작을 남깁니다. 1513년 로렌초 데 메디치의 아들 조반니 데 메디치 추기경이 레오 10세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교황과의 친분으로 라파엘로는 최고의 시기를 맞이합니다. 제단화 분야에서도 <폴리뇨의 성모 마리아>와 예술 역사상 가장 유명한 ‘두 천사’를 담은 <시스티나의 성모 마리아> 역시 이 시기에 그려집니다. 무엇보다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경당 천장화를 보고 칼이 아닌 붓으로 조각한 듯한 작품에 경외감을 느꼈으며, 동시에 그가 도전할 상대가 있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1514년 라파엘로는 태피스트리 디자인 의뢰를 받고 수개월에 걸쳐 밑그림 작업을 한 후 플랑드르 공방으로 보냈습니다. 3년 후 완성된 태피스트리가 로마에 도착하여 시스티나 경당의 제단 좌우와 뒤편을 가득히 장식하였고, 교황청의 모든 추기경과 예술가들은 <고기잡이의 기적> 등의 작품을 보고 그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시기에 교황 아파트의 방들 가운데 ‘보르고의 불의 방’과 ‘콘스탄티누스의 방’ 작업도 병행하였습니다. 이 해는 또한 브라만테가 사망하고 라파엘로가 성 베드로 대성당의 총감독으로 임명되어 대성당의 설계에 힘을 쏟을 때이기도 했습니다. 라파엘로는 이보다 조금 앞서 시에나 출신의 부유한 은행가 아고스티노 키지(Agostino Chigi)의 의뢰로 로마의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del Popolo)에 키지 경당(Cappella Chigi)을 설계하였고, 산텔리조 델리 오레피치 성당(Chiesa di Sant'Eligio degli Orefici)과 빌라 마다마(Villa Madama) 등을 건축했습니다. 1520년 3월 라파엘로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변모> 작업을 4년째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모세와 엘리야로 둘러싸여 거룩하게 변모한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리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삶의 가장 의미 있는 마지막 순간을 그분과 함께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즈음 얻은 열병은 낫지 않았고 결국 그분의 거룩하게 변한 모습을 바라보며 1520년 4월 6일 성금요일에 그분의 손을 잡고 본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육신은 판테온에 남겨둔 채로….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07-20 제3451호 20면

‘2025 로마 젊은이들의 희년’ 한국교회 순례 여정 본격화

한국교회가 7월 28일부터 8월 3일까지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리는 ‘2025 로마 젊은이들의 희년’을 앞두고 참가 준비에 한창이다. 젊은이들의 희년 행사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2023년 리스본 세계청년대회 폐막미사에서 “2025년 희년에 전 세계 청년들을 로마로 초대한다”고 발표한 것을 계기로 시작됐다. 전국 각 교구는 수차례 사전 모임과 워크숍을 통해 참가자 간 친교를 도모하고 준비를 이어왔으며, 이제 로마행을 앞두고 발대미사와 순례단 축복식 등 최종 점검 단계에 들어섰다. 대구대교구는 7월 12일 청년청소년국 대안동센터 경당에서 교구 총대리 장신호(요한 보스코) 주교 주례로 발대미사를 봉헌했다. 서울대교구와 의정부교구는 각 19일, 인천교구는 20일 각각 발대미사를 봉헌했다. 부산교구는 19일 순례단에 대한 축복 예식을 열었다. 서울대교구는 ‘1004 프로젝트’라는 이름 아래 당초 1004명을 목표로 참가자를 모집했으나, 예상보다 많은 1100여 명이 지원해 참여할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인천교구 78명, 수원교구 40명, 의정부교구와 부산교구 각 39명, 대구대교구 29명 등 전국에서 약 1300명이 프란치스코 교황의 초대에 응답했다. ‘2025 로마 젊은이들의 희년’ 개막미사는 7월 29일 오후 6시(현지 시간)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레오 14세 교황 주례로 거행된다. 이어 세계 각국 청년들은 7월 30일부터 8월 1일까지 사흘간 로마 시내 주요 성지를 순례하게 된다. 특히 8월 1일은 ‘참회의 날’로, 고대 로마의 전차 경기장 터인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에서 오전 10시30분부터 오후 6시까지 고해성사가 진행된다. 성사는 영어·이탈리아어·스페인어로 이뤄지며, 한국어 고해성사 시간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8월 2일 오후 3시부터는 로마 토르 베르가타(Tor Vergata)에서 음악과 함께하는 환영 행사가 열린다. 로마 곳곳을 순례한 전 세계 청년들이 한데 모여 자신의 신앙을 증언하고 젊음의 열기를 함께 나눈다. 같은 날 저녁 8시30분에는 교황과 함께하는 철야기도 ‘비질(Vigil)’이 이어지고, 다음 날인 8월 3일 오전 9시30분, 같은 장소에서 교황 주례 폐막미사로 대회 일정이 마무리된다. 한편, 일부 교구는 본대회 전후로 로마 외 지역에서도 순례를 갖는다. 순례단은 로마뿐 아니라 밀라노, 피렌체, 아시시, 카스텔 간돌포 등을 방문하며 순례 여정을 이어갈 계획이다.

발행일 2025-07-20 제3451호 16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14) 4·19 민주혁명과 천주교회

반공주의라는 이념적 목표를 공유하며 연대했던 이승만 정권과 한국 천주교회는 6.25 전쟁 이후 점차 사이가 벌어지게 됩니다. 그 가장 큰 원인은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장기 독재에 대한 야욕이었습니다. 장면 총리가 이승만 대통령의 대안으로 부상하자, 그는 곧 이승만의 정적으로 간주되었고, 장면을 지지하던 천주교회 역시 정권의 탄압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승만 정권과 천주교회의 대립이 이어지는 가운데, 1960년 3월 15일 치러진 정·부통령 선거에서 장면은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습니다. 그러나 전국적인 부정 투개표로 점철된 이 선거에서 이기붕이 부통령에 당선되고, 장면은 낙선했습니다. 이때부터 전국적으로 “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시위가 들불처럼 번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4·19 민주혁명과 이승만 정권의 몰락 4월 초, 전국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여론이 고조되던 중, 마산 해변가에서 16세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됐습니다. 최루탄에 맞아 처참한 모습이 된 어린 학생의 주검을 본 시민과 학생들은 분노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경찰의 총탄에 쓰러졌습니다.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4월 15일, 마산 시위에 대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고무되고 조종된 것”이라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하며 폭력과 억압을 통한 통치를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습니다. 또한 이승만 정권은 이러한 사태가 국민의 뜻이 아니라, “장면과 그를 지지하는 천주교 세력의 개입에 의한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마침내 4월 19일, 서울에서는 약 3만 명의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이 거리로 나섰고, 수천 명은 경무대로 몰려들었습니다.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기 시작했고, 같은 시각 전국 주요 도시에서도 수천 명의 학생들이 시위에 가세했으며 계엄령이 선포됐습니다. 연일 이어진 전국적인 시위 끝에,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6일 부정선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담화를 발표하게 됩니다.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몰락했고, 하야한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했으며, 부통령에 당선된 이기붕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노기남(바오로) 주교는 서둘러 교황사절 람베르티니 주교를 찾아가 당시 상황을 설명했고, 이승만 정권에 의해 폐간됐던 경향신문을 즉시 복간시켰습니다. 이승만의 하야 발표 이후, 시민들은 경향신문 깃발이 나부끼는 노기남 주교의 자동차를 향해 ‘경향신문 만세’를 외쳤다고 전해집니다. 소극적인 천주교회 이승만 정권의 몰락으로 이어진 4·19 민주혁명의 과정에서, 천주교회는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시 상황과 관련한 가톨릭시보의 보도는 1960년 5월 1일, 8일, 15일자 등 총 세 차례 게재되었습니다. 4월 19일 서울의 시위와 유혈 사태에 대해, 5월 1일자 가톨릭시보는 4면 톱기사로 「조국과 동포에 (대한) 참사랑은 이런 때에...」라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전했습니다. “4월 19일, 서울 거리를 휩쓴 ‘학생 의거’ 사건이 벌어지자, 학생회 지도신부인 아오스딩 나(羅相朝) 신부와 동성중학 지도신부였던 바오로 최(崔爽浩) 신부, 그리고 가톨릭대학 지도신부이며 전 학생회 지도신부였던 방지거 박(朴稿安) 신부는 학생들의 뜻하지 않은 변사를 염려하여 그들의 임종을 돕고 영혼을 구하고자 쏟아지는 총탄 속에서도 종횡무진으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활약하여, 많은 영혼들에게 마지막 위로를 주는 한편 천국으로 인도하였다.” 가톨릭시보는 이어 “노 시몬 군의 장례미사 거행”이라는 제목으로, 시위 도중 사망한 동국대 노두희(시몬) 군의 장례미사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 미사는 4월 23일 명동성당에서 노기남 주교 집전으로 거행됐습니다. 단편적이나마 가톨릭시보의 보도 내용을 통해 미뤄볼 때, 당시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가톨릭학생회가 시위에 동참하고, 각 학교의 지도신부들이 이들을 돌보며 지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노기남 주교가 시위 도중 희생된 학생의 장례미사를 직접 집전한 것은 4·19 민주혁명에 대한 일종의 지지 입장을 드러낸 행위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일선 본당의 신자들과 수도회 등에서는 부상자를 위문하고 모금 활동을 벌이는 등 여러 방식으로 지원에 나섰습니다. 이처럼 교회 내 활동들이 가톨릭시보를 통해 일부 보도되었지만, 교회 당국이 당시 정치 상황과 다수의 희생자를 낳은 불의하고 참담한 현실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밝힌 흔적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4월 한 달 내내 독재 정권의 광기로 온 나라가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교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가톨릭시보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정교 분리’를 내세운 침묵 교회의 소극적 자세는 5월 8일자 가톨릭시보 1면 사설에서 그 이유를 엿볼 수 있습니다. ‘국가의 근본원칙 – 국가는 공동선을 통한 인간완성의 수단이다’라는 제목의 이 사설은 해묵은 정교분리 원칙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습니다. “첫째, 모든 국가는 적어도 교회에 반항하는 정치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교회를 도우며 상호 협조해야 한다. 둘째, 모든 국법은 신법인 자연법에 거역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제정되어야 한다. 셋째, 신자인 국민에 대하여 국가 명령과 교회 명령이 서로 상충될 경우, 교회 명령이 국가 명령에 우선한다. 넷째, 국가는 교회의 초자연적인 복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정치에 있어서 교회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 언뜻 보면 국가는 교회에 간섭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는 듯하지만, 특히 네 번째 항목은 교회가 국가와 사회의 중요한 사안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도 해석됩니다. 사설은 이 네 가지 원칙에 앞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교회는 백성의 구령 문제가 국가의 침해를 받을 경우, ‘예외적’으로 정치에 간섭할 권한을 가진다. 물론 이 간섭은 ‘교회적인 방법’에 의한 ‘간접적인 간섭’을 의미한다.” 결국 이 사설은 교회의 생존과 확장이 최우선적인 가치이며, 국가가 이러한 교회의 권익을 보장하는 한 교회는 기존 체제에 저항하지 않겠다는 변명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물론 이후 한국 천주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수용하고 체득하면서 독재 정권과의 지난한 싸움에 나섰고, 사회 정의와 정치적 민주화를 위한 실천에 앞장섰습니다. 그렇게 시대착오적인 정교분리 원칙으로부터 점차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4·19 민주혁명은 교회가 자신의 예언자적 소명을 자각하기 시작한 첫 발걸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발행일 2025-07-20 제3451호 8면

[서울대교구 최광희 보좌주교 임명] 삶과 신앙

속 깊은 아들, 어느 사람이든 존중으로 대하던 어른, 가장 작은 소리에도 귀 기울이려 애쓰는 사제. 서울대교구 새 보좌주교로 임명된 최광희(마태오) 주교를 만난 이들은 최 주교의 삶이 ‘겸손과 배려가 녹아 있다’고 입을 모은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탈출 3,12)라는 말씀에 의탁해 사제의 길을 걸어 왔고, 또 주교의 길을 걸어갈 최 주교의 삶과 신앙을 들여다본다. 사제가 된 착한 아들 최 주교의 어머니 이연복(데레사) 씨는 최 주교가 어려서부터 “점잖고 어른스러웠다”라면서 “‘싫다’라는 말을 한 적이 없고, 부모의 관점에서 헤아리려 하고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었다”라고 최 주교의 어린 시절을 회고했다. 어린아이라면 싫은 것도 있고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일도 있기 마련이지만, 최 주교는 투정을 부리는 법이 없었다. 최 주교는 도리어 부모의 어려움을 먼저 생각해 행동하곤 했다. 초등학교 3학년 전주교구 숲정이본당에서 첫영성체를 하고부터는 더 반듯한 성품으로 성장해 나갔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예비신학생 모임을 다니며 성소의 씨앗을 키웠고, 성당에서 성체조배를 하며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그런 최 주교가 딱 한 번 부모의 반대를 무릅쓴 일이 있었다. 바로 진로를 결정할 때였다. ‘사제가 되고 싶다’라는 최 주교에게 아버지 최동준(보나벤투라) 씨는 “좋은 학교에 갈 실력이 되는데 왜 신학교에 가느냐”라며 반대했다. 최 주교는 그런 아버지의 반대를 깊은 대화로 풀어 나갔다. 처음에는 반대하던 아버지 최 씨는 깊은 생각과 뚜렷한 주관으로 사제의 길을 걷고자 하는 최 주교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돌렸다. 경청하는 존중하는 ‘스승님’ 최 주교는 어려서부터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곤 했다. 어린 시절 집에 손님이 오시면 자리를 피하는 보통 아이들과 달리, 최 주교는 어른들의 말을 듣고 있곤 했다. 친구나 동생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은 물론이었다. 덕분에 동생과도 한 번도 싸우지 않고, 늘 친했을 정도로 우애가 좋았다. 최 주교의 동생 최현주(엘리사벳) 씨는 “(오빠가 있는) 다른 사람들은 자매나 동생이 있는 집을 부러워한다는데, 저는 오빠가 너무 좋아서 그런 불만을 가진 적이 없었다”면서 “늘 제 말을 잘 들어주고, 배려해 주는 오빠였다”라고 말했다. 사목현장에서 최 주교를 만난 이들도 경청하는 최 주교의 모습을 기억했다. 최 주교의 경청은 그저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존중과 배려가 담겼다. 후배 사제들은 물론이고, 청년들에게도 함부로 말하는 일 없이, 존댓말을 사용하며 상대방을 존중했다. 그리고 자신보다는 이웃을 위해, 그리고 교회를 위해 헌신했다. 가장 오랜 시간 사목을 한 가톨릭청년성서모임 청년들에게 최 주교의 별명은 ‘스승님’이었다.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최 주교는 고민이나 어려움을 나누는 청년들의 목소리를 항상 진지하게 경청하고 가까이 다가가려 노력했다. 청년들은 그런 최 주교에 존경과 친근함을 담아 장난스레 ‘스승님’이라 불렀다. 청년성서모임 봉사자들은 지금도 스승의 날이면 ‘스승님’ 최 주교에게 연락하곤 한다. 최 주교의 서품 동기이자 로마에서 함께 유학한 김남균 신부(시몬·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부관장)는 “최 주교님은 늘 친절하고 웃는 모습으로 무슨 일이건 솔선수범하는 분”이라면서 “제일 젊은 주교님이시기도 하고, 젊은이들과 호흡하고,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분이기에 세계청년대회를 앞두고 전 세계 젊은이와 교류하는 다리 역할을 해줄 것 같다”라고 기대를 전했다. 문화로 소통하는 사목자 최 주교의 경청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최 주교는 늘 세상의 다양한 모습에 관심을 기울이곤 했다. 학창 시절에도 그랬고, 신학교에서도 연극부를 비롯해 다양한 부서활동에 참여하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어머니 이 씨는 “다른 아이들은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보는데, 최 주교는 어릴 적부터 정치·경제·사회·문화 관련 프로그램을 보곤 했다”라면서 “고3 때도 세상의 다양한 이야기에 관심을 두기에 ‘학생이면 공부해야지 다른 데 신경을 쓰느냐’라고 말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성품이 사목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갖추게 해주지 않았을까 한다”고 말했다. 사람들과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이던 최 주교는 문화를 통해 세상의 이야기를 듣고 또 교회의 이야기를 세상 전하고자 진력해 왔다. 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으로 일하면서는 다양한 문화사목을 펼쳐왔다. 최 주교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던지 부서 직원들에게 “일 좀 그만 받아오시라”라는 타박 아닌 타박을 받기도 했다. 문화홍보국에서 최 주교와 함께 일한 진슬기 신부(토마스 데 아퀴노·문화홍보국 부국장)는 “최 주교님은 제가 후배임에도 언제나 존댓말을 써주는 배려 가득한 분”이라면서 “개인보다는 교회를 위해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 참 일꾼이시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성경에 진심인 신앙인 모든 사제가 그렇겠지만, 최 주교는 특별히 더 ‘성경에 진심’인 사제였다. 성서학을 전공한 최 주교는 성경을 어떻게 잘 풀어내면 신자들에게 도움이 될지를 늘 고민했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지식을 가르치는 방식은 최 주교의 방식이 아니었다. 최 주교가 청년성서모임을 지도할 당시 개정한 청년성서모임 교재는 지금도 수많은 청년이 말씀에서 힘을 얻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또 성경과 예술을 접목해 <바이블 갤러리>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하는 등 신자들이 말씀을 더 가까이 받아들이도록 돕고자 애썼다. 최 주교와 청년성서모임 연구부 활동을 한 윤지은(다미아나) 씨는 “주교님은 늘 청년들 입장에서 생각하고 공감해 주시면서, 바쁜 중에도 청년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시간을 내주셨다”라면서 “주교님께서는 훨씬 지식도 많고 혼자 하는 것이 더 편하셨을 텐데도, 늘 청년들의 생각에 귀 기울여주셨고 그걸 교재 제작에 반영해 주셨다”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최 주교 자신이 말씀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이었다. 최 주교는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라는 자신의 서품성구처럼, 말씀에서 힘을 얻고, 말씀과 늘 함께하려고 노력해 왔다. 최 주교는 매일 독서·복음 묵상을 SNS에 올린다. 누구를 가르치거나 무엇을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최 주교 스스로 성경을 묵상하기 위해서다. 최 주교는 “제 서품성구는 공동번역에서는 ‘내가 네 힘이 되어주겠다’로 번역되는데, 하느님께서 제게 해주시는 말씀인 것 같다”라며 “성경 말씀은 제게 삶의 힘이 되고 하루하루를 살 수 있도록 해준다”라고 말했다.

발행일 2025-07-20 제3451호 10면

[당신의 유리알] 기억 저 깊은 곳에(상)

저녁 미사 전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언덕 위의 작은 성당에서 장명숙 안젤라 선생님을 만나기로 했다. 소셜미디어에서 ‘밀라논나’로 불리며, 많은 이에게 사랑을 받는 분이었다. 선생님(이하에서는 밀라논나님으로 칭함)을 부르는 애칭 밀라논나는, ‘밀라노 할머니’를 뜻하는 이탈리아어에서 비롯됐다. “제가 머리가 하얗잖아요. 하루는 그 방송을 만드는 친구들이, ‘밀라노 논나’라는 채널명을 제안했어요. 거기에 대고 ‘할머니 소리는 싫어’ 하기도 우습고, 그런 것에 저는 자유롭거든요. 그때부터 이 애칭을 쓰게 됐어요.” 영상을 보는 이들은 밀라논나님의 가식 없는 이런 모습들을 좋아했다. 나는 요양원에 계신 엄마가 잠시 떠올랐다. 누군가 엄마를 ‘할머니’라고 불렀을 때의 거북했던 기억과 함께, 몸만큼이나 이 호칭은 엄마를 더 멀리 느껴지게 했다. 그러고 보니 엄마의 세례명도 안젤라였다. 패션의 도시 밀라노에서 밀라논나님이 공부를 시작했을 때 느꼈던 문화적 차이에 대해 먼저 가볍게 물었다. “우선 이탈리아 사람들이 자유롭게 애정 표현을 하는 것에 저는 무척 놀랐어요. 그리고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서로의 이름을 그냥 부르는 모습에서 ‘평등한 관계가 이렇게 시작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이러니 세월이 지나도 서로 트집 잡지 않고 잘 지낼 수 있는 건가 싶기도 했습니다.” ‘내가 살던 밀라노에 이미 계셨구나…’ 우리는 이미 밀라노 중심 스칼라 극장 건너편 있는 고풍스러운 카페에 앉아 있는 듯했다. 질문을 준비하면서 밀라논나님이 출연하신 영상과 책을 먼저 읽었다. 책에서는 장기기증에 관해 쓰신 문구 ‘나의 죽음이 누군가에게 선물이 되기를’ 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궁금해졌다. “저는 이제 살아온 만큼 더 살지는 못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달려만 가던 생각들에서 멈칫 서서는, 남아있는 시간이 얼마나 있는지를 더 고민하게 되었지요." 나이가 드니 생각도 바뀌는 느낌. "나이 듦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역시 소탈한 표정으로 답하셨다. “저는 그 질문을 많이 받는데요. 나이를 어떻게 안 먹나요?! 떡국을 안 먹는다고 나이를 안 먹나요. 잠을 안 잔다고 세월이 안 가는 것도 아니고, 물결 따라 가는 거지요. 인생을 역행한다는 게 얼마나 흉해요. 사람들이 그래요 ‘염색하면 더 젊어 보일 텐데…’ 젊어 보이면 어쩔 건데요? 연애할 것도 아니잖아요. 이대로의 내 모습을 좋아하는 사람과 사랑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염색을 안 하니까 제일 화를 내시는 건 어머니였어요. 당신은 염색을 하셨거든요. 딸이 당신보다 나이 들어 보이니까 그러신 거지요.” 어머니에 대해 언급하셨을 때, 사제 아들을 두고 서로 당신들을 더 닮았다고 농담하시는 부모님이 생각났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아무도 닮지 않았다고 차갑게 답했던 기억. 받은 것은 많으나 작은 가시 하나가 늘 아픈 법이다. 이럴 때는 왜 엄마가 더 미웠던 것일까. “’하느님 아버지’를 부를 때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평소 따뜻한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던 밀라논나님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나는 알고 있었다. 저편에서 기억을 길어 올리는 듯한 얼굴. “제 아버지는 은행원이셔서 바쁘셨지만, 저를 사랑하셨어요. 울타리 같은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기도 중에 ‘하느님 아버지’를 말할 때 오히려 든든했지요. 저는 할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저를 보며 ‘어떤 때는 네가 얄미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맨날 못생겼다고 구박하셨고. 지금은 다들 스타일이 있다고들 하는데 그때는 그러셨거든요. 아마도 우리 할머니가 며느리에게 굉장히 엄격하셔서 시집살이를 모질게 시키신 거 같아요. 신교육을 받은 어머니는 저를 그래서 귀찮아하신 거 같고요. 게다가 어릴 때 제가 할머니를 많이 닮아서 더 그러셨나 봐요.” 밀라논나님의 솔직한 이야기를 듣다 보니, 프랑스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했던 예술가 루이스 부르주아(1911~2010)의 사진 한 장이 떠올랐다. 그의 사진에는 부드러우면서도 말없이 타인의 내면을 감싸줄 것 같은 응시가 있다. 내면의 상처를 작품에 형상화했던 예술가 루이스 부르주아. 그녀에게 있어서 어머니는 나약했고, 남편과 가정교사의 오랜 불륜을 보고도 그저 침묵으로 일관하던 인물로 그려졌다. 작가는 ‘덧없음’과 ‘안정’이라는 감정에 깊이 파고들었다. 느닷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기억의 덧없음은, 상실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이었다. 동시에 보이지 않더라도 어딘가에 존재하는 영속성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했다. 그랬다. 낳아 준 존재를 미워한다? 고맙고, 밉고, 사랑하고, 분노하고…. 우리는 가족에 대해 말하면서 ‘상처받은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도 나눴다. 친부에게 성범죄를 당한 아이들의 이야기. 밀라논나님은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가출 소녀 쉼터’에서 20여 년 동안 봉사활동 중인 이야기를 여러 차례 했다. “거기 애 중에는 아버지에게 성범죄를 당한 애들이 참 많아요. 그 아이들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할 때마다 손끝에서부터 몸서리를 치는 거 같아요.” 꽝 하고 마음의 문이 닫히는 소리. ‘이해와 용서’라는 단어가 강요될 때, 피해자는 치유되지 않은 상처들에 갇힌 채 곪아 간다. ‘엄마’라는 이름, 태어나서 처음 만난 존재이며 사랑, 사랑하면서도 아픔을 주는 관계. 중증 치매로 요양원에 계시는 나의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든든한 울타리이자 찌르는 가시관이었다. 예술가 루이스 부르주아는 그녀의 작품 전반에서 ‘엄마’라는 존재를 ‘양가감정’으로 다루었다. 즉 엄마에 대한 분노와 함께 사랑하는 존재로, 존경과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이 그의 작품에는 공존했다. 강하면서도 무기력했던 존재의 이름. 내가 오히려 엄마를 아프게 한 적이 더 많은데, 식지 않은 미움은 어찌할 것인가. 밀라논나님은 공감하듯 말을 이었다. “저의 어머니는 따뜻한 분이 아니셨잖아요. 그래도 묵주기도를 할 때면 제 마음이 따뜻해져요. 저는 엄마에게서 따뜻한 손길을 받은 기억이 없었어요. 어머니는 돈을 잘 주시고 제가 부탁한 것은 절대로 거절하지 않으셨지만, 마음에는 살가운 온기가 없던 분이셨어요. 그러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용서를 청하셨어요. 그 후로는 ‘성모님’을 부를 때마다 오히려 마음이 훈훈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내 영혼은 설명할 수 없는 기억을 향해 돌을 던지며 묻고 있었다. 그 존재를… ‘엄마’라는 이름을 다시 사랑할 수 있냐며. 글 _ 박홍철 다니엘 신부 (서울대교구 삼각지본당 주임)

발행일 2025-07-13 제3450호 13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줄리아노 다 상갈로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설계를 처음 맡은 도나토 브라만테(1444~1514)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피렌체 사람으로, 알베르티 이후 정체된 피렌체의 르네상스를 전성기로 끌어올린 건축가가 있습니다. 피렌체 초기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브루넬레스키와 알베르티의 훌륭한 계승자로 알려진 그는 줄리아노 다 상갈로(Giuliano da Sangallo, 1445~1516)입니다. 상갈로 가문은 여러 건축가를 배출했는데, 줄리아노는 그중 가장 연장자입니다.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베키오(Antonio da Sangallo il Vecchio)가 그의 동생이고,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Antonio da Sangallo il Giovane)는 그의 조카입니다. 그리고 조각가인 프란체스코 다 상갈로(Francesco da Sangallo)는 그의 아들입니다. 줄리아노는 20대 초반에 5년간 로마에 머물면서 고대 로마의 건축물을 연구하고 그림으로 남겼는데, 이 자료들은 훗날 그의 건축에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20대 중반에 피렌체로 돌아온 그는 목조 조각가로 일하다가 요새(要塞) 공사를 시작으로 건축가로 활동하였습니다. 특히 로렌초 데 메디치의 후원으로 메디치가의 전속 건축가가 되었으며, 로렌초의 의뢰로 프라토의 산타 마리아 델레 카르체리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delle Carceri a Prato, 1486~1495)을 설계하였고, 피렌체의 영토를 방어하기 위한 포조 임페리알레 요새(Fortezza di Poggio Imperiale, 1488~1511)의 설계도 맡았습니다. 이 시기에 라파엘로가 피렌체에 머물렀는데, 이때 줄리아노는 라파엘로와 교류하며 건축 분야에서 영향을 주었습니다. 1492년 로렌초의 사망과 함께 줄리아노는 밀라노에 가서 브라만테와 레오나르도를 만났고, 1495년에는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 추기경(훗날 율리오 2세 교황)의 건축물을 지으며 그의 후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1503년 율리오 2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어 그는 로마 교황청에서 일하였고, 그때 성 베드로 대성당에 대한 기획을 제안하였습니다. 그의 계획안은 브라만테에게도 영향을 미쳤는데, 나중에 브라만테에게 뒤처지면서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브라만테 사후 라파엘로와 함께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의 건축가로 활동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피렌체로 돌아와 1516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줄리아노의 작품 중에 브루넬레스키의 마지막 작품인 산토 스피리토 성당의 성구보관실(제의실)이 있습니다. 1489년 건축이 시작된 이 성구보관실은 평면이 팔각형인 점에서 피렌체 대성당의 세례당을 닮았습니다. 내부는 피에트라 세레나(회색 사암으로 토스카나 지방의 석재료)로 된 12개의 코린트식 기둥이 있고, 드럼(돔을 받치는 수직 구조물)에는 삼각형의 페디먼트와 직사각형 창문이 있으며, 돔 하부의 반원 아치 부분에는 둥근 창이 있습니다. 줄리아노는 당대의 브루넬레스키와 알베르티 그리고 브라만테로 이어지는 르네상스의 특징들 특히 중앙집중형 평면과 오더 양식을 종합하여 그의 작품에 담았습니다. 줄리아노의 대표작은 프라토의 산타 마리아 델레 카르체리 성당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1484년 어떤 병든 아이가 프라토의 한 감옥(카르체리) 벽에 그려진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그림이 살아나는 것을 보게 되었고 곧 아이의 병이 치유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그 기적에 대한 대중 신심이 커지면서, 1485년 로렌초 데 메디치는 그곳에 성당을 짓기로 결정하고 줄리아노에게 설계를 맡겼습니다. 성당의 평면은 르네상스 성당의 대표적인 형태인 그릭 크로스의 평면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줄리아노는 산타 마리아 델레 카르체리 성당을 설계하면서 특히 알베르티가 만토바에 건축한 산 세바스티아노 성당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단 알베르티의 산 세바스티아노 성당은 출입구가 한 곳이고 세 팔에 앱스가 있는 반면에, 줄리아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카르체리 성당은 제단이 있는 한 곳에만 앱스가 설계되어 있고 나머지 세 방향에 모두 출입구가 있으며, 크로싱을 중심으로 네 방향의 팔 길이가 짧습니다. 이러한 형태는 단독 출입구에서 생기는 선형성을 약화하고, 중앙 크로싱까지의 거리를 줄여서 중앙집중성을 높였습니다. 내부는 특히 브루넬레스키의 파치 경당과 산 로렌초 성당의 구 성구보관실에서 영향을 받았는데, 건물의 높이가 3층으로 확장된 것을 제외하면 두 건물과 비슷한 느낌을 줍니다. 특히 3층 부에 펜던티브(돔 하부의 곡면 삼각형 부분)가 있고 그 위에 반구형 돔이 얹혀 있는 형태가 두 성당과 매우 흡사합니다. 출입구가 있는 세 면은 외부처럼 페디먼트가 있는 신전 파사드이고 제단이 있는 앱스 쪽은 반원 아치로 되어 있습니다. 외부는 알베르티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처럼 토스카나의 로마네스크 형태에 사각형을 기본으로 하는 기하학적 장식을 취했습니다. 사각형은 흰색 대리석 둘레로 검은색 대리석의 띠가 둘러쳐 있는 형태인데, 이러한 대비는 추상적인 외관을 만들어냅니다. 외관 본체의 구성은 1층과 2층이 같은 크기로 올라가면서 육면체를 형성하고 있으며 지붕은 페디먼트로 마감되었습니다. 그 위로 12개의 오쿨루스가 있는 원통형 드럼과 돔이 있는데 브루넬레스키의 돔 지붕 형태입니다. 본체의 모서리 부분은 쌍기둥 형태의 벽기둥으로 되어 있는데, 1층은 토스카나식이고 2층은 이오니아식입니다. 산타 마리아 델레 카르체리 성당은 훗날 줄리아노가 로마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을 계획할 때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줄리아노의 성 베드로 대성당 계획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브라만테의 설계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따라서 브라만테의 성 베드로 대성당 평면이 미켈란젤로에 의해서 다시 취해진 것은 줄리아노에게도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건축의 중심이 브라만테 이후로 피렌체에서 로마로 옮겨졌다고 하지만, 그런 흐름 안에서도 줄리아노 다 상갈로는 르네상스의 뿌리가 여전히 피렌체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고, 산타 마리아 델레 카르체리 성당이 그것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07-13 제3450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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