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안동교구장 두봉 주교 선종] 장례미사 이모저모

초대 안동교구장을 지낸 두봉 주교(杜峰·레나도·프랑스명 René Dupont)의 장례미사가 4월 14일 오전 11시 안동교구 목성동주교좌성당에서 교구장 권혁주(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주례, 전·현직 주교단 공동집전으로 봉헌됐다. 장례미사에 참례한 사제·수도자·신자들은 70여 년 사목활동을 통해 한국교회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사회적 약자와 농민들을 진심으로 품어줬던 두봉 주교의 삶을 돌아보며 하느님께서 그에게 영원한 안식을 내려주시기를 한마음으로 기도했다. ◎… 4월 10일 두봉 주교의 선종 소식이 알려지면서 고인의 빈소가 마련된 안동교구 목성동주교좌성당에서는 경건한 분위기 속에 추모 행렬이 이어졌다. 안동교구 신자들은 지구별로 빈소를 찾아 위령기도와 선종미사를 봉헌했다. 선종 다음날인 4월 11일부터 빈소를 방문한 교구 사제단과 신자들은 소박하고 가난한 교회를 표방하며 한국교회를 위해 평생을 헌신해온 고인이 하느님의 품에 안겨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를 두 손 모아 기도했다. 전국 각 교구 사제단과 수도자들도 빈소에 속속 도착해 조문을 이어갔다. ◎… 두봉 주교의 장례미사가 봉헌된 안동교구 목성동주교좌성당에는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한국교회에 큰 발자취를 남긴 두봉 주교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수많은 신자들이 운집했다. 장례미사가 봉헌된 성당에 자리가 부족해 들어오지 못한 신자들은 본당 측이 야외에 특별히 설치한 대형 스크린을 통해 장례미사에 참례했다. ◎… 장례미사에는 그동안 두봉 주교가 한국 사회에 미친 큰 영향력을 보여주듯 김문수 전 고용노동부 장관, 이준석(안드레아) 개혁신당 의원, 이철우 경북도지사, 권기창 안동시장 등 정·관계를 비롯해 불교·유교계 등 각계각층 인사들이 참례해 고인의 넋을 기렸다. ◎… 장례미사 직전 안동교구가 전한 두봉 주교의 마지막 순간은 신앙인들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4월 6일 뇌경색 증상으로 입원했던 두봉 주교는 4월 10일 오후 선종 직전 병문안을 왔던 안동교구 사제단에게 눈을 돌려 “성사”라고 힘겹게 말을 건넸다. “고해성사를 뜻하는 것이냐”는 물음에 “예”라고 답한 두봉 주교는 고해성사를 마친 뒤 한결 편안한 모습이었다고 전해진다. 이어 그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라며 감사를 연이어 표시했고, 그때마다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뻗는 특유의 몸짓을 보였다. 그러나 이후 호흡이 불안정해지며 주님의 품에 안겼다. ◎… 영성체 후 이어진 고별식은 두봉 주교 약력 및 각계 조전 소개, 고별사, 고별예식, 감사 인사 순으로 진행됐다.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 유흥식(라자로) 추기경은 조전을 통해 “평생 우리나라를 위해 헌신해주신 따뜻한 마음과 호탕한 웃음을 기억하자”며 “두봉 주교님께서 머지않은 장래에 시복·시성되실 수 있길 기원한다”고 전했다. 주한 교황대사 조반니 가스파리 대주교는 고별사를 통해 두봉 주교의 선종에 깊은 애도를 표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조전을 대독하며 “두봉 주교님께서 보여주신 열정과 봉사의 삶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 ◎…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애도 메시지도 이어졌다. 염수정(안드레아) 추기경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어떠한 고난도 이겨낼 수 있다고 강조하셨던 두봉 주교님은 저의 인생에 있어서도 거울 같은 분이셨다”며 “순례자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 모든 신앙인들을 두봉 주교님께서 인도해주시리라 믿는다”고 애도했다. 주교회의 의장 이용훈(마티아) 주교는 “소외된 이웃과 농민들을 위해 열성을 다하셨던 두봉 주교님의 삶은 격동의 한국사의 산증인과 같은 분이었다”며 “인자하신 주 예수님을 닮으셨던 분, 모든 신앙인에게 큰 귀감이 되고 영적 모범이 돼 주셨던 두봉 주교님께 감사드린다”고 전했다. 파리 외방 전교회 한국지부장 하대건(크리스토프 베라르) 신부는 “두봉 주교님을 병원에서 뵀을 때 눈빛으로 미소지으셨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며 “우리의 소중한 형제였던 주교님은 하느님의 사랑을 나눔으로써 더욱 빛나셨던 분”이라고 밝혔다. ◎… 사제단 대표로 고별사를 한 최숭근(비오·안동교구 울진 북면본당 주임) 신부는 “특별귀화로 한국 국적을 취득하셨을 때 우리보다도 한국을 더 사랑하며 기뻐하시는 모습을 봤다”며 “우리 사제들은 주교님의 뜻을 받들어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버팀목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수도자 대표로 고별사를 한 그리스도의 교육수녀회 윤요한 관구장 수녀는 “주교님과 함께했던 모든 순간들이 은총이었다”며 “우리 수도자들도 주교님 뜻을 이어받아 기쁘게 ‘희망의 순례자’로 살아가겠다”고 전했다. 안동교구 평협 송규흠(아오스딩) 회장은 “예수님처럼 뜨거운 가슴으로 우리를 품어주시던 그 사랑이 그리움으로 남는다”며 “주님에 대한 열정과 우리 신자들에 대한 사랑을 항상 기억하겠다”고 고인을 기렸다. ◎… 장례미사 고별식 마지막 순서에서는 두봉 주교가 선종하기 정확히 1년 전인 지난 2024년 4월 10일에 녹음된 고인의 음성 메시지가 성당 스피커를 통해 전해졌다. 평소 예수님의 사랑을 외치며 “감사합니다”를 유쾌하게 연호했던 고인의 음성이 성당 내에 울려 퍼지자 신자들은 웃음과 함께 눈물로 고인을 기렸다. ◎… 이어진 고별예식은 대구대교구장 조환길(타대오) 대주교가 진행했다. 장례미사 후에는 사제단과 수도자, 신자들이 안동교구 농은수련원 성직자묘지로 이동해 하관예절을 진행하며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초대 안동교구장 두봉 주교 선종] ‘기쁘고 떳떳하게’…한국교회에 남긴 발자취

솔직담백하고 열린 마음. 생전 두봉 주교가 강조했던 사제로서의 모습이다. 20대 젊은 시절부터 전쟁으로 초토화된 한국 땅에서 선교하며 사회적 약자와 농민의 편에 서서 정의를 외쳤다. 항상 소탈하고 떳떳한 모습으로 주님 사랑을 전한 그는 신앙인들은 물론 국민 전체에게 진한 감동을 주며 존경받아 온 한국교회의 큰 어른이었다. 한국교회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 하나로 70여 년 사목활동에 임해온 그의 발자취를 돌아본다. ■ ‘기쁘고 떳떳하게’ 두봉 주교는 1929년 9월 2일 프랑스 오를레앙교구의 가톨릭 가정에서 3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대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1950년 21세에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하고 로마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과 대학원에서 공부한 뒤 1953년 6월 29일 사제품을 받았다. 그와 한국의 인연은 한국교회 복음화 사명을 받고 1954년 12월 한국 땅을 밟으면서부터다. 처음 사목활동을 시작한 곳은 대전교구 주교좌대흥동본당이었다. 보좌신부로 힘차게 첫발을 내딘 그에게 당시 주임이었던 고(故) 오기선(요셉) 신부가 한국식 이름을 지어주게 된다. 그의 프랑스 이름이던 ‘뒤퐁’을 음차한 두봉(杜峰)이었다. ‘두견새’와 ‘봉우리’를 뜻하는 이름, 두봉 주교는 그렇게 한국 땅에서 ‘한국인보다도 더 한국을 사랑한 프랑스인’으로 70여 년 삶을 이어가게 된다. 대전교구에서 사목하던 그는 1969년 5월 신설된 안동교구의 첫 교구장으로 임명된다. 1969년 7월 25일 주교품을 받고 안동교구 발전을 위한 봉사와 헌신의 삶을 살았다. 교구장이었음에도 두봉 주교에게는 특별한 문장이나 표어가 없었다. 다만 안동교구 사명 선언문인 ‘기쁘고 떳떳하게’는 그가 선종 직전까지도 강조하고 소중히 여겼던 ‘사제로서의 사명’이었다. 2023년 사제서품 70주년을 맞아 본지와 나눈 인터뷰에서 그는 “평범하고 소박하게 살아야합니다. 기쁘고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 불의 앞에 사회 정의를 외치다 이렇듯 두봉 주교의 신앙은 내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삶을 관통하는 가장 큰 주제는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하며 불의에 맞서 정의를 지킨다는 것이었다. 시대의 아픔 속에서도 그는 농민들의 편에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켜나가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유신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1977년 10월 30일, 안동교구는 주일미사 대신 공소예절로 대치하고 교구장 두봉 주교를 포함한 전 사제단이 신자 800여 명과 함께 안동문화회관 내 동부동성당에서 합동미사를 봉헌했다. 당국의 인권 유린에 저항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두봉 주교는 미사 강론에서 ‘법과 양심’을 주제로 강한 어조로 정부를 비판했다. 유신정권의 심기를 건드린 두봉 주교에게 엄청난 압박이 가해졌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는 이후로도 굴하지 않았다. 그러던 1979년 5월 5일,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 오원춘 분회장이 보안기관에게 납치돼 폭행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군청에서 농민들에게 보급한 감자종자가 불량인 것이 대대적으로 드러나면서 이 사실에 항의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농민회 임원이 농민을 위해 나섰다는 이유로 영양군 버스정류장 인근에서 납치돼 포항과 울릉도로 끌려가 모진 일을 당한 것이다. 두봉 주교는 즉시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목성동주교좌성당에서 정부의 탄압에 항거하는 전국 특별기도회를 시작했다. 기도회에 참석했던 고(故)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이 강조한 “이 땅에서 민주주의를 행하는 것” 바로 그것이 두봉 주교가 꿈꾸던 ‘진정한 한국의 미래’였다. 유신정권은 1979년 8월 18일 두봉 주교에게 ‘자진출국’할 것을 명령했으나 그는 이를 당당하게 거부했다. 얼마 지나지 않은 10월 26일, 민주주의를 행하지 않았던 유신정권은 스스로 처참하게 무너졌다. ■ 소탈했던 삶, 넘쳤던 한국 사랑 6·25전쟁으로 황폐화된 한국 땅에서 사목활동을 시작한 그는 안동교구장으로 재임하던 시절 이 땅의 사회·문화 발전을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사회적 약자와 농민을 위한 돌봄 시설과 기관 설립이 이어졌다. 한센병 환자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한 그는 1973년 경북 영주시에 ‘다미안 의원’을 개원하게 했다. 1978년에는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가 창립해 가난한 농민들이 불이익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나섰다. 미래 한국사회를 이끌어갈 인재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1969년 상지여자실업고등전문학교가 설립됐으며 이는 현재 가톨릭상지대학교의 발판이 됐다. 신자와 지역민을 위한 문화 사업을 위해 1973년 안동문화회관을 설립해 지역 문화 발전에도 이바지했다. 일평생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사목활동에 매진했던 그의 삶은 ‘소탈’ 그 자체였다. 1990년 은퇴 후 경기도 행주공소에서 지내던 그는 현 안동교구장 권혁주 주교의 간곡한 요청으로 2004년 경북 의성군 봉양면 도원리에 자리잡았다. 소박한 텃밭을 일구며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던 그에게 ‘신자·비신자’라는 구별은 없었다. 찾아오는 이들에게 한결같은 밝은 표정으로 대하며 진심을 주고받았다. 안동교구의 크고 작은 행사가 있을 때마다 고령의 몸을 이끌고 참석해 농민들과 함께 꽹과리를 치며 즐기는 등 소탈한 모습으로 모든 이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주님을 모시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기쁘고 고마운 일입니다. 주님을 모시는 우리 모두는 항상 빛나는 존재입니다. 항상 떳떳하십시오.” (2023년 사제서품 70주년을 맞으며 본지와 나눈 인터뷰 대화 중) ◆ 두봉 주교 약력 ◆ 1929년 9월 2일 프랑스 오를레앙에서 출생 1947년 4월 20일 오를레앙시 쌩끄로아 고등학교 졸업 1949년 6월 오를레앙 대신학교 철학과 졸업 1950년 파리외방전교회 가입 1951년 6월 파리외방전교회 대신학교 신학과 졸업 1953년 6월 29일 사제서품 1954년 6월 로마 그레고리안 대신학교 대학원 신학과 졸업 1954년 12월 19일 ~ 1955년 5월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 신부 1955년 5월 ~ 1965년 5월 대전 대흥동본당 보좌 신부 1965년 5월 ~1967년 8월 대전교구청 상서국, 상서국장 신부 1967년 9월 ~ 1969년 6월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장 신부 1969년 5월 29일 교황 바오로 6세 명에 의해 제1대 안동교구장으로 임명 1969년 7월 25일 주교수품 및 교구장 착좌식 1970년 10월 ~ 1984년 11월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위원장 1981년 10월 ~ 1984년 11월 주교회의 사목주교위원회 위원장 1984년 11월 ~ 1990년 주교회의 사목주교위원회 위원 1985년 10월 ~ 1990년 주교회의 교리주교위원회 위원 1987년 11월 ~ 1990년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위원장 1990년 10월 6일 안동교구장 사임, 은퇴 1990년 12월 2일 안동교구장 이임 2025년 4월 10일 선종

발행일 2025-04-20 제3438호 13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일제강점기 교회에 대한 반성

2000년 대희년을 맞은 가톨릭교회는 제삼천년기를 열면서 하느님 자녀들의 잘못을 하느님과 인류 앞에 고백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2000년 3월 12일 십자군 전쟁을 비롯해 교회가 2000년 동안 잘못한 일들에 대해 용서를 청했습니다. 한국교회도 12월 3일 한국교회의 과거사 반성 문건인 「쇄신과 화해」를 발표했습니다. 총 7개 항의 고백 중 하나가 바로 일제 통치 아래에서 민족의 고통을 외면한 죄였습니다. 「쇄신과 화해」는 두 번째 항목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열강의 침략과 일제의 식민 통치로 민족이 고통을 당하던 시기에 교회의 안녕을 보장받고자 정교분리를 이유로 민족 독립에 앞장서는 신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제재하기도 하였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가톨릭신문(2000년 12월 3일)은 1면 톱기사와 19면 특집면에서 이 고백을 게재하고 “과거사 반성은 매우 정밀한 역사적 판단과 신학적 판단이 필요하다”면서도 “과거의 잘못을 참회하고 정화하지 않고는 새로운 천년기의 문턱을 넘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당초 이 문건은 병인양요, 일제강점시대 독립운동 외면과 제재, 신사참배 허용 등 구체적인 사안들을 직접 언급하려 했으나 최종 단계에서는 역사적 및 신학적 평가의 어려움 때문이었는지 역사적 사건들이 구체적으로 언명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19년 뒤인 2019년 3.1운동 100주년에 즈음해서는 더 구체적인 반성과 성찰이 이뤄집니다. 당시 주교회의 의장 김희중(히지노) 대주교는 ‘3·1운동 정신의 완성은 참 평화’라는 제목으로 100주년 기념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가톨릭신문은 3·1운동 100주년에 즈음해 전국에서 거행된 기념행사 소식을 전하면서 담화의 내용을 소상히 소개했습니다. “김 대주교는 담화를 통해 100년 전 많은 종교인이 독립운동에 나섰지만 그 역사의 현장에서 천주교회가 제구실을 다하지 못했음을 반성했다. 김 대주교는 ‘외국 선교사들로 이루어진 한국 천주교 지도부는 교회를 보존하고 신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정교분리 정책을 내세워 신자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금지했다’면서 ‘나중에는 신자들에게 일제의 침략 전쟁에 참여할 것과 신사참배를 권고하기까지 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는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채 민족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하고 저버린 잘못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성찰하며 반성한다’고 말했다.”(가톨릭신문 2019년 2월 24일자 1면 중에서) 우리 민족이 일제 치하에서 국권을 상실하고 억압당했지만 교회는 이러한 민족적 시련과 괴리된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 많은 역사학자들의 평가입니다. 비록 그것이 피로써 지킨 교회가 또다시 피 흘려서는 안된다는 절박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부끄러운 역사임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당시 교회 지도층은 뮈텔 대주교를 비롯한 외국인 선교사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어쩌면 일본은 단지 또 하나의 정권으로 여겨졌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오랜 박해를 받았던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새 정권인 일제와 정교분리적인 관계를 맺으려 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은 「뮈텔 주교 일기」(1911년 6월 16일자)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는 여기에서 “천주교는 정치 문제에 무관심하고 항상 일본을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하고 있다”며 “이것은 나와 우리 모든 신부들의 공통된 생각이고 또한 이렇게 신자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독립운동에 대한 당시 지도층의 인식은 참담할 지경이었습니다. 뮈텔 대주교는 안중근(토마스) 의사의 의거에 대해 분노했고 죽음을 앞둔 안 의사에게 성사를 허락하지 않았으며, 이를 어기고 성사를 준 빌렘 신부에게 성사 집행 정지령을 내리기까지 했습니다. 안 의사는 살인자로 단죄됐습니다. 그 단죄가 취소되고 안 의사가 1993년 8월 21일 복권되기까지는 무려 84년이 필요했습니다. 가톨릭신문은 그날 오후 6시 서울 혜화동 가톨릭교리신학원 성당에서 봉헌된 안중근 의사 추모 미사 소식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일제 수탈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암살, 일제 치하의 제도교회에 의해 단죄됐던 안중근(토마스) 의사가 84년 만에 김수환 추기경의 공개 사과로 의거의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 제도교회를 대표하는 현직 교구장이 공식 집전한 첫 번째 추모 미사로 일제 치하의 한국 가톨릭교회가 범한 과오를 사과하고 바로 잡은 것은 한국 현대교회사의 일대 전환점으로 평가됐다.”(가톨릭신문 1993년 8월 29일자 1면 중에서) 김 추기경은 심포지엄에 앞서 제도교회의 친일 행각에 대해 “상상했던 이상의 일들이 저질러졌다”며 “한국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과오를 당시 제도교회가 범했다”고 안타까움을 표시했습니다. 일제 아래에서 교회의 친일 행위와 관련해 비판받는 또 한 가지 사례가 최초의 한국인 주교인 노기남(바오로) 대주교입니다. 2009년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는 노 대주교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단정하고 이를 서울대교구에 통보했습니다. 이에 대해 서울대교구는 “노 대주교의 일제에 대한 협력은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보다 많은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자기희생으로, 다른 친일 행위자와 분명하게 구분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사실 선교사들이 맡고 있던 한국교회의 교구장 자리에 일본인 성직자를 임명하려고 했던 일제의 뜻에 반해, 최초의 한국인 성직자가 주교로 임명된 사실 자체가 식민 통치에 대한 저항의 일환이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최초의 한국인 주교가 탄생한 경성대목구가 여러 가지 불이익을 받았던 점이나 대구대목구와 광주지목구에는 일본인 성직자가 각각 대목구장과 지목구장에 임명된 것도 사실입니다. 이후 노기남 대주교의 행적은 일제에 대한 협력과 민족의 자주성과 독립을 옹호하는 모습, 이 두 가지 모두로 해석될 수 있는 모습들이 교차됩니다. 역사와 시대의 제한성 안에서, 지금의 획일적인 잣대로만 측량하고 평가하기만은 어려운 상황들이 많습니다. 그에 대한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평가들은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역사적인 오점과 과오들이 점철돼 있다고 할지라도 한국 천주교회는 그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자신과 민족의 역사가 함께 엮여 있음을 인식하게 됐다는 사실입니다. 민족의 운명, 민족적 고통과 고난 속에서 신앙과 교회는 국가와 민족과 유리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깨달음은 장차 독재정권과의 투쟁, 가난한 이들 곁에 서서 인권과 정의를 실현하려는 노력에 투신하는 바탕을 이룹니다.

발행일 2025-04-20 제3438호 9면

움트는 생명의 힘 보고 느끼며 ‘부활의 기쁨’ 체험

주님 부활 대축일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주님께서 부활하심을 경축하는 날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주님의 부활에서 새 삶과 새 생명의 희망을 찾는다. 강원도 강릉에 위치한 발달장애인 사회복귀시설 애지람(愛之籃, 원장 신현재 라이문도 수사)이 운영하는 ‘케어팜’(Carefarm, 돌봄농장)에서 발달장애인들의 손길을 따라 돋아나는 새 생명들은 부활의 의미를 알려 준다. 또한 케어팜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자연과 자연 간 상생의 노력이 배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주님 부활 대축일을 앞두고 케어팜을 찾아갔다. 케어팜이 이뤄지기까지 4월 9일 오후 강릉시 사천면 춘천교구 사회복지회 소속 애지람에서는 변중섭(빈첸시오) 사무국장과 고명숙(가타리나) 후원홍보담당자, 김동현(루카) 사회복지사, 박상규 사회복지 실습생이 애지람 입주인들과 케어팜에서 자라는 생명들을 돌보기 위해 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날은 발달장애인 입주인 이귀용(스테파노), 김진호, 전찬우 씨가 동행했다. 바깥나들이를 하고 영농체험을 한다는 생각에 입주인들의 표정은 무척 밝았다. 거동이 다소 불편한 입주인들은 애지람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매주 케어팜에서 일을 한다. 애지람에서 강릉시 구정면 케어팜까지는 14km 정도 거리다. 변중섭 국장이 운전하는 승합차는 20분 정도를 달려 케어팜에 도착했다. 케어팜 입구에는 ‘치유의 숲 케어팜 땅을 돌보고 사람을 돌보고 서로 나누는 곳’이라는 단정한 글씨가 적힌 안내 간판이 서 있다. 케어팜이 어떤 곳인지 알기 쉽고 압축적인 설명이 이어진다. “본 농장은 발달장애인을 비롯한 다양한 시민들에게 농장에서의 여러 활동을 통해 몸과 마음을 돌보는 치유의 시간을 제공하기 위해 조성되었습니다. 기후위기 시대의 방주가 될 이 공간은 탄소를 저장하는 생태농장이자 다양한 동식물이 함께 살아가는 생명다양성의 공간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넘어 서로를 만나고, 자연을 만나고, 사회의 구성원으로 공존하고자 합니다.” 안내 간판에서 눈길을 또 끄는 부분은 케어팜이 만들어지기까지 상생의 정신으로 협력한 기관들의 명칭이다. 강릉시,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생태전환마을 내일’, 한살림 강원영동 그리고 애지람이 나란히 등장한다. 케어팜 운영주체는 애지람이지만 캠코는 1100㎡ 넓이(약 333평)의 국유지를 5년 동안 19만230원의 임대료만 받고 빌려줬다. 거의 무상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강릉시는 이곳에 이동식 화장실과 교육용 컨테이너를 설치할 수 있는 예산을 지원했다. 환경과 미래를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모인 생태전환마을 내일에서는 케어팜을 디자인하고 생태농업 정보를 제공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와 한살림은 케어팜에서 생산한 농산물 등을 유통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케어팜이 공식 개장한 것은 2023년 9월 15일이다. 그러나 2021년 11월 30일 애지람과 캠코가 부지 대부계약을 체결한 뒤에도 복잡한 행정 처리와 민원 해결, 개간 작업을 하기까지 2년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다. 이 과정은 애지람의 모토인 ‘사회 속으로!’ 장애인들이 나아가고 장애인, 비장애인 모두가 생명과 치유의 공간을 꾸며가는 여정이었다. 생명을 가꾸며 부활을 준비하다 케어팜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애지람 최종우(베드로) 관리사가 이날 심을 옥수수 모종을 조심스럽게 트럭에 싣고 따로 와 있었다. 케어팜에 처음 온 방문객들은 어디에 어떤 작물이 심겨 있는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튤립처럼 금방 알아보는 꽃이 아니면 언뜻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잡초처럼 보이는 식물들이 많다. 어떤 곳에는 벽돌이 쌓여 있기도 하고, 길도 복잡하게 갈라져 있다. 케어팜을 조금 더 풍요롭게 관리하기 위해 치유농업사 수업을 듣고 있는 고명숙 홍보담당자의 설명을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잡초처럼 보여도 다 이름이 있어요. 아직 열매가 열리지 않았지만 포도, 복숭아, 사과나무도 자라고요. 작년에는 감자가 잘 돼서 애지람 입주인들과 맛있게 먹었고, 올해는 그 자리에 마늘이 자라고 있습니다. 작년에 케어팜 울타리에 수세미를 키웠는데 올해는 울타리 밖에 코스모스를 심기로 했어요. 케어팜 옆에 강릉 바우길 6구간 산책로와 장현저수지도 있어서 코스모스가 피면 사람들이 좋아하겠죠.” 중간중간 벽돌을 쌓아 놓은 곳은 휠체어로 이동하는 장애인들의 눈높이에 맞춰 벽돌로 둘러싸인 내부 공간에서 식물을 키울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케어팜 안에 복잡한 길을 만들어 놓은 것 역시 장애인들이 조금이라도 편하게 이동 하도록 돕기 위한 고민에서 비롯됐다. 길 위에 깔린 야자매트도 눈이나 비가 올 때 장애인들이 미끄러지지 않게 돕는 안전장치다. 이귀용, 김진호, 전찬우 씨는 옥수수 모종 심기 작업이 시작되자 표정에 의욕이 넘치는 듯했다. “기분 좋아요”라는 간단한 의사표현을 하면서 옥수수 모종을 심을 자리에 물을 뿌리고 모종을 심은 다음 흙을 덮어 다지는 일을 정성스럽게 해 나갔다. 애지람 직원들이 옆에 붙어서 하나하나 친절하게 도와줬다. 변중섭 사무국장은 케어팜은 단지 농작물이나 과실수를 키우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의지에 따라 시행되고 있는 ‘찬미받으소서 7년 여정’과 기후위기 극복 노력에 동참하면서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에게 치유의 시간을 주는 것이 케어팜을 운영하는 진정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작업 효율로 치면 장애인보다 비장애인이 비교할 수 없이 높습니다. 케어팜은 장애인들이 영농 체험을 하면서 심리적, 정서적으로 치유 받고, 사회와의 접촉면을 넓히는 공간입니다. 친환경 농법으로만 케어팜을 운영함으로써 생태계 보전과 기후위기 극복에 장애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의미도 중요합니다. 애지람을 운영하는 작은형제회의 정신에도 부합하는 측면이 있고요. 애지람 입주인들처럼 비장애인들도 기후위기 극복에 동참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옥수수 모종을 심은 뒤에는 숙성된 짚을 울타리를 따라 덮어 주는 작업을 이어갔다. 짚을 덮으면 잡초가 잘 나지 않는다. 이것도 친환경 농법이다. 애지람 가족들은 케어팜에서 생명과 상생의 소중함과 더불어 부활의 기쁨을 미리 체험하고 시원한 음료수를 마시면서 하루 영농체험을 마무리했다.

발행일 2025-04-20 제3438호 11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산타 마리아 데이 미라콜리 성당

피렌체를 중심으로 시작된 르네상스 건축은 15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피렌체 밖으로 전해졌습니다. 피렌체에서 르네상스 양식의 성당과 건물을 설계한 브루넬레스키와 피렌체뿐만 아니라 만토바에 르네상스 성당을 세운 알베르티, 두 건축가는 르네상스 건축 양식의 표준형을 제시하면서 당대의 건축 양식을 주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르네상스 표준 양식을 배운 제자들은 이탈리아 여러 지역에서 르네상스 건축물을 지으며 지역 양식을 발전시켰습니다. 그 대표적인 지역으로 피렌체에서 남쪽으로 100킬로미터가량 떨어진 토스카나의 작은 도시 피엔차를 들 수 있습니다. 르네상스를 장려하는 인문주의 교황으로 알려진 비오 2세 교황(1458-1464 재위)은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베르나르도 로셀리노(Bernardo Rossellino, 1409–1464)에게 피엔차의 도시 계획을 맡겼습니다. 로셀리노는 비오 2세 광장을 중심으로 남쪽에는 피엔차 대성당(Duomo di Pienza)을 서쪽에는 교황의 세속 이름을 딴 팔라초 피콜로미니를 배치했습니다. 로셀리노는 성당의 북쪽에 면한 좁은 광장이 가능한 넓은 면적을 갖도록 하려고, 성당의 파사드를 북쪽으로 향하게 하고 성당을 가능한 한 남쪽의 끝에 배치하였습니다. 따라서 성당의 제대가 있는 앱스 부분은 가파른 경사면에 지어졌습니다. 사실 이곳에는 작은 로마네스크 성당이 일반적인 배치에 따라 동서 방향으로 놓여 있었는데, 성당과 광장을 모두 살리기 위해서 성당이 광장을 바라보도록 남북 방향으로 배치한 것입니다. 외관을 보면 파사드가 세 개의 층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리고 네 개의 기둥에 의해서 수직으로 세 부분으로 분할되었는데, 이 분할은 내부의 3랑식(네이브와 두 아일) 구성과 일치합니다. 파사드 1층에는 세 개의 출입문이 있고, 2층은 세 개의 아치로 장식되었으며, 3층 페디먼트 안쪽의 팀파눔에는 비오 2세 교황의 문장이 있습니다. 남쪽에 있는 앱스에는 고딕 양식의 창문이 있어서 내부의 조도가 밝은 편입니다. 내부는 네이브와 두 아일의 높이가 같은 3랑식 평면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하지만 네이브는 두 아일의 폭에 비해서 훨씬 넓게 설계되었습니다. 천장은 교차 아치형으로 되어 있고, 앱스는 세 개의 경당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큰 경당에 성가대석이 있습니다. 로셀리노는 이렇게 브루넬레스키와 알베르티의 영향을 받아서 르네상스 성당을 지역 양식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초기 르네상스 건축에서 지역 양식이 발달한 도시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베네치아입니다. 베네치아 르네상스는 토스카나로부터 르네상스의 표준 양식을 들여왔을 뿐만 아니라, 해양 도시에 남아 있는 고대 유적지에서 동로마(비잔틴)제국의 건축을 직접 습득하였습니다. 그러한 초기 베네치아 르네상스를 이끈 건축가로 피에트로 롬바르도(Pietro Lombardo, 1435–1515)를 들 수 있습니다. 조각가이기도 한 그는 20대 청년 시절부터 브루넬레스키의 작품을 통해서 피렌체의 르네상스 양식을 배웠는데, 산타 마리아 데이 미라콜리 성당(Chiesa di Santa Maria dei Miracoli)이 그의 대표작입니다. ‘기적의 성모 마리아’(Santa Maria dei Miracoli)라는 성당 이름에 나타나 있듯이 이 성당에는 성모 마리아와 관련된 기적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15세기 후반, 베네치아의 비단 장수 안젤로 아마디의 집 모퉁이에는 1408년에 봉헌된 니콜로 디 피에트로가 그린 성모 마리아 성화가 있었습니다. 이 성화는 사람들에게 기적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실제로 지역 주민들은 은총을 얻기 위해서 성화 속 성모 마리아께 기도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사람들은 1480년 그 성모 성화의 기적 은총을 영광스럽게 해줄 성당을 지어 성모 성화를 보관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피에트로 롬바르도에게 성당 건축이 맡겨졌고, 그는 베네치아 최초의 르네상스 성당을 지어 봉헌하였습니다. 성당의 내부는 1랑식 바실리카 평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배럴 볼트(원통을 반으로 자른 형태의 둥근 천장)로 되어 있는 네이브의 천장은 구약의 예언자들과 성조들이 새겨져 있는 50개의 목재판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제단 부분은 2층으로 만들어졌는데, 아래층에는 성물이 안치되어 있고 위층에는 성 프란치스코, 성녀 클라라, 가브리엘 대천사와 주님 탄생 예고(수태고지), 그리고 양쪽에 팔각형 독서대가 다양한 채색 대리석으로 제작되어 있습니다. 제단의 뒷벽에는 원형 문양으로 된 십자가가 있고, 양옆에 반원 아치의 창문과 그 위에 원형 창이 있습니다. 천장은 돔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외부는 두 단으로 되어 있는 직육면체의 본체 위에 반원통형 천장과 돔 천장이 얹힌 형상입니다. 정면(파사드)과 뒷면(제단 외부) 앞에는 작은 광장이 있고, 왼쪽에는 운하가 흐르고 오른쪽에는 통행로가 나 있습니다. 외벽은 아치 열을 사각 벽기둥이 받치고 있는데, 아케이드가 아닌 장식 형태에 머물고 있습니다. 사각 벽기둥의 주두는 외벽의 1단에는 코린토 양식이 2단에는 이오니아 양식이 사용되었습니다. 다만 1단과 2단 사이의 엔태블러처는 1단과 2단에 통일성을 주지 못하고 마치 분리된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알베르티의 경우처럼 여기에 장식적 요소를 넣어 1단과 2단이 지루하지 않으면서 일체성을 갖도록 하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출입구 부분은 다른 부분에 비해서 아치의 폭이 넓은데, 여기에 십자가 장식을 넣어서 양쪽의 아치와 구분하는 효과를 냈습니다. 출입구 상부의 팀파눔에 성모자의 흉상이 있어서 성당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반기고 있습니다. 파사드 최상층의 반원형 페디먼트에는 커다란 원형 창과 3개의 오쿨루스, 2개의 대리석 원형 장식이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고대 로마의 벽체 구조와 유사한 면에서 토스카나 지역의 로마네스크 영향을 받은 부분이 있고, 브루넬레스키와 알베르티의 초기 르네상스 양식의 영향도 받았습니다. 여기에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대성당 등에서 비잔틴 양식의 요소들을 취하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피렌체의 르네상스 표준형 양식에 베네치아 고유의 비잔틴 양식이 더해져 베네치아 지역 양식을 형성한 것입니다. 건축 양식을 이해하고 해석하여 지역에 맞도록 재탄생시키는 일은 우리나라 ‘성당 건축’도 풀어야 할 과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04-20 제3438호 24면

[당신의 유리알] 천국의 티라노

‘공룡 옷을 입고 꼬마들 앞에 설 수 있을까?’ 어린이날이 가까울수록 스스로에게 또 묻는다. 그래도 될까? 안 그런다고 없는 품위가 생기는 것도 아니지만, 선을 넘는 행동이 아닐까 해서였다. 하필 저렴하게 구입한 게 공룡 옷이라니. 그러나 모든 선택엔 이유가 있다. 어릴 때 공룡은 각별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던 장난감 공룡 티라노. 고대 그리스어로 ‘폭군 도마뱀’을 뜻하는 이 공룡은 ‘티렉스’라고 불리며, 한국에서 1950~60년대 플라스틱과 고무로 만든 장난감으로 유행했었다. 내 손에 떻게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엄마를 지키는 것이 책장 속 야광 성모님이었다면, 내게는 공룡 티라노가 있었다. 놀이터에서 펼쳐지는 장난감 자랑에서도 빠지지 않고 ‘으르렁’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이빨을 보여주면 다들 물러섰다. 그러나 공룡 티라노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만다. 이 시절을 나는 그리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티라노가 사라졌던 그날은 여전히 느낀다. ‘상실’…. 누가 그랬을까. 깊은 상실감이 또 들이친다. 나만 그런 것인가 해서 주일학교 꼬마들에게 물었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장난감을 잃어버렸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니?” 꼬마 준혁이는 장난감을 찾다가 머리가 아파서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고 했고, 조이는 도둑이 훔쳐 가서 슬펐는데 경찰서에 신고하고 나서는 기분이 나아졌다고 했다. (정말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여러 친구 중에 비슷한 마음이었던 현우는 두 살 때부터 사랑했던 인형이 사라지자, 그 순간 나라를 잃은 심정이었다고 했다. 누구보다 소중했던 장난감을 동생처럼 곁에 두고 영혼까지 담았다면, 고통은 극심했을 것이다. 나는 다시 티라노 장난감을 만날 수 있을까. <실종된 공룡을 찾습니다. 이름: 공룡 티라노, 실종 일시: 알 수 없음, 실종 위치: 엄마와 같이 쓰던 방 장난감 상자. 추정하기로 엄마가 다른 아이 집에 넘겼을 가능성 있음. 특징: 어른 손바닥 두 개 합한 크기의 노란 공룡 장난감. 절대로 물지 않음, 소심한 성격에 주인만 잘 따르며 무서워서 싸움도 잘 못함. 목줄이 없고 좌우로 목이 돌아감. 긴 꼬리는 땅에 닿지 않음. 목격 시 공룡을 부르지 마시고 사진을 찍어 댓글로 제보 바람. 수십 년간 애타게 찾고 있음.> 이렇게 전단이라도 붙이고 싶지만, 이제 와서 어디에다 올린다는 말인가. ‘공룡 장난감이 필요하면 택배로 주문하면 그만인 것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에는 돈으로도 구할 수 없는 게 아직 많다. 그때의 온기와 사랑의 기억을 포함해서…. 이렇듯 어릴 적 경험한 ‘상실’은, 과거로 끝나지 않고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그래서 정서적으로 부족하다고 여겨질 때마다 자동으로 불안을 떠올리며 그 안에 갇히게 된다는…. 예수님의 부활 소식에도 제자들은 기쁨보다 다락방에 숨어 불안해했다.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숨진 스승의 잔상과 이에 무력했던 스스로를 벌하면서 상실감에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사라짐’에서 오는 상실은 사랑한 만큼 아프다. 스승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은 곧 남은 자의 아픔이었다. 그분의 몸을 직접 만지기 전까지…. 부활의 빛은 미뤄지고 치워진다. 사라진 장난감 티라노는 지금 태평양 어디쯤 헤엄치고 있을까. 그는 어디에 있나. 집어삼켜지는 슬픔. 그러나 아이가 겪어야 할 상실감을 돌볼 여유는 가난한 집에 없었다. 어릴 적 소중했던 공룡 장난감 잃은 후 느낀 상실감 기억나 예수님 죽음 이후 제자들도 부활한 주님 깨닫지 못하고 깊은 아픔 느꼈을 것 영화 ‘천국의 아이들’은 이란 감독 마지드 마지디의 1997년 작품이다. 여동생의 낡은 신발을 수선하고 들린 야채가게에서 주인공 알리는 신발을 잃어버린다. 남매는, 이 일을 비밀로 하고 신발을 찾을 때까지 알리의 것을 교대로 신은 채 학교를 다니게 된다. 누구의 탓인가. 신발을 잃어버린 알리 탓이다. 신발이 담긴 검은 비닐을 무심히 고물 장수에게 줘버린 야채가게 주인 탓이기도 하다. 영화 속 아이들은 이 ‘탓’을 보듬으며 해결해 간다. 어린이들이 어른들을 살피고 걱정하며, 아픔을 준 어른들을 원망하지 않는 세상. 맞다. 어른들은 그동안 잊고 있었다. ‘아이들도 어른을 용서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의 말과 행동 그리고 내려준 상처까지 말이다. ‘상실’은 일반적으로 소중하게 여겨지는 대상과 이어지다 끊어진 것을 의미한다. 이 상실에 사로잡히면, 새로운 것들을 볼 수 없다고 한다. 마치도 처음에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님을 깨닫지 못했던 것처럼. 주일학교 꼬마 지안이가 그랬다. “장난감을 잃어버렸을 때, 슬펐어요. 잃어버린 화장품 장난감을 찾고 있을 때, 나는 하느님을 믿었어요.” ‘하느님을 믿는다고? 갑자기?’ 찾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라 믿었다는 말인가. 그게 아니고 지안이는, 맨날 하느님의 손길을 느낀다고 했다. 잃어버렸을 때도 느끼고, 지금도 느끼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이라고 했다. ‘마이 멜로디’ 화장품을 잃어버렸을 때는 속 상하고 찡그렸지만, 하느님의 손길이 느껴지면 안 좋은 느낌이 다 사라진다는 신비로운 말이었다. 공룡 옷을 앞두고 망설이던 내게, 내 마음이 물어왔다. ‘인생에서 어린이날이 몇 번이나 남았을까?’ 이 물음에 답이라도 하듯 공룡 옷을 입고 꼬마들 앞에 나섰다. 내 친구 티라노를 생각하며 최대한 무섭게 으르렁거렸다. 예상대로 아이들은 갑자기 등장한 공룡을 보자,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이러면 됐다! 꼬마들이 즐거워한다. 사라진 티라노 장난감을 잊을 만큼 나는 티라노가 된 것이다. 그런데 5살 한 꼬마가 도망치지 않고 도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공룡 무릎을 한껏 안는다. 순간 서 있는 나, 꼬마 현서가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공룡아 울지마! 엄마 찾아 줄게. 내가 안아 줄게~” 놀래주려고 공룡처럼 으르렁댔는데, 엄마 보고 싶은 공룡으로 보였나 보다. 울지 말라며 안아 주다니…. 어쩌면 말이야 티라노 장난감은 나에게 오기 전에, 어떤 소년이 가난한 집에 보내 준 장난감이었던 것처럼, 지금도 어느 꼬마의 밤을 지켜주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룡 앞에 선 꼬마 천사들은 내게, 상실을 잊고 하느님의 손길로 다시 나와야 한다고, 그래서 지난 상실감과 이제는 작별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 천국에 가면 너를 다시 만날 수 있겠지. 그때까지 안녕 티라노.’ 글 _ 박홍철 다니엘 신부(서울대교구 삼각지본당 주임)

발행일 2025-04-20 제3438호 15면

‘손짓(殳)으로 전하는 소리(聲)’…"소통 방식만 다를뿐 신앙에 대한 목마름은 똑같죠"

청인은 목소리를 내어 상대에게 말을 건네고, 상대의 말을 귀로 들어 소통한다. 이렇듯 소통이란 대개 소리를 매개로 이뤄진다. 그러면 과연 농인은 듣거나 말할 수 없다는 이유로 소통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소리’(聲)라는 한자는 손짓(殳)을 구성자로 쓴다. 말하고(声) 듣는(耳) 것을 넘어 손짓으로 전하는 이야기도 하나의 소리라는 지혜가 담겼다. 하느님 안에 모두가 같음을 믿는 우리는 교회 안에서 그 지혜를 어떻게 새롭게 찾을 수 있을까. 인천교구 농인 신자들의 신앙 공동체 청언본당(주임 임성환 바오로 신부) 수어 주일미사와 미사 전후 친교 현장에서 그 실마리를 찾았다. 물리적 파장은 없어도 마음과 마음 사이 파동치는 손짓의 소리(聲)에는 청인들과 차이 없는 농인들의 믿음과 사랑이 너울거리고 있었다. ■ 소리 없이도 건네는 음성 4월 13일 오전 인천 일원은 초겨울처럼 찬 돌풍이 뜨문뜨문 몰아치는 가운데 소나기가 그쳤다가 또 내리기를 되풀이하는 날씨였다. 정오를 향할수록 언제 그랬냐는 듯 흰 구름 틈으로 햇빛이 고개를 내밀고, 봄기운 가득한 하늘 아래 찾은 청학동 주택가. 골목 어귀의 나무들은 지저귀는 새들처럼 스스로 음파를 일으키지는 않아도 ‘몸짓’으로 충만하게 한봄을 알리고 있었다. 길쭉한 소나무 잎새들이 잔바람에 하늘거리고, 목련 가지가 흰색과 자주색 꽃잎에서 봄비 방울을 똑똑 떨구고, 흩어진 벚꽃잎들이 이따금 돌풍을 타고 올라 도로 위 빙글빙글 춤을 추고 있었다. 이렇듯 동작만으로도 생기를 표현하는 자연물들을 넘어 주택가 안쪽 언덕을 올랐다. 청학감리교회 바로 뒤편, 조금 더 봉긋한 언덕배기에 성당이 있었다. 그 앞 차도로 ‘청언성당’ 글귀가 적힌 밴이 9시 무렵부터 농인 신자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형님은 이번 사순 시기 기도 실천에 성공한 것 같아요?” “그런 것 같아. 하지만 그 후에도 열심히 묵주기도 하려고. 기도 지향도 더 넓힐 거야. 돌아가신 부모님 외에도, 세상을 떠난 다른 농인 신자들의 영혼을 위해서.” 성주간 첫째 날인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인 이날. 농인 이태수(안토니오·64) 씨가 하느님과 약속했던 사순 실천 사항을 주제로 1층 친교 공간에서 벗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처럼 미사 전 신앙 나눔 삼매경인 교우들의 말소리에서 청인들이 들을 수 있는 건 옷소매가 마찰하는 가벼운 소음 정도였다. 하지만 농인들과, 수어를 할 줄 아는 청인 봉사자들 사이에는 시끌벅적하고 정다운 ‘소리’가 오가고 있었다. 청인 기준에서는 과장되리만큼 표현력을 최대한 담아내는 역동적인 표정과 몸짓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수어는 시각 언어라 뉘앙스를 담아내려면 정확한 수형(手形)과 동작 외에도 표정과 제스처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청인 언어의 말투나 어조와 같다. 예컨대 오른손 주먹에서 새끼손가락만 편 다음 턱에 두 번 두드리는 ‘괜찮다’도 수형과 동작을 평안한 표정으로 하면 “괜찮아요~”(무사함), 우려하는 표정으로 하면 “괜찮으세요?”(걱정), 흡족한 표정으로 하면 “괜찮은데요!”(감탄)가 된다. 이렇듯 농인 신자들의 말은 음파만 아닐 뿐 똑같은 ‘소리’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11시 교중미사 10여 분 전, 2층 성당에 모여 각자 묵상에 잠긴 50여 명 신자들을 배경으로 주임 임성환 신부(청인)가 성지 주일의 붉은 제의를 입으면서 “농인들이 청인들과 아무 차이 없이 얼마나 성실하게 신앙생활 하는지 다들 감탄할 것”이라며 웃었다. ■ 마음과 마음이 이루는 소통 “둥!” 전례 봉사를 맡은 최우정(요한 세례자·52) 씨가 제대 옆에 꿇어앉아 경건한 표정으로 큼직한 북을 세게 내리쳤다. 거양성체·성혈 때였다. 농인들은 종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북소리는 고막이나 몸에 진동이 와서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청언본당 미사 전례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흐름을 놓치지 않게끔 맞춰져 있었다. 청인 봉사자들과 사제가 미사 통상문과 독서, 복음을 읽으면서 동시통역하듯 해당 내용을 수어로 구사했다. 강론과 성체 배령도 입말과 수어 양쪽으로 동시에 이뤄졌다. 사제가 “그리스도의 몸” 하며 성체를 상하로 한 바퀴 돌리자, 농인 신자가 묵례하며 받아 모셨다. 2개 언어로 미사가 동시에 거행되는 만큼 청인들의 미사보다 늘 길어진다. 농인들은 청인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한국 수어는 한국어와 별개 언어고, 수어가 모어인 농인들에게 한국어는 제2외국어와 같다. 높은 수준의 교육이 없으면 청인들만큼 빨리 글을 읽고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청인 미사에 큰 파워포인트 화면으로 전례문을 보여준다고 해도 농인들의 전례 참여를 높이는 데는 큰 효과가 없다. 봉사자 대표이자 수어 통역사인 우향숙(미카엘라·청인) 씨는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영어 직독 직해와 일상적 구사가 자유자재인 게 아님을 생각하면 역지사지로 알 수 있다”고 강조했다. 청언 공동체 등 전국에 농인 본당들이 만들어지기 전, 청인들의 몰이해는 농인들을 교회에서조차 외롭게 했다. 이태수 씨는 하느님이 우리의 구원자라는 깨달음으로 20대에 세례받았으나 교우 간 소통이 안 돼 마음과 달리 냉담하게 됐었다. “글 못 읽어요?”라는 말은 사회에서도 자주 듣는 아픈 말이었다. “귀찮아하거나 욕하는 것도 그 사람들 표정으로 직감할 수 있었죠. 수어는 표정이 중요한 언어라 잘할수록 상대의 표정을 잘 읽는데, 수어를 모어로 하는 우리가 그쯤 눈치 못 챌 리가요.” 그럼에도 농인들은 주일이면 성당을 찾고, 이곳에서 친교를 나눈다. “하느님과 영혼에 대해 늘 궁구하지만, 영적이지 않은 것들에 삶의 지향을 둔 사회 친구들과는 그런 대화를 나눌 수 없어 목마르기 때문”임은 그들도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요리 관련 자격증이 있는 최우정 씨는 농인이라는 이유로 직장에서 부당한 해고를 당한 적이 있다. 사회에서도 교회에서도 소외로 상처 입은 그는 “청인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사랑’뿐”이라고 말했다. “‘사랑합니다’ 정도 수어는 교회 구성원 누구나 알고 서로 그 마음을 전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농인이든 청인이든, 우리는 고통 속에도 사랑밖에 모르시던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잖아요. 물론 말과 손짓이라는 서로 다른 ‘소리’를 쓰지만,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소리인 사랑만큼은 수어로 주고받았으면 좋겠어요. 여러분, 많이 사랑합니다!” 한국교회 최초의 청각장애인 속인(屬人) 본당으로 2011년 설립된 청언본당은 ‘푸른 하늘 같은 하느님의 말씀’(靑言, 청언)을 받는다는 이름대로 수어 미사 및 고해성사 봉헌, 농인들을 위한 피정과 순례 등 농인 사목을 활발히 펼쳐오고 있다. 국내를 벗어나기 힘든 농인들을 위해 올해 4월은 3박4일 일본 성지 순례를 떠났다. 본당은 수어 구사 능력 상관없이 ▲주일미사 후 점심 준비 ▲인천, 시흥, 김포 각지에 사는 농인들을 성당으로 실어주는 차량 운전 ▲미사 음성 해설 등 봉사에 힘을 보탤 청인 봉사자들을 찾고 있다. ※ 문의 032-832-2361 인천교구 청언본당 ※ 후원 농협 351-1150-4867-53 예금주 인천교구천주교회유지재단 청언성당

발행일 2025-04-20 제3438호 14면

[특집] ‘기후변화’로 잿더미 된 이웃들 삶

3월 22일 경북 의성에서 시작된 불은 강한 바람을 타고 안동·청송·영양·영덕 등으로 번져 모든 것을 태웠다. 산불영향구역은 서울 면적의 75%가량인 4만5157㏊(헥타르). 경상북도에 따르면, 4월 10일 현재 신고 피해액은 1조435억 원, 신고 복구액은 2조6533억 원으로 집계됐다. 특히 이번 산불로 농축업 분야의 피해가 컸다. 10일 오전을 기준 산불 피해 현황은 농작물 3862㏊, 시설 하우스 783동, 축사 235동, 농기계 1만883대 등이다. 불길을 키운 것은 건조한 날씨와 강풍이다. 전 세계적으로 대형산불이 잦아지고 있는 원인으로 지구온난화가 지목됐다. 기후변화로 기온이 오름에 따라 가뭄이 늘어나고 상대습도가 낮아지면서 강풍과 번개가 빈번해지게 된 것. 산불피해로 농민들의 시름이 깊어진 가운데 “환경과 사회의 훼손은 특히 이 세상의 가장 취약한 이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회칙 「찬미받으소서」의 메시지가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산불 ‘연중화’ 가속 실제로 우리나라의 산불발생율은 증가추세다. 산림청이 산불 추이를 분석한 결과, 1980년대 연평균 238건 발생하던 산불이 2020년대(2020∼2023년) 들어 연평균 580건 발생하고 있다. 산불 피해 면적은 1980년대 연평균 1112㏊에서 2020년대 연평균 8369㏊로 대폭 넓어졌다. 산림청은 “기후변화 등의 원인으로 전 세계적으로 초대형 산불이 자주 발생해 산불이 범국제적 재난으로 부각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산불 발생율 증가와 함께 두드러지는 변화는 산불의 연중화다. 산림청에 따르면, 3월 중순에서 4월 중순에 집중됐던 산불이 12월과 1월에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겨울철에도 평균기온이 높아지고 건조한 날씨가 지속되면서 산불 위험이 증가한 것이다. 12월과 1월 평균 산불발생건수는 1990년대 38건에서 2000년대 57건, 2010년대 52건, 2020년부터 2024년까지는 75건으로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아카시아 꽃이 피는 5월 이후엔 산불이 나지 않는다”란 말이 있는데, 이는 나무들이 물을 머금어 수분함량이 많아지고 녹음이 짙어지는 5월 이후엔 산불이 나더라도 크게 번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이 같은 정설이 무의미해졌다는 게 산림청의 설명이다. 최근 10년 5~6월 산불발생건수가 882건으로 전체 산불 중 16.2%를 차지하였으며, 산불조심기간 외에도 산불발생 비율이 28.3%로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기후변화로 인해 이상기후현상이 나타나고 있어 산불조심기간 외 여름철, 겨울철에도 산불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연중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대형산불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호주에서는 2019년 6월 산불이 발생해 6개월 만에 진화되면서 산림 1억1860만㏊를 불태웠다. 우리나라 국토 면적을 훌쩍 뛰어넘는 규모의 산림이 불에 사라진 셈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는 2021년 7월 발생한 산불로 서울 면적의 6배가 넘는 38만9800㏊가 불탔다. ‘딕시’라는 별칭이 붙은 이 산불은 발생 약 3개월 만에 진화됐다.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 피해, 취악 계층에 악영향 비극 막기 위해 그리스도인 책임 있게 나서야 기후변화와 산불 산림청 국립산림과학원이 1979년부터 2022년까지 약 43년간 일본을 포함한 여러 지역의 온도, 상대습도, 풍속 등의 기상 자료를 분석한 결과, 더운 날씨와 건조한 기상 조건이 산불 발생을 촉진시킨 것으로 나타났다. 전 세계적으로 해수면 온도가 상승하면서 대기 순환에 영향을 주고, 건조하고 강한 바람이 발생해 산불 위험이 커졌다는 것이다. 또한 기온이 1.5℃ 높아지면 산불기상지수가 8.6% 상승하고 2.0℃ 오르면 상승 폭이 13.5%로 커진다고 밝혔다. 온도, 습도, 강수량, 풍속 등을 토대로 산출하는 이 지수는 0부터 99까지이며 숫자가 클수록 산불이 발생할 확률이 높다는 의미다. 같은 기관에서 1월 20일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산불의 대형화 원인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첫 번째로 기상조건을 꼽았다. 2024년 5월 이후 LA 지역의 강수량은 평년의 4%에 불과할 정도로 건조했으며 이로 인해 탈 수 있는 연료가 말라 쉽게 발화될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이다. 이밖에 지형조건, 주민생활권 확장과 연료량 증가, 산불의 연중화 현상이 원인으로 지목됐다. 기후변화로 인한 장기적인 영향과 단기적인 조건이 맞물려 산불의 규모와 강도를 증가시킨 것이다. 국립산림과학원 산불연구과 오정학 과장은 “기후변화로 인해 시기를 가리지 않고 산불이 나는 연중화 현상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며 “인명 및 재산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생활권 주변의 가연물질을 정리하고 숲을 가꿔야 산불로부터 안전할 수 있다”고 밝혔다. 산불은 이산화탄소 배출을 늘려 기후변화를 촉진하기도 한다. 3월 21일부터 30일까지 경북·경남·울산 등에서 발생한 산불로 약 366만 톤CO2eq(이하 ‘톤’)의 온실가스가 배출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국립산림과학원은 밝혔다. 산불이 발생하면 나무의 잎과 가지가 불에 타면서 이산화탄소를 비롯한 온실가스가 배출되는데, 이러한 배출량은 산불 피해 면적 및 산림의 양을 바탕으로 산정할 수 있다. 이번 산불로 인한 잠정 산불영향구역은 4만8239ha로, 산불 발생으로 인해 이산화탄소(CO2) 324.5만 톤, 메탄(CH4) 27.2만 톤, 아산화질소(N2O) 14.3만 톤으로, 총 366만 톤이 배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온실가스 배출량 366만 톤은 2022년 기준 산림에서 흡수한 온실가스 순흡수량 3987만 톤의 약 9.2%에 해당하며, 이는 중형차 약 3436만 대가 서울과 부산을 왕복(800km)할 때 배출하는 양과 동일하다. 기후변화로 인해 자연환경이 변하고 결국 가장 취약한 이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목격한 그리스도인들은 「찬미받으소서」의 메시지를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한다. “대부분 가난한 이들은 온난화와 관련된 현상에 특별한 영향을 받는 지역에서 살고 있으며 그들의 생계는 자연 보호 지역과 농업과 어업과 삼림업과 같은 생태계에 관련된 일에 크게 의존합니다. … 우리의 형제자매가 관련된 이 비극에 대한 우리의 부실한 대응은 모든 시민 사회의 기초인, 우리 이웃에 대한 책임감의 상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25항)

발행일 2025-04-20 제3438호 19면

[부활 특집] 부활하신 예수님의 실제 이동 거리는?

신약성경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의 굵직한 행적을 자세하게 담고 있다. 예루살렘의 무덤에서부터 승천한 장소로 알려진 올리브 산까지, 예수님은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다양한 장소에서 나타나시며 세상에 당신의 부활을 선포하셨다. 그렇다면 성경을 바탕으로 살펴봤을 때 부활한 예수님은 승천 전까지 몇 킬로미터를 이동하셨을까? ■ 예루살렘과 엠마오 왕복 부활한 예수님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곳은 예루살렘의 무덤 인근이었다. 안식일이 지난 주간 첫날 새벽, 마리아 막달레나를 비롯한 여인들이 천사에게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 무덤을 나서 달려가던 중 갑자기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며 “평안하냐”고 물으셨다.(마태 28,1-10 참조) 지금 예수님의 무덤 자리라고 알려진 곳은 예루살렘의 구시가지로, 주님 무덤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 부활한 예수님의 여정이 시작됐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 예수님은 여인들에게 나타나신 후, 같은 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도 동행하셨다. 특히 루카복음은 이 여정을 자세하게 다룬다. 교회사 전승은 엠마오의 위치를 대략 예루살렘의 서쪽 혹은 북서쪽으로 본다. 어찌 됐든 루카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이 여정만큼은 확실히 ‘걸어서’ 이동하셨다. 루카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엠마오까지의 거리를 예순 스타디온이라고 언급하는데, 1스타디온은 대략 185m 정도로 예순 스타디온은 11km를 웃돈다. 예수님은 이 거리를 두 명의 제자와 함께 걸으시며 이야기 나누셨고, 제자들의 집에서 그들의 눈을 열리게 하신 뒤 돌연 사라지셨다. 루카복음은 예수님을 목격한 마리아 막달레나와 여인들, 열한 제자, 엠마오로 간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다고 말한다. 갑자기 그들 가운데에 예수님이 서시어 평화의 인사를 나누고, 당신을 유령이라고 여기는 제자들을 나무라신 뒤 상처 난 손과 발을 보여주신다.(루카 24, 36-49 참조)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토마스에게 옆구리를 만져보라고 하신 것도 언급한다.(요한 20,24-29 참조) 예수님은 이렇게 부활 후 만 하루 동안 엠마오와 이스라엘을 왕복하며 약 22km를 이동하셨다. ■ 부활 후 예수님이 이동하신 가장 먼 거리는 150여km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 요한복음은 어느 날 새벽 예수님이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일곱 제자에게 또 한 번 나타나셨다고 밝힌다.(요한 21,1-14 참조)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 갈릴래아 카나 출신 나타나엘과 제베대오의 아들들, 다른 두 제자가 고기를 잡던 중 예수님과 만났다. 그들이 작은 배에서 던진 그물은 고기로 가득 찼고, 예수님은 자신을 못 알아보는 제자들을 위해 호숫가에서 손수(?) 숯불과 물고기, 빵을 준비하셨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당신을 사랑하는지 세 번 물어보신 후, 양들을 돌보아 달라고 부탁하신다. 티베리아스 호숫가는 갈릴래아 호수의 남서쪽에 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150km를 이동해야 했다. 빠른 길로 곧장 갔다면 고산 지대를 넘어가야 했을 것이다. 다만 예수님이 이 거리를 어떻게 이동했는지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티베리아스는 당시에도 팔레스타인 북부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고 지금도 약 5만 명이 거주하는 휴양·관광도시다. 갈릴래아의 한 산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성경 말씀도 있는데(마태 28,16 참조), 티베리아스 호숫가와 같은 여정 중에 들렀다고 가정해 본다면 예수님은 호숫가를 떠나 갈릴래아 지방을 거쳐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셨을 수 있다. 어찌 됐든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티베리아스 호숫가까지 왕복 약 300km가 넘는 거리를 이동하셨다. ■ 종착지는 승천하신 올리브 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루카 24, 50-51) 예수님은 그 후에도 500명의 제자에게 모습을 보이셨다.(1코린 15,6 참조) 즉 성경에 구체적으로 언급된 장소들 말고도 예루살렘 인근을 활발하게 이동하셨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구체적인 지명이 언급된 곳은 40일간의 여정을 마치고 승천하신 올리브 산이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강복하시고, 복음 선포 사명을 주신 다음 하늘에 올라 구름에 둘러싸인 채 승천하셨다. 예루살렘 중심부에서 동쪽으로 4.5km정도 떨어진 올리브 산은 해발고도 약 820m로, 갈릴래아 지방 타보르산보다도 높다. 다만 예루살렘도 700m가 넘는 고지대라 올리브 산은 상대적으로 얕은 산처럼 보인다. 바로 동쪽에는 베타니아가 인접해 있다. 예수님이 부활 후 40일 뒤에 승천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올리브 산 정상에는 팔각형으로 봉헌된 ‘승천 경당’이 있다. 이처럼 예수님은 빈 무덤에서부터 올리브 산에 이르기까지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표징을 보여주시며 당신의 부활한 사실과 복음의 기쁨을 전하셨다. 부활한 예수님이 인간의 방식으로 이동하셨다면 예수님이 소화한 거리는 약 330km다. 500명의 제자를 만난 나머지 여정을 고려한다면 이는 최소거리다.

발행일 2025-04-20 제3438호 10면

[특집] 성삼일(聖三日) 의미와 전례

성목요일 주님 만찬 미사로부터 시작돼 주님 부활 대축일 저녁기도까지 이어지는 성삼일(聖三日)은 성주간과 부활 시기 안에서 가장 큰 의미를 갖는 날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구원 역사의 최고 절정이고 완성인 주님의 파스카 신비,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경축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성삼일 동안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 묻히심과 부활하심을 특별한 예식으로 기념한다. 성삼일의 전례와 의미들을 살펴본다. ■ 성삼일의 의미 나기정 신부(대구 매호본당 주임)는 「성지주일·성삼일-예절준비와 해설」(가톨릭신문사)에서 “성삼일은 사순 시기의 마지막 절정과 주님 부활 대축일이 연결돼 있는 지점이다. 그런 면에서 이 기간은 인간 구원을 위한 구원의 정점으로서 특별한 의의를 지닌다”고 밝힌다. 부활 대축일이 교회 생활 절기의 절정이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내어주신 크고 깊으신 사랑을 드러내 주는 결정판이라고 할 때, ‘성삼일은 여기에 가장 근접한 준비 기간이자 파스카 신비가 집약된 기간’이라는 설명이다. 「전례주년과 전례력에 관한 일반 규범」(1969)은 “인류 구원과 하느님의 완전한 현양 사업을 그리스도께서 주로 당신의 파스카 신비로 완성하셨으니, 곧 당신께서 돌아가시어 우리의 죽음을 소멸하시고 당신께서 부활하시어 생명을 되찾아 주셨으니 주님의 수난과 부활의 파스카 삼일은 전례주년의 정점으로 빛난다”고 그 중요성을 밝힌다. ■ 성삼일 전례 +주님 만찬 성목요일 성목요일 저녁에 거행되는 ‘주님 만찬 미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것을 기념한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바라보면서 주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제자들과 만찬을 하시며 빵과 포도주 형상으로 당신의 몸과 피를 제자들에게 나누신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미사 주제는 주님 만찬을 기념하는 것이기 때문에, 미사가 지니는 모든 의미 곧 주님의 새로운 파스카, 십자가의 제사, 일치와 사랑과 나눔의 식사, 새 계약, 주님의 현존 등이 최고로 표현돼야 한다. 발씻김 예식은 최후의 만찬 때 겸손과 봉사, 애덕을 가르치시고자 제자들 발을 씻기신 일에서 비롯된다. 신앙인들에게는 그 모습을 본받아 사랑의 계명을 되새기고 실천하라는 뜻으로 전해진다. 미사에서 사제는 백색 제의를 입는다. 또 제대는 성목요일 특성에 맞게 소박하게 장식된다. 특별한 점은 이날 대영광송 때 성당 종과 제대 종을 치고, 이후 파스카 성야 미사의 대영광송 전까지 타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신 나무로 만든 딱따기를 사용한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때에 교회의 슬픔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오르간과 악기 연주는 성가를 돕는 반주에만 사용할 수 있다. 윤종식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전례학 교수)는 “성삼일 기간 동안 타종과 오르간 연주를 하지 않는 것은 수난 시기에 십자가와 성상들을 보자기로 가리고 ‘눈의 재(齋)’를 지키는 것으로 여겼듯, 일종의 ‘귀의 재(齋)’를 지키는 것이라 생각한 데서 나왔다”고 풀이했다. 미사 후에는 ‘수난 감실’에 성체를 모셔가는 행렬이 시작된다. 성금요일까지 밤샘을 하며 드리는 성체조배는 예수께서 ‘한 시간만이라도 나와 함께 깨어 기도할 수 없느냐’(마르 14,37)고 하신 요청에 대한 응답이다. +주님 수난 성금요일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기억하고 묵상하는 날이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으심이 절정에 달하는, 1년 중 가장 비장한 날이라 할 수 있다. 교회가 미사를 드리지 않는 유일한 날이다. 오랜 관습에 따라 고해성사와 병자 도유를 제외하고 모든 성사를 거행하지 않는다. 주님 수난 예식만 거행되며 단식과 금육이 실천된다. 예식은 ‘요한의 수난 복음’(18-19장)을 입체낭독하는 말씀전례, 십자가 경배, 영성체로 이어진다. 십자가 경배는 ‘거룩한 십자가를 보여주는 예식’과 ‘거룩한 십자가 경배’로 구성된다. 십자가를 보여주는 예식에서 십자가는 보라색 천으로 덮인다. 특히 이날 제대는 십자가·촛대·제대포 없이 완전히 벗겨둔다. 사제들은 검은색 제의 대신 순교자들의 색인 붉은색 제의를 입는다. 「성지주일·성삼일-예절준비와 해설」에 따르면 4세기 말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금요일에 십자가 조각을 현시해 경배했고, 7세기 로마에서는 ‘예루살렘십자가성당’으로 행렬하고 주님 말씀을 들은 다음 십자가 경배를 했다고 한다. 그 내용이 십자가 경배의 중심 예식으로 자리잡았다는 것. 교회는 이날 그리스도의 죽음을 묵상하면서 부활을 준비한다. 그 수난과 죽음은 부활의 영광과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이러한 뜻에서 ‘복된 수난’이라는 전례적 표현도 쓰인다. +성토요일·파스카 성야 이날 교회는 주님의 무덤 옆에 함께하면서 수난과 죽음, 또 저승에 가심을 묵상한다. 깊은 침묵과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부활의 실현을 바라고 기다린다. 제대는 벗겨진 상태이며 미사도 드리지 않는다. 고해성사와 병자 도유를 제외하고 모든 성사를 거행하지 않고 ‘노자성체’만 모실 수 있다. 성토요일 밤인 파스카 성야는 ‘모든 성야(전야제)의 어머니(Mater omnium sanctarum vigiliarum)’로 모든 밤 가운데 가장 위대하고 고귀한 밤이다. “주님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시려고 밤을 새우셨으므로,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도 대대로 주님을 위하여 이 밤을 새우게 되었다”(탈출 12,42)는 말씀처럼 하느님 말씀을 들으며 주님을 기다리는 밤이다. 또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고 주인을 기다리는’(루카 12,35-37 참조) 것처럼 깨어있는 밤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에서는 루카 복음의 권유처럼 부활 성야를 깨어 기념했다고 한다. 이후 서방교회에서 10세기에는 전례 거행이 오후로, 14세기에는 오전으로 옮겨지며 부활 첫 미사가 아침에 봉헌되기도 했다. 비오 12세 교황이 1955년 성주간 전례를 개정하면서 파스카 성야가 밤으로 복원돼 그 의미를 되찾게 됐다. 파스카 성야에 사제는 백색 제의(祭衣)를 입는다. 「성주간 파스카 성삼일」(한국천주교주교회의)은 “성야 예식은 모든 장엄한 예식 가운데 가장 드높고 존귀하다. 모든 교회는 하나가 되어 한마음으로 이 예식을 거행한다”고 밝힌다. 전례는 크게 ‘빛의 예식’ ‘말씀 전례’ ‘세례 전례’ ‘성찬 전례’로 구성된다. 사제는 빛의 예식에서 새 불을 축성하고, 파스카 초에 ‘A’(알파)와 ‘Ω’(오메가), 그 해의 연수를 표시하고 불을 켠다. ‘처음과 마지막이며 시작과 끝이신 그리스도께서 오늘도 내일도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시며 구원의 길로 이끄신다’는 의미다. 이어서 공동체는 말씀 전례를 통해 하느님께서 계획하시고 이루신 구원 역사를 듣고 마음에 새긴다. 아울러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부활’의 날을 맞이하며 교회 새 지체들이 새로 태어나는 세례식 혹은 세례 때 약속을 새롭게 하는 세례 서약 갱신식을 가진다. 이러한 새로 태어남의 삶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성찬 전례로 완성된다.

입력일 2025-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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