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를 보내주십시오] 성 베네딕도회 진 토마스 신부(상)

1962년 3월 10일, 29살 때 독일 함부르크에서 배를 타고 42일간의 고생 끝에 부산에 도착한 일을 ‘좋은 휴가’였다고 웃어넘긴 진 토마스 신부(토마스 모어·Joseph Wilhelm Timpte·91·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화순분원). 진 신부는 한국에서 사제로, 교수로, 선교사로, 수도원 수련장으로 다양한 역할을 맡아왔다. 올해 수도서원 70주년을 맞은 진 신부의 한국에서의 여정을 2회에 걸쳐 살펴본다. 선교사 꿈꿨지만 한국행은 뜻밖 “꼭 신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그저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싶었습니다.” 선교사가 꿈이었지만 혼자서는 어려울 것 같아 수도회에 들어와 양성 과정을 자연스레 받고 사제가 됐다는 진 신부. 1950년대 전 세계에 퍼져있던 공산주의의 심각성 때문에 그를 해결하기 위한 선교 열망이 커졌다. “원래는 아프리카에 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한국에 파견됐습니다. 그냥 순명했죠.” 순명이 쉽지만은 않았다. 북한의 강제 노동 수용소를 경험한 선배 선교사들이 한국에 대해 조언해 주는 말은 언어를 배우기 어렵고 너무 춥다는 것뿐이었다. 처음엔 파견지를 바꿔달라 얘기도 해봤지만 수도회 결정에 순명한 결과로 한국에 온 것을 지금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성 베네딕도회의 기본 원칙인 ‘순명’을 하면 하느님께서 은총을 내려주심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진 신부는 한국에 대한 첫인상으로 “너무 가난하고 비참해 보여서 충격을 받았다”고 전했다. 학교와 병원을 제외하고는 전부 판잣집이었고, 부산에서 대구로 가는 기차 밖으로 보이는 것은 모두 초가집뿐이었다. 진 신부는 “한국이 가난하다고 말은 들었지만 직접 심각한 현실을 마주치자 너무 슬프고 불쌍했다”고 밝혔다. 이 애처로운 땅에서 진 신부는 몇 년 안 되는 본당 사목을 시작한다. 33세에 수도원 수련장이 되다 “오토바이 타고 전깃불도 없는 거리를 달리며 공소를 찾아다녔어요. 스릴 있었죠.” 많은 사람이 열린 마음으로 혹은 구호물자 때문에라도 세례를 받던 시절이었다. 경북 상주 서문동본당 주임으로 2년 있을 땐 신자 수가 2000명에서 2500명으로 늘어나기도 했다. 한국 이름도 지었다. 철학을 전공했다고 해서 관련되도록 글월 ‘문’에 길 ‘도’를 써서 ‘문도’가 이름이 됐다. 원래 독일어 이름의 ‘진’을 성으로 써 한국 이름은 ‘진문도’가 됐지만 거의 병원이나 공공기관 등에서만 쓰고 평소에는 ‘진 토마스’로 불린다고. 본당에서 잘 지내던 진 신부는 갑작스레 왜관수도원 수련장으로 발령받았다. “당시 아빠스가 35세에 수련장이 될 수 있다는 교회법을 따르지 않고 로마에서 관면을 받으면서까지 33세인 저를 수련장으로 발령했어요. 너무했다고 생각했죠.” 한국 생활 4년 차. 한국말은 어느 정도 적응한 상태였지만 지난 29년을 보냈던 독일 문화가 더 익숙할 때였다. 뜻하지 않은 수련장 발령에 놀랍고 걱정됐지만 진 신부는 다시 순명했다. “독일인들과 많이 다른 한국인들을 수련시키기 너무 힘들었다”고 그때를 회상한 진 신부는 수련장을 세 차례나 역임하며 15년 동안 현재 왜관수도원장인 박현동(블라시오) 아빠스를 비롯한 100여 명의 수도자 양성에 힘썼다. ‘말씀’의 선교사 진 신부는 상주 가르멜 수녀원 언저리에 예쁜 공소를 하나 지은 적이 있다. 하지만 본인은 성당을 짓거나 다른 사업을 하는 능력은 없다고 손사래를 쳤다. 은총을 받은 것은 ‘말씀’ 쪽이 아닐까 진 신부는 조심스레 추측했다. “저희 부모님과 이모, 고모 등 모두 학교 교사였어요. 그 유전이 어느 정도 있나 봐요.” 1965년 로마 교황청립 성 안셀모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진 신부는 30년간 왜관 가톨릭신학원(현 대구가톨릭대학교 가톨릭신학원)에서 교회사를 가르쳤고 신학원 원장도 역임했다. 영남지방 수녀들은 거의 자신을 안다고. 뿐만 아니라 피정 지도나 외부 강의도 많이 나간다. 진 신부는 “작년엔 두 번 정도밖에 피정 지도를 못 나갔지만 그 전엔 못해도 다섯 번은 나갔다”고 말했다. 말씀으로 무장한 선교사로서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고 싶지만 선교가 어려운 나라들이 있다. 파키스탄, 북한 등은 신자가 되려면 이민을 가야 할 정도이고 베트남과 중국도 박해가 어느 정도는 남아있다. 한국도 처음엔 쉽지 않았다. 진 신부는 “6·25전쟁 때 한국 사제들이 많이 사살당해서 그 수가 독일 사제들보다 적었다”며 “지금은 많아진 한국 사제가 독일에 가는 것도 교회의 보편성 안에서 서로 새로운 자극을 주고받는 데 좋은 것 같다”고 선교사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기후위기, 50년 경력 유기농민도 좌절시킬 만큼 생계 위협

“올해는 추석 때까지 폭염이 기승이네.” 도시 사람들이 지난해보다 길고 온도가 높아진 여름으로 지구온난화를 체감할 때, 농부들은 무서운 자연의 변화를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고 있다. 당장의 더위는 에어컨 온도를 높여 버틸 수 있을지 모르지만, 바뀐 자연 생태계는 인간이 버틸 수 없는 환경을 점차 확산시키고 있다. 이제 농부들에게 ‘하늘이 짓는 농사’는 옛말이 됐다. 절기에 따라 씨를 뿌리고, 꽃을 피우고, 가지를 다듬고, 수확했던 농사가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농부의 경고는 결코 우리 삶과 무관하지 않다. ■ 사과, 한국 식탁에서 사라질 위기 지난해 수확량이 적어 ‘금값’이었던 사과가 올해 추석에는 색이 들지 않아 농민들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다. 사과는 밤과 낮의 일교차가 있어야 당도가 올라오고 색이 빨갛게 드는데, 올해는 여름철에 기록적인 고온이 지속되면서 야간에 기온이 떨어지지 않아 착색이 되지 않은 것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업관측정보에 따르면, “올해 사과는 태풍 피해가 없어 생육상황은 전년 대비 양호하지만 홍로의 경우 여름철 고온으로 일소 피해가 전년 대비 증가했다.” 사과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봄이다. 4월에 꽃이 풍성하게 잘 피어야 꽃이 진 곳에 질 좋은 열매가 달린다. 5월부터 이 열매들을 선별하는 작업을 거치는데, 이후 나무에 남아있는 ‘착과수’는 그해 생산량의 주요한 지표가 된다. 지난해 사과 수확량이 적었던 이유는 봄이 이례적으로 따뜻했기 때문이다. 보통 4월 이후에 피는 사과꽃이 기온이 높아져 1주일 이상 빨리 핀데다, 꽃샘추위가 찾아오면서 만개한 꽃들이 얼어버렸다. 꽃이 제때 떨어지지 못한 자리에 사과가 열리지 않아 수확량이 감소하는 원인이 됐다. 게다가 길고 강한 장맛비도 탄저병을 확산시켜 수확량에 영향을 미쳤다. 이상기후로 사과 농사에 피해 빨랐던 봄과 이어진 꽃샘추위 길고 강한 장맛비도 수확 영향 농촌진흥청은 연평균 기온이 1℃ 오를 때 농작물 재배 가능 지역은 81km 북상하고, 해발고도는 154m 상승한다고 분석했다. 한국의 여름철(6~8월) 평균 기온은 2022년 24.5℃로 2002년(22.9℃)보다 1.6℃ 높아졌다. 지난 20년간 농작물 적정 재배지의 위도는 129.6km 북상하고, 해발고도는 246.4m 높아진 셈이다. 사과의 경우 기온과 이산화탄소 농도가 상승하면 크기도 작고 당도도 떨어진다. 붉은색을 내는 안토시안 함량도 낮아져 품질도 떨어진다. 2022년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이 기후변화 시나리오를 반영한 6대 과일 재배지 변동을 예측한 결과, 사과는 2070년대에 강원도 일부 지역에서만 재배되고 지금과 같은 맛을 내는 고품질 사과는 2090년에 완전히 사라질 것으로 내다봤다. ■ 하늘이 도와줬던 농사, 인간을 외면하다 “내가 아무리 기술이 좋고 노력을 해도 하늘이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농사입니다. 10년 전부터 급속도로 달라진 날씨는 50년 이어온 사과 농사를 접어야 하나 고민하게 될 만큼 생계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충북 단양에서 50여 년간 사과 농사를 짓고 있는 남원식(비오) 씨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 수확량에 시름이 깊다. 땅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고자 20년 전부터는 유기농으로 농사를 짓고 있지만 예전과 달라진 날씨는 병충해와 냉해, 잎이 빨리 져버리는 황화현상 등을 발생시켜 50년 경력 농부가 사과를 키우기 어려운 환경으로 바꿔놨다. 유기농업 농민 의지 꺾일 만큼 자연의 도움 받을 수 없는 상황 “급격한 자연 변화에 큰 위기감” 길게는 몇십 년간 키운 자식과 같은 사과나무. 수확량이 적어지자 5년 전 어린나무를 새로 심었지만 올봄, 이상기온으로 갑자기 날이 추워지자 동해를 입어 몇 그루의 나무가 죽었다. “한국의 날씨는 원래 봄에서 여름으로, 여름에서 가을로 갈 때 기온이 천천이 올라갔다 천천히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봄과 가을이 짧아지고 기온이 급격히 변하는 양상이 됐죠. 5년 전부터 이러한 변화가 느껴진 것 같아요. 사과나무는 한겨울 이상 고온으로 땅이 일찍 녹으면 나무도 봄 준비를 하기 위해 뿌리에서 물을 끌어올리는데 이때 갑자기 기온이 낮아지면서 나무가 얼어버린 것이죠.” 올여름, 전보다 많이 내린 장맛비도 내년 작황에 걸림돌이다. “물을 싫어하면서도 많이 필요로 하는 것이 사과나무입니다. 적정한 수분이 있어야 잘 자라죠. 비가 많이 내려 뿌리가 젖어있으면 잎이 떨어지는 황화현상으로 인해 열매에 맛이 떨어집니다. 게다가 장마가 길어지면 내년에 꽃을 피울 수 있는 꽃눈을 만들지 못해 내년 농사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칩니다.” 땅을 살리고자 화학비료, 화학농약을 사용하지 않는 남원식 씨에게 기후변화는 뚝심 있게 지켜 온 농부의 50년 고집을 꺽을 만큼 위협적인 존재가 됐다. 천연재료로 만든 농약과 비료는 화학농약만큼 살충력이 덜하기에 더욱 정성 들여 사과를 돌보고 있지만 기후변화로 인해 관행농으로 수확한 사과의 크기와 색을 따라가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남원식 씨는 “유기농으로 재배하기 어려운 작물이 사과인데, 기후변화로 인해 어려움이 더욱 가중되고 있는 현실”이라며 “도시의 사람들은 자연의 직접적인 변화들을 잘 모르겠지만 우리 농부들은 하루하루 달라지는 자연의 변화를 보며 큰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2024-09-15

[함께 보는 우리 성인과 복자들(10·끝)] 성 이영덕·이인덕 자매 / 복자 정광수·정순매 남매

조선 후기 박해 시대. 가장 가까운 가족의 지지 없는 신앙생활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성 이영덕(막달레나·1812~1839)과 성 이인덕(마리아·1818~1840) 자매, 복자 정광수(바르나바·17??~1802)와 복자 정순매(바르바라·1777~1801) 남매는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은 다른 가족 구성원과의 갈등 속에서도 신앙을 증거했다. 성인과 복자 특집 연재 마지막 순서로 가정을 떠나 교회에 몸 바친 자매와 남매의 이야기를 알아본다. 가족 구성원의 반대도 꺾지 못한 신앙 성 이영덕·이인덕 자매는 외교인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자매는 어린 시절 외할머니에게 신앙을 배워 천주교에 입교했다. 다만 아버지가 천주교를 몹시 싫어해 세례도 아버지가 지방으로 여행 간 틈을 타 식구들과 함께 받을 수밖에 없었다. 언니 성 이영덕에게 혼기가 다가오자 아버지는 외교인과 혼인할 것을 강요했다. 동정을 지키기로 한 성인은 꾀병을 앓거나 심지어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써 보이기도 했지만 완고한 아버지를 꺾지 못했다. 복자 정광수·정순매 남매는 경기도 여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오빠인 정광수 복자가 일찍이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관심을 가졌고 하느님의 종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남매도 가족의 반대에 부딪혀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다. 정광수 복자가 같은 교우였던 복자 윤운혜(루치아)와 혼인하는 것을 부모가 반대해 혼인 문서도 주고받을 수 없었다. 당연하게도 집안에서 교리 가르침을 지키지 못했다. 이런 와중에 여동생 정순매 복자는 오빠 부부에게서 신앙을 배웠다. 본가를 떠나 신앙생활 성인 자매는 신앙생활을 싫어한 아버지를 떠나기로 작정했다. 마찬가지로 신자였던 어머니와 함께 집을 나와 교우들 집에 숨어 살았는데, 성 앵베르 주교는 세 모녀에게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했다. 하지만 조선 사회에서 한 번 가출한 양반집 부녀자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 앵베르 주교는 그녀들이 살 집 한 채를 마련해줬다. 자매는 어머니를 모시고 조그마한 집에서 굶주림과 추위로 많은 고생을 했다. 하지만 마음 놓고 신앙을 고백할 수 있어 곤궁과 고통을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또 주님께 감사하며 동정을 지켜나갔다. 복자 남매는 제사 참여를 요구하는 부모님을 떠나 1799년 한양으로 이주한다. 정광수 복자와 그 아내는 자신들의 집 한편에 건물을 짓고 복자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모셔와 미사를 봉헌하거나 교우들의 모임 장소로 제공했다. 여동생 정순매 복자도 부부를 성심성의껏 도우며 교회에 봉사했다. 또 그녀는 동정을 결심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허가와 혼인하였다가 과부가 되었다”며 과부로 행세했다. 남매는 교회 서적과 성물을 신자들에게 보급하는 일에도 힘썼다. 학식이 깊었던 정광수 복자는 교회 서적을 신자들 여럿이 볼 수 있도록 베끼는 일을 담당했고, 정순매 복자는 이 베낀 서적들을 보급하는 일을 맡았다. 정순매 복자는 동정녀 공동체 일원으로도 활동했다. 성인 자매와 복자 남매, 천주 품으로 돌아가다 성인 이영덕·이인덕 자매와 그 어머니는 기해박해 당시 앵베르 주교가 체포되면 함께 기쁜 마음으로 자수하기로 마음먹었으나, 1839년 6월 어느 날 포졸들이 갑자기 들이닥치는 바람에 자수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포도청에 잡혀 온 이들은 옥에서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무척 고생했다. 온갖 잔악한 고문 속에서도 신앙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형조에서도 새로운 고문을 가했으나 쓸데없는 일이었다. 그들을 괴롭게 한 건 고문이 아니라 옥에서 함께 고초를 겪던 어머니가 열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봤다는 것이었다. 곧이어 1839년 12월 29일 언니 성 이영덕은 28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에서, 이듬해 1월 31일 동생 성 이인덕은 22세에 당고개에서 각각 순교했다. 복자 남매는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될 것을 예상했다. 이미 정광수 복자는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된 상태였다. 결국 그해 남매는 체포됐다. 그들의 용기는 형벌 과정에서 드러났다. 모진 고문 속에서 그 어떤 밀고도 하지 않고 버텼다. 특히 포도청은 여동생 정순매 복자가 과부 행세를 한 ‘요녀’(妖女)라며 배교하라고 위협했지만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정광수 복자는 1802년 1월, 여동생 정순매는 1801년 7월에 순교했다. 이들은 모두 고향 여주로 이송돼 참수당했는데, 고향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였다. ◆ 서울대교구 당고개 순교성지 서울대교구 당고개 순교성지는 기해박해가 끝날 무렵인 1839년 열 명의 남녀 교우가 순교한 곳이다. 성 이인덕도 여기서 순교했다. 당고개 순교성지는 ‘찔레꽃 아픔 매화꽃 향기’를 주제로 조성됐다. ‘찔레꽃 아픔’은 박해의 고통을, ‘매화꽃 향기’는 하느님의 은총을 의미한다. 성지 내 십자가의 길 14처는 이곳에서 순교한 이들 중 하나인 복자 이성례(마리아)가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구성으로 이뤄져 고난의 길과 순교의 영광을 함께 느낄 수 있게 했다. 성지는 지역 재개발로 2008년 철거됐다가 3년간의 재개발 공사를 마치고 2011년 9월 봉헌식을 치렀다. 신계역사공원 내에 있으며 지하 1층에는 성당과 전시관, 사무실이 있고 지상1층 잔디광장에는 야외 제대와 십자가의 길, 한옥 성물방이 있다.

2024-09-15

수난까지도 그리스도와 온전히 일치하고자 했던 사랑의 표징

1224년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즈음,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육체에 그리스도의 거룩한 다섯 상흔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대못이 손과 발을 뚫는 고통이 그대로 성인을 강타했다. 올해로 800주년을 맞은 성 프란치스코 ‘오상 기적’ 이야기다. 프란치스코 성인을 통해 교회 내 가장 신비스러운 기적 중 하나인 ‘오상 기적’이 현대인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지 알아보자. 하느님과 인간의 ‘사랑의 표시’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 시대의 신앙생활 맞게 해석해 신앙적 메시지로 이해해야 연민과 사랑의 성인 오상 기적을 증언하는 이는 프란치스코 성인 전에도 있지만,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를 모두 받은 성인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처음이라고 알려져 있다. ‘제2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라는 별명처럼 성인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다. 새들과 대화하고 늑대를 순한 양으로 만들었다는 일화처럼 성인은 인간뿐 아니라 하느님이 창조한 모든 자연을 사랑하고 연민을 가졌다. 이런 면에서 오상 기적은 우주 만물에 대한 사랑, 더 나아가 그리스도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그리스도와 온전히 일치하고자 걸어온 성인의 삶과 맞닿아 있다. 그 오상 기적의 은총을 입은 건 그 삶의 여정이 거의 마무리돼 가던 때, 홀로 더 깊이 관상하기 위해 찾아간 라베르나 산에서였다. 홀로 고요함 속에서 받은 ‘오상 기적’ 1224년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즈음 프란치스코 성인은 라베르나 산에 오른다. 성인은 40일간 동료들과 떨어져 단식과 금욕생활을 할 작정이었다. 세 명의 동료와 함께 지내는 것마저도 고요의 신비 속으로 젖어 드는 데 방해가 된다고 느껴 절벽 위에 홀로 지내겠다며 동료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하느님의 거룩함, 선과 최고선, 사랑, 아름다움, 지혜, 겸손 등. 라베르나 산의 고독한 고요 속 성인이 깊이 관상한 신비들이다. 그러던 어느 날 고요를 깨는 환시를 목격한다. 여섯 개의 날개를 단 세라핌 천사와 빛으로 휩싸인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나타났다. 기적은 환시로 끝나지 않았다. 성인의 두 손바닥과 두 발, 옆구리에 그리스도가 입었던 수난 상처가 그대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성인의 전기 「프란치스코의 잔 꽃송이」 2부 3장의 표현을 보면 손에 단순한 구멍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에 박혔던 못도 적나라하게 생겨났다. 수도복을 적실 정도로 피를 흘린 프란치스코 성인은 라베르나 산에서의 일을 감추고 싶었다. 하지만 형제 수도자들은 피에 물든 그의 수도복과 핏자국의 위치를 보고 이 일을 알아챘다. 상처는 아물지도 심해지지도 않았다. 끊임없이 성인에게 그리스도 수난의 고통을 그대로 안겨줄 뿐이었다. 하지만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리스도와 일치하고자 했던 성인이 그토록 원하던 고통이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곧 눈마저 멀었다. 이즈음 라베르나 산에서 일어난 일을 기억하며 믿음의 절정 속에서 드린 기도는 노래 ‘태양의 찬가’로 전해 내려온다. 성인은 2년 뒤인 1226년 10월 세상을 떠났다. 오상 기적, 하느님과 인간의 사랑으로 이해해야 오늘날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세상에 사는 현대인에게 오상 기적은 비현실적이면서도 자극적으로 다가온다. 더불어 가시적인 기적에 대한 과도하고 잘못된 몰입에 대한 우려도 있을 수 있다. 한국교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가톨릭 이단 ‘마리아의 구원방주’ 교주 윤홍선(나주 율리아)도 오상을 받았다며 주장한 바 있기에 더욱 그렇다. 작은형제회 고계영 신부(바오로·영성신학)는 “우리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오상 기적을 이 시대의 신앙생활에 맞도록 해석해 이해해야 한다”며 “성경 속 기적 이야기들을 문자 그대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가 하고자 하는 ‘신앙의 메시지’를 알아듣는 것과 같다”고 설명한다. 결국 ‘오상’이 현재를 사는 신앙인에게 무엇을 전달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고계영 신부는 이어 “오상의 일차적인 의미는 하느님께서 성인을 사랑하셨다는 사랑의 인장이고, 또 성인이 하느님을 놀랍도록 탁월하게 사랑했다는 사랑의 표시”라며 “결국 오상 기적을 보고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것인지 깊이 헤아리며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아무리 화려하고 놀라운 기적도 결국은 그리스도교적 ‘사랑’으로 귀결되는 것을 알 수 있다. ◆ 오상을 받은 성인들 그리스도교 역사를 훑어보면 오상의 사례가 무려 400건에 이른다. 다만 대부분 가톨릭교회가 공인하지 않는다. 프란치스코 성인보다 앞서 우아니(Oignies)의 성녀 마리아도 같은 체험을 증언한다. 오상 기적의 은총을 입은 것으로 잘 알려진 또 한 명의 성인은 피에트렐치나의 비오 성인(카푸친 작은형제회·1887~1968)이다. 1910년 23세의 나이로 카푸친 작은형제회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된 지 1년 차부터 몸에 오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몸의 상처가 대외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건 1919년부터다.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상처가 아물지 않고 피가 계속 흘렀다고 전해진다. 성인은 오상으로 인해 오해를 받아 3년 간 성무집행을 정지당하기도 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도 오상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카타리나 또한 오상을 숨기다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야 그 상처가 세상에 알려졌다. 다만 교회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오상만을 공식적으로 기념한다. 교회는 올해 1224년 프란치스코 성인이 오상을 받은 지 800년이 되는 해를 맞았다.

2024-09-15

평신도 대표 성인 정하상으로부터 배우는 ‘평신도의 덕목’

9월 20일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이다. 대축일을 맞아 103위 성인 중 평신도 대표로 선정된 성 정하상(1795~1839)으로부터 평신도의 덕목을 배워본다. 성 정하상 가족은 아버지인 복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1760~1801)과 어머니 성 유조이(체칠리아·1761~1839), 이복형 복자 정철상(가롤로·?~1801) 및 친동생 성 정정혜(엘리사벳·1797~1839)까지 순교한 순교자 집안이다. 성 정하상은 회장 격인 지도자이자 활발한 사제 영입 운동과 복사 활동, 한국 최초의 호교론서인 「상재상서」(上宰相書) 작성, 순교 등으로 평신도에게 귀감을 준다. 우선 봉사자를 구하기가 어려워진 요즘, 박해 시대에도 지도자 역할을 한 성 정하상에게서 리더십과 책임감을 배울 수 있다. 1821년경, 약 27세였던 성인은 사실상 한국교회의 사무장 격이었다. 그는 성 현석문(가롤로·1797~1846), 복자 이경언(바오로·1792~1827) 등과 신자들을 가르치고 지도했으며, 거의 해마다 몇몇의 신자들을 데리고 북경을 오가며 여러 성사를 볼 기회를 줬다. 다음으로 성인이 중국까지 건너가 사제 영입 운동을 주도했다는 면에서 수동적인 태도보다는 능동적인 순명의 정신을 따를 수 있다. 성 정하상은 북경까지 9회, 변문까지는 11회나 왕래하는 등 계속되는 좌절에도 교황에게 탄원서를 보내고 북경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며 사제 영입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그의 지성에 힘입어 한국교회는 성 앵베르 주교(라우렌시오·1796~1839) 영입에 성공했다. 중국에서 사제 영입 운동…능동적인 순명 정신 실천 순교 전 제출한 상소문 통해 당당히 하느님 실존 설명 또 1839년 재상에게 보내는 상소문인 「상재상서」를 작성해 당당히 조정에 목소리를 냈던 성 정하상을 통해 신학적 지식에 대한 열정과 종교 간의 화합, 정치·사회 문제로의 적극적인 참여를 본받을 수 있다. 성인은 체포 후 포장 대리에게 제출한 「상재상서」에서 “공자는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고 말하였다”라며 “참으로 충서, 효제, 인의예지가 모두 이 (십계) 속에 들어 있으니, 무엇이 티끌만큼이라도 부족한 것이 있는가”라는 말을 통해 천주교가 유교와 동떨어지지 않았음을 밝혔다. 또 충효 사상에서 오는 부모의 명과 임금의 명, 천지 대군의 명의 크고 작음을 비교하며 “천주를 받들어 섬김은 구태여 임금의 명에 어기고자 함이 아니고 부득이한 데서 나옴이다”라고 하느님의 실존을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성인에게서 순교로 생을 마친 뜨거운 신앙을 배울 수 있다. 주리를 틀리고 톱질을 당하는 등의 고문에도 성 모방 신부(베드로·1803~1839)와 성 샤스탕 신부(야고보·1803~1839)가 있는 곳을 자백하지 않은 성 정하상은 마침내 1939년 9월 45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2024-09-15

“한가위, 우리농과 함께 생명 밥상 차려보세요”

몸과 마음이 풍성하길 기원하는 한가위. 올해는 생명 살림 농부가 수확한 농산물들과 함께 땅과 밥상, 사람이 모두 건강해지는 명절을 보내면 어떨까.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에서 준비한 한가위 선물 꾸러미를 소개한다. ■ 한우 지역·자가 농사 부산물을 먹고 자란 한우는 네 종류의 세트가 준비됐다. 국거리와 불고기로 구성된 정육 세트는 15만4600원, 양지와 국거리, 불고기로 구성된 특선정육 세트는 16만1400원에 판매한다. 스테이크 세트와 등심 세트도 각각 24만300원, 21만8700원에 구입할 수 있다. 예약 마감은 9월 5일 오전 10시. ■ 한돈·육가공식품 한돈 선물 꾸러미는 무항생제 한돈 부위를 엄선했다. 아울러 산소 포장으로 신선함을 더했다. 삼겹살, 보쌈, 불고기, 장조림 고기로 구성된 한돈모듬선물세트는 6만1600원, 떡갈비·매운떡갈비·표고떡갈비·동그랑땡까지 총 1.4kg로 구성된 떡갈비선물세트는 3만3400원에 판매한다. 한우사골곰탕선물세트, 고기곰탕선물세트, 도가니탕선물세트도 각각 1만4400원, 2만2600원, 2만1200원에 판매한다. 공급일은 9월 14일까지다. 전주교구 대광목장에서 생산한 유기농유제품 세트는 6만7000원, 유기농치즈 세트는 10만1000원에 판매한다. 예약마감은 9월 5일 오전 10시다. ■ 과일 우리농 과일은 화학비료, 항생제, 호르몬제, 3대 금지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정직하게 키워냈다. 광주대교구 임성섭·윤범석 농민이 수확한 사과 5kg은 각각 6만1600원(특대), 5만3900원(특), 4만6200원(대)이다. 춘천교구 마용하·이대봉 농민의 사과도 각각 6만9900원, 6만4300원, 5만8600에 판매한다. 배는 광주대교구 박기성 농민이 수확했다. 상과 특1호 상품이 5만3900원, 5kg 대2호 상품은 4만6200원이다. 사과의 공급일은 미정으로 우리농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차례상에 빠질 수 없는 곶감도 전주교구 농민이 정성스레 준비했다. 대봉곶감 10개가 1만8100원, 흑곶감 선물 세트는 4만8100원에 판매한다. 광주대교구 지리산농원에서 만든 잣호두 세트는 7만600원, 마산교구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에서 만든 딸기잼·무화과잼·귤잼 세트는 3만300원, 딸기잼과 무화과잼 세트는 2만200원에 판매한다. ■ 더덕·버섯 황토에서 자란 3년근 무농약 더덕도 한가위의 풍성함을 더한다. 광주대교구 이국원 농민이 재배한 더덕선물은 총 6개 세트로 구성, 3만7000원부터 13만8600원까지로 다양하다. 백화고와 흑화고 세트는 각각 12만5000원, 6만6200원. 표고슬라이스와 분말로 구성된 표고분말혼합1호는 3만2400원에 판매한다. 표고절편 200g도 3만8300원에 구입할 수 있다. 공급일은 9월 14일까지다. ■ 수산·건어 수산물 역시 자연의 섭리를 따른 방식으로 수확하고 말렸다. 진도 바다에서 3년 이상 키워낸 전복은 4만9200원부터 6만8100원까지 5가지 세트로 구성했다. 전복 세트의 예약마감은 9월 9일 오전 10시다. 이밖에 고등어 선물세트가 5만5000원, 제주옥돔 6미로 구성된 선물세트가 12만2000원, 제주갈치 4미로 구성된 선물세트가 18만5000원에 판매된다. 수산물 선물세트 예약마감은 9월 5일 오전 10시다. 가정에서 쓰임새가 많은 건어물도 다양한 세트로 준비했다. 국멸치, 꽃새우, 파래김, 건미역 등으로 구성된 되살이 선물세트는 총 4종류를 판매한다. 황태선물세트도 3만7800원, 5만400원, 7만1400원 세 가지로 준비했다. 광주대교구 해양수산에서 내놓은 바다선물꾸러미도 다시마, 볶음멸치, 국물멸치, 구운김 등으로 풍성하게 준비했다. 건어물 공급일은 9월 14일까지. ■ 임산물·가공 마삼교구 이경희 농민은 가족을 위하는 마음으로 씨를 뿌려 유기농 산양산삼을 키웠다. 한가위 할인가로 만날 수 있는 산양산삼은 5년근 5뿌리 7만9000원부터 9년근 42만 원까지 준비했다. 산양산삼 예약마감은 9월 5일 오전 10시. 우리농은 건강에 도움을 주는 홍삼도 한가위 선물로 추천한다. 홍삼봉밀절편과 홍삼농축액, 홍삼액은 물론이고 활록녹용엑기스도 판매한다. ■ 기름·양념·생명쌀 화학농약과 비료 없는 건강한 땅에서 키워낸 주잡곡과 생명농산물로 만든 양념은 가족의 건강을 위해 만드는 음식에 생명력을 더한다. 매실고추장·찹쌀고추장·양념깻잎·전통된장·전통쌈장·전통간장으로 구성된 성가정선물세트 6종은 5만3500원, 4종은 3만5600원에 판매한다. 찰보리·찰흑미·오색찹쌀·15곡으로 구성된 우리농잡곡모음도 두 세트가 준비됐다. 유기농 발아현미·발아흑미·발아오색혼합으로 구성된 미실란들녘세트도 2만5400원, 4만4800원 두 세트가 판매된다. 전주교구 꼬숨기름세트와 안동교구 은혜농부들의 기름세트도 9월 14일까지 공급된다. ■ 차례상·가공 추석 다과상에 빠질 수 없는 송편과 한과도 풍성하게 준비했다. 가공식품들은 모두 우리농 생명쌀과 우리밀로 만들었다. 송편은 생송편과 생모싯잎깨송편, 단호박녹두송편, 백미깨송편, 흑미녹두송편을 판매하며 찹쌀산자(1만2900원), 차례상약과(1만1000원), 우리밀약과(6200원), 찹쌀유과(4800원)도 구입할 수 있다. 다양한 한과가 들어간 나드리 한과 540g도 3만2500원에 만날 수 있다. 우리밀로 만든 전병선물모듬(대) 2만5300원, 찹쌀모나카선물모듬은 1만3900원이다. 공급일은 9월 14일까지. < 주문방법 > 한가위 선물 꾸러미는 공급일 기준 2일전 오후 1시에 주문이 마감된다(신선물품은 사전마감 2일전 오전10시). 주문은 전화(02-2068-0140), 팩스(02-727-2279), 온라인(www.wrn.kr)을 통해 가능하며 우리농 상설나눔터에서도 구입할 수 있다. < 우리농 상설나눔터 > ▶ 명동직매장(서울 중구 명동길80 가톨릭회관) ▶ 서초협동조합(서울 서초구 효령로 47길 32) ▶ 한강협동조합(서울 용산구 이촌로 300) ▶ 인천답동(인천 중구 우현로50번길 43, 1층)

2024-09-08

고문에도 당당했던 어린 순교자…부모 굳건한 신앙 물려받은 덕분

선교사 10명을 포함한 한국교회 103위 성인은 모두 순교자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 생명을 내놓고 목숨을 바친 것이다. 이들 중 유대철(베드로) 성인의 나이는 당시 13세였다. 성인은 옥에 갇힌 아버지 유진길(아우구스티노) 성인과 여러 순교자가 보여준 영웅적인 모범에 감복해서 어린 나이에도 순교를 각오했고 스스로 관헌을 찾아가 결국 순교의 면류관을 썼다. 조선 시대 평신도들의 자발적 신앙 노력으로 시작된 한국천주교회는 시작과 함께 혹독한 박해를 견뎌냈다. 이 과정에서 순교한 이들은 1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부지기수가 이름도 없이 스러졌다. 기록에 남은 이는 2000명에도 미치지 못한다. 고초와 형벌을 이겨내며 하느님을 드러낸 신앙 선조 중에는 유대철 성인처럼 죽음 앞에서도 굳건한 믿음을 고백하고 믿음을 지키려 애쓴 어린이나 청소년들의 자취를 찾을 수 있다. “믿고 말고요. 제가 하느님을 버릴 줄 아세요?” 전 세계 성인(聖人) 관련 사이트(CatholicSaints.Info)의 ‘어린 성인’ 명단에도 이름을 올린 유대철 성인은 어려서부터 천주교에 입교해 부친을 본받아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 어머니, 누나의 반대와 괴롭힘 등 가정의 박해 속에서도 하느님을 저버리지 않았고 지극한 효성을 보이며 그들의 회개를 기도했다. 1839년 기해박해로 많은 신자들이 잡혀가는 모습을 보고 순교의 열망을 지니게 된 성인은 자수했지만 배교를 강요받았다. 힘든 형벌과 고문에도 신앙을 굽히지 않자 한 형리가 구리로 된 담뱃대로 허벅지 살을 뜯어내며 “이래도 천주교를 믿겠느냐?”고 했다. 이에 성인은 “믿고 말고요. 그렇게 한다고 제가 하느님을 버릴 줄 아세요”라고 답했다. 화가 난 형리가 불에 달궈진 숯덩이를 입에 넣으려 하자, “자요”라며 입을 크게 벌려 형리들을 놀라게 했다. 총 14차례의 신문과 고문, 100여 대의 매, 40대의 치도곤을 맞아 피투성이가 됐음에도 성인은 평온을 잃지 않고 기쁜 표정이었다고 한다. 형리들은 배교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해 몰래 목을 졸라 죽였다. 이 바르바라 성녀도 기해박해 때 15세 어린 나이로 순교했다. 독실한 교우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두 이모 밑에서 자랐던 성녀는 체포돼 ‘어린 것이 요물이다'하여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다. 끝까지 배교하지 않아 포도청에서 형조로, 다시 포도청으로 송환되며 훨씬 가혹한 고문이 가해졌어도 꿋꿋이 참아냈다. 성녀는 그런 가운데서도 함께 갇힌 어린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다가 기갈과 염병, 고문의 여독으로 옥사했다. “내 목을 자른다면 나는 천주께로 가겠죠” 선교사들이 보낸 편지에서도 당시 어린이들의 어른 못지않은 굳은 신앙심을 들여다볼 수 있다. 리델 신부(1830-1884)는 안드레아라는 신자 집에 피신 중 그의 딸 12살 안나와 동생들이 나눈 대화를 듣고 이를 편지에서 언급했다. 리델 신부가 다블뤼 주교의 순교 소식을 안드레아 내외와 나눴고, 이를 엿들은 어린 자녀들이 자기들끼리 이야기한 것을 이번에는 리델 신부가 들은 것이다. 안나가 “우리도 붙잡아다가 ‘천주를 버려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지를 자르겠다’고 말할 거야.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자, 동생은 “난 이렇게 말할 거야. ‘마음대로 하세요. 하지만 나도 아빠처럼 할 거고 천주를 버리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내 목을 자른다면 나는 천주께로 가겠죠.’” 안나는 두 남동생을 껴안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 다 함께 치명하는 거야. 그래서 아빠랑 엄마랑 신부님하고 같이 천국에 갈 거야.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천주님께 기도를 잘해야 해'. 그 사람들이 우리를 아프게 할 거거든. 머리털이며 이도 뽑고, 팔을 빼고, 커다란 몽둥이로 때릴 테니까.”(1866년 12월 23일자 리델 신부가 가족들에게 보낸 서한) 안나와 두 동생은 이미 순교를 각오한 것이다. 1864년 11월 15일 베르뇌 주교(1814~1866)가 성영회장에게 보낸 서한에서는 천주의 수난에 함께 하지 못해 슬퍼하는 12살 소녀 사연이 나온다. 고해성사를 보러왔던 이 소녀는 아버지로부터 ‘하느님을 섬기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런 죄를 짓느니 차라리 천 번이라도 죽겠다’고 하자 몽둥이로 심하게 두들겨 맞았다. 측은한 마음이 들었던 이웃의 비신자 여인들이 와서 아버지에게 ‘더 이상 신앙생활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해 매질은 중지됐다. 하지만 소녀는 고통에 비명을 참지 못했던 것과 비신자 여인들이 아버지에게 한 약속에 자신이 항의하지 못했던 것에 마음 아파했다. 여기서 소녀를 힘들게 했던 것은 매를 맞는 아픔이 아니라, 자신을 도와준 여인들이 고마우면서도 ‘천주를 버릴 수 없다’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한 나약함이었다. 천주에 대한 소녀의 태도는 당시 조선 신자들의 평범한 신앙을 대변한다. 위앵 신부(1836~1866)는 1865년 쓴 편지에서, 언어를 배우며 지내던 집의 주인 딸 14살 데레사 이야기를 한다. 데레사는 위앵 신부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꽃들을 심어 놓았다. 여기서 어린 소녀가 보기에도 안쓰러웠던 선교사의 삶이 그려진다. 들꽃을 꺾어 신부님만을 위한 비밀 정원을 만들었던 소녀의 정성은 목자의 지친 마음을 잠시나마 위로해 주었을 것이다. 위앵 신부는 순교의 피로 신자들 사랑에 보답했다.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동생들이 아버지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과 어머니 이성례(마리아) 복자가 순교하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꿋꿋하게 믿음을 지킨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때 14세였던 둘째 아들 의정(야고보)은 감옥에 가끔 드나들며 어머니가 형장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는 것을 목격했다. ‘형장에 따라오지 말라’는 얘기를 들은 그는 옥에서 작별 인사를 했고 ‘하느님 계명을 부지런히 지키고 형제간에 서로 화목하고 사랑하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겼다. 의정과 어린 동생들이 동냥으로 구한 돈 몇 푼과 떡을 망나니에게 내밀며 “우리 어머니가 아프지 않게 단칼에 하늘나라로 가게 해주세요”라고 한 일화는 유명하다. 상속되는 신앙 「근세조선정감」에는 “천주교인들은 장을 맞고 피부가 낭자하게 터지는데도 ‘내 몸에서 혈화(血花)가 나니 장차 천당에 오르겠다’고 환호하고, 어린아이들도 부모를 따라 천당에 오르기를 원했다”고 기록돼 있다. 유대철 성인이 아버지 유진길 성인의 신앙을 보고 순교를 자청했던 것처럼, 리델 신부가 피난했던 집 안나와 동생들이 ‘아빠처럼 천주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말 같이 박해 시기 어린이들의 신앙은 열심했던 부모들에게서 이어진 것이었다. 대전교구 내포교회사연구소 소장 김성태(요셉) 신부는 “부모의 신앙은 자녀에게 상속되는 것이고, 자식의 신앙 됨됨이는 부모의 모습이기도 하다”며 “신앙은 그렇게 본보기가 되는 것임을, 또 유산처럼 전수되는 신앙의 속성을 깊이 생각해 보게 한다”고 전했다.

2024-09-08

“결핍 속에서 감사함 느끼는 순간, 하느님 발견했죠”

‘도전’마저 아름답게 추억하는 젊은이다운 굳센 마음은 어디서 주어진 걸까. 어쩌면 도전이야말로 영혼이라는 나무를 자라게 하는 ‘물’(양분)이 아닐까? 예수회 마지스청년센터(책임 김정현 요셉 신부, 이하 마지스)는 8월 13일부터 20일까지, 2027년 서울 세계청년대회(World Youth Day, 서울 WYD)와 국제 마지스 대회를 준비하는 첫걸음으로 참가 청년 20여 명과 함께 ‘2024 제주마지스대회’(이하 마지스 대회)를 펼쳤다. 일상 속 놓치고 있던 영적 성장을 찾아 순례자가 된 청년들은 일상에서 체험하기 어려운 낯설고 다양한 도전을 마주했다. 한여름 뙤약볕마저 불사한 7박8일 여정을 통해, 메말랐던 영혼을 ‘물’(도전)로 촉촉이 적시고 왔다. 예수회는 선교 역사 안에서 뿌리내려 온 본회 영성을 청년들에게 체험하게 하는 장으로 마지스 대회를 열어오고 있다. 올해도 청년들은 이냐시오 영성을 토대로 만들어진 매일의 기도 루틴을 따르고, 매일 20㎞씩 걷는 고된 일정을 소화했다. 대회의 꽃은 중간에 3박4일간 체험지로 파견돼 낯선 상황 속에서 도전을 받는 ‘체험’ 기간이었다. 각각의 다양한 테마를 가지고 소규모로 흩어져 그곳에 몰입해 살아남는 일종의 서바이벌 체험과 같았다. 이번 대회 참가 청년들은 각각 ‘순례팀’과 ‘생태팀’으로 나뉘어 현장에 투입됐다. 생태팀 청년들은 생태적 삶을 고민하는 농부의 농장에 가서, 농막에서 지내며 밭일을 돕고 직접 재배한 농산물로 음식을 해 먹는 지속적이고 생태적인 생활문화를 경험했다. 일상에서 체험하기 어려운 도전은 ‘결핍’이 돼 청년들에게 다가왔다. 참가 청년들은 30℃가 넘는 폭염 속에 행군하며 낡은 순례자 숙소로 잠자리를 옮겨 다녔다. 농가의 창고에서 다 함께 지내며 일손을 도울 때는 흙바닥 위에서 잠을 자야 했다. 물도 부족하고 식량도 부족한 채로 모든 순간을 함께 맞닥뜨리고 헤쳐 나가야만 하는 체험이었다. 모든 체험은 청년 코어팀 봉사자들이 이끌었고, 이들은 같은 도전 속에서도 공동체를 위해 식별하고 결정하는 소명을 수행했다. 결핍은 청년들이 진정 삶에서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묵상하도록 이끌었다. ‘공동체’였다. 청년들은 자신이 바라는 자기 역할과 실제 능력 사이에서 끝없이 갈등·고민하면서,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를 ‘순례자들’이라고 부르며 다독이는 가운데 ‘함께’라는 아름다운 가르침이 아로새겨졌다고 입을 모았다. 순례팀 리더 안유주(로사리아) 씨는 “순례자로서, 그리고 함께 걷는 벗들을 이끄는 길잡이로서 친구들 발의 무게를 제가 덜어줄 수 없다는 것이 미안했다”며 “서로가 서로에게 애틋해진 그 모든 순간을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는 것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공동 리더 조민수(클라로) 씨는 “무더위 속에서 오히려 자신에 집중하며 그간 놓쳤던 것들을 숙고하게 됐다”며 “모두가 이렇게 변화하고 새로운 힘을 얻어서 돌아왔다”고 말했다. 생태팀 리더 백가영 씨는 “비신자인 자신을 있는 그대로 환대해 준 공동체가 너무 고마웠다”고 전했다. 그는 “우리가 자연에게도, 함께 살아가는 친구에게도 빚지며 살듯 혼자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삶을 고민하는 충만한 시간을 선물받았다”며 웃었다. 이번 마지스 대회는 국내 체험이었지만, 참가 청년들에게 낯선 외국에서의 체험만큼 깊이 있는 체험이 됐다. 지난해 포르투갈 마지스 대회 참가자였던 유선재(미쉘) 씨는 “함께 자고 먹으며 공유하는 감정과 마음이 곧 서로에게 위로였다”고 말했다. 이어 “결핍 속에서 더 감사하게 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하느님을 발견했다”며 “그때 우리가 비로소 하느님 영광을 위해 매 순간 자신을 투신하는 청년 사도로 거듭난다는 것을 절감했다”고 전했다. ◆ 예수회 마지스청년센터는 마지스청년센터는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라는 예수회 모토에 따라, 이냐시오 영성을 따라 사는 청년 사도직을 ‘더욱 더’(라틴어 Magis) 넓혀가고자 2013년 설립됐다. 젊은이 침묵피정, ‘모하기’(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발견하기) 프로그램, 청년 토크 등 청년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이냐시오 영성을 소개하는 활동을 해왔다. 마지스는 2019년 예수회 보편적 사도적 선택 중 하나가 ‘젊은이들의 희망찬 미래여정 동반하기’로 결정되면서 보다 더 영신수련을 기반으로 한 활동에 집중해 청년들을 동반하고 있다. 가장 큰 활동 두 가지는 젊은이 침묵피정과 ‘마지스서클’이다. 젊은이 침묵피정은 청년들이 한 단기간 침묵 피정 속에서 각자의 고유한 하느님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동반한다. 정기적으로 열리며, 교구와 함께 진행하는 경우 ‘가톨릭 청년 침묵 피정’이라는 이름으로 위탁 진행하기도 한다. 마지스서클 참가자들은 6개월~1년간의 장기적이고 깊이 있는 양성을 통해 이냐시오 영성 요소를 배우고 공동체 안에서 직접 체험한다. 개별 영적 동반을 받고 자기성찰 습관을 들이며, 자연스럽게 이냐시오 영성에 맛을 들이고 다함께 체험을 떠난다. 현실 속 다양한 상황에서의 영적 식별이 무엇인지 부딪히며 배운다. 올해 진행된 마지스서클 2기는 이냐시오 영성 배움터부터 활동 봉사, 2024 제주마지스대회와 체험까지 모든 과정을 청년 봉사자들인 코어팀과 함께 기획·진행했다. 청년들이 직접 미리 양성받은 내용을 토대로 이냐시오 영성에 대한 강의를 하기도 했다. 마지스 사목자들은 팀을 정기적으로 만나 개인 영적 면담, 매달 공동체 나눔 등을 꾸준히 동반했다. 마지스에는 청년 사목자가 3명 있다. 책임 김정현 신부, 정다운(안젤라) 씨, 홍찬미(글로리아) 씨다. 이들은 각자의 특색을 살린 고유한 소그룹 모임 운영, 사목에 대한 의견 교환, 수다를 나누는 모습까지 가감 없이 보여주며 ‘함께 걷는’ 신앙 공동체의 예시를 선사한다. 청년들은 젊은 평신도 청년 사목자들이 영적 동반, 신앙프로그램 운영 등을 주체적으로 하는 모습을 보며 자연스럽게 자신의 신앙 경험이나 의견을 개진하는데 자신감을 얻는다. 김미소진(마리아) 씨는 “‘마지스 공동체 안에서 터득한 시선의 변화가 나도 모르게 평범한 일상에도 물들어 간다”며 “일상 모든 순간이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는 관상의 장이 됐다”고 말했다. 배기현(카타리나) 씨는 ‘각자의 영적 성장과 고유한 하느님 체험에 마지스 공동체가 깊은 관심을 갖고 개별적으로 동반하기에, 약함이나 부족함 속에서 하느님의 온전함을 체험한다“며 웃었다. 김 신부는 ‘마지스는 청년들 삶에 맞닿은 하느님을 발견하는 ‘영신수련의 일상화’를 전하고자 한다”며 “마음속 어떤 움직임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고 어떤 것이 아닌지 모호해 두려움과 압박감을 느끼는 청년들에게 큰 영적 해방, 평화의 체험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2024-09-08

십자가, 악의 세력 물리치고 인류 구원하신 주님 상징의 표지

9월 14일은 예수님이 못 박히신 성 십자가를 공경하고 묵상하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이다. 성 헬레나(250?~330년)가 발견한 것으로 알려진 성 십자가(보목)는 전 세계 여러 성당에 나눠 안치돼 있다. 보목은 우리나라 가톨릭목포성지 산정동준대성전, 갑곶순교성지, 절두산순교성지에도 있다. 성 십자가의 역사와 의미를 살펴보고 우리나라에 있는 보목에 대해 알아본다. 성 십자가 공경의 역사와 의미 예수님이 못 박혀 돌아가신 성 십자가 공경은 4세기 초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뒤부터 시작돼 692년 트룰라눔 교회 회의를 통해 강화됐고 787년 제2차 니케아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됐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9월 14일로 고정됐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는 세 가지를 기념한다. 첫 번째는 성 헬레나가 십자가를 발견한 것, 두 번째는 335년 9월 14일 예루살렘의 예수님 무덤 자리에 세워진 부활 대성전을 콘스탄티누스 대제(272~337)가 봉헌한 것, 세 번째는 629년 헤라클리우스 황제(575~641)가 페르시아인들에게서 예수님이 실제로 못 박혔던 십자가의 일부를 탈환한 사건에 대한 기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해 악의 세력을 이기셨기 때문에 십자가는 신자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때문에 십자가는 수치나 실패의 표지인 형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승리와 구원의 표지로 다가온다. 성 헬레나가 찾은 성 십자가 전설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인 황후 성 헬레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셨던 십자가를 찾기 위해 노력하던 중 320년에서 345년 사이에 골고타 언덕에서 몇 개의 십자가를 발견한다. 그중 하나는 병자들의 치유를 돕는 데 특별한 효과를 보였고 다른 하나는 죽은 청년을 되살리기까지 했다. 이 두 개가 바로 회개했던 우도의 십자가와 예수님의 성 십자가로 여겨졌다. 성 헬레나는 성 십자가를 셋으로 나눠 하나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에게 보내고, 하나는 예루살렘의 주교인 성 마카리오(335년경)에게, 남은 부분은 로마로 가져왔다. 성 헬레나는 로마의 자신의 궁전 안에 있는 방 주위에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유물들을 안치하기 위한 성 십자가 예루살렘 성당을 지었다. 당시 성당 바닥은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흙으로 덮었다. 성당은 몇 번의 개축을 거쳐 지금의 모습이 됐고 현재에도 보목 일부와 예수님이 쓰셨던 가시관에서 나온 가시 등 성유물이 모셔져 있다. 보목이 안치된 우리나라 성지 전 세계 여러 곳에 흩어진 성 십자가 조각은 우리나라에도 있다. 보목이 안치된 성지는 광주대교구 가톨릭목포성지 산정동준대성전과 인천교구 갑곶순교성지, 서울대교구 절두산순교성지이다. 가톨릭목포성지 산정동준대성전(주임 윤영남 시몬 신부)의 주보는 성 십자가 현양이다. 제대 아래 유리벽 안쪽으로 모셔져 있는 보목은 1963년 교황청이 “한국천주교회의 발전을 기원한다”며 한국으로 오는 멕시코 과달루페 선교사들을 격려하기 위해 과달루페 외방 선교회 초대 총장 에스칼란테(Alonso Escalante) 주교에게 전달한 것이다. 이는 다시 1962년부터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원 헥톨(Diaz Hector) 신부에게 전달됐고 2018년 광주대교구에 증여됐다. 보목은 주님 수난 성금요일과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조배를 위해 유리 밖으로 꺼내진다. 보목을 대할 때는 몸이 불편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성 십자가에 큰절 혹은 깊은 절을 권하고 있으며 장궤틀을 이용하는 묵상도 좋다. 주임 윤영남 신부는 “보목 앞에서 묵상하면 십자가라는 약함으로 우리 모두를 구원하는 힘을 보여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더 와닿게 느낄 수 있는 것 같다”며 “십자가 현양은 예수님의 죽으심뿐 아니라 부활도 상징함을 기억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보목은 갑곶순교성지(담당 민동규 다니엘 신부)에 가도 볼 수 있다. 성 십자가 조각은 성지 기념성당 제대 옆 유리관 안에 안치돼 있다. 이 보목은 전 인천교구장 고(故) 최기산(보나파시오) 주교가 1999년 주교 서품을 받을 때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1920~2005)이 선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평생 목걸이에 담아 보목을 소지했던 최 주교는 2016년 선종 일주일 전 갑곶순교성지에 맡겼다. 성지 담당 민동규 신부는 “우리는 보목 앞에서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신 주님’,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 ‘만남의 십자가’ 이 세 가지를 묵상할 수 있다”며 “특히 십자가의 세로 모양은 하느님과 사람의 연결, 가로는 사람의 시대와 시대를 연결하는데, 가로와 세로가 만나는 시간이라는 한 점에서 하느님과 사람의 만남을 묵상하면 좋겠다”고 전했다. 절두산순교성지(주임 원종현 야고보 신부) 보목은 박물관 학예실에서 관리 중이다.

2024-09-08

[성미술 작가 다이어리] 정미연 작가

묵주기도 책으로 시작한 성화 대학 졸업 후 박대성(바오로) 화백과 결혼하고, 친정엄마를 모시고 신혼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8남매 중 막내라 그런지 엄마에 대한 마음이 무척 각별했거든요. 그러나 엄마와 이별을 해야 했습니다. 엄마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묵주기도 책을 발견했어요. 낡아서 곳곳이 너덜너덜해진 기도 책에는 딸과 사위, 손주 등 기도가 필요한 사람들 이름과 기도 시작 날짜 등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이 책이 마치 엄마 그 자체인 것 같은 생각에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외국에는 가죽 표지의 성경책을 대를 이어 물려주곤 하는데, 우리도 그렇게 튼튼한 제본으로 만들어 대대로 물려줄 수 있는 기도 책이 있으면 좋겠다고요. 그 바람은 2009년 시인 신달자(엘리사벳) 선생님의 글과 제 성화로 「성모님의 뜻에 나를 바치는 묵주의 9일기도」(성바오로출판사)라는 책을 만들면서 결실을 맺게 됐습니다. 정교회 대주교님과의 만남 묵주기도 책 성화를 준비하면서 감수가 필요했습니다. 마침 우연한 기회로 한국정교회 초대교구장 소티리오스 트람바스 대주교(1929~2022)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소티리오스 대주교님은 서양화이면서도 한국적 정서가 물씬 풍기는 저의 성화를 보시며 “내가 필요할 때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티리오스 대주교님과의 재회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2010년 소티리오스 대주교님께서는 바오로 사도 관련 신문 연재 기획에 참여하시면서, 저에게 성화 연재를 제안하셨습니다. 그리고 성화 작업을 위해 그리스와 터키로 성지순례를 떠나자고 하셨습니다. 성지순례는 저에게 더없는 영광의 시간이었습니다. 묵주기도 책과 수도원 기행 등 일련의 일들을 겪으며, 하느님께서 저를 훈련시키는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은 주보 표지 성화를 그리는 경험으로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2015년(나해)에는 서울대교구, 2017년(가해)와 2018년(나해)에는 대구대교구, 2019년(다해)에는 전주·원주·제주교구 주보 표지에 ‘그림으로 읽는 복음’을 실었습니다. “고통 봉헌은 곧 순교” 주보 그림에 매달려 지냈던 시간이 끝나고 전국 순회전을 계획하던 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모든 계획을 취소해야만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시대에 무언가 메시지를 던져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작품이 500호 크기의 대작 ‘현존’입니다. 팬데믹으로 힘든 경험을 하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메시지와 위로를 전하는 작품입니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던 중 뭔가 몸에 이상이 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병원에서 췌장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 쉽게 이해되지 않았지만, 투병 생활이 제게 큰 전환점이 된 것만은 확실합니다. 특히 소티리오스 대주교님과의 마지막 만남은 저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했습니다. 대주교님께서도 저와 비슷한 시기에 수술과 항암치료를 겪으셨습니다. 아픈 몸을 이끌고 대주교님을 찾아뵈었습니다. 많이 야위신 대주교님은 “아픔이 올 때마다 십자가 주님의 고통을 떠올리며 기쁘게 아픔을 봉헌하는 것이 순교정신”이라고 오히려 저를 위로하셨습니다. 대주교님의 말씀이 주님께서 저에게 주신 메시지인 듯, 순교는 성화 작가로서의 제 앞날에 새로운 화두가 됐습니다. 영광스러운 부활 항암치료가 끝난 뒤 전주교구 박상운(토마스) 신부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전주교구 권상연성당의 성물을 모두 제 작품으로 꾸미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혼란스러웠습니다. 제 몸이 과연 이 일을 할 수 있겠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오히려 “작가로서 그런 명예스러운 일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며 저를 응원했습니다. 작업을 시작하며 흙을 만지는데, 눈물이 쭉 흘렀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를 정도로 주님과 대화하는 심정으로 작업에 임했습니다. 십자가를 만들 때는 이제까지의 관념을 모조리 부수고 정말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계셨던 분의 목이 빳빳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고개를 숙이게 했고, 골수에 박힌 가시와 탈골된 팔, 구멍난 몸을 표현하려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제 작품을 보고 많은 분들이 “아프고 난 뒤의 작업과 이전 작업에서 깊이의 차이를 느낀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마도 이 작업들을 하면서 내내 주님께서 제게 기쁨을 주셨기에, 정말 기적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무명순교자를 위한 진혼곡 권상연성당 성물 봉헌에 이어 또다시 순교자와 만났습니다.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관장 원종현(야고보) 신부님께서 저를 초대하셨거든요. 주님께서 예비하신 무슨 특별한 뜻이 있나 보다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원 신부님께서는 목이 잘려 한강에 던져진 8000여 명의 절두산 무명 순교자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순간 순교자들의 마음이 제 안에 물밀 듯이 들어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이분들을 기려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8월 15일 시작한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초대전 ‘무명순교자를 위한 진혼곡’은 10월 27일까지 계속됩니다. 이번 전시 역시 하느님의 계획 안에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저뿐만 아니라, 작품을 접하는 여러분 모두와 맞닿아 있지 않을까요? 많은 분들이 오셔서 저와 작품으로 소통하고, 특별한 하느님의 사랑을 느껴보시면 좋겠습니다. ◆ 정미연(아기 예수의 데레사) 작가는 효성여자대학교(현 대구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뉴욕 Art Student of League에서 수학했다. 1995년 서울 세검정본당 기공 기념 전시를 시작으로 20여 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숙명여대 박물관, 서울대교구청, 여산성지, 김수환추기경 사랑과 나눔공원 등에 성물을 봉헌했다. 남편 소산(小山) 박대성 화백은 옥관 문화훈장을 수훈한 한국화의 거장이다.

2024-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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