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유리알] 기억 저 깊은 곳에(상)

저녁 미사 전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언덕 위의 작은 성당에서 장명숙 안젤라 선생님을 만나기로 했다. 소셜미디어에서 ‘밀라논나’로 불리며, 많은 이에게 사랑을 받는 분이었다. 선생님(이하에서는 밀라논나님으로 칭함)을 부르는 애칭 밀라논나는, ‘밀라노 할머니’를 뜻하는 이탈리아어에서 비롯됐다. “제가 머리가 하얗잖아요. 하루는 그 방송을 만드는 친구들이, ‘밀라노 논나’라는 채널명을 제안했어요. 거기에 대고 ‘할머니 소리는 싫어’ 하기도 우습고, 그런 것에 저는 자유롭거든요. 그때부터 이 애칭을 쓰게 됐어요.” 영상을 보는 이들은 밀라논나님의 가식 없는 이런 모습들을 좋아했다. 나는 요양원에 계신 엄마가 잠시 떠올랐다. 누군가 엄마를 ‘할머니’라고 불렀을 때의 거북했던 기억과 함께, 몸만큼이나 이 호칭은 엄마를 더 멀리 느껴지게 했다. 그러고 보니 엄마의 세례명도 안젤라였다. 패션의 도시 밀라노에서 밀라논나님이 공부를 시작했을 때 느꼈던 문화적 차이에 대해 먼저 가볍게 물었다. “우선 이탈리아 사람들이 자유롭게 애정 표현을 하는 것에 저는 무척 놀랐어요. 그리고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서로의 이름을 그냥 부르는 모습에서 ‘평등한 관계가 이렇게 시작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이러니 세월이 지나도 서로 트집 잡지 않고 잘 지낼 수 있는 건가 싶기도 했습니다.” ‘내가 살던 밀라노에 이미 계셨구나…’ 우리는 이미 밀라노 중심 스칼라 극장 건너편 있는 고풍스러운 카페에 앉아 있는 듯했다. 질문을 준비하면서 밀라논나님이 출연하신 영상과 책을 먼저 읽었다. 책에서는 장기기증에 관해 쓰신 문구 ‘나의 죽음이 누군가에게 선물이 되기를’ 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궁금해졌다. “저는 이제 살아온 만큼 더 살지는 못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달려만 가던 생각들에서 멈칫 서서는, 남아있는 시간이 얼마나 있는지를 더 고민하게 되었지요." 나이가 드니 생각도 바뀌는 느낌. "나이 듦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역시 소탈한 표정으로 답하셨다. “저는 그 질문을 많이 받는데요. 나이를 어떻게 안 먹나요?! 떡국을 안 먹는다고 나이를 안 먹나요. 잠을 안 잔다고 세월이 안 가는 것도 아니고, 물결 따라 가는 거지요. 인생을 역행한다는 게 얼마나 흉해요. 사람들이 그래요 ‘염색하면 더 젊어 보일 텐데…’ 젊어 보이면 어쩔 건데요? 연애할 것도 아니잖아요. 이대로의 내 모습을 좋아하는 사람과 사랑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염색을 안 하니까 제일 화를 내시는 건 어머니였어요. 당신은 염색을 하셨거든요. 딸이 당신보다 나이 들어 보이니까 그러신 거지요.” 어머니에 대해 언급하셨을 때, 사제 아들을 두고 서로 당신들을 더 닮았다고 농담하시는 부모님이 생각났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아무도 닮지 않았다고 차갑게 답했던 기억. 받은 것은 많으나 작은 가시 하나가 늘 아픈 법이다. 이럴 때는 왜 엄마가 더 미웠던 것일까. “’하느님 아버지’를 부를 때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평소 따뜻한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던 밀라논나님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나는 알고 있었다. 저편에서 기억을 길어 올리는 듯한 얼굴. “제 아버지는 은행원이셔서 바쁘셨지만, 저를 사랑하셨어요. 울타리 같은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기도 중에 ‘하느님 아버지’를 말할 때 오히려 든든했지요. 저는 할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저를 보며 ‘어떤 때는 네가 얄미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맨날 못생겼다고 구박하셨고. 지금은 다들 스타일이 있다고들 하는데 그때는 그러셨거든요. 아마도 우리 할머니가 며느리에게 굉장히 엄격하셔서 시집살이를 모질게 시키신 거 같아요. 신교육을 받은 어머니는 저를 그래서 귀찮아하신 거 같고요. 게다가 어릴 때 제가 할머니를 많이 닮아서 더 그러셨나 봐요.” 밀라논나님의 솔직한 이야기를 듣다 보니, 프랑스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했던 예술가 루이스 부르주아(1911~2010)의 사진 한 장이 떠올랐다. 그의 사진에는 부드러우면서도 말없이 타인의 내면을 감싸줄 것 같은 응시가 있다. 내면의 상처를 작품에 형상화했던 예술가 루이스 부르주아. 그녀에게 있어서 어머니는 나약했고, 남편과 가정교사의 오랜 불륜을 보고도 그저 침묵으로 일관하던 인물로 그려졌다. 작가는 ‘덧없음’과 ‘안정’이라는 감정에 깊이 파고들었다. 느닷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기억의 덧없음은, 상실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이었다. 동시에 보이지 않더라도 어딘가에 존재하는 영속성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했다. 그랬다. 낳아 준 존재를 미워한다? 고맙고, 밉고, 사랑하고, 분노하고…. 우리는 가족에 대해 말하면서 ‘상처받은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도 나눴다. 친부에게 성범죄를 당한 아이들의 이야기. 밀라논나님은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가출 소녀 쉼터’에서 20여 년 동안 봉사활동 중인 이야기를 여러 차례 했다. “거기 애 중에는 아버지에게 성범죄를 당한 애들이 참 많아요. 그 아이들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할 때마다 손끝에서부터 몸서리를 치는 거 같아요.” 꽝 하고 마음의 문이 닫히는 소리. ‘이해와 용서’라는 단어가 강요될 때, 피해자는 치유되지 않은 상처들에 갇힌 채 곪아 간다. ‘엄마’라는 이름, 태어나서 처음 만난 존재이며 사랑, 사랑하면서도 아픔을 주는 관계. 중증 치매로 요양원에 계시는 나의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든든한 울타리이자 찌르는 가시관이었다. 예술가 루이스 부르주아는 그녀의 작품 전반에서 ‘엄마’라는 존재를 ‘양가감정’으로 다루었다. 즉 엄마에 대한 분노와 함께 사랑하는 존재로, 존경과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이 그의 작품에는 공존했다. 강하면서도 무기력했던 존재의 이름. 내가 오히려 엄마를 아프게 한 적이 더 많은데, 식지 않은 미움은 어찌할 것인가. 밀라논나님은 공감하듯 말을 이었다. “저의 어머니는 따뜻한 분이 아니셨잖아요. 그래도 묵주기도를 할 때면 제 마음이 따뜻해져요. 저는 엄마에게서 따뜻한 손길을 받은 기억이 없었어요. 어머니는 돈을 잘 주시고 제가 부탁한 것은 절대로 거절하지 않으셨지만, 마음에는 살가운 온기가 없던 분이셨어요. 그러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용서를 청하셨어요. 그 후로는 ‘성모님’을 부를 때마다 오히려 마음이 훈훈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내 영혼은 설명할 수 없는 기억을 향해 돌을 던지며 묻고 있었다. 그 존재를… ‘엄마’라는 이름을 다시 사랑할 수 있냐며. 글 _ 박홍철 다니엘 신부 (서울대교구 삼각지본당 주임)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줄리아노 다 상갈로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설계를 처음 맡은 도나토 브라만테(1444~1514)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피렌체 사람으로, 알베르티 이후 정체된 피렌체의 르네상스를 전성기로 끌어올린 건축가가 있습니다. 피렌체 초기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브루넬레스키와 알베르티의 훌륭한 계승자로 알려진 그는 줄리아노 다 상갈로(Giuliano da Sangallo, 1445~1516)입니다. 상갈로 가문은 여러 건축가를 배출했는데, 줄리아노는 그중 가장 연장자입니다.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베키오(Antonio da Sangallo il Vecchio)가 그의 동생이고,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Antonio da Sangallo il Giovane)는 그의 조카입니다. 그리고 조각가인 프란체스코 다 상갈로(Francesco da Sangallo)는 그의 아들입니다. 줄리아노는 20대 초반에 5년간 로마에 머물면서 고대 로마의 건축물을 연구하고 그림으로 남겼는데, 이 자료들은 훗날 그의 건축에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20대 중반에 피렌체로 돌아온 그는 목조 조각가로 일하다가 요새(要塞) 공사를 시작으로 건축가로 활동하였습니다. 특히 로렌초 데 메디치의 후원으로 메디치가의 전속 건축가가 되었으며, 로렌초의 의뢰로 프라토의 산타 마리아 델레 카르체리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delle Carceri a Prato, 1486~1495)을 설계하였고, 피렌체의 영토를 방어하기 위한 포조 임페리알레 요새(Fortezza di Poggio Imperiale, 1488~1511)의 설계도 맡았습니다. 이 시기에 라파엘로가 피렌체에 머물렀는데, 이때 줄리아노는 라파엘로와 교류하며 건축 분야에서 영향을 주었습니다. 1492년 로렌초의 사망과 함께 줄리아노는 밀라노에 가서 브라만테와 레오나르도를 만났고, 1495년에는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 추기경(훗날 율리오 2세 교황)의 건축물을 지으며 그의 후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1503년 율리오 2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어 그는 로마 교황청에서 일하였고, 그때 성 베드로 대성당에 대한 기획을 제안하였습니다. 그의 계획안은 브라만테에게도 영향을 미쳤는데, 나중에 브라만테에게 뒤처지면서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브라만테 사후 라파엘로와 함께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의 건축가로 활동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피렌체로 돌아와 1516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줄리아노의 작품 중에 브루넬레스키의 마지막 작품인 산토 스피리토 성당의 성구보관실(제의실)이 있습니다. 1489년 건축이 시작된 이 성구보관실은 평면이 팔각형인 점에서 피렌체 대성당의 세례당을 닮았습니다. 내부는 피에트라 세레나(회색 사암으로 토스카나 지방의 석재료)로 된 12개의 코린트식 기둥이 있고, 드럼(돔을 받치는 수직 구조물)에는 삼각형의 페디먼트와 직사각형 창문이 있으며, 돔 하부의 반원 아치 부분에는 둥근 창이 있습니다. 줄리아노는 당대의 브루넬레스키와 알베르티 그리고 브라만테로 이어지는 르네상스의 특징들 특히 중앙집중형 평면과 오더 양식을 종합하여 그의 작품에 담았습니다. 줄리아노의 대표작은 프라토의 산타 마리아 델레 카르체리 성당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1484년 어떤 병든 아이가 프라토의 한 감옥(카르체리) 벽에 그려진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그림이 살아나는 것을 보게 되었고 곧 아이의 병이 치유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그 기적에 대한 대중 신심이 커지면서, 1485년 로렌초 데 메디치는 그곳에 성당을 짓기로 결정하고 줄리아노에게 설계를 맡겼습니다. 성당의 평면은 르네상스 성당의 대표적인 형태인 그릭 크로스의 평면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줄리아노는 산타 마리아 델레 카르체리 성당을 설계하면서 특히 알베르티가 만토바에 건축한 산 세바스티아노 성당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단 알베르티의 산 세바스티아노 성당은 출입구가 한 곳이고 세 팔에 앱스가 있는 반면에, 줄리아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카르체리 성당은 제단이 있는 한 곳에만 앱스가 설계되어 있고 나머지 세 방향에 모두 출입구가 있으며, 크로싱을 중심으로 네 방향의 팔 길이가 짧습니다. 이러한 형태는 단독 출입구에서 생기는 선형성을 약화하고, 중앙 크로싱까지의 거리를 줄여서 중앙집중성을 높였습니다. 내부는 특히 브루넬레스키의 파치 경당과 산 로렌초 성당의 구 성구보관실에서 영향을 받았는데, 건물의 높이가 3층으로 확장된 것을 제외하면 두 건물과 비슷한 느낌을 줍니다. 특히 3층 부에 펜던티브(돔 하부의 곡면 삼각형 부분)가 있고 그 위에 반구형 돔이 얹혀 있는 형태가 두 성당과 매우 흡사합니다. 출입구가 있는 세 면은 외부처럼 페디먼트가 있는 신전 파사드이고 제단이 있는 앱스 쪽은 반원 아치로 되어 있습니다. 외부는 알베르티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처럼 토스카나의 로마네스크 형태에 사각형을 기본으로 하는 기하학적 장식을 취했습니다. 사각형은 흰색 대리석 둘레로 검은색 대리석의 띠가 둘러쳐 있는 형태인데, 이러한 대비는 추상적인 외관을 만들어냅니다. 외관 본체의 구성은 1층과 2층이 같은 크기로 올라가면서 육면체를 형성하고 있으며 지붕은 페디먼트로 마감되었습니다. 그 위로 12개의 오쿨루스가 있는 원통형 드럼과 돔이 있는데 브루넬레스키의 돔 지붕 형태입니다. 본체의 모서리 부분은 쌍기둥 형태의 벽기둥으로 되어 있는데, 1층은 토스카나식이고 2층은 이오니아식입니다. 산타 마리아 델레 카르체리 성당은 훗날 줄리아노가 로마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을 계획할 때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줄리아노의 성 베드로 대성당 계획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브라만테의 설계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따라서 브라만테의 성 베드로 대성당 평면이 미켈란젤로에 의해서 다시 취해진 것은 줄리아노에게도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건축의 중심이 브라만테 이후로 피렌체에서 로마로 옮겨졌다고 하지만, 그런 흐름 안에서도 줄리아노 다 상갈로는 르네상스의 뿌리가 여전히 피렌체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고, 산타 마리아 델레 카르체리 성당이 그것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07-13 제3450호 20면

대구 상동본당, “덜 쓰고 덜 버리며 생태적 삶에 가까워져요”

대구대교구 상동본당(주임 신종호 베네딕토 신부)이 소비를 줄이고 ‘제로 웨이스트’(Zero Waste·버리지 않고 재사용)를 실현하는 문화 정착에 힘을 쏟고 있다. 공동체의 생태적 회심을 토대로 공동의 집 지구를 돌보는 실천을 하고, 나아가 지역 사회에 ‘덜 쓰고 덜 버리는’ 문화를 확산하기 위한 노력이다. “미처 다 소비하지 못하거나 앞으로도 소비할 가능성이 높지 않은 식재료가 필요한 신자나 지역주민, 또는 어려운 이웃들과 공유하기 위해 설치했습니다.” 본당 생태환경위원회 김진의(요셉) 위원장이 성당 계단 아래에 놓인 ‘공유냉장고’를 보며 이같이 설명했다. 공유냉장고는 신자들뿐 아니라 지역에 사는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열린 나눔공간이다. 김 위원장은 “가난한 사람을 돕는 데만 목적이 있지 않다”며 “버려짐 없이 모두 소비될 수 있는 자원순환 운동에 초점을 맞췄다”고 설명했다. 공유냉장고 이외에도 본당은 생태환경위원회 주관으로 ‘자원순환센터’를 운영하며 상시로 재활용품을 모아 자원순환을 하고 있다. 연 2회 ‘생태바자’를 열어 사용하지 않은 양질의 제품들을 나눈다. 바자 후에는 남은 제품들을 대구대교구 생명사랑나눔운동본부를 통해 캄보디아나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등에 보내고 있다. 캄보디아에서 유치원 운영을 맡고 있는 김분선 수녀(마리아 도미니카·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는 최근 본당을 찾아 신자들에게 직접 감사 인사를 전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알맹이 성물방’이 인기를 얻고 있다. 기존 본당 성물방 자리에 제로 웨이스트숍을 함께 설치한 것이다. 운영 봉사를 맡은 생태환경위원회 위원들은 기존 성물 판매도 하면서 친환경 제품들을 신자들이 잘 사용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 알맹이 성물방에는 화학첨가물이 들어가지 않은 세제나 식품, 생활용품 등 친환경 제품들이 종류별로 갖춰져 있다. 손정화(마리아 막달레나) 위원은 “처음에는 신자들이 어색해하고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성당 마당에서 두 번의 홍보활동을 펼친 뒤부터 이용이 늘고 있다”며 “사용을 하고 나서는 제품의 필요성을 느껴 재구매가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본당 신자들은 지역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환경미화를 하는 ‘우리동네 플로깅’을 매월 한 번씩 하고 있다. 지난가을 주민센터로부터 낙엽 정리를 도와달라는 제안을 받을 정도로 본당의 플로깅 활동은 지역에서도 호응을 얻고 있다. 본당의 이 같은 실천 활동은 교육을 통한 ‘관찰’과 ‘판단’의 결과다. 2022년 10월 생태환경위원회를 조직한 본당은 이후 1년간 신자들과 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를 공부하고, 주일미사 때 생태 동영상을 보면서 생태적 회심과 실천이 얼마나 중요한지 체득했다. 복음적 가르침을 바탕으로 생태 교육에 힘썼던 본당은 이제 실천 단계를 거치며 더 발전적인 생태적 회심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신종호 신부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이 본당 교우들의 일상 안에 정착되고, 나아가 지역 사회에 확산되면 좋겠다”며 “앞으로는 생태 교육을 넘어 우리가 함께 고민하고 연구하는 단계들로 강화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신 신부는 또 “무엇보다 공동의 집이 얼마나 아름답고 우리에게 좋은 곳인지에 대해서 많은 사람이 체험하길 희망한다”며 “깊어진 체험들 속에서 실천에 대한 다짐들이 싹을 틔우면 한다”고 밝혔다.

발행일 2025-07-13 제3450호 16면

유흥식 추기경, “경청하는 새 교황님…한반도 평화 위한 역할 기대”

휴가차 한국을 찾은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 유흥식(라자로) 추기경이 7월 3일 주교회의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교황 선종과 콘클라베, 새 교황 즉위 등 중대한 교회 변화의 한가운데에서 분주한 나날을 보낸 유 추기경은 이날 잠시 숨을 고르며, 레오 14세 교황과의 일화를 비롯해 교황의 한국에 대한 깊은 애정, 그리고 개인적인 소회와 근황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전했다. Q.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으로서 현재 중점적으로 수행하는 역할은? 2021년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으로 임명돼 올해로 4년째 직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성직자부는 전 세계 가톨릭교회의 모든 사제와 부제를 관할하며, 사제 양성을 위한 교육과 예비신학생들의 준비 과정 역시 성직자부의 책임입니다. 모두가 각자의 직무를 더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저의 역할입니다. 장관 임명 당시, 한 주교님이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신부 하나라도 기쁘지 못한 모습으로 있다면 그것은 네 책임이라는 걸 명심해라.” 그 말씀이 마음 깊이 남아, 그때부터 ‘세상 어떤 신부님도 슬픈 모습을 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다짐을 품게 됐습니다. 지난 6월 23일부터 27일까지 로마에서는 전 세계 신학생과 사제, 주교님들이 함께하는 희년 행사가 열렸습니다. 주제는 ‘행복한 신부들’이었습니다. 사제가 행복할 때 많은 사람에게 더 큰 행복을 줄 수 있고, 젊은이들도 그 모습에 매력을 느껴 사제성소가 늘어날 것입니다. 성직자부 장관으로서의 제 직무도 행복하게 수행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저를 ‘웃는 추기경’이라 부르셨습니다. 교황청 안에서 저는 아주 잘 웃는 사람이고 모든 이들과 친구로 지내고 있습니다. Q. 가까이에서 본 레오 14세 교황은 어떤 분인가? 교황님은 저보다 1년 뒤에 교황청 주교부 장관으로 부임했습니다. 주교 직무와 사제 직무는 서로 긴밀히 연결돼 있기 때문에 공식 회의 외에도 자주 가까이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교황님이 추기경이었을 때 교황님은 3층, 저는 바로 위 4층에 살았습니다. 제 방 바로 아래가 교황님 방이라 승강기에서도 자주 만났습니다. 제가 윗방에 사니까 “층간소음 괜찮냐”고 물으니 교황님은 “걱정하지 말라”면서 “한국 사람은 방에 들어가면 구두를 벗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고 농담을 건넨 기억이 납니다. 콘클라베 후 많은 이가 ‘어떻게 미국 사람이 교황이 되었을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콘클라베에 참여한 추기경님들은 교황님을 단순히 ‘미국인’으로 보지 않고, ‘선교사’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교황님이 가장 가난한 지역에서 선교사로 헌신한 그 삶을 높이 평가해 교황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진취적인 면이 강했다면, 레오 교황님은 조용하고 특별히 잘 경청하는 분입니다. 무언가를 앞서 주도하거나 자신의 뜻을 강하게 드러내기보다는, 되도록 많은 이의 이야기를 듣고자 합니다. 성직자부 장관으로서 교황님과 독대할 기회가 종종 있습니다. 마주 앉아 담담하게 대화를 나누고, 필요하다 싶으면 직접 메모까지 하며 기억하려 합니다. 무척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이뤄지는 진심 어린 만남입니다. Q. 한국·한국교회와 관련해 교황과 나눈 대화가 있다면? 휴가 전, 교황님과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특히 2027년 열릴 세계청년대회(WYD) 개최지가 서울로 결정되기까지의 과정과, 그와 관련해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나눴던 대화를 전했습니다. 한국은 남북으로 분단된 나라이고, 그런 만큼 평화가 매우 중요한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한국교회는 순교자들의 신앙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이 순교 정신을 세계 젊은이들에게 소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말씀드렸습니다. WYD는 가톨릭교회 내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이가 모이는 큰 행사이기 때문에, 한국이 그 무대를 맡는 것은 의미가 깊다고 생각합니다. 교황님께서도 제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귀 기울여 들으셨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과 대통령에 취임한 후 두 차례 교황님께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를 제가 직접 교황님께 전달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한국 정부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또 한국과 교황청 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고, 교황님은 우리나라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남북관계에 대해서도 대화를 나눴습니다. 제가 현 상황을 이야기하자 교황님은 진지하게 경청했습니다. 사실 레오 14세 교황님이 선출됐을 당시, 제 마음속에 가장 먼저 스친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분이라면 남북관계에 있어 뭔가 큰 역할을 할 수 있겠다’ 하는 직감 같은 것이었습니다. 교황님께서 앞으로 남북관계는 물론, 북미관계와 한반도 평화 증진에 있어서도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Q. 국민 통합과 갈등 치유를 위해 필요한 자세는?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레오 14세 교황님도 말씀하셨듯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고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때로 마음이 닫혀 있고, 관계에 있어 경직된 태도를 보일 때가 있습니다. 로마에서 지내다 보면 많은 한국 분을 만납니다. 제가 그분들에게 다가가 먼저 인사하면 어떤 분들은 이상한 사람을 보듯 합니다. 그러다 누군가가 ‘추기경님이세요’라고 소개하면 얼굴이 180도 바뀝니다. 그럴때는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추기경, 주교, 신부니까 잘 대해야 하고, 아니면 아무렇게 대하는 것은 그리스도 정신이 아닙니다. 조금만 마음을 열고, 조금만 상대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며, 눈높이를 맞추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성경 말씀 중 하나가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9)입니다. 내가 먼저 거룩해질 때, 다른 사람에게도 거룩해지게 하는 힘을 줄 수 있습니다. 우선 자신부터 거룩해져서 가능하면 모범을 보이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 가톨릭신자가 600만 명 가까이 됩니다. 우리 신자들이 하느님을 믿고 이웃을 신뢰하면서 소금과 누룩의 역할을 해주길 바랍니다. 정치인은 누구보다도 더 많은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국민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고, 대화로 마음을 잇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진심으로 애써 준다면, 분열된 사회를 치유하는 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국민 통합, 사회 통합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대통령을 비롯해 책임 있는 분들이 지혜를 모아 우리 사회를 바른 길로 이끌어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Q. 특별히 마음에 두고 기도하는 지향이 있다면? 가장 먼저는 교황님을 위한 기도입니다. 제가 가까이에서 교황님을 모시는 만큼, 교황님이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교회뿐 아니라 온 인류를 이끌 수 있도록 항상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위해서도 기도하고 있습니다. 12·3 비상계엄 사태 직후인 12월 7일 전 세계 추기경들이 로마에 모인 자리에서 정말 많은 분이 제게 ‘한국은 괜찮은가?’라고 물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어떻게 한국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냐’며 ‘한국이 (이 위기를) 잘 벗어나길 나도 기도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솔직히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새 대통령이 선출됐고, 이제 저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위기를 이겨 낸 나라’라고 자랑하고 있지만 한편으론 여전히 부끄러움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잠재력도 있고, 세상에 나눌 수 있는 것이 참 많은 나라입니다. 저는 진정한 의미의 선진국, 다른 이들에게 베풀고 함께 잘 사는 나라, 그런 한국이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발행일 2025-07-13 제3450호 12면

[여름 특집-안녕夏세요?] 기후 재난 최전선, 가난한 이웃에 손 내미는 사람들

기후 변화가 초래하는 폭염과 폭우 등 이상기후는 이제 더 이상 예외적 현상이 아닌, 일상의 재난이 되고 있다. 레오 14세 교황은 7월 2일 발표한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9월 1일) 메시지에서 “인간이 초래한 기후 변화로 인해 극단적인 기후 현상이 점점 더 잦아지고 강해지고 있다”며 “이로 인해 가장 먼저 고통받는 이들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배제된 이들”이라고 전했다. 이어 “환경 정의는 추상적인 목표가 아니라 신앙과 인간성의 표현이고, 이제는 행동으로 옮길 때”라고 강조했다. 기후 재난의 최전선에 놓인 쪽방촌. 이곳에서 ‘안녕하지 못한 여름’을 살아가는 주민들과 함께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의 연대 현장을 소개한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6월 27일, 서울 중구 서울역 일대 쪽방촌에서는 더운 여름을 무사히 보낼 수 있도록 힘쓰는 이들의 손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들은 사단법인 길벗사랑공동체(대표 김영민 유스티나, 지도 이재을 요한 사도 신부) 산하 ‘서울역 해피인 공동체’다. 길벗사랑공동체는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는 말씀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인 공동체다. 음식과 생필품을 나누고, 미용·의료·청소 봉사는 물론, 방문 상담과 예비자 교리, 정기 미사 봉헌까지 함께하며 이웃과 신앙 안에서 연대하고 있다. 막막한 여름… 그래도 누군가 곁에 있습니다 “너무 더워서 정말 못 살겠어요. 나라에서 설치해 준 공용 에어컨은 리모컨을 누가 가져가 쓸 수도 없어요. 선풍기도 오래돼 바람이 시원치 않아요. 벌써 이런데 한여름 7, 8월은 어떻게 보내야 하나 걱정이네요.” 윤혜정 수녀(스콜라스티카·살레시오 수녀회)와 봉사자 김미정(아델라이데·성수동본당) 씨가 찾은 김수인(가명) 씨의 단칸 쪽방은 숨이 턱 막힐 만큼 더웠다. 김 씨 부부는 몸만 누일 수 있는 한 평(3.3㎡) 남짓한 공간에서 낡은 선풍기 한 대에 의지해 여름을 나고 있었다. 필요한 것이 없냐는 물음에 김 씨는 두터운 겨울용 이불밖에 없다며 여름용 이불을 청했다. 봉사자들은 김 씨 집 외에도 서울역 곳곳 쪽방을 돌며, 더위에 허덕이는 주민들을 살폈다. 이날은 공동체가 쪽방촌 주민들과 점심을 나누는 날이었다. 오전부터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며 기온이 30도에 육박했지만, 봉사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침 일찍부터 모여 음식을 준비했다. 이마에 땀이 맺히고 마스크 속 숨이 가빠지는 와중에도 누구 하나 힘들다는 내색 없이 웃으며 식사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봉사자들의 정성으로 만들어진 도시락은 서울역 인근 쪽방촌 곳곳으로 전달됐다. 이 음식 나눔은 길벗사랑공동체 산하 노량진 해피인 공동체가 중심이 되어 매주 월요일, 화요일, 목요일, 금요일에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고물가 시대, 기초생활수급비에 의존해 살아가는 주민들에게 식사와 생필품 지원은 생존을 위해 필수다. 서울시립 남대문쪽방상담소가 운영하는 ‘동행식당’, 서울역쪽방상담소의 ‘동행스토어 온기창고’ 등을 통해 일부 식사와 식료품을 지원받을 수 있지만, 수요를 충족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쪽방 주민 최인길(가명) 씨는 “’동행식당’이 있어서 그나마 한 끼는 해결되지만, 나머지 끼니는 어떻게 때워야 할지 늘 고민”이라며 “물가가 너무 올라 밖에서 사 먹기도 어렵고, ‘온기창고’의 물품은 금세 동나버려 결국 내 돈으로 사야 하는데, 그럴 여유가 없어 공동체에서 주는 도시락이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최근 몇 년간 라면, 즉석밥 등 저소득층이 자주 찾는 가공식품 위주의 생활물가가 큰 폭으로 올랐다. 한국은행이 지난 6월 18일 발표한 ‘최근 생활물가 흐름과 수준 평가’에 따르면, 2021년부터 올해 5월까지 생활물가 누적 상승률은 19.1%로, 같은 기간 소비자물가 상승률(15.9%)보다 3.2%포인트 높다. 물가 상승은 가장 취약한 계층에 먼저 타격을 주고 있다. 기도와 사랑의 빛으로 꽉 막힌 쪽방 문 열리길 “해가 갈수록 여름 더위는 점점 더 심해지는데, 쪽방 주민들은 에어컨도 없는 좁은 방 안에만 계속 머물려고 합니다. 이렇게 지내다 보면 온열 질환 위험이 커져 건강에 매우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이재을 신부는 불볕더위 속에 방 안에 갇혀 지내는 쪽방 주민들의 건강을 깊이 우려했다. 그는 이어 “방 밖 세상에 나가기를 두려워하는 이들의 마음을 사랑이신 하느님의 말씀으로 치유해야 한다”며 “그 말씀이 용기가 되어 문밖 세상과 마주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했다. “요셉 형제님. 술 조금만 드시고, 이따 미사 때 꼭 오셔야 해요. 건강하시고, 사랑해요.” 쪽방을 돌며 상담하던 윤혜정 수녀와 봉사자 김미정 씨는 기도를 마친 뒤 떠나기 전, 주민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꼭 전했다. 이들은 쪽방 주민의 마음을 여는 열쇠는 바로 지속적인 관심과 따뜻한 언어라고 믿는다. 김 씨는 “쪽방에서 주민들을 위해 기도하며 사랑의 빛이 깃들기를 바랄 때, 그 빛이 퍼져나가 마음의 문을 여는 순간들을 종종 목격하곤 했다”고 말했다. 공동체는 ‘주님의 기도’가 담긴 작은 간식 봉투를 전달하며,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기도를 잊지 않는다. 이재을 신부는 월례 미사와 예비자 교리를 통해 영적 돌봄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치는 여름, 신앙은 이들에게 큰 힘이 될 수 있다”며 “이것이야말로 교회가 해야 할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기후 재난 겪는 사회 약자들 위한 봉사 문화 뿌리내려야 이재을 신부는 “본당 차원에서도 이제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봉사 문화가 뿌리내려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신자들이 지역사회 안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자연스럽게 함께하는 문화가 보편화돼야 한다”며 “이를 위해 교회가 본당 사회복지를 적극 지원하고, 봉사자 양성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도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부는 공용 에어컨 설치, 샤워 시설 운영 등 여름철 쪽방 주민들의 건강 보호를 위한 대책을 시행 중이지만, 근본적인 주거 문제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동자동사랑방 박승민 활동가는 “복지 정책 덕분에 여름나기가 예전보다는 나아졌지만, 쪽방이라는 근본적 주거 환경 때문에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며 “주거권 실현을 위해서는 ‘선이주-선순환’ 방식의 공공개발이 핵심”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2021년 2월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동자동 쪽방촌 공공개발 계획’은 2025년이 된 지금까지도 사업 첫 단계인 ‘지구 지정’조차 이뤄지지 못한 채 표류 중이다.

발행일 2025-07-13 제3450호 10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13) 교회와 신협운동

1950년대는 우리 사회와 교회 모두 전쟁의 아픈 상처를 딛고 일어서기 위해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수십 년 만에 세계가 놀랄 정도의 경제 성장을 이루며 절대 빈곤의 처지에서 벗어났지만, 폐허 속에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했던 당시의 현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굶주림과 가난으로 고통받던 우리 민족은 미국 등 여러 나라의 원조를 바탕으로 전후 복구 사업을 추진하며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썼지만, 상황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자선’만으로는 빈곤의 악순환을 끊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자립’의 기틀을 마련할 방안을 찾아야 했고, 빈곤 탈출의 길은 협동을 통한 자립에 있다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었습니다. 교회는 그 출발점을 신용협동조합 운동에서 찾았습니다. 한국 신협의 효시 1959년 10월, 서울에서는 고(故) 장대익(루도비코) 신부(1923~2008)를 중심으로 ‘협동경제연구회’라는 단체가 발족했습니다. 이 연구회는 “교우 상호 간의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고, 앞으로 ‘가톨릭협동조합’을 조직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가톨릭시보 1960년 3월 6일자에 따르면, 연구회는 1960년 2월 27일 서울대교구 주교관 회의실에서 정기회의를 개최하고, 3월 3일 내한 예정인 미국 신용조합(CUNA) 부총재 메이터스 씨를 초청해 강연을 듣기로 결의했습니다. 노기남(바오로) 주교를 비롯한 20여 명의 회원들은 강연회에서 협동조합 설립과 관련한 법적 문제 등을 질문하고, 향후 조합 설립을 위한 준비에 착수할 각오를 다졌습니다. 가톨릭시보 3월 20일자는 강연회의 성공적인 개최 소식과 함께 한국에서도 협동조합 설립이 가능하다는 희망적인 전망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연구회는 마침내 6월 26일, 서울 명동 계성여중에서 ‘가톨릭중앙신용조합’ 창립총회를 열었습니다. 이에 앞서 부산에서도 신협이 설립되었습니다. 1952년부터 부산 메리놀병원에서 근무하며 구호 활동을 펼쳐 온 고(故)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Mary Gabriella Mulherin, 1900~1993)가 그 주역이었습니다. 가톨릭시보 1960년 7월 10일자는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지난 3월 7일, 미국 신용조합(CUNA) 부총재 메이터스 씨가 서울을 거쳐 부산을 시찰하면서 대청동 메리놀 수녀원에서 두 차례 강연회를 가졌는데, 이후 신용조합 설립에 뜻을 품은 몇몇 사람들은 경제학을 전공한 가브리엘라 수녀님을 중심으로 ‘신용조합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다섯 차례의 강연과 좌담회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5월 1일, ‘성가(聖家)신용조합’이라는 이름으로 27명의 창립 조합원이 각자의 기대와 함께 푼푼이 모은 돈을 바탕으로 ‘누굴 믿고 저금하느냐’는 염려 속에서도 첫 총회를 열고 협동조합 운동에 첫발을 내디뎠던 것입니다.” 신협 발족 시기만 놓고 보면 메리놀병원의 성가신용조합이 앞서지만, 사실상 비슷한 시기에 출범한 두 조합은 한국 신협운동의 효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협운동과 가톨릭교회 앞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나라의 근대적 협동조합 역사는 그리 길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신협운동이 시작된 1950년대는 일제 강점기와 전쟁, 분단 등으로 절대 빈곤에 시달리던 시기였습니다. 당시에는 전근대적인 사회 질서와 산업 구조로 인해 만성적인 빈곤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습니다. 서민들이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고, 고리의 사채는 가뜩이나 힘든 삶을 더욱 파멸로 몰아넣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려운 이들이 십시일반의 정신으로 서로를 돕는 신협운동이 시작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서울·경기 지역의 장대익 신부와 경상도 지역의 가브리엘라 수녀는 모두 캐나다에서 신협운동의 이론과 실제 그리고 빈곤 퇴치 운동인 ‘안티고니쉬 운동’(Antigonish Movement)을 연구한 인물입니다. 이들은 서구 여러 나라의 사례를 참고해 한국에서도 교회를 중심으로 자조, 자립, 협동의 정신을 실현하고자 신협운동에 매진했습니다. 당시 신협운동에 헌신했던 교회 내 선각자들은 이 운동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소명으로 여겼습니다. 가톨릭시보 1960년 6월 19일자 사설은 그 정신을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신협은 가난한 사람들끼리 모여 서로 돕는 것으로 가난을 극복하고, 믿음과 사랑의 기반을 다지는 조직이다. 따라서 사랑으로 가난한 이웃들과 동고동락하며, 현실 사회를 직시하고 참여하는 신협은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조직이라는 강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많은 교회 지도자는 정신적·물질적으로 신협운동을 격려하고 지원하였으며, 이러한 신협운동은 점차 범가톨릭적 관심사가 되었다.” 교회는 신협운동을 복음적 가치의 핵심인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사회적 실천으로 인식했습니다. 한국의 신협운동은 ‘잘살기 위한 경제운동’, ‘사회를 밝히는 교육운동’, ‘더불어 사는 윤리운동’이라는 세 가지 과제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교회의 가르침과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부산 중구, 한국 신협의 발상지인 부산가톨릭센터 뒤편에는 기념비와 가브리엘라 수녀의 동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기념비에는 가브리엘라 수녀의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한국에서 신협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오직 한 가지였습니다.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한국 국민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신자유주의 극복 위한 대안 이후 한국 신협은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일부에서는 신협이 본래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자본주의적 기업 운영 방식으로 변질되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신협이 사랑을 실천하는 대안적 기구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있다는 반성입니다. 한국 신협 탄생 60주년을 맞은 2020년 6월 21일자 가톨릭신문은, 신협운동이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며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오늘날 전 세계를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 속에서, 가톨릭교회는 인간을 소외시키고 성장과 경쟁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비인간적인 경제를 지양한다. 교회는 인간이 경제의 주체임을 분명히 하며, 자본이 아니라 인간을 살리는 경제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신협운동은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대안이 될 수 있으며, 협동조합 안에서 인간을 위한 봉사적 경제 정책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이다. 인간 존엄성, 공동선, 재화의 보편적 목적, 보조성, 연대성이라는 교회 사회교리의 원리들이 실현되는 장이 곧 협동조합이라고 할 수 있다.”

발행일 2025-07-13 제3450호 8면

[칼럼 - ‘공동의 집’ 지구를 위해] (1) 밥상의 순환

인간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지구 환경이 심각하게 쉐손되고 있습니다. 생태적 회개를 촉구하며, 지구의 울부짖음과 그로 인해 고통받는 피조물들의 현실, 그리고 창조질서 보전을 위한 다양한 노력들을 각 분야 전문가와 활동가들의 글을 통해 살펴봅니다. 하지가 지나 감자를 캤다. 캐고 보니 알이 작다. 좀 늦게 심은 탓도 있겠지만, 퇴비 섞는 일을 게을리한 탓이다. 퇴비의 좋은 성분들이 그냥 공기 중으로 흩어져버렸다. 이러니 감자알이 커지면 이상하지 않겠는가? 보통 작물의 크기를 키우고 생육 기간을 당기기 위해 화학비료를 사용한다. 편하게 화학비료를 사용하면 될 일인데 우리는 유기질 퇴비를 만들어 사용한다. 유기농으로 농사짓기 때문이기도 하고, 화학비료의 원료가 석유임을 알기 때문이다. 비료를 만들 때, 사용할 때, 이산화탄소가 발생한다. 결국 우리가 먹는 먹거리 생산을 위해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있다. 요리하며 식생활 교육을 하던 나는 기후위기를 공부하며 기후활동가가 되었다. 먹거리 생산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가 기후위기의 원인임을 알고 농사를 해야겠다 마음먹었고 1년을 밭에서 매주 살았다. 유기농으로 농사짓는 김현숙 농부님 밭 한쪽에 작지만 내 밭이 생겼고, 공동 농사도 한다. 사계절을 지내고 밭에서 배운 것은 순환이다. 농사를 시작하며 시작된 변화는 음식물쓰레기를 모아 밭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밭 한쪽 퇴비간에 붓고 톱밥을 잘 섞어둔다. 시간이 지나면 질 좋은 유기질 비료를 얻을 수 있다. 식생활 교육이 있는 날 나오는 음식물 쓰레기도 챙겨가면 모두 묻는다. ‘왜요?’라고, 당연히 버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재미난 상상력을 키워줄 수 있는 시간이다. 쓰레기가 다시 땅으로 돌아가 먹거리를 키우는 순환에 대해서. 벼농사를 하니 왕겨와 짚이 넉넉히 생겼다. 왕겨는 마늘과 양파밭에 뿌려두면 긴 겨울 따뜻한 이불이 되어 주고 수확 전까지 풀도 잡고, 햇빛도 가려주고 적당히 습도도 유지시키는 아주 훌륭한 ‘멀칭’(Mulching, 바닥덮기) 재료가 된다. 짚은 생강을 심고 덮어둔다. 땅에서 나온 것들이 다시 땅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또 다른 순환은 우리 몸에서 시작된다. 우리 밭에는 생태화장실이 있다. 오줌을 따로 모을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오줌은 그 자체로 아주 훌륭한 비료다. 비료의 3대 성분인 질소와 인, 칼륨이 모두 들어 있다. 전 세계는 지금 오줌 모으기 운동이 한창이다. 미국의 비영리민간단체인 ‘풍요로운 지구연구소’는 ‘식물은 우리를 먹이고 우리는 그들을 먹인다’며 오줌 모으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오줌을 버리지 않고 다시 땅으로 보내는 것은 불과 얼마 전까지 우리 농촌에서 흔하게 보던 장면이었다. 기후문제가 심각해지며 지구촌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이유를 깊게 파 보면 식량 문제가 드러난다. 식량 수출국들이 생산량 축소로 수출을 막으면서 수입국들은 곡물 가격 폭등과 식량난, 비룟값 상승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대표적인 예가 시리아 내전이다. 이로 인해 세계는 난민·식량·비료 문제를 겪으며 석유 기반 농업의 문제를 다시 확인했다. 이런 위기 속에서 화학비료 없이 농사를 지으며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며, 땅을 살리고 생물다양성을 지키고며 물도 절약하고 하천의 오염도 막을 수 있는 지속가능한 해법이 바로 생태순환적인 유기농업이다. 오줌을 버리지 않고 음식물쓰레기를 모아 퇴비를 만들어 농사짓는 순환을 일으켜야 한다. 글 _ 성미선 엘리사벳 가톨릭기후행동 운영위원으로, 인류의 가장 심각한 위기인 기후문제 해결을 위해 함께 모여 맛있게 먹고 기도하며 사랑하자고 당부한다. 우리 농업 기반 채식문화를 알리기 위해 ‘지구여행자의 레시피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경기 양평의 김현숙 농부와 함께 공동체 ‘팀화요’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발행일 2025-07-13 제3450호 16면

‘안락사’ 허용 확산세…생명 존엄성 ‘적신호’

프랑스 하원에 이어 영국 하원에서도 안락사를 허용하는 법안이 통과되면서, 세계 각국에서 안락사를 허용하는 흐름이 확산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지난해 7월 안락사 관련 법안이 발의되는 등 안락사 합법화 시도가 이어져, 인간 생명 존엄성이 위협받고 있다. 영국 하원은 6월 20일 ‘생의 말기 성인에 대한 임종 선택권’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생존 기간이 6개월 이하로 예측되는 말기 환자가 의사의 도움을 받아 자살하는 ‘의사 조력 자살’ 형태의 안락사를 허용한다. 5월 27일 프랑스 하원이 유사한 내용의 안락사 법안을 통과시킨 지 불과 한 달 만이다. 안락사 합법화 움직임은 서구 사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해 6월 더불어민주당 안규백 의원은 ‘조력 존엄사에 관한 법률안’ 제정안을 발의했다. ‘조력 존엄사’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안락사를 합법화한 오리건주의 ‘존엄사법’(Death With Dignity Act)에서 온 말로, ‘존엄한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돼 불려지지만, 사실상 안락사를 의미한다. 안 의원은 앞서 2022년 6월에도 안락사를 허용하는 법안을 개정해 발의했으나, 가톨릭교회와 의사협회 등의 반대로 제정이 무산된 후 21대 국회 임기 만료와 함께 폐기됐다. 안락사는 “모든 고통을 제거할 목적으로 그 본성에서나 의도에서 죽음을 유발하는 작위나 부작위”(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생명의 복음」 65항)로 정의된다. 타살, 자살을 막론하고 고통을 피하기 위해 저지르는 모든 ‘살인’은 안락사에 해당한다. 때문에 교회는 안락사를 “생명 자체를 거스르는 행위”로 보고 “이는 인간 문명을 부패시키는 한편 창조주의 영예를 극도로 모욕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사목헌장」 27항 참조) 자살을 돕는 행위 역시 “요청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불의한 일에 협조하는 것이며, 때로는 실질적인 가해자가 되는 것”이라고 단호히 반대한다.(「생명의 복음」 66항) 안락사 합법화 움직임은 사회의 분위기와도 맞물려 더 큰 우려를 낳고 있다. 국민의 많은 수가 안락사 합법화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락사 허용 법안이 처음 발의된 해인 2022년 7월 한국리서치 조사에서는 의사 조력 자살 합법화에 대해 찬성으로 응답한 이가 82%에 달했고, 지난 6월 주간조선이 발표한 설문에서도 찬성이 83%로 조사됐다. 이런 경향은 사회 전반에 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하다는 방증이다. 안락사의 저변에는 생명의 가치에 차등이 있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건강하고 즐거운 삶(생명)만 가치 있고, 고통 받는 생명은 죽여도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며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목숨을 직접 해칠 권리를 주장하지 못한다”고 강조한다. “하느님만이 그 시작부터 끝까지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258항 참조) 가톨릭생명윤리연구소 소장 박은호(그레고리오) 신부는 “‘특정 조건에서는 죽여도 괜찮다’는 식으로 생명의 가치를 구분하는 경향은 생명권을 무너뜨리고 나아가 사회 공존의 기반을 뒤흔들게 된다”면서 “생명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주신 선물이자 소명이며, 아무리 병들고 약해진 생명이라 할지라도 그 생명의 가치는 변함없고, 그 어떤 고통 중에도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이끌어주신다는 것을 기억해달라”고 당부했다.

발행일 2025-07-13 제3450호 1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미켈란젤로의 성 베드로 대성당

새로운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설계는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의 사망으로 1547년 칠순을 넘긴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에게 맡겨졌습니다. 브라만테의 중앙집중형 그릭 크로스 평면과 라파엘로의 바실리카형 라틴 크로스 평면을 무리하게 조합한 상갈로의 설계를 보고 미켈란젤로는 눈살을 잔뜩 찌푸렸습니다. 평면만이 아니라 입면에서도 중앙 돔과 거의 같은 높이의 종탑을 파사드 양쪽에 배치한 상갈로의 계획은 미켈란젤로의 관점에서 로마에는 전혀 맞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브라만테 이후의 건축가들 모두 성 베드로 대성당의 중심은 당연히 돔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에게 중앙의 돔은 단순히 건물의 중심이 아니라 로마 교회의 중심으로서의 성 베드로 대성당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돔을 중요하게 생각했기에, 미켈란젤로는 브라만테와 관계가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그의 중앙집중형 그릭 크로스 평면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브라만테의 원안을 훼손시킨 상갈로의 계획 중 이미 시공된 외벽은 허물어야 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이미 전성기 르네상스를 넘어 후기 르네상스를 향하고 있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매너리즘(Mannerism)의 시각으로 브라만테의 평면을 다시 바라보았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브라만테의 평면이 복잡하고 구조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평면을 더욱 단순한 형태로 재구성하기로 하고, 다섯 겹의 동심원으로 구성된 평면과 복잡하게 들어선 기둥들 그리고 다양한 두께의 벽체를 세 겹의 공간과 단일한 두께의 벽체로 정리하였습니다. 브라만테의 고전적 평면을 미켈란젤로만의 간단하고 명료한 방식으로 바꾼 것입니다. 브라만테의 평면은 사각형과 마름모가 겹쳐 있는 형태인데 크기로 보면 사각형이 조금 더 크게 계획되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브라만테의 평면에서 마름모의 크기를 유지하면서 사각형의 크기를 줄여서 기둥과 외벽 사이의 거리를 좁혔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설계 의도는 중앙 돔의 안정성 확보가 우선이었기에, 돔의 하중을 받는 기둥의 단면을 확대하고 외벽을 기둥 가까이 붙인 것입니다. 이미 돔을 받치는 기초가 브라만테의 계획대로 크로싱의 네 모서리에 시공되었는데 미켈란젤로는 그 크기가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미켈란젤로는 기둥 보강에 더하여 브라만테의 돔을 포기하고 지금의 상황에 맞는 돔을 새로 설계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 설계를 자신에게 맡겨진 마지막 소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미켈란젤로도 처음에는 브라만테의 매끈한 반구형 돔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반구형 돔의 원형은 1500년 전에 세워진 판테온인데, 로마에서 그보다 아름다운 돔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가 계획한 돔은 상부가 뾰족하고 리브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판테온이 아니라 브루넬레스키의 피렌체 대성당 돔과 유사합니다. 건축 구조에서 끝이 뾰족한 포인티드 아치는 반원 아치보다 하중을 더 분산시켜 기둥에 부담을 덜 주고, 리브 역시 돔의 두께를 감소시켜 하중을 줄이는 역할을 합니다. 이는 고딕 성당의 구조 원리인데, 르네상스 시대에 대형 돔을 건설하기 위해서 구조적 목적으로 적용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리브가 달린 뾰족한 돔은 표면이 매끈한 반원형 돔보다 수직성이 강조되어 훨씬 역동적으로 보입니다. 두 돔의 느낌이 다른 것은, 미켈란젤로와 브라만테의 성향 차이도 있지만 50년이라는 세월의 간격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합니다. 입면의 구성은 마름모의 네 모서리 중 한 곳을 평평하게 만들어 파사드로 계획하고, 그곳에 거대한 포르티코(건물 정면에 기둥과 지붕으로 구성된 공간)를 설치하였습니다. 외벽은 거대한 쌍기둥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기둥의 돌출 부분이 시간대에 따라 번갈아 음영을 만들면서 조각 작품에서 얻을 수 있는 조형성을 보입니다. 이 쌍기둥이 돔의 드럼으로 이어지면서, 16쌍의 코린트식 원형 기둥들이 드럼의 외벽을 두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돔을 받치는 기둥은 돔 표면의 리브와 이어지는데, 이러한 연속성은 성 베드로 대성당의 외관이 구조 면에서나 조형 면에서 통일성을 갖게 합니다. 마치 교회의 믿음이 지상 외벽의 쌍기둥에서 출발하여 드럼의 쌍기둥으로 이어지고 이것을 돔의 리브가 받아 하늘로 솟아오르는 느낌을 줍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이 전반적으로 수평성에 집중하였다면, 외벽의 연속적인 기둥 배치는 수직성을 증대시켜 건물 전체에 균형감을 줍니다. 미켈란젤로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계획을 전체적으로 확정하지 않고 부분적으로 만들어가며 공사를 진행했다고 합니다. 오랜 기간 공사가 진행되는 프로젝트의 경우, 건축가는 누군가에 의해 자신의 설계가 수정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또한 설계 전체를 공개할 때 다른 건축가들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미켈란젤로 역시 이전의 브라만테, 라파엘로, 상갈로의 계획안을 상당 부분 수정하고 실제로 철거도 감수하였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천재성을 믿고 후계자들이 그의 설계에 따라 공사를 하도록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서 대성당 공사를 진행하였다고 합니다. 미켈란젤로는 1564년 돔의 상부가 지어지는 것을 보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를 이어서 자코모 델라 포르타(Giacomo della Porta, 1533~1602)가 돔의 끝을 뾰족한 형태로 올리면서 돔 공사를 마무리하였습니다. 1603년 클레멘스 8세 교황은 미켈란젤로의 중앙집중형 평면과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의 네이브를 모두 살리는 것을 조건으로 건축가 카를로 마데르노(Carlo Maderno, 1556~1629)에게 대성당 완공을 지시하였습니다. 하지만 1605년 바오로 5세 교황이 새로 선출되자 미켈란젤로의 중앙집중형 평면을 새로운 네이브로 교체하는 의견이 우세하였고, 마데르노는 그에 따라 다음 해부터 공사를 시작하였습니다. 마데르노의 설계는 미켈란젤로의 계획을 상당 부분 바꾸어 놓았습니다. 계단식으로 줄어드는 형태의 3랑식 네이브가 3베이 추가되면서, 평면은 신자들을 많이 수용할 수 있는 라틴 크로스 형태가 되었습니다. 이제 성 베드로 대성당은 로마의 주교좌성당을 능가하는 세계 교회의 중심으로 탈바꿈하였습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07-06 제3449호 20면

“AI가 소개하는 불교 콘텐츠 어때요?”

재가불교단체 ‘한국불교 하이붓다’(대표 지공선사, 이하 하이붓다)가 MZ세대를 겨냥해 인공지능(AI)과 디지털 기술을 접목한 불교문화 콘텐츠 제작에 주력하고 있다. 최근 뉴진스님 등 ‘힙불’(힙한 불교)의 등장으로 전통 불교에 대한 거리감을 줄이고 MZ세대의 접근성을 높이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하이붓다는 지난 5월 5일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AI 기술을 적용한 공식 홈페이지(https://hibuddha.co.kr)를 개설했다.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불교 교육과 경전 강의, 법회 활동 등을 온‧오프라인으로 제공하고 있으며, ‘하이붓다 뮤직’과 염불 수행을 통해 불교의 지혜를 쉽게 전달하고 있다. 홈페이지의 주요 온라인 프로그램 중 하나인 ‘D-100 프로젝트’는 사용자가 자신만의 기도문을 작성하고 100일 동안 기도를 실천하며 삶의 변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구성됐다. ‘하이붓다 뮤직’은 불교 경전을 현대적 감성의 음악으로 재해석해 어려운 불교 교리를 보다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 외에도 병으로 지친 이들에게 치유의 에너지를 전하는 ‘감로수 캠페인’, 삶의 고통 속에서 희망을 전하는 ‘힐링터치 캠페인’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지공선사 대표는 “불교라는 종교를 단순히 배우는 것을 넘어 일상에서 실천하고 성장할 수 있는 ‘디지털 도량’을 선보이고자 했다”며 “AI 기술을 활용한 불교 음악과 애니메이션을 통해 젊은 세대는 물론 일반 시민과 불자들에게 한층 친근하게 다가갈 것"이라고 밝혔다. 지공선사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지공선사TV’는 구독자 3만 명을 넘겼다. 하이붓다는 신라 원효 스님의 정신을 계승해, 중생 구제의 뜻을 현대적으로 실현하고 불교 중흥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발행일 2025-07-06 제3449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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