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TH] 가톨릭관동대 ‘두둥탁 봉사단’의 사랑 나눔

취업 준비와 자기 계발, 자격증 취득 등으로 누구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는 대학생들에게 봉사와 재능 기부는 먼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하지만 전공 분야에서 쌓은 역량을 사회와 나누며 진로 실습의 기회로도 삼는 대학생들이 있다. 조리·외식 전문 지식을 살려 소외 계층에게 따뜻한 한 끼를 전하는 가톨릭관동대학교 ‘두둥탁 봉사단’은, 진로 개발과 나눔의 기쁨을 함께 실현하며 ‘공동선’의 가치를 실천하고 있다. ‘두·둥·탁’… 세 가지 맛 사랑 나눔 두둥탁 봉사단은 가톨릭관동대 조리외식경영학전공 소속 재학생들의 재능 기부 동아리다. ‘인간과 자연과 생명을 경외하고, 진실한 자세로 열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전문인을 양성한다’는 대학의 교육 이념에 따라, 전공 특성을 살린 지역사회 봉사 활동을 지속해 왔다. 두둥탁 봉사단은 세 가지 활동을 통해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취약계층 노인을 위한 ‘짜장면 나눔’ ▲지역 사회복지시설 방문 제과제빵 쿠킹클래스 ‘꿈빵’ ▲복지시설 아동·청소년들에게 특식을 전하는 ‘맛드린’이다. 2018년 시작된 짜장면 나눔은 주로 복지시설이 문을 닫는 토요일, 식사를 거르기 쉬운 홀몸 어르신과 저소득층 노인들에게 따뜻한 점심 한 끼를 제공하는 무료 급식 봉사다. 매주 토요일 강원도 강릉시 남대천교 작은쉼터 공간은 두둥탁 봉사단의 야외 주방이자 음식 나눔터로 변신한다. 봉사단은 오전 9시부터 재료 손질과 국수 반죽, 조리에 나서 정오부터 약 250인분의 짜장면을 정성껏 배식한다. 봉사 활동을 주관하는 지역 복지재단, 쉼터 공간을 리모델링해 준 강릉시, 조리 기구와 식자재 자금을 후원하는 여러 기관·단체의 도움도 있지만, 국수 반죽만큼은 두둥탁 봉사단이 스스로 마련할 만큼 성의를 들인다. 매주 목요일 열리는 꿈빵 동아리 활동은 아동·청소년과 장애인 등 복지시설 이용자들이 직접 간식을 만들어보며 즐거움과 성취감을 느끼는 제과제빵 교실이다. 봉사단원들은 강의자로서 전문성을 쌓고, 참여자들은 제과 경험을 통해 진로를 탐색하는 기회를 얻는다. 수업 후 봉사단원들은 수강생들이 직접 만든 빵과 쿠키, 케이크를 이웃과 나눠 먹을 수 있도록 예쁘게 포장해 주는 정성도 잊지 않는다. 2025년에는 초등학생들과 함께 만든 빵을 지역 홀몸노인에게 전하는 사회공헌 활동도 펼쳤다. 맛드린 동아리 활동은 외식할 기회가 드문 지역 사회복지시설 아동·청소년들에게 다양한 외식 메뉴를 대접하는 봉사다. 봉사단은 포크커틀릿, 파스타, 다코야키 등 인기 메뉴를 손수 만들어 대접하며, 아이들이 스스로 소중한 존재임을 느끼고 또래들과의 대화 속에서도 위축되지 않도록 응원한다. 봉사단원들은 이 시간을 통해 실습을 넘어, 조리와 외식 경영 전문가로서의 보람과 소명을 체험하고 있다. 정영주 책임교수는 “학생들이 배운 지식과 기술을 자신을 넘어 공동체를 위한 나눔으로 확장해 가는 모습이 매우 자랑스럽다”며 “이런 현장 경험이 인성과 전문성을 갖춘 인재로 성장하는 바탕이 되고 있다”고 밝혔다. “세상을 이롭게”…나눔을 통해 자라는 전문인 가톨릭관동대는 사회봉사 활동 교과목을 전교생 필수로 운영하고 있으며, 졸업 필수 요건에도 포함해 학생들의 봉사 참여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학생들은 이를 단순 의무가 아닌 진로 계발의 연장선이자 성취의 경험으로 받아들이며 자발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두둥탁 봉사단은 사회 환원을 강조하는 대학의 학풍과 맞물려, 학생들을 ‘공동선’의 의미를 깨닫고 몸소 실천하는 전문인으로 양성하는 데 큰 몫을 하고 있다. 학교 인근에 베이커리 카페 ‘미르펠유’를 창업해 운영하는 두둥탁 봉사단 출신 김윤재(16학번) 씨는 매장에서 판매하고 남은 빵을 꾸준히 지역 주민센터와 복지시설에 나누고 있다. 재학생 시절 꿈빵으로 키워온 이웃사랑 정신을 꾸준히 이어가는 실천 방법이다. 재고를 기부하기보다는 할인해 팔거나 재가공 또는 폐기하는 편이 사실 손해를 최대한 줄이는 방법이 아닐까. 김 씨는 “효용성도 중요하지만, 작은 재능이라도 공동체와 나누고 사회에 공헌하는 기쁨은 ‘나’ 혼자 잘사는 외로운 삶에 견줄 수 없는 소중한 가치”라고 답했다. 그는 꿈빵 활동을 하는 후배들을 위해 각종 제과 재료를 지원하거나 직접 강사로 나서기도 한다. 김형일(리카르도) 지도교수는 “직업인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회인이기에, 화합의 정신이 없이는 직업적 성공을 이룰 수도, 보람을 느낄 수도 없다”며 “두둥탁 봉사단은 학생들이 공동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이를 통해 스스로 성장의 의미를 찾도록 돕고 있다”고 전했다. 김호석 지도교수도 “작은 일도 성실하게, 때로는 손해처럼 보여도 인내하며 초심을 지키는 자세가 중요하다”며, “두둥탁 봉사단처럼 실천 중심의 인성 교육과 지역 연계를 통해 공동체와 함께 성장하는 인재 양성에 앞으로도 힘쓰겠다”고 말했다.

[인터뷰] 착좌 1주년·교구 설정 60주년 맞은 마산교구장 이성효 주교

2025년 2월 12일 마산교구 제6대 교구장으로 착좌한 이성효(리노) 주교가 착좌 1주년을 맞았다. 특히 올해는 교구 설정 60주년의 해로, 교구는 4월 18일 60주년 기념행사와 새 교구청사 축복식을 개최한다. 1월 28일 마산교구청에서 이 주교를 만나, 그간의 소회와 앞으로의 비전을 들었다. - 교구장 착좌 1주년을 축하드립니다. 개인적인 소회를 들려주신다면? 1년밖에 안 지났다는 것이 오히려 신기합니다. 지난 1년이, 지난날과 그렇게 색다르거나 낯설지 않았습니다. 이곳에 30년쯤은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함께 지내는 신부님, 직원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종종 하시고요. 그분들이 많이 도와주셔서 이렇게 잘 지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 마산교구장좌는 2년 6개월간 비어 있던 상태였기에, 착좌 후 바쁜 일정을 소화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교구 곳곳을 방문하시면서 직접 느끼신 교구의 가장 큰 장점을 말씀해 주신다면? 교구민들을 만나면서 ‘오랜 신앙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참 순수하다’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동 진교본당 삼장공소를 찾아 미사를 봉헌한 적이 있었습니다. 고령화와 신자 수 감소, 공간 유지‧관리에 공소 대부분이 어려움을 겪고 있음에도, 저와 함께한 신자들은 그저 매우 기뻐 보였습니다. 꾸준히 공소를 지켜가는 깊은 신앙심이 정말 고맙고, 묵직하게 와닿았어요. ‘이것이 우리 마산교구의 힘이구나’ 깨달았고, 그들이 자긍심을 느낄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이 제 역할임을 알게 됐습니다. - 올해는 교구 설정 60주년의 해로 더욱 뜻깊습니다. 올해 계획은? 거창한 행사를 준비하진 않았습니다. 60주년 행사를 겸해 새 교구청사 축복식을 열 예정입니다. 마산교구청사는 전국 교구 중 유일하게 교구 소유의 청사가 없던 상황에서 교구민들이 힘을 모아 2023년 완공한 것입니다. 그 의미가 남다르지만, 교구장이 없어 축복식을 하지 못했습니다. 우선 교구청사 축복식을 하고, 다음으로는 교구 규정위원회와 함께 여러 규정을 현실에 맞게 정리하며 내실을 다져갈 계획입니다. 새 교구청사 축복과 규정 정비로 내실 다지는 데 주력 ‘AI위원회 출범’…올바른 인공지능 활용 위한 지침 마련 - 60주년을 기념해 전국 교구 최초로 ‘AI 위원회’가 출범했습니다. 역할이 궁금합니다. AI 위원회는 ‘AI 리터러시’, ‘AI 문해력’을 키워보자는 취지로 설립된 것입니다. 단순히 기술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의 문제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AI가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스스로 깨닫고, ‘올바르게’ 잘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찾아보자는 것이죠. 위원들이 주일학교, 이주민사목, 교정사목 등 부문별로 AI 문해력 향상을 위한 방법들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황청 AI 연구그룹’이 발간하는 도서들을 한국어로 번역해 알리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영문으로 업로드된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주체성 회복」을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진과 전문가들과 함께 번역 중인데, 4월 18일 60주년 기념행사 당일까지 출간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AI 활용은 특히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들이 대중매체를 접할 때도 문해력이 필요한데, AI를 활용해 그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교회가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올해 5월 31일 청소년 주일에 ‘청소년 교육과 AI’를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고, 그 결과를 「청소년 교육을 위한 AI 윤리 지침서」로 발간할 예정입니다. - 오스트리아 그라츠-섹카우교구와 자매결연한 지 55주년이 됐습니다. 그라츠교구에서 사제 파견을 요청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우리 교구의 제2대 교구장 장병화(요셉) 주교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1971년 자매결연을 위해 오스트리아 그라츠교구를 직접 방문하신 장 주교님은 당시 낯선 타국에서 눈물을 흘리며 도움을 요청하셨다고 하더군요. 이후 그라츠교구의 지원으로 가톨릭문화원, 양덕동주교좌본당, 여성회관 등 초기 교구의 기반 시설들이 갖춰졌습니다. 이제 우리가 도움을 줄 차례라는 목소리가 사제단 안에서 나오고 있고, 선교 기금도 어느 정도 마련된 상황입니다. 수품 15년 차 이하 사제들을 일일이 만나 그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으며 ‘시노달리타스’를 실현해 가는 중입니다. 성령을 통해 기도하고 함께 나아가며, 구체적 내용을 결정해 갈 것입니다. - ‘가난한 이들과 함께 걸어가는 희망의 공동체’라는 제목의 2026년 사목교서를 발표하셨습니다. 향후 교구의 주요 운영 방향을 소개해 주신다면? 2025년 9월에 교구 사목평의회를 오랜만에 개최했습니다. 여러 상황과 교구장좌 공석에 의해, 2016년 이후 처음으로 열렸죠. 이 자리에서 나온 의견들을 사목교서의 뼈대로 삼았습니다. 가난한 이들이 ‘경제적 빈곤자’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AI 시대의 어린이와 청소년, 청장년과 노인, 이주민 등 모두가 여러 의미에서 ‘가난한 이들’입니다. 이들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는, ‘희망의 공동체’가 되기 위한 고민을 이어갈 것입니다. 또한 교구의 취약점 중 하나인 청년사목의 활성화에 집중할 예정입니다. 경상남도 지역은 젊은 층의 이탈이 심각한 곳입니다. 일단 대학생 사목부터 한발 한발 다가가 볼 예정입니다.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YD)는 종착점이 아니라, 한국교회 청년사목이 새롭게 도약하는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모두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 교구민들에게 당부할 말씀이 있다면?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 녹록지 않지만 서로의 손을 놓지 않고 존중하고 사랑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사랑의 일치를 이뤄 간다면 그 어떤 파고도 넘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교구 설정 60주년의 은총을 기억하며 미래를 향해 함께 나아갑시다. 저를 위해 늘 기도해 주시는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하느님의 대리자로서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가정에 주님의 무한한 평화와 축복이 가득하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발행일 2026-02-08 제3478호 11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37)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 전국 사목회의

“복음화 3세기의 좌표 설정- 복음화 3세기를 향한 한국 천주교회의 새로운 사목지침이 마련됐다. 한국 천주교회 2백주년 기념 사목회의 위원회는 11월 30일과 12월 1일 서울 가톨릭의대 강당 마리아홀에서 사목회의 총회를 속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의안 등 모두 12개 사목회의 의안을 확정, 통과시키고 4년 여에 걸쳐 추진되어 온 사목회의의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 한국교회 사상 처음으로 개최한다는 점에서 교회는 물론 교회 밖의 이목을 집중시킨 사목회의 의안들은 각 의제마다 과거 및 현재를 엄격히 분석, 반성하는 것으로 출발하고 있으며, 아울러 이를 개선하고 보다 나은 내일을 설계하는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는 점에서 3백년대를 향한 사목지침서로 손색이 없다는 평을 듣고 있다.”(가톨릭신문 1984년 12월 9일자 1면 중에서) 한국교회 사상 첫 전국 사목회의 개최 1984년은 한국교회 역사에 있어 신학적이고 사목적으로 거대한 전환을 이룬 시기였습니다. 선교 200주년을 기념해 개최된 ‘전국 사목회의’는 한국교회가 복음을 받아들인 지 200년 만에 처음으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한자리에 모여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설계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방한과 103위 순교자 시성식이 한국교회의 성장을 전 세계에 알린 축제의 장이었다면, 사목회의는 내실을 다지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한국적 토양 위에 육화시키려 했던 자기 쇄신의 노력이었습니다. 시대적 징표와 교회의 과제 전국 사목회의는 교회의 내적 성숙을 향한 열망과 외적 사회 상황에 대한 예언자적 응답이라는 두 가지 축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 둘은 ‘세상 속의 교회’라는 공의회의 가르침 안에서 긴밀하게 상호작용을 했습니다. 첫째, 사목회의는 ‘한국판 제2차 바티칸공의회’였습니다. 공의회는 교회를 ‘하느님 백성’으로 선언하고 세상과의 대화와 협력을 강조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전후 복구와 교세 확장에 주력하느라 공의회 정신을 연구하고 체화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1984년 선교 200주년은 공의회 정신을 한국적 상황에 맞게 구현하는 기회였습니다. 둘째, 사목회의는 ‘민족과 사회에 열린 자세’를 핵심 기조로 설정했습니다. 1980년대 초반 한국 사회는 정치적 격변과 사회적 모순이 극에 달했습니다. 10·26 사태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신군부의 집권은 한국 사회에 깊은 트라우마와 민주화에 대한 갈망을 동시에 심어주었습니다. 산업화 과정에서 발생한 빈부 격차, 노동 문제, 인권 유린은 교회가 성당 울타리 안에만 머물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교회는 공의회가 천명한, 세상 사람들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삼아야 한다는 가르침에 대해 응답해야 했습니다. 셋째, 양적 팽창에 대한 반성과 질적 성숙의 요구에 주목했습니다. 1970년대 이후 고속 성장으로 인한 기복 신앙의 만연, 중산층화, 대형 본당의 익명성, 성직자 중심주의에 대해 성찰하고 쇄신의 요구에 부응해야 했습니다. 진행 과정과 12개 의안 사목회의는 일회성 행사가 아니었습니다. 1980년부터 4년에 걸친 준비 자체가 한국교회 전체를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학교였습니다. ‘가정 성화의 해’부터 ‘교구 공동체의 해’까지 이어진 연도별 사목 지표는 쇄신을 가정과 본당의 밑바닥에서부터 끌어올리려는 전략이었습니다. 의안 작성 과정에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전문가 등 700여 명이 참여했습니다. 전국 교구와 단체에서 접수된 313개의 제안을 바탕으로 총 12개 영역의 의안이 마련됐습니다. 각 의안은 철저한 사회과학적 조사와 신학적 성찰을 거쳤으며, 본문 외에 구체적인 제안 사항을 첨부하여 실천력을 담보하고자 했습니다. 특히 평신도와 여성의 참여 확대, 기혼자 종신 부제직 도입, 평신도 연구기관 및 사회교리연구소 설치, 전례의 과감한 토착화 등은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이고 구체적인 미래 사목의 대안들이었습니다. 역사적 성과 200주년 사목회의는 제삼천년기 미래 교회의 지향점을 모색한 것에서 역사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1980년대의 시대적 조건 속에서 2000년대 교회를 내다본 예언자적 청사진을 제시했습니다. 첫째, 미래 사목의 이정표를 제시했습니다. 여성의 참여 확대, 사회교리의 중요성 강조, 소공동체 운동, 청소년사목의 전문화, 사제들의 재교육 등은 이후 30년 넘게 한국교회가 추구해 온 사목 정책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둘째, 주체적 신학을 수립하는 첫걸음이었습니다. 단순히 서구 신학의 소비자가 아니라, 한국적 상황에서 신학을 생산하는 주체로 서게 됩니다. ‘민중 속의 교회’, ‘겨레와 함께하는 교회’, ‘전례의 토착화’ 등의 의제는 보편교회의 가르침을 한국의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서 재해석하려는 주체적 노력의 산물이었습니다. 셋째, ‘시노달리타스’의 원형적 체험의 장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끌고 레오 14세 교황이 이어받은 시노드 교회의 여정이, 이미 1984년 한국교회에서 놀랍게도 선구적으로 실현됐습니다 미완의 여정과 남겨진 과제 그러나 이러한 빛나는 성취에도 불구하고, 실행 과정과 후대 평가는 ‘미완의 과제’ 혹은 ‘절반의 성공’이라는 비판적 시각이 공존합니다. 가장 큰 아쉬움은 12개 의안이 정식 법규나 지침서로 공포되지 못하고, 단순한 참고 자료로 남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당시 주교회의는 의안의 급진성과 이상적인 내용을 우려하여 “실천 가능한 것부터 선별적으로 수렴한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로 인해 의안 전체의 유기적 통일성과 개혁적 활력이 훼손되었고, 평신도 종신 부제직이나 주교 선출 시 평신도 참여와 같은 획기적인 제안들은 사장되거나 장기 과제로 유보되었습니다. 공식적인 <한국천주교 사목지침서>가 10년이 지난 1995년에야 발간되면서 사목회의의 열기는 식어버렸고, 사회교리연구소 설치 등 구체적인 제도의 안착도 지연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목회의의 영향력은 면면히 이어졌습니다. 1990년대 이후 활성화된 우리말 미사 경본 개정, 가톨릭 성가 개편, 상장 예식의 정착 등은 전례 의안의 결실이며, 2000년대 각 교구 시노드의 활성화 역시 1984년의 경험을 토대로 합니다. 비록 1984년의 제안들이 온전히 제도화되지는 못했지만, 성직자 독점을 넘어선 평신도의 실질적 참여, 교회 울타리를 넘어선 사회적 연대 그리고 형식주의를 탈피한 토착화의 정신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완수해야 할 시노달리타스의 과제로 여전히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발행일 2026-02-08 제3478호 8면

[가톨릭 쉼터] 교회사 속 ‘커피’ 이야기

한국인은 한 해 평균 416잔의 커피를 마신다. 이는 세계 평균 150잔의 약 2.8배에 달하는 수치다(2024년 유로모니터 기준). 이처럼 커피는 한국인의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이 커피에도 교회와 얽힌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 교회사 속 커피 이야기를 만나 보자. ‘악마의 음료’, 축복을 받다? 커피라고 하면 이탈리아, 프랑스처럼 그리스도교 문화가 깊이 자리 잡은 나라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커피가 유럽에 전해진 16세기 무렵, 유럽의 신자들 사이에서 커피는 ‘악마의 음료’로 불릴 만큼 거부감을 주는 음료였다. 당시 커피를 즐기던 이들은 중동의 이슬람 문화권 사람들이었다. 오스만제국은 동로마제국을 무너뜨리고 유럽과 지중해로 진출해 신성로마제국의 수도 빈까지 침공하는 등 잦은 전쟁을 벌였다. 유럽인들에게 커피는 이교도이자 적국의 음료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 ‘악마의 음료’가 그리스도교 문화권으로 확산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전해지는 인물이 바로 클레멘스 8세 교황(1535~1605)이다. 당시 신자들은 교황에게 커피를 금지해 달라고 청원했고, 교황은 커피가 유해한지 확인하기 위해 직접 마셔보았다. 그는 커피를 맛본 뒤 금지는커녕 오히려 그 풍미를 극찬하며, 커피에 축복을 내렸다고 한다. 그렇게 커피는 교황의 손을 거쳐 악마의 음료가 아닌 축복받은 음료가 되었다. 교회와 커피에 관한 이야기에서 카푸친 작은형제회 복자 마르코 아비아노(Marco d’Aviano, 1631~1699)도 빼놓을 수 없다. 이탈리아 북부 아비아노 출신인 그는 오히려 오스트리아 빈에서 더 크게 존경받는 인물이다. 1693년 오스만제국이 두 달 동안 빈을 포위했을 때, 빈을 지켜낸 결정적인 역할을 그가 해냈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 각국의 군주들은 내분과 경쟁으로 연합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복자는 설득과 설교로 그들을 하나로 모아 ‘신성 연맹’을 결성할 수 있도록 했다. 그의 설교와 기도는 연합군의 사기를 높였고, 결국 오스만제국군을 물리치며 빈을 지켜낼 수 있었다. 당시 전장에서 오스만군이 남기고 간 진한 커피에 복자가 따뜻한 우유와 꿀을 섞어 마셨고, 이것이 오늘날 ‘카푸치노’의 기원이 됐다고 전해진다. 카푸치노라는 이름은 그가 속한 수도회 카푸친에서 비롯됐다. 물론 이는 역사라기보다는 전승이나 전설에 가까운 이야기다. 그러나 중동에서 유입된 커피에 처음엔 거부감을 가졌던 교회가 점차 커피와 가까워지게 된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일화들이기도 하다. ‘복음은 커피를 타고’ 커피는 이슬람 문화권에서 그리스도교 문화권으로 전해졌을 뿐 아니라, 이후 그리스도교 복음 선포의 여정에도 함께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오늘날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콜롬비아 커피다. 콜롬비아 커피에 관한 최초의 언급은 18세기 예수회 소속 호세 구미야 신부가 남긴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선교지의 자연환경과 주민들의 생계를 고려하며 커피 재배를 시험했고, 이 작물이 현지에서 잘 자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후 본격적인 커피 재배도 교회의 복음화와 함께 확산되었다. 특히 19세기, 살라사르 데 라스 팔마스본당에서 사목하던 로메로 신부는 ‘커피나무 심기’를 고해성사 보속으로 줄 정도로 재배를 적극 권장했다. 이후 커피는 곧 신자들의 생계를 돕는 중요한 작물이 되었고, 이 지역은 콜롬비아 커피 재배의 요람이 됐다. 우리나라에 커피가 전래된 가장 이른 기록 또한 교회에서 찾을 수 있다. 1860년 3월 6일, 성 베르뇌 주교는 리브와 신부에게 선교에 필요한 물품 목록을 요청하며 그중 하나로 커피 40리브르(약 18.14kg)를 포함시켰다. 이듬해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를 통해 커피를 전달받은 그는, 편지를 통해 “커피 덕분에 여름을 예전보다 훨씬 잘 보낼 수 있었다”며 감사 인사를 전하기도 했다. 베르뇌 주교는 이후에도 1861년, 1863년, 1865년에 걸쳐 커피를 지속적으로 청했고, 누적량은 약 130kg에 달한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커피 한 잔을 내리는 데 약 4g을 사용했다는 기록을 감안하면, 총 3만2500잔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커피의 희소성으로 인해 두세 번씩 우려 마셨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결코 혼자 마시기는 어려운 양이었다. 이러한 점을 보면, 베르뇌 주교가 커피를 단순한 기호품이 아니라 선교의 일환으로 활용했을 가능성도 짐작해볼 수 있다. 신자들과 둘러앉아 커피향을 음미하는 목자의 모습도 결코 허황된 상상은 아니다. 흥미롭게도 고종 황제가 커피를 즐기기 시작한 것은 이보다 약 30년 뒤다. 조선교회 신자들은 이미 그 이전에 베르뇌 주교와 함께 커피를 마시고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보다 전,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에서 교육을 받은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와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 역시 커피를 접했을 가능성이 크다. 혹독한 박해 속에서 복음을 전하던 그 선교 현장에도, 은은한 커피 향이 함께하고 있었던 것이다.

발행일 2026-02-08 제3478호 12면

[세계 병자의 날 특집] 요셉의원, 의료 사각지대 환자 찾아가는 ‘사회적 처방’ 눈길

세계 병자의 날(2월 11일)은 병자들을 향한 사회의 관심을 환기하고,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그들을 돕는 의료인과 봉사자의 사명을 되새기는 날이다. 특별히 오늘날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병자들이 있다. 바로 미등록 이주민, 생계형 건강보험료 장기 체납자, 기초생활수급 대상에서 제외된 의료 사각지대의 이웃들이다. 그들의 절박한 현실을 진단하고, 쪽방촌 한복판에서 의료·정서·복지·법률 지원을 아우르는 ‘사회적 처방’을 펼치는 요셉나눔재단 요셉의원의 활동을 통해, 병자에게 진정 필요한 ‘곁에 있음’의 의미를 새겨본다. 의료 사각지대의 절박한 현실 세계보건기구(WHO) 헌장은 모든 인간이 경제·사회적 조건을 불문하고 어떤 차별도 없이 최고 수준의 건강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명시한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에는 그 기본권에서조차 배제된 이들이 존재한다.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한국에 체류 중인 미등록 이주민은 약 50만 명. 이들은 공적 의료 체계 밖에 놓여, 사고나 중증 질환이 생겨도 사실상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한다. 긴급복지지원법 역시 한국 국적자와 등록 이주민만을 대상으로 한다. 건강보험 제도 안에서도 사각지대는 존재한다. 2025년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에 따르면, 보험료를 낼 여력이 없어 급여가 제한된 생계형 장기 체납 세대는 6만6000세대 이상이다. 제도는 모든 국민을 포괄하고 있지만, 실상은 경제적 빈곤이 의료 복지로부터의 단절로 이어지고 있다. 또한, 보험은 주민등록 주소지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고정된 거주지를 갖지 못한 이들 역시 복지망 밖으로 밀려난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제3차 기초생활보장 종합계획(2024~2026)’은 의료급여 사각지대에 놓인 인구를 약 5만 명으로 추산한다. 가족과 단절된 채 살아가고 있음에도, 법적으로는 ‘부양의무자’가 있다는 이유로 지원 대상에서 제외된 이들로 비급여 진료비를 감당하지 못한 채, 제대로 된 진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들 중 다수는 쪽방촌에 거주하고 있고, 이로 인해 이곳의 의료 공백은 심각한 상황이다. 국가인권위원회와 서울시 조사에 따르면, 쪽방촌 주민 10명 중 2명은 병원을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며, 응답자의 약 40%는 생계난으로 인해 한 달 의료비 지출이 전무하다고 답했다. 절박한 ‘이웃’에게 그들이 간구하는 ‘사랑’을 요셉의원은 1987년 개원 이래 서울 신림동과 영등포동, 동자동 등에서 무료 자선 의료를 이어오고 있다. 요셉의원의 이웃들은 단순히 병만을 앓고 있지 않다. 치료 시기를 놓쳐 병이 악화된 이들은 물론, 고립과 은둔 속에 지낸 정신질환자, 트라우마를 겪는 이들도 많다. 때로는 외부 방문자가 정신적 외상을 고려하지 않은 채 접근해 2차 피해를 주는 사례도 있었다. 무연고자들의 고독사는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다. 이들이 겪는 고통은 단순한 의료 문제를 넘어선다. 사회적 안전망으로부터의 소외, 생활 기반의 붕괴, 심리적·정신적 고립까지 겹쳐진 복합적인 문제다. 그래서 단순한 치료를 넘어 통합적인 돌봄, 근본적인 회복을 위한 동반과 종합적 지원이 절실하다. 요셉의원은 이러한 필요에 응답하며, 거동이 불편하거나 중병·장애를 앓는 환자들을 위한 ‘방문 진료’ 사업을 꾸준히 펼쳐왔다. 2025년 7월 서울역 인근 동자동으로 병원을 이전한 후에는 별도 조직인 ‘요셉이웃사랑센터’ 조직을 꾸려, 방문 진료를 한층 더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센터 방문진료팀은 평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서울 돈의동·동자동·후암동 쪽방촌, 서부역 텐트촌 등지를 찾아 환자들을 직접 만난다. 진료와 처방, 복약 지도, 필요시 병원으로의 전원까지 이어지는 전 과정을 현장에서 수행한다. 사업의 핵심은 의료·정서·복지·법적 지원을 종합 제공하는 ‘사회적 처방’에 있다. 재단 사무총장 홍근표(바오로) 신부는 “그 누구도 생명의 소중함에 있어 차별적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교회 정신과 설립자 고(故) 선우경식(요셉) 병원장의 뜻에 따라 좀 더 전문화한 돌봄에 나설 계획”이라며 “정신건강전문요원, 심리상담과 알코올 중독 전문가, 트라우마 전문가 등 분야별 전문가들의 자원봉사 참여를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요셉이웃사랑센터는 의료 사각지대 환자들과의 현장성 있는 동반을 위해 2월 중 동자동 쪽방촌 내 건물로 입주해 정식 출범할 예정이다. ※봉사 문의 02-2637-7258 요셉의원 후원 담당자 ※후원계좌 우리 1005-604-557810 요셉나눔재단법인

발행일 2026-02-08 제3478호 10면

[세계 병자의 날 특집] 10년 넘게 병원 봉사한 유병상·유현재 부자

“너무 아프고 힘들어 봉사를 그만두려던 날, 가톨릭성가 <형제에게 베푼 것>의 가사가 떠올랐어요. ‘지금 아니면 언제 주님을 위해 봉사할 수 있을까’ 생각했고, 그날 이후로 더 기쁘게, 더 열심히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유병상(안드레아·서울대교구 종암동본당)·유현재(니콜라오) 씨 부자(父子)는 성가소비녀회가 운영하는 무료 병원인 성가복지병원에서 10년 넘게 봉사를 이어오고 있다. 매주 주일 아침, 진료 시작 전 조용한 병원에 가장 먼저 도착해 2층 진료실 전체를 청소한다. 현재 씨는 중학생 때부터 봉사를 시작해 이제는 어엿한 사회인이 됐다. 어떻게 봉사를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버지는 “아들이 먼저 하자고 했다”고 기억하고, 아들은 “아버지가 먼저 데려갔다”고 말하며 함께 미소를 짓는다. 누가 먼저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둘 다 이 시간을 “하느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이라 여긴다. 매주 봉사는 한 시간 남짓,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자원봉사에 나서본 사람이면 공감하는 이야기가 있다. ‘꼭 중요한 일과 겹치고, 유독 빨리 돌아오는 시간.’ 유병상 씨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봉사 일정을 위해 업무 일정을 미리 조정하고, 개인 일정도 철저히 피해서 잡는다. 주일학교 교감으로 활동하는 현재 씨 역시 “캠프 등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절대 빠지지 않는다”며, “전날은 무조건 자정 전에 귀가해 몸을 챙겨야 봉사를 제대로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부자는 청소 봉사 이전에는 병원 식당에서 배식과 설거지를 맡았다. 그때 환자들을 더 가까이서 만날 수 있었다. 당시 중학생이던 현재 씨가 반찬을 담아드릴 때, 자신을 향해 “감사합니다”라며 존댓말을 건네던 환자들. 그는 그 짧은 순간을 통해 ‘내가 이분들에게 정말 도움이 되는구나’ 하는 실감했다. 유병상 씨는 아들과 함께 봉사하기 훨씬 전 레지오 마리애 활동과 연계해 병원에서 봉사를 시작했다. 목욕 봉사, 병실 청소 등을 하며 환자들을 직접 돌보던 시간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평소에는 접할 수 없었던 중환자실 환자들도 보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우리도 언젠가 환자분들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 될 수 있겠지요. 그렇기에 이 작은 봉사가 누군가에겐 큰 힘이 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부자가 긴 시간, 봉사를 할 수 있었던 데는 병원의 수도자들 그리고 함께하는 봉사자들의 격려가 큰 힘이었다. 더불어 이 시간이 현재 씨에게는 성숙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봉사자들 모임은 늘 배려와 격려가 가득해요. 함께하는 분위기 속에서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어요. 학창 시절은 물론이고, 사회인이 된 지금까지도 그 마음이 저를 지탱해 주는 힘이에요.” 누가 먼저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매주, 한결같이 그 길을,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며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이다.

발행일 2026-02-08 제3478호 10면

[함께 살기, 다시 쓰는 가족] 자녀를 위한 기도 “세상 한 가운데에서도 길을 잃지 않게”

「가톨릭 기도서」의 ‘자녀를 위한 기도’ 후반부는 아이의 삶이 놓이게 될 세상을 바라보게 합니다. “세상 부패에 물들지 않게 하시며.”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저는 세상이 아이를 위협하는 공간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아이를 세상으로부터 떼어 놓아 달라는 요청처럼 들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이 기도의 의미가 제 걱정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기도는 아이를 세상에서 빼내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서 길을 잃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에 가깝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부패’는 노골적인 악의 얼굴로만 다가오지 않습니다. 더 자주, 아무 생각 없이 흘러가는 삶의 형태로 다가옵니다. 비교하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분위기, 질문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길 말입니다. 아이들이 물드는 것은 악 그 자체보다, 이런 무감각과 체념일지도 모릅니다. 기도는 이어서 말합니다. “온갖 악의 유혹을 물리치고.” 유혹은 대개 위험한 제안의 모습으로 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속삭입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해?”, “다들 그렇게 살아.” 이런 말들은 현실적인 조언처럼 들리기에 더 위험합니다. 아이들이 맞닥뜨리는 유혹은 나쁜 선택을 하라는 권유가 아니라,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길로 내미는 손길일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마침내 깨닫게 됩니다. 아이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보호막이 아니라, 분별의 힘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대신 판단해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멈추고 묻고 다시 선택할 수 있는 힘 말입니다. 기도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청합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주님의 뜻을 이루는 일꾼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을 본받는다는 말은 자칫 착하게 살라는 도덕적 권고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만나는 예수님은 늘 질문하는 분이셨습니다. 당연하게 여겨지던 사회 질서에 질문을 던지셨고, 힘의 중심보다 주변부에 서 계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모범생이 되는 일이 아니라, 자기 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일에 더 가깝습니다. 이렇게 보면, 자녀를 위한 기도의 후반부는 아이를 약한 존재로 바라보는 기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아이는 세상을 살아갈 힘이 필요하다고, 다르게 살아갈 용기가 필요하다고 고백하는 기도입니다. 이 지점에서 가족의 역할도 다시 보입니다. 가족은 꿈을 대신 이루어 주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꿈을 포기하지 않도록 곁에 남아 주는 사람들입니다. 아이가 세상 속에서 흔들릴 때, “다 그렇게 사는 거야”라고 말하는 대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질문해도 괜찮아”라고 말해 줄 수 있는 자리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는 서로를 꿈꾸게 하는 가족이라고 말입니다. 꿈을 대신 살아 주지는 않지만, 꿈을 포기하지 않도록 함께 살아 주는 가족입니다. 세상 한가운데서도 자기 길을 잃지 않도록, 서로의 곁에 머무는 사람들입니다. 자녀를 위한 기도의 후반부는, 아이를 세상에서 빼내 달라는 기도라기보다, 세상 한가운데서도 자기 삶을 지켜 내며 살아가게 해 달라는 기도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글 _ 유형선 아우구스티노(가족인문학연구소 공동운영자)

발행일 2026-02-08 제3478호 16면

[성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따라] 성 다미아노 성당, 충만한 시간의 완성

불타는 떨기 한가운데에 당신 모습을 모세에게 드러내시며 거룩한 땅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성스러운 장소는 하느님께서 당신 신비를 드러내신 곳입니다. 이 신비를 아시시 성 밖 한적한 곳에 있는 성 다미아노 성당의 십자가를 통해 성 프란치스코에게 보여주셨고, 현재는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클라라의 삶을 통해 당신 현존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시리아의 의사이며 순교자인 다미아노 성인에게 봉헌된 성 다미아노 성당은 8~9세기 사이에 처음 지어졌고 1030년까지 베네딕토 수도원의 중요한 경당으로 사용되다가 점차 부서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성당 안에 있는 이콘형 십자가는 12세기 익명의 화가가 제작했는데, 성당의 이름을 따 ‘다미아노 십자가’로 불립니다. 성녀 클라라 선종 이후 베네딕토 수도원이 1257년 성 다미아노 성당에서 클라라 대성당으로 이전하면서 이 십자가도 함께 옮겨졌기 때문에 현재 성 다미아노 성당에 있는 십자가는 모조품입니다. 그리스어에서 유래하는 이콘이라는 말은 ‘비친 상’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거울 앞에 서 있을 때,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바로 이콘인 것입니다. 초기교회 시절, 눈으로 볼 수 없는 초월적인 대상을 그림으로 그린다거나 형상으로 만드는 것은 교리적으로 우상숭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동방교회에서 시작된 이콘의 주제는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 그리고 넓게는 사도들까지만 가능했고, 이콘을 그리는 것도 전문적인 화가가 아니라 영성이 뛰어난 수도자만이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가 중요한 일을 앞두고 항상 단식과 기도를 먼저 하신 것처럼, 수도자는 이콘을 그리기 전 단식기도와 회개를 하고, 지도 사제로부터 신학 교육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대상을 그리려 했던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비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밖으로 드러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콘은 내가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라 이콘에 그려진 분이 나를 바라보는 것이고, 이런 이유로 이콘 속 가장 중요한 분은 가장 크고 그다음으로 중요한 분은 조금 더 작고, 이콘을 바라보는 우리는 이콘 속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콘 속 예수님의 시각으로 평면은 공간으로 확장되고, 우리 또한 그 안에 함께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가 기도한 다미아노 십자가가 우리의 시간을 초월하여 지금 내 앞에서도 뭔가를 말씀하실 것만 같이 보이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콘 앞에서 우리는 기도하지만 유명한 화가들이 그린 성화 앞에서는 그림에 대한 감상만 하게 됩니다. 다미아노 십자가에서 무엇보다 먼저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비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지만, 죽음의 슬픔과 고통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시는 기쁨의 순간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에서는 고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두 눈을 크게 뜨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보내신 성부의 뜻을 이해하시고 모두 이루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 머리는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예수님 머리 뒤의 후광이 증명하듯 밝게 빛나고 있고, 예수님 주위의 사람들이나 천사들에게서도 어떤 슬픔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십자가의 신비를 이해하고 있다는 듯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예수님 팔 아래 다섯 사람은 예수님의 모습보다 작지만 십자가에 그려진 다른 사람들보다는 크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직접 본 증인임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왼쪽 두 명은 성모 마리아와 성 요한 사도 그리고 오른쪽 세 사람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작은 야고보의 어머니인 클레오파의 마리아 그리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라고 고백한 백인대장입니다. 백인대장의 이 한마디는 예수님은 죽은 것이 아니라 아직도 살아 계신다는 증언입니다. 성모 마리아 아래 작은 모습으로 그려진 사람은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던 로마 병사이자 순교자인 성 론지노입니다. 백인대장 아래 작은 모습의 사람 역시 로마 병사로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으로 예수님의 입을 적셔드렸던 성 스테파톤입니다. 발아래에는 여섯 명이 사람이 서 있고 덜 훼손된 두 명의 사람에게서는 후광도 보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여섯 명은 움브리아 지방의 수호성인으로 성 요한 사도, 성 미카엘, 성 루피노, 성 요한 세례자,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양 팔의 끝에 있는 여섯 명의 천사도 슬퍼하는 모습보다는 놀랍고 영광스러운 광경을 서로 이야기하며,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 모두를 ‘살아 계시며 양팔을 벌려 모든 사람을 맞이하시는’ 예수님에게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머리 위에는 죄명판 ‘유다인의 왕 나자렛 예수’라는 말이 라틴어로 적혀있고 그 위로 황금색 옷을 입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고 계십니다. 열 명의 천사가 예수님을 반갑게 맞이하고, 하늘나라에 오르시는 예수님은 손을 들어 인사하시는 것처럼 밝은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머리 위로는 두 손가락을 펴고 올라오는 성자를 축복하며 맞으시는 성부이신 하느님의 오른손이 보입니다. 다미아노 십자가의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수동적인 모습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두 팔과 손을 벌려 우리 모두를 하늘나라로 데려가기 위해 세상 끝 날까지 기다리시는 살아 계신 예수님이십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이 십자가 앞에서 멀리 계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 곁에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본 것입니다. 글 _ 이관술 요한 마리아 비안네(성지순례 가이드)

발행일 2026-02-08 제3478호 13면

청주교구 생태위·에코나우,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생태환경 실천 업무협약(MOU)’

청주교구 생태환경위원회(이하 생태위)는 1월 30일 교구청 직장사목부 사무실에서 환경단체 에코나우와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생태환경 실천 업무협약(MOU)’을 맺고, 기후위기에 함께 대응할 것을 약속했다. 이번 협약은 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찬미받으소서」 정신을 바탕으로 신앙 안에서 생태적 삶을 실천하고자, 본당 중심의 생태환경 활동과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촉진하기 위해 마련됐다. 양측은 협약을 토대로 교구 내 공동체를 대상으로 생태환경 교육을 열고, 성당 건물에 태양광 발전설비 등 재생에너지 전환을 위한 기반을 조성해 나갈 계획이다. 이를 위해 ▲사제·교리교사·신자 대상 생태환경 교육을 통한 실천 확산 ▲기후 행동을 위한 에너지·탄소중립 관련 교육과 캠페인 협력 ▲재생에너지 수용성 확대·기반 시설 설치를 위한 교육과 캠페인 협력 등을 준비한다. 생태위는 협약의 첫 사업으로 ‘꿈(CUM) 에코’ 프로그램에 참여할 본당과 신자 활동가를 모집한다. 선정 본당에는 재생에너지 전환을 위한 교육과 컨설팅, 신자 활동가에게는 본당 생태환경 활동을 주도할 ‘에코리더(Eco Leader)’ 양성 과정을 제공한다. 생태위 위원장 김태원(요셉) 신부는 “기후위기 시대에 교회는 창조 질서 보전이라는 본연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며 “에코나우와의 협력으로 신자들이 생명의 가치를 일상 속 환경 실천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에코나우 하지원(레지나) 대표는 “이번 협약은 종교계가 환경 위기 대응에 적극 참여하는 중요한 계기”라며 “신앙 공동체의 강력한 연대와 실천력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 전체에 생태 전환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생태위는 「찬미받으소서」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교구 본당을 중심으로 다양한 생태환경 보전 활동, 교육, 캠페인 등을 펼치고 있다. 2009년 4월 22일 지구의 날에 설립된 에코나우는 ‘대한민국에 환경의 가치를 심다’라는 비전 아래 운영되고 있다. 주교회의 생태위와 함께 환경보호를 위한 주일학교 교리교재 「지구를 위해 “하다”」를 개발하고 보급했으며, 교회와의 생태환경 협력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국내 환경단체 중 유일한 유엔환경계획(UNEP) 공식 파트너 기관인 에코나우는 실천 중심의 교육과 캠페인으로 약 33만4000여 명의 에코리더를 육성해 왔다. 또한 국내 환경 비정부기구(NGO) 최초로 공공도서관 서초구립 방배숲환경도서관을 위탁 운영하며 ‘에코라이프’ 문화를 일상으로 확산하고 있다.

입력일 2026-02-04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36) 북한 동포에 특별메시지

“북한 형제들과 손잡고 미사 할 수 있길 - 2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위원장 겸 북한선교부 담당 김남수(안젤로) 주교는 6·25를 맞아 북한 동포들에게 전하는 특별 메시지를 발표, ‘북한의 형제들에게 하루속히 종교의 자유가 주어지도록, 또한 우리 모두 서로 손잡고 기쁨과 감격의 눈물로 한 우리의 한 양 떼가 되어 함께 감사의 미사를 드리게 될 때까지, 우리는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라도 여러분을 위한 일이라면 주저하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천명했다.”(가톨릭신문 1983년 6월 26일자 1면)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북한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한국교회 창립 200주년(1984) 기념사업을 준비하면서부터입니다. 주교단은 지난 200년 동안 한국교회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서 ‘교회 쇄신과 민족 복음화’를 200주년 이후 교회가 나아갈 가장 중요한 여정으로 제시하고 북한 선교 사업을 공식화했습니다. 여기에는 특별히 1984년 방한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영향도 컸습니다. 공산권 국가인 폴란드 출신이었던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한국을 방문하기 전부터 민족적 비극인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한국민들에 대해 깊은 안타까움을 가졌고, 북한 지역의 교회 상황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사실 당시 한국교회는 북한교회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주교단은 이러한 현실을 깨닫고 새삼 깊은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주교회의는 1982년 12월 12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안에 ‘북한선교부’를 공식 설치하고 김남수 주교를 담당 주교로 선출했습니다. 이듬해인 1983년 6월 10일에는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 행사를 개최하고, 6월 25일에는 담당 주교가 북한 동포에게 전하는 특별 메시지 ‘주께서 함께 계시다’를 발표했습니다. 이는 남북한의 모든 형제가 함께 감사의 미사를 드리는 날이 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북한 동포와 함께 교회 창립 200주년을 기념해야 6월 26일자 가톨릭신문은 이 역사적인 메시지 전문을 4면에 게재하고, 1면에서는 주요 내용을 바탕으로 분단의 아픔을 토로하며 다시금 한 형제로 일치하고자 하는 각오를 전했습니다. “북한선교부가 6·25를 앞두고 침묵의 북한교회 형제들을 위해 마련한 특별기도회에 즈음하여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하십니다’라는 제목의 메시지를 발표한 김남수 주교는, ‘같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같은 말을 하고 사는 한 형제자매인 우리가 조국 분단의 비극으로 잔혹한 비인간적 이별의 아픔을 겪고 있으며 특히 북한 동포들은 최고의 권리 박탈인 종교의 자유마저 잃고 있다’고 전제하고 ‘우리는 동고동락하려는 마음의 자세와 어떤 희생이라도 바치려는 결의로 북한의 형제들과 모든 운명을 함께하려 하고 있다’고 역설했다.” 특히 김 주교는 1984년 개최 예정인 200주년 행사가 “결코 북한 동포 여러분을 소외시킨 가운데 진행될 수 없다”며 “주어진 조건 안에서 여러분과 함께 200주년을 기념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후 1984년 11월 26일 ‘북한선교부’는 2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의 해체에 따라 주교회의 직속 기구로 개편되었고, 1985년 2월 16일 담당 주교에 이동호(플라치도) 아빠스가 임명됐습니다. 그해 6월 23일에는 북한선교후원회가 창립되고, 10월 13일자로 명칭이 ‘북한선교위원회’로 바뀝니다. 이후 북한선교위원회는 기도 운동을 중심으로 북한 선교 문제에 매진하게 됩니다. 반공과 멸공의 이데올로기 이처럼 한국교회가 1980년대에 접어들며 창립 200주년에 즈음해 북한 동포와의 형제애를 강조하고 관심을 표명했지만, 사실 교회는 너무나 오랫동안 북한을 타도의 대상으로만 여겼습니다. 공산주의와 유물론은 악마의 세력이었기에 북한은 동포이기 이전에 전쟁을 통해 말살해야 할 대상이라는 반공과 멸공의 이데올로기에 교회는 오랫동안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는 수십 년간 가톨릭신문의 지면에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6·25전쟁은 “양을 가장한 이리의 아편에 중독된 동족 아닌 동족이 가능한 온갖 악마적 방법을 다하여 빚어낸 참극”(천주교회보, 1951년 1월 14일자)으로 간주됐고, 따라서 “동족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때는 이미 지났다”(천주교회보, 1950년 11월 10일자)고 여겨졌습니다. 심지어 전쟁의 참상과 분단의 아픔에도 아랑곳없이, 공산주의자들의 말살을 위해서 전쟁은 계속돼야 한다며 “우리의 싸움은... 공산주의 지배 세력이 지구상에서 말살되는 날까지 계속돼야 한다”고 ‘장기전을 결의’하기까지 했습니다.(천주교회보, 1952년 6월 25일자) 분단의 비극을 겪으면서도 교회는 “칼을 쳐서 보습을,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이사 2,4 참조)는 평화의 의지보다는, 여전히 반공과 무력 통일 의지의 강화를 결론으로 얻은 듯했습니다. 전후 한국교회는 북한 지역 교회를 ‘침묵의 교회’로 불렀습니다. 북한 지역에서 사목 활동을 하는 성직자가 없었기 때문에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침묵에 빠진 북한 지역 신앙인들의 해방과 회복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때의 통일관은 북한 정권이 무너지고 종교의 자유가 회복되는 ‘흡수 통일’에 가까웠습니다. 통일과 민족화해에 대한 인식의 전환 반공과 멸공의 이데올로기가 온 나라와 교회를 지배하던 모습에 조금씩 변화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사회 안에서 뜨겁게 펼쳐진 민주화 운동, 그리고 현대 교회에 모든 면에서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해 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이 맞물리면서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변화가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 1984년 한국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행사와 그에 즈음해 성사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방한, 그리고 5년 뒤인 1989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성체대회 등입니다. 특히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는 주제 아래 열린 세계성체대회는 북한 선교와 민족 통일을 교회의 중요한 사목적 과제로 부상시켰습니다. 북한을 적대시하는 것만으로는 복음을 실현할 수 없다는 자성이 광범위하게 일어났습니다. 서울대교구장이자 평양교구장 서리였던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은 1995년 3월 1일 한국교회 최초로 서울대교구에 ‘민족화해위원회’를 공식 발족하고, 북한 선교와 인도적 지원을 위한 대북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주교회의 산하 북한선교위원회 역시 1999년 ‘민족화해위원회’로 명칭을 변경했고 이후 순차적으로 대부분의 교구에 민족화해위원회가 설치됩니다. 이는 북한을 용서와 선교의 대상으로만 여기던 인식을 벗어나, 북한을 한 형제이자 이웃으로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을 불러왔습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교회는 기도와 미사, 인도적 대북 지원, 북향민의 포용 및 정착 지원 등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노력을 다각적으로 펼치게 됩니다.

발행일 2026-02-01 제3477호 12면
기사 더보기더보기아이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